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헌 - 공회 찬송, 영의 사람, 해방 초기 인물
공회 찬송 201곡 중에 7곡이 '유재헌' 목사님의 찬송입니다.
7곡의 찬송보다 그 분은 영의 사람으로 살다 순교한 분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의 내면을 가진 분입니다. 다음 기사는 '예장뉴스'에 소개 되었고 기자이며 발행을 책임 진 목사님과 직접 통화하고 이 곳에 소개합니다. '출처' 표시 조건부로 사용을 자유로 하라 했습니다.
http://www.pck-good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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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골 이야기(기획) I will miss your(추모)
한국 복음성가의 아버지 화단(火壇) 유재헌목사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승인 2015.10.15
한국 복음성가의 아버지 화단(火壇) 유재헌목사
한국선교역사상 최초로 부흥회에서 사용하는 복음성가를 만드신 고 유재헌 목사(劉載獻, 1905. 3. 21~1951 공산군에게 피납 순교)의 생애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 어른이 세상을 뜨신지는 벌써 64년이 되던 해에 저평가된 그의 자취가 역사가 이미 오소운, 이상규, 김종희 목사의 노력으로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 이번에 고 유 목사가 졸업한 경신학원이 130년을 맞는 기념행사가 창립년도가 같은 연세대학교에서 열렸다. 마침 그 행사에서 고 유 목사님이 여러동문들과 함께 모교를 빚낸 동문으로 추대하는 귀한 자리에 함께 했다. 이외에도 장한 동문에는 본 교단의 원광기 목사도 계셨고 총회장이신 채영남 목사는 설교를 하시고 총회 임원들도 참석을 하였고 서울 노회장 김창근 목사(무학교회)가 축도를 하는 등 마치 교단의 행사와도 같았다.
* 유재헌 목사 대구지역의 부흥회
이 가족들과 나의 연고는 부친(고 劉德龍 목사)이 서울장신 재학 시절에 고인이 세우신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전도사로 잠시 강단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나도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고인이 우리와 종친이기도 하지만 임마누엘 수도원은 부친에게 첫 목양의 기회를 준 곳이며 거기서 고 유 목사의 유지와 정신을 받들어 훗날 부흥사로써의 인격과 영성훈련을 도양하며 신앙의 귀한 동지들도 사귄 곳이기에 잊지 못할 곳이라고 늘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세검정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서정의 사모(30년전 소천)
부친이 임마누엘 수도원를 관리하며 주일 강단을 볼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찬송은 고 유 목사님이 지으신 복음성가을 불렀는데 찬송가 곡조에 유 목사가 작사한 가사를 붙힌 것이었다. 부친이 임마누엘 수도원에 오기전에는 이단자가 된 양도천 목사가 인도하는 "천국복음전도운동본부" 라는 요즘 말로 기독교 열심단체가 입주하여 사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훗날 양도천 목사는 기도원의 교주로 신심이 지나쳐 독신으로 자신의 성기를 거세하였다고 들었다. 훗날 이들은 계룡산으로 이주하여 종말론적인 신앙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자취가 없어졌다. 부친이 수도원을 나온 후 이 수도원은 유목사의 장남이셨던 유종건 목사(군목)이 제대로 돌보셧다.
NCCK 청년 모임을 하는 장소로도 많이 애용을 했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던 날 EYC모임을 하던 중이었다. 유종건 목사(육사교회)는 원장으로 계셨다. 부친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여러차례 시국문제는 깊이 개입하지 말라는 권면을 주시곤 했는데 듣지 않았다. 그 어른도 2012년에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이다.
이 가족과 오랜만에 해후를 하였다. 그 다리는 경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목으로 일하시고 은퇴하신 존경하는 김종희 목사님을 통해서이다. 김 목사님은 이전에 이 가족중의 한분인 유정심 사모와의 한 서신에서 “저는 순교자 유재헌 목사님이 졸업하신 경신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대신학대학과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경신학교에서 교목으로 37년 일하다가 2004년에 은퇴한 76세의 늙은 목사입니다. 은퇴 후 순교자 사무실에 자원봉사자로 한국 교회 순교자들의 기록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과 홈페이지에 넣는 등 순교자들의 순교기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유재헌 목사님의 순교기록을 다시 정리하면서 유정심 사모님의 이름을 발견하고 무척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유재헌 목사님의 이력서를 정리할 수 없었는데 오늘 유정심 사모님을 오소운 목사님을 통해서 알게 되어서 이제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쓰시고 있다.
* 유재헌 목사의 가족 좌 2번 유종건 목사, 앉은이 유목사와 사모(서정의)와 모친
그후 페이스 북을 통하여 이 가족과 연락이 되어 뵙기로 약속을 하여 이 날을 정하여 이 행사에서 해후를 하게 된 것이다. 고 유 목사님의 차남 유광웅 목사(아세안연합신학대학 교수 은퇴) 로 그의 제자들로는 장신대 임희국 교수(바젤신학부) 와 서원모 교수가 동신교회에 같이 출석한바 있다. 유광웅 목사에 대한 기억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연세대를 졸업하시고 스위스 바젤대학으로 유학을 가신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 계시다는 것만 알았지 뵐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뵙게 되었다.
* 경기도 이천에 있는 고인의 묘역
다시 김종희 목사의 글이다. “혹시 저의 고모님 김득순 전도사님을 아실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피어선 성경학원 사감으로 30년을 일하셨고 강의도 하셨습니다. 고모님은 유종건 목사님과도 교분이 있으신줄 알고 있습니다. 유종건 목사님도 피어선에서 강의를 하신줄 압니다. 정유장학회 멤버이셨습니다. 저도 정유장학회(현재 정유한양선교회) 멤버로서 과거에 유종건 목사님을 가끔 모임에서 뵈었고 임마누엘 수도원에서도 뵌일이 있습니다. 저의 고모님은 평양성경학교를 5년간 다니시면서 용인지역 13개 교회를 순회전도하셨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김종희 목사의 학창시절은 양수리의 용진교회(현재는 기장)에서 보냈고 이후 새문안교회에서 신학과 전도사 목사를 지냈는 데 경신학교 교목으로 은퇴를 하셨다.
