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만열 - 고신, SFC, 국사학자, 한국기독교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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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 역사가 이만열 교수를 만나다" - 244호 그 사람의 서재9, 2011.1.26.
▲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담을 쌓고 갈등만을 부추기고 있는 극단의 상황에서 양측 모두와 소통하며 모두에게서 인정받는 대표적인 기독 지성 이만열 교수의 서재를 방문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역사만큼 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학문이 있을까? 역사란 기록이라는 매개를 바탕으로 해야 성찰이 가능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만열 교수는 한국 복음주의 지성의 큰 나무일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에 관한 독보적인 학자로 가장 먼저 찾았어야 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담을 쌓고 갈등만을 부추기고 있는 극단의 상황에서 양측 모두와 소통하며 모두에게서 인정받는 대표적인 기독 지성 이만열 교수의 서재를 방문하기 위해 사직공원 옆에 위치한 이 교수의 댁을 찾았다. 차가운 한기로 집안에서도 외투를 걸치고 있어야 하는 거실과 서재에서 그의 신앙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 실장/ 바쁘신 중에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교수/ 책이나 독서에 관해서는 별로 해 줄 얘기가 없지만 어쨌든 찾아 주어 고맙습니다.
정 실장/ 오늘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한복판에 계셨던 분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생각으로 왔습니다. 책이나 독서에 대한 부담은 크게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수님의 삶의 여정은 저 같은 젊은 복음주의 청년들에게는 당시 책보다 더 큰 의미였습니다.
이 교수/ 그런 얘기를 들을 정도로 대단 한 사람은 아닙니다. 책과 독서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니 어찌되었든 조금 편하게 인터뷰에 응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싶군요.
이 교수의 신앙 이력
▲ 이만열 교수의 집 거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집안에서도 외투를 입고 지낸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정 실장/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역사나 신앙과 관련한 인터뷰는 많이 하셨지만 교수님의 신앙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더군요. 기독교학문연구회 수련회에서 발표하셨던 ‘나의 신앙과 학문’과 15년 전에 두레시대에서 출간한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라는 자서전적 책에서 그나마 신앙고백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지만 그마저도 절판이 되어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었고요. 이번 기회에 교수님의 신앙 이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교수/ 나는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 텃골이라는 마을에서 1938년에 태어났어요. 십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지요. 위로 누님이 여섯 분이에요. 태어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해방될 때까지는 일제 치하여서 교회라는 걸 잘 몰랐습니다. 해방 후에나 교회에 본격적으로 나갔죠. 1897년 우리 동네에서 약 5~6km 떨어진 사촌이라는 마을에 호주 장로교 선교사 손안로의 전도를 받아 복음을 받은 조동규라는 분이 세운 사촌교회가 교세가 늘어 1908년경에 면소재지인 군북에도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군북교회에서 할머님, 여섯 분의 아버님 형제분과 그 후손들이 신앙 훈련을 받았습니다. 시냇가에서나 볼 수 있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아주 좋은 교회당이었어요.
정 실장/ 부모님을 통해 신앙 훈련 같은 것을 받으셨는지요. 어렸을 때 아버님이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이 교수/ 나의 아버님은 1녀 6남 중 장남이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농사지을 땅이 없어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벌은 생활비를 집에 몇 푼 남기시곤 하셔서 아버님이 일찍부터 살림의 책임을 짊어지셨지요. 결혼을 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야하다 제철소에서 일하셨습니다. 거기서 돈을 꽤 많이 모으셨는지 나중에 논밭과 산판 등을 마련하셨고 그 덕분에 십남매의 자식을 기초교육이라도 받게 하셨습니다. 당시 시골 형편으로는 힘겨웠을 소학교 교육을 모두 받았던 거죠. 아버님은 일본에 계시면서, 조선인들이 세운 교회에서 한 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기독신보>에서 그 교회에서 활동한 아버님과 숙부님의 이름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딸 여섯을 낳은 뒤에 7년이나 지나 저를 얻었지요. 그래서 부모님은 물론이고 저의 할머님께서 저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지만 할머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광경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할머님이 저를 너무 좋아하셨기 때문에 할머님을 장사할 산판을 따로 사서 제 이름으로 등기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아버님은 나를 향해 웃거나 인자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거의 없었지요. 오히려 더 엄하게 대하신 것 같은데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가져야 할 몸가짐에 대한 교훈을 지금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에 대한 인상은 ‘두렵다’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에 부자간에 가져야 할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오륜(五倫)의 윤리는 거의 갖지 못했지요. 어릴 때 교회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설교를 들으면 우리 아버님 모습이 먼저 떠올랐어요. 변명같습니다만, 아마도 제가 제 자식에게 엄격하게 보인 것도 바로 아버님의 이런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철이 들고 난 뒤부터는 반성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관해서 아버님께 전해 받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유교적인 교훈으로 어른에 대한 예의를 엄격하게 가르쳤지요. 해방 후에 아버님은 교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어요. 하지만 임종에 앞서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셨다고 맏누님이 말씀해 주시더군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은 1952년 2월 29일로, 중학교 1학년 때였죠. 당시 집을 떠나 마산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3?1절 행사 연습을 마치고 하숙하고 있는 숙모집으로 돌아왔는데 작은 아버님이 큰소리로 우시면서 비보를 알려 주셨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너무 어렸기 때문에 죽음이 그렇게 철저하게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평소 아버님과 각별한 정을 나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슬픔을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날이 지나고 제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님의 엄격하고 냉정스러운 성품 뒤에 숨겨진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날이 정말 슬픈 날이었음을 두고두고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엄격함과 냉정함’도 아버지 사랑의 표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혼자 길을 가거나 운전을 하거나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면서 적적할 때면 찬송가를 외워 부르곤 하는데 이게 어머님한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인 것 같습니다. 열다섯 살에 네 살 위의 아버님과 결혼하신 어머님은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셨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결혼하신 후 얼마 안 있어 예수를 믿으셨지요.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새벽에 드렸던 가정예배가 떠오르는데 어머님은 날이 채 새지도 않았는데 우물에서 세수를 하시고 우리를 깨우고 예배를 드리셨어요. 어머님은 오늘날처럼 이론적으로 잘 정리된 기도를 드리지는 않으셨지만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 덕분에 자식들이 모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실 때까지 가까운 교회에서 명예권사로 봉사하셨지요.
정 실장/ 해방 직후에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는지요. 주일학교에서 말이지요.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에 보면 생애에 극적인 전환을 마련해 준 특별한 만남 같은 것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떠오르는 몇 분에 관한 추억과 함께 문성주라는 분에 대해 짧게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교수/ 해방 후에는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신앙 교육을 잘 받았습니다. 6년 동안의 주일학교 교육이 평생을 좌우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강조된 신앙이라는 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든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것들이었죠. 엄위하신 하나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인과응보하시는 하나님 같은 것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문성주 선생님은 당시 유년 주일학교 부장으로 교사들과 학생들을 지도하셨습니다. 오른손이 성치 않던 분이셨죠. 집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던 게 그분 때문이었어요. 당시 주일학교는 분반공부 후에 학생 전체를 상대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문 선생님은 우리가 담임선생님한테서 잘 배우지 못한 부분까지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동화’ 시간을 가장 기다렸는데, 구약의 위인들 이야기를 아주 생동감 있게 잘 들려주셨습니다. 모세, 다윗의 이야기를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분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 중에 기억에서 떠나지 않은 주제가 ‘신앙과 민족’이었어요. 소박하지만 민족주의의 기틀과 방향을 마련할 수 있는 강렬한 민족 교육을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그분을 통해 배운 겁니다. 역사를 공부하게 된 것도 그분의 영향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 민족, 역사’의 틀 속에서 인생과 학문을 정립하려는 몸부림이, 철이 들고 난 뒤에 반성해 보니, 문성주 선생님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지하 서재 한편에는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책장도 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정 실장/ 일부에서, 교수님의 사상이 굉장히 호방하시고 진취적이신 것에 비해 신앙은 교조적이기까지 하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신앙이 보수적이신 것이 주일학교 때 배운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됩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고등학교 때 월요일 시험을 앞두고도 주일 밤 12시가 넘어서야 공부를 했고 대학 시절에 역사학과 학생이라면 꼭 가야 할 답사가 주일을 끼고 있어 한 번도 답사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고신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교수/ 고신 교단의 신앙 교육이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약점을 용서하시고 보완해 주시기보다는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율법적인 신앙으로 이끌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교단이 주장하는 원래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이념을 폐쇄적이고 기계적으로 운용하려는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와, 그 이념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스럽다고 생각하지, 그 이념이나 엄격한 신앙 훈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서울에 와서 김형석 교수의 성경공부 모임이나 경동교회나 함석헌 선생 모임에 참석하면서 폐쇄적이던 신앙이 조금씩 풀려나간 건 사실입니다. 어렸을 때 받은 신앙 훈련 중 기억나는 것은 성경 구절을 많이 외웠다는 거예요. 내가 6학년 때 한국전쟁이 났습니다. 살고 있던 지역이 ‘인민군’이 최후의 전진기지로 삼은 전투지가 되어 두어 달 동안 동네에 ‘인민군’이 주둔하게 되었어요. 당시 우리 가족은 피난을 마산이나 부산 쪽으로 가지 못하고 자형이 있던 의령으로 갔는데 이곳도 ‘인민군’ 치하로 넘어갔죠.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집이 불타서 먹을 게 거의 없었죠. 공습 때문에 낮에는 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타다 남은 보리니 쌀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밥을 해서는 소금이나 젓갈 섞은 부추 등을 조금 넣은 주먹밥을 만들어 산 속으로 다시 들어가 하루 종일 숨어 지냈지요. 당시는 교과서 외에는 책이 없었어요. 시골에서는 교과서도 제대로 구입할 형편이 안 되었고요. 그때 아마도 일제강점기 때에 집에서 사용했을, 앞뒤장이 다 떨어진 신약 성경하고 찬송가가 있었는데 그걸 가져가서 물가에 자리를 만들고는 거기서 하루 종일 성경을 보고 찬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여름철이라서 그게 가능했습니다.
