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 학살 사건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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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 학살, 경찰이 방관했다
1950년부터 (영복원)비토섬 이주계획
1956년 11월 농림부장관의 귀속임야 임대방침에 따라 비토섬의 귀속임야 22정보 임차를 위한 수속 시작
1957년 7월 12일 경남도에 접수하였으나 각하
8월 7일 삼천포시장, 농업은행 삼천포지점장, 영복원장이 삼천포경찰서장을 방문하여 (비토리 입주에 대해)협조요청, 합법적 행위에 대해 협조의사를 밝힘
8월 8일 병력자 36명 입도, 9일 퇴거
8월 16일 (정봉성)원장과 (허판개)총무부장이 서포지서, 삼천포경찰서에 8월 19일 입도 예고
8월 22일 입도 후 개간착수
8월 24일 서포지서로부터 원 대표 출두요청, 서포면장실에서 27일까지 퇴거를 약속
8월 27일 현지 경찰이 퇴거약속 준수를 요구하며 공포 발사. 비토리섬 주민은 굴양식장 기대 무산 우려, 전염위험 및 토지 상실 우려
8월 28일 비토리 및 서포면민 100여 명이 저항능력이 없는 환자 68명을 공격, 22명 현장 사망, 2명 행방불명, 중상자 33명, 경상자 23명, 중상자 중 2명(국가인권위 보고서에는 ‘1명’으로 잘못 표기됨) 사망
한센인 학살, 경찰이 방관했다
1950년 경남 사천의 끔찍한 참극을 증언하는 국회 현지보고서 발굴
비토섬에서 충돌 벌어지자 현장 감시하던 경찰들은 슬그머니 자리 떠▣사천 비토리섬=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wjryu@hani.co.kr
마을을 찾은 것은 정확히 1년 만이다. 그때 마을 이장 지명석(70)씨는 “쓸데없이 옛날 일을 들추려 한다”며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었다. 그때까지 한센인 사회에서 ‘학살’의 기억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철저한 금기로 여겨졌다. 그는 48년 만에 입을 열었고, 1957년 8월28일 오후 반나절 동안 그가 겪은 비극은 2005년 2월5일치 <한겨레> 6면에 ‘한센병 환자들…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역사’라는 제목의 기사로 세상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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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섬 '비토'에 숨은 '핏빛' 이야기
<끝나지 않은 통곡>'비토 한센인 학살사건'을 다시 본다
“1957년 8월. 삼천포 영복원에 살던 한센인들이 농토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천 서포면의 비토리 섬에 건너가 개간을 하고 있던 중, 비토리 및 서포면 주민들과 충돌하여 환자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사건이다. 주민들은 한센인들이 철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한센인들은 철수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몇 차례의 협상과 갈등이 반복되는 가운데, 1957년 8월 28일, 주민 약 1백여 명에 의해 나병병력자 30여 명이 살해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비토섬에서 충돌 벌어지자 현장 감시하던 경찰들은 슬그머니 자리 떠▣사천 비토리섬=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wjryu@hani.co.kr
마을을 찾은 것은 정확히 1년 만이다. 그때 마을 이장 지명석(70)씨는 “쓸데없이 옛날 일을 들추려 한다”며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었다. 그때까지 한센인 사회에서 ‘학살’의 기억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철저한 금기로 여겨졌다. 그는 48년 만에 입을 열었고, 1957년 8월28일 오후 반나절 동안 그가 겪은 비극은 2005년 2월5일치 <한겨레> 6면에 ‘한센병 환자들…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역사’라는 제목의 기사로 세상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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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섬 '비토'에 숨은 '핏빛' 이야기
<끝나지 않은 통곡>'비토 한센인 학살사건'을 다시 본다
“1957년 8월. 삼천포 영복원에 살던 한센인들이 농토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천 서포면의 비토리 섬에 건너가 개간을 하고 있던 중, 비토리 및 서포면 주민들과 충돌하여 환자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사건이다. 주민들은 한센인들이 철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한센인들은 철수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몇 차례의 협상과 갈등이 반복되는 가운데, 1957년 8월 28일, 주민 약 1백여 명에 의해 나병병력자 30여 명이 살해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1950년부터 (영복원)비토섬 이주계획
1956년 11월 농림부장관의 귀속임야 임대방침에 따라 비토섬의 귀속임야 22정보 임차를 위한 수속 시작
1957년 7월 12일 경남도에 접수하였으나 각하
8월 7일 삼천포시장, 농업은행 삼천포지점장, 영복원장이 삼천포경찰서장을 방문하여 (비토리 입주에 대해)협조요청, 합법적 행위에 대해 협조의사를 밝힘
8월 8일 병력자 36명 입도, 9일 퇴거
8월 16일 (정봉성)원장과 (허판개)총무부장이 서포지서, 삼천포경찰서에 8월 19일 입도 예고
8월 22일 입도 후 개간착수
8월 24일 서포지서로부터 원 대표 출두요청, 서포면장실에서 27일까지 퇴거를 약속
8월 27일 현지 경찰이 퇴거약속 준수를 요구하며 공포 발사. 비토리섬 주민은 굴양식장 기대 무산 우려, 전염위험 및 토지 상실 우려
8월 28일 비토리 및 서포면민 100여 명이 저항능력이 없는 환자 68명을 공격, 22명 현장 사망, 2명 행방불명, 중상자 33명, 경상자 23명, 중상자 중 2명(국가인권위 보고서에는 ‘1명’으로 잘못 표기됨)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