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에 대한 이의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에 문제가 있습니다. 새 관점의 접근을 통하여 신율법주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PAUL 2016-07-22 16:06:55 | 조회: 2136
아래의 소논문(article)은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reserved justification)에 관한 인터뷰를 보고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내용의 글로, 주위의 목사님들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 것입니다.
[질문] K 교수의 “유보적 칭의”(RESERVED JUSTIFICATION)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필자는 본래 K 교수를 한국이 낳은 바울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자랑으로 여겨왔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명성을 생각하여 그의 신학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분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는 더욱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그분을 바라보는 시선과 신학자로서 그분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이 특히 실천신학적인 신자들의 거룩한 신앙생활이라면, 신학자들은 윤리적인 면에 앞서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진리를 파수해야 할 사명감으로 교리에 신경을 쓴다는 점인데, 그래서인지 이번에 K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이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 칭의 (JUSTIFICATION)
K 교수의 인터뷰를 보면, “제1의 칭의”(primary justification: 이것은 필자가 붙인 용어로 처음에 받은 칭의를 의미함), 즉 처음에 “믿음으로 얻은 칭의”로 “첫 열매”에서 종말론적 “제2의 칭의”(secondary justification)로, 종말에 거둘 “수확”, 즉 “행위를 통하여 완성될 칭의”(구원의 완성)에로 진행되는 것으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우리가 거듭나서 중생한 후, 구원의 서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우리의 신앙 인격이 성장한다는 “성화”(sanctification)와 혼동하여 “칭의”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K 교수가 말로는 처음에 “믿음으로 받은 칭의”도 완전한 것으로 “첫 열매”라고 하며 이것은 “종말에 받을 칭의”에 대한 “예약”으로 아직은 “유보된 칭의”(reserved justification)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 “유보적인 칭의”라는 말도 개혁신학의 전문용어로는 적절치 않은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구태여 비교하자면 구원이란 아직 미결정 상태로 인간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와 유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될 때까지는 구원의 결정이 유보상태에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의미에서 K 교수의 주장은 세미-알미니안주의(semi-Arminian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세미-칼빈주의(semi-Calvinism)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면 칼빈주의로 말하다가 다른 면에서 그것을 수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칭의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전시적(全時的) 구도(frame)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라며, 처음과 종말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의도는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칭의”의 정확한, 고유의 개념을 무시하고 “첫 번의 칭의”와 “종말의 칭의” 사이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유보적 칭의”(reserved justification)라고 표현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논리입니다. "칭의“의 즉각 성을 차치하고 백번 양보해서 “칭의”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씨앗”과 “열매”의 동질성을 인정한다고 가정하더라도, K 교수의 이론에, 첫 번째 “칭의”를 받아 “의인”이 된 사람이 종말에 “의의 열매” 즉 “의인의 삶”(의로운 행위)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타락과 멸망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는 견해는 전혀 칼빈주의나 성경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이라면 생명이 있는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진정한 칭의로 의인이 되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씨앗과 열매가 본질상 동질(homogeneity)이 아니라면 이것이야 말로 큰 문제가 됩니다. 씨앗 혹은 첫 열매로 표현된 “칭의”가 종말론적 의의 열매인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비성경적이며 비 진리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고 했습니다. 이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으로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에 심은 종류와 꼭 같은 종류의 열매를 거둔다는 뜻이고(갈 6:7; 마 7:16), 또 하나는 심은 양 그만큼 거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라고 한 말씀입니다.
위에서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은 처음에 심은 종류와 꼭 같은 종류의 열매를 거둔다는 뜻으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는 뜻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라는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는 심은 그대로 거둔다는 뜻으로, 처음에 심은 것과 나중에 거두는 것이 꼭 같이 일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옛날 우리나라의 속담과 같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 같습니다.
만일 처음의 얻은 칭의(구원)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행위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면, 처음에 얻은 칭의 자체가 참 칭의(true justification)가 아니라 거짓 칭의(false justification)일 뿐입니다. 이 거짓 칭의를 얻은 사람은 물론 탈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 칭의를 얻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이 보장되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칭의”를 얻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의 열매를 맺어야만 구원을 받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는 논리는 비 성서적입니다. 칭의는 구원이 보장된 것이고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얼마간이라도 의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할 수 있으나, 반대로 의의 열매를 맺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구원의 동기와 보장이 되지만, 인간의 행위는 구원의 동기나 보장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강도는 십자가상에서 의의 열매를 맺을 기회도 없이 죽었지만,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말하면, 구원이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영생(유업의 상)을 의미한다면(롬 1:17), 상급이란 성도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의의 열매를 맺는 정도에 따라 얻는 상(보상의 상)을 의미합니다. 디지털 방식으로 말하면, 이 두 가지 상은 부활의 차원으로 승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칭의는 성화로 이어지며, 성화는 상급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반드시 성화의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상급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마치 반예정론자들이 예정론을 공격하는 방식과 같이, 인간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구원 파 모양으로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참된 칭의를 받은 사람은 그 마음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더욱 열정을 내게 되어있습니다. 그의 속에 성령이 거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거나 의를 위한 생활과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한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며, 오히려 성령의 강권하심에 따라서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 더욱 열심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렘 20:9).
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선을 행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이것을 가리켜 믿음이란 사람의 일(행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행위)이라고 했습니다(요 6:29). 만일, 칭의를 받고도 삶의 행위에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게으른 생활로 아무런 “의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진정한 칭의를 받지 못한 사람으로 칭의를 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은 육욕에 의하여 유혹을 받고 죄(자범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루터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멸망이란 이 자범죄(peccatum actuale)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죄(peccatum originale)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죄관과 구원관입니다. 사실, 인간이 멸망하는 것은 원죄 때문입니다. 이 원죄를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해결해주셨고, 이 공로를 힘입은 사람들은 즉시 단번에 그리고 완벽하게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는 선언을 받게 되어 일차적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구원과 심판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그 자체가 완전한 것입니다 (요 3:18).
그러나 칭의(קךצ, δικαιοσῦνη)는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현재 선언하시는 즉시 완전한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루터는 “칭의는 우리가 성취할 수 있다거나 공로로 이룩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적인 성취를 미리 보시고서 수여해주시는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칭의는 즉각적이며 단회적인 것으로 현재 진행형의 “과정”(process)이 아니며, 또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에 속한 “선언”입니다.
이 후로 우리는 원죄의 차원에서는 죄인이 아닌 당당한 ‘의인’이 되어 구원이 보장되며, 그 보증으로 성령의 인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중생하여 의인이 된 후에도 육신의 소욕에 의하여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개혁자들 중에는 “의인인 죄인”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도 중생하여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하며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될 죄와의 전쟁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죄는 원죄가 아니라 자범죄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된 원죄가 다시 살아날 이유는 없으며, 우리가 종말까지 범하게 되는 죄는 자범죄로 이 죄를 가리켜 사도 요한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요일 5:17)라고 해서 회개가 가능한 죄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미 받은 원죄의 사함이 취소되고, 원죄의 차원에서 다시 죄인이 된다면 반복해서 회개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 때마다 매번 십자가에 죽으셔야 될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원죄를 위하여 단번에 죽으셨다는 말씀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번 회개해야 할 죄는 원죄가 아니라 자범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얻은 칭의에 의하여, 멸망하여 지옥으로 떨어질 염려가 없는 이유는 다시는 원죄와 같은 죄를 범할 염려가 없기 때문인데, 그 이유인즉 우리는 하나님의 씨로 낳았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9; 5:18).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의 확고부동한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러면 칭의 된 이후에 범하는 자범죄는 어찌되는 것입니까? 물론, 이 자범죄로 멸망하여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 따를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보응"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징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이 죄(자범죄)를 범했을 경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아들이라면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며 만일 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사생자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6~13).
물론 이 자범죄가 원죄에 연결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서 불신자와 같이 본래부터 원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의 자범죄로 지옥에 가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게 되는데, 불신자들의 자범죄는 원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원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신자들의 자범죄는 죄의 뿌리인 원죄가 죽은 상태이고, 불신자들의 자범죄는 아직도 죄의 뿌리인 원죄가 살아서 자범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바울이 원가지인 유대인과 이방인이 참 감람나무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는 구원의 도리를 확대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원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영어로 “유보”(reservation)라는 말이 “예약”(reservation)으로 사용되는 것도 모르느냐고 반문하고 있으나, 사실 “유보”라는 말과 “예약,” 더 나가서 “예정”이라는 말과 사이의 의미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또는 “예정”이라는 말은 결정적인 것으로 나중에도 변개치 않는 것을 의미하며, “유보”라는 말은 예약은 되어 있으나 상황에 따라서 나중에라도 취소되거나 또는 변경될 수도 있다는 개연성(probability)을 전제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인지 K 교수는 아무리 칭의를 받았다 하더라도 나중에 그 칭의에 합당한 의의 열매, 즉 믿음에 합당한 삶(행위)을 살지 아니하면 타락해서 칭의가 취소되고 멸망으로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는 바울의 칭의와 중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설명을 잘 못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K 교수가 사용하고 있는 “칭의는 유보된 것”이라는 표현은 잘 못된 표현입니다. 물론 종말론적인 전문용어인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는 구도(frame)를 칭의론에 적용하는 것부터가 무리입니다. 나중에 좀 더 소상하게 논할 수 있겠지만 정통적인 칼빈주의 개혁신학에서는 “칭의”를 “성화”와 구별하여 죄인에 대한 무죄선고로 법정용어를 채용한 것입니다. 칭의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외부적으로 신분회복을 객관적으로 선언해주신 것인 반면에, 성화는 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주관적인 신앙 인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칭의와 중생은 한 번의 선언으로 완성되지만 성화는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나가다가 우리가 죽어야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K 교수는 “칭의”는 우리가 이미 받았지만(already), 아직도(not yet) 진행 중인 것으로 종말에 가서야 의의 열매로 완성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의의 열매에 따라 첫번에 받은 칭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각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바로 첫 번째 칭의(첫 열매)는 받았으나,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고, 종말에 가서 의의 열매를 맺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주장으로, 결국 첫 열매로서의 칭의는 그 후의 행위여하에 따라 취소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위험성입니다. 이는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이해한 것으로 개혁주의의 칭의에 대한 개념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칭의 개념은 단회적인 것이며, 선포되는 순간 완전한 것으로 거기에 무엇(행위)을 가감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성화와 같이 어떠한 “과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중생의 성격과 같이 한 번의 단회적인 하나님의 “무죄선언”인 동시에 “의롭다”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죄인에 대한 “완벽한 신분회복”을 의미합니다. 중생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하신 하나님께서 한 번 결정하신 이 선언은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좀 잘 못했다고 해서 주셨다가 다시 빼앗는 분이 아니십니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아들이 좀 잘 못했다고 해서 호적에서 파버리거나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혹시 여인이 자기의 젖 먹는 아이를 잊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손바닥에 새겨서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49:16~17). 이는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일반적인 원리로 말하자면, 사람들도 아무런 조건이 없이 호의(은혜)로 준 선물을, 받은 사람이 좀 잘못했다고 해서 다시 내놓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조건 없이 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고(롬 5:8),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으로(롬 5:9), 조건 없이 받은 은혜로운 선물이기 때문에, 다시 행위를 조건으로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도 맞지 않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미 칭의를 받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여하에 따라 취소 될 수도 있다는 견해가 바로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제가 알기에 K 교수는 지금까지 칼빈주의 신학자로 알고 있었는데, 만일 이와 같은 주장을 한다면, 그의 주장은 곧 세미-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 즉 세미-알미니안주의(semi-Arminianism)거나 수정된 칼빈주의(modified Calvinism)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칭의”의 포괄성을 망각한 처사로 칭의를 받은 사람은 개인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자력으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기 때문에 칭의 자체가 완벽한 것입니다. 칭의는 아날로그 방식을 넘어 디지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의의 열매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신자들의 성화는 이 세상에서는 완성되지 않으며, 행위의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었느냐가 아니라 (1) 다른 종류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마 7:16)과 그리고 (2) 의의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한 경우(마 21:19; 25:24~30)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칭의를 받고도 전혀 의의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했다면 그는 진정한 칭의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칭의를 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으로, 이러한 예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마 7:22; 25:44; 계 22:15).