정 실장/ 할머니를 비롯해 친척들이 매우 이른 시기에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고 하셨는데 당시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이 교수/ 아까 말했듯이 어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야 예수를 믿으셨습니다. 할머니가 호주 선교부의 전도를 받아서 먼저 예수를 믿고 계셨는데 그 영향 때문이었겠지요. 고모가 한 분 계셨지만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형제가 6형제인데 모두 예수를 믿었습니다. 아버지가 장남이고 차남 되는 분이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됐는데 1930년대에 폐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삼촌의 아들 두 분이 목사가 됐고, 큰 아들(이삼열 목사)의 아들도 역시 목사입니다. 영국에서 학위를 하고 고신대 구약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구포제일교회 에서 그 아버님이 세운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이성구 목사입니다. 제가 이 목사의 5촌 당숙이 됩니다. 그 뒤에 우리 집안에서 목사, 장로, 권사가 많이 나왔어요.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인지, 우선 문중의 종인(宗人)들이 사는 평관이라는 곳에서 일찍 떠나 있었습니다. 문중에는 학자, 독립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섰던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골에서 놀라운 일이지요. 하여튼 우리 집은 문중의 분위기와 달라 인천 이 씨 집성촌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따로 살아야 했어요.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서 신앙생활의 진수를 맛보았죠. 1950년,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전쟁이 나니 그 이듬해 국가고시를 쳤어요. 그때 성적이 아주 좋았어요. 군내에서 1,2등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마산으로 가서 삼촌 집에서 하숙했는데, 제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다섯째 숙모가 굉장히 신앙이 좋았어요. 일본식으로 지어진, 요즘말로 하면 다가구주택이었는데 친구랑 같이 자취도 하고 그 집에서 밥도 먹고 그랬어요. 숙모하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당시 고신에서 <파수꾼>이라는 잡지가 간행되었는데 그 잡지 영향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꾸준히 읽었거든요. <파수꾼>에 찰스 쉘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소설을 거창고등학교의 전영창 선생이 번역, 연재했는데 그 소설도 당시 내 신앙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마산에 가서는 고신파 신마산교회를 다녔는데, 중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죠. 당시 부흥회 강사로 온 분이 전 충현교회 담임 목사였던 김창인 전도사였죠. 그때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맞아들이는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해서 초등학교 4학년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회심 전에는 기독교 원리도 잘 모르고, 예수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심히 읽어 그 내용을 가르치는 데는 열심이었습니다.
▲이만열 교수가 <성서 조선> 전집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정 실장/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교사를 하셨다니 정말 신앙에 열심이 있으셨던 듯합니다.
이 교수/ 성경은 정말 열심히 읽었습니다. 다른 준비는 안 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그대로 전하는 거죠. 내 말 많이 안 붙이고 성경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또 토요일이 되면 아이들 심방을 했어요. 들어가서 기도하기보다는 불러내서 “요절 외웠니” 물어보고 “내일 일찍 오거라” 하는 거죠. 중학교 1학년 때 고신 교단이 분리가 됩니다. 그때 고신의 분리와 정신에 대해 매우 강조를 합디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말 러시아가 진해(마산)만에 진출할 때 지었던 영사관이 있었는데, 그 건물을 다른 신마산교회가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닌 고신파 신마산교회에서는, 그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까지 말하고 그랬지요. 그쪽을 에큐메니칼, 칼측이라고 하더군요. 당시 학생신앙운동(SFC, Student For Christ)이 막 일어날 즈음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젊은이를 키웠을 겁니다. 엄격한 신앙 훈련, 기도 등으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거기에도 관여하게 됐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에 그 교회 학생회(SFC)장을 하게 된 거예요. 선배들이 있었지만 시키니 안 할 수도 없고…. 회장이 된 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헌신 예배를 드리게 되면 회장이 사회를 해야 하는데 세례를 받지 않고 강단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고신파의 정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학년 올라가면서부터는 가정교사를 하는 집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마산 지역 학생연합회의 회장도 맡게 되었어요. 대학입시 공부도 해야 하는데, 2학년부터 3학년 졸업 때까지 입주식 가정교사를 하면서 2~4명을 돌봐야 했어요. 그러나 가정교사로 들어갈 때 주일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하는 약속을 받고 들어갔고 그 약속을 꼭 지켰지요. 지금 난 고등학생 때에 가정교사 한 것을 후회해요.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가정교사를 하면서 한참 지적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더 책을 읽고 기초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그때 미래를 내다보고 설계를 하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워요.
정 실장/ 그래도 배움이라는 게 남에게 가르칠 때 자기 것이 되기도 하고, 지금 교수님이 가르치시는 일을 잘 하실 수 있었던 게 당시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이 교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어요. 당시 마산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미군 교회에 한두 번 가 본 적이 있어요. 결국 너무 바빠 정기적으로 가지 못했지요. 그때 끈기 있게 미군 교회에 다녔더라면 영어를 제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 선배 한 명은 미군 교회에 다니면서 영어를 능숙하게 잘하게 됐어요. 저도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많아요. 그래서 인생의 미래를 조언해 줄 선배가 필요합니다. 결정적인 조언은 아니더라도 가까이서 한두 마디라도 조언을 해 주는 그런 선배나 친구 말이죠. 진학할 때도 조언해 주는 이가 있었더라면 아마 제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현재를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좋은 선배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정 실장/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역사를 가르치시는 교수님한테 ‘아마’라는 말씀을 들으니 아이러니합니다. ‘그 사람의 서재’ 코너가 신앙과 인생의 모범적인 선배들의 사상의 궤적, 고민의 흔적들을 책을 통해 알아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지만 책 말고도 한 사람의 멘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배움, 특히 영어에 대한 아쉬움을 크게 느끼신 계기가 있으셨나요? “4년간의 외출”, 다른 말로 “별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내던져 버리셔서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찾게 하셨고 결국 한국 기독교사 연구로 몰아가셨다”고 고백하셨던 미국에서의 연구 경험이 아무래도 가장 큰 필요를 느끼게 하셨던 것 같은데요.
이 교수/ 네, 그래요. 1980년 7월 신군부에 의해 해직되어 자의반 타의반 한국기독교사 연구 자료 수집을 위해 미국에 가서 세계에 대한 시각이 열렸어요. 그 전에는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니까 굳이 밖에 나갈 게 뭐 있나 했는데, 한국 기독교사의 귀중한 자료가 상당수 외국에 있을 뿐 아니라 내가 하는 학문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더 많은 배움, 특히 어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정 실장/ 교회와 학생신앙운동에 열심히 참여하셨으면 주변에서도 그렇고 자신도 신학에 대한 고민, 그러니까 목회의 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셨을 것 같습니다. 한참 후이긴 하지만 나중에 합동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도 하셨지요.
이 교수/ 그랬지요. 중고등학교 시절, 숙모님과 주변 분들이 목회에 대한 소명 의식을 한껏 불어 넣으셨었지요. 실제로 목회자가 되리라 결심도 했고요. 사학과를 지망하게 된 것도 신학을 위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학교로 곧바로 입학하지 말고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좁은 생각에 신학과 관련이 있는 철학, 종교학, 사학 중 한 곳에 진학하겠다고 생각하고 모두를 두루 배울 수 있는 곳이 사학과이겠거니 하고 사학과로 갔지요. 아마 역사를 공부하게 된 데는 문성주 선생님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지하 서재에 빼곡히 책들이 들어차 있다. 거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이렇게 책장이 서 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정 실장/ 신학을 하실 생각이었으면 서양사를 전공하셨어야 했는데 국사로 방향을 바꾸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교수/ 물론, 입학해서는 서양사 공부를 주로 했어요. 곁들여 신학에 필요한 종교학 강의와 언어학과의 희랍어 강의, 독일어 강의를 듣기도 했죠. 그러면서 독일어 성경도 읽고요. 그런데 2학년을 마치고 나온 입영 통지서가 인생의 첫 전환기를 가져왔어요. 1959년 3월 입대해 6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를 받았는데 공병 참모실에 근무하는 통역관 선 중위가 강의 준비를 하면서 내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교안을 작성해 달라고 하더군요, 잘 못하겠다고 하니까 “S대 사학과에 다니다가 온 녀석이 뭐 이래” 하면서 아주 심하게 모욕을 주는 거예요. 그 모욕을 들으면서 기분이 매우 나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사람 말이 맞다 했어요. 목사 되기 위해 역사 공부한다고 했는데 서양사만 공부하고, 사학과에 와서도 역사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고 종교학과의 강의를 넘보는가 하면, 경건 생활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닫고서 대학의 진보적인 문화를 수용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인생 여정에 뜻을 같이 해야 할 여러 친구들을 폭넓게 사귀지도 못했지요. 그러면서 이 땅에 뿌리박은 목사가 되겠다고! 자기 역사도 모르는 목사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서 국사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기초 공부부터 시작했어요. 그래도 여전히 신학교에 갈 생각이었는데 막상 졸업할 때가 되자 신학교에 원서를 내지 못했어요. 부산의 교단 신학교로 가야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는 거예요. 변명을 하자면, 당시 어머님도 많이 늙으셨고 동생 셋도 있고. 대학 졸업하면 뭐가 되겠지 하고 바라만 보고 있어 취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신학 공부하면서 가족 부양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요….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 결국 신학교에 가지 못하고 인천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했습니다. 그 학교는 대학 동기였던 손봉호(영문) 선생이 거쳐 갔고, 홍성현(철학), 최관식(수학), 김창락(전 한신대 교수), 전영운(중앙대 독문과) 교수 등이 막 가 있을 때인데 나더러 오라고 하는 거예요. 신앙의 동지들이 가 있다는 게 좋고 해서 갔죠. 그러고는 대학원에 들어가 국사를 더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몇몇 고등학교를 거쳐 숙명여대로 옮기게 됐어요. 동숭동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인천으로 출근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신학을 포기하지 않아서 국사를 공부해도 사상사 분야를 주로 공부했어요. 신학교는 가야 하는데 교사 하면서 공부를 하고 또 집을 돌보자니 힘들었죠. 그래서 박사 과정에는 한참 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니던 교회가 갈라지면서 어디에도 참여하기가 곤란해 서울중앙교회로 옮겼지요. 그게 1968년 말이었어요. 가니까 대학부를 좀 맡아달라고 해서 대학생을 지도하면서 전담교역자 없이 10년 정도 대학부를 맡아 강의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우창록(법무법인 율촌 대표) 변호사를 비롯해서, 김유신(부산대), 박영태(동아대), 백종국(경상대), 정인철(부산대), 박주용(수산대), 이충열(경원대), 이상훈(고려대), 박정원(상지대), 이세재(구미공대) 교수와 이석형 박사 등이 직간접으로 저한테 영향을 받았죠.
