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금산교회, 김방호 목사님 간단소개

일반자료      
쓰기 일반 자료 초기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2. 금산교회, 김방호 목사님 간단소개

http://www.mjk1004.org/sub5_4_detail.asp?CatNo=5&PSize=10&PageNo=4&IndNo=19



제목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서(6) 순교자 김방호목사 작성일 2017-04-13

기독교헤럴드(6)

순교자 김방호목사 (영광 염산교회. 1895~1950)

문준경순교기념관 관장 김헌곤목사

청년 김방호는 만주 용정에서 독립군 자금 모집책이 되어 지방으로 출장을 가던 중 참석하게 된 부흥회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주여, 독립군이란 명목으로 무수한 생명을 살해한 죄인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후 김방호는 닫슨 선교사의 조사로 헌신하고 소룡리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 평양신학교를 1933년에 졸업(26회)한 후 영광읍교회, 덕산교회 시무를 거쳐 상촌교회에서 8.15해방을 맞았다.

김방호 목사는 1950년 3월10일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염산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 교회는 1년 이상 목회자가 없는 상태로 좌익 세력과 힘겨운 대립을 하고 있던 차였다. 석 달 후 시작 된 6.25 전쟁에도 굴하지 않고 김 목사는 교인들에게 천국과 재림신앙을 심어 주는 데 매진했다.

염산교회에 전쟁의 수난이 몰려들자 김동근 장로, 김 장로의 큰 아들 김형호 집사(목포상고 교사)는 목선을 준비하여 김 목사에게 피난을 권했다. 하지만 김 목사는 ''어떻게 성도들을 놔두고 다른 곳으로 피하겠는가?''하며 거절하였다. 김 목사와 염산교회에 박해가 밀물처럼 닥쳐왔다. 7월 23일, 공산당원들에게 예배당과 사택을 빼앗겼다. 10월 7일, 예배당이 불에 타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1950년 10월 27일, 결국 김 목사와 8식구(부인, 5남매, 손녀)가 한 아들만 남기고(김 익 -목회자로 헌신) 한 날 순교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창과 몽둥이에 맞아 김 목사가 먼저 쓰러졌다. 피를 흘리고 쓰러지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영광된 순교의 길을 간 것이다. 이어 부인, 다섯 남매, 어린 손녀가 공산당원들의 광기에 차례로 숨을 거두었다. 김방호 목사의 장남 김 휼은 목포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기독청년 연합회장’이었는데 좌익 학생의 고발로 야산에 끌려가 순교하였다.

염산교회 성도들이 당한 순교는 김 목사 가족의 순교 후에도 계속 되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목포성경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기삼도(23세)는 죽창에 수차례 찔려 순교했다. 노병재 집사는 공산당원들이 수문까지 끌고 가 수장시키려 하는 와중에도 찬송을 멈추지 않고 부르다가 스스로 뛰어들어 순교했다. 그의 일가족 9명도 순교했다. 염산교회의 1대 교역자였던 허상 장로와 부인이 순교했다(10월 13일). 봉덕산 골짜기로 끌려가 매를 맞고 죽창에 찔려 숨을 거두었는데 장로님은 끝까지 찬양을 드렸다고 전해진다. 이밖에도 염산교회 교인들은 많이 희생당했다. 1m 간격으로 묶이고 돌을 가슴에 매단 채 한꺼번에 물에 빠져 순교했다. 전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순교한 것이다. 염산교회 김방호목사와 성도들의 순교의 삶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발자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