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박윤선의 56-61년, 어학과 학문의 문제점, 시험, 갈등

일반자료      
쓰기 일반 자료 초기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인물] 박윤선의 56-61년, 어학과 학문의 문제점, 시험, 갈등




이 교수 : 박윤선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겠습니다. 가까이에서 보신 박윤선 교장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허 교수 : 제가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 많이 배우고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진정한 신학자입니다. 또 경건한 분이시고 신학과 영력을 겸비하신 흔치 않으신 분이지요. 그 분은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 분은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는 교단 직영신학교가 아니고 일종의 사설 신학교인데 월급을 제때 준 일이 없습니다. 돈이 들어오면 봉급을 드리는 정도였습니다만 이런 점에 불만을 표한 일이 없습니다. 당시로 볼 때 박 교장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화란어도 자습으로 익혀 화란신학을 소개했습니다.



이 교수 : 이런 분이 고신을 떠나게 된 일은 안타까운 일이지요?

허 교수 : 그렇지요. 박윤선 목사님이 1953년에 하란으로 유학을 떠나셨으나 사모님의 급서로 귀국하게 되는데,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받은 제목이 ‘신약과 이교사상’(New Testament and Paganism)이었는데, 이 논문을 쓰기위해 1957년과 58년을 투자했어요. 논문 건으로 박 목사님이 화란으로 가기 전에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가서 좀 더 정리하려는 생각으로 1959년 12월 27일 미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1960년 초에 갑자기 귀국했어요. 미국에서 논문 프로포잘을 보냈는데 화란 자유대학교가 적절치 못하다고 거부한 것입니다. 박윤선 교장이 이해한 페이거니즘이라는 것은 동양사상이었는데, 지도교수는 그렇게 이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도교수는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의 이교주의였습니다. 페이거니즘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박 목사님은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때 박 목사님도 약간의 시험이 들지 않았나 생각해요. 귀국하신 박윤선 목사님이 경건회 설교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강단에 담배연기가 자욱합니다”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점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놀랐습니다. 저는 시험이 들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도 인간이니까 박사논문 건이 잘 안 돼 부정적인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해에 주일성수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이 때 박 목사님은 주일성수와 관련된 글 많이 썼는데, 결국 교장직에서 해임 당했지요. 뒤돌아보면 이사회가 좀 심했다고 봅니다. 어쨌든 그 분이 고신을 떠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교수 : 저는 박윤선 목사님이 고신에서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으셨는데, 고신을 떠난 것은 안타가운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박윤선 목사님이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합동신학교로 옮겨가시면서 한국에 개혁신학을 확산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고신에서만 활동했다면 개혁신학의 폭은 현재만큼 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님이 고신 떠나게 되는 주일성수 문제와 관련해 한상동 목사의 책임이 없었나요?

허 교수 : 책임이 없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1956년은 고려신학교 설립 1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 때 박 교장이 교회당 쟁탈전 문제, 신학교 이사회 문제 등 현안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고신의 첫 10년은 화평했는데, 그 후에는 좀 어려운 일이 있었지요. 당시 박손혁, 한상동 등은 교수이면서 이사였으나 박윤선은 학교 일만 하는 교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좀 불편해 했고 이런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고려신학교 10주년 후 경기노회 떨어져 나갔고, 1957년에는 박윤선 교장이 고려신학교 나와서 서울서 개혁신학교를 열지 않습니까? 이상근 교수도 따라 나가고, 박윤선 없는 고려신학교는 공허하니까 이사회가 찾아가 다시 모셔 오게 됩니다만, 주일성수 문제가 제기됐을 때 이사회는 박윤선이 좀 심하다 여겨 그의 기(氣)를 한번 꺾으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