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죽산 박형룡 - 한국 보수신앙 수호자
한국 보수신앙의 수호자, 죽산 박형룡 박사
[ 2011-01-06]
< 죽산 박형룡 박사>
"신학적 정통성과 교단 보수에 헌신
저서와 교육 통해 보수신앙 지켜"
죽산과의 첫 만남
"호명합네다"
강한 평안도 액센트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조그만 키의 교수님을 보고 "아 저분이 박형룡 박사님이구나"라고 감탄하는 것으로 죽산 (竹山, 박형룡 박사의 호)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때 죽산은 70을 바라보는 원로 학자였고,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총회신학교 (오늘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과에 갓 입학한 20대 초반의 여학생이었다. 그때까지 총회신학교에서는 M. Div. 과정에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1년을 기다린 끝에 학칙이 개정되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3명의 여학생이 M. Div. 과정에 입학하였는데 한 분은 재학 도중 부산의 어느 목사님과 결혼하여 도중 하차하고 안춘진(성도 교회 권사)과 필자만이 3년을 계속하여 같이 공부 하였다.
당시에는 명신홍 목사님이 교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어느 모로 보아도 총신의 지주는 교의신학을 전공한 죽산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총신이 일구어졌고 또 이끌어져 왔다.
필자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남학생들의 구박(?)을 많이 받았다. 입학시험날 어떤 수험생이 "목사도 못될 것인데 뭐하러 오신겁니까?"라고 하였다 (나중에 보니 그는 성남의 김태규 목사였다).
이렇게 시작된 신학공부에서 죽산과 연관된 이야기부터 하려고 한다. 1년 선배였던 김충남 전도사(현재 미국 산호세 순복음교회 목사)가 "고학생 자활회"를 만들었다. 김충남은 「산곡의 백합화」라는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저술하여 교수들과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얻어온 일거리는 죽산의 한문투성이의 「교의신학」원고를 책으로 출판하기 위하여 200자 원고지에 정리하는 일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는 편지지에 책의 원고가 기록되었는데 끈으로 맨 부분은 일정하나 보완하여 첨가한 부분은 크기가 커져서 배가 불룩하게 나온 죽산의 강의안이었다.
여러 학생들이 나누어서 원고를 정리하였다. 그때 함께 죽산의 원고를 정리를 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45년의 세월이 지나서 모두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홍정이, 정정숙, 박종구 등이 이일을 하였다. 그 원고들은 한문 투성이였기 때문에 젊은 우리는 이두문자를 해독하듯이 독해하였다. 어려운 한문은 한글로 표기하고 괄호 안에 한문을 넣고 문맥과 토씨를 고치는 등의 작업이었다. 수고비가 원고지 한 장에 1환이었던가? (당시 기숙사의 점심값이 한끼에 20환이었다). 그러니 김충남이 죽산으로부터 원고를 가지고 와서 일하는 속도와 분량에 따라서 나누어 주면서 일을 시켰는데, 이렇게 정리된 「교의신학 서론」과 「교의신학 신론」이 책으로 출판되어 나왔다.
그후 김충남과 홍정이는 죽산의 집에 입주하여 죽산의 일을 도우는 조수가 되었고, 우리는 계속하여 학교 공부에 매진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죽산의 책이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우 중에 정길성 목사가 죽산의 「교의신학」강의 노트를 철판에 긁어서 프린트판 교재를 만들었고 매학기 초에 우리는 그 프린트 판을 사서 공부 하였다.
죽산의 강의 방법은 그의 강의 노트를 그대로 읽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프린트 판 교재에 밑줄을 치면서 죽산이 읽는 것을 따라갔고, 간혹 질문을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웅변 보다는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서 침묵을 택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산으로부터 신학서론, 신론, 인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등의 3년에 걸친 교의신학 전반의 교육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한 교육방법이었지만 총신의 신학적 근간을 확립한 면에서 그의 신학은 우리에게 개혁주의 신학의 골격을 세워 주었다.
학문세계의 배경
죽산 박형룡은 거대한 산이다. 봉우리가 높은가 하면 골짜기가 깊은 양면성이 있다. 그의 평생은 학문의 삶, 그것도 신학의 삶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높은 산을 바라보고 감탄하는가 하면 죽산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내젖기도 한다.