이 교수가 만난 사람들
정 실장/ 교수님 생애에 기억할 만한 인물들은 어떤 분들이 있을까요. 교수님에게 신앙적으로 깊은 인상을 주셨던 분들 중심으로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교수/ 먼저 김형석 전 연세대 철학 교수와의 인연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대학에 올라와서 1년 동안은 천안에서 온 친구와 자취를 했고, 그 뒤로는 김형석 교수 집에 입주해서 가정교사를 했거든요. 그 전에 매 주일 오후에 남대문교회에서 열리는 김형석 교수의 성경공부 모임을 소개받았습니다. 가 보니 정말 좋은 강의를 하는 거예요. 고신파에 속해 있으면서 폐쇄적으로만 살았던 신앙의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경험이었습니다. 나중에 개인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 집에 와서 아이를 지도해 달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입주 가정교사가 되었죠. 그 집에 들어가 가정예배도 함께 드리고 생활을 하면서 눈을 넓게 뜨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 설교도 들었는데, 강 목사님의 설교는 매번 사자후예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갔죠. 나는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함석헌 선생의 일요성서 강의도 가서 들었는데 당시에 나한테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김형석 교수였습니다. 군대에서 제대를 한다니까 다시 가정교사로 오라는 거예요, 자녀가 6명이었거든요.
정 실장/ 서울중앙교회면 손봉호 교수님도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뜻이 통했던 분들로는 어떤 분들이 계신가요?
이 교수/ 손봉호 교수님은 제가 서울중앙교회로 옮기기 전에 그 교회에 다녔지요. 손 교수님은 윤봉기 목사님의 아들 윤종하 선생과 가깝게 지냈어요. 성서유니온에서 사역했던 윤종하 선생하고는 영문과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고 경주교회에서부터 교분이 두터웠지요. 제가 서울중앙교회로 갔을 때는 손 교수님은 유학을 떠나셨어요. 귀국 후에 고등공민학교도 같이 하고 대학부도 서로 번갈아 가며 맡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손 교수님은 김경래 장로님과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해 설교자로 가면서 떠나게 됐고요.
정 실장/ 함석헌 교수님이나 김형석 교수님 얘기를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당시 이미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계셨고 김형석 교수도 그 즈음을 전후로 철학적 에세이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셨었지요.
이 교수/ 내가 함석헌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57년 대학 입학 후예요. 천안 출신으로 나와 같이 자취하던 임한순 형의 소개로 함 선생의 강연에 참석하면서였죠. 자유당 치하였던 당시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가톨릭의 윤형중 신부와 기독교에 대해 몇 번 논쟁하는 글을 읽긴 했죠. 1950년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은 1934~35년에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서 낸 책인데 당시는 그 명저를 이해하지 못했죠. 사실 함 선생의 책을 제대로 읽은 것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지금은 조금 열려 있다 하지만, 그때는 고신 폐쇄적인 분위기에 너무 젖어 있어서 쉽사리 마음이 열리지 않아 그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요. 어릴 때 교육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제대 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하고 그 책을 탐독하게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깨우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최근에 그 책을 한국의 사학사적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근대적 역사관을 가지고 한국 역사를 일관되게 본 최초의 역사라는 거지요. 함석헌 선생의 글은 논리적이지는 못하나 직관적인 혜안과 거침없이 솟구치는 힘이 있어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인권 민주화를 위해 새로운 도전적 과제들을 제시했고, 어설픈듯하면서도 비수가 숨어있는 그의 비판은 용기 없이 움츠리고 있던 우리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죠.
정 실장/ 최근 <교수신문>에서 많은 학자들이 근대 백년 이래 재조명이 필요한 논쟁적인 인물로 함석헌 선생을 꼽았습니다. 그러나 함석헌 선생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놀랍게도 그에 대한 한국교회의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대로 된 신학적 평가 외에도 그의 먼 친척이라는 사람이 쓴 <거짓 예언자, 함석헌> 같은 책은 함석헌 선생의 여성 문제를 근거로 삼아 도덕성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함석헌 선생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 선생도 이 문제로 함 선생님을 크게 나무라시고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으셨다고 하지요.
이 교수/ 네, 나도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던 때라, 그것이 정치적인 모략까지 곁들인 의도적인 저술이라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읽었죠. 그리고 그 책에 등장하는 인물을 만나 사실 관계를 확인해 보려고도 했어요. 하지만 그는 화제를 바꾸고 답을 회피하더군요. 그래서 함석헌 선생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인간의 약점들을 악의적으로 조작, 모함하거나 침소봉대하려는 부분도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은 가졌습니다. 현재 함석헌 선생과 관련해 많은 모임이 있지만 그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는 작업은 여전히 부족해요. 흩어져 있는 구슬을 꿰듯 그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급선무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의 근대 역사에서 유일하게 사상가로 꼽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전집이 30권으로 출판되었죠. 아직 정리되지 못한 노장(老莊)사상 강의 녹음도 있어요.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연구는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제가 회장으로 있는 함석헌학회에서는 우선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그의 저작을 제대로 읽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 동아리 형태로 그의 저작을 읽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이런 활동이 인문학의 위기를 타계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정 실장/ 김형석 교수님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님 서재에서 책을 보시진 않았는지요. 신앙 배경이 달라 토론을 하셨을 것 같기도 한데요.
이 교수/ 김 교수님과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깊게 해 보지는 않았어요. 앞서 얘기했던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격려하시는 분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 김형석 선생님을 통해서죠. 서재를 자주 들어가진 않았어요. 그리고 고신 출신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무거운 신학적 토론 같은 것은 하지 않았죠. 물론 고신의 형편을 물으시기도 했고 인생에 대한 상담도 했으며 그 분이 에세이집을 낼 때 내가 구술을 받아 써서 원고화하는 작업도 했지만 그 밖에 딱히 기억되는 게 없습니다. 아직도 한 가족처럼 지내고 중요한 행사 때는 서로 연락하며, 매년 정초에는 꼭 세배를 가고 있습니다.
정 실장/ 해직된 후, 당시 막 시작한 합동신학교에서 결국 신학을 하셨지요. 신학교에 가시게 된 숨어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교수/ 1972년에 유신이 있고 난 후에 한국 교회가 유신을 지지했습니다. 안타깝지만 고신도 유신을 지지했고, 5?16쿠데타 후에는 주일을 범해가면서 화폐 개혁에도 동조했죠. 주일 성수를 그렇게 강조하더니 주일날 화폐를 바꾸라니까 순종하고. 유신 때 제가 서른다섯 살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죠. 신학적 바탕이 없어서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어렵고, 역사학도로서 이걸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가지고 대들 용기도 없어서, 한말 격동기 때에 기독교가 어떤 처신을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어요. 그 결과 나온 게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 과정’(서울대학교 한국사론 제1집)이라는 논문이에요. 봉건사회를 극복하려는 사회개혁운동에서 국권수호운동 및 한말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는 1910년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건데 이 논문이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그런 시각에서 민족사와 기독교사를 통찰한 게 없었던 거죠. 그 논문이 유신치하에서 많이 읽혔고 제가 교회사 연구자처럼 됐어요. 10?26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신군부에 의해 저는 학교에서 쫓겨났어요. 이런 형편에 있었는데 1980년 가을에 남서울교회(홍정길 목사)에서 합동신학교가 시작되자 박윤선 목사님이 저를 불러 한국교회사를 가르쳐달라 한 거예요. 조건을 하나 걸었죠. 해직돼서 놀고 있을 때니까 날 학생으로 받아 주면 가르치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해서 미국에 가기 전까지 1년간 가르쳤고 하다가 돌아와서 또 몇 년 강의를 듣고 강의를 했습니다. 또 귀국하기 전에 연락이 돼서 동양 고전 중 논어를 강의해 보고 싶다 했는데 박윤선 목사님이 허락을 하더라고요. 박윤선 목사님이 당시 생각이 트인 거죠. 한국기독교사를 강의하는 한편 ‘한국 기독교와 동양 고전’이라고 강의 제목을 붙여 했습니다.
▲ 이만열 교수. ⓒ복음과상황 이종연
정 실장/ 신학교에서 동양 고전을 강의한다는 게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논어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 교수/ 평소에 논어를 즐겨 읽었습니다. 논어 주석 중 주자의 주석이 제일 좋은데 주자 주석을 대본으로 성경을 적용하여 기독교적 관점에서 ‘논어 주석’을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평소에도 신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의 신학교라고 한다면, 유동식 교수식으로 말하자면, 복음의 밭에 씨를 뿌릴 때 씨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라면, 밭은 한국의 지적 사상적 풍토다. 그런데 지금까지 신학 교육이 ‘씨’에 대해서만 말하고 ‘밭’에 관해서는 거의 강의하지 않았다. 그건 균형이 맞지 않다.” 그렇게 말했죠. 가령 부모를 두고 말한다고 할 때 아버지만 강조하고 어머니는 무시한다면 어떻겠어요? 사상적 풍토에서 밭에 해당하는 어머니가 뭐냐, 그게 바로 한국 사상을 포함한 동양 사상이다. 동양 사상의 에센스 가운데 하나가 논어잖아요. 그래서 신학교에서 논어를 공부해 보자 했던 거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이런 얘길하면 한편에서는 자유주의자로 자꾸 몰고 가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신학이란 뭐냐? 학문이다. 학문은 문제의식에서 시작된다. 서양의 문제의식이 서양 학문을 생산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세계 보편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동양은 동양대로 또 우리는 우리대로 문제의식이 있다. 그것을 성경에 바탕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해 내는 것이 우리 신학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문제의식을 학문화할 때에 우리의 학문이 된다는 거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상황을 문제의식으로 승화시키고 성경을 토대로 학문화할 때 그게 우리 신학이다. 그렇다면 그 때 중요한 건 이걸 어떻게 인류의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특수한 것으로 두면 이단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그걸 학문(신학)화하되 보편성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신학은 당연히 우리의 문제의식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민중 신학을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이런 말 하면 고신에서는 죽일 놈이라고 하겠지만, 난 민중 신학의 내용이 좋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 문제의식을 토대로 신학화 작업을 했다는 겁니다. 그게 제대로 됐어야 하는데 중단돼 버렸지요. 지금도 외국에서는 연구하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하는 사람이 없게 되어 버렸잖아요. 우리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신학화 작업으로 승화시킨 것이 민중 신학인데 말입니다.
