[교단] 고신 50년과 신학교육 - 고신 50년을 말한다 (4) [고신]
분류: 교단-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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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설립 50주년 기획특집 /
시작하면서
1884년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후 1901년에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많은 경우 교회가 설
립되자 그 교회를 건사하기 위하여 신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신의 경우는 사정이 달
랐다. 반세기 동안 귀한 발전을 한 한국교회가 1930년대에 이르러 내부에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였고, 밖으로는 일본 정부가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핍박이 있었다. 이 신
사참배 반대 투쟁을 하였던 20여명의 주의 종들이 1945년 8월 17일에 평양 형무소에서 출옥
하였는데, 그 중에는 주남선 한상동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옥중에서 하나님께 기
도하며 구상한 대로 폐쇄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하여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교역자를
양성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가 개교하였다. 이 신학교가 설립된 후 6년 간 한국
교회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총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총회 안에서 “같
이 회개하자”고 한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에서 단절되었음으로 1952년 9월 11일에 대한예
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였으니 이것이 고신교회이다.
고려신학교 개교 후 6년이 지나서 고신교단이 설립되었고, 고신 50년의 역사에 총회 직영신
학교가 생긴 것은 1946년 부터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고신 50년의 신학교육을 조명하
면서 고려신학교의 교육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신학교육의 발자취
바울 사도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2년 동안 셋집에서 사역한 것처럼 고려신학교는 1946년
9월에 부산진 금성중학교의 교실 두 간을 빌려서 시작하였다. 그 후 부산 초량교회 유치원
을 거쳐 부산시 광복동에서 9년 동안 지나다가 1956년부터 부산 송도에 정착하여 약 40년
을 경과한 후 영도와 천안으로 뻗어 나갔다.
1. 교명의 변천
고려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학교는 세 번 교명이 바뀌었다.
1) 고려신학교는 1946년 9월부터 1971년 2월까지 쓰던 이름이다. 시작부터 1954년까지는 학
제가 본과 3년, 예과 2년, 별과(후에는 전수과) 3년, 여자교역자 양성과 3년이었는데, 1954
년 9월부터는 예과가 4년이 되어 이 과정이 칼빈학원(칼빈대학)으로 존재하다가 1964년 3월
부터는 고려신학교 대학부로 편입되었다.
2) 고려신학대학은 정규대학이 된 1971년 3월부터 1981년 2월까지인데, 대학부가 정규대학
이 됨으로 본과 및 전수과는 연구과정이 되었다.
3) 고신대학은 1981년 3월부터 1993년 2월까지인데, 의학과가 설치됨으로 교명이 고신대학
이 되고, 연구과는 신학대학원이 되었다.
4) 고신대학교는 1993년 3월부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이름인데, 이때 학교가 기독교 종
합대학교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2. 인사
고려신학교의 학적 토대를 놓은 분은 박윤선 교장이었다. 그는 1946년부터 1956년까지 많
은 난관을 헤쳐가며 학교를 이끌었다. 이때의 직제에는 임기가 없었다. 1957년부터 교수회
장제가 채택되어 1년씩 시무 하였다. 1971년에 고려신학대학이 되면서 3년제 학장제를 도입
하다가 1975년부터 4년제가 되었다. 개교이래 1962년 복교까지는 성문화 없이 은혜로 운영
되다가 학교가 제도화 된 것은 1963년 이후였다.
고려신학교는 초창기부터 진리파수, 교회의 정화, 회개운동, 교회의 성결, 권징의 강화 등
강성발언과 투쟁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화평이나 화목 등이 소홀히 취급됨
으로 인화 측면에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인사 면에도 포용책을 중요히 하지 않음으로 개
교이래 많은 인재들이 고려신학교에 왔다가 떠나버렸다. 반세기가 넘은 신학대학원의 역사
에 70세로 정년 퇴임한 교수는 홍반식(1988. 8. 퇴임), 이근삼(1994. 2. 퇴임), 오병세
(1996. 8. 퇴임) 세 사람뿐이고, 다른 교수들은 다 도중하차하였다. 지금은 정년이 65세 임
으로 앞으로는 정년 퇴임자가 늘어날 것이다.