다시 말하자면 구원받은 줄 알았다가 쫓겨나는 신세들이지요(마 7:15~23). 그런데 K 교수는 우리가 모두 주님의 재림 때 하나님의 심판석(최후심판) 앞에 서서 각각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의인으로 최종적인 판결을 받아야 하고 거기에서 악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증명이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롬 14:10; 고후 5:10),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두 구절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 8:1), “그러므로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K 교수는 칭의를 받은 신자들도 최종심판석에서 심판을 받고 행위여하에 따라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위에 제시된 성경말씀(롬 14:10; 고후 5:10)은 칭의를 받은 신자들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법인 행위언약에 따라, 칭의를 받은 신자들도 심판대에서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심문)은 받으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심판받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문은 “심판을 받다”가 아니라 “심문을 받다”(마 12:36)로 그 의미는 “평가해서 되돌려 받다”, 혹은 “보상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아포도수신 페리 아우투 로곤 엔 헤멜라 크리시우스”(have to give an account)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경건치 않은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단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속죄해주시고 칭의를 선언해주셨기 때문에, 다시는 정죄할 일은 없고, 단지 그들의 행위에 따라 행한 대로 상급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불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이미 정죄된 사람들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행위에 따라 형벌이 결정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요 3:18).
2, 칭의와 신앙행위 (JUSTIFICATION AND WORKS)
성경은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은혜로 단번에 주신 칭의을 받았거나 중생함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의에 합당한 행위나 믿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버림을 받거나 멸망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회개와 보응이 따르는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같이 궁극적으로 돌이켜 회복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K 교수는 칭의가 완전하다고 하면서도 또 계속해서 성화의 과정을 거쳐 의의 열매를 맺어야 처음에 “예약된 칭의”가 종말에 가서 완성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성화의 과정을 거칠 기회조차 없어 의의 열매를 맺기도 전에 구원을 받고 주님의 십자가 옆에서 낙원에 들어간 강도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칭의는 “예약된 것”으로 종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와 상관없이 즉석에서 의롭다고 해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이며 결정적인 “선언”입니다(롬 4:5; 5:6).
이 무죄선고와 칭의의 선언은 법정용어로 하나님께서 하신 “하나님의 법적 선언”이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칭의는 “과정”(process)이 아닙니다. 칭의는 중생과 같이 단번에 한 번만 주시는 완벽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엡 2:8). 칭의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인간은 완전한 칭의를 받든지 아니면 칭의를 받지 못하든지 하는 것으로 “유보”와 같은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취소”되거나 또 다시 “재 선언”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거나 인간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513). 물론 신자의 윤리적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그 행위를 궁극적인 구원에 결부시키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K 교수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을 들어 처음에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도 그의 행위(의의 열매)에 따라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지 않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 즉 사단의 사주를 받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 “육신의 열매”(갈 5:19-21), 악의 열매를 맺으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강력히 경고합니다(갈 5:22). 고전 10장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예를 들며 경고하기도 합니다(고전 10:9-12). 곳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 받을 것을 상기시키며(예: 롬 14:10; 고후 5:10; 살전 3:12-13), (오늘 일부 한국의 신자들같이)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자랑하며 구원을 이미 다 받은 양 경거망동하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이 헛되이 믿을 수 있음(고전 15: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음(고후 6:1), “넘어질 수 있음”(고전 10:12) 을 경고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라”(빌 2:12)는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위의 주장에 대해서 몇 가지만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고 사단의 사주를 받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 “육신의 열매”(갈 5:19-21), 악의 열매를 맺으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칭의를 받은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살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보면, 칭의를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님만 따라다니던 베드로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로, 중생의 성령을 받지 못한, 즉 칭의를 받지 못하고 성령의 은사만 받은 사람들, 말하자면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신학적으로 이들을 주의 사역을 위한 외적 부르심, external calling만 받은 사람들이라고 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 7:21~23; 히 6:4; 10:26). 둘째로,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사람(외적 부르심은 물론 내적 부르심, inner calling을 받아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도 일시적으로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경우인데, 물론 전자(칭의를 받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는 성령의 열매가 아닌 악의 열매를 맺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마 7:21~23, 예를 들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 그러나 후자의 경우와 같이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사람은 일시적으로 죄(자범죄)를 범할 수 있어도 궁극에 가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된다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다윗과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
다음으로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 경고하기도 합니다 (고전 10:9-12)”라고 했는데 (갈5:22), 이 경우는 그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육에 속한 “제1세대”(the first generation)의 경우를 들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하시는 말씀으로, 바울의 언어방식으로 보면, 여기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제1세대”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고, 다음 세대인 “제2세대”(the second generation)는 영에 속한 사람들로 가나안(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이 두 경우 중에 하나님을 시험하던 “제1세대”(본래부터 육에 속한 사람들로 칭의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형)의 멸망을 들어 말세를 만난 우리들에게 경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제2세대”(광야에서 새로 출생한, 영에 속한 사람들로 칭의를 받은 사람들의 모형)들과 같이, 칭의를 받은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결국에는 감당하게 하셔서 구원을 보장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다음 구절(고전 10: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단어나 한 구절만 똑 떼어서 성경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문맥과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사람들은 그 보증으로 성령의 인을 쳐서 최종적인 구원을 보장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라는 이 말씀은 중생과 칭의를 받은 사람들은 사탄에게 넘어지는 것 같으나 아주 넘어지지 않아 궁극적으로 타락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넘어지나 실족하기까지 아니하며(롬 11:11), 칭의를 받은 의인은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고 했고, 악인은 엎드러진다(잠 24:14)고 했습니다.
“(오늘 일부 한국의 신자들같이)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자랑하며 구원을 이미 다 받은 양 경거망동하는 고린도 인들에게 그들이 ‘헛되이 믿을 수 있음’(고전 15: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음’(고후 6:1),’ ‘넘어질 수 있음’(고전 10:12)을 경고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라고 촉구합니다(빌 2:12).” 이 부분에서 K 교수는 한국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과 같이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나 헛되이 믿고, 은혜를 헛되이 받고, 넘어질 수 있으니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하라'는 성경구절들을 통하여 의로운 행위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의 개념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혼동하기 쉽고, 오해하기 쉬운 것들 중에 은혜와 은사의 개념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은혜와 은사를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구별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은혜’(grace)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의미하고, ‘은사’(gifts)는 일반적으로 ‘사역을 위한 성령의 은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the grace of God)가 바로 ‘중생’(regeneration)과 ‘칭의’(justification)라면, 사역을 위한 성령의 ‘은사’는 곧 능력을 행하는 여러 가지 ‘은사들’(charismata)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성령을, 사역(the works of the Spirit) 별로 나누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같은 성령인데, 신학적으로 중생케 하시는 성령(regenerating Spirit), 성화시키는 성령(sanctifying Spirit), 그리고 능력(은사)을 주시는 성령(empowering Spirit)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중생(칭의)과 성화의 차이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아 많은 능력을 행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마 7:21~23), 오직 중생, 칭의와 같은 하나님(성령)의 은혜를 받아 거듭남(중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구원을 받으며, 중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번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일단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은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 칭의를 받은 사람은 잠시 실족할 수는 있어도 아주 타락하지 않으며 반드시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씨로 낳았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9; 5:18). K 교수가 제시한 위에 구절들을 다시 주석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헛되이 믿을 수 있음’(고전 15:2)이라는 말씀은,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말씀으로, 반드시 최종적인 구원을 상실할 수 있을 만큼 헛되이 믿을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바울이 전한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않았다면, 즉 올바로 믿고 있다면 분명히 구원을 얻으리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굳게 붙잡고(현재형) 헛되이 믿지 않고 올바로 믿고 있었다면(현재완료), 구원을 얻는다(현재형)’라는 뜻입니다. 이는 오히려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전한 부활의 복음을 제대로 믿고 있다면 구원을 얻는다는 뜻으로, 그 당시 부활이 없다고 하는 무리들을 의식하고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12). 만일 이런 자들과 같이 거짓 사도들이 전해주는 헛된 복음을 믿지 않고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참된 부활의 복음을 믿고 있는 이상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2)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음’(고후 6:1)이라는 말씀은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으로 명령형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고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는 잃을 수도 있다는 주장입니다(Olshousen). 말하자면, 은혜는 잃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예정론(불가항력적 은혜)은 성경에는 없는 것으로 결정적인 잘못이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의 심중에 진심이 아니라 단순히 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에 돌밭에 뿌린 씨와 같이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넘어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마 13:20~21).
셋째로, 특별히 고린도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not to receive grace in vain)는 말씀으로(고후 5:20), 그들로 하여금 이 큰 구원을 거절하지 말라(not to reject)고 권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Hodge).
넷째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되는데(고후 5:10), 그 때에 그들의 공력이 드러나게 되니(고전 3:13~15)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Philip Edgcumbe Hughes).
이 구절이 반드시 궁극적인 구원과 멸망에 관계되는 말씀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신앙생활의 행위에 있어서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경계의 말씀으로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만일 중생과 칭의를 위한 성령의 은혜를 주셨는데도 인간이 잘 못하여 선행의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다면, 이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은 중생이나 칭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습니다. 이는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는 말씀으로, 각자의 행위에 따라 ‘만일 각자의 공력을 시험하여 그의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얻게 될 것이고, 그의 공력이 불에 타면 해를 받되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고전 3:12~15). 그러므로 위의 해석들 가운데서 마지막 해석이 타당한 것으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터인 그리스도(사도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터를 닦으면 물론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건축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심판 때에 그 공력을 시험하게 되는데, 만일 그 공력이 불에 타면 칭찬과 상은커녕 무서운 책망과 해를 받게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3) ‘넘어질 수 있음’(고전 10:12)이라는 말씀은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명령문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에서 주로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간음하고 주를 시험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했던 사람들을 거울삼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들은 교만한 자들로 그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자신들은 믿음의 지식이 있어서 복음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하며 방종하여 심지어 저들은 믿음의 지식이 있다고 하며 특히 우상의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음으로 귀신과 교제하는 자들(고전 10:20)로 특히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고전 8장).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한 선민의식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내세워 교만했던 것과 같이,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모든 것에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꺼리지 않고 행할 수 있다는 잘 못된 믿음, 즉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은혜의 교만으로 마치 구원파의 주장대로 은혜를 받았으니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심지어 구원 파에서는 모세도 율법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그런즉 너희는 너희의 믿음의 지식으로 형제들을 실족케 하며 스스로 교만하여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4)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 중에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말씀은 은혜를 받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며, 그의 뜻을 거사릴까 두려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히 12:28). 이는 최후 멸망의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함이 아니라, 공경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영원한 구원(딤전 1:15; 히 10:10)이 아니라, 말하자면 ‘생활의 구원,’ 즉 점진적으로 이루어나가는 성화를 이루어나가라는 뜻입니다(Hendricksen). 성경에서 구원에 대한 개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습니다. 즉 ‘영생의 구원’과 ‘생활의 구원’으로 가난이나 질병에서 고침 받고, 사단에게서 해방을 받는 것,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등등 여러 가지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이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갈 4:19)
그 이유는 본문의 문맥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 있을 때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빌 2:12)라는 말씀과 이 행위마저도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work out) 하신다”는 것을 보아 이는 분명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생활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활의 구원’이란 우리가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후에 역사의 생활현장에서 신앙 인격을 점차적으로 성숙하게 이루어나가는 “성화”(sanctification)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나는 즉시 단번에 이루어지는 중생, 즉 ‘칭의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나가는 ‘성화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Hendricksen). 물론 이는 단번에 주신 칭의나 중생 또는 영생의 구원을 이루어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야 이루어지는 이 ‘성화의 완성’을 계속해서 이루어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NIV) 이 말씀은 어떤 선행들을 쌓아서 최종적인 구원인 영생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이 자녀’로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통하여 의의 열매를 맺어 나가라는 뜻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영생의 구원’의 조건이라면, 과연 어떤 종류의 선행(의의 열매)을 쌓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가톨릭주의가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성화는 평생 살아있는 동안에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지만 육신이 있는 한 완성되지 않으며, 우리의 육신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영의 성화가 완성되는 것이고(육신이 죽었으므로), 부활 후에는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영화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영육의 부활로). 설령 의로운 행위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죽는 순간 성화가 완성되며 이와 함께 구원도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내려주시는 은혜요, 의의 열매는 구원받은 사람의 행위의 결과입니다.
