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 몰트만이 신앙인가 불신앙인가?
큰 목사님, 큰 신학자를 만나다
조용기의 "희망"과 몰트만의 "희망"은 다르다
데스크 승인 2013.10.02 16:07:47
이원석 (verbs)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몰트만 박사와 희망의 목회자 조용기 목사. 둘 다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희망의 내용은 다르다. (<국민일보> 갈무리)
독일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rgen Moltman)이 한국에 왔다. 내게 있어서 그는 석사 할아버지시다. 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의 박사 아버지(Doktorvater,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바로 몰트만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첫 번째 한국인 제자이며, 몰트만의 서적의 대표적인 번역자답게 나의 지도 교수는 대학원 세미나에서 줄곧 몰트만을 읽히셨다. 다행히 몰트만은 독일인답잖게(?) 글이 명확하고, 논리 구조가 선명하여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하여튼 나에게 몰트만은 너무 익숙하달까나.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번 내한에 대해 심드렁했다.
더욱이 몰트만의 이번 내한은 처음이 아니다. 한국인 제자가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1975년 3월 이래로 수시로 내한하였다. 심지어 자신이 먼저 방문을 제안할 정도로 말이다. 여하간 이번이 아마도 십여 번째 방문일 게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교계가 좌우를 막론하고 그를 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번에 그를 만난 조용기 목사는 "나는 목회 인생 전체를 통해 희망의 신학을 실천했다. 당신의 신학은 내 목회의 강력한 기초였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나, 나로서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치적 희망과 풍요의 희망
▲ 몰트만 박사는 민중 중심의 교회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앙한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지배 체제와의 투쟁을 통해 실현된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물론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자이고, 조용기는 희망의 목회자이다. 그런데 단어가 같다고 내용이 같을까? 우선 몰트만의 출세작 <희망의 신학>에서 연원하는 이 희망은 어떠한 희망인가? 원래 그는 좌파 사상가인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탐독하고 여기에서 혁명의 동력으로서의 종말론적 희망 개념을 신학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희망이라는 어휘에 정치적 맥락을 도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 정확하게 말한다면 체제 저항적 희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지배 체제와의 비판적 거리를 상정하고 있다.
반면, 조용기 목사는 어떠한가? 말했듯이 우리는 그를 희망의 목회자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 희망은 전쟁의 참화 위에서 가난을 극복하고 풍요를 갈망하던 이의 희망이다. 조용기의 시야에 군사독재 정권의 문제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마음 아파한 것은 경제적 가난(과 육체적 질병)이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가 갈망한 것은 풍요의 희망이었다. 거기에 정치적 맥락은 배제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체제 지속적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희망은 지배 체제 안에서 풍요와 성공을 획득하는 것을 지향한다.
투쟁의 힘과 신념의 힘
몰트만은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그의 출세작 <희망의 신학>은 칼 바르트가 미완으로 남긴 종말론 연구를 계승한 것이다(바르트를 자유주의자로 보는 분들에게 별도로 드릴 말씀은 없다). 몰트만은 초월의 희망을 현세 변혁의 동력으로 보았다. 그는 초월, 즉 하나님의 좌소(坐所)를 전통적인 공간적 은유(하늘)에서 시간적 은유(미래)로 변용시켜 설명하고 있다.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서 미래에 계신 하나님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래는 초월적 가능성이고, 그 미래의 강림으로 인해 현실에서의 정치, 사회적 변혁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초월적 미래의 도입(강림)은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로 인해 가능하게 된다. 몰트만은 후속작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을 통해 성령 안에 존재하는 메시아적인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교회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선포하며, 그 미래 성취에 헌신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는 곧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초월적 미래(가능성)의 실현을 위해 세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면, 세상(지배 체제)과 불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말해 희망은 세상과의 투쟁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반면, 조용기는 어떠한가? 그가 말하는 풍요의 희망은 적극적 믿음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게 무슨 말인가? 간단히 말하면, 돈을 생각하면 돈이 온다는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나는 <거대한 사기극>에서 이러한 관점을 신비적 패러다임으로 명명한 바 있다. <시크릿>의 론다 번과 <긍정의 힘>의 조엘 오스틴은 그의 정신적 후배이다. 조용기의 멘토는 오랄 로버츠이며, 그의 절친은 로버트 슐러이다. 이들은 이른바 신사고(new thought) 운동의 가르침을 기독교적으로 전유하여 성서가 말하는 믿음과 다른 주술적 믿음을 가르치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희망은 믿음에서 기초를 발견하는데, 이 믿음의 성격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달래며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주술적인 것이다. 따라서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이의 주된 내용은 "적극적 상상"이다. 물론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를 믿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삼중 축복(영적 구원, 경제적 부요, 신체적 건강), 즉 기복적 믿음의 한 가지 항목으로 자리할 뿐이다. 이것은 <요한삼서> 2절의 일반적 관용어구로서의 간구를 구체적 축복 사항으로서의 약속으로 오독(誤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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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 기독교적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이다.