정 실장/ 교수님의 삶을 보면 지극히 보수적인 신앙 교육을 받으셨는데 어떻게 해서 진보적인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 열려 있으신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아무래도 저는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합니다. 어떤 분들의 영향을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으실런지요. 가령 단재 신채호에 대해 높이 평가하신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 교수/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죠. 그의 사론은 보편적입니다. 다만 그 역사 이론을 실제 역사 연구와 역사 서술에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영웅이 역사를 이끌어 간다고 하다가 신국민이 이끈다 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나니 국민 개념도 없어지고 민중 얘기를 끌어내 민중이 이끌어 간다고 말하기도 했죠. 그럼 민중이 이끄는 역사를 써 보라 할 때 자신은 그러지 못했어요. 함석헌 사관이 신채호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역사관이 이론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지요.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이 뭐냐? 결국 역사란 한두 사람의 영웅이나 지배자가 주도권을 갖는 것에서부터 발전해 민중, 백성이 역사의 주체자로 등장하며 역사의 진전에 따라 역사 주체자의 수가 양적으로 증가한다는 거죠. 그 과정이 역사 발전이더라.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이 소수의 사람을 특별하게 쓰신 경우도 많지만, 개인의 자유를 확대해 가면서 사회적으로는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모든 인간을 책임 있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역사의 발전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 거죠. 결국 유신이라는 게 뭐냐? 역사의 발전에 역주행하는 거고 반역사적인 거죠. 신군부가 뭡니까? 80년 서울의 봄을 뒤엎어버리는 거죠. 그런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기를 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명박 정권도 마찬가지죠. 과거 해직교수 중에 역사학자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적 신념을 갖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저항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정 실장/ 아무래도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말씀대로라면 한국 교회는 현재 역주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를 방관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역사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이 교수/ 제도화된 종교와 예수 그리스도는 일치될 수 없는 거지요. 한국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속에 가둬 버리고 예수의 삶과 복음으로부터 멀어져 간 것입니다. 제도화되어 간다는 중요한 대목 중 하나는 한국 교회가 세속화됐다, 너무 부자가 됐다, 기득권자가 됐다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또 그걸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반역사적인 일에 가담하고 때로는 그런 일에 앞장서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는 가난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작은교회운동’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가진 걸 내놓고 나누며 가난한 자들의 눈물을 씻겨 주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꼭 거지꼴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겠지요. 큰 교회가 되면 그게 힘듭니다. 작은교회운동은 곧 풀뿌리운동이지요. 우리 기독교가 사실 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 가정, 사회 및 세속적 가치관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요. 풀뿌리교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큰 교회를 지향하면서 돈과 권력 등 세속적 가치관이 교회를 덮어 버린 때문이지요. 풀뿌리운동으로 가자면 큰 교회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서재를 구경하며 어떤 책을 읽으셨으며 독서에 대한 의견을 조금 더 듣고 싶다는 요청에 교수님은 연신 손사래를 치시며 당신은 독서에 관해서는 할 얘기가 없다고 하시며 서재만 구경시켜 주시겠다 하신다. 거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병풍처럼 책들이 둘러져 있고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지하 서재에는 역사 자료들이 분야별, 용도별, 자료별로 분류되어 있다고 거침없이 설명하시더니 서둘러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하신다. 교수님의 재촉과 뒤이어 잡혀 있는 또 다른 인터뷰 약속으로 더 이상 서재를 자세히 살필 순 없었다. 그러나 서재 곳곳에서 우리는 역사와 민족이라는 상황을 복음으로 조명하며 고민하는 한 역사가의 고뇌와 한 사람의 신앙인, 그리고 한 독서 대가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고수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 않던가. 책에 대한 보화 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삶 자체가 젊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한 권의 양서가 아니던가. 그런 분의 삶을 잠시 엿보고 그분의 서재에서 책 향기를 맡았다는 것만으로 이번 서재 탐방은 충분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리 정지영 기획실장 theblessedjung@gmail.com
사진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이만열 교수님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고, 고신 출신으로 보수 신앙을 제대로 알고 익혔고 동시에 사학적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어, 필연적으로 보수 정통 신앙에서 볼 때는 좌파 기독교인으로 분류 됩니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 목회자가 될 신앙과 국내 정상급 신학자들과 서울대 문리대 동기였다는 점에서 손봉호 교수님과 함께 한국교회에 오랫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적지 않은 세월에 "한국기독교를 자유주의화 좌파화 하여 교회를 도덕이나 사회개량 단체로 만드는" 역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다음 내용은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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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신에만 구원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고신 교단이 분리가 됩니다. 그때 고신의 분리와 정신에 대해 매우 강조를 합디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말 러시아가 진해(마산)만에 진출할 때 지었던 영사관이 있었는데, 그 건물을 다른 신마산교회가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닌 고신파 신마산교회에서는, 그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까지 말하고 그랬지요. 그쪽을 에큐메니칼, 칼측이라고 하더군요. 당시 학생신앙운동(SFC, Student For Christ)이 막 일어날 즈음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젊은이를 키웠을 겁니다. 엄격한 신앙 훈련, 기도 등으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거기에도 관여하게 됐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에 그 교회 학생회(SFC)장을 하게 된 거예요. 선배들이 있었지만 시키니 안 할 수도 없고…. 회장이 된 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헌신 예배를 드리게 되면 회장이 사회를 해야 하는데 세례를 받지 않고 강단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고신파의 정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학년 올라가면서부터는 가정교사를 하는 집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마산 지역 학생연합회의 회장도 맡게 되었어요. 대학입시 공부도 해야 하는데, 2학년부터 3학년 졸업 때까지 입주식 가정교사를 하면서 2~4명을 돌봐야 했어요. 그러나 가정교사로 들어갈 때 주일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하는 약속을 받고 들어갔고 그 약속을 꼭 지켰지요. 지금 난 고등학생 때에 가정교사 한 것을 후회해요.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가정교사를 하면서 한참 지적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더 책을 읽고 기초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그때 미래를 내다보고 설계를 하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워요.
- 고신과 주일: 화폐개혁 때 태도
이 교수/ 1972년에 유신이 있고 난 후에 한국 교회가 유신을 지지했습니다. 안타깝지만 고신도 유신을 지지했고, 5?16쿠데타 후에는 주일을 범해가면서 화폐 개혁에도 동조했죠. 주일 성수를 그렇게 강조하더니 주일날 화폐를 바꾸라니까 순종하고. 유신 때 제가 서른다섯 살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죠. 신학적 바탕이 없어서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어렵고, 역사학도로서 이걸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 박윤선, 합동신학교의 논어 강의
10?26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신군부에 의해 저는 학교에서 쫓겨났어요. 이런 형편에 있었는데 1980년 가을에 남서울교회(홍정길 목사)에서 합동신학교가 시작되자 박윤선 목사님이 저를 불러 한국교회사를 가르쳐달라 한 거예요. 조건을 하나 걸었죠. 해직돼서 놀고 있을 때니까 날 학생으로 받아 주면 가르치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해서 미국에 가기 전까지 1년간 가르쳤고 하다가 돌아와서 또 몇 년 강의를 듣고 강의를 했습니다. 또 귀국하기 전에 연락이 돼서 동양 고전 중 논어를 강의해 보고 싶다 했는데 박윤선 목사님이 허락을 하더라고요. 박윤선 목사님이 당시 생각이 트인 거죠. 한국기독교사를 강의하는 한편 ‘한국 기독교와 동양 고전’이라고 강의 제목을 붙여 했습니다.
- 목회자가 되려고 사학과를 지망
이 교수/ 그랬지요. 중고등학교 시절, 숙모님과 주변 분들이 목회에 대한 소명 의식을 한껏 불어 넣으셨었지요. 실제로 목회자가 되리라 결심도 했고요. 사학과를 지망하게 된 것도 신학을 위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학교로 곧바로 입학하지 말고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좁은 생각에 신학과 관련이 있는 철학, 종교학, 사학 중 한 곳에 진학하겠다고 생각하고 모두를 두루 배울 수 있는 곳이 사학과이겠거니 하고 사학과로 갔지요.
- 고신의 교파 분열 책임론, 2004.8.1 (고려신학회 제2차 학술발표회)
고려신학회(회장 최재건, 연세대 신학과)는 고신교단 출신 혹은 고신정신을 사랑하는 신학자들로 이루어진 학술단체이다. 제2차 학술논문발표회가 2004년 6월 18일과 19일 서울중앙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김윤태 교수(천안대)가 ‘미전도종족의 운명’을, 송영목 박사(고신대학교회)가 ‘요한계시록의 전환적, 부분적, 과거론적 해석의 정당성’을, 김은홍 박사(천안대)가 ‘대위임령에 나타난 선교구조’를, 성기문 교수(국제신대)가 ‘구약 선지사와 포르노그라피’를 발표했다.