3. 칭의(중생)와 궁극적 타락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한 마디로 은혜(칭의)를 받아 그리스도(성령)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 8:1).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으로 이 믿음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칭의를 주시며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그러므로 우리를 주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진리로 인도하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칭의를 받은 중생인은 결정적인 범죄를 할 수 없음으로 궁극적인 타락은 없습니다(요일 3:9; 5:18). 물론.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성령으로 중생하고도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적 행위에 따라서 타락하여 칭의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K 교수는 문맥이나 신학적인 의미는 고려하지 않고, 문맥으로 보아 전혀 뜻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성구들을 따로 떼어다가 나열하며, 그것들을 궁극적인 구원과 멸망에 갖다 결부시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성경과 신학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K 교수의 논리가 인간중심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칭의에 관한 것, 특히 구원문제도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다가도 결국은 인간의 행위 여하에 따라 결판이 나는 것으로 언급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점차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신앙생활의 구원,’ 즉 점진적인 ‘성화의 구원’과 중생 또는 칭의에 의하여 단번에 얻는 구원을 구별하지 못하고(물론, 칭의와 구원의 즉각성에 이어 점진적이라는 연속성의 차원에서 조화롭게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혼동을 하다 보니, 거기에 비슷한 구절들을 그 문맥이나 신학적인 의미를 무시한 채 나열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의 행위가 부족해도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K 교수의 주장은 신율법주의(neo-Legalism/neo-Nomism)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K 교수는 칭의의 완성을 위해서는 종말론적 신앙생활에서의 선행(good works)을 통한 “의의 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선취된 칭의는 의의 열매 즉 선행이 없으면 취소되고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톨릭주의(Catholicism)입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단회 적이며 완전한 것으로, 더 이상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행위가 실패할 때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또 다시 두 번, 세 번, 매번 반복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죽으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행위는 믿음으로 행하는 행위, 즉 이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행하게 되는 것으로(벧전 4:10~11), 이것은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칭의”의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성화는 칭의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칭의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구원의 서정에서 점차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 얻어진 성숙과 그 영광의 정도는 다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에 있어서 간난아이나 어른이 똑같은 ‘사람’인 것과 같다는 이치입니다. 예를 들어 간난아이나 성숙한 어른이나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성숙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일 행위를 통하여 칭의나 구원이 취소되거나 통과될 수 있다면 그 정도가 얼마가 되어야 구원을 받게 됩니까? 말하자면 몇 점을 받아야 낙제(타락/멸망)를 면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는 가당치 않은 논리입니다. 이는 은혜언약의 교리를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구태여 이것을 정의하자면 세미-알미니안주의(semi-Arminianis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칭의나 중생은 단회 적이며 한번 받는 것으로 끝납니다. 다만 그 칭의로 얻는 구원이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의 행위의 과정을 통해서 더욱 성숙한 사람들로 성장하게 되면서 그 영광의 빛이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정도에 따라 주어지는 행한 대로 받는 상급으로,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의의 면류관을 받는 각자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고전 3:14).
만일, 칭의를 받은 자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칭의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칭의와 중생으로 얻은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취소”와 “멸망” 대신에 “보응”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회개”(repent)에 이르게 하시고(베드로와 같이) 결국에는 처음에 선언하신 칭의로 인한 의와 그 의를 힘입은 구원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학이며 칼빈의 불가항력적 은혜와 성도의 견인에서 증명되는 구원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신학의 권위자라고 하는 분이, 정작 율법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이방 신자들에게 강요했던 유대인신자들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라고까지 정죄했던 바울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한다면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K 교수의 결정적인 오류는 “칭의”를 포괄적인 차원(과거, 현재, 미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접근하는 것은 좋으나, 단지 시종일관 아날로그 방식의 시간적, 논리적 순서로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소위 선취된 칭의(첫 열매)의 완전성을 주장하면서도 종말에 가서 그 선취된 칭의가 의의 열매(행위)를 맺지 못할 경우에는 상실될 수도 있으므로,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앞뒤가 맞지 않는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에 받은 칭의가 유보상태에 있다가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에는 그 칭의가 상실된다는 논리인데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의의 열매를 얼마나 맺어야 합격이 되어 칭의가 완성된다는 것입니까?
사실, 칭의를 통하여 단번에 얻은 구원은 영생이라는 상으로 이것은 변동이 없으며, 성화의 과정에서 행한 대로 받는 상은 이생에서의 하나님의 축복과 사후의 영화로운 영광이라는 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한국교인들이 너무나 엉터리없는 생활에 빠져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을 지나치게 촉구하려다가 진짜 값진 은혜를 경솔히 여길 것이 아니라, 의롭지 못한 행위로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통한 무서운 고통의 보응을 받지 말고, 믿음의 의로운 삶을 통하여 이생에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사와 축복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지복의 기쁨(bliss)과 영광(glory)을 누리라고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K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칼 바르트(Karl Barth)가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정통주의(neo-Orthodoxy) 자가 된 것 모양으로, K 교수의 “칭의론”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그만 세미-칼빈주의 또는 세미-알미니안주의가 된 것 같은 오해를 떨쳐버릴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믿음’과 ‘행위’ 양자 중에 강조점이 다른 양단간의 신학을 함께 아울러 조화를 시도해보려다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해서 종교개혁을 성공했지만, 행위를 강조한 성경의 야고보서에 대해서, 지푸라기 서신(straw Epistle)이라고 하면서 성경에 없었으면 좋겠다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들어낸 것을 보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도하면서 믿음을 강조하다가 야고보서에서 발목이 잡혀 의로운 신앙생활을 강조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루터와 야고보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복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있어서 최종적인 목표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당시 가톨릭교회의 행위로의 구원이 개혁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했던 것이고, 야고보는 행위를 무시한 죽은 믿음을 질책하기 위해서 행위를 강조했지만, 알고 보면 야고보도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야고보가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K 교수의 주장이 얼핏 보기에 옳은 것 같으나, 문제는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촉구하려다가 “믿음의 의”와 “행위의 의”를 분리시켜 결국 믿음과는 동떨어진 “행위의 의”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의 종교개혁을 위하여 오직 믿음 일변도로 나간 것 같지만, 다른 한편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행함을 촉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할 때에도 믿음을 등한히 한 것이 아니라 균형 잡힌(balanced) 신앙생활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의”와 “행함의 의”를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묶어놓았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의 의”로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행함의 의”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2~24)라고 하며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실례를 들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칭의로 구원 받은 사람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로운 행위를 하게 되어 있고,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들로 올바른 행위를 했다면 그 사람은 칭의를 받은 사람으로 증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시각에 따라 칭의(무죄와 의인됨)와 의인의 삶을 디지털 방식으로 조명해서 믿음의 논리로 잘 전개했더라면 소위 “선취된 칭의”와 종말에 “완성될 칭의”가 일치될 수 있었을 터인데, 단지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논리를 전개하다보니 앞뒤(선취된 칭의와 완성될 칭의)가 달라져서 칭의를 받은 사람이 그의 행위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디지털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이며 입체적인 영상(spiritual 4D image)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성경을 올바로 바라보고 읽으며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칭의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칭의는 단회적인 선언이며 한번 선언된 칭의는 본질적으로는 변함이 없으며, 그 칭의는 성숙한 열매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칭의의 본질과 현상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언된 칭의로 말미암아 첫째 아담에 의해서 실패한 인간의 불의를 청산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K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다가, 어느 부분에 가서는 선취된 칭의를 받고도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또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믿음으로 구원만 강조하고 의로운 삶을 외면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 모양이 되었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미국의 하비 콕스(Harvie Cox)의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선구자 본회퍼(Dietrich Bon Hoeffer)가 주장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값진 은혜”(costly grace)를 사회적인 실천이 없는 은혜 즉 “싸구려 은혜” 즉 “값싼 은혜”(cheap grace)로 바꾸어버렸다고 주장합니다(Bonhoeffer, Dietrich, The Cost of Discipleship). 사실인즉,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아 의인이 되었더라도 그에 따라 의의 열매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지 아니하면 그것이 바로 “값싼 은혜”라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소위 사회복음주의의 행동주의(behaviorism)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4. 신학적 접근방법 (THEOLOGICAL APPROACH)
K 교수의 이론은 어원학적 접근방법(etymological approach)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학연구 방법의 차원에서 볼 때에, 그의 방법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유보”라는 말은 구조론적 방법(structural method)을 즐겨 사용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접근방법으로, 항상 존재론적 방법(ontological method)을 즐겨 사용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전제적 방법(presuppositional method)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어떤 명제를 개연성(probability)으로 가정하는 철학적 접근방법(philosophical approach method)으로, 귀납적인 과정의 방법을 통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결론에 가서 전제한 명제와 달라질 수 있는 확률이 대단히 큽니다. 물론, 이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예수님과 같이(마 25장) 전제적 명제가 정확히 설정된 가운데 변함없이 이를 증명하는 방식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명제(proposition)를 확정적으로 전제하는 것(presupposition)이 아니라, 그 명제의 개연성(probability) 즉 가능성(possibility)을 조건적으로 가정하고 상황(context)을 고려해서 연구한 후에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나 “예정”과 같은 것은 후회하심이 없으신 완벽한 하나님의 결정으로(롬 11:29) 변경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광야에서와 같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기간이나 코스를 변경한다거나 보응이라는 징계의 채찍을 사용하실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가나안의 약속”은 변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칭의나 중생이나 영생과 같은 신학적인 주제들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완전한 것으로 독자적인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신학적으로 전자를 허용적 작정 (βουλή, permissive decree), 다시 말하자면 근재 적, 또는 임시적 작정(temporary decree)이라 말하고, 후자를 가리켜 궁극적 작정 (θέλημα, ultimate decree)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중생”과 같이 한번으로 완성되는 영원한 궁극적 작정, 다른 말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the sovereign decree of God)에 속하고, “성화”는 계속해서 점진적인 과정 속에서 이루어나가는 근재적 작정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죄인에 대한 “무죄선고와 의롭다 여기시는 선언”으로서 단 한 번의 선언으로 완전하게 된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주시는 구원의 근거”(엡 2:8)인 반면에, “성화”는 이 세상에서 계속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성숙의 과정(the process of maturity)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행위에 관계없이 죽는 순간(영육분리 순간) 완성(영의 성화의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초대교회는 물론, 심지어 성 어거스틴(St. Augustin)까지도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확실한 구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톨릭주의(Catholicism)로 발전하는 것에 제동을 걸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행위는 물론 구원의 원인이 될 수 없지만, 믿음, 좀 더 엄밀하게 말해서 “오직 믿음”(sola fide)까지도 구원의 방편 즉 통로(through)가 아니라 구원의 원인(by)라고 할 때, 이러한 위험성에 대하여 철학적 존재의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까지도 로마 가톨릭주의 안에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나쁜 인간의 악업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욱이 Tillich는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바탕이나 원인이라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지 못 한다”라고 말했습니다(Paul Tillich, Perspectives on 19th and 20th Century Protestant Theology).
