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여호와증인 세계 지도부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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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여호와증인 세계 지도부의 증언


여호와증인을 비판하는 수 많은 글을 접할 기회가 있었으나 거의 본 기억이 없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그 비판의 글들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행위였습니다. 여호와증인의 세계 본부의 최고 지도자가 내부를 비판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그들은 수에 칠 가치가 없도록 치명상을 입습니다. 이단을 상대할 때는 그들의 말을 일일이 좇아 가며 반증하는 "몰지각"이나 "자멸"을 피하는 것이 이 노선의 이단 대처 지도 지침입니다. 이단이란 99%가 다 맞는 듯하고 철옹성 같아 보이나 1%의 감춰 진, 그러나 의외로 가장 외부에 노출 된 고리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만 걸어 놓고 끝장을 보면 됩니다. 그들이 싸우자는 장소를 따라 다니며 그들이 흘려 놓은 증거들을 찾아 다니는 짓은 정화조에 손을 넣고 손가락으로 찍어서 혀로 맛을 본 다음에 "아! 똥이구나!"라고 하는 일입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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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특공대


레이몬드 프렌즈

레이몬드 빅터 프렌즈(Raymond Victor Franz, 1922년 5월 8일?2010년 6월 2일)는 1971년 10월 20일부터 1980년 5월 22일까지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 성원이었다. 그는 워치타워 조직의 본부에서 15년을 봉사하였다.(1965-1980년)프렌즈는 1914년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통치체에서 해임되었다.그후 배교로 제명되었다. 프렌즈는 워치타워 조직에서의 자신의 경험과 여호와의 증인 교리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양심의 위기","그리스도인 자유를 찾아서)


워치타워 경력

프렌즈는 1922년 출생하였다. 그의 삼촌인 프레드릭 프렌즈는 이 종교의 발전과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4대 협회장이다.그의 아버지는 성서 연구생 운동에 참여하였고(여호와의 증인 전신으로써 별도의 발전 역사를 가지고 있다.),1913년에 침례받았다. 레이몬드는 1938년에 여호와의 증인에 참여하였고, 1939년에 침례받았다. 1944년에 프렌즈는 이 종교의 선교인 양성학교인 길르앗을 졸업하였고, 일정기간 미국 순회구를 여행하는 감독자로써 지낸 이후에,1946년에 프에르토리코 선교사로 임명되었다.프렌즈는 캐리비안 지부 대표가 되었고, 버진 아일랜드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순회하였다.1957년에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하였다.

프렌즈는 37세에 신시아 자매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선교봉사에 동참하였다. 둘은 모두 1961년에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돌아와서 4년을 더 선교봉사한 이후에, 뉴욕 브룩클린 워치타워 본부에 임명되었다.프렌즈 조직의 집필부에서 일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 최초의 백과사전인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를 공동 집필하였다.

1971년 그는 통치체 성원으로 임명되었다. 개인적 회고에서 프렌즈는 1979년에 내적 혼란을 겪었다고 말한다: "나는 거의 40년 동안 조직의 모든 부서에서 대표자로 일하였다. 마지막 15년 동안 나는 세계 본부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그중 마지막 9년은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 성원으로 일하였다. 이 마지막 기간은 나에게 혼란의 시간이었다. 환상이 현실에 직면하였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수도 있었다.(수혈거부, 병역거부,선거와 투표 거부등) 그리고 실제로 죽었다. 통치체 성원들은 현실 감각을 상실한 채 보편타당하고 상식적인 진리가 아니라 미신적이고 권위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그런 결정에 목숨을 바치고 있었다. (말라위에서 단지 당원증 구입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들 수백 명이 화형과 강간과 살해를 당하였다. 동일한 시대에 멕시코에서는 뇌물을 주고 형제들이 병역을 면제받도록 협회가 편지를 보냈다.)" 통치체 성원들의 독단적 교리화와 성경에 지나친 대한 확대해석을 보고 1979년에 프렌즈와 그의 아내는 세계 본부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추방1980년 프렌즈와 그의 아내는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브룩클린 본부를 떠나서 알라바마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 증인들의 사유지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통치체에 워치타워의 잘못되고 모순적 교리들에 대한 염려를 나타내는 편지를 보냈다. 이 일로 그는 사법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해 변론할 기회를 가졌다.[12][13] 1980년 3월 15일 파수대 기사를 통해 1975년에 아마겟돈을 기대한 것은 잘못된 기대였을을 실었다.[14]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큰 실망을 가져왔다.[15] 1981년에 프렌즈는 배교로 제명되었다. 제명된 이후 통치체의 위선과 워치타워의 거짓 교리을 폭로한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양심의 위기","그리스도인 자유를 찾아서)

2010년 6월 2일 향년 88세로 사망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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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호와의 증인 출신의 고백이단 사이비

2013/07/23 19:16
http://blog.naver.com/cselee59/100192580814




어느 여호와의 증인 출신의 고백

글쓴 분-작은 화분님




저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남자 아이를 두고있는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구요. 제가 "여호와의 증인"과 관계를 맺게 된것은 제가 중학교 3학년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1년전이 되는군요.

세월이 참 빠르다고 느껴집니다. 친구 B군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된 "여호와의 증인"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기존 교회에서 풀 수 없던 많은 갈증들이 대부분 해소되었다고 느꼈으니까요.

저는 전 시간 봉사자(파이오니아라고 지칭)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그분의 사무실에서 일대일로 성서를 같이 공부했습니다. 그분이 가르쳐준 성서의 내용은 기존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해석이었고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였습니다. 또한 그분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 즉 제가 관찰할수 있는 범위의 모든 "증인"들은 겸손하며 도덕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여호와의 증인"을 점차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에 관한 교육을 마친 후 제사 때 절을 하지 않겠다는 저를 보시고 엄청 화를 내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납니다. 걱정스런 얼굴로 저를 설득해 보겠다던 친척 누나의 염려도 그때 당시 이미 굳어버린 저의 마음을 돌이키진 못했습니다. 기독교의 성서에 일가견이 있다는 분들도 만나 직접 토론해 보았지만 그들의 성서 이해의 수준은 정말 실망스러운 것이었고 그럴 때마다 "여호와의 증인"이 "진리"라는 확신은 점차 굳어져 갔던것 같습니다.

지식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호와의 증인"에 관련한 비판 서적도 열심히 읽어 보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근거없는 중상모략의 수준을 넘지 못했으며 교리에 관한 비판도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로 유치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그런 감정적인 비난은 저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굳혀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연구 도중 누군가 저에게 "너는 여호와의 증인이 진리라고 확신하니?"라고 물어보았을때 90%이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정도로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조금 이상한 점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연대를 산출하게 되는 방법에 관한 것이 있었는데 다니엘서를 근거로 예언을 풀어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연도를 추정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처음 공부를 할 당시에는 정말 놀랄만한 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를 찬찬히 읽어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예언이 "예수님의 재림년도를 예언하는 것"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는 근거의 성구는 조금 억지라고 느꼈습니다.

또한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 예수님이 재림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례없이 큰 전쟁이라고 하는 점에 중점을 두었지만 산업 및 군사기술이 발달하면서 전쟁의 규모는 커지는 경향이 있었기때문에 새로이 일어나는 전쟁은 항상 이전 어떤 전쟁보다 더 참혹해왔기 때문에 특별히 그러한 점에 주목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즉 1차세계대전이 예수의 재림 표징이라고도 말할수 있지만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부분에서도 의혹은 있었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이 부활하였을 당시 그 제자들이 보여준 행동은 이상한 것(예를 들어 한번에 알아보지 못한 점)이었지만 전체적으로 성서는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던가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던가 하는 것으로 육체 부활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가 그만 둔 사람들에 관해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간단히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들끼리 모이기도 하는 것 같고 자신들을 중상모략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는 식사나 대화 자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실뿐 더이상 언급을 회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여호와의 증인이었다가 그만 둔 사람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고는 느꼈지만 만날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 또한 그렇게 간절하지도 않았기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물론 그들로부터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 회중을 지킬 의무가 있겠지만 그러한 사람들과 식사도, 인사도, 대화도 하지 않는다는 그분들의 견해에는 동조할 수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까지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곳 카페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말 그렇게 하더군요.

한 번은 그들의 집회 참석을 요청받아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이후에도 몇 번을 참석했었던것 같습니다.) 다들 따뜻하게 저를 맞이해 주었고 그들의 사랑을 느낄수 있었습니다만 그날 주제는 저를 조금 혼란스럽게 하였습니다.

흑인 여성 증인의 간증이 파수대지 기사(아니면 "깨어라"일지도 모릅니다)에 나왔는데 악한 영이 밤마다 자신을 강간하는 경험을 하고 괴로워 하던 중에 여호와의 증인을 알게 되었고 그후 그 영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사탄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수 있는 실제 존재하는 영이라고는 믿었지만 그렇게 개인적으로 인간을 학대를 할만큼 "한가한?" 영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짙은 이 기사는 이전 제가 교육 받아왔던 "논리적이고 설득력있는" 그분들의 모습과는 조금 대조적이라 느꼈지만 증인들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사탄의 영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한 신비적인 기사는 자제해야하지 않겠냐고 "워치타워협회"에 편지를 써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던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러한 의혹은 전체적으로 볼 때 "사소한"것이었고 상대적으로 그들의 교리는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논리적이고, 사람들 또한 단정하며 예의 바르고 겸손하였기에 저는 그들과 함께 할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침례는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침례를 받지 않은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습니다. "가족"을 핑계대고 있지만 사실상 용기가 없었던것 아니냐고 질책하신다면 사실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증인"이 되어 학업을 포기하고 군대도 가지 않는다면 저희 아버지는 어떤일을 저지르실지 예상하기 힘들었습니다. 우리 가정이 파탄나는 것은 당연했고, 극단적으로 아버님은 "자살"까지도 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구원을 위해 가정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고 매우 이기적인 나만의 생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의 때를 놓칠지는 모르더라도 우선 가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진학했으며 영적 양식을 받지 못해서인지 성서에 관한 관심은 점차로 멀어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성서가 진리라면 바로 "여호와의 증인"이 참 조직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우연히 JMS라는 종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여신도를 강간하다 어떤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으로 정명석 교주가 교도소에 수감된 이 사악한 사이비 종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범죄로 얼룩진 사악한 집단이었습니다.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열렬한 신도들은 모든 것은 모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것은 그 교주는 그렇게 수많은 범죄 즉 강간, 살인 음모 ,횡령 등에 관계되면서도 신도들에게는 매우 수준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나 추악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교주와는 달리 일반 신자들은 높은 도덕적 표준에 따라서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 교주의 죄를 없애주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신도들의 진실어린 생활과는 반대로 그들을 지도하고 있는 이익 단체는 사악할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윗 물이 썩어도 아랫 물은 맑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렴풋이 여호와의 증인도 그와 마찬가지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가 보았던 많은 증인들의 진실함이 워치타워협회가 진실하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 충분 조건은 아니라는것을 짐작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고 어렴풋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여기 카페를 알고 난후 저의 그러한 짐작이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레이몬드 프랜즈의 "양심의 위기"라는 글은 상당히 설득력 있고 신빙성 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여호와의 증인 조직이 휼륭한 도덕적 표준을 지키고 성서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것이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지만 "이탈"된 형제들에게 말도 못하게 하는 폐쇄적인 종교라면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성서에 순종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아닌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이기적인 발현이 아닌가?" "자신의 구원을 버리면서까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는 없는가?" 저는 이러한 질문이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 형제를 사랑하는 차원에서 발현된 어떤 행동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수 있다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알게된, 지난 협회의 연대 1914, 1925, 1975 등등 빗나간 예언으로 인해 제가 그토록 진실한 단체라고 생각한 "여호와의 증인"이 다미선교회와 같은 한낮 시한부 종말 단체과 비슷한 사이비 종교일뿐이라는 "가능성"을 열게 되었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수고하시는 여러분들에게 따뜻한 애정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현재 저는 무교로서 여러분들께는 진실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성서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임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의 믿음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호와의 증인의 최고 지도부의 잘못된 영향으로 인하여 성서를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만 항상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견해를 듣고 싶어하며, 믿음을 가지신 분들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도 이곳 카페에 활동할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묻고 싶으며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의 정보만이라도 공유하고 싶습니다.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 : 혹시 레이몬드 프랜즈의 "양심의 위기"혹은 기타 다른 저술들을 제가 구할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영문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출처는 사정상 밝히지 않습니다. 알고 싶으신 분은 댓글을 달아주십시오.)





아래에 레이몬드 프랜즈의 좀 긴 글이 있습니다. 차분하게 읽어보세요.