3. 학사
처음에는 규정된 커리큘럼이 없이 기본적인 요건만 갖추고 교수형편을 따라 유동적으로 운
영하였다. 1963년부터는 커리큘럼이 확정되어 본과 및 전수과는 120학점을 졸업의 최저 기
준으로 삼다가 1981년 신학대학원이 된 다음에는 94-100학점으로 운용하고 있다.
4. 시설 및 재정
1946년 개교 때인 부산진 시대와 초량 시대에는 셋집에 사는 ‘보따리 신학교’였다. 광복
동 시대에는 적산 집에 살았는데 운동장이 없는 학교였다. 교사와 운동장을 갖춘 것은 1956
년 송도시대인데, 대지 약 8천평에 594평 단층 건물들에서 교육하였다.
1975년에는 자매교단인 화란 자유개혁파교회의 헌금(1억2천만원)과 국내 모금(1억2천만원)
으로 5층 건물 연건평 1700평을 신축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반세기의 부산시대를
마감한 신학대학원은 1998년부터 천안시대를 열었다. 천안 교정은 3만3천3백34평의 대지에
6개의 건물 연건평 8천8백95평의 웅장한 교사를 마련하여 본격적인 신학대학원 교육을 하
고 있다.
고려신학교는 설립자들의 기도와 눈물과 헌신을 토대로 하여 뜻있는 성도들의 성금으로 유
지되었다. 총회직영 신학교가 된 다음에는 교회적인 후원금이 재정의 보탬이 되다가 1983년
부터는 총회산하의 모든 교회가 경상비 1%를 헌금함으로 학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5. 대외관계
고려신학교는 1964년 총회직영 신학교가 되기까지 18년 간 독립된 사립학교였다. 비록 사립
학교였으나 총회가 인정하고 교역자 양성을 고려신학교에 의탁하였다. 그리고 고려신학교
는 교회의 정신적, 물질적 도움을 받는 상호 밀접한 관계였다. 또 고신교회의 절대 다수의
교역자가 고려신학교 출신임으로 고려신학교가 총회 직영이 아닌 사설학교라는 인식은 별
로 가지지 못했다. 고려신학교와 총회와의 특수한 관계는 1960년에 총회가 승동측과 합동
할 때에 합동 조건 중에 고려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합동 건이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사립
학교인 고려신학교가 총회직영 신학교와 동일시된 예이다.
고려신학교는 외국교회의 힘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수난 성도들의 독자적인 힘으로 세워
졌다.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다음 한부선 선교사를 위시한 미국 정통장로교와 성경장로교 선
교사들이 힘을 보태주었고, 또 미국 기독개혁파교회에서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화란 자유개혁파교회에서 물질로 도왔으며, 1980년대에는 선교사 교수 2명
을 파송하여 신학교육에 보탬이 되었다.
신학대학원의 교수들은 전부가 미국, 화란, 영국, 남아공화국 등 외국에서 신학 연구를 하
고 왔다. 그리고 신학대학원 졸업생들은 세계 여러 곳에 선교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
다. 신학대학원에서는 졸업생을 외국에 파송할 뿐만 아니라, 대만과 인도의 신학생들을 초
청하여 교육시켜 돌려보냄으로 그들의 모국에서 교회 지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신학교육의 특색
1982년 12월에 제정된 고신대학(신학대학원)의 교육이념은 다음과 같다.
“고신대학은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의 직영 교육기관으로서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
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의 전반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하여 충성할 유용한 인재를 양성한다. 이에 따라 본 대학은 다음 점들에 유념하여
교육한다.
1) 개혁주의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겸비토록 한다.
2) 넓고 깊은 학문의 연구와 기술의 습득에 진력토록 한다.
3) 하나님의 나라와 인류사회를 위하여 봉사토록 한다.”
이 교육이념은 1982년에 성문화되었으나, 신학교 설립 당시의 정신을 이어 받은 것이며 그
것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 특색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성경의 절대권 고수
신학대학원은 선지와 사도들이 기록한 원문 성경을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주셨기 때문에 틀림이 없다고 설립자들과 교수들이 믿고 가르쳐왔다. 그러므로 신학대학원
에서는 성경의 본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파악하고 깨달은 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교육하
였다. 그러므로 신학대학원에서는 모든 학문이 성경에 토대하고 성경의 검증을 받고 성경
이 가라는 곳에 가고 성경이 머물라는 곳에 머무는 훈련을 하고 생활하도록 지도하고 있
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력
학교란 인재양성 기관이다. 그런데 흔히 인재양성이라고 해서 사람의 지능개발과 기술연마
를 통하여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는 것으로 교육의 목적을 삼는 학교들이 있다. 그러나 신학
대학원은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거기에 두지 않는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류가 바벨론 지역에서 흩어진 다음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는 자신의 영달
과 이권에 치중하는 생활이었다. 사람은 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허물이 많은 죄인임으
로 신학대학원에서는 교만하여 자신의 무엇을 나타내는 자를 양성하지 않으려고 한다. 때
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혹 짓밟히고 억울함을 당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자
를 양성코자 노력한다.