구조적 방법론은 하나님이나 성경권위(the authority of the Bible)의 절대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연성(probability)으로 “유보”해 두었다가 상황적인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성이나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겠다는 지극히 위험한 방법으로 이것은 고등비평방법(higher criticism)입니다. 이 방법은 양식사비평방법(formgeschichte)으로 원조는 슈미트(K. L. Schumit),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와 함께 불트만(Rudolf Bultmann)입니다. 현대의 다수의 신약학 학자들이 알게 모르게 이러한 비평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이상한 하나님이 되거나 무신론으로 변하게 되고, 성경의 무오성(infallibility)이 성경의 유오성(fallibility)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첫 열매로서의 칭의를 개연성(probability)으로 전제하고 “새 관점”으로서의 접근방법을 K 교수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첫 열매)을 받아도 행위(의의 열매) 여하에 따라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K 교수는 후 불트만 학파(post Bultmann school)의 신학자, 즉 불트만의 제자인 언스트 케제만 (Ernst Kaesemann)의 영향을 받아 칭의의 개념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언스트 케제만은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의 “제1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the first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이후에, 언스트 훅스 (Ernst Huchs), 군더 보른캄(Gunther Bornkamn)등과 함께 “제2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the secon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즉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탐구”(the new quest for historical Jesus)의 주역으로 후 불트만 학파(the post-Bultmann schools)에 속한 학자입니다.
그는 불트만의 제자였지만 불트만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작업의 과정을 통한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비역사적인 해석에 가장 큰 불만을 품었던 사람으로, 불트만을 뛰어넘으려는 야심으로 “새 관점”(new perspective, new quest)에서 예수의 역사성의 탐구와 칭의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길을 열어 놓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제만은 불트만의 양식사비평적 해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톰 라이트(Nicolas Thomas Wright)를 비롯하여 샌더스(E. F. Sanders), 제임스 던(James Dunn)과 같은 학자들이 이것의 영향으로 “제3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통한 “새 관점”에서 출발하여 칭의론을 이해하며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논쟁을 통하여 개인구원의 우선성에 초점을 맞춘 옛관점(old perspective)과 사회학적, 선교학적 차원에 초점을 맞춘 새관점(new perspective)의 절충 내지 두 관점의 통합의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신선한 새관점(fresh perspective)을 주장하고 있지만, 역시 새관점에 우선적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물론 K 교수역시 언약에 있어서 톰 라이트의 사회학적 선교학적 차원의 칭의를 비판하며 개인적 칭의의 우선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처음의 칭의가 마지막의 의의 열매로서의 행위에 대한 심판에서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케제만의 새로운 관점은 “칭의”라는 새로운 주제에도 적용되었는데, 그리스도와 동반하는 칭의를 제창했기 때문에 아마 K 교수가 이점에 맘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K 교수가 케제만에게 감명을 받았다는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칭의는 인간에게 칭의만 전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칭의와 함께 오셨다”는 대목으로 매우 매력적인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통한 칭의론의 접근에서 케제만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왔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 안에 그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K 교수는 단순한 “하나님의 의”의 전가가 아니라, 칭의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접근하는 칭의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론은 신학적으로 고도의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매우 타당성 있는 이론으로, 칭의가 한 낱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행동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추상적 하나님의 의(롬 3:25~26)도 아니고 행위적(공로적) 인간의 의도 아닌 제3의 저자적인 의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련성(relativity)으로 설정합니다. 이 관계성을 유지할 때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성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행위와의 정확한 관계를 도외시한 중간적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칭의란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 선언하심으로 그의 심판적인 의가 믿음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가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인 인간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회복된 관계"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에 있어서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의가 객체가 되는 인간에게 전이되는 과정을 다른 개념으로 K 교수는 “유보”(reservation)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포된 칭의가 단회적이 아니라 유보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동들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K 교수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련의 행위들에 따라서 선포된 하나님의 의가 취소될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칭의에 대한 실존(주의)적 의미가 부여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칭의의 선언은 택한 자들에게 한번만 내려주시는 은혜의 선물로서 유보의 과정에 따라 취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효과적인 은혜로 성도의 견인에 의하여 전혀 변함이 없이 유지되어 종말론적인 결과(열매)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단번에 몸을 드려 한 번에 이루신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권으로 단번에 선언해주신 확정적인 “칭의”의 “선언”을 “유보”라는 형식으로 종말까지 보류했다가 우리의 행위를 보아서 인정할 수도 있고 취소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바울의 성경구절의 의미를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해서 왜곡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정통신학의 조직신학에서는 한 결 같이 칭의의 단회성을 강조하며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성화와 구분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칭의는 단번에 선언되는 무죄선고이지 완성을 위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나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선언이라는 뜻입니다.
5. 상급론에 대하여 (ON THE REWARDS)
그리고 다른 주제이지만 비슷한 면이 있는 바울의 상급론에 있어서 이미 타계한 OOO교회의 K 목사가 주장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상급은 “영생” 즉 우리가 받는“구원”일뿐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을 기대하는 것은 잘 못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도 차별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논리입니다. 바울의 상급론을 다른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는 셈이지요. 물론 우리의 상급이 “영생”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바울이 말한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신학적으로 신학자들은 물론,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벌코프(Berkohf)도 상급을 “영생”으로 전제 하면서 행위에 따르는 상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의 선행이 그들의 공로일 수는 없지만, 은혜로운 상급의 척도가 된다고 했습니다(Systematic Theology, p.737). 최후심판 때, 생명책이 펴져있는 것 외에 행위대로 심판하는 다른 책들이 펴져 있습니다(계 20:12). 그러나 그 상급으로 인한 차별이 아니라 본질 적으로 영생의 영광이 동일한 것과 같이, 행위로 인한 각자의 상급인 지복(bliss) 즉 “영광”의 빛의 본질은 같지만, 영광의 빛의 정도(the degrees in the bliss of heaven)가 각자의 행위에 따라 다른데 (단 12:3; 고후 9:6; 고전 15:41~42), 그렇다고 차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개혁신학의 입장입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The reward of the righteous is described as eternal life, that is not merely an endless life, but life in all its fullness, without any of the imperfections and disturbance of the present, Matt. 25:46; Rom. 2:7. The fullness of this life is enjoyed in communion with God, which is really the essence of eternal life, Rev. 21:3. They will see God in Jesus Christ face to face, will find full satisfaction in Him, will rejoice in Him, and will glorify Him. We should not think of the joys of heaven, however, as exclusively spiritual. There will be something corresponding to the body. There will be recognition and social intercourse on an elevated plane. It is so evident from Scripture that there will be degrees in the bliss of heaven, Dan. 12:3 2Cor. 9:6. Our good works will be the measure of our gracious reward, though they do not merit of it. Notwithstanding this, however, the joy of each individual will be perfect and full.” (Berkohf, Systematic Theology, p.737).
다시 말하자면, 성경적인 상급의 개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받는 “유업의 상”(골 3:24; 히 11:6; 눅 6:23)인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함과 동시에,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행위에 따라서 받는 “상급”(마 5:12; 5:46; 10:41~42; 마 16:27; 눅 6:35; 고전 3:8, 3:14; 고전 9:17, 9:18, 9:24; 골 2:18; 히 10:35; 11:26; 요이 1:8), 즉 하늘의 기쁨인 지복 (reward, that is, the bliss of heaven)을 의미합니다. 이 상급은 모두 “영광”으로 빛나게 됩니다. 예수님과 바울도 분명이 이 상(reward)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마 5:12, 46; 6:1; 10:41;~42; 고전 3:8,14; 고전 9:17~18; 9:24; 빌 3:14; 골 2:18; 골 3:24; 히 10:35; 11:6; 11:26; 요이 1:8; 계 11:18; 22:12).
성경에는 같은 주제들, 예를 들어 믿음이나 구원과 같은 주제들에 관하여 이중적인 성격으로 언급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① 영생의 구원과 ② 현세의 구원(가난, 질병, 전쟁, 사단 등에서 해방과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어 나가는 성화의 완성 즉 성화의 구원)으로 말씀하며, “믿음”도 ① 영생 얻은 믿음과 ② 능력을 행하는 믿음 등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상급”에 대해서도, 원형적인(archetypical) 영생(eternal life)과 같은 구원의 상이 있는가 하면, 지상에서의 성도들이 그들의 믿음의 행위를 따라 받는 현세의 복과 내세의 영광과 같은 표상적(typical)인 상급(reward for the works)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상급에 관하여 사도 바울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 3:8, 14; 9:17; 빌 3:14; 골 2:18; 3:24; 히 10:35). 성경적인 상급론은 본지 토론방 414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CONCLUSION)
[새 관점학파]에서와 같이 “칭의론”이 잘못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칭의”를 보는 관점과 방법에서 잘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칭의”를 존재론적 본질이라는 정통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구조론(상황적)인 문제라는 새 관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는 상황에 따라 변할(취소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본문(text)에서 출발하여 상황(context)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정통적인 존재론적 방법(ontological method)이 아니라, 상황(context)에서 출발하여 본문(text)을 이해하고 증명하려는 구조론적 방법(structural method)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중생, 믿음, 칭의, 구원, 영생, 성화 등의 신학적 전문용어들의 개념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칭의, 중생, 영생과 같은 것들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된 미완성의 작품으로 보아서는 위험합니다. 물론 믿음이라든가 구원과 같은 것들은 이중적인 성격인 즉각성과 점진성의 측면이 있어서 성화와 같이 점진적으로 이루어나가는 면도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영생의 믿음은 단번에 완성되며, 생활의 믿음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성숙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구원에도 적용시켜서 영적이며 영생에 이르는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해결해주신 원죄해결을 통하여 믿음으로 완성됨과 동시에, 생활의 구원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자범죄를 해결하며 선행을 통하여 의로운 열매를 맺어 나가는 방식으로 점차적인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게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엡 4:13). 그러므로 경건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단번에 의롭다 인정받은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현세에서 신앙생활의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 2:12). 이것은 구원의 즉각성이 아니라 구원의 점진성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유보적 칭의”의 핵심은 처음에 받은 칭의(첫 열매)가 유보되었다가 종말에 가서 완성된다는 것으로,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칭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선언하신 “칭의”가 미완성된 것이라는 뜻이며,
둘째로, “칭의”가 아직도 미완성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칭의가 완성될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그러므로 항상 그것을 이루기 위해 피곤하게 살게 될 것이며,
셋째로, “칭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면, 종국에 가서 이미 믿음으로 얻은 칭의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염려와 불안으로 구원의 확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받은 “칭의”는 처음부터 완전한 “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행위에 의하여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종말에 가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가서 오히려 더욱 더 풍성한 의로 승화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칭의가 완전한 것이 아님으로 의로운 행위를 요구한다면, 미쳐 의의 열매를 맺기도 전에 주님의 십자가 옆에서 죽어 구원 받은 강도에 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이미 우리가 받은 칭의가 불완전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가 믿음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맺어 더욱 풍요롭게 되며, 그로 인한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거두어 더욱 풍성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지극히 성서적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날로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칭의”(justification)는 처음부터 완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언으로, 믿음으로 받는 "유업의 상"(the reward of inheritance through faith, 골 3:24)인 영생(eternal life)으로 확정된 것으로 불연속성(discontinuity)인 동시에, “성화”(sanctification)는 칭의의 연속성(continuity)으로 우리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성숙화되어 각 개인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마 16:27) 현세에서의 축복과 하늘에서의 상인 "보상의 상"(the rewards in heaven)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보면 "칭의"와 "성화"가 구원의 양면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구원의 한 측면인 "칭의"(믿음)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반면에, 또 어떤 이들은 구원의 다른 측면인 "성화"(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디지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믿음에 의한 칭의"(the justification by faith)와 "행위에 의한 성화"(the sanctification by actions of faith)는 신비로운 연합(mystical union)의 관계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과 인간의 영육 양성의 신비로운 연합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디지털 방식으로 보면 "칭의"와 "성화"가 연합된 하나로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구약과 신약의 양면성으로 보이면서 신약과 구약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 것으로 이해되어,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변함없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권하고 싶은 말씀은, 칭의(중생)를 받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행위의 열매인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이미 받은 구원이 취소되어 멸망하지 않도록 의로운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할 것이 아니라, 세속에 빠져 죄를 범하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받아 고통을 당하지 말고 그들 속에 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의의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이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은사와 축복은 물론, 천국에서의 의의 면류관의 영광스러운 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라고 촉구하는 편이 성경(복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단지 최선을 다할 뿐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Chong Shin University in USA
Systematic Theology (Professor)
Rev./Dr. Paul B. Jang
PAUL 2016-07-22 16:06:55 | 조회: 2136
아래의 소논문(article)은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reserved justification)에 관한 인터뷰를 보고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내용의 글로, 주위의 목사님들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 것입니다.