여호와의 증인 세계 최고 지도자 통치체 성원에서 제명당한

레이몬드 프랜즈의 간증







레이몬드 프랜즈-인생의 궤적과 신앙





취재 및 글 : 무라모토 오사무





소개말





이 전기는, 여호와의 증인의 최고 중추 기관인 통치체의 얼마 안 되는 일원으로서 전 세계에 있는 수백만 명의 여호와의 증인을 지도한 레이몬드 프랜즈의 인생의 궤적과 신앙을 그린 것이다. 현재까지 레이몬드 프랜즈는, 여호와의 증인의 최고 중추 기관의 내부를 체험했기에, 그것을 외부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레이몬드 프랜즈가 1980년에 통치체를 사임했을 때, 이 사건은 여호와의 증인의 사회에서 큰 화제 거리가 되었다. 거기에는 그가 당시의 제4대 협회장인 프레더릭 W. 프랜즈의 조카인 것도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그의 인생은,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전형적인 삶의 방법과 신앙을 보여주는 한편, 그가 조직으로부터 제명되어 가는 과정은, 워치타워협회 조직의 내부 실태를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파란 많은 인생 체험은, 그가 저술한 2권의 책, 「양심의 위기」(Crisis of Conscience)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찾아서」(In Search of Christian Freedom)에 자세하게 진술되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러한 저서가 일본어로 번역이 완성되어 있지 않다. 지금 이 전기에서는, 이러한 저작을 포함한 많은 자료와 레이몬드 프랜즈 본인에 대한 취재를 통해서, 그의 인생과 신앙을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통치체 성원으로서의 활동을 묘사한 부분에서는「양심의 위기」책 내용을 많이 인용했으므로, 필자는, 이 중후한 프랜즈의 저작을 영문으로 독파할 시간이 없는 분들에게 그 내용의 개요를 간단하게나마 아는데 도움을 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묘사를 통해서, 워치타워 종교의 밑바탕에 있는 것이 이유가 되어 워치타워에서 사라진 레이몬드 프랜즈의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으로, 일본 여호와의 증인 분들에게 생각할 양식을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덧붙여 성서의 인용은 원칙적으로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에서 발행한 신세계역 일본어판을 사용했으며 워치타워협회 출판물의 페이지를 인용할 경우, 원칙적으로는 영문판에 근거했지만, 일본어판 페이지를 알 수 있는 경우에는 그것도 같이 표시해 두었다. 이 전기를 집필하는데 특별한 협력과 격려를 해준 레이몬드 프랜즈 씨와 로자린 휴즈 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성장 배경





 레이몬드 프랜즈(이하 레이라고 하는 그의 애칭으로 생략한다 )는 1922년 5월 8일,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의 대안의 마치 켄터키 주 데이톤에서 독일계 이민자의 가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맨 프랜즈는 생애 현지의 철도 회사에서 비서나 사무 일을 하고 있었다. 레이의 부모님은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4명의 조부모 중 3분이, 워치타워 협회의 초대회장으로 이 종교의 창시자인, 찰즈 러셀이 주재 한 워치타워 종교의 신자로서 나중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불리는「성경 연구생」이었다. 레이의 부모님의 형제 중 어머니 형제 한 명과 아버지 형제 3명이 여호와의 증인이며, 이 중에는 레이 아버지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제 4대 워치타워 협회 회장인 프래더릭 프랜즈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4명 가운데, 아버지 쪽의 가장 젊은 숙부 알버트는 1925년의 예언이 빗나갔을 때 이 종교에서 멀어졌다. 레이에게는 두 명의 누나가 있고 양쪽 모두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자랐다. 바로 위의 누나는, 워치타워 협회의 선교인 학교인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후에, 브라질에 봉사자로서 파견되었지만, 나중에 워치타워 종교에서 떨어져 나갔다. 또 한명의 누나는 현재까지도 여호와의 증인이며, 레이는 정기적으로 인사편지를 쓰고 있지만, 한 번도 답장을 받았던 적이 없다고 한다.



 레이는 일찍이 고등학생 시절부터, 집에서 집으로의 전도를 한주에 20시간부터 30시간 행해, 길거리에서 잡지를 팔거나 전단을 나눠주거나 하는 열렬한 워치타워의 신자였다. 1938년에 16세였던 그는, 그 해에 집에서 가까운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 당시 제2대 협회장 조셉 러더포드의 연설을 런던으로부터 라디오 전화를 통해 듣게 되었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그 때 이래로, 조직이 구원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증거 사업은 결혼이나 출산 등의 개인적인 관심사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때 이래 , 그는 본격적인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들어갔다.

 

1939년 1월 1일에 침례를 받은 후에, 194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교육을 추구하는 일 없이 즉시 전 시간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들어갔다. 그때에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하고 있었고, 여호와의 증인은 전쟁참여 거부, 국기경례 거부의 입장 때문에 각지에서 박해를 받았다. 그 해에 디트로이트에서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는, 세계 종말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 러더포드 회장은 이 때, 이것이 큰 환란 전 마지막 대회가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레이는 그 해 가을에 여름옷을 처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다음에 여름옷이 필요하게 되기 전에 아마겟돈이 오든가, 혹은 큰 환난 시대에 접어들어 강제 수용소라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전시 중의 종교박해 체험





 레이 자신은, 미국에 있어서의 1940년대의 여호와의 증인의 박해를 눈앞에서 체험하고 있었다. 그 해에 그는 동료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선동죄의 재판에 참석해서, 유죄판결 후에 폭도에 의해 뭇매가 될 뻔한 경험을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그 후에, 그는 75명의 회중 내 증인들과 함께, 집단에서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로부터 인디애나 주의 코나스빌에 나가, 당시의 워치타워 협회가 합헌성을 제기했던, 집에서 집에의 전도의 권리를 행사하는 활동에 참가했다. 이 결과 이러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레이를 포함해서 일주일간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 젊은 시대의 폭행이나 투옥에 의한 종교 박해의 생생한 경험은, 스스로가 하느님을 실제로 섬기고 있다고 하는 그의 확신을 더욱 강하게 해 갔다.



 그는 그 후, 집에서 나와서 다른 동세대의 증인과 둘이서, 동부 켄터키 주와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탄광 지대에서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자로서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 레이는 여기에서도 매일같이 박해의 위험에 직면하는 일이 계속됐다. 분노에 몰아진 항부의 집단에 둘러싸였다가 간신히 도망간 적도 있었다. 그 당시 그는, 이러한 박해를 통해서 이러한 사람들 속에 있는 뿌리 깊은 종교적 불관용을 가슴에 사무치게 느꼈다. 레이는 그 당시, 자신의 몸에 40년 후에 닥치는, 워치타워 종교내의 불관용의 폭풍우를 예상할 방법도 없었고, 자신은 그러한 종교적 불관용이 없는, 워치타워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1941년 여름이 왔지만, 레이의 기대와는 반대로 아마겟돈도 큰 환난도 오지 않았다. 그는 그 해에 센트 루이스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것이 러더포드 회장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대회가 되었다. 대회 마지막 날, 러더포드 회장은, 5세부터 18세까지의 아이들을 연단의 맨 앞자리에 앉게 하였고, 결혼을 하는 것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성서에 등장하는 고대 충실한 사람들이 부활하여 나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설득하며, 「어린이들」(Children)이라는 제목을 붙인 새로운 책을 나눠주었다. 이 책은, 존과 유니스라고 하는 약혼중인 젊은 여호와의 증인 커플의 이야기였다. 이 두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결혼해서 가족을 만드는 것은 수년 후에 오게 될 새 질서가 되고난 뒤로 미룰 것을 권유받고 있었다. 당시 19세로 독신이었던 레이는, 흥분과 낙담이 뒤섞인 복잡한 기분을 경험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해, 임박한 아마겟돈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 해 9월의 「파수대」지는 “아마겟돈까지 남아있는 몇 개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더포드는 곧 그 다음 해 1월 8일에 사망했으며, 예상한 아마겟돈은 오지 않았다.



 레이는 나중에, 워치타워 협회의 요원이 된 후에, 당시에 러더포드가 그러한 긴박감을 부추긴 이유를, 차기 회장으로 숙부에 해당하는 프래더릭 프랜즈로부터 들었다. 그것은 러더포드 자신이 그 시점에서 말기 암이었고, 자신이 수개월의 생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서, 어떻게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아마겟돈이 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강한 소망이 그를 그와 같은 긴박감을 부추기는 기사나 연설로 몰아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에, 러더포드의 권고를 따라서, 결과적으로 결혼 적령기를 놓쳐 생애를 독신으로 보낸 여호와의 증인이 다수 나왔다.



 1942년에 레이는, 오하이오 주 웰 스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어 전파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협회 본부로부터 지급된 최저 수당만으로 극한의 오하이오의 겨울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마을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1944년에는 레이는 5개월간, 협회의 선교학교인 길르앗 학교에서 선교 훈련 코스를 밟았다. 그 후 일 년 반은 순회 감독자로서 애리조나와 남 캘리포니아의 회중들을 순회하였다. 이전에 그는 샌디애고에 있는 벳사림이라고 부르는, 워치타워 협회 소유의 러더포드의 별장에도 머물게 된다. 러더포드는 처음에 이 대저택을, 머지않아 부활해서 나오게 될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고대의 충실한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하기위해서, 협회의 자금을 사용하여, 이러한 성서의 등장인물들 명의로 구입했다. 그러나 결국은 러더포드 자신의 별장으로서 그의 사망까지,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었다. 레이는 이 저택에 머물면서, 성서에서 읽은 고대의 인물들이 이런 대저택의 생활양식을 정말로 기뻐할까 하는, 소박한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카리브 해 제도에서의 지부감독 시기





 1945년, 레이는 「기름부음 받은 자」중 한 명이 된 후에, 1946년, 당시의 제3대 워치타워 협회장 노어로부터 푸에르토리코의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어, 카리브 해의 섬나라에 단신으로 부임했다. 그는 열대섬나라 특유의 병에 골치를 썩이면서, 8년간을 수도 산원의 선교자의 집에서 보냈다. 그 후 선교 활동의 확대에 수반해, 그는 아그아디라의 마을로 들어갔다. 더욱이 일 년 뒤에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임명받아 레이는 인접한 버진 제도나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되고 있었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도 수차례나 여행하였다. 이 여행은 주로 파수대 잡지를 이 금지령 하에 있는 나라에 밀반입시키는 것이었지만 , 어떤 때에는 당시의 독재자에게 면회를 신청해서, 워치타워의 금지령을 해제해줄 것을 청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57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한층 더 탄압을 받게 되어, 수많은 증인들이 박해받고 투옥되었다.



 1959년에 레이는 현재의 아내인 신시아와 푸에르토리코에서 결혼했다. 이것은 협회가 지금까지의 방침을 변경해서, 선교인으로 파견된 사람도 결혼을 해도 상관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레이는 결혼 후에도 푸에르토리코를 근거로서 여행하는 감독자의 직무를 계속했다. 레이와 그의 아내 신시아는 여행처의 미개척 섬에서의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에 계속 시달렸다. 오염된 물, 상한 음식, 바퀴벌레나 쥐와 같이 지낸 탓에 아내인 신시아는 시게아츠인 위장염과 기생충증을 앓은 적도 있었다. 충분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 그 후의 신시아와 레이의 건강 상태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1961년에 레이는 독재정권이 무너진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임명받았다. 5년간의 그의 지부 감독자로서의 임기 중에, 이 나라는 정치적 불안정이 반복됐다. 그러다가 1964년에는 다시 길르앗 성서학교에서 10개월간의 훈련을 받았다. 이 때 레이는 처음으로 노어 회장으로부터 브루클린 본부에서의 근무를 제안 받았다. 하지만 레이는 도미니카공화국 지부에 남겨진 일 때문에 일단 도미니카로 돌아오게 된다. 1965년에는 도미니카에서 내전이 발발했지만, 레이와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들은 미국 본국으로 피난하지 않고, 내전의 한가운데서 이 고향에 머무르면서, 문자 그대로 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간신히, 워치타워 협회 지부의 존재를 지켰다.







브루클린의 집필 부문의 시기





 1965년에 레이는 회장 노어의 지시에 따라서, 20년간의 카리브 해 섬들에서의 임무를 끝내고 뉴욕 브루클린의 국제본부(이곳을 “베델”이라고 부른다)에 초대받아 집필분야에서 일하게 되었다. 레이는 처음에, 카리브 해 섬들에서의 선교 활동에 만족하고 있어서, 이 중요한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신청했지만, 이것은 노어 회장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레이는 솔직히 노아 회장의 지시에 따라서, 뉴욕 본부로 이사하기로 했다.



 레이가 브루클린에 도착한 후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그에게는 노어 회장에 의해 협회의 성서사전을 편집하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이 임무의 시작은, 그 당시에 이미 모아지고 있던 방대한 원고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고는 전 세계의 여호와의 증인 약 250명에 의해 분담 집필된 것이지만, 그 집필 분담은 단지 협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할당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필자는 사전을 집필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없었으며, 조사 방법조차도 몰랐다. 이러한 기존원고의 적어도 90퍼센트 이상은 온전히 사용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다시 새롭게 집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레이는 처음에 단독으로 이 사전의 집필을 시도했지만,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협회의 이사이며 나중에 통치체성원이 된 라이먼 A. 스윙글과 길르앗 선교 학교의 교무 주임인 에드워드 댄랩이 이 기획에 더해졌고 그에 더해 두 명이 함께해서 모두 5명의 팀에 의해서 이 편집 작업은 계속되었다. 레이는 이 일에서 중심이 되어 많은 기사의 조사와 집필에 그 후의 5년간을 소비했다. 이 방대한 일은 1970년에, 1696페이지의 분량에 다다른 워치타워협회의 성서사전,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Aid to Bible Understanding)가 되어 결실을 맺는다. 이 사전은 그 후에 1988년 「성경 통찰」(Insight on the Scriptures)이라고 하는, 현재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고 있는 2권의 성서 사전으로 옮겨졌지만, 그 내용은 레이가 편집한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를 단지 수정하고 많은 도판을 더했을 뿐이며,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전 세계에서 애용되고 있다.



 이런 레이의 5년간에 걸친 성서 사전의 집필, 편집, 조사 작업은, 그에게 새로운 경지를 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노어회장의 지시를 받아서, 협회의 출판물에만 한정하지 않고, 모든 정보원을 사용해 성서의 항목의 해설을 집필하게 되었다. 이것들 중에는, 일반 여호와의 증인이 손에 넣는 일도, 대충 훑어보는 일도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리스도교국이 출판한 많은 성서 사전이나 주해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는 이런 「큰 바벨론」이라고 경멸적으로 불리고 있던 그리스도교국이 출판한, 말하자면 「적측의 자료」를 사용하는 것에 처음엔 주저하는 맘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러나 의외로 노어 회장은 그것에 대해 아무 망설임도 없는 모습이었다.



레이는 이러한 주해서를 조사하는 것에 따라, 이러한 많은 출판물의 내용이, 어떤 경우엔 한 세기 이전에 쓰인 것이면서도,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워치타워 협회의 수년 이내에 어지럽게 바뀌는 출판물과는 완전히 다른 이러한 서적은, 레이의 눈을 뜨게 하였다. 그는 그때까지는 이와 같이 성서를 깊이 연구할 기회가 없었고, 또한 성서의 이해는 항상 협회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연구의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레이의 성서에 대한 견해가 이것으로 인해 하룻밤사이 변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 후 몇 년 간의 연구를 통해,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거의 없는 성경에 대한 통찰을 배워간다. 그는 이 과정에서, 성서를 전후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 성서 단어의 의미는 성서 안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점 등을 재차 인식했다. 그리고 그는 성서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문으로부터 읽는 것의 중요성도 배워갔다.