고 유재헌 목사의 생애
해방후 한국 교회는 각처에서 회개 운동과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부흥사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이가 유재헌(劉載獻, 1905. 3. 21~1951 공산군에게 피납 순교) 목사인데 성장은 경기도 용인 김량장(金良場)했는 데 1905년 3월 21일 서울에서 유흥열(劉興烈, 1863-1945)장로의 아들로 출생했다. 유흥렬은 당시 선교사와 동사하던 초기 전도자이자 조사였다.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심리에서 출생한 유흥렬장로는 원두우(H. G. Underwood)의 전도로 1894년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등과 함께 광주, 용인, 안성, 평택 등 경성지방 순회전도자로 활동했다. 후에는 제중교회, 곧 현재의 서울 남대문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후 뒷줄 왼쪽 유흥렬 장로와 유재헌 목사, 유종웅 목사, 하단 서정의 사모와 유명애 조모
유흥렬은 순회전도를 통해 1902년에는 피득선교사와 함께 광주군 고산리교회를, 1903년에는 광주군 송파교회를, 1904년에는 피득선교사, 손흥집과 함께 전도한 결과로 광주군 소재 심곡교회, 세곡교회, 둔전교회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는 광주군의 고령교회, 용인군의 금양, 원촌교회를 순회 시무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재헌은 아버지가 순회전도자로 활동하던 때에 출생했다. 후에 아버지 유흥렬은 용인군, 대갈리교회에서 시무하기도 했고(1909), 1919년에는 장로가 되었는데, 50여년 간 무급 전도자로 혹은 장로로 봉사하시고 1945년 8월 17일 8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처럼 전도자의 아들로 출생한 유재헌은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1921년 경신고등학교를 거쳐 피어선성서학원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1924년 일성회(一成會)를 조직하고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아리실(牙利室)교회의 서정의양과 결혼하였다.
일본에서의 학업과 전도활동
결혼 이듬해 유재헌은 일본으로 건너 가 고베(神戶)성서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1928년에는 재일 조선인교회 다하라마찌(田原町)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1930년 이 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동경의 미가와시마(三河島)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1931년 12월 25일 일본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고베, 요꼬하마, 동경 등지에서 전도하며 부흥사로 활동했는데, 교포들에게 애국사상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잡혀 고베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가, 조선으로 추방된 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을 맞았다.
1944년 12월, 그는 고향 아리실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였는데, 설교 도중 우렁찬 바리톤으로 자작 「복음성가」를 부르는데, 어찌나 은혜스러운지 그 전율적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의 복음성가에 매료된 나는, 장차 그분과 같은 찬송가 작가가 되리라 다짐해 오늘에 이르렀다. 기독교 독립교회를 설립하였고 부흥사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교포들에게 애국사상을 전파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피검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그는 이국의 하늘아래서 힘겹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의 현장에서 오직 복음만이 유일한 위로라고 생각하였고, 나라 잃은 조선인의 아픔을 경험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신앙과 고백, 그가 일본에 영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귀국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조선인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에서 추방명령을 받고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1942년의 귀국했으나 요시찰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 기간 중 마산문창교회 집회를 인도하는 등 제한된 활동을 했고, <선한 목자>(1941. 겨울, 마산), <믿고 나가면 승리한다>, 일제 치하에서 고난의 길을 가던 조국에 주어진 해방은 자유와 기쁨과 감사의 시간을 보낸다. 이후 해방이 되자 그는 그 감격을 한편의 노래를 냈다. 그것이 경기도 용인에서 8월 15일 날 쓴 5절로 구성된 <애국의 노래>였다. 해방은 그에게도 새로운 시작이었다.
해방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자 유재헌목사는 부흥사로 활동하는 한편 선친 유흥렬장로가 시무하였던 용인교회를 계승하여 시무하셨다. 일본에 체재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민족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살았던 그는 집회를 인도하면서 구국기도단을 모집하였는데, 이 연유로 1945년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군탄리에 ‘대한수도원’을 설립했다. 그
는 엘리아의 제단처럼 우상을 불태우는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희구하면서 수도원을 화단(火壇), 곧 불의 재단이라 했고, 이것이 그의 아호가 되었다. 그가 작시한 찬송에는 자신의 이름 대신 ‘火壇’이라고 적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가 설립한 ‘대한수도원’이 한국에서의 기도원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그는 전국 각지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면서 많은 성가를 작사했다.
수도원 설립과 함께 작시한 것으로 보이는 <기도를 하자>(1945. 12), 그리고 1946년 1월에 쓴, <성신이 오시었네>, <성신이여 오시옵소서>, <도고찬송> 등은 수도원집회 때 부르기 위한 노래였다. 그의 대부분의 성가들은 1946-1948년 사이에 씌여졌다. 철원군에 수도원을 설립했으나 이곳이 이북지역이고 38선이 고정화되어 감에 따라 남한과의 왕래가 어려워지자 1950년 5월에는 서울 삼각산에 임마누엘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두 달이 못되어 6.25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참화는 그가 무릉도원이라 노래했던 금수강산을 피로 물들게 했다. 거리에 스치는 전쟁의 상흔을 보면서 성도들을 격려했고, 미처 남으로 피난가지 못해 기도원에서 안식을 구한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으로 위로했다. <도고자의 사명>도 이때 쓴 찬송으로 피신해 온 성도들과 끊임없이 불렀던 찬송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이들이 남으로 남으로 피난 길에 올랐으나 유재헌목사는 피난을 거부했다. 해방된 지 불과 5년, 동족상쟁의 아픔은 또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질곡을 보면서 그는 민족의 아픔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께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임마누엘수도원을 지키며 기도하시며 시련의 날을 지내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제자 중 한 사람의 밀고로 공산도배는 기도원까지 급습하였고, 강단에서 기도하시던 유재헌목사와 그 가족은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전쟁이 일어난 지 50일 째가 되던 1950년 8월 15일이었다. 가족들은 구사일생으로 풀러났으나 유목사는 납북되었고, 그 이후 생사를 알 길이 없다. 그가 납북 되던 당시 46세였다. 유재헌목사는 납북되었지만 곧 순교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기꺼이 순교의 재물이 되고자 했고, 그가 신앙을 버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피랍된 그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그가 노래했던 것처럼, “내 몸 주께 드리고,” 순교의 길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살을 찢어가라. 거룩한 피 흘리어 주의 흔적 지고 가서 주님 얼굴 뵈련다.” 이 고백은 유재헌목사가 노래했던 순교자의 기도였다. 그가 남긴 110여편의 복음성가는 지금도 한국인의 심정을 주께로 향하게 했던 신앙과 고백의 찬송이었다.