[질문] K 교수의 “유보적 칭의”(RESERVED JUSTIFICATION)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필자는 본래 K 교수를 한국이 낳은 바울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자랑으로 여겨왔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명성을 생각하여 그의 신학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분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는 더욱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그분을 바라보는 시선과 신학자로서 그분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이 특히 실천신학적인 신자들의 거룩한 신앙생활이라면, 신학자들은 윤리적인 면에 앞서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진리를 파수해야 할 사명감으로 교리에 신경을 쓴다는 점인데, 그래서인지 이번에 K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이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 칭의 (JUSTIFICATION)
K 교수의 인터뷰를 보면, “제1의 칭의”(primary justification: 이것은 필자가 붙인 용어로 처음에 받은 칭의를 의미함), 즉 처음에 “믿음으로 얻은 칭의”로 “첫 열매”에서 종말론적 “제2의 칭의”(secondary justification)로, 종말에 거둘 “수확”, 즉 “행위를 통하여 완성될 칭의”(구원의 완성)에로 진행되는 것으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우리가 거듭나서 중생한 후, 구원의 서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우리의 신앙 인격이 성장한다는 “성화”(sanctification)와 혼동하여 “칭의”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K 교수가 말로는 처음에 “믿음으로 받은 칭의”도 완전한 것으로 “첫 열매”라고 하며 이것은 “종말에 받을 칭의”에 대한 “예약”으로 아직은 “유보된 칭의”(reserved justification)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 “유보적인 칭의”라는 말도 개혁신학의 전문용어로는 적절치 않은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구태여 비교하자면 구원이란 아직 미결정 상태로 인간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와 유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될 때까지는 구원의 결정이 유보상태에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의미에서 K 교수의 주장은 세미-알미니안주의(semi-Arminian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세미-칼빈주의(semi-Calvinism)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면 칼빈주의로 말하다가 다른 면에서 그것을 수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칭의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전시적(全時的) 구도(frame)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라며, 처음과 종말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의도는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칭의”의 정확한, 고유의 개념을 무시하고 “첫 번의 칭의”와 “종말의 칭의” 사이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유보적 칭의”(reserved justification)라고 표현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논리입니다. "칭의“의 즉각 성을 차치하고 백번 양보해서 “칭의”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씨앗”과 “열매”의 동질성을 인정한다고 가정하더라도, K 교수의 이론에, 첫 번째 “칭의”를 받아 “의인”이 된 사람이 종말에 “의의 열매” 즉 “의인의 삶”(의로운 행위)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타락과 멸망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는 견해는 전혀 칼빈주의나 성경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이라면 생명이 있는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진정한 칭의로 의인이 되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씨앗과 열매가 본질상 동질(homogeneity)이 아니라면 이것이야 말로 큰 문제가 됩니다. 씨앗 혹은 첫 열매로 표현된 “칭의”가 종말론적 의의 열매인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비성경적이며 비 진리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고 했습니다. 이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으로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에 심은 종류와 꼭 같은 종류의 열매를 거둔다는 뜻이고(갈 6:7; 마 7:16), 또 하나는 심은 양 그만큼 거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라고 한 말씀입니다.
위에서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은 처음에 심은 종류와 꼭 같은 종류의 열매를 거둔다는 뜻으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는 뜻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라는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는 심은 그대로 거둔다는 뜻으로, 처음에 심은 것과 나중에 거두는 것이 꼭 같이 일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옛날 우리나라의 속담과 같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 같습니다.
만일 처음의 얻은 칭의(구원)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행위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면, 처음에 얻은 칭의 자체가 참 칭의(true justification)가 아니라 거짓 칭의(false justification)일 뿐입니다. 이 거짓 칭의를 얻은 사람은 물론 탈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 칭의를 얻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이 보장되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칭의”를 얻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의 열매를 맺어야만 구원을 받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는 논리는 비 성서적입니다. 칭의는 구원이 보장된 것이고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얼마간이라도 의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할 수 있으나, 반대로 의의 열매를 맺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구원의 동기와 보장이 되지만, 인간의 행위는 구원의 동기나 보장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강도는 십자가상에서 의의 열매를 맺을 기회도 없이 죽었지만,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말하면, 구원이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영생(유업의 상)을 의미한다면(롬 1:17), 상급이란 성도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의의 열매를 맺는 정도에 따라 얻는 상(보상의 상)을 의미합니다. 디지털 방식으로 말하면, 이 두 가지 상은 부활의 차원으로 승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칭의는 성화로 이어지며, 성화는 상급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반드시 성화의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상급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마치 반예정론자들이 예정론을 공격하는 방식과 같이, 인간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구원 파 모양으로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참된 칭의를 받은 사람은 그 마음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더욱 열정을 내게 되어있습니다. 그의 속에 성령이 거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거나 의를 위한 생활과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한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며, 오히려 성령의 강권하심에 따라서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 더욱 열심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렘 20:9).
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선을 행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이것을 가리켜 믿음이란 사람의 일(행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행위)이라고 했습니다(요 6:29). 만일, 칭의를 받고도 삶의 행위에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게으른 생활로 아무런 “의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진정한 칭의를 받지 못한 사람으로 칭의를 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은 육욕에 의하여 유혹을 받고 죄(자범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루터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멸망이란 이 자범죄(peccatum actuale)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죄(peccatum originale)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죄관과 구원관입니다. 사실, 인간이 멸망하는 것은 원죄 때문입니다. 이 원죄를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해결해주셨고, 이 공로를 힘입은 사람들은 즉시 단번에 그리고 완벽하게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는 선언을 받게 되어 일차적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구원과 심판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그 자체가 완전한 것입니다 (요 3:18).
그러나 칭의(קךצ, δικαιοσῦνη)는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현재 선언하시는 즉시 완전한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루터는 “칭의는 우리가 성취할 수 있다거나 공로로 이룩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적인 성취를 미리 보시고서 수여해주시는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칭의는 즉각적이며 단회적인 것으로 현재 진행형의 “과정”(process)이 아니며, 또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에 속한 “선언”입니다.
이 후로 우리는 원죄의 차원에서는 죄인이 아닌 당당한 ‘의인’이 되어 구원이 보장되며, 그 보증으로 성령의 인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중생하여 의인이 된 후에도 육신의 소욕에 의하여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개혁자들 중에는 “의인인 죄인”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도 중생하여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하며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될 죄와의 전쟁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죄는 원죄가 아니라 자범죄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된 원죄가 다시 살아날 이유는 없으며, 우리가 종말까지 범하게 되는 죄는 자범죄로 이 죄를 가리켜 사도 요한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요일 5:17)라고 해서 회개가 가능한 죄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미 받은 원죄의 사함이 취소되고, 원죄의 차원에서 다시 죄인이 된다면 반복해서 회개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 때마다 매번 십자가에 죽으셔야 될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원죄를 위하여 단번에 죽으셨다는 말씀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번 회개해야 할 죄는 원죄가 아니라 자범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얻은 칭의에 의하여, 멸망하여 지옥으로 떨어질 염려가 없는 이유는 다시는 원죄와 같은 죄를 범할 염려가 없기 때문인데, 그 이유인즉 우리는 하나님의 씨로 낳았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9; 5:18).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의 확고부동한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러면 칭의 된 이후에 범하는 자범죄는 어찌되는 것입니까? 물론, 이 자범죄로 멸망하여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 따를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보응"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징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이 죄(자범죄)를 범했을 경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아들이라면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며 만일 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사생자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6~13).
물론 이 자범죄가 원죄에 연결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서 불신자와 같이 본래부터 원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의 자범죄로 지옥에 가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게 되는데, 불신자들의 자범죄는 원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원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신자들의 자범죄는 죄의 뿌리인 원죄가 죽은 상태이고, 불신자들의 자범죄는 아직도 죄의 뿌리인 원죄가 살아서 자범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바울이 원가지인 유대인과 이방인이 참 감람나무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는 구원의 도리를 확대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원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영어로 “유보”(reservation)라는 말이 “예약”(reservation)으로 사용되는 것도 모르느냐고 반문하고 있으나, 사실 “유보”라는 말과 “예약,” 더 나가서 “예정”이라는 말과 사이의 의미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또는 “예정”이라는 말은 결정적인 것으로 나중에도 변개치 않는 것을 의미하며, “유보”라는 말은 예약은 되어 있으나 상황에 따라서 나중에라도 취소되거나 또는 변경될 수도 있다는 개연성(probability)을 전제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인지 K 교수는 아무리 칭의를 받았다 하더라도 나중에 그 칭의에 합당한 의의 열매, 즉 믿음에 합당한 삶(행위)을 살지 아니하면 타락해서 칭의가 취소되고 멸망으로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는 바울의 칭의와 중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설명을 잘 못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K 교수가 사용하고 있는 “칭의는 유보된 것”이라는 표현은 잘 못된 표현입니다. 물론 종말론적인 전문용어인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는 구도(frame)를 칭의론에 적용하는 것부터가 무리입니다. 나중에 좀 더 소상하게 논할 수 있겠지만 정통적인 칼빈주의 개혁신학에서는 “칭의”를 “성화”와 구별하여 죄인에 대한 무죄선고로 법정용어를 채용한 것입니다. 칭의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외부적으로 신분회복을 객관적으로 선언해주신 것인 반면에, 성화는 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주관적인 신앙 인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칭의와 중생은 한 번의 선언으로 완성되지만 성화는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나가다가 우리가 죽어야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K 교수는 “칭의”는 우리가 이미 받았지만(already), 아직도(not yet) 진행 중인 것으로 종말에 가서야 의의 열매로 완성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의의 열매에 따라 첫번에 받은 칭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각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바로 첫 번째 칭의(첫 열매)는 받았으나,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고, 종말에 가서 의의 열매를 맺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주장으로, 결국 첫 열매로서의 칭의는 그 후의 행위여하에 따라 취소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위험성입니다. 이는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이해한 것으로 개혁주의의 칭의에 대한 개념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칭의 개념은 단회적인 것이며, 선포되는 순간 완전한 것으로 거기에 무엇(행위)을 가감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성화와 같이 어떠한 “과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중생의 성격과 같이 한 번의 단회적인 하나님의 “무죄선언”인 동시에 “의롭다”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죄인에 대한 “완벽한 신분회복”을 의미합니다. 중생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하신 하나님께서 한 번 결정하신 이 선언은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좀 잘 못했다고 해서 주셨다가 다시 빼앗는 분이 아니십니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아들이 좀 잘 못했다고 해서 호적에서 파버리거나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혹시 여인이 자기의 젖 먹는 아이를 잊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손바닥에 새겨서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49:16~17). 이는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일반적인 원리로 말하자면, 사람들도 아무런 조건이 없이 호의(은혜)로 준 선물을, 받은 사람이 좀 잘못했다고 해서 다시 내놓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조건 없이 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고(롬 5:8),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으로(롬 5:9), 조건 없이 받은 은혜로운 선물이기 때문에, 다시 행위를 조건으로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도 맞지 않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미 칭의를 받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여하에 따라 취소 될 수도 있다는 견해가 바로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제가 알기에 K 교수는 지금까지 칼빈주의 신학자로 알고 있었는데, 만일 이와 같은 주장을 한다면, 그의 주장은 곧 세미-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 즉 세미-알미니안주의(semi-Arminianism)거나 수정된 칼빈주의(modified Calvinism)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칭의”의 포괄성을 망각한 처사로 칭의를 받은 사람은 개인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자력으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기 때문에 칭의 자체가 완벽한 것입니다. 칭의는 아날로그 방식을 넘어 디지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의의 열매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신자들의 성화는 이 세상에서는 완성되지 않으며, 행위의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었느냐가 아니라 (1) 다른 종류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마 7:16)과 그리고 (2) 의의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한 경우(마 21:19; 25:24~30)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칭의를 받고도 전혀 의의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했다면 그는 진정한 칭의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칭의를 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으로, 이러한 예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마 7:22; 25:44; 계 22:15).