 그는 이 조사의 과정을 통해, 몇몇 협회의 가르침이 성서의 정확한 해석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연로자, 장로」와「감독자」라고 하는 항목의 집필에서는, 1세기 당시에 회중은 장로가 그룹(會)이 되어 인도했으며, 모든 장로가 감독자로 책임을 맡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1932년 이래, 러더포드 회장의 지침을 바탕으로 장로 그룹이 해산당하고 그것을 대신하여 협회가 직접 임명한「봉사 지휘자」가 단독으로 지도한다고 하는, 그 당시까지의 협회의 제도와는 완전히 차이가 났다. 레이는 이 점을 회장인 노어와 부회장인 숙부 프레더릭 W. 프랜즈에게 지적했지만, 두 사람 모두 가까이 임박한 최후의 대결전까지는 이 체제를 계속해 가려는 자세였다. 그러나 수년 후에는 레이의 진언이 받아들여져 이 제도는 변경되었고 회중은 다시 장로회에 의해 인도되게 되었다.



 그는 그리고 많은 역사적인 항목에 대해 조사, 집필을 해야 했다.「연대 계산」의 항목은 27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기사였지만, 이 조사와 집필은 그리고 레이에 놀랄 만한 사실을 분명히 해주었다. 여호와의 증인 교리의 근간이 되는 것 중에 하나는 1914년에, 누가 21:24에 진술되어 있는「이방인의 때」가 종료되었고 그 해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통치를 보이지 않는 형태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의 근거가 되는 것은 다니엘 4장의 「일곱 때」가 2520년을 의미하며 그 「일곱 때」는 기원 전 607년부터 세기 시작하며 따라서 1914년이라고 하는 연대가 산출된다는 것이다. 이 607년이라고 하는 해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왕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된 해이지만, 레이는 이 607이라고 하는 숫자가 웬일인지, 워치타워 협회 출판물에서만 나오는 뭔가 협회 특유의 숫자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깨닫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점까지는 특별히 깊이 있는 조사를 한 적이 없었다.



 이 「연대 계산」이라는 방대한 기사의 집필을 할당받아서, 그는 몇 개월 동안, 고대사의 문헌이나 자료를 조사하여, 어떻게든 협회의 기원 전 607년이라고 하는 해를 지지하는 역사 자료를 계속 찾았다. 그는 집필 부문의 비서를 사용해 뉴욕 내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다니게 했지만, 협회의 연대를 지지하는 역사 자료는 아무것도 발견해 낼 수가 없었다. 반대로 어떤 사실도, 느부갓네살 왕의 신바빌로니아 제국 왕으로서의 즉위가 기원 전 607년이라고 하는 연대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고 예루살렘의 멸망은 협회가 가르치는 연대보다 20년 후에 일어났다는 것으로 일치하고 있었다. 레이는,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덴스에 있는 브라운 대학의 고고학 교수로서, 고대 설형문자의 권위자인 아브라함 삭스 교수를 방문해 이러한 협회의 연대를 뒤집는 많은 사료에 무엇인가 문제점이 있어, 그것을 불신할 수는 없는가를 질문했다. 이 회견에서 밝혀졌던 것은 레이에 있어 정말 놀랄만한 것이었다. 워치타워 협회가 말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이 기원 전 607년에 함락 했다는 것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고대의 서기들이 서로 가리키는 많은 설형문자로 쓰인 문서를, 일제히 똑같이 고쳐 적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에 레이는 협회 연대 계산이, 이러한 압도적인 사실 앞에서도 올바른 것으로 남아있을 것으로 계속 믿고 싶었다. 그 결과, 그는 그 “연대 계산” 항목의 집필에 즈음해서는, 할 수 있는 한 이러한 협회에 있어 불리한 사료의, 약점이나 문제점을 크게 채택해 당시의 고고학 자료의 신뢰성을 흔드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협회의 기원 전 607년이라고 하는 연대를 지지하는 것처럼 쓰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에는 무엇인가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남았다. 레이는 그 밖의 항목의 집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나라들의 지정된 때”(이방인의 때),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큰 무리”등의 항목의 집필에서는, 똑같이, 성서나 자료의 해석에 협회의 독특한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처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 레이는 불완전하면서도, 이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책이, 사물에 대한 보다 유연하고 객관적인 견해를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 배양하는데 조금은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통치체의 임명





 1970년에 5년간에 걸친 성서사전 집필과 편집이 완성되어 발행된 해에, 협회는 통치체 구성원을 지금까지의 7명에서 11명으로 증원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해 10월, 레이는 다른 3명과 함께 통치체 성원으로 임명되었다. 이제 앞으로 9년간에 걸쳐서, 레이는 이 종교 조직의 최고 중추 결정기관의 내부에 있으면서, 수백만에 달하는 전 세계 여호와의 증인의 일상생활과 생사를 컨트롤 하는, 협회의 운영과 방침결정 과정에 참가해 나가게 된다.



 이 통치체라고 하는 기관은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교리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 (마태 24:15-47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적 이야기에서 유래)이라는 소수의 여호와의 증인을 임명했고 그분의 “양”들인 일반 여호와의 증인의 지도와 관리를 맡겼다고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소수의 선택된 여호와의 증인이 “기름부음 받은 자들”중 “남은 자들”이라고 불리며 그중에서도 일부 소수가 선택되어 통치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체라고 하는 개념도 존재 자체도, 이 종교의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는 레이가 통치체에 참가하기 이전에, 어떻게 통치체라는 것이 발전해 왔는지를 먼저 보자.



 제1대 회장 러셀, 제2대 회장 러더포드 시대에는, 이러한 다수의 여호와의 증인으로 구성되는 결정기관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모든 결정은 회장의 최종적인 독단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1942년에 러더포드 회장이 사망한 후에, 네이선 H. 노어가 제3대 회장으로서 그 지위를 계승했고 얼마 되지 않아 통치체라는 말이 워치타워의 출판물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에는 7명으로 구성된,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의 법인 이사회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은 다음의 1955년의 「봉사자가 되기 위한 자격」책 381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쓰인 대로이다.



주께서 그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이후 몇 년 동안에, 법인의 이사회가 눈에 보이는 통치체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올 때까지 이 이사회는 회장아래에 있던 종속적, 형식적인 회였으며, 이사회가 중요한 결정을 회장과 독립적으로 실시한 적은 없었다. 예를 들면, 당시의 중요한 협회의 기획인, 워치타워협회 독자적인 번역에 의한 성서, 신세계역 성경의 번역과 출판에 관해서도, 그 최종 단계에 이를 때까지 이사회는 그 기획에 관해서는 듣지 못했고, 노어 회장과 프레더릭 프랜즈 부회장간에 진행되었다. 중요한 교리의 변경에 관해서도, 이사회가 거기에 발언권을 가지진 않았고, 주로 노어 회장의 지식 면에서의 전면적 보좌를 하고 있던 프레더릭 프랜즈 부회장이, 회장의 이해를 취하면서 진행되고 있었다.





통치체의 권위와 내부개혁의 일





 그러나, 레이가 통치체로 들어온 1970년 이후에 이 체제는 재검토된다. 레이가 통치체 성원으로서 맡은 큰 일중 하나는, 이 통치체와 워치타워 협회 법인체와의 관계를 다시 검토해서 지도 체제에 큰 변경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통치체 성원을 포함한 4명과 함께「5인 위원회」를 형성해, 성서에 근거한 여호와의 증인의 지도 체제의 개혁에 임했다. 그 시점에서의 큰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 전체를 종교적, 영적으로 지도하는 최고기관 이어야할 통치체가, 법인으로서의 법적인 단체인 워치타워협회, 그리고 그 법인의 회장과 이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유지해야할 것인가, 에서 시작되었다.



레이는 벌써 통치체에 참가하기 이전부터,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의 집필 , 편집을 통해서, 성서에 그려져 있는 초기의 그리스도인 교회에는, 한 사람의 독재적인 체제는 없었고, 그룹에 의한 지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부회장에게 진언 했던 사실은 앞장에서 말한 대로이다. 이것에 근거한 변경은 1972년에 실시되었다. 그 결과, 회중의 종이 혼자서 회중을 관리하는 체제로부터, 현재의, 장로회와 봉사의 종에 의한 집단적 지도 체제가 밝혀진 것은 이 때였다. 따라서 레이는 이 체제가 여호와의 증인 전체의 체제로서 최고 지도부에도 확립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레이는 5인 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본부직원이나 통치체의 구성원들의 폭넓은 의견을 청취했다. 그런데 레이가 경험했던 것은, 많은 베테랑으로 불리는 본부 직원들이, 스스로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위에서 밑으로의 명령인 일방통행에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본부 직원의 사기 저하는 눈에 띄고 있었다. 집단지도 체제는 이 폐쇄적인 지도 체계를 보다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수렴될 것이라는 희망을 바탕으로 넓게 환영받았다. 또 다른 문제는 법인의 관리 기구인 협회의 회장과 종교의 최고 지도 기관인 통치체와의 관계였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통치체는 오랜 세월 동안, 협회의 회장에게 종속되는 이사회였다. 레이를 중심으로 하는 5인 위원회는, 이것을 근본적으로 변경해, 법인과 그 회장은 통치체에 예속되어서, 통치체의 실무 면에서의 필요를 채운다. 말하자면 통치체의 도구로서 평가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생각의 기초는 이미 1971년 12월 15일호 「파수대」지(영문) 기사에 게재되고 있었다. 그러나 , 왜 그런지 부회장이자 레이의 숙부인 프레더릭 프랜즈는 이 안에 반대를 나타냈고, 그리고 노어 회장도 변혁에 소극적이어서 현상 유지를 원하고 있었다.



 흥미 있는 것은 1975년 9월의 길르앗 성서 학교의 졸업식에서, 프레더릭 프랜즈 부회장이 축사 중에서 이 건에 접했을 때에 말한 일이었다. 레이는 이 부회장의 연설의 논점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부회장은 워치타워 협회가 선교사를 배웅하는 것은 어떠한 권위에 근거하는지를 논했다. 그는 협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러셀은 통치체에 따르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한 후, 사도 6장을 언급하면서, 12사도는 7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을 선택해 신자들의 음식분배를 돌보는 것을 맡겨 그로인해 사도들은 영적인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라고 말했다. 부회장의 의도는, 통치체는 영적인 일 이외에는 관여해서는 안 되고, 세속적 일은 법인에 맡겨 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회장은 계속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있던 안티오크 회중이, 얼마나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회중과 독립해서 중요한 일을 결정했으며, 선교사를 독립적으로 파견하고 있었는지를 언급했다. 부회장의 의도는, 마치 안티오크 회중이 예루살렘의 통치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것과 같이 통치체와는 별도로 법인이,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일세기 당시의 그리스도인 회중의 예를 사용해서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졸업식에서 이 축사를 듣고 있던 레이는, 이 부회장의 논리 그 자체가, 사실은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의 절대적 권위를 흔드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는 확실히, 부회장의 논리는 바야흐로 성서의 기술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1세기 당시의 그리스도인 회중이 중앙집권적인 예루살렘의 통치체와는 독립적으로, 예수와 성령에 근거해 회중이 독자적인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성서에 기록되어있는 사실은, 현대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가, 전 세계의 모든 회중을 권위를 가지고 지도해 간다고 하는 주장을, 실제로는 근본부터 뒤집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부회장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그는 어디까지나 법인과 그 회장이, 통치체로부터 독립된 권위를 가져야 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는 이 같은 논리를 일반 증인이 사용해 현대 통치체의 권위에 의문을 갖는다면, 그는「배교자」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레이는 성서의 동일한 말씀을, 상황에 따라서 하나의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한편, 다른 상황에서는 같은 일을 반대하기 위해서 사용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75년 8월 15일, 레이는 5인 위원회를 대표해 보고서와 권고를 작성해 제출했다. 그 내용은, 회장에게 집중하고 있던 권위를, 통치체의 구성원들 사이에 분산시키는 개혁안이었다. 부회장 프레더릭 프랜즈와 통치체 성원 중에는 이것을「회장에 대한 공격」이라고 보는 태도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개혁안은 채택되었고 1976년 1월 1일에 시행되었다. 이 새로운 체제에서는 통치체가 법인 및 종교상의 방침 결정의 최고 기관이 되어서, 그 바탕으로 여섯 개의 위원회가 놓여졌다. 펜실베이니아 주의 법인인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는 이 여섯 개의 위원회아래에 놓여 이 펜실베이니아 주 법인 아래에 더욱 말단의 많은 법인 조직이 놓여졌다. 이 개혁에 의해서, 법인의 회장은 순수하게 법적인 직무가 되었고, 종교상의 권위는 통치체로 옮겨지게 되었다.







통치체 내부에서의 「양심의 위기」





 레이가 통치체 성원으로 임명된 당시에, 그는 자신이 수백만 명의 여호와의 증인 중에서 선택된 얼마 안 되는「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서 , 수백만 명의 증인의 믿음생활을 좌우할 수 있는 임무의 중요성에, 무거운 책임을 느끼며 통치체의 매주 회합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회의의 내용은 레이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통치체 회의의 상당한 부분은 인사에 관한 결정을 승인하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여러 나라 협회의 직분, 특히 여행하는 감독자(순회 감독자, 지역 감독자) 의 임명에 즈음해서는, 그 사람의 이름, 나이, 침례 년 월 일, 「기름부음 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읽어 가면서 대부분의 경우 금방 다른 곳으로라고 승인되어 갔다. 이것은 통치체의 지루한 의사결정이며, 형식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연로자들로 구성된 통치체 중에서도 특히 고령의 구성원은, 자주 앉아서 졸지 않을 수 없었다. 표결하는 시점에서도, 잠으로부터 깨어날 줄 모르는 인사가 승인에 투표하는 것은 안 된다는 배려를 받아서, 앉아서 졸고 있는 통치체 성원은 그대로 놔두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중요한 의제는, 세계 각지의 회중이나 지부로부터 보내져 오는 상담의 편지에 대한 대처였다. 그 중의 상당수는, 회중 내 개개인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는 종의 행위가 제명 처분에 해당되는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결정은 1975년까지는 전원일치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그때 이후로는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견이 크게 나뉘는 경우는 드물고, 많은 경우 소수의견은 주류의견에 맞추어 양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이도 통치체에 참여한 처음 몇 년간은, 다수 의견에 맞추어 표결에 참가했고 많은 경우에 결정은 전원일치로 행해졌다. 그러나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의 통치체 안에서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레이는 소수파로서 주류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는 것이 늘어갔다.



