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만열 - 고신, 목회자 소원, 고신과 주일, 고신만 구원..
이만열 교수님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고, 고신 출신으로 보수 신앙을 제대로 알고 익혔고 동시에 사학적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어, 필연적으로 보수 정통 신앙에서 볼 때는 좌파 기독교인으로 분류 됩니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 목회자가 될 신앙과 국내 정상급 신학자들과 서울대 문리대 동기였다는 점에서 손봉호 교수님과 함께 한국교회에 오랫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적지 않은 세월에 "한국기독교를 자유주의화 좌파화 하여 교회를 도덕이나 사회개량 단체로 만드는" 역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다음 내용은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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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신에만 구원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고신 교단이 분리가 됩니다. 그때 고신의 분리와 정신에 대해 매우 강조를 합디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말 러시아가 진해(마산)만에 진출할 때 지었던 영사관이 있었는데, 그 건물을 다른 신마산교회가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닌 고신파 신마산교회에서는, 그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까지 말하고 그랬지요. 그쪽을 에큐메니칼, 칼측이라고 하더군요. 당시 학생신앙운동(SFC, Student For Christ)이 막 일어날 즈음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젊은이를 키웠을 겁니다. 엄격한 신앙 훈련, 기도 등으로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거기에도 관여하게 됐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에 그 교회 학생회(SFC)장을 하게 된 거예요. 선배들이 있었지만 시키니 안 할 수도 없고…. 회장이 된 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헌신 예배를 드리게 되면 회장이 사회를 해야 하는데 세례를 받지 않고 강단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고신파의 정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학년 올라가면서부터는 가정교사를 하는 집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마산 지역 학생연합회의 회장도 맡게 되었어요. 대학입시 공부도 해야 하는데, 2학년부터 3학년 졸업 때까지 입주식 가정교사를 하면서 2~4명을 돌봐야 했어요. 그러나 가정교사로 들어갈 때 주일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하는 약속을 받고 들어갔고 그 약속을 꼭 지켰지요. 지금 난 고등학생 때에 가정교사 한 것을 후회해요.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가정교사를 하면서 한참 지적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더 책을 읽고 기초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그때 미래를 내다보고 설계를 하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워요.
- 고신과 주일: 화폐개혁 때 태도
이 교수/ 1972년에 유신이 있고 난 후에 한국 교회가 유신을 지지했습니다. 안타깝지만 고신도 유신을 지지했고, 5?16쿠데타 후에는 주일을 범해가면서 화폐 개혁에도 동조했죠. 주일 성수를 그렇게 강조하더니 주일날 화폐를 바꾸라니까 순종하고. 유신 때 제가 서른다섯 살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죠. 신학적 바탕이 없어서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어렵고, 역사학도로서 이걸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 박윤선, 합동신학교의 논어 강의
10?26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신군부에 의해 저는 학교에서 쫓겨났어요. 이런 형편에 있었는데 1980년 가을에 남서울교회(홍정길 목사)에서 합동신학교가 시작되자 박윤선 목사님이 저를 불러 한국교회사를 가르쳐달라 한 거예요. 조건을 하나 걸었죠. 해직돼서 놀고 있을 때니까 날 학생으로 받아 주면 가르치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해서 미국에 가기 전까지 1년간 가르쳤고 하다가 돌아와서 또 몇 년 강의를 듣고 강의를 했습니다. 또 귀국하기 전에 연락이 돼서 동양 고전 중 논어를 강의해 보고 싶다 했는데 박윤선 목사님이 허락을 하더라고요. 박윤선 목사님이 당시 생각이 트인 거죠. 한국기독교사를 강의하는 한편 ‘한국 기독교와 동양 고전’이라고 강의 제목을 붙여 했습니다.
- 목회자가 되려고 사학과를 지망
이 교수/ 그랬지요. 중고등학교 시절, 숙모님과 주변 분들이 목회에 대한 소명 의식을 한껏 불어 넣으셨었지요. 실제로 목회자가 되리라 결심도 했고요. 사학과를 지망하게 된 것도 신학을 위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학교로 곧바로 입학하지 말고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좁은 생각에 신학과 관련이 있는 철학, 종교학, 사학 중 한 곳에 진학하겠다고 생각하고 모두를 두루 배울 수 있는 곳이 사학과이겠거니 하고 사학과로 갔지요.