다시 말하자면 구원받은 줄 알았다가 쫓겨나는 신세들이지요(마 7:15~23). 그런데 K 교수는 우리가 모두 주님의 재림 때 하나님의 심판석(최후심판) 앞에 서서 각각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의인으로 최종적인 판결을 받아야 하고 거기에서 악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증명이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롬 14:10; 고후 5:10),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두 구절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 8:1), “그러므로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K 교수는 칭의를 받은 신자들도 최종심판석에서 심판을 받고 행위여하에 따라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위에 제시된 성경말씀(롬 14:10; 고후 5:10)은 칭의를 받은 신자들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법인 행위언약에 따라, 칭의를 받은 신자들도 심판대에서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심문)은 받으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심판받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문은 “심판을 받다”가 아니라 “심문을 받다”(마 12:36)로 그 의미는 “평가해서 되돌려 받다”, 혹은 “보상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아포도수신 페리 아우투 로곤 엔 헤멜라 크리시우스”(have to give an account)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경건치 않은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단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속죄해주시고 칭의를 선언해주셨기 때문에, 다시는 정죄할 일은 없고, 단지 그들의 행위에 따라 행한 대로 상급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불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이미 정죄된 사람들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행위에 따라 형벌이 결정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요 3:18).
2, 칭의와 신앙행위 (JUSTIFICATION AND WORKS)
성경은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은혜로 단번에 주신 칭의을 받았거나 중생함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의에 합당한 행위나 믿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버림을 받거나 멸망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회개와 보응이 따르는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같이 궁극적으로 돌이켜 회복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K 교수는 칭의가 완전하다고 하면서도 또 계속해서 성화의 과정을 거쳐 의의 열매를 맺어야 처음에 “예약된 칭의”가 종말에 가서 완성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성화의 과정을 거칠 기회조차 없어 의의 열매를 맺기도 전에 구원을 받고 주님의 십자가 옆에서 낙원에 들어간 강도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칭의는 “예약된 것”으로 종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와 상관없이 즉석에서 의롭다고 해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이며 결정적인 “선언”입니다(롬 4:5; 5:6).
이 무죄선고와 칭의의 선언은 법정용어로 하나님께서 하신 “하나님의 법적 선언”이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칭의는 “과정”(process)이 아닙니다. 칭의는 중생과 같이 단번에 한 번만 주시는 완벽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엡 2:8). 칭의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인간은 완전한 칭의를 받든지 아니면 칭의를 받지 못하든지 하는 것으로 “유보”와 같은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취소”되거나 또 다시 “재 선언”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거나 인간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513). 물론 신자의 윤리적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그 행위를 궁극적인 구원에 결부시키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K 교수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을 들어 처음에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도 그의 행위(의의 열매)에 따라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지 않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 즉 사단의 사주를 받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 “육신의 열매”(갈 5:19-21), 악의 열매를 맺으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강력히 경고합니다(갈 5:22). 고전 10장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예를 들며 경고하기도 합니다(고전 10:9-12). 곳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 받을 것을 상기시키며(예: 롬 14:10; 고후 5:10; 살전 3:12-13), (오늘 일부 한국의 신자들같이)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자랑하며 구원을 이미 다 받은 양 경거망동하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이 헛되이 믿을 수 있음(고전 15: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음(고후 6:1), “넘어질 수 있음”(고전 10:12) 을 경고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라”(빌 2:12)는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위의 주장에 대해서 몇 가지만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고 사단의 사주를 받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 “육신의 열매”(갈 5:19-21), 악의 열매를 맺으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칭의를 받은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살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보면, 칭의를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님만 따라다니던 베드로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로, 중생의 성령을 받지 못한, 즉 칭의를 받지 못하고 성령의 은사만 받은 사람들, 말하자면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신학적으로 이들을 주의 사역을 위한 외적 부르심, external calling만 받은 사람들이라고 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 7:21~23; 히 6:4; 10:26). 둘째로,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사람(외적 부르심은 물론 내적 부르심, inner calling을 받아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도 일시적으로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경우인데, 물론 전자(칭의를 받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는 성령의 열매가 아닌 악의 열매를 맺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마 7:21~23, 예를 들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 그러나 후자의 경우와 같이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사람은 일시적으로 죄(자범죄)를 범할 수 있어도 궁극에 가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된다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다윗과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
다음으로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 경고하기도 합니다 (고전 10:9-12)”라고 했는데 (갈5:22), 이 경우는 그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육에 속한 “제1세대”(the first generation)의 경우를 들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하시는 말씀으로, 바울의 언어방식으로 보면, 여기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제1세대”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고, 다음 세대인 “제2세대”(the second generation)는 영에 속한 사람들로 가나안(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이 두 경우 중에 하나님을 시험하던 “제1세대”(본래부터 육에 속한 사람들로 칭의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형)의 멸망을 들어 말세를 만난 우리들에게 경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제2세대”(광야에서 새로 출생한, 영에 속한 사람들로 칭의를 받은 사람들의 모형)들과 같이, 칭의를 받은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결국에는 감당하게 하셔서 구원을 보장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다음 구절(고전 10: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단어나 한 구절만 똑 떼어서 성경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문맥과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사람들은 그 보증으로 성령의 인을 쳐서 최종적인 구원을 보장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라는 이 말씀은 중생과 칭의를 받은 사람들은 사탄에게 넘어지는 것 같으나 아주 넘어지지 않아 궁극적으로 타락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넘어지나 실족하기까지 아니하며(롬 11:11), 칭의를 받은 의인은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고 했고, 악인은 엎드러진다(잠 24:14)고 했습니다.
“(오늘 일부 한국의 신자들같이)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자랑하며 구원을 이미 다 받은 양 경거망동하는 고린도 인들에게 그들이 ‘헛되이 믿을 수 있음’(고전 15: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음’(고후 6:1),’ ‘넘어질 수 있음’(고전 10:12)을 경고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라고 촉구합니다(빌 2:12).” 이 부분에서 K 교수는 한국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과 같이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나 헛되이 믿고, 은혜를 헛되이 받고, 넘어질 수 있으니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하라'는 성경구절들을 통하여 의로운 행위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의 개념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혼동하기 쉽고, 오해하기 쉬운 것들 중에 은혜와 은사의 개념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은혜와 은사를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구별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은혜’(grace)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의미하고, ‘은사’(gifts)는 일반적으로 ‘사역을 위한 성령의 은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the grace of God)가 바로 ‘중생’(regeneration)과 ‘칭의’(justification)라면, 사역을 위한 성령의 ‘은사’는 곧 능력을 행하는 여러 가지 ‘은사들’(charismata)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성령을, 사역(the works of the Spirit) 별로 나누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같은 성령인데, 신학적으로 중생케 하시는 성령(regenerating Spirit), 성화시키는 성령(sanctifying Spirit), 그리고 능력(은사)을 주시는 성령(empowering Spirit)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중생(칭의)과 성화의 차이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아 많은 능력을 행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마 7:21~23), 오직 중생, 칭의와 같은 하나님(성령)의 은혜를 받아 거듭남(중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구원을 받으며, 중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번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일단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은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 칭의를 받은 사람은 잠시 실족할 수는 있어도 아주 타락하지 않으며 반드시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씨로 낳았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9; 5:18). K 교수가 제시한 위에 구절들을 다시 주석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헛되이 믿을 수 있음’(고전 15:2)이라는 말씀은,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말씀으로, 반드시 최종적인 구원을 상실할 수 있을 만큼 헛되이 믿을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바울이 전한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않았다면, 즉 올바로 믿고 있다면 분명히 구원을 얻으리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굳게 붙잡고(현재형) 헛되이 믿지 않고 올바로 믿고 있었다면(현재완료), 구원을 얻는다(현재형)’라는 뜻입니다. 이는 오히려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전한 부활의 복음을 제대로 믿고 있다면 구원을 얻는다는 뜻으로, 그 당시 부활이 없다고 하는 무리들을 의식하고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12). 만일 이런 자들과 같이 거짓 사도들이 전해주는 헛된 복음을 믿지 않고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참된 부활의 복음을 믿고 있는 이상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2)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음’(고후 6:1)이라는 말씀은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으로 명령형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고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는 잃을 수도 있다는 주장입니다(Olshousen). 말하자면, 은혜는 잃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예정론(불가항력적 은혜)은 성경에는 없는 것으로 결정적인 잘못이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의 심중에 진심이 아니라 단순히 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에 돌밭에 뿌린 씨와 같이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넘어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마 13:20~21).
셋째로, 특별히 고린도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not to receive grace in vain)는 말씀으로(고후 5:20), 그들로 하여금 이 큰 구원을 거절하지 말라(not to reject)고 권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Hodge).
넷째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되는데(고후 5:10), 그 때에 그들의 공력이 드러나게 되니(고전 3:13~15)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Philip Edgcumbe Hughes).
이 구절이 반드시 궁극적인 구원과 멸망에 관계되는 말씀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신앙생활의 행위에 있어서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경계의 말씀으로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만일 중생과 칭의를 위한 성령의 은혜를 주셨는데도 인간이 잘 못하여 선행의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다면, 이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은 중생이나 칭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습니다. 이는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는 말씀으로, 각자의 행위에 따라 ‘만일 각자의 공력을 시험하여 그의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얻게 될 것이고, 그의 공력이 불에 타면 해를 받되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고전 3:12~15). 그러므로 위의 해석들 가운데서 마지막 해석이 타당한 것으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터인 그리스도(사도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터를 닦으면 물론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건축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심판 때에 그 공력을 시험하게 되는데, 만일 그 공력이 불에 타면 칭찬과 상은커녕 무서운 책망과 해를 받게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3) ‘넘어질 수 있음’(고전 10:12)이라는 말씀은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명령문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에서 주로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간음하고 주를 시험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했던 사람들을 거울삼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들은 교만한 자들로 그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자신들은 믿음의 지식이 있어서 복음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하며 방종하여 심지어 저들은 믿음의 지식이 있다고 하며 특히 우상의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음으로 귀신과 교제하는 자들(고전 10:20)로 특히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고전 8장).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한 선민의식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내세워 교만했던 것과 같이,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모든 것에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꺼리지 않고 행할 수 있다는 잘 못된 믿음, 즉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은혜의 교만으로 마치 구원파의 주장대로 은혜를 받았으니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심지어 구원 파에서는 모세도 율법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그런즉 너희는 너희의 믿음의 지식으로 형제들을 실족케 하며 스스로 교만하여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4)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 중에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말씀은 은혜를 받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며, 그의 뜻을 거사릴까 두려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히 12:28). 이는 최후 멸망의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함이 아니라, 공경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영원한 구원(딤전 1:15; 히 10:10)이 아니라, 말하자면 ‘생활의 구원,’ 즉 점진적으로 이루어나가는 성화를 이루어나가라는 뜻입니다(Hendricksen). 성경에서 구원에 대한 개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습니다. 즉 ‘영생의 구원’과 ‘생활의 구원’으로 가난이나 질병에서 고침 받고, 사단에게서 해방을 받는 것,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등등 여러 가지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이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갈 4:19)
그 이유는 본문의 문맥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 있을 때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빌 2:12)라는 말씀과 이 행위마저도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work out) 하신다”는 것을 보아 이는 분명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생활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활의 구원’이란 우리가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후에 역사의 생활현장에서 신앙 인격을 점차적으로 성숙하게 이루어나가는 “성화”(sanctification)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나는 즉시 단번에 이루어지는 중생, 즉 ‘칭의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나가는 ‘성화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Hendricksen). 물론 이는 단번에 주신 칭의나 중생 또는 영생의 구원을 이루어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야 이루어지는 이 ‘성화의 완성’을 계속해서 이루어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NIV) 이 말씀은 어떤 선행들을 쌓아서 최종적인 구원인 영생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이 자녀’로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통하여 의의 열매를 맺어 나가라는 뜻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영생의 구원’의 조건이라면, 과연 어떤 종류의 선행(의의 열매)을 쌓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가톨릭주의가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성화는 평생 살아있는 동안에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지만 육신이 있는 한 완성되지 않으며, 우리의 육신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영의 성화가 완성되는 것이고(육신이 죽었으므로), 부활 후에는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영화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영육의 부활로). 설령 의로운 행위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죽는 순간 성화가 완성되며 이와 함께 구원도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내려주시는 은혜요, 의의 열매는 구원받은 사람의 행위의 결과입니다.
