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님 순교 이후 가족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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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님 순교 이후 가족의 자세

태양신과 싸운이들(1956, 안용준 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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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진리의 투사 신앙의 용장 주 목사님은 순교의 반열에 참석하시게 된지

1(一) 년 남짓 지내서 하국 백성이 주야로 염원하던 8.15(八‧一五)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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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도 38(三八)선 이북은 공산치하에 들게 되니 신앙의 소유자는 다시 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이 된 산정현 교회 교인들은 우선 안심하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동시에 한편 주목사님의 유가족에게 등한히 할 수 없는지라 교회에서 많은 토지를 사서 80(八十)이 넘은 노모님을 위해서 모든 가족의 생계를 세울 수 있도록 할라고 했었다. 그러나 사모님은 이를 절대로 거절하신 것이다. 말씀하시기를 ‘안됩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첫째 물건을 의지하면 즉 신앙이 적어지는 까닭이요. 둘째 남편 팔아먹는 아내 될 것이요. 셋째 아비 팔아서 크는 자식은 병신처럼 될 것이니 자력으로 노력하도록 길러 주어야 할 것이요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남을 의지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시었다. 또 이북 공산정부에서 주 목사님을 항일투사(抗日鬪士)의 하나로 생각하여 항일투사 유가족 위문금이라고 금일봉(金一封)을 가지고 오니 사모님은 ‘못받겠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 주목사님은 항일투사가 아닙니다. 일본에 반항한 것이 아니라 성경진리를 보수(保守)하기 위해서 마귀를 배격한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주 목사님은 세상이 말하는 소위 쪼무래기 사상가는 아닙니다. 거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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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이름의 순교자입니다. 세상에서는 사상가를 크게 생각 할 것이나 그 이름은 하늘나라 생명책에는 반듯이 기록되지 못할것입니다.’ 해서 위문금을 받지 않으셨다. 또 주목사님의 순교기념비를 교회마당에 세우기로 제직회에서 결정하고 교인들에게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나 오집사님은 절대로 이를 반대하셨다.

‘그것은 산정현교회 손해일뿐 아니라 전국교회의 손해입니다. 그 이유는 이 교회는 전국적으로 신령하다는 교회인데 이 교회에 출입하는 교인들이 교회문에 드러서자 먼저 하나님이 머리에 떠올라야 할터인데 그전에 이 비석을 보고 사람인 주목사를 먼저 생각하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이니까요‘ 하시었다. 그러나 한갓 사양으로 짐작한 제직들은 교인들에게 광고를 해서 연보를 걷우니 오집사님은 그때 시무하시든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말리셨다. 그토록 강하게 거절하시니 하는 수 없이 이를 중지하였다. 그대신 주목사님 분묘 앞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였다. 사모님도 이에는 찬성하시었다.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전도가 될것이니까요 사람들이 황폐한 공동묘지를 지내다가 무명한 무덤을 보는 것보다도 순교자의 무덤을 보는 것은 한가지 무언의 전도가 될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해주신다면야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하셨다. 주목사님의 신앙동지 오집사! 실로 순교자의 아내 되기에 합당한 놀라운 신앙적 비판력을 가지



<65>첫 2줄

신 분이였다. 그는 주목사님이 순교의 기회를 잃을가 보아서 전전긍긍(戰戰兢兢)했었고 유가족으로도 행여나 시험에 들가 조심조심 하시였다.



<67>끝5줄

그러후 해방이 되어 공산치하에서 많은 시련을 받었으나 만사를 주께 맡기고 신앙적으로만 지내시었다.

그러던중 한상동 목사님이 시무하신 후인데 모든 긴장이 풀리었든지 몸에 괴롬을 느끼시게되고 1945(一九四五)년 9(九)월에 생긴 유암(乳癌)이 자꾸 심해져서 장기려(張起呂)박사에게 수술을 받으시었다. 처음에는 신앙으로 이것도 이기시겠다고 수술을 안받으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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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시는 것을 한목사님 이의 몇분이 간곡하게 권면해서 받으시게 되었었다. 그런데 수술은 받으실때도 진통제(鎭痛劑)를 쓰고 수술하는 것을 거절하시었다.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시겠다고 함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치료를 받으시고 회복되어서 다시 교회일을 잘 도우시다가 그병이 재발되어 다시 자리에 눕게되시자 이제는 일어나시지 못하시고 1947년(一九四七) 1월(一) 27일(二十七) 오전 일곱시에 소천별세(召天別世)하신것이었다. 그날은 월요일이 었는데 아침에 가정기도회를 보시는중에 기도하시다가 뒤로 쓰러지시더니 조금후에 완전히 운명하시었든것이다 1946년(一九四六) 4(四)월21(二十一)일 주목사님의 순교 三주년 추모예배를 성대히 지키시고 이제 주목사님의 아내로서 땅에서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이 주목사님이 먼저가신 영원한 하늘나라로 가신 것 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물론 온 평양에 있는 교인들이 모두를 슬퍼했고 그 장례식은 실로 성대하였다. 그날은 겨울이었으나 날이 의외로 따뜻하였다. 저좋은 낙원은 이 세상 추운 일기라도 화창한 춘일 같음을 말함인지!

끝으로 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산정현교회 교인들에 대한 것이다. 먼저도 말한 대로 사상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휼륭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또 그들의 신앙적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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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놀랍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사참배 문제로 해서 주목사님 검속을 당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여일하게 칠년간을 꼭 주목사님과 같은 신앙보고로 이루워왔고 따라서 주목사님의 가족 생활을 옴으로 양으로 책임지고 넉넉지는 못했으나마 협력해 들인것이란 실로 그 목자에 그 양떼인 것을 나타내는가 싶다. 백인숙 권사가 주로 에 책임을 지고 생활비 모으기와 교인연락 하기를 힘썼다고 한다.

또 주목사님은 오산고보(五山高普) 시절에 조만식 장로님의제자시었다고하는데 비록 제자일지라도 목자로 한번 세운후에는
꼭 목사님으로 접대를 하였다고 한다. 믿음 미담중의 하나이리라

이약신(李約信) 구사님이 말씀하시기를 3(三)기에가 한국교회 신앙투쟁사를 빛나게하였다고 즉

주기철 목사님이시기에

산정현교회이기에

오정모 집사님이시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