학회 첫날 발표한 최덕성 교수의 논문 “고신분열에 대한 고신파 책임론”은 몇몇 기독교계 신문에 소개되었다. 그 내용이 알려지면서 고신교단 총회위원회는 이 논문 내용과 관련된 전호진 박사(고신교단 총무)와 이성구 교수(고려신학대학원)와 최덕성 교수의 소명서 제출을 요구했다. 학술적인 논의의 장에서 발표한 논문이 언론과 교단의 주목을 받는 것은 한국교회사의 획을 긋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은 최덕성 교수의 “신앙고백공동체: 고신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이라는 책에 실려 출간(2004년 9월)될 예정이다.
장로교 합동측 교단 신문인 “기독신문”과 부산지역의 초교파신문인 “한국기독신문”이 보도한 고려신학회와 최덕성 교수의 논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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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신문(장로교 합동교단)
“고신파 책임론 문제 있다”
최덕성 교수, 장로교단 분열에 대한 평가 반박
고려신학대학원 최덕성 교수가 고신 내부 학자들이 제기하는 ‘고신분열에 대한 고신파 책임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고려신학회(회장:최재건) 제2회 학술논문발표회에서 최 교수는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교수, 예장고신 총무 전호진 박사, 고려신학대학원 이성구 박사 등의 장로교단 분열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조목조족 반론을 제기하며 이들의 ‘고신파 책임론’을 반박했다.
최 교수는 이만열 교수는 “고신파가 장로교 총회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독자 교단을 형설한 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장로교회 분열의 첫 머리에 있는 고신분열에 대해 고신파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고 자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이 교수의 시각에 대해 “고신은 분열을 선택하지도 감행하지도 않았다. 총회를 장악한 친일 인사들이 불법과 교권폭력을 이용해 고신파를 일방적으로 축출했다. 고신파는 총회의 폭력에 항거하는 성명서들을 발표하고 합법적 절차를 따라 총회에 항의하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또한 이만열 교수의 판단이 “교회가 무엇인가를 충분히 고려한 것인가” 질문하며, “신사참배의 과거사를 통절하게 참회하고 청산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고신 분열에 대해 고신파에게 정당성이 없다는 이만열 교수의 입장에 대해 최 교수는 이만열 교수의 경우 “콘텍스트(민족, 전쟁)가 텍스트(교회, 진리공동체)에 대한 해석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최 교수는 고신파는 분리주의 교회관을 가지고 출범했다는 전호진 박사의 고신파 파라처지(para-church) 출범론과 고신분열의 원초이자 결자는 고신파로 결자해지론을 주창한 이성구 교수에 대해서도 이만열 교수와 “궤를 같이 하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고신 출신 신학자들로 이루어진 고려신학회의 이번 학술논문발표회는 6월 18일과 19일 서울중앙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또한 김윤태 교수(천안대)가 ‘미전도종족의 운명’을, 송영목 박사(고신대학교회)가 ‘요한계시록의 전환적, 부분적, 과거론적 해석의 정당성’을, 김은홍 박사(천안대)가 ‘대위임령에 나타난 선교구조’를, 성기문 교수(국제신대)가 ‘구약 선지사와 포르노그라피’를 발표했다. 김은홍 기자 (200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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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신문 (초교파)
▷“고신분열 역사적으로 정당하다”
최덕성 교수, 고신의 장로교단 분열 책임론 반박
한국장로교 분열의 시발점으로 고신파 책임론을 내세웠던 이만열 교수(국사편찬위원장)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던 전호진 박사(고신총회 총무), 이성구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구약학)의 ‘고신파 책임론’을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역사학)가 최근 고려신학회 학술 발표회에서 반박해 눈길을 모으고 있다. 그동안 한국장로교 분열은 이만열 교수에 의해 고신파 책임론으로 규정되어 왔다.
더구나 교단 내부 인물인 전호진 박사의 ‘고신파가 분리주의 교회관을 가지고 출범했다’고 하는 의미의 고신파 파라처치(para-church) 출범론과 이성구 교수의 ‘고려신학교의 설립이 고신분열을 고착시키는 원인’이었다는 주장 때문에 한국교회에 고신파 책임론이 기정사실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덕성 교수는 이들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면서 고신분열은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 교수는 “이만열 교수가 고신의 ‘선택’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6.25 동족상잔이 이뤄지는 시점에서 ‘진리싸움’이란 명분으로 교단분열을 감행했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정당화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전쟁 중이라고 하여 불의를 용납하고 묵과하여 교권폭력에 순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그 말은 일제말기의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그 운동의 노회조직 시도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또 “고신은 분열을 선택하지도 감행하지도 않았으며 총회를 장악한 친일전력 인사들이 교권과 폭력을 행사하여 고신파를 일방적으로 축출했으며 고신파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들에 항거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교단 총무 전호진 박사의 ‘고신교단 파라처치 출범론’에 대해서는 “한국장로교단이 100여개로 나눠진 까닭은 대부분 인간적 이유 때문이며 비 고신계 장로교단들의 출범은 따지고 보면 분리주의 교회관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전호진 박사는 이 교단들에 대해서는 분리주의라는 꼬리표를 사용하지 않는 반면에 단지 고신교단 분열에 대해 사용하고 있다”며 “그 용어가 적합한 사건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고, 적합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사용하는 것은 고신교단이 분리주의 교회관으로 출범했다고 하는 전호진 박사의 역사인식은 사뭇 자조적(自嘲的)이며 자괴적(自壞的)”이라고 표현했다.
최 교수는 이성구 교수의 “고려신학교 설립이 고신분열을 고착화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9가지 예를 들면서 반박하고 있다.
최 교수는 “고려신학교가 개교한 시점은 광복 후에 조직된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를 총회신학교육 기관으로 인준할 때였고 조선신학교는 선교사들이 전해 준 한국교회의 신앙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학교이기 때문에 고려신학교는 그것을 계승하고 보급하려는 목적에서 세운 신학교지 분열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신상준 부장 (2004. 7. 10.)
>> "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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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inyouwithyou.blog.me/10103168440
: "예언자적 역사가 이만열 교수를 만나다" - 244호 그 사람의 서재9, 20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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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담을 쌓고 갈등만을 부추기고 있는 극단의 상황에서 양측 모두와 소통하며 모두에게서 인정받는 대표적인 기독 지성 이만열 교수의 서재를 방문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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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만큼 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학문이 있을까? 역사란 기록이라는 매개를 바탕으로 해야 성찰이 가능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만열 교수는 한국 복음주의 지성의 큰 나무일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에 관한 독보적인 학자로 가장 먼저 찾았어야 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담을 쌓고 갈등만을 부추기고 있는 극단의 상황에서 양측 모두와 소통하며 모두에게서 인정받는 대표적인 기독 지성 이만열 교수의 서재를 방문하기 위해 사직공원 옆에 위치한 이 교수의 댁을 찾았다. 차가운 한기로 집안에서도 외투를 걸치고 있어야 하는 거실과 서재에서 그의 신앙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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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바쁘신 중에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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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책이나 독서에 관해서는 별로 해 줄 얘기가 없지만 어쨌든 찾아 주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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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오늘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한복판에 계셨던 분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생각으로 왔습니다. 책이나 독서에 대한 부담은 크게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수님의 삶의 여정은 저 같은 젊은 복음주의 청년들에게는 당시 책보다 더 큰 의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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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그런 얘기를 들을 정도로 대단 한 사람은 아닙니다. 책과 독서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니 어찌되었든 조금 편하게 인터뷰에 응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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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의 신앙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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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열 교수의 집 거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집안에서도 외투를 입고 지낸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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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역사나 신앙과 관련한 인터뷰는 많이 하셨지만 교수님의 신앙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더군요. 기독교학문연구회 수련회에서 발표하셨던 ‘나의 신앙과 학문’과 15년 전에 두레시대에서 출간한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라는 자서전적 책에서 그나마 신앙고백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지만 그마저도 절판이 되어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었고요. 이번 기회에 교수님의 신앙 이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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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나는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 텃골이라는 마을에서 1938년에 태어났어요. 십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지요. 위로 누님이 여섯 분이에요. 태어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해방될 때까지는 일제 치하여서 교회라는 걸 잘 몰랐습니다. 해방 후에나 교회에 본격적으로 나갔죠. 1897년 우리 동네에서 약 5~6km 떨어진 사촌이라는 마을에 호주 장로교 선교사 손안로의 전도를 받아 복음을 받은 조동규라는 분이 세운 사촌교회가 교세가 늘어 1908년경에 면소재지인 군북에도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군북교회에서 할머님, 여섯 분의 아버님 형제분과 그 후손들이 신앙 훈련을 받았습니다. 시냇가에서나 볼 수 있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아주 좋은 교회당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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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부모님을 통해 신앙 훈련 같은 것을 받으셨는지요. 어렸을 때 아버님이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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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나의 아버님은 1녀 6남 중 장남이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농사지을 땅이 없어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벌은 생활비를 집에 몇 푼 남기시곤 하셔서 아버님이 일찍부터 살림의 책임을 짊어지셨지요. 결혼을 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야하다 제철소에서 일하셨습니다. 거기서 돈을 꽤 많이 모으셨는지 나중에 논밭과 산판 등을 마련하셨고 그 덕분에 십남매의 자식을 기초교육이라도 받게 하셨습니다. 당시 시골 형편으로는 힘겨웠을 소학교 교육을 모두 받았던 거죠. 아버님은 일본에 계시면서, 조선인들이 세운 교회에서 한 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기독신보>에서 그 교회에서 활동한 아버님과 숙부님의 이름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딸 여섯을 낳은 뒤에 7년이나 지나 저를 얻었지요. 그래서 부모님은 물론이고 저의 할머님께서 저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지만 할머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광경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할머님이 저를 너무 좋아하셨기 때문에 할머님을 장사할 산판을 따로 사서 제 이름으로 등기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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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아버님은 나를 향해 웃거나 인자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거의 없었지요. 오히려 더 엄하게 대하신 것 같은데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가져야 할 몸가짐에 대한 교훈을 지금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에 대한 인상은 ‘두렵다’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에 부자간에 가져야 할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오륜(五倫)의 윤리는 거의 갖지 못했지요. 어릴 때 교회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설교를 들으면 우리 아버님 모습이 먼저 떠올랐어요. 변명같습니다만, 아마도 제가 제 자식에게 엄격하게 보인 것도 바로 아버님의 이런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철이 들고 난 뒤부터는 반성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관해서 아버님께 전해 받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유교적인 교훈으로 어른에 대한 예의를 엄격하게 가르쳤지요. 