3. 칭의(중생)와 궁극적 타락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한 마디로 은혜(칭의)를 받아 그리스도(성령)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 8:1).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으로 이 믿음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칭의를 주시며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그러므로 우리를 주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진리로 인도하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칭의를 받은 중생인은 결정적인 범죄를 할 수 없음으로 궁극적인 타락은 없습니다(요일 3:9; 5:18). 물론.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성령으로 중생하고도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적 행위에 따라서 타락하여 칭의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K 교수는 문맥이나 신학적인 의미는 고려하지 않고, 문맥으로 보아 전혀 뜻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성구들을 따로 떼어다가 나열하며, 그것들을 궁극적인 구원과 멸망에 갖다 결부시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성경과 신학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K 교수의 논리가 인간중심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칭의에 관한 것, 특히 구원문제도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다가도 결국은 인간의 행위 여하에 따라 결판이 나는 것으로 언급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점차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신앙생활의 구원,’ 즉 점진적인 ‘성화의 구원’과 중생 또는 칭의에 의하여 단번에 얻는 구원을 구별하지 못하고(물론, 칭의와 구원의 즉각성에 이어 점진적이라는 연속성의 차원에서 조화롭게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혼동을 하다 보니, 거기에 비슷한 구절들을 그 문맥이나 신학적인 의미를 무시한 채 나열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의 행위가 부족해도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K 교수의 주장은 신율법주의(neo-Legalism/neo-Nomism)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K 교수는 칭의의 완성을 위해서는 종말론적 신앙생활에서의 선행(good works)을 통한 “의의 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선취된 칭의는 의의 열매 즉 선행이 없으면 취소되고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톨릭주의(Catholicism)입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단회 적이며 완전한 것으로, 더 이상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행위가 실패할 때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또 다시 두 번, 세 번, 매번 반복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죽으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행위는 믿음으로 행하는 행위, 즉 이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행하게 되는 것으로(벧전 4:10~11), 이것은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칭의”의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성화는 칭의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칭의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구원의 서정에서 점차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 얻어진 성숙과 그 영광의 정도는 다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에 있어서 간난아이나 어른이 똑같은 ‘사람’인 것과 같다는 이치입니다. 예를 들어 간난아이나 성숙한 어른이나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성숙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일 행위를 통하여 칭의나 구원이 취소되거나 통과될 수 있다면 그 정도가 얼마가 되어야 구원을 받게 됩니까? 말하자면 몇 점을 받아야 낙제(타락/멸망)를 면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는 가당치 않은 논리입니다. 이는 은혜언약의 교리를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구태여 이것을 정의하자면 세미-알미니안주의(semi-Arminianis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칭의나 중생은 단회 적이며 한번 받는 것으로 끝납니다. 다만 그 칭의로 얻는 구원이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의 행위의 과정을 통해서 더욱 성숙한 사람들로 성장하게 되면서 그 영광의 빛이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정도에 따라 주어지는 행한 대로 받는 상급으로,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의의 면류관을 받는 각자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고전 3:14).
만일, 칭의를 받은 자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칭의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칭의와 중생으로 얻은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취소”와 “멸망” 대신에 “보응”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회개”(repent)에 이르게 하시고(베드로와 같이) 결국에는 처음에 선언하신 칭의로 인한 의와 그 의를 힘입은 구원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학이며 칼빈의 불가항력적 은혜와 성도의 견인에서 증명되는 구원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신학의 권위자라고 하는 분이, 정작 율법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이방 신자들에게 강요했던 유대인신자들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라고까지 정죄했던 바울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한다면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K 교수의 결정적인 오류는 “칭의”를 포괄적인 차원(과거, 현재, 미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접근하는 것은 좋으나, 단지 시종일관 아날로그 방식의 시간적, 논리적 순서로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소위 선취된 칭의(첫 열매)의 완전성을 주장하면서도 종말에 가서 그 선취된 칭의가 의의 열매(행위)를 맺지 못할 경우에는 상실될 수도 있으므로,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앞뒤가 맞지 않는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에 받은 칭의가 유보상태에 있다가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에는 그 칭의가 상실된다는 논리인데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의의 열매를 얼마나 맺어야 합격이 되어 칭의가 완성된다는 것입니까?
사실, 칭의를 통하여 단번에 얻은 구원은 영생이라는 상으로 이것은 변동이 없으며, 성화의 과정에서 행한 대로 받는 상은 이생에서의 하나님의 축복과 사후의 영화로운 영광이라는 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한국교인들이 너무나 엉터리없는 생활에 빠져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을 지나치게 촉구하려다가 진짜 값진 은혜를 경솔히 여길 것이 아니라, 의롭지 못한 행위로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통한 무서운 고통의 보응을 받지 말고, 믿음의 의로운 삶을 통하여 이생에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사와 축복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지복의 기쁨(bliss)과 영광(glory)을 누리라고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K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칼 바르트(Karl Barth)가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정통주의(neo-Orthodoxy) 자가 된 것 모양으로, K 교수의 “칭의론”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그만 세미-칼빈주의 또는 세미-알미니안주의가 된 것 같은 오해를 떨쳐버릴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믿음’과 ‘행위’ 양자 중에 강조점이 다른 양단간의 신학을 함께 아울러 조화를 시도해보려다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해서 종교개혁을 성공했지만, 행위를 강조한 성경의 야고보서에 대해서, 지푸라기 서신(straw Epistle)이라고 하면서 성경에 없었으면 좋겠다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들어낸 것을 보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도하면서 믿음을 강조하다가 야고보서에서 발목이 잡혀 의로운 신앙생활을 강조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루터와 야고보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복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있어서 최종적인 목표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당시 가톨릭교회의 행위로의 구원이 개혁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했던 것이고, 야고보는 행위를 무시한 죽은 믿음을 질책하기 위해서 행위를 강조했지만, 알고 보면 야고보도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야고보가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K 교수의 주장이 얼핏 보기에 옳은 것 같으나, 문제는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촉구하려다가 “믿음의 의”와 “행위의 의”를 분리시켜 결국 믿음과는 동떨어진 “행위의 의”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의 종교개혁을 위하여 오직 믿음 일변도로 나간 것 같지만, 다른 한편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행함을 촉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할 때에도 믿음을 등한히 한 것이 아니라 균형 잡힌(balanced) 신앙생활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의”와 “행함의 의”를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묶어놓았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의 의”로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행함의 의”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2~24)라고 하며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실례를 들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칭의로 구원 받은 사람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로운 행위를 하게 되어 있고,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들로 올바른 행위를 했다면 그 사람은 칭의를 받은 사람으로 증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시각에 따라 칭의(무죄와 의인됨)와 의인의 삶을 디지털 방식으로 조명해서 믿음의 논리로 잘 전개했더라면 소위 “선취된 칭의”와 종말에 “완성될 칭의”가 일치될 수 있었을 터인데, 단지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논리를 전개하다보니 앞뒤(선취된 칭의와 완성될 칭의)가 달라져서 칭의를 받은 사람이 그의 행위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디지털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이며 입체적인 영상(spiritual 4D image)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성경을 올바로 바라보고 읽으며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칭의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칭의는 단회적인 선언이며 한번 선언된 칭의는 본질적으로는 변함이 없으며, 그 칭의는 성숙한 열매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칭의의 본질과 현상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언된 칭의로 말미암아 첫째 아담에 의해서 실패한 인간의 불의를 청산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K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다가, 어느 부분에 가서는 선취된 칭의를 받고도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또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믿음으로 구원만 강조하고 의로운 삶을 외면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 모양이 되었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미국의 하비 콕스(Harvie Cox)의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선구자 본회퍼(Dietrich Bon Hoeffer)가 주장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값진 은혜”(costly grace)를 사회적인 실천이 없는 은혜 즉 “싸구려 은혜” 즉 “값싼 은혜”(cheap grace)로 바꾸어버렸다고 주장합니다(Bonhoeffer, Dietrich, The Cost of Discipleship). 사실인즉,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아 의인이 되었더라도 그에 따라 의의 열매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지 아니하면 그것이 바로 “값싼 은혜”라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소위 사회복음주의의 행동주의(behaviorism)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4. 신학적 접근방법 (THEOLOGICAL APPROACH)
K 교수의 이론은 어원학적 접근방법(etymological approach)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학연구 방법의 차원에서 볼 때에, 그의 방법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유보”라는 말은 구조론적 방법(structural method)을 즐겨 사용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접근방법으로, 항상 존재론적 방법(ontological method)을 즐겨 사용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전제적 방법(presuppositional method)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어떤 명제를 개연성(probability)으로 가정하는 철학적 접근방법(philosophical approach method)으로, 귀납적인 과정의 방법을 통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결론에 가서 전제한 명제와 달라질 수 있는 확률이 대단히 큽니다. 물론, 이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예수님과 같이(마 25장) 전제적 명제가 정확히 설정된 가운데 변함없이 이를 증명하는 방식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명제(proposition)를 확정적으로 전제하는 것(presupposition)이 아니라, 그 명제의 개연성(probability) 즉 가능성(possibility)을 조건적으로 가정하고 상황(context)을 고려해서 연구한 후에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나 “예정”과 같은 것은 후회하심이 없으신 완벽한 하나님의 결정으로(롬 11:29) 변경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광야에서와 같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기간이나 코스를 변경한다거나 보응이라는 징계의 채찍을 사용하실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가나안의 약속”은 변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칭의나 중생이나 영생과 같은 신학적인 주제들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완전한 것으로 독자적인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신학적으로 전자를 허용적 작정 (βουλή, permissive decree), 다시 말하자면 근재 적, 또는 임시적 작정(temporary decree)이라 말하고, 후자를 가리켜 궁극적 작정 (θέλημα, ultimate decree)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중생”과 같이 한번으로 완성되는 영원한 궁극적 작정, 다른 말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the sovereign decree of God)에 속하고, “성화”는 계속해서 점진적인 과정 속에서 이루어나가는 근재적 작정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죄인에 대한 “무죄선고와 의롭다 여기시는 선언”으로서 단 한 번의 선언으로 완전하게 된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주시는 구원의 근거”(엡 2:8)인 반면에, “성화”는 이 세상에서 계속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성숙의 과정(the process of maturity)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행위에 관계없이 죽는 순간(영육분리 순간) 완성(영의 성화의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초대교회는 물론, 심지어 성 어거스틴(St. Augustin)까지도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확실한 구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톨릭주의(Catholicism)로 발전하는 것에 제동을 걸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행위는 물론 구원의 원인이 될 수 없지만, 믿음, 좀 더 엄밀하게 말해서 “오직 믿음”(sola fide)까지도 구원의 방편 즉 통로(through)가 아니라 구원의 원인(by)라고 할 때, 이러한 위험성에 대하여 철학적 존재의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까지도 로마 가톨릭주의 안에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나쁜 인간의 악업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욱이 Tillich는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바탕이나 원인이라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지 못 한다”라고 말했습니다(Paul Tillich, Perspectives on 19th and 20th Century Protestant Theology).
