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밝은 영안이 어두워지는 한 예 - 오징어사건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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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밝은 영안이 어두워지는 한 예 - 오징어사건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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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그 무렵 중앙교회 안에는 큰 문제가 생겨났다. 이것이 속되게 말해서 오징어 사건이다. 사람들은 때로 사소한 일도 자기 견해에 맞추려는 덧없는 노력 때문에 큰 일로 만들어 버리는 수가 많은 것이다.

속초시 노학동에 있는 신흥교회에 황순덕 전도사가 시무를 하고 있었다. 황순덕 전도사는 일제말엽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된 바 있던 손양원 목사의 가족들을 돌봐 준 귀한 분이시다. 지금도 손양원 목사의 자녀들은 황순덕 전도사를 고모로 부르고 있다. 황고모, 황고모하고 있다. 신흥교회는 1970년 2월 22일, 황순덕 전도사가 박만규, 양석규 집사 등과 함께 개척을 한 교회이다. 이 신흥교회가 교회당 건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체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교단산하 각교회의 도움을 청하는 형편에 있었다. 그냥 손 벌리는 것이 염체없는 일인줄 알고 속초의 명물인 오징어를 파는 작전을 펴게 되었다.

오징어는 누구나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먹을 바에는 신흥교회가 제공하는 것을 사먹으면 도움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는 곳을 연락하여 오징어를 제공하였다. 황순덕 전도사는 윤목사와 옛부터 아는 터였고 윤목사는 믿음 좋은 여전도사가 고생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도우기로 마음 먹었다. 특히 윤목사는 개척하는 일엔 언재나 협조적이었다.

윤목사는 황전도사에게 오징어를 보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속초에서 오징어가 한 트럭이나 실려왔다. 2,000축의 오징어를 서울중앙교회 계단 밑에 풀어 놓았으니 윤목사는 얼떨떨하였다. 윤목사는 최해일 목사에게 전화를 것었다.

"최목사님, 도와 주시오." 자초지종을 들은 최목사는 허락을 하였다.
"300축만 보내 주십시오." 윤목사는 영천교히에 전화를 걸었다. 최영구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최영구 목사도 윤목사의 말을 거절할 수 없어 200축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아는 교역자들을 통하여 2,000축을 서울 시내교회에 분배하였다. 남은 것 200축을 서울중앙교회가 맡기로 하였다. 주일낮 예배시 윤목사는 광고시간에 교회에 광고를 하였다.

"속초 신흥교회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오징어를 보낸 것이니 한 축씩 사 가십시오, 이것은 오징어를 사 먹는다기 보다 신흥교회 건축을 위해 연보를 한다는 의미에서 갖고 가시면 됩니다. 오징어는 질이 좋고 맛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 후 교인들이 나가면서 오징어를 갖고 갔다. 오징어를 들고 나가면서 질이 좋은 거라고 좋아들 했다. 오징어 질이 좋다는 소문이 중앙교회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 펴저서 교인이 아닌 불신자들이 몰려와 사가지고 간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오징어는 다 나누어 졌다.

그러나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다음 주일 예배 후 어느 장로가 윤목사에게 따졌다. "목사님, 오징어를 주일에 광고를 하여 사가지고 가는 것은 장사가 아닙니까? 주일에 장사를 해도 되는 겁니까?"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연보하는 것으로 생각해야지요." "아닙니다. 이것은 연보라고만 간주할 일이 못됩니다." 그 장로는 정색을 하며 윤목사에게 따져들었다. "목사님. 교인들만 사가지고 갔다면 혹 너그럽게 생각해서 연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이 몰려와 다 사가지고 갔습니다. 이것도 연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장사입니다. 줄일날 장사를 하다니 이건 너무나 큰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 할말이 없었다.

오징어 사건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갔다.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단순히 오징어 사건으로만 볼 수 없었다. 교단 정치적인면도 작용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윤목사는 중앙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바 있었다. 교회기 비대해지고 수준도 높아졌기 때문에 자신의 역량으로 이끌어 가기엔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그를 적극 협조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마음의 부담을 더욱 과중하게 만들었다. 강단에 서기가 힘겨웠다. 홍반식 박사를 자주 청하였다. 이때부터 윤목사의 마음은 중앙교회를 떠나고 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자신의 힘에 맞는 작은 교회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1970년 10월 6일, 신촌교회에서 모인 제32회 정기노회사 윤목사는 중앙교회 위임목사 사면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노회에서는 마땅한 임지가 없이 사면서를 제출하였음인지 사면서를 받지 않고 임사부에 넘겼다. 임사부에서는 즉시 처리하지 않았다. 윤목사는 사면서를 받아달라고 임사부원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임사부에서는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 노회 기간이 지났다. 1971년 4월 13일, 중앙교회에 모인 제33회 정기노회에서 윤목사의 사면서는 처리가 되었다. 사면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 1978년 4월 노회서 윤목사는 동부교회 담임목사 사면서를 제출하였다. 70세 정년이 되었기에 은퇴를 하는 것이었다. 평생을 경건한 모고히자로서 실수없이 걸어왔다. 비교적 순탄한 모고히의 길을 걸은 셈이다. 심한 굴곡은 없었다. 농촌교회 목회시부터 큰 교회를 담임하기까지 별 어려움이 없었다. 식솔도 간편한 편이었다. 1남 2녀였기에 교회에 큰 부담을 주지 않았다.

은퇴를 하고나니 허전하였다. 잠실에 있는 서민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사짐도 간편하였다. 부인과 함께 조금은 적적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가까이에 아들 가족이 있어 주야로 돌보아 주었다. 심방과 설교 준비만을 전업으로 생활하다가 그 일을 그만 두게 되니 먼저 마음이 공허하였다. 낮이면 거리를 나다나는 형편이었다.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정신도 흐려 있었다. 일을 하다가 일을 하지 않으니 무엇이 어떻게 되는건지 마음이 공중에 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실성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주님 앞에 서는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퇴 후 정신 실성이 심했다고 전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