해방 후에 아버님은 교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어요. 하지만 임종에 앞서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셨다고 맏누님이 말씀해 주시더군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은 1952년 2월 29일로, 중학교 1학년 때였죠. 당시 집을 떠나 마산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3?1절 행사 연습을 마치고 하숙하고 있는 숙모집으로 돌아왔는데 작은 아버님이 큰소리로 우시면서 비보를 알려 주셨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너무 어렸기 때문에 죽음이 그렇게 철저하게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평소 아버님과 각별한 정을 나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슬픔을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날이 지나고 제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님의 엄격하고 냉정스러운 성품 뒤에 숨겨진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날이 정말 슬픈 날이었음을 두고두고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엄격함과 냉정함’도 아버지 사랑의 표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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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길을 가거나 운전을 하거나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면서 적적할 때면 찬송가를 외워 부르곤 하는데 이게 어머님한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인 것 같습니다. 열다섯 살에 네 살 위의 아버님과 결혼하신 어머님은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셨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결혼하신 후 얼마 안 있어 예수를 믿으셨지요.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새벽에 드렸던 가정예배가 떠오르는데 어머님은 날이 채 새지도 않았는데 우물에서 세수를 하시고 우리를 깨우고 예배를 드리셨어요. 어머님은 오늘날처럼 이론적으로 잘 정리된 기도를 드리지는 않으셨지만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 덕분에 자식들이 모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실 때까지 가까운 교회에서 명예권사로 봉사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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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해방 직후에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는지요. 주일학교에서 말이지요.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에 보면 생애에 극적인 전환을 마련해 준 특별한 만남 같은 것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떠오르는 몇 분에 관한 추억과 함께 문성주라는 분에 대해 짧게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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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해방 후에는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신앙 교육을 잘 받았습니다. 6년 동안의 주일학교 교육이 평생을 좌우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강조된 신앙이라는 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든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것들이었죠. 엄위하신 하나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인과응보하시는 하나님 같은 것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문성주 선생님은 당시 유년 주일학교 부장으로 교사들과 학생들을 지도하셨습니다. 오른손이 성치 않던 분이셨죠. 집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던 게 그분 때문이었어요. 당시 주일학교는 분반공부 후에 학생 전체를 상대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문 선생님은 우리가 담임선생님한테서 잘 배우지 못한 부분까지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동화’ 시간을 가장 기다렸는데, 구약의 위인들 이야기를 아주 생동감 있게 잘 들려주셨습니다. 모세, 다윗의 이야기를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분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 중에 기억에서 떠나지 않은 주제가 ‘신앙과 민족’이었어요. 소박하지만 민족주의의 기틀과 방향을 마련할 수 있는 강렬한 민족 교육을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그분을 통해 배운 겁니다. 역사를 공부하게 된 것도 그분의 영향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 민족, 역사’의 틀 속에서 인생과 학문을 정립하려는 몸부림이, 철이 들고 난 뒤에 반성해 보니, 문성주 선생님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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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 서재 한편에는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책장도 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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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일부에서, 교수님의 사상이 굉장히 호방하시고 진취적이신 것에 비해 신앙은 교조적이기까지 하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신앙이 보수적이신 것이 주일학교 때 배운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됩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고등학교 때 월요일 시험을 앞두고도 주일 밤 12시가 넘어서야 공부를 했고 대학 시절에 역사학과 학생이라면 꼭 가야 할 답사가 주일을 끼고 있어 한 번도 답사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고신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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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고신 교단의 신앙 교육이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약점을 용서하시고 보완해 주시기보다는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율법적인 신앙으로 이끌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교단이 주장하는 원래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이념을 폐쇄적이고 기계적으로 운용하려는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와, 그 이념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스럽다고 생각하지, 그 이념이나 엄격한 신앙 훈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서울에 와서 김형석 교수의 성경공부 모임이나 경동교회나 함석헌 선생 모임에 참석하면서 폐쇄적이던 신앙이 조금씩 풀려나간 건 사실입니다. 어렸을 때 받은 신앙 훈련 중 기억나는 것은 성경 구절을 많이 외웠다는 거예요. 내가 6학년 때 한국전쟁이 났습니다. 살고 있던 지역이 ‘인민군’이 최후의 전진기지로 삼은 전투지가 되어 두어 달 동안 동네에 ‘인민군’이 주둔하게 되었어요. 당시 우리 가족은 피난을 마산이나 부산 쪽으로 가지 못하고 자형이 있던 의령으로 갔는데 이곳도 ‘인민군’ 치하로 넘어갔죠.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집이 불타서 먹을 게 거의 없었죠. 공습 때문에 낮에는 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타다 남은 보리니 쌀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밥을 해서는 소금이나 젓갈 섞은 부추 등을 조금 넣은 주먹밥을 만들어 산 속으로 다시 들어가 하루 종일 숨어 지냈지요. 당시는 교과서 외에는 책이 없었어요. 시골에서는 교과서도 제대로 구입할 형편이 안 되었고요. 그때 아마도 일제강점기 때에 집에서 사용했을, 앞뒤장이 다 떨어진 신약 성경하고 찬송가가 있었는데 그걸 가져가서 물가에 자리를 만들고는 거기서 하루 종일 성경을 보고 찬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여름철이라서 그게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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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할머니를 비롯해 친척들이 매우 이른 시기에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고 하셨는데 당시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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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아까 말했듯이 어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야 예수를 믿으셨습니다. 할머니가 호주 선교부의 전도를 받아서 먼저 예수를 믿고 계셨는데 그 영향 때문이었겠지요. 고모가 한 분 계셨지만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형제가 6형제인데 모두 예수를 믿었습니다. 아버지가 장남이고 차남 되는 분이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됐는데 1930년대에 폐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삼촌의 아들 두 분이 목사가 됐고, 큰 아들(이삼열 목사)의 아들도 역시 목사입니다. 영국에서 학위를 하고 고신대 구약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구포제일교회 에서 그 아버님이 세운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이성구 목사입니다. 제가 이 목사의 5촌 당숙이 됩니다. 그 뒤에 우리 집안에서 목사, 장로, 권사가 많이 나왔어요.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인지, 우선 문중의 종인(宗人)들이 사는 평관이라는 곳에서 일찍 떠나 있었습니다. 문중에는 학자, 독립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섰던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골에서 놀라운 일이지요. 하여튼 우리 집은 문중의 분위기와 달라 인천 이 씨 집성촌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따로 살아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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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서 신앙생활의 진수를 맛보았죠. 1950년,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전쟁이 나니 그 이듬해 국가고시를 쳤어요. 그때 성적이 아주 좋았어요. 군내에서 1,2등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마산으로 가서 삼촌 집에서 하숙했는데, 제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다섯째 숙모가 굉장히 신앙이 좋았어요. 일본식으로 지어진, 요즘말로 하면 다가구주택이었는데 친구랑 같이 자취도 하고 그 집에서 밥도 먹고 그랬어요. 숙모하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당시 고신에서 <파수꾼>이라는 잡지가 간행되었는데 그 잡지 영향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꾸준히 읽었거든요. <파수꾼>에 찰스 쉘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소설을 거창고등학교의 전영창 선생이 번역, 연재했는데 그 소설도 당시 내 신앙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마산에 가서는 고신파 신마산교회를 다녔는데, 중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죠. 당시 부흥회 강사로 온 분이 전 충현교회 담임 목사였던 김창인 전도사였죠. 그때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맞아들이는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해서 초등학교 4학년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회심 전에는 기독교 원리도 잘 모르고, 예수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심히 읽어 그 내용을 가르치는 데는 열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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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열 교수가 <성서 조선> 전집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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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교사를 하셨다니 정말 신앙에 열심이 있으셨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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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성경은 정말 열심히 읽었습니다. 다른 준비는 안 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그대로 전하는 거죠. 내 말 많이 안 붙이고 성경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또 토요일이 되면 아이들 심방을 했어요. 들어가서 기도하기보다는 불러내서 “요절 외웠니” 물어보고 “내일 일찍 오거라” 하는 거죠. 중학교 1학년 때 고신 교단이 분리가 됩니다. 그때 고신의 분리와 정신에 대해 매우 강조를 합디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말 러시아가 진해(마산)만에 진출할 때 지었던 영사관이 있었는데, 그 건물을 다른 신마산교회가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닌 고신파 신마산교회에서는, 그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까지 말하고 그랬지요. 그쪽을 에큐메니칼, 칼측이라고 하더군요. 당시 학생신앙운동(SFC, Student For Christ)이 막 일어날 즈음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젊은이를 키웠을 겁니다. 엄격한 신앙 훈련, 기도 등으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거기에도 관여하게 됐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에 그 교회 학생회(SFC)장을 하게 된 거예요. 선배들이 있었지만 시키니 안 할 수도 없고…. 회장이 된 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헌신 예배를 드리게 되면 회장이 사회를 해야 하는데 세례를 받지 않고 강단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고신파의 정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학년 올라가면서부터는 가정교사를 하는 집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마산 지역 학생연합회의 회장도 맡게 되었어요. 대학입시 공부도 해야 하는데, 2학년부터 3학년 졸업 때까지 입주식 가정교사를 하면서 2~4명을 돌봐야 했어요. 그러나 가정교사로 들어갈 때 주일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하는 약속을 받고 들어갔고 그 약속을 꼭 지켰지요. 지금 난 고등학생 때에 가정교사 한 것을 후회해요.