 이렇게 일반 회중으로부터 전해지는 상담 편지에서는, 온갖 여호와의 증인의 일상생활의 문제가 얽히고 있었다. 어떤 증인이 아들이나 딸에게 대학교육을 받게 했을 경우에, 그 증인은 장로로 임명받을 자격이 있는지, 딸이나 아들을 18세에 결혼시켰을 경우, 장로로 임명받을 자격이 있는지, 어떤 증인이 교대로 야간근무가 있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가끔 저녁 집회에 빠질 경우에, 그 사람을 장로로 임명해야할 것인가, 등등.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 이혼은 정당하다고 인정되는지, 남편이 아내에게 이전의 부도덕을 고백했을 경우, 아내는 그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이 허락되는지, 이혼은 부도덕을 저지른 사람의 배우자뿐만이 아니라 부도덕을 한 사람에게도 정당화되는지, 부도덕을 저지른 사람의 배우자가 이혼을 정당하게 한 후에 사실은 본인도 부도덕을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졌을 경우에, 원래의 이혼은 그대로 합당한지 등등.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서는 이혼이 허용되는 경우는, 성적부도덕이 있었을 경우뿐이지만, 그 정의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문의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외의 상담의 예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 때문에 위법행위를 했을 경우 벌금을 지불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노동조합원인 여호와의 증인은 파업에 들어갔을 때에는 피켓을 드는 파업 행위에 참여해도 좋은지, 혹은「대체 업무」로서 조합시설의 청소 등을 받아들여야할 것인가, 협회는 자금을 미국 국외의 지부로 보내는 경우, 제 3국을 경유한 송금을 통해 달러의 가치를 늘리는, 일부의 나라에서는 위법으로 되어 있는 거래를 허락해도 좋은지, 적십자를 통해 재해의 이재민들에게 원조를 보내는 것은 올바른 일인가, 등이 있었다. 마지막 사례에서의 문제점은, 적십자가 십자가라고 하는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하고 있는 종교 표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적십자가 수혈의 세계적인 공급원이라는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다.



 일반 여호와의 증인은, 통치체의 의사결정은, 면밀하게 성서에 비추어서 결정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가지 의제가 의사에 올라 심의되어 가는 과정에서, 결국의 곳, 궁극의 결정 사항은, 어떤 일이 증인의 제명에 적합한 일인지 어떤지의 여부였다. 이러한 의제에 오르는 질문 사항은, 각국의 상황에 의해 실로 여러 가지이며, 방대한 수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심의에서 성서가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통치체의 각 구성원에게 시간적인 제약이 있었다. 통치체성원이라고 해도, 일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집회와 봉사의 의무를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며, 거기에 더해 각 구성원은 몇 개의 위원회에 소속되어서, 그 중에 임무가 주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세계 각국에서 전해지는 서류의 양은 항상 위원회의 처리 능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따라서 구성원 중에는, 파수대 지에 게재될 예정인 기사를 성서와 대조해 신중하게 검토하는 일도 없이, 단지 승인을 위한 표결에 참가하는 사람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 지도부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조직의 지도적인 지위가 올라가는데 따라서, 일의 양은 증가해가 그 결과 깊이 있는 성서연구를 할 기회가 거기에 비례해 줄어들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레이의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증명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워치타워의 종교적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일단 조직의 내부에 들어가면 개개인이 성서를 깊게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어지고 가장 소중한 것은 조직의 방침과 가르침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조직의 출판물을 통해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며, 이것이 여호와의 증인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결정적 기둥인 것이다. 따라서 통치체의 내부에서도 먼저 검토되는 것은, 어떤 결정이 지금까지의 조직의 방침과 가르침에 들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것만 확인되면 성서를 펴려고 하는 일은 없고, 의결은 즉시 내려졌다.



 그러나 성서가 통치체의 결정에 사용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각지로부터 전해지는 많은 질문에 대해서 대개의 경우, 성서는 굳이 뚜렷한 지침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혈청의 주사나 혈소판의 주입을 받아들이는 것은 수혈과 같이 취급되어야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는, 성서가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예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운전기사를 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군사기지에 납품을 하는 직무가 주어질 경우, 혹은 증인 음악가가 군사기지의 장교 클럽에서 연주하게 된 경우, 이 때 이러한 증인의 행위는 제명 처분에 해당하는 죄인지, 라고 하는 질문이었다. 성서에는 어디에서도 이러한 증인의 행위를 분명히 규정하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통치체는, 이런 경우 이러한 증인의 행위는 허용되지 않으며, 그들은 군사기지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정했다. 성서가 침묵을 지킬 때 사람의 논리가 답을 매듭짓는 것이다. 비록 반대자가 성서에 대한 언급을 요구해도, 대부분의 경우 요한 15:19의 「세상의 일부가 아님」을 인용하며, 그래서 비슷한 의문은 모두 동일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 같은 확대해석과 적용방법이 성서 전체 중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느냐를, 성서에 의해 결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3분의 2의 다수결로 결정되는 통치체의 표결은, 제명 처분의 결정에도 적용되어 기묘한 결과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행위를 저지른 증인이, 예를 들면 혈액이 있는 성분을 받아들인 증인을 제명 처분할지 어떤지의 결정의 경우에, 14명의 통치체 성원중 9명까지가 그 행위는 제명 처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경우에도, 이것은 3분의 2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그 증인은 통치체의 과반수이상이 허용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하였음에도, 그런데도 제명 처분이 되는 것이었다. 레이는, 이렇게 제명 처분 받게 된 증인들이, 실제는 다수의 통치체 성원들이 그들의 행위를 지지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명되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느낄는지, 제명 처분에 관해서는 오래된 규칙의 현상 유지를 고쳐서 「의심스러운 경우는 처벌하지 않는다.」를 원칙으로 하면 안 될까, 라고 하는 의문을 통치체의 회의에서 제기했다. 그러나 이 의문도, 오랜 세월에 걸친 이 조직의 전통적인 제명처분의 방침을,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해 가려는 분위기 속에서 매장돼 사라졌다.



 레이의 통치체 의결에서의 관여는「양심의 위기」의 연속이었다. 전통을 고집하며 변화를 허용하지 않고, 하느님과 성서에 판단을 맡기는 대신 사람의 논리가 지배하는 통치체 내부의 심의과정은, 레이를 서서히 통치체 내부에서 소수파로 몰고 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레이의 기억에 인상 깊었던 통치체의 결정 중에는, 다음에 나오는 것과 같은 그의 양심을 책망하게 하는 몇 가지 사례가 있었다.





침실에 비집고 들어가는 여호와의 증인의 규제





 레이의 통치체 임기 중에, 통치체는 부부 사이의 성행위에 대한 세세한 규제를 「파수대」지에 차례차례로 발표하고, 그리고 그것을 변경해 갔다. 레이는 이 방침의 변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문제가 된 행위는, 정상적인 성교 행위인 성기끼리의 결합 이외의 행위, 특히 성기와 구강과의 결합, 성기와 항문과의 결합이었다. 많은 증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성행위에 관한 의문이 전달되어 통치체는 이것에 대해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72년에 통치체는 이러한 행위는 제명 처분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하는 결정을, 얼마 안 되는 심의 후에 내려서, 1972년 11월과 12월의 「파수대」지(영문) 에 그 취지가 게재되었다. 이 결정은, 그러한 “이상 성행위”를 범했거나 목격한 사람이 보고할 필요성을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촉구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1973년 이후에, 이상 성행위를 둘러싼 사법위원회가 각지의 회중에서 대부분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특히 부부 중 다른 한쪽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경우에, 심각한 부부 사이의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이상 성행위의 규제가 발표된 결과, 많은 증인부부가 이혼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오럴 섹스는 성교 전희로서 많은 부부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증인들과, 인도하는 입장에 있는 장로들이 차례차례로 본부에 문의를 하여 어디까지를 성교라고하며, 어디까지를 전희라고 하는지, 전희에서의 오럴 섹스는 상관없는 것인지, 라는 질문을 빈번하게 보냈다. 그리고 병이나 부상 때문에 정상적인 성행위를 할 수 없게 된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것을 대신하는 행위로서 성기 이외부위를 사용한 성행위를 오랜 세월에 걸쳐 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금지되게 되었다.



 이 이상 성행위에 관한 규칙은 여호와의 증인의 사회를 5년 이상에 걸쳐서 지배했다. 많은 부부 관계가 파괴되어 혹은 적어도 불화에 쫓아 버려졌다. 그 실수는 아무도 모른다. 1978년, 이 규칙은 통치체의 결정에 의해 폐지되게 된다. 1978년 2월 15일의 「파수대」지 32페이지(영문) 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분명한 성서의 지시가 없는 이상 , 이러한 일은 결혼한 부부 자신이 하느님 앞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혼에 관한 사적인 일은 회중의 장로가 지시하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며 단지 이러한 일을 이유로 제명 처분을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서로 결정을 맡겨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독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삼가해야한다는 예리한 책임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레이는 이 기사의 집필을 담당했을 때, 이렇게「성서로 결정을 맡기게 하지 않고 독단적인 입장을 취하는」태도가 실제로는, 통치체가 결정하는 대부분의 일에 들어맞는 다는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사의 집필은, 레이가 양심의 아픔을 완화시키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한편 지금까지 5년 동안 통치체가 전 세계의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 일으킨 상처, 감정적인 스트레스, 무의미한 죄책감, 심리적 혼란, 이혼 등 온갖 피해가 포함되었지만, 그것들을 결코 원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레이는 알고 있었다.



 이것과 관련된 문제로서, 성적부도덕이란 말에 대한 해석이 있었다. 위에 기록한 성기끼리의 결합 이외에는 정식 성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해석을 반대로 취하면, 성기결합 이외의 성행위는 음행이라고 해석되지 않게 된다고 하는 문제이다. 부부의 한편이 다른 부부 이외의 남성 또는 여성과 성기 이외의 관계를 가졌을 경우, 그 행위는 성교가 아니며, 따라서 그 행위를 범한 사람은 성서가 규정한「간음」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통치체는 해석했다. 그 결과,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으로 있는 여성은, 남편이 다른 남성과 동성 간의 성행위를 범했을 경우에는 이것은 간음에 해당되지 않으며, 그것을 이유로 그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통치체의 판단이었다. 이것은 마태 19:9에서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는데, 누구든지 음행의 근거 외에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예수의 말씀이 근거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는 이 통치체의 다수 결정에 의문을 갖고, 그리스어 원문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조사해 보았다. 레이는 그리스어의 음행에 해당되는 단어, 포르네이아가 단순한 성교에 한정되지 않고, 거의 모든 성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레이의 이러한 견해는 그 후에, 워치타워의「음행」이란 말에 대한 공식적 해석으로서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은 1972년 1월 1일호「파수대」지에 레이의 집필로 기사가 게재되었다. 그 이후에, 위에서 말한 경우의 여성은 남편의 동성애 관계에 의한 음행을 근거로 남편과 정식으로 이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성에게 있어서는 때늦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 후 재혼했으며, 그 사유 때문에 이미 제명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도 사람의 논리가 성서보다 우선되어 결정을 좌우해, 여호와의 증인의 사생활을 침해한 사례였다. 레이는 이러한 결정에 실제로 관여하는 가운데, 자신의 양심이 깨어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병역을 피하기 위한 대체 복무인가, 그렇지 않으면 투옥인가





 많은 징병제를 실시하는 나라들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해서 그것을 대체하는 비전투 근무, 예를 들면 토목공사라든지 군병원에서의 근무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오랜 세월 동안, 이 대체 비전투 근무도 거부하는 것이 공식적 방침이 되어 있었다. 이 교리는 1996년 5월 1일호 파수대지에서 변경될 때까지, 반세기 이상에 걸쳐서 계속되어 그 결과, 징병제를 실시하는 많은 나라들에서, 수천 명이 넘는 여호와의 증인 남자들이, 징병거부라는 죄로 계속 투옥되었다. 이 교리의 이유는, 대체근무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투라고 하는「유혈 죄」의 「대체」이며, 그것은 동일하게 유혈 죄가 된다고 하는 해석이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증인의 젊은 청년들은 대체복무를 거부해서 투옥되든지, 대체복무를 받아들여 즉시 회중으로부터 이탈로 처리되어 제명처분을 받은 것과 동일한 취급을 받든지 어느 한쪽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레이의 통치체 임기 중인 1978년에, 이 문제는 벨기에의 여호와의 증인으로부터의 문의가 계기가 되어 통 치체 안에서 재검토를 했다. 전 세계 지부에 조사를 위한 서신을 보냈고 몇 차례의 통치체 회의에서 심의를 도모했다. 이 안에서 대체 근무는 증인 각자의 양심에 근거한 결정에 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제안은, 구성원 16명 가운데, 찬성 9 반대 5 기권 1로 과반수는 대체 복무를 받아들이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찬성이 3분의 2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채택은 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레이의 임기 중 모두 합해서 6번에 걸쳐서 통치체의 의제로 올랐지만, 그때마다 현상을 변경하는 제안은 3분의 2에 이르는 찬성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과 때문에, 그 후에 계속해서 17년간 여호와의 증인은 세계 각지에서, 통치체중 과반수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일을, 계속 거부하며 투옥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레이의 마음속에서 양심의 가책은 더욱 심해졌지만, 다른 통치체성원은 단지 원칙에 따르고 있다는 것만으로 매우 당연한 일로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제명처분에 합당한 죄에 관한 통치체의 결정에 관해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성서에서 그 제명처분 결정의 사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순수하게 조직의 방침 결정의 결과였다. 그것은 한 번 출판되면 전 세계의 형제자매들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확립된 방침이 된 결과였다. 레이는 마태 23:4의「그들은 무거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지만, 그들 자신은 손가락으로도 그것들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생각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는 통치체임기의 후반에 다가가면서,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규칙에 의해서 여호와의 증인을 묶는 통치체의 태도에 의문의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에 대한 통치체 성원의 태도에는, 그 밑바탕에 일반 증인에 대한 불신이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통치체 성원 중 대부분은, 조직이 세밀한 원칙을 정해서 일반 여호와의 증인을 통제하지 않는 한, 그들은 타고난 경향 때문에 죄에 빠진다고 하는 사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오랜 세월동안 규칙을 변경하는 것은, 그때까지 충실히 그 원칙을 지키며 자신을 희생해 온 다른 증인들에게 심리적 혼란을 가져온다고 하는 배려가 있었다. 이러한 통치체의, 자신만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하는 겸손하지 못한 태도와 과거에 증인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해 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을 정당화한다고 하는 생각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겸손함과 타인의 멍에를 분담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임을 레이에게 생각나게 했다.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는 사람의 가르침