등사판으로 긁어 인쇄한 그의 「복음성가」 책에는 그가 찬송가 가락에 맞춰 지은 주옥같은 성가들이 114편이나 실려 있었다. 매 편마다 끝에 작사 연월과 장소를 적어 놓았는데, 맨 처음 작사는 1939년 봄 일본의「시오야」학사(鹽屋學舍)에서 작사한 것이다.「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곡조에 맞춘 이 찬송은,「내 신랑 예수여」란 제목의 5절 가사인데, 작사 동기가 애절하다.
예수 나를 위하여(개사된 복음성가)
1. 목마른 사슴이가 물을 찾음 같이 갈급한 내 심령은 예수 찾았다네.
후렴/ 예수여 예수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2.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해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네.
3. 예수 밖에 이 몸을 동정할 자 없고 예수 밖에 이 몸은 믿을 자도 없네.
4. 예수여 내 다리로 방문해 줍시고 예수여 내 입으로 말씀 전합소서.
5. 칠보단장한 처녀 때를 바람 같이 속죄 성결한 나도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
6.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만 피네.
7. 예수 죽음 내 죽음 그 부활도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숭천 그 천당도 내 것.
-火壇 作. 1941年 3月 神戶 경찰서 유치장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복음성가 가사에 대하여>
유재헌 목사는 복음성가 매 장마다 그의 아호인, 엘리야의「불제단」인「火壇」을 써서「火壇 作」이라 쓰고, 작사 연월과 장소를 적어 놓았는데, 39장의「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에는「1941年 冬 馬山에서」라고 적어놓고,「火壇 꾸밈」이라고 표기하여 당신의 원작이 아님을 밝혀놓았다. 유재헌 목사의 이 복음 성가들은 해방 직후부터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 각 교회에서 애창되었다. 그의 마지막 찬송은, 공산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던 때인, 1950년 7월 11일에 작사한 「순교자의 깃발」이란 찬송이다.
유재헌 목사의 수도원 운동
해방 후,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수도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도 있었지만 수도원을 이끌던 '남성' 목회자들이 떠나간 뒤 수도원은 폐쇄 위기에 처했다. 수도원장으로 있던 유재헌 목사는 전쟁 중 납북되었고, 박경룡 목사와 이성해 집사는 목회를 위해 외지로 떠났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전진 전도사는 기도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수도원을 지켰다. 유재헌 목사의 부탁을 받고 수도원 헌금을 전하기 위해 철원에 왔다가 수도원 살림을 맡아 물러앉게 된 것이다.
이후 대한수도원은 '전 진 원장 시대' 접어들었고, 그가 1996년 별세하기까지 규모나 내용에서 괄목할 성장을 이룩하였다. *전진 원장은 한국의 최초 목사가 되신 감리교 전밀라 목사의 언니였고 유광웅 목사의 사모가 그 분의 따님이시다.
유흥렬은 1863년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삼리에서 출생하여 삼십세의 나이에 언더우드(한국최초 개신교선교사 H, G. Underwood)의 전도를 받아 세례를 받은 후 상투를 자르고 구습을 타파하면서 개화운동과 복음전도에 앞장서게 된다. 문중으로부터 버림받고 멸시와 천대를 당했으나 그의 가슴에 붙은 복음의 불을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그는 언더우드와 동역자가 되어 제중교회(현 남대문 장로교회)의 조사(助師)로서 사역하면서 용인, 광주, 평택 등지에 소속 세워진 교회들의 순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당시 제중병운(현세부란스병원)의 간호사인 김인대와 결혼한다. 1905년 용인 김양교회의 조사로 시무하다가 1919년 장로가 되어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은지 이틀후인 聖役 50년을 마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었다.
유재현목사가 주도한 6.10 만세 운동
순교자 화단 유재헌목사는 그의 부친이 제중교회(현 남대문교회)에서 조사로 시무하고 있던 1904년 3월 21일에 태어나서 독자로 성장하였다. 경신학교(언더우드설립)를 거쳐 피어선성경학교를 다니던 중 1926년 6.10만세 시위에 가담하였고 그후 피어선성경학교의 지하에서 배재고보의 김동지 문창모 손영엽 염필주 차진호 김조영 차규섭 협성학교의 초영식 손병석 YMCA의 김동석 등과 재차 만세운동을 위해 모의한다. 그후 피어서 학원은 평택으로 이주하여 평택대학교가 되었는데 이러한 고 유재헌 목사의 역사를 기리는 조형물을 세웠다고 들었다.
6월 16일에는 거리에 뿌릴 독립문서를 등사하던 중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6월 30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 나왔다. 그후 그는 경기도 용인의 동아일보 지국에서 기자로서 일하면서 갑성회라는 민족계몽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일경의 감시와 핍박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새로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게 아니라 차라리 적의 진지 한가운데 들어가 활동하는게 좋겠다.” 그해 그는 우국동지 셋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에 이른다. 주로 구두수선을 하면서 고베(神戶-신호)의 관서성서신학교를 마치고 1931년 12월 25일 도꾜의 미가와지마(三河島)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맏게 된다. 그후 도꾜, 고베, 요꼬하마, 아까시 등지에 “조선기독교독립교회”를 세웠고 노방전도에 힘을 쓰던중 수차 투옥 감금되어 고난을 당하였다.
해방과 유재헌 목사의 구국기도단 설립
해방이 되자 유재헌목사는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40일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영력을 회복한다. 그리고는 부흥사로서 전국을 순회하면서 수없이 부흥집회를 가졌다.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대한민국은 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과 분렬 상태에 빠져있었다. 유재헌목사는 나라를 살릴 길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 밖에 없다는 확신속에 기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 기도단”을 세우게 된다. 1945년 8월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고석정에 “대한수도원”을 세워 원장으로 봉사하던 중 철원이 이북으로 편입되므로써, 1950년 다시 서울 삼각산에 “임마누엘 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그는 “구국기도단 선언문”에서 당시 한국사회와 교회가 처한 위기를 목전에 두고 이렇게 외치며 호소하였다.
구국선언문 전문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고 남녀노유를 물로하고 사천리 방방곡곡의 숨은 용사들을 규하하여 한국의 한 제단을 쌓고 한 목적으로 한 몸 한뜻이 되어 조극의 운명을 책임지고 각자 있는 곳에서 기도의 봉화를 들고자 한다. 우리는 사람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움직이자. 전도운동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기도운동을 일으키자. 이것이 순서이요 진리이다. 먼저 기도하고 다음 회개하고 다음 성신 받고 다음 나가 외치고 다음 건극하자. 기도 없는 인간의 일체의 운동은 실패에 돌아감을 우리는 목도한다. 애국혼의 불타는 신자들아! 한 제물이 되자! 한줄기의 기도의 향불이 되자! 우리의 기도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가 이 강산에 나타나 석룡사타은 몰려 나가고 자주독립과 아울러 삼천만 겨레는 구원 받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고 선언한다”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고 남녀노유를 물로하고 삼천리 방방곡곡의 숨은 용사들을 규합하여 한국의 한 제단을 쌓고 한 목적으로 한 몸 한뜻이 되어 조국의 운명을 책임지고 각자 이쓴 곳에서 기도의 봉화를 들고자 한다.