- 고신의 교파 분열 책임론, 2004.8.1 (고려신학회 제2차 학술발표회)
고려신학회(회장 최재건, 연세대 신학과)는 고신교단 출신 혹은 고신정신을 사랑하는 신학자들로 이루어진 학술단체이다. 제2차 학술논문발표회가 2004년 6월 18일과 19일 서울중앙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김윤태 교수(천안대)가 ‘미전도종족의 운명’을, 송영목 박사(고신대학교회)가 ‘요한계시록의 전환적, 부분적, 과거론적 해석의 정당성’을, 김은홍 박사(천안대)가 ‘대위임령에 나타난 선교구조’를, 성기문 교수(국제신대)가 ‘구약 선지사와 포르노그라피’를 발표했다.
학회 첫날 발표한 최덕성 교수의 논문 “고신분열에 대한 고신파 책임론”은 몇몇 기독교계 신문에 소개되었다. 그 내용이 알려지면서 고신교단 총회위원회는 이 논문 내용과 관련된 전호진 박사(고신교단 총무)와 이성구 교수(고려신학대학원)와 최덕성 교수의 소명서 제출을 요구했다. 학술적인 논의의 장에서 발표한 논문이 언론과 교단의 주목을 받는 것은 한국교회사의 획을 긋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은 최덕성 교수의 “신앙고백공동체: 고신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이라는 책에 실려 출간(2004년 9월)될 예정이다.
장로교 합동측 교단 신문인 “기독신문”과 부산지역의 초교파신문인 “한국기독신문”이 보도한 고려신학회와 최덕성 교수의 논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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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신문(장로교 합동교단)
“고신파 책임론 문제 있다”
최덕성 교수, 장로교단 분열에 대한 평가 반박
고려신학대학원 최덕성 교수가 고신 내부 학자들이 제기하는 ‘고신분열에 대한 고신파 책임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고려신학회(회장:최재건) 제2회 학술논문발표회에서 최 교수는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교수, 예장고신 총무 전호진 박사, 고려신학대학원 이성구 박사 등의 장로교단 분열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조목조족 반론을 제기하며 이들의 ‘고신파 책임론’을 반박했다.
최 교수는 이만열 교수는 “고신파가 장로교 총회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독자 교단을 형설한 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장로교회 분열의 첫 머리에 있는 고신분열에 대해 고신파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고 자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이 교수의 시각에 대해 “고신은 분열을 선택하지도 감행하지도 않았다. 총회를 장악한 친일 인사들이 불법과 교권폭력을 이용해 고신파를 일방적으로 축출했다. 고신파는 총회의 폭력에 항거하는 성명서들을 발표하고 합법적 절차를 따라 총회에 항의하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또한 이만열 교수의 판단이 “교회가 무엇인가를 충분히 고려한 것인가” 질문하며, “신사참배의 과거사를 통절하게 참회하고 청산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고신 분열에 대해 고신파에게 정당성이 없다는 이만열 교수의 입장에 대해 최 교수는 이만열 교수의 경우 “콘텍스트(민족, 전쟁)가 텍스트(교회, 진리공동체)에 대한 해석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최 교수는 고신파는 분리주의 교회관을 가지고 출범했다는 전호진 박사의 고신파 파라처지(para-church) 출범론과 고신분열의 원초이자 결자는 고신파로 결자해지론을 주창한 이성구 교수에 대해서도 이만열 교수와 “궤를 같이 하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고신 출신 신학자들로 이루어진 고려신학회의 이번 학술논문발표회는 6월 18일과 19일 서울중앙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또한 김윤태 교수(천안대)가 ‘미전도종족의 운명’을, 송영목 박사(고신대학교회)가 ‘요한계시록의 전환적, 부분적, 과거론적 해석의 정당성’을, 김은홍 박사(천안대)가 ‘대위임령에 나타난 선교구조’를, 성기문 교수(국제신대)가 ‘구약 선지사와 포르노그라피’를 발표했다. 김은홍 기자 (200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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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신문 (초교파)
▷“고신분열 역사적으로 정당하다”
최덕성 교수, 고신의 장로교단 분열 책임론 반박
한국장로교 분열의 시발점으로 고신파 책임론을 내세웠던 이만열 교수(국사편찬위원장)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던 전호진 박사(고신총회 총무), 이성구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구약학)의 ‘고신파 책임론’을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역사학)가 최근 고려신학회 학술 발표회에서 반박해 눈길을 모으고 있다. 그동안 한국장로교 분열은 이만열 교수에 의해 고신파 책임론으로 규정되어 왔다.
