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최성순 - 여전도사, 해방전후 좌익학생, 성남교회(이인재) 삼문동(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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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최성순 - 여전도사, 해방전후 좌익학생, 성남교회(이인재) 삼문동(이명재)




■ 기 / 획 / 특 / 집 - 역사의 현장 속으로 원로와의 대화 (18) / 최성순 전도사와의 대화
“우리 삶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니 순종하고 따라갈 뿐이지요”
2013.02.26 15:14 입력
1997년 이래 오늘까지 16년째 경남 창녕 여전도회관 관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최성순 전도사는 우리 교(단)회를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로 활동해 왔다. 일생동안 오직 한길 복음전도자로 살아오신 최성순 관장은 대구남성교회를 시작으로 밀양삼문교회, 대구성남교회, 밀양금곡교회를 거쳐 서울영동교회, 서울 한영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등 1955년 이래 58년 간 여전도사로 활동해 왔다.



특히 김경래 장로와 손봉호 교수가 1977년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할 때 교역자로 동참해 12년간 봉사했고, 1990년 영동교회에서 한영교회가 분리 개척될 때 다시 한영교회로 파송돼 교회 개척과 설립과정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최성순 전도사는 1950년 전후 시작된 여성 지도자들에 의한 복음전도운동, 곧 회개운동과 성령운동에 동참하거나 영향을 받고, 박인순 박복달 우태숙 명향식 표지현 조수옥 전도사들이 남긴 신앙유산과 정신적 가치들을 유지 계승하며 고신교회의 신앙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997년 여전도회관 관장으로 부름 받은 이후 여전도회의 각종 행사와 집회를 주관하거나 후원하고, 은퇴 여교역자들의 안식처인 안나의 집을 관장하는 등 은퇴를 모르는 삶을 살고 계신다. 지난 2월 15일 고신역사기념관의 김흥식 연구원과 함께 경남 창녕군 장마면 장가리 846번지의 전국여전도회관으로 찾아가 최성순 관장을 만나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들었다.

■ 이상규 부총장 /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 : 관장님. 분주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귀한 일을 하고 계시는 데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최성순 관장 : 아닙니다. 제가 전화를 받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이런 자리에 나가기가 송구하여 사양했는데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일전에도 전화를 드려서 안 오시면 좋겠다고 말했었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사님은 우리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오셨고, 인품이나 신앙인격이나 능력이나 교회 봉사, 모든 면에서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전도사님을 뵐 때 마다 특별하게 대화한 일은 없으나 뭔가 머리 숙여지는 그 무엇이 있어서 한번 뵙고 싶었고, 전도사님이 살아오신 신앙여정에 대해 듣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는데, 전도사님이 살아오신 이력을 통해 그 시대 한국교회와 우리 교단의 이야기도 듣고 우리가 본받고 반성할 것이 없는지 생각하고, 또 자성의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전도사님 뵙고 싶을 때, 영상을 보면 우리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전도사님은 경북 김천에서 최상룡(崔相龍), 이봉순(李鳳述) 씨의 5남매 중 막내로 출생하신 것으로 들었습니다만 우선 가족 배경을 말씀해 주십시오.



최 관장 : 그렇습니다. 제가 1929년생인데, 김천에서 출생했습니다. 제가 오남매 중 막내인데, 언니가 둘 오빠가 둘 있었지요. 아버지는 소작농이었습니다만 교육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습니다. 그날 공부한 것을 외우지 못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김천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간 공부했습니다. 그 때는 일본학생과 같이 공부했지요. 그 후에 김천고등여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는 4년 과정이었습니다. 학교는 그 전부터 있었지만 해방 후부터 기산하여 제가 2회로 졸업했습니다.



이 교수 : 김천여고에 다닐 때 사상 교육을 받은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해방 정국이 혼란했고 좌우익 대립이 심각할 때였는데, 김천지방에서도 그런 사상 교육을 시키는 이들이 있었던가 봅니다.



최 관장 : 그렇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 중에 좌익사상을 가진 분들이 많았는데, 머리 좋은 학생들을 모아서 사상교육을 시켰어요. 당시 선생님은 절대적 위치인데 비교적 우수한 학생을 선별하여 장소도 이동해 다니면서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8명을 비밀히 교육을 시켰는데 저도 그 중 하나였어요. 저 의사와 상관없이 그런 교육을 받게 되었지요. 감수성이 풍부할 때인데 백지 같은 우리들에게 그런 교육을 시키니 점점 그 사상에 빠져 들었고, 붉은 사상 깃발 아래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생길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동내에 삐라를 돌리기도 했는데, 그때는 그것이 민족을 위하는 길인 것으로 알았었지요.



이 교수 : 요즘 용어로 말하면 의식화 교육을 받은 샘이군요.