유재헌 목사는 “대한 임마누엘 수도원”이 “영계의 발전소”이며 “은혜의 수원지”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제단의 불은 결코 꺼치지 마라!”는 구호 아래 불철주야 기도의 향불을 올렸다. 순회 전도대를 두어 부흥회, 전도회, 노방전도를 하도록 하였다. 교역자나 평신도들이 영력이 쇠하여 질 때 언제고 와서 수양하며 힘을 얻기를 바랬다. 그는 이러한 구국과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구체적이고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한국에서 최초의 개신교 수도원(修禱園)을 세워 그후 한국의 모든 기도원 운동의 원조요 모본을 보여주었다.
그후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사경회 중심에서 개인의 회심을 위한 심령부흥까지는 이해가 가나 교회건축과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돈을 거두는 일에 부흥회가 이용되기 시작한다.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강단이 코메디장이 되고 금이빨을 만드느니 입학이나 혼인, 정초 축복성회등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남발되거나 세속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럴 때에 고인의 구국기도와 같은 나라사랑의 거시적인 부흥운동이 아쉽다고 하겠다. 그 뒤를 고 고영근 목사님이 "하나님 사랑, 민족사랑, 교회사랑"으로 주창하시던 것을 통하여 그 정신의 맥이 약간은 이어졌지만 지금은 끊겼다고 볼 수 있다.
6.25 한국전쟁과 순교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각산 임마누엘 수도원이 개원된지 두달이 채 되기도 전에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고 만다. 6.25전에 이미 이북에서 수만은 성도들이 월남하여 유재헌 목사의 지회에 참석하고자 삼각산에 운집해 있었다. 유재헌목사는 그를 찾아온 이 피난민들과 계속 집회를 가지면서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그가 오랫동안 그처럼 소망하며 각오해 두었던 그 순교의 때가 드디어 임했음을 믿고 이제 그 죽음을 달게 감당하기를 선택했던 것 같다. 6.25발발 두주후인 7월 9일 그는 이렇게 노래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남으로 미쳐 피란을 못간 많은 성도들이 삼각산으로 몰려와 유재헌 목사의 집회에 합세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엘리야의 제단과도 같이 기도의 향불을 보다 뜨겁게 타 올랐다. 그러나 8월 15일 정치보위부원들의 급습을 받게 된다. 어린 아이들과 늙은 부인들만 제외되고 유재헌목사를 선두로 모든 성도들이 체포되어 정치보위부가 감옥으로 사용하던 국립도서관의 지하실에 감금되었다. 그후 부녀자들과 대부분의 성도들은 풀려나왔으나 유재헌목사는 그곳에서 계속해서 수사를 받고 고문을 받았다. 그는 9월 28일 수복전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어 가던 중 탈진하고 지쳐 쓰러지자 총살당하고 만 것으로 추축된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114편에 달하는 주옥같은 복음성가들은 오늘날엗에 많은 노년층 신도들의 심금에 메아리치고 있으며, 우연 이들 복음성가에 접하게 된 성도들의 영혼에 깊이 새겨져 영적인 활력을 불러 일으켜 주고 있다. 오소운 목사는 그의 영향을 받아 신학과 음악을 전공하고 많은 복음성가를 지었다고 증언했다. 오늘날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CCM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린 교회들이 교회사적으로 인정받고 공인돈 찬송가를 멀리하고 유행가 부르듯하는 음악사역은 비판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감성에 호소하는 신앙은 다시 정적으로 내재되고 스며드려야 하는 데 악기나 사용하고 흥을 돋우는 식의 인위적이고 연출된 예배에 대하여는 할말이 많다.
유재헌 목사의 후손들
* 좌로부터 손녀 사위 목사와 유명현 사모, 유광웅 박사(ACT은퇴교수) 중앙 외손자 이상민 목사, 앞줄 맨우측 유정심 사모와 남편 목사(꽃을 든이)
장녀는 합동측 전 총회장인 대구 서문교회의 이성헌 원로 목사의 사모이다. 장남 이상민 목사는 부친의 뒤를 이어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중이다. 장남은 고 유종건 목사로 군목으로 제대를 하시여 수송교회와 임마누엘 수도원 원장으로 계시다가 자녀들과 함께 미국에 이주하셨는데 2012년에 소천하셨다.
유종건 목사 장녀 유영안도 장신대 학부를 다녔다. 차남 유광웅 박사는 연세대와 스위스 바젤신학부를 졸업하고 아세아연합신대학에서 교수를 계시다가 은퇴를 하셨다. 삼남 유종웅은 먼져 세상을 떠났고 차녀 유정심은 숭실대를 나오고 대구에서서 남편을 내조하면 목회하다가 현재는 은퇴하여 김포의 뉴 사운드교회를 시무하는 복음성가 가사 출신의 천관웅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하고 계신다.
*우측부터 고 유목사의 장녀, 차녀 유정심 사모, 차남 유광웅 박사 필자
이번에 이 가족들과 만나고 고인에 대하여 작은 자취를 남기게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과 모두에게 감사한다. 선친은 고 유재헌 목사의 정신적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부흥사가 되셨다. 이렇게 자신이 처음 사랑을 받은 곳으로 가르치셨는데 고마운 가족들을 뵙고 인사를 드리고 김종희 목사님도 뵙고 왔다. 민족이 어려울때 일사각오를 신앙을 지킨 선친들의 그 신앙이 새롭게 기억 되어야 할 것이다.
임마누엘 수도원이나 대한수도원(철원)을 세우시고 구국기도를 하신 던 어른들의 민족사랑과 통일염원이 새롭다. 후손들 모두 목회자로 사모로 대를 이어서 충성을 하는 분들이 나온 것은 감사한 일이고 나도 같은 교단의 목회자가 된 것을 반가워 하셨다. 모두 건강하게 오래 오랜 하나님과 조상들의 은혜를 보답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 기사내용은 오소운 목사, 고신대 이상규 교수, 김종희 목사가 이미 쓰신 글들을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7곡의 찬송보다 그 분은 영의 사람으로 살다 순교한 분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의 내면을 가진 분입니다. 다음 기사는 '예장뉴스'에 소개 되었고 기자이며 발행을 책임 진 목사님과 직접 통화하고 이 곳에 소개합니다. '출처' 표시 조건부로 사용을 자유로 하라 했습니다.
http://www.pck-good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61
(검색을 위해 데이타를 제공합니다.)