더구나 교단 내부 인물인 전호진 박사의 ‘고신파가 분리주의 교회관을 가지고 출범했다’고 하는 의미의 고신파 파라처치(para-church) 출범론과 이성구 교수의 ‘고려신학교의 설립이 고신분열을 고착시키는 원인’이었다는 주장 때문에 한국교회에 고신파 책임론이 기정사실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덕성 교수는 이들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면서 고신분열은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 교수는 “이만열 교수가 고신의 ‘선택’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6.25 동족상잔이 이뤄지는 시점에서 ‘진리싸움’이란 명분으로 교단분열을 감행했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정당화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전쟁 중이라고 하여 불의를 용납하고 묵과하여 교권폭력에 순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그 말은 일제말기의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그 운동의 노회조직 시도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또 “고신은 분열을 선택하지도 감행하지도 않았으며 총회를 장악한 친일전력 인사들이 교권과 폭력을 행사하여 고신파를 일방적으로 축출했으며 고신파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들에 항거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교단 총무 전호진 박사의 ‘고신교단 파라처치 출범론’에 대해서는 “한국장로교단이 100여개로 나눠진 까닭은 대부분 인간적 이유 때문이며 비 고신계 장로교단들의 출범은 따지고 보면 분리주의 교회관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전호진 박사는 이 교단들에 대해서는 분리주의라는 꼬리표를 사용하지 않는 반면에 단지 고신교단 분열에 대해 사용하고 있다”며 “그 용어가 적합한 사건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고, 적합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사용하는 것은 고신교단이 분리주의 교회관으로 출범했다고 하는 전호진 박사의 역사인식은 사뭇 자조적(自嘲的)이며 자괴적(自壞的)”이라고 표현했다.
최 교수는 이성구 교수의 “고려신학교 설립이 고신분열을 고착화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9가지 예를 들면서 반박하고 있다.
최 교수는 “고려신학교가 개교한 시점은 광복 후에 조직된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를 총회신학교육 기관으로 인준할 때였고 조선신학교는 선교사들이 전해 준 한국교회의 신앙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학교이기 때문에 고려신학교는 그것을 계승하고 보급하려는 목적에서 세운 신학교지 분열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신상준 부장 (200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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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교수와 고신교회
이철호 | chyi275@hanmail.net>
승인 2013.10.03 09:32:39
나의주장은 열린공간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자유롭게 펼치면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나의주장은 코닷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장에 대한 모든 책임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또한 주장에 반하는 의견이 있다면 반박할 기회를 드립니다. -코닷-
▲ 이철호 목사
창녕학포교회담임
필자의 매우 단편적이며 주관적인 관찰이긴 해도, 약 3년 전부터 이만열 교수에 대해 의미 있는 3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사실은 한동대학교의 류대영 교수가 쓴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이 책의 제 8장은 “1980년대 이후 보수교회 사회참여의 이론과 사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당대의 복음주의적 참여신학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 중 하나를 이만열 교수의 역할에 할애하고 있었다(류대영, 2009:324-333).
두 번째는 ‘역사발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 교수 자신의 진술을 통해서였다(이만열, 2007a:23-24 ; “인간 중심으로 볼 때 역사의 발전이란 역사의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수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면서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더욱 자유로워지고 사회적으로는 더욱 평등해지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부분은 ‘평등’이라는 낱말이다. 이것은 이 교수의 사관(史觀)이 기독교의 하나님나라 복음의 정신과 잘 통합되어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것은 사회 속의 평등의 가치란 유교적인 서열 문화와 자본주의 질서가 굳어 진 우리 사회에서 흔히 간과되기 쉬운 복음의 정신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막10:45, 마7:12, 눅4:18-19, 행4:32).
세 번째는 ‘민족’의 존재의미를 신학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사도행전 17장 26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의 본문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 대목을 통해서였다(이만열, 1981:259; 1991:4; 참고. 류대영, 2009:331).