죽산은 이 나라가 패망의 길로 가던 구한말인 1897년 음력 3월 28일에 압록강변에 위치한 평안북도 벽동읍에서 박기수의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가난한 산골의 농부였고, 술을 즐겼으며, 아들의 공부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못했다고 한다.
죽산의 글이나 강연등에는 어린 시절과 부모 그리고 사생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그래서 죽산의 사적 경험을 오늘의 우리들이 알 수가 없고, 또한 그의 사적 경험이 그의 공적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첬는지 알 수가 없다.
죽산은 10살(1907년)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그후 기독교에서 설립한 소학교에 다녔다. 열여섯 살에 신성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현대식 중등교육을 받게 되었다.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죽산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거쳐서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에서 학사학위(B.A.)를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죽산의 회심
죽산은 벽동읍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이 교회 부설인 신명학교에 다녔다. 아마도 이때가 1907-1910년 사이인 것같다.
벽동읍 교회는 1903년에 미국 북장로회 선천 선교구에 소속된 계인수(Carl E. Kearns, 1876-1953) 선교사가 세웠다. 계인수 선교사는 활동적인 사람으로 1905년 한해동안 무려 66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그후 1907-1914년까지 7년 동안 최봉석이 조사로 시무하였다. 최봉석은 "예수 천당"을 외치던 열정적 전도자로 "최권능"이라고도 불리웠고 1916-1926년 10년간 50여 교회를 세웠고,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감옥에 갈 때까지 30여 교회를 더 세웠다고 한다.
죽산은 그 교회에서 성장하면서 여러 모양으로 최봉석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죽산은 또한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죽산이 회심한 것은 1910년 무렵으로 보인다.
학문에의 길
죽산은 신성학교에서 현대식 교육을 받게 된다. 신성학교의 교육이념은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였다. 나라가 망해가는 혼미한 시대에 서북지방의 선각자들이 기독교와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고,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새로운 인재를 육성하려는 열정의 산물이 신성학교이다. 죽산은 신성학교에서 양전백, 강규찬, 홍성식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양전백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강규찬이 시무하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부교역자가 되는 등의 인연이 있었다.
1916년 봄에 죽산은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고등교육을 받았다. 숭실전문학교 4학년 때 죽산은 3?1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또 1920년 4월 9일, 죽산은 숭실전문과 중학생 연합부흥전도대 강사로서 전남 목포에서 전도강연을 하다가 강연 내용이 문제가 되어 1920. 4.9-1921. 2. 11까지 10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숭실전문의 학장이며 평양신학교 교장인 마포삼열 선교사는 목포 감옥에서 출감한 죽산에게 외국 유학을 권했다. 마포삼열은 죽산의 유학 자금을 마련해 주었고, 미국에 보내려고 했지만 죽산에게 학사학위(B.A.)가 없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시키기 위해서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영어 명칭은 The University of Nanking)으로 유학을 보냈다.
죽산은 그곳에서 2년을 공부하여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런데 죽산의 기록에는 남경 유학 시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것은 그의 사적 경험의 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린스턴 신학교로
죽산은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1923년 9월부터 1926년 5월까지 3년간 공부하였고, 신학사(Th. B)와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았다.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8개로 분류된 신학 영역을 이수해야 하는데 죽산은 매주 31-33 시간의 강의를 수강했다. 그 당시에는 신학사 과목과 신학석사 과목을 동시에 수강하여 학점을 취득할 수 있었는데, 주당 8시간의 전공과목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미국 학생들도 따라하기 힘든 과정을 공부에만 집중하여 그것을 무사히 끝냈다. 죽산은 그곳에서 세계적 신학자들의 강의를 들었고, 그의 전공을 변증학으로 정하였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이른바 "고전적 변증학"(Classical Apologetics)을 꽃피운 학교이다. 위필드(Benjamine B. Warfield), 그린(William Brenton Greene, Jr.), 메첸(J. Gresham Machen) 등과 같은 학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죽산은 메첸과 개인적 교류를 가졌고 훗날 그가 한국의 메첸으로 불리운 것도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죽산은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하여 켄터키주 루이빌에 소재한 남침례교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1년 가까이 공부한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목회와 신학교육을 감당하면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여 제출하였고, 1933년 1월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의 사역
죽산은 중국에서 2년, 미국에서 4년간의 공부를 끝내고 1927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하여 1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사역하다가 평양 산정현 교회의 전도사, 동사목사, 임시목사로 시무하였다.