연못골 이야기(기획) I will miss your(추모)
한국 복음성가의 아버지 화단(火壇) 유재헌목사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승인 2015.10.15
한국 복음성가의 아버지 화단(火壇) 유재헌목사
한국선교역사상 최초로 부흥회에서 사용하는 복음성가를 만드신 고 유재헌 목사(劉載獻, 1905. 3. 21~1951 공산군에게 피납 순교)의 생애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 어른이 세상을 뜨신지는 벌써 64년이 되던 해에 저평가된 그의 자취가 역사가 이미 오소운, 이상규, 김종희 목사의 노력으로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 이번에 고 유 목사가 졸업한 경신학원이 130년을 맞는 기념행사가 창립년도가 같은 연세대학교에서 열렸다. 마침 그 행사에서 고 유 목사님이 여러동문들과 함께 모교를 빚낸 동문으로 추대하는 귀한 자리에 함께 했다. 이외에도 장한 동문에는 본 교단의 원광기 목사도 계셨고 총회장이신 채영남 목사는 설교를 하시고 총회 임원들도 참석을 하였고 서울 노회장 김창근 목사(무학교회)가 축도를 하는 등 마치 교단의 행사와도 같았다.
* 유재헌 목사 대구지역의 부흥회
이 가족들과 나의 연고는 부친(고 劉德龍 목사)이 서울장신 재학 시절에 고인이 세우신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전도사로 잠시 강단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나도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고인이 우리와 종친이기도 하지만 임마누엘 수도원은 부친에게 첫 목양의 기회를 준 곳이며 거기서 고 유 목사의 유지와 정신을 받들어 훗날 부흥사로써의 인격과 영성훈련을 도양하며 신앙의 귀한 동지들도 사귄 곳이기에 잊지 못할 곳이라고 늘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세검정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서정의 사모(30년전 소천)
부친이 임마누엘 수도원를 관리하며 주일 강단을 볼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찬송은 고 유 목사님이 지으신 복음성가을 불렀는데 찬송가 곡조에 유 목사가 작사한 가사를 붙힌 것이었다. 부친이 임마누엘 수도원에 오기전에는 이단자가 된 양도천 목사가 인도하는 "천국복음전도운동본부" 라는 요즘 말로 기독교 열심단체가 입주하여 사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훗날 양도천 목사는 기도원의 교주로 신심이 지나쳐 독신으로 자신의 성기를 거세하였다고 들었다. 훗날 이들은 계룡산으로 이주하여 종말론적인 신앙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자취가 없어졌다. 부친이 수도원을 나온 후 이 수도원은 유목사의 장남이셨던 유종건 목사(군목)이 제대로 돌보셧다.
NCCK 청년 모임을 하는 장소로도 많이 애용을 했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던 날 EYC모임을 하던 중이었다. 유종건 목사(육사교회)는 원장으로 계셨다. 부친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여러차례 시국문제는 깊이 개입하지 말라는 권면을 주시곤 했는데 듣지 않았다. 그 어른도 2012년에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이다.
이 가족과 오랜만에 해후를 하였다. 그 다리는 경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목으로 일하시고 은퇴하신 존경하는 김종희 목사님을 통해서이다. 김 목사님은 이전에 이 가족중의 한분인 유정심 사모와의 한 서신에서 “저는 순교자 유재헌 목사님이 졸업하신 경신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대신학대학과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경신학교에서 교목으로 37년 일하다가 2004년에 은퇴한 76세의 늙은 목사입니다. 은퇴 후 순교자 사무실에 자원봉사자로 한국 교회 순교자들의 기록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과 홈페이지에 넣는 등 순교자들의 순교기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유재헌 목사님의 순교기록을 다시 정리하면서 유정심 사모님의 이름을 발견하고 무척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유재헌 목사님의 이력서를 정리할 수 없었는데 오늘 유정심 사모님을 오소운 목사님을 통해서 알게 되어서 이제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쓰시고 있다.
* 유재헌 목사의 가족 좌 2번 유종건 목사, 앉은이 유목사와 사모(서정의)와 모친
그후 페이스 북을 통하여 이 가족과 연락이 되어 뵙기로 약속을 하여 이 날을 정하여 이 행사에서 해후를 하게 된 것이다. 고 유 목사님의 차남 유광웅 목사(아세안연합신학대학 교수 은퇴) 로 그의 제자들로는 장신대 임희국 교수(바젤신학부) 와 서원모 교수가 동신교회에 같이 출석한바 있다. 유광웅 목사에 대한 기억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연세대를 졸업하시고 스위스 바젤대학으로 유학을 가신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 계시다는 것만 알았지 뵐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뵙게 되었다.
* 경기도 이천에 있는 고인의 묘역
다시 김종희 목사의 글이다. “혹시 저의 고모님 김득순 전도사님을 아실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피어선 성경학원 사감으로 30년을 일하셨고 강의도 하셨습니다. 고모님은 유종건 목사님과도 교분이 있으신줄 알고 있습니다. 유종건 목사님도 피어선에서 강의를 하신줄 압니다. 정유장학회 멤버이셨습니다. 저도 정유장학회(현재 정유한양선교회) 멤버로서 과거에 유종건 목사님을 가끔 모임에서 뵈었고 임마누엘 수도원에서도 뵌일이 있습니다. 저의 고모님은 평양성경학교를 5년간 다니시면서 용인지역 13개 교회를 순회전도하셨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김종희 목사의 학창시절은 양수리의 용진교회(현재는 기장)에서 보냈고 이후 새문안교회에서 신학과 전도사 목사를 지냈는 데 경신학교 교목으로 은퇴를 하셨다.