 여호와의 증인은 혈액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교리에 근거해서, 많은 치료 행위에도 세밀한 규칙을 제정해 왔다. 그 좋은 예가, 혈액응고인자(혈우병치료약품)가 유전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지혈기능이 손상되어 응고 인자의 주사만이 유효한 치료법인 혈우병의 환자의 치료였다. 통치체와 조직의 각 지부의 지도부는, 혈우병 여호와의 증인 환자에 대해서는 그 출판물을 통하지 않고, 환자 개개인에게 직접적인 지도를 해 왔다. 그 쪽바늘은, 혈액 성분인 제 8응고 인자를 사용해 1회의 치료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 치료를 반복해서 받는 것은, 피를 생명을 지탱하는 음식으로 이용해 거기에 따라 「길러지는 것」(feeding 즉 공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서의 가르침 (창세기 9:3-4;레위기 17:10-12)에 위배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방침은 오랜 세월동안, 출판물에 실리는 일 없이, 문의를 하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직접, 본부나 각국의 지부가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침은, 1975년 6월의 통치체의 회합에서 변경되어 혈우병 환자는 반복해서 혈액 성분의 치료를 받아도 상관없다고 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 결과는 협회 출판물에 바로 발표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원래의 1번만 혈액 성분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원칙자체가 발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만약 새로울 방침을 발표한다면, 먼저 과거의 방침이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고, 방침의 어지러운 변경이 너무 드러나게 되서,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본부는 과거에 문의해 온 혈우병 증인들에게 편지를 통해서, 새로운 방침을 증인환자 각자에게 전하기로 했다. 이 방법은 한편으로 만족할 만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많은 증인들이 전화를 통해 본부에 치료 방침을 문의해 오고 있어서 그러한 환자에게는, 과거의 기록을 언급하며 새로울 방침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간신히 1978년 6월 15일의 「파수대」지에(한국어판은10월호 48면), 다른 혈액 성분의 치료가 허용되는 사례와 함께(디프테리아, 파상풍, 혈청간염, 공수병, RH형이 맞지 않는 경우 질병에 대항하기위해) 혈우병이 작게 다루어졌다. 과거의 방침의 변경은 어디에도 진술하지 않았다. 이 통치체의 결정에서부터,「파수대」지에 발표되기까지의 3년 동안, 방침이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출혈에 의해 병이 악화되거나 죽음에 이른 혈우병 여호와의 증인의 실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도 조직의 방침 변경이, 통치체의 배려가 미치지 않은 말단 여호와의 증인의 생사를 휘두르게 된 예로서 레이의 마음을 깊이 손상시키게 되었다.







이중의 기준





 레이의 9년간의 통치체의 직무 중에서, 그의 양심을 손상하는 일은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 그가 실제로 경험했던 것 중에서, 최악의 조직의 방침의 모순과 불일치의 사례는 , 통치체가 두 개의 나라의 지부에 대해 행한 지도 방침의 모순과 일관성의 결여였다. 이 예는, 이중 기준, 즉 한편에서는 하나의 원칙을 적용해서 지도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동일한 일에 완전히 다른 규칙을 적용해서 지도한 뚜렷한 사례이며, 이 사례를 통해서 레이의 양심은 최대의 위기에 노출되게 된다. 이 두 개의 나라는 멕시코와 동 아프리카의 말라위에서 시작했다.

 1964년 이래로,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실로 잔혹한 종교탄압을 계속 받고 있었다. 천명 이상에 달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이 태워지고 폭행, 고문, 학살 등의 학대를 받아 많은 여호와의 증인은 근처의 잠비아나 모잠비크에 난민으로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학대의 이유는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이, 당시의 일당독재정권의 당원 카드를 구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라위는 당시 반다 종신 대통령이 말라위 의회당을 인솔해 독재정치를 강압적으로 실시해서 국민에게 이 독재정당의 당원카드를 구입할 것을 강제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 독재정권이 국민 전체를 당원으로 하는 것으로서, 국민의 완전한 일치를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달성하려는 정책의 하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말라위 지부는 이것에 대해서, 이 정권의 당원 카드를 여호와의 증인이 구입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중립을 어기는 것이며, 이 세상의 세력과 타협하게 되어, 그것은 여호와께 대한 배반으로 여겨진다고 하여, 그 나라 여호와의 증인에게 이 정당 카드를 사지 않게 지도하고 있었다. 이 방침은 뉴욕의 통치체에 의해서 온전하게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 때문에 말라위의 대부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목숨을 걸고 이 지침을 지키며 행동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통치체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는, 항상「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강조되었다.



 레이는 1975년에, 종교 탄압이 계속되는 이 말라위의 상황을 조사해 서류로 남기는 임무를 받았다. 이 안에서 말라위의 특수한 상황을 알게 됨에 따라, 레이의 마음속에는 이 당원 카드 구입 거부의 방침에 대한 몇 가지 중대한 의문이 생겼다. 먼저, 당원 카드라는 이름이 확실히 정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의 구입은 정치적 중립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말라위와 같은 일당독재국가에서 국가권력이 국민 전원에게 당원일 것을 요구한다면, 당원이 되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의무와 거의 동일하지 않을까, 라고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도 바울은 로마 13장에서 국가의 정치권력에 대해「사자」혹은 「봉사자」로 보면서 복종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로마 13:7에서 요구하는 것을 모두 주도록 가르치고 있다. 말라위에서 카드를 사는 것은 그 정권이 국민에게 요구하고 있는 의무이며 ,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정치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아닐까. 바울의 견해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확실히 이것과 동일한 상황은 성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권력자가 무거운 짐을 주어 1마일을 걷도록 요구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에 대한 정치권력에 타협하는 일 없이 거부하도록 가르쳤을 것인가. 마태 5:41에는 1마일을 걷도록 권력자가 요구하면 2마일 가도록 예수께서 가르치고 있다. 레이의 마음에는 잇달아 성서에 근거한 의문이 끊어지지 않았다. 레이는 말라위의 곤란한 상황에 대해서 명쾌한 답은 낼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에게 있어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말라위의 당원카드의 구입거부의 방침은, 명확한 성서기록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라위의 문제가 심각해진 1978년경에, 앞에서 말한 병역의 대체 근무문제에 관해서, 통치체는 멕시코에서의 징병 제도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대응방법에 관한 보고를 멕시코 지부로부터 받았다. 그 보고는 레이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멕시코에서는 징병 연령에 이르면 남자 전원이 일정기간의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이 의무가 되어 있었다. 남자는 등록할 때에「카르티라」라고 불리는 증명서가 발행되어 군사 훈련을 받으면 그 카르티라에 그것을 증명하는 표를 눌러 주게 되어 있었다. 멕시코 정부는, 이 군사훈련 종료의 표시가, 관리를 뇌물로 매수하는 방법으로, 훈련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에게 불법으로 팔리고 있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당시에 알고 있었으며, 정부는 그것을 적발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워치타워협회 멕시코지부의 보고에 의하면, 이 불법적인 관리매수는 멕시코의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도, 수년간에 걸쳐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레이의 놀라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뭐라고 이 불법행위를 오랜 세월 지부가 지도해 나간 이유는, 뉴욕 본부가 그처럼 지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라위 사태에서는「타협을 허용하지 않는」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지도해 온 통치체가, 동일한 시기에 저와 같은 지침을 멕시코에 지시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레이는 이 심각한 의문에 직면해서, 양심의 동요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레이는 1978년 11월에 멕시코의 지부를 방문하여 현장에서 이 사태를 조사하게 되었다. 레이는 멕시코의 지부에 있으면서, 현지 여호와의 증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보고를 받게 된다. 그들 멕시코 지부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말라위의 비참한 상황을 알고 있으며, 거기에 비교해 뇌물을 사용해 관리를 매수해 유효한 병역 카드를 소지하고 있는 멕시코의 증인들 사이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레이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이렇게 뇌물을 사용한 매수의 방법은 확실히, 뉴욕 본부가 1960년에 문서로 승인한 방침이었다. 레이는 멕시코 지부에서, 그 1960년에 본부에서 보낸 편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멕시코 지부가 뉴욕본부에 편지로 질문을 보낸 것에 대한 답변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는 즉시 그것이, 당시 부회장이며 그의 숙부인 프래더릭 프랜즈가 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편지에는「뇌물」이라고 하는 말은 사용되지 않고, 대신에「금전 거래」, 「요금의 지불」이라고 하는 표현이 사용되어 지불한 금전은 군사 권력에 준 것이 아니라, 뇌물을 받는 개인에게 간다는 것이 강조되어 이것에 의해 도덕적인 문제가 가벼워지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으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관습이 멕시코 각지에서 넓게 행해지고 있어 감시관도 놓치고 있다면, 여호와의 증인에게 있어서는 유익한 일이니까 계속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 지시였다. 이 편지의 마지막에는, 그러나 이 관습에 의해 문제가 일어났을 때는, 본부는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증인 각자가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되어있었다.



 레이에게 있어서의 슬픔과 놀라움은, 이 본부로부터의 지시가 멕시코로 전달된 1960년에 레이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관할하는 지부 감독자였고 그 시기에 같은 문제, 즉 의무 군사 훈련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다수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년간이나 투옥되고 있었던 사실을 직접 체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멕시코에서 카르티라를 사용해 군사훈련을 회피하는 것을 인정해 준 것과 같은 시기에, 완전히 동일한 문제로 고통 받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형제들에게 노어 회장과 프랜즈 부회장은 어떤 방법도 내리지 않았다. 실제로 회장과 부회장은 같은 무렵 도미니카 공화국을 방문해서, 일부러 이러한 병역을 거부해서 투옥된 형제를 보러 구치소까지 면회하러 갔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하면서, 한편의 멕시코에서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군사 훈련을 회피시키고, 완전히 동일한 문제로 고민하는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굳이 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 이중 기준은 레이의 이해를 아득하게 넘는 것이었다.



 이 멕시코의 군사 훈련을 뇌물을 사용해 회피하는 방침은, 말라위에서 당원카드 구입거부의 방침과 거의 시간적으로 평행해 발전해 왔다. 최초의 말라위에 있어서의 여호와의 증인에게로의 폭력적 탄압은 1964년에 일어나, 일단 기세가 수그러들었지만, 1967년에 재발했다. 이와 같이 말라위의 국민이 한 장의 카드를 둘러싸고 탄압에 괴로워하는 동안에, 멕시코의 여호와의 증인은 뉴욕 본부에서의 승인을 받아, 한 장의 카드가 일으키는 문제를 뇌물로 계속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1969년에는, 멕시코 지부는 뉴욕본부 편으로, 이 불법적인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로 허용되는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한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 안에서 지부는 새로운 정보로서 이와 같이 뇌물을 사용해 종료의 표를 얻은 사람은 제일 예비군에 배속되어 전시에는 정규군의 다음에 소집되게 되는 것을 알려 이것에 의해, 뇌물을 사용해 훈련 종료의 표를 취득하는 현행의 관습을 변경시켜야할 것인가를 문의하고 있었다. 레이는 이것에 대한 뉴욕으로부터의 대답도 읽을 수가 있었다. 이 편지는 회장(노어)이 그의 비서를 시켜서 쓰게 한 것이었다. 그 편지는, 간단하게 1960년의 편지에서 말한 지침 이외의 변경은 없으며, 이 건은 형제들 각자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고, 만약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집을 받으면, 개개인이 양심에 근거해 결정해야 할 일이다 , 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 사실은 더욱 레이의 마음을 깊게 손상하게 된다. 한쪽 말라위에서는「정치적 중립」이란 이름의 이유로 카드의 구입을 철저하게 거부해서 폭력적 탄압에 노출된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으며 다른 한쪽인 멕시코에서는「양심문제」라는 이름으로 군사훈련종료의 표를 뇌물을 사용해서 취득하며, 제일 예비군이라고 하는 군사 조직에 속하면서, 게다가 이탈처분도 받지 않고 순회감독자나 지역감독자가 되어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전투 대체 복무를 병역 대신에 받아들이는 것은, 이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게 된다고 하여 계속 거부해 투옥될 것을 지시해 두면서, 한편 제일 예비군이라고 하는 훌륭한 군대에 속하는 것을「양심문제」라고 정리해 계속 용인하는 것 때문이었다. 더 이상 명백한 이중적인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 , 라고 레이는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는 다음과 같은 잠언 20:23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 저울추는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고, 속이는 저울은 좋지 않다.”