흥미롭게도 이 본문(행17:26)은 20세기 후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풍미했던 ‘아파르테이트 신학’(Apartheid theology, 인종분리정책을 정당화한 신학)을 정립하는데 초석이 되는 5개의 근거 본문들 중에 하나였다. 나중에 그곳에서 반세기 가까이 치열한 성경해석학의 싸움을 통해 밝혀져 논박된 대로, 이설적인 이 신학을 뒷밭침하고 있던 그 본문에 대한 해석에서 문제가 된 것은 섭리가 아니라 규범(norm)의 관점에서 그것을 읽은 사실 때문이었다.
여기서 이 교수께서 사도행전 17장 26절 본문을 규범이 아니라 섭리의 관점에서 읽었다는 것은 민족의 존재가치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한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20세기 후반 남아공의 화란개혁교회(DRC)는 관련된 5개의 성경 본문을 근거로 민족(volk)의 존재가치를 절대화함으로써 인종차별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득세케 하여 심대한 사회문제를 야기한 바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른바 이만열 교수의 기독교 민족주의는 외견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최대한 배제하면서 기독교적 가치와 조화되는 민족의 개성적인 정체성(identity)이나 그 자주성을 천명하여(이만열, 1991:4-5), 주로 민족이 겪고 있는 심대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코자 하는 신앙적 학문적 모색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사실들로 인해서, 필자는 내심으로 만약 강의의 주제와 충분한 연관이 있는 경우라면 이만열 교수야말로 고신교회를 위한 우선적인 고려 대상의 강사가 아닐까 하는 의견을 평소에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특히 주류 고신교회의 하나님나라의 역사적 현재성에 관한 신학적 입장이 다소 모호해 보이는 반면에 이에 대한 이 교수의 견해는 훨씬 더 구체성을 띠고 있어서 연관된 강의를 통해 이를 보완할 여지가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류대영, 2009:332-333; 특히 참고. 이만열, 1991:375-411, 495-529). 이와 관련해 남아공의 드 그루시(2008:121-122)는 개혁전통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의 메시지는 플라톤적 잔재로 인해 너무 자주 영화(靈化)되고 몰역사화 되어져 왔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논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매우 뜻밖에도 4개월여 전에 ‘코람데오닷컴’의 토론방을 통해 “더 이상 이만열이를 고신에 초청하지 말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J목사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J목사가 이만열 교수를 더 이상 고신교회에 초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퍼온 글’의 내용을 참고할 때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만열 교수가 2003년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개천절 경축사를 할 때 “단군은 우리의 선조이다”라는 언급을 한 사실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 교수가―퀘이커교의 회원이었던 함석헌 선생의 철학적 사상을 계승하기 위한―‘함석헌 학회’의 학회장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J목사의 주장에 대해 이만열 교수는 지난 6월 16일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비판과 폄훼”라는 글을 통해 유감 섞인 해명을 한 바가 있었다. 그 며칠 후에는 J목사가 고신총회 자유게시판을 통해 “이만열 장로의 참된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로 “비판과 폄훼”에 나타난 이 교수의 신학적 문제점을 부각시켜 재차 거론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접하게 되면서, 필자가 거론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이만열 교수의 신학적 견해들을 모두 타당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 교수께서 너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오해가 어느 정도라도 불식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두 가지 문제 중에 퀘이커교와 관련된 것부터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하지만 “비판과 폄훼”라는 글 속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내면의 빛’과 관련된 퀘이커교의 이단성에 대한 이 교수의 해명에도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비록 퀘이커교가 주장하는 ‘내면의 빛’(inward light)이 요한복음1:9-18절에 근거해 있다고 해도, “퀘이커교는 우선 그리스도교의 중핵적 전통의 노선에서 약간 소외되어 온 노선을 따르고 있다”는 한 연구자의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김영태, 1997:95).
그럼에도 J목사가 이 교수께서 ‘함석헌 학회’의 학회장이라는 역할 때문에 고신교회의 강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니버(H.R. Niebuhr)의 범주에 따르면 개혁전통은 주로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이 아니라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이므로, 이런 역할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여기서 퀘이커교의 이단성이 주로 문제시 되고 있는 만큼, 함석헌 선생이 퀘이커교의 회원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그가 퀘이커교도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김성수, 2005:186).
