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월교회 순교자 연구
http://www.yaweal.or.kr/ (야월교회)
서 론
순교자가 많은 교회라고 하여 부임하였으나 전연 순교자가 있는 교회답지를 않게 보였다. 영락교회를 가본적이 있다. 김응락장로님이 교회 건축위원으로 교회를 6,25사변중에 지키시다가 퇴각하는 공비에게 기도중 사살되여서 후에 뜰에 작은 비석에 이름이 세겨진 것을 보고 이런것이라도 이 교회 뜰에 세워졌으면 흔적이라도 남을텐데...
그래서 행여 문서라도 남았나 조사했으나 다행이도 선임교역자님들이 몇분의 이름만 찾아 남겨 놓았다. 나는 이 명단을 보고 그 기쁨을 형언할 수 없이 기뻤고 소망이 있었다. 부임 첫날밤 우리교인이라 하지만 지금 우리 교인이 아닌 무리들이 교회안에서 열심히 기도하신 모습을 이틀저녁을 꿈으로 보고 더욱 관심을 풀길이 없어 내 기어히 이분들의 이름을 밝혀 놓고 말리라 다짐하였던 것이다. 이젠 우리는 이들의 신앙을 결코 자랑하는 교회로 끝나지는 않겠다.
이제부터 이들의 신앙의 자세와 기풍을 세우는 교회가 되어 선교와 봉사와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리라는 자세로 마음을 다지며 이 연구에 임한 것이다.
연 구 목 적
대한 예수교장로회(통합) 광주노회소속 야월교회는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471-1에 소제한 교회로써 1908년 4월 5일을 기하여 설립된 교회이다.
조선 예수교장로회 사기상에는 영광군 염산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본리인 문영국, 정정옥등이 일진회를 대항하기 위하여 봉산교회를 다니다가 차차 진리를 습득한 후 열성으로 전도하여 신도가 증가함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 배유지 , 도대선, 남대리, 이아각 과 조사 박인원, 이경약, 최홍교, 이규주 등이 차제 시무하니라.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어서 야월리교회의 초기 명칭이 염산리교회였고 현재의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소재 염산교회는 사실상 1939년 군남면 옥실리 교회로 출발 1947년 봉남리 현 소재지로 옮겨 염산교회로 명칭을 변경하다.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야월교회는 1908년4월5일 전라노회 제4회기에 설립허가를 받은염산면에서는 처음시작된 교회이다.그래서 염산면을 대표하여 마을이름으로 호칭하지 않고 염산교회로 설립허가를 받았다. 그러다 1937년 염산교회 (지금 설도교회)가 설립이되니 노회로부터 마을이름을 따서 야월교회로 개명 되어진 것이다. 야월리는 염업이 크게 성한 곳이다. 예전에는 화염을 주로 하였고 점차 천일염전으로 발전하였고 해방후에 육지와 제방으로 연결된 후 오늘날에는 교통도 편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온교인이 순교한 교회라지만 전연 문서나 어떤 유적이나 흔적을 찾을수 없어서 이분들을 찾아서 잊어버리고 숨겨진 역사를 한국 기독교 역사에 제자리 찾기를 해야겠다는 담임목사로써 의지를 갖게된 것이다.
한국 기독교사에 이토록 한 시대의 아픔과 수난을 맞이하여 신앙을 지킬려고 하다가 수없는 인명을 잃었지만 전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이름들을 볼수 없다. 그 이름을 찾아 놓지 않으면 영원히 잊혀질 것이다. 이제 이분들은 마땅히 한국기독교사에 기록되여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더구나 작은 교회였기에 교역자가 없었고 한때 한국전쟁후에 교회당도 불태우고 교인은 한사람도 남지 않고 순교하여 백지화된 교회이기에 역사적인 기록 및 순교자 명단도 찾지 못하였다. 이제 이분들의 이름이라도 가족사항이라도 정확이 찾아 전하여야겠기에 이 연구에 임한 것이다.
순교자 범위
제목이 야월교회 순교자 연구이기에 순교자란 예수 믿는 성도들이 어떤 특정한 권력과 제도에 의하여 신앙때문에 수난당하여 희생하신 분들을 순교자라 한다면 지난 1950년 6.25사변부텨1952(음) 1월 16일까지 공산당에의하여 여기 야월리에서 신앙을지키시다가 주님앞에 가신 성도들을 여기서 순교자라고 말하려고 한다.
야월리에서는 6.25사변 당시 50년 6월 22일 이북 공산군이 숫자 미상의 1개 부대가 야음을 타서 창수앞으로부터 상륙하였다. 이로 보건대 이미 6.25사변이 일어나기전 후방 교란 목적으로 북한에서 이미 병력을 파병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광주에 상주한 여순 반란사건을 토벌하고 지방의치안을 위하여 주둔시킨 병력이 있었다한다 북한군이 상륙한 이튼날 23일 염산면 내남리 뒷산에서 광주에주둔한 군병력과 영광 함평지방 경찰부대와 연합하여 이곳 내남리에 22일 잡입한 북한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소탕전이 벌어졌는데 치열한 전투끝에 거의 전멸시켰고 그중 살아있는 잔병은 남쪽서쪽으로 도망하였다한다 6.25사변 당시 공산군 주력 부대는 낙동강 전투에 총투입되고 이 쪽은 주로 지역 빨치산이 조직되여 이들이 준동하면서 막대한 재산 피해와 인명피해를 준 것이다.
특히 염산면 지역은 늦게 수복되어(52년 1월 16일<음력>백수 까봉전투를 마지막으로 잔딩을 소탕하였다고 함) 타지방에서 볼 수 없는 기독교 인사 및 우익 인사들이 체포 처형되였고 심지어 가족까지 모조리 쳐형한 것이다. 그래서 이시기에 신앙지키다 죽어 순교하신분을 순교자의 범위에 제한하려 한다.
순교자 발생의 시대적 배경
염산면 소제지 소제한 설도교회 임한선장로(현설도주유소주인)에 의하면 이미 염산면 지역에 1950년전 일찍 부터 북한 공산당 거물 金三龍(남노당 거물 간첩)이 염산면 오동리 상오부락 출신으로서 金三龍을 추종한 지방 빨치산이 준동 입산하여 월암산에 근거를두고 인근 부락과 심지어 도로에까지 출몰하여 밥을 짓게하고 우익인사들을 납치 살해하자 경찰력에 의하여 주민이나 입산한 가족을 구금밎 쳐형하게 되여 감정이 격화되었다.
야월리 이리부락에 소제하신 정준성씨 증언에 의하면 1950년 6월 22일 밤 숫자미상의 북한 인민군 1개 부대가 창수 앞으로 야음을 이용하여 상륙 염산뒷산넘어 내남리에 잠입하여 영광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 정보를 접한 국군토벌군이 광주에서 내려와서 지방경찰들과 함께 신성리에 입접한 내남리 부근 야산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대다수가 살상되였고 잔당이 남쪽으로옥실리 그리고 서쪽으로 야월 지금 야월 서초등학교 뒷산으로 잠입하였다.