 이 이중적인 기준은, 이 여호와의 증인의 최고 권좌에 오르는 인간들의 자의적인 산물과 다름없었다. 조직의 이익을 증인들 개개인의 괴로움보다 우선하며, 자신들의 표결이 66.6%나 62.6%등에 의해서, 많은 젊은이와 그 가족의 인생을 수년에 걸쳐 헛되게 하게 하는 것에 완전한 무감각이 되어있는, 그것이 이 최고 기관으로 독점적 결정권을 가진 소수 사람들의 실태였다. 성서에는 명백한 근거를 나타낼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 하나의 방침을 한 나라의 신자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키게 하면서도, 다른 나라에서는 완전히 반대의 방침을 용인하고, 게다가 그러기 위해서는 불법행위를 하는 것조차「양심문제」라고 정리하는, 이것이 이 통치체라고 하는 권력자 집단의 실태였다. 이 추악한 모순이 이 조직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결국은 이 지도집단이 여호와께 대한 충성이란 이름을 바탕으로 하면서, 실제로는 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스스로 부과한 결과, 사람들이 조직의 모순에 대해서 맹목이 되어 간다는 것을, 레이는 깨닫게 되었다. 레이는 이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은 동료인간 위에, 강력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 같은 인간집단을 두실 의도가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1975년까지 살아남는다.





 레이가 통치체에 참가한 1970년의 몇 해 전부터, 전 세계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는 1975년을 그리스도의 새로운 천년 통치가 시작되는 해로서 기대하는 움직임이, 해를 거듭하면서 박차를 더해가며 증대하고 있었다. 이 1975년의「예언」을 만들어내 추진하고 있던 사람은 당시의 부 협회장인 프래더릭 프랜즈였다. 그는 1966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 가운데서의 영원한 생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한국어는 68년)



“...이 독립적 연구의 결과로 발행된 연대표는 사람이 창조된 때가 기원전 4026년임을 알려 줍니다. 이 믿음직한 성서 연대에 의하면 사람이 창조된 지 6,000년이 되는 해는 1975년이며, 인간 역사의 일곱째 천년 기간은 기원 1975년 가을에 시작됩니다.(중략)

그러므로 바로 우리 세대 안에, 여러 해가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의 일곱째 날로 보실 수 있는 날에 이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일곱째 천년 기간을 휴식과 석방의 안식 기간 즉 땅의 모든 거민들에게 자유를 공포하는 큰 희년이 되게 하신다면 얼마나 적절할 것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때에 알맞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 있어서도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아직도 성서 마지막 권에서 말하고 있는 이 땅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를 앞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 구백년 전에 이 땅에 계셨을 때에 자신에 관하여 예언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태 12:8)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사람 존재의 일곱째 천년과 평행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신 목적에 따른 것일 것입니다.”





 이것에 계속되는 9년간의 워치타워 협회의 출판물은, 차례차례로 1975년을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가 시작되는 해로서 열심히 온 세상의 여호와의 증인에게 계속 고무시켜갔다. 예를 들면 1968년의 <깨어라>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낡은 제도가 그의 완전한 종말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절정에 달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날 것이 틀림없습니다. 기껏해야 여러 해 안에 이 [마지막 때]에 관한 성서 예언의 마지막 부분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1,000년 통치로 살아남은 인류는 해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날이 오겠지만, 바로 우리 앞에는 얼마나 웅장한 날들이 놓여 있습니까!  ( 깨어라 1968년 5월 1일 272페이지-한국어는 깨어라!68년 8월1일호 351면)



 레이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확실히 1975년이라고 하는 숫자는 나오지 않지만 「가까운 장래」,「아무리 길어도 수년 이내」라고 있는 이때는 도대체 어느 정도 먼 장래를 말하는지 소박한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많은 「권위자」의 인용으로서 1975년이 어떻게 특별한 해로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을까를 「파수대」지나 「깨어라!」잡지에서 몇 번이나 다루어 1975년까지 세계가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한 저명인의 인용을 채택하거나 해서, 독자의 여호와의 증인의 종말감을 더욱 더 부추겨 갔다.



 나중에 워치타워 협회는, 어디에도 1975년에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가 시작된다고 단언했던 적은 없다고 말해 이 예언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에 대한 변명이 한데 합치고 있다. 확실히 무조건으로 그처럼 단언한 문서는 없다. 그러나, 무수한 워치타워의 출판물의 기사 안에서 반복되었던 논리는, 1975년에 인류 창조로부터 6000년이 종료해, 제7번째의 천년기에 접어드는, 그것은 여호와의 안식의 천년기에 해당되어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천년기이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논리는 읽는 것에 조금의 의문을 주는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당시, 1975년에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가 시작된다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의 사이에 상식이 되어 버리고 있었다. 1974년의「왕국 봉사」에서는 이 종말감은 절정에 이른다.



집이나 자산을 팔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이 낡은 제도에 있어서의 스스로의 나머지의 날들을 보내려고 하는 형제들을 잘 듣습니다만 , 확실히 그것은 , 사악한 세상이 끝나기 전에 남겨진 짧은 시간을 보내는 뛰어난 방법입니다. (왕국 봉사 1974년 5월호, 영문)---(한국어판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형제들이 그들의 책임을 가볍게 마련함으로써, 이 낡은 제도에서 살게 되는 생활의 남은 부분을 파이오니아 봉사로서 마치고자 계획하고 있다는 보고를 종종 듣는다. 그것은 참으로 이 악한 세상의 끝이 이르기 전에 남아 있는 짧은 시간을 보내는 훌륭한 방법인 것이다.”-우리의 왕국봉사 74년 6월호 4면. 그러나 영문은 “brothers selling their homes and property”즉 “집이나 자산을 팔아”라는 말이 포함되어있다. 워치타워도서관 영문참조--역자주)



 당시에 통치체의 안쪽으로부터, 이 사태를 보고 있었던 레이는, 통치체 성원 대부분이 이 여호와의 증인의 상승하고 있는 기대를 억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방치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로는, 이 1975년의 예언이 발표된 1966년 이후 , 여호와의 증인 신자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 새로운 교리가 조직의 확대에 확실히 공헌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레이 자신도 그 당시, 한 명의 여호와의 증인으로 해 그리고 신입의 통치체 성원으로서 확실히 이 1975년이라고 하는 해에 기대를 가졌던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레이는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 1975년이라고 하는 설정된 해를 향해 온 세상의 여호와의 증인이 준비해 있는 모습과 성서에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의 여러 가지가 아무래도 맞지 않는다는 점에, 내심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과 시간에 관하여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 (마태 24:36)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주가 어느 날에 올는지 여러분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 24:42)



이 때문에, 여러분도 준비하고 있으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4:44)



계속 눈여겨보며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은 지정된 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가 13:33)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관할에 두셨으니, 그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은 여러분에게 속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 1:7)



 레이는 이러한 성구를 일 있을 때마다 당겨, 과도함을 억제하는 발언을 했지만, 증인의 수의 세계적 급성장 전에는 그것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흥미 있는 것은 1968년 8월 15일의 파수대지에서는(한국어는 11월15일호) 이 마태 24:36을 채택해 「그러므로 지금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가지고 희롱할 때가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지금이야 말로 이 사물의 제도의 끝이 그의 횡포한 종말을 향하여 급격히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의식해야 할 때입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아버지께서 “그 날과 그 때”를 아시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제쳐놓은 것 같은 가르침에 따라 일반 여호와의 증인들을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1974년의 어느 날 , 레이 부부의 방을 방문한 숙부 프랜즈 부회장에 대해서, 레이의 아내 신시아는 레이가 다른 형제의 과열 기색의 1975년에 대한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는 것 같은 강연을 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부회장은 레이에 대해서「모두가 흥분하면 무엇이 안 된다는 건지? 이것은 흥분해야 할 만한 것이야」라고 말했다. 레이는 그의 숙부가 마음속으로부터 이 자신이 만들어낸 교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75년 여름에는, 부회장은「너, 이것은 1914년과 아주 비슷해. 그 해도 여름까지는 모두가 평안 무사했다. 그런데 가을이 와서 사태가 급변해 전쟁이 시작되었지 않은가」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는, 1914년의 예언을 거의 체념하려고 하고 있던 제 1대 회장 러셀의 심경을 자신의 심경과 거듭해 맞추고 있는 것이었다. 1975년의 처음에 걸쳐, 부회장은 회장과 함께 온 세상을 돌아 다녀 이 1975년의 교의를 중심으로 해 강연해 돌았다. 이것은 더욱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 세계적인 과열 상태는, 그러나 통치체 내부에서도 소수였지만,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특별한 방침의 변환을 가져오는 논의에는 이르지 않았다.



 1975년은, 이 조직이 예언 해 빗나간 1881년, 1914년, 1918년, 1920년, 1925년, 1940년과 같이,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고 지나갔다. 레이는 이 때, 결국의 문제는, 이와 같이 맞지 않는 예언을 반복하는 것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행위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과 신뢰감을 진척시키는 것이 되는 것일까. 오히려 반대로, 이러한 행위는 성서의 말씀을 경시하는 입장을 정당화 하는, 절호의 구실을 주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레이의 마음에 해를 거듭해 퍼져 가는 의문이었다.



 1976년 이후의 통치체의 회합에서는, 빗나간 1975년의 예언에 대한 대처의 방법이 몇 번이나 토론되었다. 통치체 성원 중 한사람은, 굳이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쓰거나 하지 않는 것이 제일 현명하다, 그러면 수년 안에 여호와의 증인 형제자매들은 이것을 문제 삼지 않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해 굳이 하지 않는 것을 권했다. 그러나 1977년 이후, 서서히 이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의 사회 속에서 문제를 배어 갔다. 레이가 있던 브루클린의 본부 안에서도, 통치체로부터 1975년 예언에 대해 아무 코멘트도 없는 것에, 솔직하게 문제 제기를 나타내는 사람이 증가해 갔다. 그러나, 가장 큰 타격은 1977년과 78년의 2년 연속으로, 전 세계 전도인수(호별방문 전파활동에 참가한 인원수로, 여호와의 증인 활동의 지표로서 매년의 변화가 항상 주목받고 있다)가 감소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일은 워치타워의 전후 역사 중에서는 있어 유리한 산 것에서 만났다. 이 결과, 통치체는 마침내 1975년에 관해서 그 예언이 빗나간 것을 인정하는 기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기사는 레이가 집필하게 되어 , 1980년 3월 15일의 파수대지(영문 17페이지 5항)에 게재되었다. 이것은 물론 레이가 통치체 전체로부터 집필을 할당할 수 있던 것으로, 통치체의 당시의 다수의 견해를 그대로 기술한 정도의 내용 뿐 이었다. 레이로서는 이것이 통치체 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반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최대한의 진실한 행위였다.





축소되는 「이 세대」





 앞의 장에서 말한 1975년의 예언과 나란하게, 이 워치타워조직의 교리 중 큰 역할을 차지하는 연대 예언에 1914년과「이 세대」 교리가 있다. 이 교리에서는, 마태 24:34, 누가 21:32로 예수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 이 세대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기초를 두어, 1914년에 시작한 「마지막 때」의 표징을 본 세대가 지나가 버리기 전에, 이 사물의 제도가 끝나, 즉 최후의 대결전이 온다고 하는 것이다. 이 「1914년 세대」의 교리는 해가 지나감에 따라 증대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1914년의 사건을 목격한 세대는 매년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대결전이 도래하지 않는 이상, 이 교리를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든「이 세대」를 길어지게 하는 「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는, 이 교리에서「이 세대」는 1914년에 적어도 15세 이상인 사람들로 했다. 그것은 15세라고 하는 나이가 그 당시의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최저의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이 해석은 1968년 10월 8일의「깨어라!」잡지 13페이지에 실려 있다. 이것은 1975년의 예언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왜냐하면 1975년에는 이 세대가 76세 이상이 되어, 생존중인 사람이 다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75년의 예언이 빗나간 후, 이 교리 「1914년의 사건을 본 세대」라고 바꿀 수 있었다. 이것에 의해 , 「이 세대」의 연령을 낮출 가능성을 만들었다.



 1978년 통치체 회의에서는, 이 세대」의 해석을 어떻게 변경하면 좋은가에 대한 토론을 했다. 통치체 성원 앨버트 슈로더는 「이 세대」를 「기름부음 받은 자」즉, 14만 4천명의 특별한 여호와의 증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기름부음 받은 자’의 수는 매년 봄 기념식에서 표상물을 취하는, 즉 빵과 포도주를 먹은 여호와의 증인 숫자이며, 이중에는 꽤 젊은 여호와의 증인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곧바로 멸족할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통치체 토의에서는 이 새로운 교리해석은 각하 되었다. 다른 관련된 교리의 변경도 필요로 해, 교리 체계의 근본을 뒤집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1979년 통치체 회의에서는 레이는, 스웨덴의 장로 칼 올로프 존슨(Carl Olof Jonnson)이 보내온 1914년의 연대 계산의 근거로 대하는 조사 결과를 카피해 배포했다. 그리고 이 1914년과 「이 세대」의 교리가 역사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 예수께서 누가 21:28,31에서 「이 세대」사람들에 대해서「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똑바로 일으키고 머리를 드십시오. 여러분의 구출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왕국이 가까운 줄을 아십시오.」라고 지시하셨는데, 지금의 교리대로 당시 유아나 갓난아기인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라고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확실히 1914년 당시 20대 , 30대이며 , 당시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해, 「하느님의 왕국이 가까운 줄을 알았던」세대는 차례차례 죽고 있어서 생존자는 얼마 남지 않게 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한 다른 통치체 성원의 태도는 레이에 대해서 냉담했다. 통치체 성원 로이드 배리는, 통치체 성원 중에 1914년의 현행의 교의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는 것에 당혹을 느낀다고 말했다. 다른 통치체 원 라이먼 스윙글은, 소련의 어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130세의 장수이며, 현행의 교리를 고수해 나가는 것에 문제는 없다고 말하여 이것은 통치체 다수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레이는 이것에 대해 , 오늘「현재의 진리」로서 배우고 있는 것은「과거의 진리」가 되어, 「미래의 진리」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이러한 「진리」는 그 말 자체의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냐고 말했다. 결국 이 레이를 유일한 소수의견으로 하는 토론의 결과, 통치체는 이 1914년과「이 세대」의 교리를 변경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통치체도, 회장도 1914년이라는 교리를 확고부동한 진리라고 믿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레이의 양심을 몇 년에 걸쳐 계속해서 손상시켰다. 예를 들면 1975년의 통치체 회의에서, 노어 회장은「1914년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1914년은 대단히 오랫동안 말해왔다. 우리는 올바를지도 모른다. 맞을 것으로 희망한다.」라고 무기력한 발언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집필 부문의 회의에서도 1914년의 교의가 다루어졌을 때 , 통치체 성원 컬 클라인은, 이 1914년을 적어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그만두는 것, 하나의 교리를 변경하기 전에는 그 교리에 관해서 그 사이 당분간은 침묵을 지키는 것, 그것에 의해 다음에 오는 교리의 변경은 스무드하게 간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몇 번씩이나 행해지고 있던 방식을 통해 진행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레이는 나이지리아를 방문했을 때, 지부 위원회의 봉사자에게 일반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의 이 1914년의 교리의 수취되는 방법을 물어 보았다. 그 지부 위원은, 자기 자신이 솔직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레이에게 털어 놓고 있다. 이와 같이 워치타워 지도부 내부에 많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면서도, 통치체는 이 1914년 교리에 손을 대기를 계속 거부했던 것이다.