구조적 방법론은 하나님이나 성경권위(the authority of the Bible)의 절대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연성(probability)으로 “유보”해 두었다가 상황적인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성이나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겠다는 지극히 위험한 방법으로 이것은 고등비평방법(higher criticism)입니다. 이 방법은 양식사비평방법(formgeschichte)으로 원조는 슈미트(K. L. Schumit),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와 함께 불트만(Rudolf Bultmann)입니다. 현대의 다수의 신약학 학자들이 알게 모르게 이러한 비평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이상한 하나님이 되거나 무신론으로 변하게 되고, 성경의 무오성(infallibility)이 성경의 유오성(fallibility)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첫 열매로서의 칭의를 개연성(probability)으로 전제하고 “새 관점”으로서의 접근방법을 K 교수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첫 열매)을 받아도 행위(의의 열매) 여하에 따라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K 교수는 후 불트만 학파(post Bultmann school)의 신학자, 즉 불트만의 제자인 언스트 케제만 (Ernst Kaesemann)의 영향을 받아 칭의의 개념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언스트 케제만은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의 “제1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the first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이후에, 언스트 훅스 (Ernst Huchs), 군더 보른캄(Gunther Bornkamn)등과 함께 “제2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the secon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즉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탐구”(the new quest for historical Jesus)의 주역으로 후 불트만 학파(the post-Bultmann schools)에 속한 학자입니다.
그는 불트만의 제자였지만 불트만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작업의 과정을 통한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비역사적인 해석에 가장 큰 불만을 품었던 사람으로, 불트만을 뛰어넘으려는 야심으로 “새 관점”(new perspective, new quest)에서 예수의 역사성의 탐구와 칭의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길을 열어 놓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제만은 불트만의 양식사비평적 해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톰 라이트(Nicolas Thomas Wright)를 비롯하여 샌더스(E. F. Sanders), 제임스 던(James Dunn)과 같은 학자들이 이것의 영향으로 “제3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통한 “새 관점”에서 출발하여 칭의론을 이해하며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논쟁을 통하여 개인구원의 우선성에 초점을 맞춘 옛관점(old perspective)과 사회학적, 선교학적 차원에 초점을 맞춘 새관점(new perspective)의 절충 내지 두 관점의 통합의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신선한 새관점(fresh perspective)을 주장하고 있지만, 역시 새관점에 우선적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물론 K 교수역시 언약에 있어서 톰 라이트의 사회학적 선교학적 차원의 칭의를 비판하며 개인적 칭의의 우선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처음의 칭의가 마지막의 의의 열매로서의 행위에 대한 심판에서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케제만의 새로운 관점은 “칭의”라는 새로운 주제에도 적용되었는데, 그리스도와 동반하는 칭의를 제창했기 때문에 아마 K 교수가 이점에 맘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K 교수가 케제만에게 감명을 받았다는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칭의는 인간에게 칭의만 전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칭의와 함께 오셨다”는 대목으로 매우 매력적인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통한 칭의론의 접근에서 케제만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왔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 안에 그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K 교수는 단순한 “하나님의 의”의 전가가 아니라, 칭의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접근하는 칭의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론은 신학적으로 고도의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매우 타당성 있는 이론으로, 칭의가 한 낱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행동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추상적 하나님의 의(롬 3:25~26)도 아니고 행위적(공로적) 인간의 의도 아닌 제3의 저자적인 의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련성(relativity)으로 설정합니다. 이 관계성을 유지할 때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성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행위와의 정확한 관계를 도외시한 중간적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칭의란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 선언하심으로 그의 심판적인 의가 믿음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가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인 인간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회복된 관계"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에 있어서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의가 객체가 되는 인간에게 전이되는 과정을 다른 개념으로 K 교수는 “유보”(reservation)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포된 칭의가 단회적이 아니라 유보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동들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K 교수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련의 행위들에 따라서 선포된 하나님의 의가 취소될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칭의에 대한 실존(주의)적 의미가 부여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칭의의 선언은 택한 자들에게 한번만 내려주시는 은혜의 선물로서 유보의 과정에 따라 취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효과적인 은혜로 성도의 견인에 의하여 전혀 변함이 없이 유지되어 종말론적인 결과(열매)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단번에 몸을 드려 한 번에 이루신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권으로 단번에 선언해주신 확정적인 “칭의”의 “선언”을 “유보”라는 형식으로 종말까지 보류했다가 우리의 행위를 보아서 인정할 수도 있고 취소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바울의 성경구절의 의미를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해서 왜곡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정통신학의 조직신학에서는 한 결 같이 칭의의 단회성을 강조하며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성화와 구분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칭의는 단번에 선언되는 무죄선고이지 완성을 위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나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선언이라는 뜻입니다.
5. 상급론에 대하여 (ON THE REWARDS)
그리고 다른 주제이지만 비슷한 면이 있는 바울의 상급론에 있어서 이미 타계한 OOO교회의 K 목사가 주장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상급은 “영생” 즉 우리가 받는“구원”일뿐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을 기대하는 것은 잘 못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도 차별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논리입니다. 바울의 상급론을 다른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는 셈이지요. 물론 우리의 상급이 “영생”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바울이 말한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신학적으로 신학자들은 물론,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벌코프(Berkohf)도 상급을 “영생”으로 전제 하면서 행위에 따르는 상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의 선행이 그들의 공로일 수는 없지만, 은혜로운 상급의 척도가 된다고 했습니다(Systematic Theology, p.737). 최후심판 때, 생명책이 펴져있는 것 외에 행위대로 심판하는 다른 책들이 펴져 있습니다(계 20:12). 그러나 그 상급으로 인한 차별이 아니라 본질 적으로 영생의 영광이 동일한 것과 같이, 행위로 인한 각자의 상급인 지복(bliss) 즉 “영광”의 빛의 본질은 같지만, 영광의 빛의 정도(the degrees in the bliss of heaven)가 각자의 행위에 따라 다른데 (단 12:3; 고후 9:6; 고전 15:41~42), 그렇다고 차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개혁신학의 입장입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The reward of the righteous is described as eternal life, that is not merely an endless life, but life in all its fullness, without any of the imperfections and disturbance of the present, Matt. 25:46; Rom. 2:7. The fullness of this life is enjoyed in communion with God, which is really the essence of eternal life, Rev. 21:3. They will see God in Jesus Christ face to face, will find full satisfaction in Him, will rejoice in Him, and will glorify Him. We should not think of the joys of heaven, however, as exclusively spiritual. There will be something corresponding to the body. There will be recognition and social intercourse on an elevated plane. It is so evident from Scripture that there will be degrees in the bliss of heaven, Dan. 12:3 2Cor. 9:6. Our good works will be the measure of our gracious reward, though they do not merit of it. Notwithstanding this, however, the joy of each individual will be perfect and full.” (Berkohf, Systematic Theology, p.737).
다시 말하자면, 성경적인 상급의 개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받는 “유업의 상”(골 3:24; 히 11:6; 눅 6:23)인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함과 동시에,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행위에 따라서 받는 “상급”(마 5:12; 5:46; 10:41~42; 마 16:27; 눅 6:35; 고전 3:8, 3:14; 고전 9:17, 9:18, 9:24; 골 2:18; 히 10:35; 11:26; 요이 1:8), 즉 하늘의 기쁨인 지복 (reward, that is, the bliss of heaven)을 의미합니다. 이 상급은 모두 “영광”으로 빛나게 됩니다. 예수님과 바울도 분명이 이 상(reward)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마 5:12, 46; 6:1; 10:41;~42; 고전 3:8,14; 고전 9:17~18; 9:24; 빌 3:14; 골 2:18; 골 3:24; 히 10:35; 11:6; 11:26; 요이 1:8; 계 11:18; 22:12).
성경에는 같은 주제들, 예를 들어 믿음이나 구원과 같은 주제들에 관하여 이중적인 성격으로 언급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① 영생의 구원과 ② 현세의 구원(가난, 질병, 전쟁, 사단 등에서 해방과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어 나가는 성화의 완성 즉 성화의 구원)으로 말씀하며, “믿음”도 ① 영생 얻은 믿음과 ② 능력을 행하는 믿음 등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상급”에 대해서도, 원형적인(archetypical) 영생(eternal life)과 같은 구원의 상이 있는가 하면, 지상에서의 성도들이 그들의 믿음의 행위를 따라 받는 현세의 복과 내세의 영광과 같은 표상적(typical)인 상급(reward for the works)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상급에 관하여 사도 바울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 3:8, 14; 9:17; 빌 3:14; 골 2:18; 3:24; 히 10:35). 성경적인 상급론은 본지 토론방 414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CONCLUSION)
[새 관점학파]에서와 같이 “칭의론”이 잘못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칭의”를 보는 관점과 방법에서 잘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칭의”를 존재론적 본질이라는 정통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구조론(상황적)인 문제라는 새 관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는 상황에 따라 변할(취소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본문(text)에서 출발하여 상황(context)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정통적인 존재론적 방법(ontological method)이 아니라, 상황(context)에서 출발하여 본문(text)을 이해하고 증명하려는 구조론적 방법(structural method)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중생, 믿음, 칭의, 구원, 영생, 성화 등의 신학적 전문용어들의 개념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칭의, 중생, 영생과 같은 것들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된 미완성의 작품으로 보아서는 위험합니다. 물론 믿음이라든가 구원과 같은 것들은 이중적인 성격인 즉각성과 점진성의 측면이 있어서 성화와 같이 점진적으로 이루어나가는 면도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영생의 믿음은 단번에 완성되며, 생활의 믿음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성숙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구원에도 적용시켜서 영적이며 영생에 이르는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해결해주신 원죄해결을 통하여 믿음으로 완성됨과 동시에, 생활의 구원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자범죄를 해결하며 선행을 통하여 의로운 열매를 맺어 나가는 방식으로 점차적인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게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엡 4:13). 그러므로 경건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단번에 의롭다 인정받은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현세에서 신앙생활의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 2:12). 이것은 구원의 즉각성이 아니라 구원의 점진성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유보적 칭의”의 핵심은 처음에 받은 칭의(첫 열매)가 유보되었다가 종말에 가서 완성된다는 것으로,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칭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선언하신 “칭의”가 미완성된 것이라는 뜻이며,
둘째로, “칭의”가 아직도 미완성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칭의가 완성될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그러므로 항상 그것을 이루기 위해 피곤하게 살게 될 것이며,
셋째로, “칭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면, 종국에 가서 이미 믿음으로 얻은 칭의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염려와 불안으로 구원의 확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받은 “칭의”는 처음부터 완전한 “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행위에 의하여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종말에 가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가서 오히려 더욱 더 풍성한 의로 승화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칭의가 완전한 것이 아님으로 의로운 행위를 요구한다면, 미쳐 의의 열매를 맺기도 전에 주님의 십자가 옆에서 죽어 구원 받은 강도에 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이미 우리가 받은 칭의가 불완전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가 믿음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맺어 더욱 풍요롭게 되며, 그로 인한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거두어 더욱 풍성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지극히 성서적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날로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칭의”(justification)는 처음부터 완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언으로, 믿음으로 받는 "유업의 상"(the reward of inheritance through faith, 골 3:24)인 영생(eternal life)으로 확정된 것으로 불연속성(discontinuity)인 동시에, “성화”(sanctification)는 칭의의 연속성(continuity)으로 우리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성숙화되어 각 개인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마 16:27) 현세에서의 축복과 하늘에서의 상인 "보상의 상"(the rewards in heaven)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보면 "칭의"와 "성화"가 구원의 양면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구원의 한 측면인 "칭의"(믿음)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반면에, 또 어떤 이들은 구원의 다른 측면인 "성화"(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디지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믿음에 의한 칭의"(the justification by faith)와 "행위에 의한 성화"(the sanctification by actions of faith)는 신비로운 연합(mystical union)의 관계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과 인간의 영육 양성의 신비로운 연합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디지털 방식으로 보면 "칭의"와 "성화"가 연합된 하나로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구약과 신약의 양면성으로 보이면서 신약과 구약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 것으로 이해되어,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변함없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권하고 싶은 말씀은, 칭의(중생)를 받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행위의 열매인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이미 받은 구원이 취소되어 멸망하지 않도록 의로운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할 것이 아니라, 세속에 빠져 죄를 범하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받아 고통을 당하지 말고 그들 속에 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의의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이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은사와 축복은 물론, 천국에서의 의의 면류관의 영광스러운 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라고 촉구하는 편이 성경(복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단지 최선을 다할 뿐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Chong Shin University in USA
Systematic Theology (Professor)
Rev./Dr. Paul B. J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