그중 한사람이 야월서초등학교 뒷산에 숨어있다가 나뭇꾼에게 발견되여 이소식이 경찰에 알려지게 되자 경찰이 마을에 와서 자수를 권유독려하므로 야월교회교인인 정문성씨가 산에 다시올라가 공비잔당 일명을 자수권유하여. 경찰에 인개 하였던바 입동 길옆(상여집 앞)에서 총살하였다.
남아있는 다른 잔당이 사실을 알리고 이 마을이 불순한 마을이라고 하여 그들의 주목하는 불순한 마을이 되였고 또 정문성이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이다. 좀더 확실한 직접 원인은 1950년 9월 29일 국군과 UN군이 목포에서 함평 영광을 수복할 때 기독교인사와 우익 인사들이 대 환영을 하러 나갔다고 한다.
이 사실을 기독교대백과사전 1489page에 보면 "1950년9울29일 후퇴했던 국군과 UN군이 영광읍에 진주하였다. 이에 기독교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환영행진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기독교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환영행진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미쳐 후퇴치 못한 공산군과 지방 공산당들은 인근산속에 은거하고 있었고 국군을 환영한 기독교 인사에 대한 보복게획이 추진되였다.
이상의 말을 빌려 보더 라도 정남철장로 부친 정종달(72세)씨의 증언도 일치하고 현제 서울 동대문구 장안1동 220-6에생존해 계신 최창섭장로(6. 25 직전 야월리에서 신앙생활하시고 사시다가 이거하신 분)의 증언에도 심지어 그 당시 야월교회 최판섭집사, 조숙현집사, 조양현영수 자제들이 태극기를 띠고 국군 환영대회에 나갔다고 한다.
또 하나의 직접적인 원인은 야월리 이리 마을 김희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이지역을 점령하여 술양조장집 주인과 다른 유지들을 교회당 뜰에 꿀리고 마을사람들을 모여놓고 공개처형 하기위해서 인민제판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이두사람들은 인민의 피와 땀을 착취한 악질 반동입니다. 이 악질 반동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인민의 원수이니 죽여야 합니다." 그러자 야월교회 출신 김성종영수님이 칼칼한 목소리로 "아닙니다. 그 사람은 흉년이 들어 한때 어려웠을때 쌀을 풀어 나눠주었고, 법없이도 사는 사람입니다. 나라에선 이런사람을 표창을 하고 상을주어도 모자랄진대 어찌 상을 주지 못할지언정 사람을 죽일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옳소"하여 그들의 이 지역혁명 게획에 차질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먼저 죽여 재거시킨후에 마을 혁명을 완수 하자는 무서운 음모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염삼면과 백수가 가장 늦게까지 수복되지 못하여 1952년(음)3월 16일 백수로 퇴각 할때까지 긴세월 지방공산 빨치산과 공산군들은 인민재판으로 처형을 필두로 하여 1951년(음) 8월, 9월 까지 야월리교회 성도들을 처음은 중심인물들을 설도분주소에 끌어다 죽도록 두둘겨 허리에 돌을 매달아 물속에 처녛어 처형한 것이다.
야월리 이리 부락에 계신 이시성씨 증언에 의하면 " 김성종영수, 조양현영수,최판섭 집사 최판원집사 김두석 성도 등은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모두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체포되어 이리마을 조씨집 창고에 가두었는데 낮에는 살려두고 깊은 밤에 처형했는데 온마을이 떠나가게 찬송을부르고 기도 하였고 밤이깊어지자 이들을 차례로 두우리쪽 큰북재 넘어 이리마을 공동묘지가 있는데 공동묘지 앞부분에다에 약 직경10m 넓이로 큰 구덩이를 낮에파놓고 밤이 깊어지자 교인들을 손을 뒤로 몸에 묶어서 구덩이에 때밀어 생매장시켜 죽였다고한다. 안들어 갈려고 하는자는 칼로 찌르고 대창으로 찔러 강제로구덩이에 처넣고 흙을 덮어 죽였다. 증언자의 말에의하면 흙이 3m가 넘게 깊이 쌓였는데도 그흙이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한다 그구덩이에도 모자라 또 한팀은 지금은 천일 염전이지만 낮에 바다가에 큰 구덩이를 파서 둠벙을 만들어 그둠벙에 교인들을 밀처넣어 생매장시키어 흙을 덮어서 죽였다고한다. 물론비신앙인도 그곳에 함께 쳐형하였는데 후에 한 구덩이에서 사체를 80구를 발굴했다고 한다. 이시성씨에 의하면 주로 이 두곳에서 생매장하여 죽였다고 한다.
조양현 영수님과 최판섭집사님은 해방전 신사참베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루다. 8.15일에 출옥 성도까지 된다고 한다.(최석창장로 증언 및 "야월도 순교자"심영걸 저) 특별히 최판섭집사는 신앙이 좋고 똑똑하여 지방회에 참석하며, 교회사를 의논 할 때 명쾌하게 발언하고 매사에 깊이 있고 능력있게 마무리 짖자, 해남군 산이면 초성리교회 유귀남장로님이 자기 딸 유영심을 인연을 맺게 ㅡ하여 사위로 삼았다.
이분도 뿌렴도(지금은 지도상 가기도라고 기명)란 섬으로 피난갔는데 들려온 소식이 교인과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교인과 가족이 모두 죽었는데 나혼자 살면 무었하냐"하고 상륙하여 그날 저녁에 체포되였다집사님은 어머님이네장형 최판원집사가 잡혀 죽게 되었다고 어머니가 울으시면서 네가 들어가면 네 장형 판원이를 살려준다고 하니 네가 들어가거라. 그러자 최판섭집사는 어머니 앞에서 “내가 어머니 앞에 먼저 가는 것은 어머님께 불효이오나 하나님이 부르시니 이제 가겠습니다.” 하고 붙잡혀 맨발로 걸어서 가시면서 의연한 자세로 저멀리 주님만 바라보시면서 찬송을 부르시며 설도 분주소에 잡혀가시어 설도 수문에서 형 최판원집사와 함께 물에 빠뜨려 장렬히 순교하셨다고 한다.
이시성씨 증언에 의하면 남석우씨는 예수 믿는 반동분자라고 해서 밭가에서 돌로 머리를 처 두개골이 파열했으나 아직 죽지 않어서 집으로 옴겨 놓았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어서 1950년 음력9월 어느날 오후 4시경에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몇년동안 교회없는 마을이 되고 마랐다.
야월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여 순교제물이 되여진 것이다.
사료적 증거
야월교회가 단일교회 순교자 숫자가 영광에서 염산교회 77명보다는 작지만 온교인이 한사람도 당시 교회다니며 사신 분중에서 남지않고 순교하였고 교회가 불탔던 교회로서는 한국교회사에 유일한 교회라 생각된다.
한국 교회사 호남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광군내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가 수난을 당하고 또 많은 순교자를 낸 교회들이 많다. 그중에 야월교회는 최판섭성도를 비롯해서 유년주일학교 학생까지 포함에서 65名의 순교자를 냈다. 야월교회는 교인을 잃고 또 교회당은 전소되고 말았다.