고 유재헌 목사의 생애
해방후 한국 교회는 각처에서 회개 운동과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부흥사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이가 유재헌(劉載獻, 1905. 3. 21~1951 공산군에게 피납 순교) 목사인데 성장은 경기도 용인 김량장(金良場)했는 데 1905년 3월 21일 서울에서 유흥열(劉興烈, 1863-1945)장로의 아들로 출생했다. 유흥렬은 당시 선교사와 동사하던 초기 전도자이자 조사였다.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심리에서 출생한 유흥렬장로는 원두우(H. G. Underwood)의 전도로 1894년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등과 함께 광주, 용인, 안성, 평택 등 경성지방 순회전도자로 활동했다. 후에는 제중교회, 곧 현재의 서울 남대문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후 뒷줄 왼쪽 유흥렬 장로와 유재헌 목사, 유종웅 목사, 하단 서정의 사모와 유명애 조모
유흥렬은 순회전도를 통해 1902년에는 피득선교사와 함께 광주군 고산리교회를, 1903년에는 광주군 송파교회를, 1904년에는 피득선교사, 손흥집과 함께 전도한 결과로 광주군 소재 심곡교회, 세곡교회, 둔전교회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는 광주군의 고령교회, 용인군의 금양, 원촌교회를 순회 시무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재헌은 아버지가 순회전도자로 활동하던 때에 출생했다. 후에 아버지 유흥렬은 용인군, 대갈리교회에서 시무하기도 했고(1909), 1919년에는 장로가 되었는데, 50여년 간 무급 전도자로 혹은 장로로 봉사하시고 1945년 8월 17일 8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처럼 전도자의 아들로 출생한 유재헌은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1921년 경신고등학교를 거쳐 피어선성서학원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1924년 일성회(一成會)를 조직하고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아리실(牙利室)교회의 서정의양과 결혼하였다.
일본에서의 학업과 전도활동
결혼 이듬해 유재헌은 일본으로 건너 가 고베(神戶)성서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1928년에는 재일 조선인교회 다하라마찌(田原町)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1930년 이 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동경의 미가와시마(三河島)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1931년 12월 25일 일본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고베, 요꼬하마, 동경 등지에서 전도하며 부흥사로 활동했는데, 교포들에게 애국사상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잡혀 고베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가, 조선으로 추방된 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을 맞았다.
1944년 12월, 그는 고향 아리실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였는데, 설교 도중 우렁찬 바리톤으로 자작 「복음성가」를 부르는데, 어찌나 은혜스러운지 그 전율적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의 복음성가에 매료된 나는, 장차 그분과 같은 찬송가 작가가 되리라 다짐해 오늘에 이르렀다. 기독교 독립교회를 설립하였고 부흥사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교포들에게 애국사상을 전파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피검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그는 이국의 하늘아래서 힘겹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의 현장에서 오직 복음만이 유일한 위로라고 생각하였고, 나라 잃은 조선인의 아픔을 경험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신앙과 고백, 그가 일본에 영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귀국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조선인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에서 추방명령을 받고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1942년의 귀국했으나 요시찰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 기간 중 마산문창교회 집회를 인도하는 등 제한된 활동을 했고, <선한 목자>(1941. 겨울, 마산), <믿고 나가면 승리한다>, 일제 치하에서 고난의 길을 가던 조국에 주어진 해방은 자유와 기쁨과 감사의 시간을 보낸다. 이후 해방이 되자 그는 그 감격을 한편의 노래를 냈다. 그것이 경기도 용인에서 8월 15일 날 쓴 5절로 구성된 <애국의 노래>였다. 해방은 그에게도 새로운 시작이었다.
해방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자 유재헌목사는 부흥사로 활동하는 한편 선친 유흥렬장로가 시무하였던 용인교회를 계승하여 시무하셨다. 일본에 체재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민족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살았던 그는 집회를 인도하면서 구국기도단을 모집하였는데, 이 연유로 1945년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군탄리에 ‘대한수도원’을 설립했다. 그
는 엘리아의 제단처럼 우상을 불태우는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희구하면서 수도원을 화단(火壇), 곧 불의 재단이라 했고, 이것이 그의 아호가 되었다. 그가 작시한 찬송에는 자신의 이름 대신 ‘火壇’이라고 적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가 설립한 ‘대한수도원’이 한국에서의 기도원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그는 전국 각지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면서 많은 성가를 작사했다.
수도원 설립과 함께 작시한 것으로 보이는 <기도를 하자>(1945. 12), 그리고 1946년 1월에 쓴, <성신이 오시었네>, <성신이여 오시옵소서>, <도고찬송> 등은 수도원집회 때 부르기 위한 노래였다. 그의 대부분의 성가들은 1946-1948년 사이에 씌여졌다. 철원군에 수도원을 설립했으나 이곳이 이북지역이고 38선이 고정화되어 감에 따라 남한과의 왕래가 어려워지자 1950년 5월에는 서울 삼각산에 임마누엘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두 달이 못되어 6.25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참화는 그가 무릉도원이라 노래했던 금수강산을 피로 물들게 했다. 거리에 스치는 전쟁의 상흔을 보면서 성도들을 격려했고, 미처 남으로 피난가지 못해 기도원에서 안식을 구한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으로 위로했다. <도고자의 사명>도 이때 쓴 찬송으로 피신해 온 성도들과 끊임없이 불렀던 찬송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이들이 남으로 남으로 피난 길에 올랐으나 유재헌목사는 피난을 거부했다. 해방된 지 불과 5년, 동족상쟁의 아픔은 또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질곡을 보면서 그는 민족의 아픔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께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임마누엘수도원을 지키며 기도하시며 시련의 날을 지내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제자 중 한 사람의 밀고로 공산도배는 기도원까지 급습하였고, 강단에서 기도하시던 유재헌목사와 그 가족은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전쟁이 일어난 지 50일 째가 되던 1950년 8월 15일이었다. 가족들은 구사일생으로 풀러났으나 유목사는 납북되었고, 그 이후 생사를 알 길이 없다. 그가 납북 되던 당시 46세였다. 유재헌목사는 납북되었지만 곧 순교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기꺼이 순교의 재물이 되고자 했고, 그가 신앙을 버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피랍된 그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그가 노래했던 것처럼, “내 몸 주께 드리고,” 순교의 길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살을 찢어가라. 거룩한 피 흘리어 주의 흔적 지고 가서 주님 얼굴 뵈련다.” 이 고백은 유재헌목사가 노래했던 순교자의 기도였다. 그가 남긴 110여편의 복음성가는 지금도 한국인의 심정을 주께로 향하게 했던 신앙과 고백의 찬송이었다.