3. 교회와 사회의 봉사
신학교육은 탁상공론이 아니며 상아탑 속에서의 forum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봉
사하고 교회에 유익을 가져오도록 하여야 한다. 신학생들은 소속 노회의 지도 하에 목사후
보생으로 양육을 받으며 교회에서 목사로서 할 일을 실제적으로 실습해 보아야 한다.
신학교육은 교회를 위한 학문인데, 이 교회는 개체교회와 아울러 전체교회 곧 우주적 교회
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속해있는 개체교회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
라 우주적 교회를 위해서도 죽으셨다. 그러므로 신학교육은 주님의 몸된 전체 교회를 위해
서 봉사하도록 교육하여야 한다.
복음으로 무장한 자들이 교회와 사회의 일원으로 자기 희생의 봉사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이
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며 이들을 사용하신다. 신학대학원에서는 자기 유익만을 구하다
가 생을 마칠 자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봉사
하는 뜻있는 사람을 양성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신학교육의 반성
개인이나 기관의 일들도 처음에는 자연 발생적으로 시작되다가 규모가 커짐에 따라 조직화
하고 체계화하게 된다. 반세기의 고신의 신학교육도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많은 발전을 하였
다. 그러나 되돌아볼 때 인간의 실수가 일을 그르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1. 깊은 연구 없이 행한 시행착오
고려신학교의 신학적 토대를 놓은 박윤선 교수가 1960년 10월에 주일성수 문제로 고려신학
교를 떠남으로 학교와 교회가 큰 타격을 입었다. 또 1959년 대전총회에서 승동측과 연동측
이 분리되어 승동측이 난국 돌파의 묘책을 강구하던 중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돌파구를 마련
하기 위하여 고신측과 승동측 양 교단이 공식논의를 시작한지 3개월만에 전격적으로 합동하
였다. 이 총회 합동 때의 조건으로 고려신학교와 총회신학교도 1년 만에 합동하였다. 이때
세부사항까지 점검하고 정지 작업을 한 다음에 합동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으로 1년이 못가
서 1962년 10월 17일에 구 고려신학교 이사장의 복교 선언으로 인해 합동은 깨지고 말았
다. 이로 인하여 신학교 합동의 공적 결의를 먼저 파기한 책임을 고신이 지게 되었다. 신학
교 합동이라는 문제는 깊은 연구와 토론 끝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의 계기를 삼
아야 할 것이다.
2. 인재의 손실
고려신학교는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적잖은 수가 고신교단을 떠난 것을 볼 때 안
타까움이 많다.
자리가 없었다면 부득이 하겠으나 고신에서 일하다가 인간관계 때문에 섭섭한 마음으로 떠
난 분들도 있었다. 혹 학교 당국자들의 사랑이 부족하거나, 인재를 아끼지 않아 부당한 대
우 때문에 떠난 분들이 있었다면, 이것을 교훈 삼아 앞으로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할
것이다.
3. 토론 문화의 미숙
어느 기관이나 단체가 처음에는 카리스마를 가진 소수의 의도대로 이끌려 가다가 기관이 커
지면 중지를 모아 추진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따라서 신학대학원 교수들의 수가 늘어남
에 따라 토론 문화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토론문화에 익숙지 못한 지도자들이 다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거나 깊은 연구 없이, 또는 회의의 번거러움을 기피함으
로 인하여 자신의 의견만으로 이끌어 가려함으로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신학
대학원에서 일어났던 파동을 살펴보면 토론문화의 미숙으로 인해 감정이 앞서고 편가르기
현상이 나타나서 수습할 수 없는 위기를 맞았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고신교단 50년을 맞으면서 앞으로는 제기된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더욱 좋은 교육의
장을 펼쳐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