또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1950년 6.25사변으로 교회는 다시금 수난에 직면 했는데 특히 인근지역에서 암약하던 地方공산당들의 만행에 더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의 전도인이던 김영갑은 피난하였고 교회당은 공산당에게 징발당하여 교인들은 다시 지하교회의 형태로 신앙생활을 게속하였다.
이에 기독교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환영행진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미쳐 후퇴치 못한 공산군과 地方공산당들은 인근 산속에 은거하고 있었고 국군을 환영한 기독교 인사들에 대한 보복계획이 추진되였다. 그해 10월 공산당들은 야월리에 난입 교인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석유를 뿌린채 불을 질렀다. 이때에 조양현 조숙현영수 최판섭, 최대섭집사 그의 여동생 최판례를 비롯 어린아니까지 포함하여 65명의 교인들이 참살되었다. 고 기록되어져 있다.
88년도 구역예배지침서에는 "교회적인 참상의 실예로 전남 영광 야월교회는 65명" 이렇게 숫자만 기록되여 있다.
그러나 현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51년 9월부터 10월까지 기독교 인사들에 보복 계획에 의하여 살해하였지만 핵심 인사들은 염산면 분주소도 체포인도하여 많은 매를 맞아 반 죽음 후에 손목을 위로하여 새끼줄로 묶여 돌을 채워서 바닷물에 뛰워죽게하였고, 나중에 그 가족까지 심지어 어린이 갓난아기까지 바다 물에 빠뜨려 죽게 한 것이다.
1952년 음 1월 16일 공산당이 백수로 철수한후에 경찰이 수복한후에 한번에 80여구를 매장한 시체들을 발굴할 때 호쿠와 쇠스랑으로 시신들을 들추어 모습을 알 수 없어서 입은 옷으로 확인하여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당은 1951년 10월 어느날 오후 5시에 공비에 의하여 불태워 졌다
추적방법 및 과정
순교자 명단 추적하는 과정은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이도 순교자의 중요인물은 교회 연혁에 전임 목회자님들이 기록하여 남겨져 있었다. 호적이 이적되여 기록이 없는분 호적은 남아있지만 혼인신고 및 호적에 출생신고가 안된분도 많았다.
호적이 불타 소실되여 地方法院에서 복사하여 복원하였지만 전가족이 멸족한 가족은 호적복원에 누락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호적열람으로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미 40여년의 세월이 지난후인지라 당시 함께 살았던 분들도 이웃이지만 어려웠던 때인지라 기억에 빨리 잊고 싶어해서였는지 전연 기억을 못하신다.
그러나 추적하면 반듯이 드러날것을 확신하면서 시도했다. 추적방법은 당시 야월리 이장을 지낸 정준성씨를 찾아가 전반적이 부리핑과 기억을 더듬어 그 가족의 호주 및 남자들은 대강 기억하고 계셔서 도움이 되였으나 부인들이나 아이들은 전연 이름을 찾기가 어려워 특별추적할 필요성이 있었다.
먼저 호적추적을 시도했다. 다행히도 호적담당 직원및 면장님의 특별배려중에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본인 이름이 지방에서 부른 이름으로 등제가 안된분 이적이 되어 기록행방이 묘연한 분, 그래서 거의 실패하였다.
남자는 이름이 등제되였으나 혼인신고 출생신고가 안되여 부인과 아이들 이름을 찾을수 없었다. 그래서 한가족 중심하여 집중 추적하기로 하였다. 당시 함께 이웃해서 사신분 혹은 사신분중 가장 친하게 사신분을 찾았고 친척을 찾아 일일히 방문하여 추적하였다. 다행히도 조양현영수님의 가정은 영광읍에 현제 生存한 동생 조풍관집사님(☎352-3329)소장한 족보를 조사하여 잃은 이름들을 찾은것이다.
최판섭집사의 가족은 현재 사촌형님이 영광군 군남면 양덕리 40번지 갑촌에 생존하여 계신대 3회에 걸쳐 방문하여 그 부인의 탁월한 기억력 때문에 최판섭집사및 최판원집사님의 모든 가족의 이름은 찾게 된 것이다. 김성종영수님의 가족은 두 아드님까지는 마을에서 어르신들이 기억하고 있지만 자부와 손주들의 이름은 다잊어버려서 찾을길이 없었다.
옥실리에 선산이 있어서 가까운 친척을 찾았으나 소득이없고 약간 먼 친척이 함평읍 신기산에 생존하신 김대선씨를 찾았으나 문권에도 기록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허탈한 마을으로 돌아왔다. 다시 옛 주거지 번지를 찾아서 등기부 열람을 했으나 미등기로 있어서 토지대장을 열람하여 확실한 번지를 찾아서 다시 호적을 직원과 같이 조사하였더니 주께서 도우셔서 모든 가족사항이 말소되지 않고 남아 있어 영수님의 모든 가족 사항을 찾게된 것이다. 옥실리에 선산이 있어서 가까운 친척을 찾았으나 소득이없고
그러나 호적에도 모든분의 기억에도 찾을수 없는 이름들이 있었다. 분명히 결혼하여 동거하여 살았고 같이 살았기에 가신분의 이름은 이토록 아플수가 없었는데 요행히도 당시 함께 신앙생활하시던 장로님을 뵙게 되어 정대성성도의 부인 전덕성씨를 찾게 되였다. 그래서 거의 모든분을 찾게됨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특히 찾아 추적할 때 마다 성의있게 말씀해 임해 주신분들께 감사한다.
순교자 명단 체택과정
야월리에 1950년대에 실제로 체험하고 그 불행한 시대를 살으셨고 현재 생존하여 생생히 증언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이 분들은 기억력도 즣으시고 자못 생활도 좋으신 분들로서 마을 유지에 속한다.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황판옥 81세 야월리 1구 이리부락 소제
정종달 72세 야월리 2구 야장부락소재(☎52-9155)정남철장로 부친
강대위 72세 야월리 2구 456번지 야장부락 소제(☎52-9971)
이희성 63세 야월리 1구 이리 마을 유지
최석인 75세 야월리 1구 이리소제
정준성 66세 야월리 1구 50년대 당시 마을 이장하신분
이분들은 살아 있는 증언자들이시다.
본교회순교자 명단을 결정할 때 1989년 2월 26일 최종한장로님의 다방에서 상기분들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최장로님입회하에 명단을 살펴가면서 누락되신분, 오기되신분 혹은 비기독교인이 이명단에 끼여 있는가를 결정케하였다.
본교회 담임목사인 배길양목사의 사회로 삼심제에 의하여 체택하기로 하였다. 제일심 전체를 낭독하여 살피다. 제이심 가족적으로 살피며 명단 하나하나 이름을 구체적으로 오기되었거나 호적보다 마을에서 부른 이름들을 체택하고 누락자를 찾다.