위르겐 몰트만 내한, 서초교회에서 “희망의 하나님과 우리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
코닷 | webmaster@kscoramdeo.com
승인 2013.10.04 07:42:11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 박사(독일 튀빙엔대학교 석좌교수)가 내한하여 강연을 했다. 제목은 “희망의 하나님과 우리의 미래.” 10월 1일(화)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와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가 주관한 국민일보 창간 25주년,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개교 8주년 기념 컨퍼런스 “참된 희망 우리의 미래”가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소재 서초교회에서 열렸다. 이 컨퍼런스에서는 몰트만 교수 외에도 은준관 목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자, 명예총장)가 “세상에 희망을 여는 공동체”, 임영수 목사(모새골 공동체 담임 목사)가 “모새골의 미래와 희망”,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가 “교회, 한국사회의 희망이 되어라”, 서우경 교수(서우경코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코칭아카데미 책임교수)가 “성도여, 희망을 코칭하라”, 최윤식 교수(미래학자, 한국뉴욕주립대 교수)가 “10년 후, 한국교회 희망을 찾으라”, 김두현 소장(21C 목회연구소 소장)이 “목회자, 희망을 제시하라"라는 제목으로 각각 강연하였다.
희망의 하나님과 우리의 미래
몰트만 박사 강연의 대략은 이렇다.
▲ “기독교적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부활의 현존 안에서 미래에 그 단단한 닻을 내리고 있다.” 강의하는 몰트만 박사
초월적 신은 이미 많은 종교에 알려져 있지만 희망의 하나님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전해 준 성경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온전하고 완전한, 확실한 희망이다. 앞으로 향하는 것이자 오고 있는 것에 대한 기대 속에 사는 삶인 것이다. 즉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사는 것”이며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자신을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종말론은 아마겟돈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묵시론적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종말은 오히려 “참 생명의 시작, 하나님 나라의 시작, 모든 피조물이 그 영원한 모습으로서 새롭게 창조되는 시작”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희망이 원천이자 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부활의 빛 안에서 미래 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희망”도 존재한다.
이러한 기독교적 희망은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가난한 자와 병자와 아이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역사를 기억한다. “기독교적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부활의 현존 안에서 미래에 그 단단한 닻을 내리고 있다.” 이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회장은 “개인 생애의 미래와 민족의 미래와 세계사의 미래와 자연사의 미래” 안에 넓은 지평을 열어 준다.
이 희망은 현재의 고난과 실망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고난의 상황 속에서 “십자가의 그늘이 우리에게 드리울” 때, 이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계를 견디기 시작한다. 그리고 희망을 가진 생명은 “선으로 악을 이겨”낸다(롬 12:20). 우리는 우리 백성들의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관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이기주의, 타자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정신을 깨우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에 참여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를 완전하게 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인 각자는 늘 “새로운 것을 시작한 상태”에 있다. 이 한 걸음 안에 완성이 있다.
죄의 원천은 교만 뿐만 아니라 “타성에 젖은 심장, 슬픔 어린 자각, 용기 잃은 의지”에도 있다. 이는 “유혹에 빠진 무기력함”이다. 우리는 현실에 회의하지만 그 회의하는 현실 속에 희망이 있다. 즉, 희망의 이유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공상이나 탐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여기에서 오늘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강연하고 난 몰트만 박사는 “숨쉬는 한 희망한다.” 라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지었다.
▲ 컨퍼런스가 진행되고 있다.
희망의 신학, 오해하지 말아야
몰트만 박사는 한국의 개혁신학 진영에서는 계시관, 구원관의 차이로 인해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희망의 신학”이 교회와 사회 현실에 유의미한 음성을 낼 만한 여지는 많다. 복음을 믿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감내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은 신앙의 중요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매우 밝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매우 변혁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강연에서도 드러났듯이 현실 속에서 가지는 희망은 매우 급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희망은 단순한 “긍정신학” 내지는 “번영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몰트만 박사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와 평화를 선언한다는 점에서 “공공신학" 내지는 “정치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일각에서는 몰트만 박사가 내한하여 보이는 행보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있다. 자신의 신학적 용어인 “희망"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을 수용하든지 말든지 간에, 그가 말하는 “희망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