등사판으로 긁어 인쇄한 그의 「복음성가」 책에는 그가 찬송가 가락에 맞춰 지은 주옥같은 성가들이 114편이나 실려 있었다. 매 편마다 끝에 작사 연월과 장소를 적어 놓았는데, 맨 처음 작사는 1939년 봄 일본의「시오야」학사(鹽屋學舍)에서 작사한 것이다.「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곡조에 맞춘 이 찬송은,「내 신랑 예수여」란 제목의 5절 가사인데, 작사 동기가 애절하다.
예수 나를 위하여(개사된 복음성가)
1. 목마른 사슴이가 물을 찾음 같이 갈급한 내 심령은 예수 찾았다네.
후렴/ 예수여 예수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2.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해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네.
3. 예수 밖에 이 몸을 동정할 자 없고 예수 밖에 이 몸은 믿을 자도 없네.
4. 예수여 내 다리로 방문해 줍시고 예수여 내 입으로 말씀 전합소서.
5. 칠보단장한 처녀 때를 바람 같이 속죄 성결한 나도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
6.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만 피네.
7. 예수 죽음 내 죽음 그 부활도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숭천 그 천당도 내 것.
-火壇 作. 1941年 3月 神戶 경찰서 유치장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복음성가 가사에 대하여>
유재헌 목사는 복음성가 매 장마다 그의 아호인, 엘리야의「불제단」인「火壇」을 써서「火壇 作」이라 쓰고, 작사 연월과 장소를 적어 놓았는데, 39장의「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에는「1941年 冬 馬山에서」라고 적어놓고,「火壇 꾸밈」이라고 표기하여 당신의 원작이 아님을 밝혀놓았다. 유재헌 목사의 이 복음 성가들은 해방 직후부터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 각 교회에서 애창되었다. 그의 마지막 찬송은, 공산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던 때인, 1950년 7월 11일에 작사한 「순교자의 깃발」이란 찬송이다.
유재헌 목사의 수도원 운동
해방 후,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수도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도 있었지만 수도원을 이끌던 '남성' 목회자들이 떠나간 뒤 수도원은 폐쇄 위기에 처했다. 수도원장으로 있던 유재헌 목사는 전쟁 중 납북되었고, 박경룡 목사와 이성해 집사는 목회를 위해 외지로 떠났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전진 전도사는 기도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수도원을 지켰다. 유재헌 목사의 부탁을 받고 수도원 헌금을 전하기 위해 철원에 왔다가 수도원 살림을 맡아 물러앉게 된 것이다.
이후 대한수도원은 '전 진 원장 시대' 접어들었고, 그가 1996년 별세하기까지 규모나 내용에서 괄목할 성장을 이룩하였다. *전진 원장은 한국의 최초 목사가 되신 감리교 전밀라 목사의 언니였고 유광웅 목사의 사모가 그 분의 따님이시다.
유흥렬은 1863년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삼리에서 출생하여 삼십세의 나이에 언더우드(한국최초 개신교선교사 H, G. Underwood)의 전도를 받아 세례를 받은 후 상투를 자르고 구습을 타파하면서 개화운동과 복음전도에 앞장서게 된다. 문중으로부터 버림받고 멸시와 천대를 당했으나 그의 가슴에 붙은 복음의 불을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그는 언더우드와 동역자가 되어 제중교회(현 남대문 장로교회)의 조사(助師)로서 사역하면서 용인, 광주, 평택 등지에 소속 세워진 교회들의 순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당시 제중병운(현세부란스병원)의 간호사인 김인대와 결혼한다. 1905년 용인 김양교회의 조사로 시무하다가 1919년 장로가 되어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은지 이틀후인 聖役 50년을 마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었다.
유재현목사가 주도한 6.10 만세 운동
순교자 화단 유재헌목사는 그의 부친이 제중교회(현 남대문교회)에서 조사로 시무하고 있던 1904년 3월 21일에 태어나서 독자로 성장하였다. 경신학교(언더우드설립)를 거쳐 피어선성경학교를 다니던 중 1926년 6.10만세 시위에 가담하였고 그후 피어선성경학교의 지하에서 배재고보의 김동지 문창모 손영엽 염필주 차진호 김조영 차규섭 협성학교의 초영식 손병석 YMCA의 김동석 등과 재차 만세운동을 위해 모의한다. 그후 피어서 학원은 평택으로 이주하여 평택대학교가 되었는데 이러한 고 유재헌 목사의 역사를 기리는 조형물을 세웠다고 들었다.
6월 16일에는 거리에 뿌릴 독립문서를 등사하던 중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6월 30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 나왔다. 그후 그는 경기도 용인의 동아일보 지국에서 기자로서 일하면서 갑성회라는 민족계몽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일경의 감시와 핍박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새로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게 아니라 차라리 적의 진지 한가운데 들어가 활동하는게 좋겠다.” 그해 그는 우국동지 셋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에 이른다. 주로 구두수선을 하면서 고베(神戶-신호)의 관서성서신학교를 마치고 1931년 12월 25일 도꾜의 미가와지마(三河島)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맏게 된다. 그후 도꾜, 고베, 요꼬하마, 아까시 등지에 “조선기독교독립교회”를 세웠고 노방전도에 힘을 쓰던중 수차 투옥 감금되어 고난을 당하였다.
해방과 유재헌 목사의 구국기도단 설립
해방이 되자 유재헌목사는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40일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영력을 회복한다. 그리고는 부흥사로서 전국을 순회하면서 수없이 부흥집회를 가졌다.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대한민국은 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과 분렬 상태에 빠져있었다. 유재헌목사는 나라를 살릴 길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 밖에 없다는 확신속에 기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 기도단”을 세우게 된다. 1945년 8월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고석정에 “대한수도원”을 세워 원장으로 봉사하던 중 철원이 이북으로 편입되므로써, 1950년 다시 서울 삼각산에 “임마누엘 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그는 “구국기도단 선언문”에서 당시 한국사회와 교회가 처한 위기를 목전에 두고 이렇게 외치며 호소하였다.
구국선언문 전문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고 남녀노유를 물로하고 사천리 방방곡곡의 숨은 용사들을 규하하여 한국의 한 제단을 쌓고 한 목적으로 한 몸 한뜻이 되어 조극의 운명을 책임지고 각자 있는 곳에서 기도의 봉화를 들고자 한다. 우리는 사람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움직이자. 전도운동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기도운동을 일으키자. 이것이 순서이요 진리이다. 먼저 기도하고 다음 회개하고 다음 성신 받고 다음 나가 외치고 다음 건극하자. 기도 없는 인간의 일체의 운동은 실패에 돌아감을 우리는 목도한다. 애국혼의 불타는 신자들아! 한 제물이 되자! 한줄기의 기도의 향불이 되자! 우리의 기도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가 이 강산에 나타나 석룡사타은 몰려 나가고 자주독립과 아울러 삼천만 겨레는 구원 받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고 선언한다”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고 남녀노유를 물로하고 삼천리 방방곡곡의 숨은 용사들을 규합하여 한국의 한 제단을 쌓고 한 목적으로 한 몸 한뜻이 되어 조국의 운명을 책임지고 각자 이쓴 곳에서 기도의 봉화를 들고자 한다.