제삼심 최종적으로 가족명단을 확정 결의하다. 그리고 전 명단을 다시 살피고 이상 없음을 확정 체택 결의 하였다. 이어서 이 순교자 명단을 돌에 새겨 건립키로 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경비는 본교회 성도들의 특별헌금으로 하기로 하여 89년 3월19일 헌금하였다. 이는 진실로 사랑하는 교회가 순교신앙을 이어가고 이 순교 신앙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전교인 헌금토록 하였던바 더욱 감사한 것은 주일학생 아동부, 중고등부
학생까지도 비록 작은 금액이지만 정성 다하여 헌금되여진 것이다.
순교자 명단
영수 김성종 (부인)최씨부인
(장남)김두원 (자부)오연이 (손녀)김안순
(차남)김두석 (자부)박귀례
영수 조양현 (부인)신씨 (모친)인동장씨 (장남)조영원 (차남)조영연 (딸)조마리아(영님)
(사위)김준수 조영민 갓난이
(사위)홍순택 조영애(삼녀)
(사위제)홍사차 (사위제)홍오차
(동생)조숙현집사 (부인)김씨 (장남)조영신
(차남)조영태 (삼남)조영배
(동생)조춘현집사 (부인)김씨, 조연레, 조귀례, 조연순,
조안순 (사위)박성철 (장녀)조순례, 조영갑(조양현 맡형의 장남)
집사 최판섭 (부인)유영심(해남 산이면 조성리교회 유귀남 장로의 딸)
(모친)김씨 (장남)최영국 (장녀)최영애
(형)최판원집사 (부인)김씨 최영님, 최영복, 최반달이, 최영숙
집사 김병환 (부인)채선례 (장남)김형기 (차남)김요기 (사위)이희범 (자부)한씨 (손녀)김정숙
집사 정일성 (부인)이씨 (장남)정종임 (장녀)정정단
정문성 (부인)배금순 (장남)정해동굴 (동생)정대성 (부인)정덕성
남석우 (부인)본아리댁(원례) (장녀)남헤자 남부댁
(이 상 65 명)
순교기념탑 건립과정 및 추모식
본 교회에서 순교자명단이 확정되자 순교비를 건립코져 온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을 하였다. 여기에는 교회학교 아동부의 코흘리개의 헌금까지 하였다. 이런 사실을 노회장이 알고 그토록 의미 있고 막중한 일을 지교회에서 하는것보다 거 노회적으로하면 어떻겠느냐고 하기에 "매우감사합니다. 그렇다 하면 더 의미가 있겠습니다." 하여 노회임원의 중지를 모아 거노회적인 사업으로 추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1989년 3월 29일 광주노회 제3회 정기노회총회에서 야월교회 순교 기념탑을 건립키로 결의하고 제반업무는 임원회에 위임키로 하였다. 1989년 4월 8일 오후 5시에 노회 임원회가 대인동 노회사무실에서 소집하여 노회장 유한귀목사의 사회로
야월교회 순교기녑탐 건립위원회와 각분과위원희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기로 하여
*위원장 : 유한귀목사 *서 기 : 이정조목사 *회 계 : 유재옥장로
*분과위원
1. 사증분과 위원: 노정열, 유한귀, 차종순, 박금호, 배길양
2. 탑 건립분과 위원 : 남정규, 나종권, 김정문, 김녹현, 최종한
3. 행사위원 : 오용운, 이정조, 박겸낙, 유재옥, 김초현
4. 고문 : 홍관순, 장동진, 박관석, 이화림, 김홍배
*제3회 노회 제1차 임시노회가 주후 1989년 6월 12일 오후 2시 담양읍 교회에서 임원회 보고중 조직을 보고하였다.
*1989년 6월 4일 사중분과위원장 노정열목사 차종순교수(호신대), 김수진박사(장신대), 안종렬목사, 배길양(본교회 담임)목사와 마을의 당시에 생존하신 어른들(정종달, 정준성, 이시성, 강대위, 홍순춘)을 모시고 담임목사의 추적명단을 중심으로 사정을 하여 확인하고 1986년 6월 16일 노회 임원에서 사증분과 위원회 보고의 보고가 증명되므로 받기로 결의하고 비문작성은 탑건립 분과 위원인 차종순교수께 위임하여 쓰기로 하였다.
*1990년 4월 14일 남정규,박관석, 나종권목사님과 본교회 담임목사및 야월교회 온교인들과 더불어 탑 건립 기공예배를 드려 건축공사를 하였다.
*1990년 11월 29일 준공예배를 드리고 탑제막식을 하였다.
순교기념탑 비문 (차 종순 목사 호신대학교 총장 쓰신글)
순교기념탑 건립에 즈음하여
1897년 목포에 선교부를 세운 미국 남장로교소속의 배유지(Eugin. Bell)목사 일행의 선교활동으로 이곳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구한말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곳에서도 친일적인 일진회를 반대하던 문영국, 정정옥씨등이 교회를 찾았으며 이렇게 해서 1908년 4월 5일 야월리교회가 설립되었다.
해방 이후 야월도가 연육되면서 부터 교인들이 지역사회의 주축을 이루면서 교회는 성장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6월 22일 이 지역에 상륙한 숫자 미상의 인민군의 기습이 한 기독교인의 제보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갈등으로 교회 탄압을 가하던중 1950년 9월 부터 10월사이에 기독교인들을 살해하였다. 교회는 불타고 교인전체(65명)가 죽임을 당하여 이 지역의 복음화가 일시 단절된둣 하였으나 이들의 거룩한 씨앗이 큰나무로 자라서 이곳이 믿음의 모퉁이 돌임을 오늘 까지 생생하게 중언해 준다.
본 대한 예수교 장로회 광주노회는 정성어린 기념탑을 세우면서 이곳이 여호수아의 증언석이 되어서(수24:17) 65명의 귀한 순교의 신앙을 영원토록 전해주기 바란다.
결 론
이미 아픔의 한 시대는 간 것이다. 이제 공산주의 국가의 이념도 시대가 변하듯이 변천하여 소련도 중공도 개방화로 변천하고 있다. 어제의 적이 이제는 상호이익을 위해 손을 잡는 시대가 되어져 가고 있다.
평양에도 봉수교회와 칠곡 교회가 세워지고 보도에는 40,000여명의 교인이 지하에서 피눈물 나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 순교자가 있었던 마을 사람의 마음은 동토처럼 녹지 않고 "교회에 가면 죽는다."고 하는 이 엄청난 상처와 외곡은 좀처럼 아물지 않고 있다.예수 복음 때문에 생명 받친 영혼들은 아브라함 품에 쉬지만 이 야월 리에 뿌려진 이 거룩한 피는 결코 헛되지 않고 성도의 심령으로 타고 내려가리라 "오직 나는 예수 복음위하여 이 제단에 피를 남겼노라고"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성장하여 예수 복음의 역군이 되는 모든 성도가 되라고 지금도 기도하실 것이다. 한편최판섭 집사 같은 분은 인근 섬으로 피난하였으나 교인이 모두 죽어 간다고 한 말을 듣고 내가 혼자 살아 무엇 하느냐! 나도 주님 가신 길 가리라 하고 친히 분 주소에 들어가서 순교제물이 되셨다고 한다. 우리는 이분들의 뜻을 헛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골고다로 가신 상처투성이의 주님의 발자국을 밟았던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끝
주후 1998년 6월 5일 탈고 배길양 목사 글

순교자가 많은 교회라고 하여 부임하였으나 전연 순교자가 있는 교회답지를 않게 보였다. 영락교회를 가본적이 있다. 김응락장로님이 교회 건축위원으로 교회를 6,25사변중에 지키시다가 퇴각하는 공비에게 기도중 사살되여서 후에 뜰에 작은 비석에 이름이 세겨진 것을 보고 이런것이라도 이 교회 뜰에 세워졌으면 흔적이라도 남을텐데...