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가정교사를 하면서 한참 지적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더 책을 읽고 기초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그때 미래를 내다보고 설계를 하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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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그래도 배움이라는 게 남에게 가르칠 때 자기 것이 되기도 하고, 지금 교수님이 가르치시는 일을 잘 하실 수 있었던 게 당시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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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어요. 당시 마산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미군 교회에 한두 번 가 본 적이 있어요. 결국 너무 바빠 정기적으로 가지 못했지요. 그때 끈기 있게 미군 교회에 다녔더라면 영어를 제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 선배 한 명은 미군 교회에 다니면서 영어를 능숙하게 잘하게 됐어요. 저도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많아요. 그래서 인생의 미래를 조언해 줄 선배가 필요합니다. 결정적인 조언은 아니더라도 가까이서 한두 마디라도 조언을 해 주는 그런 선배나 친구 말이죠. 진학할 때도 조언해 주는 이가 있었더라면 아마 제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현재를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좋은 선배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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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역사를 가르치시는 교수님한테 ‘아마’라는 말씀을 들으니 아이러니합니다. ‘그 사람의 서재’ 코너가 신앙과 인생의 모범적인 선배들의 사상의 궤적, 고민의 흔적들을 책을 통해 알아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지만 책 말고도 한 사람의 멘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배움, 특히 영어에 대한 아쉬움을 크게 느끼신 계기가 있으셨나요? “4년간의 외출”, 다른 말로 “별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내던져 버리셔서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찾게 하셨고 결국 한국 기독교사 연구로 몰아가셨다”고 고백하셨던 미국에서의 연구 경험이 아무래도 가장 큰 필요를 느끼게 하셨던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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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네, 그래요. 1980년 7월 신군부에 의해 해직되어 자의반 타의반 한국기독교사 연구 자료 수집을 위해 미국에 가서 세계에 대한 시각이 열렸어요. 그 전에는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니까 굳이 밖에 나갈 게 뭐 있나 했는데, 한국 기독교사의 귀중한 자료가 상당수 외국에 있을 뿐 아니라 내가 하는 학문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더 많은 배움, 특히 어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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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교회와 학생신앙운동에 열심히 참여하셨으면 주변에서도 그렇고 자신도 신학에 대한 고민, 그러니까 목회의 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셨을 것 같습니다. 한참 후이긴 하지만 나중에 합동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도 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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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그랬지요. 중고등학교 시절, 숙모님과 주변 분들이 목회에 대한 소명 의식을 한껏 불어 넣으셨었지요. 실제로 목회자가 되리라 결심도 했고요. 사학과를 지망하게 된 것도 신학을 위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학교로 곧바로 입학하지 말고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좁은 생각에 신학과 관련이 있는 철학, 종교학, 사학 중 한 곳에 진학하겠다고 생각하고 모두를 두루 배울 수 있는 곳이 사학과이겠거니 하고 사학과로 갔지요. 아마 역사를 공부하게 된 데는 문성주 선생님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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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 서재에 빼곡히 책들이 들어차 있다. 거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이렇게 책장이 서 있다. ⓒ복음과상황 이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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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신학을 하실 생각이었으면 서양사를 전공하셨어야 했는데 국사로 방향을 바꾸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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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물론, 입학해서는 서양사 공부를 주로 했어요. 곁들여 신학에 필요한 종교학 강의와 언어학과의 희랍어 강의, 독일어 강의를 듣기도 했죠. 그러면서 독일어 성경도 읽고요. 그런데 2학년을 마치고 나온 입영 통지서가 인생의 첫 전환기를 가져왔어요. 1959년 3월 입대해 6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를 받았는데 공병 참모실에 근무하는 통역관 선 중위가 강의 준비를 하면서 내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교안을 작성해 달라고 하더군요, 잘 못하겠다고 하니까 “S대 사학과에 다니다가 온 녀석이 뭐 이래” 하면서 아주 심하게 모욕을 주는 거예요. 그 모욕을 들으면서 기분이 매우 나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사람 말이 맞다 했어요. 목사 되기 위해 역사 공부한다고 했는데 서양사만 공부하고, 사학과에 와서도 역사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고 종교학과의 강의를 넘보는가 하면, 경건 생활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닫고서 대학의 진보적인 문화를 수용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인생 여정에 뜻을 같이 해야 할 여러 친구들을 폭넓게 사귀지도 못했지요. 그러면서 이 땅에 뿌리박은 목사가 되겠다고! 자기 역사도 모르는 목사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서 국사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기초 공부부터 시작했어요. 그래도 여전히 신학교에 갈 생각이었는데 막상 졸업할 때가 되자 신학교에 원서를 내지 못했어요. 부산의 교단 신학교로 가야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는 거예요. 변명을 하자면, 당시 어머님도 많이 늙으셨고 동생 셋도 있고. 대학 졸업하면 뭐가 되겠지 하고 바라만 보고 있어 취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신학 공부하면서 가족 부양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요….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 결국 신학교에 가지 못하고 인천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했습니다. 그 학교는 대학 동기였던 손봉호(영문) 선생이 거쳐 갔고, 홍성현(철학), 최관식(수학), 김창락(전 한신대 교수), 전영운(중앙대 독문과) 교수 등이 막 가 있을 때인데 나더러 오라고 하는 거예요. 신앙의 동지들이 가 있다는 게 좋고 해서 갔죠. 그러고는 대학원에 들어가 국사를 더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몇몇 고등학교를 거쳐 숙명여대로 옮기게 됐어요. 동숭동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인천으로 출근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신학을 포기하지 않아서 국사를 공부해도 사상사 분야를 주로 공부했어요. 신학교는 가야 하는데 교사 하면서 공부를 하고 또 집을 돌보자니 힘들었죠. 그래서 박사 과정에는 한참 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니던 교회가 갈라지면서 어디에도 참여하기가 곤란해 서울중앙교회로 옮겼지요. 그게 1968년 말이었어요. 가니까 대학부를 좀 맡아달라고 해서 대학생을 지도하면서 전담교역자 없이 10년 정도 대학부를 맡아 강의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우창록(법무법인 율촌 대표) 변호사를 비롯해서, 김유신(부산대), 박영태(동아대), 백종국(경상대), 정인철(부산대), 박주용(수산대), 이충열(경원대), 이상훈(고려대), 박정원(상지대), 이세재(구미공대) 교수와 이석형 박사 등이 직간접으로 저한테 영향을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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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가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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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교수님 생애에 기억할 만한 인물들은 어떤 분들이 있을까요. 교수님에게 신앙적으로 깊은 인상을 주셨던 분들 중심으로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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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먼저 김형석 전 연세대 철학 교수와의 인연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대학에 올라와서 1년 동안은 천안에서 온 친구와 자취를 했고, 그 뒤로는 김형석 교수 집에 입주해서 가정교사를 했거든요. 그 전에 매 주일 오후에 남대문교회에서 열리는 김형석 교수의 성경공부 모임을 소개받았습니다. 가 보니 정말 좋은 강의를 하는 거예요. 고신파에 속해 있으면서 폐쇄적으로만 살았던 신앙의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경험이었습니다. 나중에 개인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 집에 와서 아이를 지도해 달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입주 가정교사가 되었죠. 그 집에 들어가 가정예배도 함께 드리고 생활을 하면서 눈을 넓게 뜨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 설교도 들었는데, 강 목사님의 설교는 매번 사자후예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갔죠. 나는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함석헌 선생의 일요성서 강의도 가서 들었는데 당시에 나한테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김형석 교수였습니다. 군대에서 제대를 한다니까 다시 가정교사로 오라는 거예요, 자녀가 6명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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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서울중앙교회면 손봉호 교수님도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뜻이 통했던 분들로는 어떤 분들이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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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손봉호 교수님은 제가 서울중앙교회로 옮기기 전에 그 교회에 다녔지요. 손 교수님은 윤봉기 목사님의 아들 윤종하 선생과 가깝게 지냈어요. 성서유니온에서 사역했던 윤종하 선생하고는 영문과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고 경주교회에서부터 교분이 두터웠지요. 제가 서울중앙교회로 갔을 때는 손 교수님은 유학을 떠나셨어요. 귀국 후에 고등공민학교도 같이 하고 대학부도 서로 번갈아 가며 맡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손 교수님은 김경래 장로님과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해 설교자로 가면서 떠나게 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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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함석헌 교수님이나 김형석 교수님 얘기를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당시 이미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계셨고 김형석 교수도 그 즈음을 전후로 철학적 에세이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셨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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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내가 함석헌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57년 대학 입학 후예요. 천안 출신으로 나와 같이 자취하던 임한순 형의 소개로 함 선생의 강연에 참석하면서였죠. 자유당 치하였던 당시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가톨릭의 윤형중 신부와 기독교에 대해 몇 번 논쟁하는 글을 읽긴 했죠. 1950년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은 1934~35년에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서 낸 책인데 당시는 그 명저를 이해하지 못했죠. 사실 함 선생의 책을 제대로 읽은 것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지금은 조금 열려 있다 하지만, 그때는 고신 폐쇄적인 분위기에 너무 젖어 있어서 쉽사리 마음이 열리지 않아 그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요. 어릴 때 교육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제대 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하고 그 책을 탐독하게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깨우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최근에 그 책을 한국의 사학사적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근대적 역사관을 가지고 한국 역사를 일관되게 본 최초의 역사라는 거지요. 함석헌 선생의 글은 논리적이지는 못하나 직관적인 혜안과 거침없이 솟구치는 힘이 있어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인권 민주화를 위해 새로운 도전적 과제들을 제시했고, 어설픈듯하면서도 비수가 숨어있는 그의 비판은 용기 없이 움츠리고 있던 우리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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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최근 <교수신문>에서 많은 학자들이 근대 백년 이래 재조명이 필요한 논쟁적인 인물로 함석헌 선생을 꼽았습니다. 그러나 함석헌 선생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놀랍게도 그에 대한 한국교회의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대로 된 신학적 평가 외에도 그의 먼 친척이라는 사람이 쓴 <거짓 예언자, 함석헌> 같은 책은 함석헌 선생의 여성 문제를 근거로 삼아 도덕성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함석헌 선생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 선생도 이 문제로 함 선생님을 크게 나무라시고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으셨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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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네, 나도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던 때라, 그것이 정치적인 모략까지 곁들인 의도적인 저술이라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읽었죠. 