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3. 박형룡 - 조직신학의 사람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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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박형룡박사는 1977년 80고령에도 집필을 계속, 그의 저서로는 교의신학 7권, 신학난제선편 2권, 비교종교학, 변증학험증학 각1권, 신학논문집 2권, 설교집 5권, 회고록 1권, 성경주석 7권 등.
그는 젊은 나이에 평양신학교 교수를 하였으며 만주신학교, 동북신학교, 부산고려신학교, 성울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칼빈주의 신학을 가르침. 그의 문하생은 3천명이 넘고 현재 신학교 교수 또는 목회자로 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에 있다고 교계가 평가.
박형룡박사는 1887년 음력 3월 28일, 평북 벽동군 운서면 운하동에서 출생, 자라면서 교회에 출석하였고 당시 그가 출석하던 교회는 "예수 천당"으로 유명한 최봉석(권능)목사가 전도사로 시무, 박형룡박사는 어려서부터 신앙이 뜨거운 최봉석전도사의 영향을 받아 뜨거운 가슴으로 믿음을 굳혔감.
1913년 4월,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에 입학 신학학문을 배우면서 방학이 되어 집으로 내려오면 최봉석 전도사와함께 노방전도에 열심. 1915년 2월, 선천북교회에서 양정백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문답시 "앞으로 박군은 어떤 사람이 되기 원하는가"라고 물을 때 "목사가 되겠습니다."고 대답. 그 문답대로 목사가 되었고 목사로서 신학자가 되어 개혁주의 신앙의 목사가 되어 수천 명의 목사를 기르는 목사가 됨.
1916년 3월,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성적이 뛰어나 서열도선교사의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졸업. 졸업후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을 다니며 전도에 힘을 기울였고 목포에서 일경에게 연행되어 유치장, 2개월 미결수로 복역한 후 8개월 형을 받아 전체 10개월 옥고, 그동안 그는 감옥에서 명상과 기도로 신앙심을 더욱 견고히 하여 복음을 위해 자신을 던질 것을 다짐.
1921년 8월, 중국 남경에 있는 곰능대학에 편입 1923년 7월 문학박사. 그해 9월 미국 프린스톤신학교 입학, 메이천박사의 지도르 ㄹ받고 1926년 5월 신학석사. 그해 9월 켄터키주 침례교 신학대학원 입학 1927년 5월 수료후 귀국.
8월에 신의주제일교회 전도사로 목회, 1928년 1월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부임, 1929년 5월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 1930년 8월까지 산정현교회 동사 목사로 시무 1930년 9월 시무를 사임하고 평양신학교교수로 초빙. 1933년 1월 최종수업을 받았던 미국 켄터키주 침례교 신학대학원에 제출한 논문이 통과되며 철학박사학위. 1934년 6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성경주석 집필 위원장으로 취임, 주석사업에 몰두하였고 신학강의 계속. 1941년 신사참배 검속으로 만주봉천으로 건너가 봉천신학원교수직을 수행하다 해방.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게 동북신학교로 옮겨 교장직을 맡았고 귀국하려 하였으나 38선으로 나뉜 남북 어디로 갈 수 없는 형편에서 부산의 고려신학교가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박윤선으로 개교되었고 박형룡목사를 청빙키로 하여 사람을 보내게 됨. 1차 남영환전도사가 출발하였으나 콜레라 때문에 실패하고 2차송상석목사가 만주로 출발 1947년 5월 영구행 밀선에 편승 험한 파도를 넘어 만주에서 박형룡박사와 그 가족들을 데리고 9월 인천 도착.
1947년 10월 14일, 박형룡박사는 부산중앙교회당에서 고려신학교장 취임. 그러나 서울에서 더 큰 신학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상경 1948년 6월 서울장로회 신학교를 개교 교장에 취임. 이 일로 고려신학교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한상동목사는 입원. 1977년 박형룡박사는 그랬을 것이라고 기억하고 인정하는 정도. 서울 남산에서 시작한 장로회신학교는 부지를 크게 확보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고 그 무렵, 숭의여학교 부지확보를 위해 공을 세웠다는 박호근이 자신을 소개하며 접근. 박형룡박사는 세상일에 밝지 못하여 박호근을 믿고 땅을 매도한다며 나선 그와 계약.
이사회 허락없이 3016만 2172환의 돈을 지불하였고 완전히 사기를 당하게 됨. 이 문제로 이사회가 소집되어 전원 사임, 박박사도 교장직을 사임. 1951년 9월, 장로회 신학교 평교수로만 강의하였고 1953년 9월 다시 교장직에 복귀, 1954년 10월, 신학교육 공로가 총회에서 인정되어 세계 신학계를 시찰하는 세계일주. 1972년 3월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어 강의와 집필을 전념하였고, 1975년 10월 합동측 노회에서 공로목사로 추대.
집필 의욕으로 미완성으로 있던 강의안을 출간하였고 1978년 합동측 총회가 분열의 위기로 복잡할 때 10월 25일 봉천동자택에서 향년 82세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