그래서 행여 문서라도 남았나 조사했으나 다행이도 선임교역자님들이 몇분의 이름만 찾아 남겨 놓았다. 나는 이 명단을 보고 그 기쁨을 형언할 수 없이 기뻤고 소망이 있었다. 부임 첫날밤 우리교인이라 하지만 지금 우리 교인이 아닌 무리들이 교회안에서 열심히 기도하신 모습을 이틀저녁을 꿈으로 보고 더욱 관심을 풀길이 없어 내 기어히 이분들의 이름을 밝혀 놓고 말리라 다짐하였던 것이다. 이젠 우리는 이들의 신앙을 결코 자랑하는 교회로 끝나지는 않겠다.
이제부터 이들의 신앙의 자세와 기풍을 세우는 교회가 되어 선교와 봉사와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리라는 자세로 마음을 다지며 이 연구에 임한 것이다.

대한 예수교장로회(통합) 광주노회소속 야월교회는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471-1에 소제한 교회로써 1908년 4월 5일을 기하여 설립된 교회이다.
조선 예수교장로회 사기상에는 영광군 염산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본리인 문영국, 정정옥등이 일진회를 대항하기 위하여 봉산교회를 다니다가 차차 진리를 습득한 후 열성으로 전도하여 신도가 증가함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 배유지 , 도대선, 남대리, 이아각 과 조사 박인원, 이경약, 최홍교, 이규주 등이 차제 시무하니라.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어서 야월리교회의 초기 명칭이 염산리교회였고 현재의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소재 염산교회는 사실상 1939년 군남면 옥실리 교회로 출발 1947년 봉남리 현 소재지로 옮겨 염산교회로 명칭을 변경하다.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야월교회는 1908년4월5일 전라노회 제4회기에 설립허가를 받은염산면에서는 처음시작된 교회이다.그래서 염산면을 대표하여 마을이름으로 호칭하지 않고 염산교회로 설립허가를 받았다. 그러다 1937년 염산교회 (지금 설도교회)가 설립이되니 노회로부터 마을이름을 따서 야월교회로 개명 되어진 것이다. 야월리는 염업이 크게 성한 곳이다. 예전에는 화염을 주로 하였고 점차 천일염전으로 발전하였고 해방후에 육지와 제방으로 연결된 후 오늘날에는 교통도 편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온교인이 순교한 교회라지만 전연 문서나 어떤 유적이나 흔적을 찾을수 없어서 이분들을 찾아서 잊어버리고 숨겨진 역사를 한국 기독교 역사에 제자리 찾기를 해야겠다는 담임목사로써 의지를 갖게된 것이다.
한국 기독교사에 이토록 한 시대의 아픔과 수난을 맞이하여 신앙을 지킬려고 하다가 수없는 인명을 잃었지만 전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이름들을 볼수 없다. 그 이름을 찾아 놓지 않으면 영원히 잊혀질 것이다. 이제 이분들은 마땅히 한국기독교사에 기록되여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더구나 작은 교회였기에 교역자가 없었고 한때 한국전쟁후에 교회당도 불태우고 교인은 한사람도 남지 않고 순교하여 백지화된 교회이기에 역사적인 기록 및 순교자 명단도 찾지 못하였다. 이제 이분들의 이름이라도 가족사항이라도 정확이 찾아 전하여야겠기에 이 연구에 임한 것이다.

제목이 야월교회 순교자 연구이기에 순교자란 예수 믿는 성도들이 어떤 특정한 권력과 제도에 의하여 신앙때문에 수난당하여 희생하신 분들을 순교자라 한다면 지난 1950년 6.25사변부텨1952(음) 1월 16일까지 공산당에의하여 여기 야월리에서 신앙을지키시다가 주님앞에 가신 성도들을 여기서 순교자라고 말하려고 한다.
야월리에서는 6.25사변 당시 50년 6월 22일 이북 공산군이 숫자 미상의 1개 부대가 야음을 타서 창수앞으로부터 상륙하였다. 이로 보건대 이미 6.25사변이 일어나기전 후방 교란 목적으로 북한에서 이미 병력을 파병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광주에 상주한 여순 반란사건을 토벌하고 지방의치안을 위하여 주둔시킨 병력이 있었다한다 북한군이 상륙한 이튼날 23일 염산면 내남리 뒷산에서 광주에주둔한 군병력과 영광 함평지방 경찰부대와 연합하여 이곳 내남리에 22일 잡입한 북한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소탕전이 벌어졌는데 치열한 전투끝에 거의 전멸시켰고 그중 살아있는 잔병은 남쪽서쪽으로 도망하였다한다 6.25사변 당시 공산군 주력 부대는 낙동강 전투에 총투입되고 이 쪽은 주로 지역 빨치산이 조직되여 이들이 준동하면서 막대한 재산 피해와 인명피해를 준 것이다.
특히 염산면 지역은 늦게 수복되어(52년 1월 16일<음력>백수 까봉전투를 마지막으로 잔딩을 소탕하였다고 함) 타지방에서 볼 수 없는 기독교 인사 및 우익 인사들이 체포 처형되였고 심지어 가족까지 모조리 쳐형한 것이다. 그래서 이시기에 신앙지키다 죽어 순교하신분을 순교자의 범위에 제한하려 한다.

염산면 소제지 소제한 설도교회 임한선장로(현설도주유소주인)에 의하면 이미 염산면 지역에 1950년전 일찍 부터 북한 공산당 거물 金三龍(남노당 거물 간첩)이 염산면 오동리 상오부락 출신으로서 金三龍을 추종한 지방 빨치산이 준동 입산하여 월암산에 근거를두고 인근 부락과 심지어 도로에까지 출몰하여 밥을 짓게하고 우익인사들을 납치 살해하자 경찰력에 의하여 주민이나 입산한 가족을 구금밎 쳐형하게 되여 감정이 격화되었다.
야월리 이리부락에 소제하신 정준성씨 증언에 의하면 1950년 6월 22일 밤 숫자미상의 북한 인민군 1개 부대가 창수 앞으로 야음을 이용하여 상륙 염산뒷산넘어 내남리에 잠입하여 영광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 정보를 접한 국군토벌군이 광주에서 내려와서 지방경찰들과 함께 신성리에 입접한 내남리 부근 야산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대다수가 살상되였고 잔당이 남쪽으로옥실리 그리고 서쪽으로 야월 지금 야월 서초등학교 뒷산으로 잠입하였다.