그리고 그 책에 등장하는 인물을 만나 사실 관계를 확인해 보려고도 했어요. 하지만 그는 화제를 바꾸고 답을 회피하더군요. 그래서 함석헌 선생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인간의 약점들을 악의적으로 조작, 모함하거나 침소봉대하려는 부분도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은 가졌습니다. 현재 함석헌 선생과 관련해 많은 모임이 있지만 그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는 작업은 여전히 부족해요. 흩어져 있는 구슬을 꿰듯 그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급선무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의 근대 역사에서 유일하게 사상가로 꼽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전집이 30권으로 출판되었죠. 아직 정리되지 못한 노장(老莊)사상 강의 녹음도 있어요.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연구는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제가 회장으로 있는 함석헌학회에서는 우선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그의 저작을 제대로 읽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 동아리 형태로 그의 저작을 읽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이런 활동이 인문학의 위기를 타계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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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김형석 교수님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님 서재에서 책을 보시진 않았는지요. 신앙 배경이 달라 토론을 하셨을 것 같기도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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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김 교수님과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깊게 해 보지는 않았어요. 앞서 얘기했던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격려하시는 분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 김형석 선생님을 통해서죠. 서재를 자주 들어가진 않았어요. 그리고 고신 출신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무거운 신학적 토론 같은 것은 하지 않았죠. 물론 고신의 형편을 물으시기도 했고 인생에 대한 상담도 했으며 그 분이 에세이집을 낼 때 내가 구술을 받아 써서 원고화하는 작업도 했지만 그 밖에 딱히 기억되는 게 없습니다. 아직도 한 가족처럼 지내고 중요한 행사 때는 서로 연락하며, 매년 정초에는 꼭 세배를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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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해직된 후, 당시 막 시작한 합동신학교에서 결국 신학을 하셨지요. 신학교에 가시게 된 숨어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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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1972년에 유신이 있고 난 후에 한국 교회가 유신을 지지했습니다. 안타깝지만 고신도 유신을 지지했고, 5?16쿠데타 후에는 주일을 범해가면서 화폐 개혁에도 동조했죠. 주일 성수를 그렇게 강조하더니 주일날 화폐를 바꾸라니까 순종하고. 유신 때 제가 서른다섯 살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죠. 신학적 바탕이 없어서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어렵고, 역사학도로서 이걸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가지고 대들 용기도 없어서, 한말 격동기 때에 기독교가 어떤 처신을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어요. 그 결과 나온 게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 과정’(서울대학교 한국사론 제1집)이라는 논문이에요. 봉건사회를 극복하려는 사회개혁운동에서 국권수호운동 및 한말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는 1910년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건데 이 논문이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그런 시각에서 민족사와 기독교사를 통찰한 게 없었던 거죠. 그 논문이 유신치하에서 많이 읽혔고 제가 교회사 연구자처럼 됐어요. 10?26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신군부에 의해 저는 학교에서 쫓겨났어요. 이런 형편에 있었는데 1980년 가을에 남서울교회(홍정길 목사)에서 합동신학교가 시작되자 박윤선 목사님이 저를 불러 한국교회사를 가르쳐달라 한 거예요. 조건을 하나 걸었죠. 해직돼서 놀고 있을 때니까 날 학생으로 받아 주면 가르치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해서 미국에 가기 전까지 1년간 가르쳤고 하다가 돌아와서 또 몇 년 강의를 듣고 강의를 했습니다. 또 귀국하기 전에 연락이 돼서 동양 고전 중 논어를 강의해 보고 싶다 했는데 박윤선 목사님이 허락을 하더라고요. 박윤선 목사님이 당시 생각이 트인 거죠. 한국기독교사를 강의하는 한편 ‘한국 기독교와 동양 고전’이라고 강의 제목을 붙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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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열 교수. ⓒ복음과상황 이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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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신학교에서 동양 고전을 강의한다는 게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논어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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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평소에 논어를 즐겨 읽었습니다. 논어 주석 중 주자의 주석이 제일 좋은데 주자 주석을 대본으로 성경을 적용하여 기독교적 관점에서 ‘논어 주석’을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평소에도 신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의 신학교라고 한다면, 유동식 교수식으로 말하자면, 복음의 밭에 씨를 뿌릴 때 씨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라면, 밭은 한국의 지적 사상적 풍토다. 그런데 지금까지 신학 교육이 ‘씨’에 대해서만 말하고 ‘밭’에 관해서는 거의 강의하지 않았다. 그건 균형이 맞지 않다.” 그렇게 말했죠. 가령 부모를 두고 말한다고 할 때 아버지만 강조하고 어머니는 무시한다면 어떻겠어요? 사상적 풍토에서 밭에 해당하는 어머니가 뭐냐, 그게 바로 한국 사상을 포함한 동양 사상이다. 동양 사상의 에센스 가운데 하나가 논어잖아요. 그래서 신학교에서 논어를 공부해 보자 했던 거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이런 얘길하면 한편에서는 자유주의자로 자꾸 몰고 가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신학이란 뭐냐? 학문이다. 학문은 문제의식에서 시작된다. 서양의 문제의식이 서양 학문을 생산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세계 보편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동양은 동양대로 또 우리는 우리대로 문제의식이 있다. 그것을 성경에 바탕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해 내는 것이 우리 신학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문제의식을 학문화할 때에 우리의 학문이 된다는 거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상황을 문제의식으로 승화시키고 성경을 토대로 학문화할 때 그게 우리 신학이다. 그렇다면 그 때 중요한 건 이걸 어떻게 인류의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특수한 것으로 두면 이단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그걸 학문(신학)화하되 보편성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신학은 당연히 우리의 문제의식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민중 신학을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이런 말 하면 고신에서는 죽일 놈이라고 하겠지만, 난 민중 신학의 내용이 좋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 문제의식을 토대로 신학화 작업을 했다는 겁니다. 그게 제대로 됐어야 하는데 중단돼 버렸지요. 지금도 외국에서는 연구하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하는 사람이 없게 되어 버렸잖아요. 우리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신학화 작업으로 승화시킨 것이 민중 신학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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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교수님의 삶을 보면 지극히 보수적인 신앙 교육을 받으셨는데 어떻게 해서 진보적인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 열려 있으신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아무래도 저는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합니다. 어떤 분들의 영향을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으실런지요. 가령 단재 신채호에 대해 높이 평가하신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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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죠. 그의 사론은 보편적입니다. 다만 그 역사 이론을 실제 역사 연구와 역사 서술에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영웅이 역사를 이끌어 간다고 하다가 신국민이 이끈다 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나니 국민 개념도 없어지고 민중 얘기를 끌어내 민중이 이끌어 간다고 말하기도 했죠. 그럼 민중이 이끄는 역사를 써 보라 할 때 자신은 그러지 못했어요. 함석헌 사관이 신채호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역사관이 이론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지요.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이 뭐냐? 결국 역사란 한두 사람의 영웅이나 지배자가 주도권을 갖는 것에서부터 발전해 민중, 백성이 역사의 주체자로 등장하며 역사의 진전에 따라 역사 주체자의 수가 양적으로 증가한다는 거죠. 그 과정이 역사 발전이더라.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이 소수의 사람을 특별하게 쓰신 경우도 많지만, 개인의 자유를 확대해 가면서 사회적으로는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모든 인간을 책임 있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역사의 발전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 거죠. 결국 유신이라는 게 뭐냐? 역사의 발전에 역주행하는 거고 반역사적인 거죠. 신군부가 뭡니까? 80년 서울의 봄을 뒤엎어버리는 거죠. 그런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기를 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명박 정권도 마찬가지죠. 과거 해직교수 중에 역사학자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적 신념을 갖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저항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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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실장/ 아무래도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말씀대로라면 한국 교회는 현재 역주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를 방관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역사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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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수/ 제도화된 종교와 예수 그리스도는 일치될 수 없는 거지요. 한국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속에 가둬 버리고 예수의 삶과 복음으로부터 멀어져 간 것입니다. 제도화되어 간다는 중요한 대목 중 하나는 한국 교회가 세속화됐다, 너무 부자가 됐다, 기득권자가 됐다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또 그걸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반역사적인 일에 가담하고 때로는 그런 일에 앞장서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는 가난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작은교회운동’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가진 걸 내놓고 나누며 가난한 자들의 눈물을 씻겨 주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꼭 거지꼴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겠지요. 큰 교회가 되면 그게 힘듭니다. 작은교회운동은 곧 풀뿌리운동이지요. 우리 기독교가 사실 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 가정, 사회 및 세속적 가치관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요. 풀뿌리교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큰 교회를 지향하면서 돈과 권력 등 세속적 가치관이 교회를 덮어 버린 때문이지요. 풀뿌리운동으로 가자면 큰 교회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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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를 구경하며 어떤 책을 읽으셨으며 독서에 대한 의견을 조금 더 듣고 싶다는 요청에 교수님은 연신 손사래를 치시며 당신은 독서에 관해서는 할 얘기가 없다고 하시며 서재만 구경시켜 주시겠다 하신다. 거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병풍처럼 책들이 둘러져 있고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지하 서재에는 역사 자료들이 분야별, 용도별, 자료별로 분류되어 있다고 거침없이 설명하시더니 서둘러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하신다. 교수님의 재촉과 뒤이어 잡혀 있는 또 다른 인터뷰 약속으로 더 이상 서재를 자세히 살필 순 없었다. 그러나 서재 곳곳에서 우리는 역사와 민족이라는 상황을 복음으로 조명하며 고민하는 한 역사가의 고뇌와 한 사람의 신앙인, 그리고 한 독서 대가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고수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 않던가. 책에 대한 보화 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삶 자체가 젊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한 권의 양서가 아니던가. 그런 분의 삶을 잠시 엿보고 그분의 서재에서 책 향기를 맡았다는 것만으로 이번 서재 탐방은 충분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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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 정지영 기획실장 theblessedjung@gmail.com
: 사진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