유재헌 목사는 “대한 임마누엘 수도원”이 “영계의 발전소”이며 “은혜의 수원지”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제단의 불은 결코 꺼치지 마라!”는 구호 아래 불철주야 기도의 향불을 올렸다. 순회 전도대를 두어 부흥회, 전도회, 노방전도를 하도록 하였다. 교역자나 평신도들이 영력이 쇠하여 질 때 언제고 와서 수양하며 힘을 얻기를 바랬다. 그는 이러한 구국과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구체적이고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한국에서 최초의 개신교 수도원(修禱園)을 세워 그후 한국의 모든 기도원 운동의 원조요 모본을 보여주었다.
그후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사경회 중심에서 개인의 회심을 위한 심령부흥까지는 이해가 가나 교회건축과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돈을 거두는 일에 부흥회가 이용되기 시작한다.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강단이 코메디장이 되고 금이빨을 만드느니 입학이나 혼인, 정초 축복성회등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남발되거나 세속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럴 때에 고인의 구국기도와 같은 나라사랑의 거시적인 부흥운동이 아쉽다고 하겠다. 그 뒤를 고 고영근 목사님이 "하나님 사랑, 민족사랑, 교회사랑"으로 주창하시던 것을 통하여 그 정신의 맥이 약간은 이어졌지만 지금은 끊겼다고 볼 수 있다.
6.25 한국전쟁과 순교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각산 임마누엘 수도원이 개원된지 두달이 채 되기도 전에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고 만다. 6.25전에 이미 이북에서 수만은 성도들이 월남하여 유재헌 목사의 지회에 참석하고자 삼각산에 운집해 있었다. 유재헌목사는 그를 찾아온 이 피난민들과 계속 집회를 가지면서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그가 오랫동안 그처럼 소망하며 각오해 두었던 그 순교의 때가 드디어 임했음을 믿고 이제 그 죽음을 달게 감당하기를 선택했던 것 같다. 6.25발발 두주후인 7월 9일 그는 이렇게 노래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남으로 미쳐 피란을 못간 많은 성도들이 삼각산으로 몰려와 유재헌 목사의 집회에 합세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엘리야의 제단과도 같이 기도의 향불을 보다 뜨겁게 타 올랐다. 그러나 8월 15일 정치보위부원들의 급습을 받게 된다. 어린 아이들과 늙은 부인들만 제외되고 유재헌목사를 선두로 모든 성도들이 체포되어 정치보위부가 감옥으로 사용하던 국립도서관의 지하실에 감금되었다. 그후 부녀자들과 대부분의 성도들은 풀려나왔으나 유재헌목사는 그곳에서 계속해서 수사를 받고 고문을 받았다. 그는 9월 28일 수복전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어 가던 중 탈진하고 지쳐 쓰러지자 총살당하고 만 것으로 추축된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114편에 달하는 주옥같은 복음성가들은 오늘날엗에 많은 노년층 신도들의 심금에 메아리치고 있으며, 우연 이들 복음성가에 접하게 된 성도들의 영혼에 깊이 새겨져 영적인 활력을 불러 일으켜 주고 있다. 오소운 목사는 그의 영향을 받아 신학과 음악을 전공하고 많은 복음성가를 지었다고 증언했다. 오늘날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CCM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린 교회들이 교회사적으로 인정받고 공인돈 찬송가를 멀리하고 유행가 부르듯하는 음악사역은 비판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감성에 호소하는 신앙은 다시 정적으로 내재되고 스며드려야 하는 데 악기나 사용하고 흥을 돋우는 식의 인위적이고 연출된 예배에 대하여는 할말이 많다.
유재헌 목사의 후손들
* 좌로부터 손녀 사위 목사와 유명현 사모, 유광웅 박사(ACT은퇴교수) 중앙 외손자 이상민 목사, 앞줄 맨우측 유정심 사모와 남편 목사(꽃을 든이)
장녀는 합동측 전 총회장인 대구 서문교회의 이성헌 원로 목사의 사모이다. 장남 이상민 목사는 부친의 뒤를 이어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중이다. 장남은 고 유종건 목사로 군목으로 제대를 하시여 수송교회와 임마누엘 수도원 원장으로 계시다가 자녀들과 함께 미국에 이주하셨는데 2012년에 소천하셨다.
유종건 목사 장녀 유영안도 장신대 학부를 다녔다. 차남 유광웅 박사는 연세대와 스위스 바젤신학부를 졸업하고 아세아연합신대학에서 교수를 계시다가 은퇴를 하셨다. 삼남 유종웅은 먼져 세상을 떠났고 차녀 유정심은 숭실대를 나오고 대구에서서 남편을 내조하면 목회하다가 현재는 은퇴하여 김포의 뉴 사운드교회를 시무하는 복음성가 가사 출신의 천관웅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하고 계신다.
*우측부터 고 유목사의 장녀, 차녀 유정심 사모, 차남 유광웅 박사 필자
이번에 이 가족들과 만나고 고인에 대하여 작은 자취를 남기게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과 모두에게 감사한다. 선친은 고 유재헌 목사의 정신적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부흥사가 되셨다. 이렇게 자신이 처음 사랑을 받은 곳으로 가르치셨는데 고마운 가족들을 뵙고 인사를 드리고 김종희 목사님도 뵙고 왔다. 민족이 어려울때 일사각오를 신앙을 지킨 선친들의 그 신앙이 새롭게 기억 되어야 할 것이다.
임마누엘 수도원이나 대한수도원(철원)을 세우시고 구국기도를 하신 던 어른들의 민족사랑과 통일염원이 새롭다. 후손들 모두 목회자로 사모로 대를 이어서 충성을 하는 분들이 나온 것은 감사한 일이고 나도 같은 교단의 목회자가 된 것을 반가워 하셨다. 모두 건강하게 오래 오랜 하나님과 조상들의 은혜를 보답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 기사내용은 오소운 목사, 고신대 이상규 교수, 김종희 목사가 이미 쓰신 글들을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