그중 한사람이 야월서초등학교 뒷산에 숨어있다가 나뭇꾼에게 발견되여 이소식이 경찰에 알려지게 되자 경찰이 마을에 와서 자수를 권유독려하므로 야월교회교인인 정문성씨가 산에 다시올라가 공비잔당 일명을 자수권유하여. 경찰에 인개 하였던바 입동 길옆(상여집 앞)에서 총살하였다.
남아있는 다른 잔당이 사실을 알리고 이 마을이 불순한 마을이라고 하여 그들의 주목하는 불순한 마을이 되였고 또 정문성이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이다. 좀더 확실한 직접 원인은 1950년 9월 29일 국군과 UN군이 목포에서 함평 영광을 수복할 때 기독교인사와 우익 인사들이 대 환영을 하러 나갔다고 한다.
이 사실을 기독교대백과사전 1489page에 보면 "1950년9울29일 후퇴했던 국군과 UN군이 영광읍에 진주하였다. 이에 기독교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환영행진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기독교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환영행진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미쳐 후퇴치 못한 공산군과 지방 공산당들은 인근산속에 은거하고 있었고 국군을 환영한 기독교 인사에 대한 보복게획이 추진되였다.
이상의 말을 빌려 보더 라도 정남철장로 부친 정종달(72세)씨의 증언도 일치하고 현제 서울 동대문구 장안1동 220-6에생존해 계신 최창섭장로(6. 25 직전 야월리에서 신앙생활하시고 사시다가 이거하신 분)의 증언에도 심지어 그 당시 야월교회 최판섭집사, 조숙현집사, 조양현영수 자제들이 태극기를 띠고 국군 환영대회에 나갔다고 한다.
또 하나의 직접적인 원인은 야월리 이리 마을 김희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이지역을 점령하여 술양조장집 주인과 다른 유지들을 교회당 뜰에 꿀리고 마을사람들을 모여놓고 공개처형 하기위해서 인민제판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이두사람들은 인민의 피와 땀을 착취한 악질 반동입니다. 이 악질 반동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인민의 원수이니 죽여야 합니다." 그러자 야월교회 출신 김성종영수님이 칼칼한 목소리로 "아닙니다. 그 사람은 흉년이 들어 한때 어려웠을때 쌀을 풀어 나눠주었고, 법없이도 사는 사람입니다. 나라에선 이런사람을 표창을 하고 상을주어도 모자랄진대 어찌 상을 주지 못할지언정 사람을 죽일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옳소"하여 그들의 이 지역혁명 게획에 차질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먼저 죽여 재거시킨후에 마을 혁명을 완수 하자는 무서운 음모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염삼면과 백수가 가장 늦게까지 수복되지 못하여 1952년(음)3월 16일 백수로 퇴각 할때까지 긴세월 지방공산 빨치산과 공산군들은 인민재판으로 처형을 필두로 하여 1951년(음) 8월, 9월 까지 야월리교회 성도들을 처음은 중심인물들을 설도분주소에 끌어다 죽도록 두둘겨 허리에 돌을 매달아 물속에 처녛어 처형한 것이다.
야월리 이리 부락에 계신 이시성씨 증언에 의하면 " 김성종영수, 조양현영수,최판섭 집사 최판원집사 김두석 성도 등은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모두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체포되어 이리마을 조씨집 창고에 가두었는데 낮에는 살려두고 깊은 밤에 처형했는데 온마을이 떠나가게 찬송을부르고 기도 하였고 밤이깊어지자 이들을 차례로 두우리쪽 큰북재 넘어 이리마을 공동묘지가 있는데 공동묘지 앞부분에다에 약 직경10m 넓이로 큰 구덩이를 낮에파놓고 밤이 깊어지자 교인들을 손을 뒤로 몸에 묶어서 구덩이에 때밀어 생매장시켜 죽였다고한다. 안들어 갈려고 하는자는 칼로 찌르고 대창으로 찔러 강제로구덩이에 처넣고 흙을 덮어 죽였다. 증언자의 말에의하면 흙이 3m가 넘게 깊이 쌓였는데도 그흙이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한다 그구덩이에도 모자라 또 한팀은 지금은 천일 염전이지만 낮에 바다가에 큰 구덩이를 파서 둠벙을 만들어 그둠벙에 교인들을 밀처넣어 생매장시키어 흙을 덮어서 죽였다고한다. 물론비신앙인도 그곳에 함께 쳐형하였는데 후에 한 구덩이에서 사체를 80구를 발굴했다고 한다. 이시성씨에 의하면 주로 이 두곳에서 생매장하여 죽였다고 한다.
조양현 영수님과 최판섭집사님은 해방전 신사참베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루다. 8.15일에 출옥 성도까지 된다고 한다.(최석창장로 증언 및 "야월도 순교자"심영걸 저) 특별히 최판섭집사는 신앙이 좋고 똑똑하여 지방회에 참석하며, 교회사를 의논 할 때 명쾌하게 발언하고 매사에 깊이 있고 능력있게 마무리 짖자, 해남군 산이면 초성리교회 유귀남장로님이 자기 딸 유영심을 인연을 맺게 ㅡ하여 사위로 삼았다.
이분도 뿌렴도(지금은 지도상 가기도라고 기명)란 섬으로 피난갔는데 들려온 소식이 교인과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교인과 가족이 모두 죽었는데 나혼자 살면 무었하냐"하고 상륙하여 그날 저녁에 체포되였다집사님은 어머님이네장형 최판원집사가 잡혀 죽게 되었다고 어머니가 울으시면서 네가 들어가면 네 장형 판원이를 살려준다고 하니 네가 들어가거라. 그러자 최판섭집사는 어머니 앞에서 “내가 어머니 앞에 먼저 가는 것은 어머님께 불효이오나 하나님이 부르시니 이제 가겠습니다.” 하고 붙잡혀 맨발로 걸어서 가시면서 의연한 자세로 저멀리 주님만 바라보시면서 찬송을 부르시며 설도 분주소에 잡혀가시어 설도 수문에서 형 최판원집사와 함께 물에 빠뜨려 장렬히 순교하셨다고 한다.
이시성씨 증언에 의하면 남석우씨는 예수 믿는 반동분자라고 해서 밭가에서 돌로 머리를 처 두개골이 파열했으나 아직 죽지 않어서 집으로 옴겨 놓았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어서 1950년 음력9월 어느날 오후 4시경에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몇년동안 교회없는 마을이 되고 마랐다.
야월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여 순교제물이 되여진 것이다.

야월교회가 단일교회 순교자 숫자가 영광에서 염산교회 77명보다는 작지만 온교인이 한사람도 당시 교회다니며 사신 분중에서 남지않고 순교하였고 교회가 불탔던 교회로서는 한국교회사에 유일한 교회라 생각된다.
한국 교회사 호남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광군내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가 수난을 당하고 또 많은 순교자를 낸 교회들이 많다. 그중에 야월교회는 최판섭성도를 비롯해서 유년주일학교 학생까지 포함에서 65名의 순교자를 냈다. 야월교회는 교인을 잃고 또 교회당은 전소되고 말았다.