평양신학교 임시 교수를 거쳐 1934년에 변증학 교수가 되었고, 「신학지남」에 변증학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기독교 신학난제서평」이 1935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은 자연과학과 신학적 자유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전통적 기독교를 옹호하는 글이며, 한국 신학사상사에서 주목하여야 할 책이다.
죽산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대해 정통적 기독교를 옹호하는 보수신학의 투사가 되었다. 송창근, 김재준 등의 진보주의 신학에 맞서서 보수주의를 지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일제말과 해방후의 자취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불법결의로 인하여 한국 교회가 혼란에 빠졌고 평양신학교가 자진 폐교를 하자 죽산은 일본 동경에서의 망명생활을 거쳐 만주신학원(일명 동북신학원)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출옥 성도들의 한국 교회 재건 원칙 작성에 동참하기도 하였고, 송상석 목사의 안내로 귀국하여 신설된 부산의 고려신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죽산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과 정치의 핵심에 서게 되었다. 약 6개월 정도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수행하다가 사임하고 상경하여 1948년 6월에 서울 남산에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했다. 장로교 총회는 장로회신학교와 기존의 조선신학교를 통합하여 1951년 9월에 대구에서 총회신학교가 개교되었다. 조선신학교는 1953년에 장로교 총회를 이탈하여 독자노선을 걷는다(오늘의 기장측과 한신대학교이다).
죽산은 고신측의 분립, 기장측의 이탈과정의 증인이었고, 1958년에는 이른바 "3,000만원 사건"으로 총회신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는 등 곤욕을 치루었다. "3,000만원 사건"이란 행정미숙으로 인한 사기사건이었다. 남산의 숭의여학교 부지를 불하받아준 박호근이란 사람이 남산신학교의 땅을 불하받아 주겠다고 하여 교섭비로 건넨 액수가 3,000만원이었다. 당시 학교의 경리는 박내승 목사가 맡고 있었다.
죽산은 1959년의 통합측 이탈 때 그 중심에 섰고, 고신측과의 합동과 환원이라는 교회 정치의 처절한 증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72년 2월에 교수직에서 완전히 은퇴하였고 1978년 10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죽산에 대한 재조명
죽산은 총신의 신학적 기둥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논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총신은 죽산을 외면하였다. 그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그의 자료조차 제대로 모아지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장동민이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죽산 박형룡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이 우리 말로 번역되어 연구가들에게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장동민은 또한 「박형룡」(살림, 2006)이라는 평전을 저술하여 죽산 연구의 길을 열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죽산신학강좌」를 간헐적으로 개최하고 「신학지남」에 연구 논문들이 발표되기도 한다. 죽산의 제자들이 「박형룡 전집」(전24권)을 간행하였으나 그 전집이 계속 발간되지는 못하고 있다.
2010년 5월에 「죽산 박형룡 박사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으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서 답보상태인 것이 가슴 아프다. 오늘의 우리들이 죽산의 신학적 우산 아래서 지내왔음을 부인할 자가 없다. 인간적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고 있으니 이것이 실리적 계산법일까?
지금도 "작은 거인"인 그를 기억한다. 작은 키지만 높은 산봉우리였고, 개혁주의 신학의 찬란한 꿈을 안은 꿈꾸는 자(Dreamer)였다. 필자는 3년동안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그의 강의를 경청하며 노트 필기를 하고 강의안에 밑줄을 그었다. 개인적으로는 죽산으로부터 따뜻한 정을 느낄 만큼 개인적인 교류를 한적이 없지만 그의 문하에서의 3년은 내가 개혁주의 신학의 골격을 형성하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죽산에 대한 체계적 연구 작업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책무이건만 우리는 무관심하였고 외면하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일어나자. "개혁신학의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사표였던 "죽산탐구"가 무엇보다 필요하리라고 본다. ◇
필자 정정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