 이 1914년의 교리 변경의 일련의 논의 중에서, 레이가 가장 경탄한 것은 앨버트 슈로더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자위원회가 1980년 3월 5일의 통치체 회의에서 제안한,「이 세대」를 1914년이 아니고 1957년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변경하는 안이었다. 그것에 따르면 , 마태 24:3-22는, 1세기 당시와 1914년 이래 일어나고 있는 것을 평행하여 말하고 있어 , 24:23-28은 그리스도의 1914년의 「파루시아」(눈에 보이지 않는 임재) 를 가리키고 있다. 그에 대한 24:29-44는 천체 현상을 말하고 있어, 이것은 1957년의 러시아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에 의해 열리게 된, 우주 시대를 문자 그대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대」는 1914년을 본 세대가 아니고, 1957년의 우주 시대의 시작을 본 세대로 변경해야한다, 라는 것이었다. 이 안에 의해 1914년과 「이 세대」교리는 수정을 더해져 47년간 더욱 시간을 벌게 될 수가 있었다. 이 안은 통치체의 회합에서 너무 기발하다는 이유로 각하되었다. 그러나 레이의 최대의 놀라움과 슬픔은, 이 1914년과 「이 세대」의 교리를 추진해, 일반 여호와의 증인에게 확고부동한 진리로서 가르치고 있는 본부의 통치체 내부에서, 적어도 3명의 통치체 성원이 이러한 안을 제출했다고 하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교리의 근본인 최고 지도부 자체가, 이 교리를 확고부동한 진리와 젓가락이라고 믿고 있지 않고, 다른 「안」에 의해 진리를 옮겨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레이의 통치체 성원으로서의 9년간은, 겹겹이 쌓이는 양심의 위기를 통해 그에게 새로운 경지를 여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양심의 갈등은 그의 마음을 책망해갔다. 1976년 이후, 레이는 통치체 안에서의 입장이 더욱더 곤란해져갔다. 많은 경우, 그의 입장은 소수파이며, 그의 의견은 혐의의 눈을 가지고 다루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사태가 때와 함께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근거가 없는 것 이라는 것을 레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갔다. 레이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연설 가운데 다음의 말이, 그의 그 때의 심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진리의 최대의 적은 대부분의 경우, 계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던 부정직한 허위가 아니고, 일관되게 설득성이 있는 비현실적인 신화이다.”



 레이는 자신이 접근했던 것이, 바야흐로「일관되게 설득성이 있는 비현실적인 신화」에 근거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성서와 하느님에 대한 견해가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는 그 반대였다. 성서 그 자체가 말하게 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는 재차 발견했다. 그는 그때까지 통치체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얼마나 이「성서 그 자체가 말하게 한다.」는 중요한 입장이 부족한 것인지, 얼마나, 성서의 말이 우선 불완전한 인간조직을 「경로」로서 통해져 바꿀 수 있었는지를 9년간의 통치체 성원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아플 정도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레이는 지도자의 권위나 조직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권위는 그리스도인을 섬기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을 지배하거나 억압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조직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를 다만 조직에 온순하게 따를 만큼의「영적인 갓난아기」로서 지도하지 않고 그들을 개개의 인간으로서 선악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영적인 어른」으로 단련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레이는 재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조직보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의 지도 가운데서 제일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에 있어, 인간의 논리에 의해 성서의 말씀을 바꿀 수 있어 하느님의 말씀보다 조직의 전통적 입장이 옹호 되는 것은 이미 중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논리가 일관성 없는 결정을 내려, 이중의 기준으로 그리스도인의 생사를 지배해, 그것이 절대적 권위로서 온 세상에서 일제히 받아들여지는 것, 이것은 레이의 지성에도 감정에도 참기 어려운 아픔을 주는 것이었다.

 1979년의 가을, 레이는 아프리카지역을 방문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을 기회로, 아내인 신시아에게 그때 그의 심경을 털어놓아 부부의 향후 장래를 상의했다. 레이는 57세, 신시아는 44세였다. 신시아는 레이의 통치체에서의 스트레스를 벌써 느끼고는 있었지만, 레이가 모든 것을 털어놓아 이야기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통치체 성원의 일자리를 사임할 생각을 신시아와 상의했다. 레이는 두 사람의 건강 상태, 부부가 아이를 만들 수 있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 등도 생각했다. 이것은 레이에 있어 실로 큰 결단이었다. 통치체 성원인 것은 레이에게 있어서 일평생의 보장이었다. 브루클린 본부에서의 마음 편한 주거, 생활의 보장, 거의 전 세계를 모두 협회의 경비로 여행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온 세상 어디를 가도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 등, 통치체 성원으로서 머무는 것의 매력은 많이 있었다. 한편 57세라고 하는 나이에, 손에 일자리를 얻을만한 기술도 없고, 연금이나 저축도 없는 레이와 그 아내가, 통치체를 그만두고 단순한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 일인가는 너무나 분명했다. 레이가 다만 무난하고 평화로운 일생을 보내고 싶다면, 통치체의 회합에서 다수 의견에 동조해, 항상 다른 구성원과 협조를 유지해 간다면, 그의 생애의 통치체 성원으로서의 지위는 보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의 마음속에서는 이 시점에, 더 이상 이 혜택을 계속 받는 것이 양심상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레이는 이 시점에서 벌써, 조직의 가르침 중 몇 가지는 성서를 통한 증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미 말한 1914년과 「이 세대」 교리 외 , 여호와의 증인 중에서 14만 4천 명만이 예수를 중개자로서 하늘에서 부활해, 그 외 많은 신자들은 예수가 중개자가 되는 희망은 없고, 최후의 대결전 후에 지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가능성만이 희망이다고 하는, 신자를 2개 급으로 나누는 교리가 있었다. 레이는 조직이 이것에 관해서 인용하는 성구, 로마 8:16, 17을 전후관계를 포함해 읽는 한 , 결코 조직이 가르치는 것 같은 신자 2층급을 바울이 말하고 있으므로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는 그러나, 자신의 통치체 성원이라고 하는 입장으로부터, 세계 각지의 강연여행에서는 항상 조직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해야 했다. 실제 그는 자기 자신이 조직의 교리에 관한 의문을 강연 도중에 이야기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의 교리에 대한 의문은 그저 한 줌의 레이의 개인적인 친구의 사이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실제로 믿는 것처럼,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야기하는 것으로의 어긋나는 점을 계속해 가는 것은, 레이에 있어 참기 어려운 고통이 되어 가고 있었다.





폭풍우의 예고





 1979년 11월 14일의 통치체의 회합은, 그 다음 해에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 불어 거칠어진 숙정의 폭풍우의 예고가 되었다. 이 회합에서 통치체 성원 중 한 명, 그랜트 수터는, 통치체 성원의 일부와 집필부의 일부에 협회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어서 혼란이 생기고 있다고 하는 보고를 들었다는 것을 꺼냈다. 이러한 보고는 통치체 성원들 사이에서는, 수터 이외에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레이는, 그가 세계 각국에서 강연해 돌았을 때에는, 한 번도 협회가 출판해 온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 같은 강연을 했던 적은 없다는 것, 그러한 경우가 있다면 청중의 누군가가 녹음하거나 필기하거나 해서, 어떠한 내용인가 알 수 있겠지만 그러한 증거는 있는지, 라고 수터에게 물었다. 그러나 답은, 이것은 단순한 소문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교육위원회가 조사한 결과, 통치체의 일원이 강연에 즈음해 그리스도의 왕국이 기원 33년에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1914년 교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청중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후의 회의에서 통치체는, 향후의 강연에서는 그러한 일이 없게 조심하자고 하는 것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 된 것처럼 보였다. 이 합의에서는 개인적인 회화의 내용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실은 그 후에 오는 모든 발언을 포함한 통제라는 것을, 레이는 그 시점에서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레이는 1976년 이후, 해를 거듭해 높아지는 조직 지도부의 권위적 태도의 강화를 볼 때, 한층 더 진행된 통제의 수단이 취해지는 것, 그리고 그것이 레이와 몇 명의 본부에서 요직에 붙어 있는 사람들로 향해질 것이라는 점을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레이의 예감은 머지않아 적중했다. 레이에 대한 공격의 도화선을 지른 것은 통치체 성원 로이드 배리였다. 그는 「파수대」지에 매호 실리는 기사를, 인쇄로 돌기 전에 최종 검열을 하는 역이었지만, 그는 다수의 기사의 원고에, 레이만이 5명의 집필 위원회의 위원 중에서 승인하는 서명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통치체 회의에서 문제 제기했다. 레이는 이것에 대해, 자신은 양심에 비추어 이러한 기사를 승인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레이는 그러나, 이러한 기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서명을 하지 않는 것은 투표로 기권하는 것과 같은 논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통치체의 의향에 따르지 않고, 양심상의 이유로 서명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면, 통치체는 레이를 집필 위원으로부터 제외하고, 서명을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통치체는 결국, 레이를 집필 위원의 직무로부터 제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레이의 마지막 말은, 협회 본부에서 그 후 일 년 가까이에 걸쳐서 더욱 불어 닥친, 폭풍우의 예고를 느끼게 하는데 충분했다.



다음 1980년 3월 4일, 레이는 통치체의 인사 위원회에 3월 24일부터 7월 24일까지의 휴직 소원을 제출했다. 레이도 그의 아내도, 심신의 건강을 되찾는 데는 수개월의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고 결론 했다. 이전에 두 명은 건강진단을 받는 것과 동시에, 앨라배마 주 가즈덴의 마을에 있는 친구 피터 그레거슨을 방문해 통치체를 사직 후, 어떠한 일자리와 주거를 얻을 수 있을까를 조사하려고 예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와 신시아가 앨라배마에 침착해 머지않아, 브루클린 본부에는「조직에 대한 음모」라는 죄목으로「숙정」의 폭풍우가 불어 닥치게 되는 것이었다.







종교재판의 폭풍우





 종교재판은 사람을 신앙의 내용에 의해 재판하는 재판이다. 중세시대에는 고문, 폭력적 처벌이 항상 대부분이었지만, 이것들이 현재는 위법행위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권위주의, 교의적인 방식, 피고가 공정한 중재를 받을 권리의 무시는, 현대의 종교재판에도 계승되고 있다. 워치타워 협회의 세계 본부에서 1980년에 전개된 일련의 사건은, 현대 종교재판의 전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가 휴직에 들어간 단 2주간의 사이에, 몇 명의 본부 직원에게 의혹을 걸칠 수 있어 조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된 것은 길르앗 성서 학교의 교무 주임으로, [야고보서 주해]를 집필하였고, 해박한 성서지식으로 잘 알려져 있던 에드워드 댄 랩, 이전 스페인 지부 감독자로, 본부의 봉사부에서는 전문의 스페인어 회중 전체를 지도한 적도 있는 루네 바스케스, 쿠바인으로 본부의 인쇄공장에서 일하는 크리스 산체스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의 발단은, 본부의 봉사부에 들어간, 한 쿠바출신 여호와의 증인으로부터의 밀고였다. 그것은 베델 가족(본부 직원의 다른 명칭) 중에 조직의 가르침과는 다른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이 밀고자 훈베르트 고디네스는 봉사부와 사회자 위원회에서 두 번에 걸쳐서 장시간의 청취를 받아 그 내용은 테이프에 녹음되었다. 이 안에서는 먼저 크리스 산체스가 크게 다루어졌고 그에 더해 루네 바스케스, 에드워드 댄 랩, 그리고 레이의 이름이, 같은 동료로서 거론되었다. 그리고 그 청취의 한중간에 고디네스는 루네 산체스에게 전화해, 직접적으로 그의 입으로부터 증거가 되는 것 같은 발언을 유도 하였다. 이 2시간 반에 걸치는 고디네스의 청취의 녹음은, 통치체의 회합에서 참가자 전원이 듣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광범위한 사법위원회가 설치되어 심문의 고리는 광범위하게 파급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댄 랩은 두 명의 통치체성원인, 로이드 배리, 잭 바 두 명에 의해, 그의 조직에 대한 견해, 1914년 교리, 14만 4천명과 2계급 그리스도인의 교리 등에 대해서 심문을 받았다. 댄 랩은 그에 대한 답으로서 통치체 구성원 사이에 성서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는 것, 1914년, 14만 4천명의 교리에 관해서는 솔직하게, 통치체의 내부에도 이 가르침에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했다. 한편 같은 무렵 루네 바스케스, 크리스 산체스가 관여하고 있던 스페인어 번역부의 직원도 일제히 심문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심문은 개별적으로 행해져 각자가 같은 부문의 다른 인간이 사적으로 어떠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를 꼬치꼬치 추궁 당했다.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한 심문을 통해 얻은 정보를 다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심문의 재료로서 사용하는, 범죄에 대한 조사방법이 사용되었다. 스페인어 번역부의 어떤 직원이 증언을 거부했을 때, 통치체 성원으로 사법위원회의 한 명은「당신이 증언하지 않으면, 배교를 숨긴 죄로 당신도 제명된다.」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 증인은 그가 들었던 것은 배교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이 사법 위원의 위협대로 그는 머지않아 제명처분 되었다.