또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1950년 6.25사변으로 교회는 다시금 수난에 직면 했는데 특히 인근지역에서 암약하던 地方공산당들의 만행에 더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의 전도인이던 김영갑은 피난하였고 교회당은 공산당에게 징발당하여 교인들은 다시 지하교회의 형태로 신앙생활을 게속하였다.
이에 기독교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환영행진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미쳐 후퇴치 못한 공산군과 地方공산당들은 인근 산속에 은거하고 있었고 국군을 환영한 기독교 인사들에 대한 보복계획이 추진되였다. 그해 10월 공산당들은 야월리에 난입 교인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석유를 뿌린채 불을 질렀다. 이때에 조양현 조숙현영수 최판섭, 최대섭집사 그의 여동생 최판례를 비롯 어린아니까지 포함하여 65명의 교인들이 참살되었다. 고 기록되어져 있다.
88년도 구역예배지침서에는 "교회적인 참상의 실예로 전남 영광 야월교회는 65명" 이렇게 숫자만 기록되여 있다.
그러나 현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51년 9월부터 10월까지 기독교 인사들에 보복 계획에 의하여 살해하였지만 핵심 인사들은 염산면 분주소도 체포인도하여 많은 매를 맞아 반 죽음 후에 손목을 위로하여 새끼줄로 묶여 돌을 채워서 바닷물에 뛰워죽게하였고, 나중에 그 가족까지 심지어 어린이 갓난아기까지 바다 물에 빠뜨려 죽게 한 것이다.
1952년 음 1월 16일 공산당이 백수로 철수한후에 경찰이 수복한후에 한번에 80여구를 매장한 시체들을 발굴할 때 호쿠와 쇠스랑으로 시신들을 들추어 모습을 알 수 없어서 입은 옷으로 확인하여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당은 1951년 10월 어느날 오후 5시에 공비에 의하여 불태워 졌다

순교자 명단 추적하는 과정은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이도 순교자의 중요인물은 교회 연혁에 전임 목회자님들이 기록하여 남겨져 있었다. 호적이 이적되여 기록이 없는분 호적은 남아있지만 혼인신고 및 호적에 출생신고가 안된분도 많았다.
호적이 불타 소실되여 地方法院에서 복사하여 복원하였지만 전가족이 멸족한 가족은 호적복원에 누락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호적열람으로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미 40여년의 세월이 지난후인지라 당시 함께 살았던 분들도 이웃이지만 어려웠던 때인지라 기억에 빨리 잊고 싶어해서였는지 전연 기억을 못하신다.
그러나 추적하면 반듯이 드러날것을 확신하면서 시도했다. 추적방법은 당시 야월리 이장을 지낸 정준성씨를 찾아가 전반적이 부리핑과 기억을 더듬어 그 가족의 호주 및 남자들은 대강 기억하고 계셔서 도움이 되였으나 부인들이나 아이들은 전연 이름을 찾기가 어려워 특별추적할 필요성이 있었다.
먼저 호적추적을 시도했다. 다행히도 호적담당 직원및 면장님의 특별배려중에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본인 이름이 지방에서 부른 이름으로 등제가 안된분 이적이 되어 기록행방이 묘연한 분, 그래서 거의 실패하였다.
남자는 이름이 등제되였으나 혼인신고 출생신고가 안되여 부인과 아이들 이름을 찾을수 없었다. 그래서 한가족 중심하여 집중 추적하기로 하였다. 당시 함께 이웃해서 사신분 혹은 사신분중 가장 친하게 사신분을 찾았고 친척을 찾아 일일히 방문하여 추적하였다. 다행히도 조양현영수님의 가정은 영광읍에 현제 生存한 동생 조풍관집사님(☎352-3329)소장한 족보를 조사하여 잃은 이름들을 찾은것이다.
최판섭집사의 가족은 현재 사촌형님이 영광군 군남면 양덕리 40번지 갑촌에 생존하여 계신대 3회에 걸쳐 방문하여 그 부인의 탁월한 기억력 때문에 최판섭집사및 최판원집사님의 모든 가족의 이름은 찾게 된 것이다. 김성종영수님의 가족은 두 아드님까지는 마을에서 어르신들이 기억하고 있지만 자부와 손주들의 이름은 다잊어버려서 찾을길이 없었다.
옥실리에 선산이 있어서 가까운 친척을 찾았으나 소득이없고 약간 먼 친척이 함평읍 신기산에 생존하신 김대선씨를 찾았으나 문권에도 기록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허탈한 마을으로 돌아왔다. 다시 옛 주거지 번지를 찾아서 등기부 열람을 했으나 미등기로 있어서 토지대장을 열람하여 확실한 번지를 찾아서 다시 호적을 직원과 같이 조사하였더니 주께서 도우셔서 모든 가족사항이 말소되지 않고 남아 있어 영수님의 모든 가족 사항을 찾게된 것이다. 옥실리에 선산이 있어서 가까운 친척을 찾았으나 소득이없고
그러나 호적에도 모든분의 기억에도 찾을수 없는 이름들이 있었다. 분명히 결혼하여 동거하여 살았고 같이 살았기에 가신분의 이름은 이토록 아플수가 없었는데 요행히도 당시 함께 신앙생활하시던 장로님을 뵙게 되어 정대성성도의 부인 전덕성씨를 찾게 되였다. 그래서 거의 모든분을 찾게됨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특히 찾아 추적할 때 마다 성의있게 말씀해 임해 주신분들께 감사한다.

야월리에 1950년대에 실제로 체험하고 그 불행한 시대를 살으셨고 현재 생존하여 생생히 증언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이 분들은 기억력도 즣으시고 자못 생활도 좋으신 분들로서 마을 유지에 속한다.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황판옥 81세 야월리 1구 이리부락 소제
정종달 72세 야월리 2구 야장부락소재(☎52-9155)정남철장로 부친
강대위 72세 야월리 2구 456번지 야장부락 소제(☎52-9971)
이희성 63세 야월리 1구 이리 마을 유지
최석인 75세 야월리 1구 이리소제
정준성 66세 야월리 1구 50년대 당시 마을 이장하신분
이분들은 살아 있는 증언자들이시다.
본교회순교자 명단을 결정할 때 1989년 2월 26일 최종한장로님의 다방에서 상기분들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최장로님입회하에 명단을 살펴가면서 누락되신분, 오기되신분 혹은 비기독교인이 이명단에 끼여 있는가를 결정케하였다.
본교회 담임목사인 배길양목사의 사회로 삼심제에 의하여 체택하기로 하였다. 제일심 전체를 낭독하여 살피다. 제이심 가족적으로 살피며 명단 하나하나 이름을 구체적으로 오기되었거나 호적보다 마을에서 부른 이름들을 체택하고 누락자를 찾다.