다음으로 이 교수께서 바로 10년 전에 개천절 경축식에서 개천절의 내력을 설명하다가 단군을 “우리의 선조”라고 언급을 한 문제를 논의해보려고 한다. 실제로 이 문제는 그와 같은 발언 그 자체만으로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문제가 될 소지는 충분히 있다. 게다가 이 언급이 그 당시 기독교계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단군상 문제대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처사로 비춰졌을 경우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언급이 해당 발언 그 자체 외의 특수한 상황적 요인으로 인해 오해의 여지가 많은 문제일 경우, 그런 언급을 하게 된 동기나 그 전제에 대한 확인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런 언급을 하게 된 진의가 너무 쉽게 왜곡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단군이 “우리의 선조”라는 언급은 한 나라의 긴 역사와 관련된 표현이므로, 우리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이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비록 좌절되긴 했어도, 과거에 정부 차원에서 단군상(혹은 단군신전)을 건립하여 국론을 통일해 보려는 시도가 몇 차례(1966, 1970, 1985년 등) 있었다. 그런데 1999년에는 한 민간단체(한문화운동연합-현재는 홍익문화운동연합) 주도로, 전국 초중고교와 공공장소에 ‘통일기원국조단군상’369기를 건립하여 많은 사회적인 논란을 야기하였다. 하지만 그 민간단체의 단군상 건립 명분이 아무리 근사해도, 그 단체 지도자(명예총재)의 행적 하나만 놓고 본다고 해도, 그 건립 의도는 순수해 보이지 않으며, 그 건립에 종교사업적인 관심도 없지 않아 보인다(위키백과 ‘단월드’ 검색 참조).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단군신화를 통한 정치적, 또는 종교사업적 이용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단군신화를 이처럼 이용하는 입장만 아니라―비록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결과적으로―그것을 역이용하는 세력도 있는 것 같다. 그 사례를 우리는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주류 뉴라이트 계열의 단체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고. 2007b:524-573). 여기서 주류 뉴라이트가 단군신화를 역이용하는 입장이라는 것은 그들이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사관(史觀)을 따르면서(이만열, 2001:323-324), 민족의 존재가치는 부정하고 재물의 가치는 거의 절대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입장을 보이는 까닭이다(김기협, 2008:71-82). 류대영(2009:402, 410)도 한국의 뉴라이트가 뜻하는 자유주의는 그것이 경제적인 차원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윤리가 결여된 특징이 있다고 본다. 역사학자 김기협(2008:208, 222)은 “뉴라이트의 모든 가치는 재물에 걸려 있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우리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을 숙고해 보면, 눈에 보이는 단군상만 우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지상주의적인 이념도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마4:3-4, 골3:5, 엡5:5). 이것은―번영 이데올로기의 아류로 보이는―뉴라이트의 경우처럼 ‘민족’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입장을 통해서도 눈에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우상숭배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드 그루시(2008:142)는 개혁전통에 내재한 위험 요소들 가운데 하나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폐기하는 것 자체를 우상숭배가 극복된 것으로 간주하려는 환상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이만열 교수는 단군의 신격화와 역사화는 구분될 필요가 있음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설하고 있다(이만열, 2001:341-343). 김영재 교수는 한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군이 설화 속의 인물이든 역사적인 인물이든 상관없이 단군을 신격화하여 신앙과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일에 반대한다”(김영재, 2008:467)라고 천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만 역사학자들과 함께 단군 신화를 우리 한민족의 개국 설화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이런 유의 설화는 다른 민족 국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임에 유의한다”(김영재, 2008:466)라며 단군의 역사성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교수께서 그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입장에서 단군을 “우리의 선조”라고 언급한 것을 전적으로 신앙적인 표현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언급이 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민족의 정체성이나 그 자주성을 합당하게 천명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표현은 아닌지 더욱 유의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강사로서의 역량에 관한 손봉호 교수의 평을 덧붙이자면, “이 교수의 강연은 항상 알맹이가 있고 매우 진지하며 설득력이 있어서 우리나라의 최고급 강사라 할 수 있다”(이만열, 2007a:347).
* 참고 자료
김기협. 2008. 『뉴라이트 비판』. 파주: 돌베개.
김성수. 2005.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in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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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inyouwithyou.blog.me/10103168440
: "예언자적 역사가 이만열 교수를 만나다" - 244호 그 사람의 서재9, 201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