 당시 앨라배마에 있던 레이는, 이 사태의 급 전개를 에드워드 댄 랩으로부터의 전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알았다. 레이는 통치체의 사회자로 사법위원회의 중심이 되고 있는 알버트 슈로더에게 앨라배마로부터 전화해 사태의 설명을 요구했다. 그 시점에서, 슈로더는 레이에게, 고디네스의 청문의 테이프, 에드워드 댄 랩이나 레이의 이름이「공모자」중에 오르고 있는 것, 그 죄상은「배교」라고 하는 중대한 것임을, 모두 레이에게 알리지 않았다. 슈로더는 레이에게「집필 부문의 운영이 잘 되어가지 않아서 출판 업무가 늦는 것을 조사하고 있다」라고 사실과는 반대되는 대답을 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인 형제들 사이에 있어야 하는 솔직함과 정직함은 볼 수 없었다. 이것은, 통치체의 에드워드 댄 랩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했다. 그들은, 댄 랩을 심문은 했지만, 결코 무엇을 조사해 심리하고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1980년 4월 25일, 레이가 앨라배마로 옮겨져 정확히 1개월이 지났을 때, 사법위원회는 대량의 제명 처분을 결정했다. 이 중에는 루네 바스케스 부부, 크리스 산체스 부부, 몇 사람의 스페인어 번역부의 직원, 바스케스 부부가 소속된 회중의 장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에, 바스케스만이 상소를 인정받아 상소 위원회가 열렸지만, 그 중에 그에게는 조직의 교리 리스트를 들이대면서 이것에 전부 예스라고 말하는지 어떤지를 추궁 당했다. 바스케스는 그 넘치는 냉혹한 처사에 쓰러져 울면서 그 이상의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상소 위원회는 바스케스의 제명처분을 지지하여, 그의 처분은 결정됐다. 바스케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상소는 즉시 기각되어 제명 처분은 본부 직원 전체에게 발표되었다.



이러한 제명된 사람들을 보건데, 그 성인으로서의 인생의 대부분을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개인적인 생활을 희생해가며, 조직을 위해서 바쳐 온 경건한 신자였지만, 불과 일주일간 안 되는 심리의 결과, 수십 년간에 걸치는 조직에 대한 봉사도 무로 되었다. 그들은 사적인 대화중에서, 조직의 가르침에 대해서 성서에 근거한 의문을 이야기한 것에서 출발했지만, 이것에 대해 사법위원회는 모두 그 발단이 되는 가르침을 성서에 근거한 논의로 이「배교자」들의 「잘못」을 가르치고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심리 위원은 이「배교자」들의 심리에 대해,「우리는 당신의 성서적인 의문을 논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해 성서에 근거한 논의를 처음부터 회피했다. 사법 위원에게 있어서의 관심사는, 성서의 말씀에 충실한지 어떤지 보다는, 조직과 그 가르침에 충실한지 어떤지 인 것이었다.



 5월에 들어와, 종교재판의 고리는 마침내 레이에게 파급한다. 5월 8일, 레이는 통치체의 사회자, 알버트 슈로더로부터 정식으로 본부로 돌아와 심문을 받도록 전화로 지시를 받았다. 이 시점에서 벌써 레이는, 벌써 제명을 받거나 냉혹한 심문에 노출된 다수의 친구들로부터의 전화 연락에 의해, 일의 중대성과 자신에게 의혹이 파급되는 것을 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통치체와 사법위원회는 레이에게, 지금까지의 경위를 모두 알리지 않았다. 많은 본부에 있던 친구는 레이에게, 이것은「잔챙이」를 먼저 처분해 증거 굳히기를 하고 나서 레이나 에드워드 댄 랩과 같은「거물」에게 착수하는 방책이라고 가르쳤다. 5월 19일,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로 돌아온 레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이해를 넘은 이상 사태를 겪은 본부 직원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심문의 내용과 방식을 「악몽」 「망상적」이라고 한 말로 표현해, 그것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태도가 아니고, 그들은 처음부터 위험한 적의 일부로서 다루어진 것을 레이에게 이야기했다. 그 심문 내용을 통해서 레이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심문의 기본 태도가, 다른 견해를 가지는 사람은 그 만큼 하느님께 불충실한 사람이라고 하는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레이는 4월 28일에 배포된, 통치체 사회자위원회의 이름으로 다루어진 다음과 같은 메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잘못된 가르침이 퍼지고 있는 최근의 증거

아래에 나오는 것은 베델에서 번지고 있는 잘못된 가르침 몇 가지이다. 이것들은 4월 14일 이후, 외부로부터 통치체에 대해서 초래된 것이다.



1. 여호와는 오늘날 지상에 있어 조직을 갖고 있지 않다. 통치체는 여호와에 의해 지시를 받지 않았다.

2. 그리스도의 시대(기원 33년) 부터 마지막 때까지 침례를 받은 것은 모두, 하늘에서의 부활의 희망이 있다. 이러한 모든 사람은 기념식에서 표상물을 맡아야 하는 것이어 ,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3. 기름부음 받은 자로부터 완성되는「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반열의 사람들과 통치체가 여호와의 백성을 지시한다고 하는 정당한 근거는 없다.

4. 오늘날, 「천적」반열과 요한 10:16에서「다른 양」이라고 부르는「지상」반열 , 의 두 개의 반열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5. 계시 7:4로 말할 수 있고 있는 14만 4천의 수는 상징적인 의미이며, 문자 그대로이해해서는 안 된다. 계시 7:9에서 말하고 있는「큰 무리」도 또한 하늘에서 봉사를 드린다. 이것은 15절에서 그들이「그분의 성전에서 주야로」혹은 왕국행간역 에서는 「그분의 신성한 거주지에서」봉사를 드리고 있다, 라고 써있는 그대로이다.

6. 우리는 지금, ‘마지막 날’의 특별한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마지막 날」은, 베드로가 사도 2:17에서 예언자 요엘을 인용해 말한 것처럼 1900여 년 전인 기원 33년에 벌써 시작되었다.

7. 1914년은 확립된 해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1914년에 왕좌에 도착한 것은 아니고, 기원 33년 이래 왕국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임재 =파루시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마태 24:30에 진술되어 있는「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하늘에 나타날」장래에 일어난다.

8. 아브라함, 다윗, 그 외의 옛 믿음이 있던 사람들도 또한, 히브리 11:16에 써 있는 대로 하늘에서 부활한다.



주의: 위에서 말한 성서의 견해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져「새로운 이해」로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협회의 그리스도인 신앙의 기본적인 성서의「골격」과 반하고 있다. (로마 2:30, 3:2)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여호와의 백성에 의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성서적으로 받아들여져 온「건전한 말씀의 본」에도 반하고 있다. (디모데 둘째 1:13) 이러한 「변화」는 잠언 24:21, 22에서 비난하고 있다. 따라서 위 내용은 「진리에서 벗어나,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교란하고 있다.」(디모데둘째 2:18) 모두를 고려하면 이것은 배교이며, 회중적 조치로서 처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권 선교 학교 지침서 1977년 58페이지 참조. )

의장 위원회 4/28/80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논리는, 레이에 있어서는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협회의 가르침을 먼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오랜 세월 믿어 왔다는 사실이 마치 그 올바름을 증명하는 것 같이, 이러한 인간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첫째로 중시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레이는 다음에 고디네스의 청문 테이프를 들었다. 그 중에 레이가 들은 것은, 세 명의 조사에 해당되는 통치체 성원들의, 벌써 결론을 내린 것 같은 태도였다. 거기에는, 용의자의 반론을 듣거나 증거 조사하고를 하거나 하는 전부터, 벌써 이러한「배교자」로서 평가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강한 비난으로 밀고를 해 온 고디네스 부부에게로의 칭찬은 나왔지만 단순한 한마디도, 잘못을 범한 가능성이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있는 배려는 듣지 못했다. 다음에 레이가 들은 것은 제 2의 밀고자 보네리의 청취의 테이프였다. 이 내용은 제일의 테이프보다 더욱 심한 내용이었다. 보네리는 루네 바스케스, 크리스 산체스들이 새로운 분파를 만들어 다른 가르침을 가르치거나 다른 집회를 열거나 침례를 주거나 하고 있다고 하는, 자신이 목격한 적도 없는 것을 소문에 근거해 증언 하고 있었다. 그가 증언한 것 중 반 이상은 근거가 없는 소문이거나, 완전히 만들어낸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증언의 나머지 절반은, 성서에 대한 개인적인 대화의 내용이었다. 성서를 개인적으로 논할 때에, 조직의 가르침과 완전하게 일치하고 있지 않는 한 그러한 대화는 금지된다고 하는 규칙을 만들지 않는 이상 이것으로 처벌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보네리의 이 소문에 근거한 고발은, 이차적인 소문을 만들어내 이후 본부 직원의 일부가 새로운 분파를 만들려고 했다는 소문이, 본부 전체의 1500명 이상의 직원들 사이에 퍼져, 그것은 결국 전 세계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 소문으로서 확대되었다. 이 완전히 사실과 반대되는 소문을 퍼지도록 내버려두고 용의자를 제명하기만 하고 그 소문의 신빙성을 조사해서, 근거가 없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멈추는 지도를 하지 않았던 것이 통치체였다. 이 외 , 그 시점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사이에 세계적으로 퍼진 소문 중에는, 스페인어 번역부가 공모해서 스페인어판 출판물의 내용을 바꾸어 썼다는 것, 이러한 「배교자」들 사이에 동성애를 하고 있었다는 어느 쪽도 완전히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 있었다.



레이는 왜 이러한 터무니없는 소문이, 전 세계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 퍼지기가 쉬운 것인가를 생각했다. 정보가 통제되고 있는 사회 속에서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그에 대한 설명을 찾아, 그런 사태를 정합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이러한 많은 경건한 여호와의 증인이, 갑자기 일제히 제명된다고 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일어났던 데다가, 정보 통제하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해, 합리화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조금이라도 타당한 것 같은 소문은「진실」로서 받아들여지기가 쉬워지고 있었다. 거기에 대신하는 설명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는「조직」그 자체가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 그것은 그들 일반 여호와의 증인들의 생각에 일말의 가능성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 이다. 조직을 계속 하는 것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은 결과가, 이러한 소문이 퍼지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마지막 통치체 회의





 5월 21일, 레이는 통치체의 전체 회의에 임했다. 17명 전원이 출석한 이 회의의 분위기는 비정상인 것이 있었다. 앨라배마로부터 돌아와 2개월 만에 얼굴을 맞대는 통치체 성원들의 누구하나도 레이에게 친하게 말을 건네는 것은 없었다. 사회자 앨버트 슈로더는 먼저, 레이에게 사회자 위원회가 배포한 8항목의 교리에 관해서, 각 항목 마다 의견을 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 사회자의 위원회의 8항목의 쓰는 법은 교의적이고, 이것을 받아들이든가, 받아들이지 않는가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은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 레이는 자신의 성서에 근거한 양심에 타협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이러한 항목에 관한 견해를 할 수 있는 한 조직의 가르침에 맞추는 형태로 말해 갔다. 예를 들면 제1항의「여호와는 오늘날 지상에 있어 조직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물음에는, 레이는, 지상에 있어 조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고, 어떠한 조직을 여호와가 가지고 있을지가 문제이다. 중앙집권적인, 고도로 계층화한, 권위적인 조직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 형제의 회중의 조직으로, 그 중에서의 권위는 형제를 도와 이끌어, 섬기는 것이며, 결코 지배하는 것은 아닌, 그러한 조직은 아닌 것인지, 거기가 문제였다. 따라서 레이의 답은「나는 하느님이 지상에 조직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지만, 그것은 하느님이 지상에 회중을 갖고, 형제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 대해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통치체가 여호와의 지시를 받고 있는지 어떤지의 질문에 대해서는,「나는 통치체가 성서의 말씀에 충실하다 한정해, 하느님의 지시는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통치체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질 때에는, 하느님의 지시는 없다고 믿는다.」라고 대답했다. 레이의 답은 모든 항목에 관해서, 이와 같이 조건부의 유연성이 있는 것이었다. 만약 다른 배교의 죄로 고발된 사람의 누군가가 이 8항목과 같은 교의적인 견해를 말했다고 하면, 레이 자신이 먼저 그에 대해보다 유연한 견해를 하도록 재촉한 것일 것이다.



 이것에 대해, 통치체 성원 중 여러 명은, 레이가 지금 말한 견해가 테이프 안에서 증언된 레이의 견해로 여겨지는 것과 달라서 이 레이의 이야기에서는 문제점이 애매해지고 있다고 추궁을 시작했다. 레이는 이것에 대해, 타인이 그의 견해를 어떻게 해석할까에 책임을 가질 수 없다고 대답해 사도 바울조차 그 말을 오해 받은 것을 지적했다 (로마 3:8;베드로 둘째 3:15, 16). 그 외, 그리스도교국의 성서 주해서를 사용하는 것이 적당한가, 파수대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하는 증언은 사실인가, 레이가 기념식(봄마다에 행해지는 여호와의 증인이 실시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 의 강연에서 「다른 양」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등 의 질문이 레이로 향해졌다. 「다른 양」은 2반열의 여호와의 증인 중 「그 외 여럿」의 반열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것에 대해, 그의 숙부로 현회장인 프래더릭·프랜즈 자신이, 레이가 최초로 브루클린에 온 해의 기념식에서 「다른 양」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해 만약 확인하고 싶었으면 자신이 그 때에 써둔 노트가 남아 있기 때문에 증거로 해 제출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일련의 질문의 뒤, 레이는 이번 사태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 같은, 조직에 반대하는 교리적인 의견을 표명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벌써 제명되어 있던 친구, 특히 루네 바스케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가 과거 30년간 얼마나 충실한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조직에 대해서 헌신적인 봉사를 해 왔는지를 강조하고, 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품에 지금도 경의와 신뢰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레이는 통치체의 이 심문이 끝나고, 회의실을 나와 다음 통지까지 방에서 기다리라고 들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 수 시간을 굳이 하는 일 없이 기다렸다. 점심식사 시에 다른 통치체 성원이 안뜰을 걸어 식당으로 가는 모습을 창을 통해서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