제삼심 최종적으로 가족명단을 확정 결의하다. 그리고 전 명단을 다시 살피고 이상 없음을 확정 체택 결의 하였다. 이어서 이 순교자 명단을 돌에 새겨 건립키로 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경비는 본교회 성도들의 특별헌금으로 하기로 하여 89년 3월19일 헌금하였다. 이는 진실로 사랑하는 교회가 순교신앙을 이어가고 이 순교 신앙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전교인 헌금토록 하였던바 더욱 감사한 것은 주일학생 아동부, 중고등부
학생까지도 비록 작은 금액이지만 정성 다하여 헌금되여진 것이다.

영수 김성종 (부인)최씨부인
(장남)김두원 (자부)오연이 (손녀)김안순
(차남)김두석 (자부)박귀례
영수 조양현 (부인)신씨 (모친)인동장씨 (장남)조영원 (차남)조영연 (딸)조마리아(영님)
(사위)김준수 조영민 갓난이
(사위)홍순택 조영애(삼녀)
(사위제)홍사차 (사위제)홍오차
(동생)조숙현집사 (부인)김씨 (장남)조영신
(차남)조영태 (삼남)조영배
(동생)조춘현집사 (부인)김씨, 조연레, 조귀례, 조연순,
조안순 (사위)박성철 (장녀)조순례, 조영갑(조양현 맡형의 장남)
집사 최판섭 (부인)유영심(해남 산이면 조성리교회 유귀남 장로의 딸)
(모친)김씨 (장남)최영국 (장녀)최영애
(형)최판원집사 (부인)김씨 최영님, 최영복, 최반달이, 최영숙
집사 김병환 (부인)채선례 (장남)김형기 (차남)김요기 (사위)이희범 (자부)한씨 (손녀)김정숙
집사 정일성 (부인)이씨 (장남)정종임 (장녀)정정단
정문성 (부인)배금순 (장남)정해동굴 (동생)정대성 (부인)정덕성
남석우 (부인)본아리댁(원례) (장녀)남헤자 남부댁

본 교회에서 순교자명단이 확정되자 순교비를 건립코져 온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을 하였다. 여기에는 교회학교 아동부의 코흘리개의 헌금까지 하였다. 이런 사실을 노회장이 알고 그토록 의미 있고 막중한 일을 지교회에서 하는것보다 거 노회적으로하면 어떻겠느냐고 하기에 "매우감사합니다. 그렇다 하면 더 의미가 있겠습니다." 하여 노회임원의 중지를 모아 거노회적인 사업으로 추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1989년 3월 29일 광주노회 제3회 정기노회총회에서 야월교회 순교 기념탑을 건립키로 결의하고 제반업무는 임원회에 위임키로 하였다. 1989년 4월 8일 오후 5시에 노회 임원회가 대인동 노회사무실에서 소집하여 노회장 유한귀목사의 사회로
야월교회 순교기녑탐 건립위원회와 각분과위원희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기로 하여
*위원장 : 유한귀목사 *서 기 : 이정조목사 *회 계 : 유재옥장로
*분과위원
1. 사증분과 위원: 노정열, 유한귀, 차종순, 박금호, 배길양
2. 탑 건립분과 위원 : 남정규, 나종권, 김정문, 김녹현, 최종한
3. 행사위원 : 오용운, 이정조, 박겸낙, 유재옥, 김초현
4. 고문 : 홍관순, 장동진, 박관석, 이화림, 김홍배
*제3회 노회 제1차 임시노회가 주후 1989년 6월 12일 오후 2시 담양읍 교회에서 임원회 보고중 조직을 보고하였다.
*1989년 6월 4일 사중분과위원장 노정열목사 차종순교수(호신대), 김수진박사(장신대), 안종렬목사, 배길양(본교회 담임)목사와 마을의 당시에 생존하신 어른들(정종달, 정준성, 이시성, 강대위, 홍순춘)을 모시고 담임목사의 추적명단을 중심으로 사정을 하여 확인하고 1986년 6월 16일 노회 임원에서 사증분과 위원회 보고의 보고가 증명되므로 받기로 결의하고 비문작성은 탑건립 분과 위원인 차종순교수께 위임하여 쓰기로 하였다.
*1990년 4월 14일 남정규,박관석, 나종권목사님과 본교회 담임목사및 야월교회 온교인들과 더불어 탑 건립 기공예배를 드려 건축공사를 하였다.
*1990년 11월 29일 준공예배를 드리고 탑제막식을 하였다.

순교기념탑 건립에 즈음하여
1897년 목포에 선교부를 세운 미국 남장로교소속의 배유지(Eugin. Bell)목사 일행의 선교활동으로 이곳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구한말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곳에서도 친일적인 일진회를 반대하던 문영국, 정정옥씨등이 교회를 찾았으며 이렇게 해서 1908년 4월 5일 야월리교회가 설립되었다.
해방 이후 야월도가 연육되면서 부터 교인들이 지역사회의 주축을 이루면서 교회는 성장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6월 22일 이 지역에 상륙한 숫자 미상의 인민군의 기습이 한 기독교인의 제보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갈등으로 교회 탄압을 가하던중 1950년 9월 부터 10월사이에 기독교인들을 살해하였다. 교회는 불타고 교인전체(65명)가 죽임을 당하여 이 지역의 복음화가 일시 단절된둣 하였으나 이들의 거룩한 씨앗이 큰나무로 자라서 이곳이 믿음의 모퉁이 돌임을 오늘 까지 생생하게 중언해 준다.
본 대한 예수교 장로회 광주노회는 정성어린 기념탑을 세우면서 이곳이 여호수아의 증언석이 되어서(수24:17) 65명의 귀한 순교의 신앙을 영원토록 전해주기 바란다.

이미 아픔의 한 시대는 간 것이다. 이제 공산주의 국가의 이념도 시대가 변하듯이 변천하여 소련도 중공도 개방화로 변천하고 있다. 어제의 적이 이제는 상호이익을 위해 손을 잡는 시대가 되어져 가고 있다.
평양에도 봉수교회와 칠곡 교회가 세워지고 보도에는 40,000여명의 교인이 지하에서 피눈물 나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 순교자가 있었던 마을 사람의 마음은 동토처럼 녹지 않고 "교회에 가면 죽는다."고 하는 이 엄청난 상처와 외곡은 좀처럼 아물지 않고 있다.예수 복음 때문에 생명 받친 영혼들은 아브라함 품에 쉬지만 이 야월 리에 뿌려진 이 거룩한 피는 결코 헛되지 않고 성도의 심령으로 타고 내려가리라 "오직 나는 예수 복음위하여 이 제단에 피를 남겼노라고"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성장하여 예수 복음의 역군이 되는 모든 성도가 되라고 지금도 기도하실 것이다. 한편최판섭 집사 같은 분은 인근 섬으로 피난하였으나 교인이 모두 죽어 간다고 한 말을 듣고 내가 혼자 살아 무엇 하느냐! 나도 주님 가신 길 가리라 하고 친히 분 주소에 들어가서 순교제물이 되셨다고 한다. 우리는 이분들의 뜻을 헛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골고다로 가신 상처투성이의 주님의 발자국을 밟았던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이젠 이 땅에 다시금 아픈 고난이 없도록 기도하고 가신 분들의 용기 있는 신앙을 배워 우리의 신앙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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