최 관장 :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때는 신앙이 없을 때였으니 잘 몰랐지요. 당시 학생들이 100여명 정도로 기억되는데, 학생 자치회를 구성할 때도 사전에 모의하여 사상교육을 받은 8명이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47년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에 좌익학생 리스트에 올라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에 김천 시내는 아닙니다만 봉계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일 년간 일한 일이 있습니다. 이때도 같은 사상을 가진 친구와 자취를 하며 지냈는데, 배우자도 같은 사상을 가진 자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교사로 일하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결혼하자고 하여 처음에는 피하고 결혼 같은 것은 생각도 안했습니다만 계속 따라다니며 요구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꼭 1달 10일 만에 그가 잡혀가서 조사를 받던 중 사망했습니다. 그가 김천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학생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사주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죽은 것이지요.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갔습니다. 깨끗한 몸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렇게라도 해야 제가 돌아온다고 하여 그렇게 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지요.



이 교수 : 그 때는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였고, 또 해방 후 혼란한 정국에서 타의에 의해 그런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6.25 동란 중에는 사상 문제로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최 관장 : 6.25때는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으나 가입을 강요했지만 그 때는 가담하고 싶지 않아 거부했습니다. 그 때는 다리 뻗고 자지 못했습니다. 피하려는 의도로 시골의 큰집 쪽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지요. 김천 지역이 완전히 공산군 수중에 들어간 후에는 나를 찾아와 부녀동맹회장을 하면서 시키는 데로 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나는 못하겠다고 하니 총살시키겠다는 겁니다. 하늘에는 연일 폭격이 있었는데, 죽더라도 오라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갔는데, 폭탄이 떨어져 모임도 못하고 저는 그냥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저를 부녀동맹회 조직부장으로 이름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 일로 저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인민군이 들어와서도 나를 찾아내려고 했고, 후에 국군이 들어와서도 어머니에게 딸 찾아내라 하여 가족들도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제가 시골 친척집에 숨어살았는데, 그 때 갇혀 지내면서 하루는 주일학교 때 들었던 예수님 생각이 났습니다. 이것이 헛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교수 : 주일학교에 다닌 일이 있었군요.



최 관장 :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 오빠가 청빈생활을 하면서 금강산을 왕래하는 등 기도생활 하는 분이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찬송도 가르치고 했는데 이 일로자연스럽게 교회에 따라 나간 일이 있었어요. 그러나 김천여고 다니면서 신앙도 버리고 예수 믿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했는데, 숨어살고 있을 때, 예수님 생각이 난 겁니다. 이때 ‘하나님’하고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쏟아지는데, 정말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가 22살 혹은 23살 때였는데, 주님 버리고 살아온 것을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기도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겨 뒤뜰에 나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저는 ‘기도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 저는 대구로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당시는 여행허가증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없으면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대구로 갔는데, 그날은 기차가 역까지 가지 않고 달성공원 앞에서 차가 섰습니다. 사람들이 뛰어내렸는데 저도 거기서 내려 여행증 없이도 무사히 대구 시내로 갈 수 있었습니다. 기차가 평소처럼 달성공원 근처에 서지 않고 역까지 갔더라면 통행증이 없어 잡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구에서 주일날 교회 갔는데, 그 일로 우태숙 선생 집 근처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 다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우태숙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그의 신앙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교수 : 우태숙 선생과의 만남이 전도사님의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군요.



최 관장 : 그렇지요. 그 때 우 선생님이 저더러 단식기도하라 하여 3일간 금식 기도했는데, 처음에는 좌익사상에 영향 받았던 일 외에는 별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십계명을 보면서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게 되었지요. 아침 창살에 햇빛이 비취면 먼지가 다 드러나듯이 죄가 생각이 나 회개하게 되고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감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지요.



그 때 ‘비록 죄인이지만 이 몸을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고, 그 고백으로 오늘까지 전도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서문교회 근처의 차태화 선생 지도로 야간성경학교, 주간성경학교 다니면서, 또 우태숙 선생을 통해 신앙 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 우태숙 선생이나 박복달 선생님 같으신 분의 회개운동과 영적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비록 안수 받는 목사는 아니었지만 이들의 집회, 회개운동 등 여성 지도자들이 영성이 고신교회 초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 : 이런 과정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교회를 위해 일하게 되셨군요. 하나님께서 관장님의 삶을 섬세하게 인도해 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관장 : 그렇습니다. 우태숙 선생님과 함께 이인제 목사님이 담임하고 계신 성남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저더러 사명이 있다며 일하게 하셔서 성남교회가 개척한 남성교회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1955-56), 그 후에는 이인재 목사님의 동생 이명재 목사님이 계시던 밀양삼문동교회로 갔습니다. 그런데 한 달 후에 이 목사님이 사임하여 새벽기도를 비롯한 각종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당을 건축을 마무리하는 등 여러 일을 했습니다.



이 교수 : 그 후에 대구 성남교회로 가셨지요?



최 관장 : 성남교회서 3년 전부터 오라고 요구했으나 삼문도교회를 떠날 수 없어 그냥 지냈는데, 박정덕 목사님과 우태숙 선생이 와서 강요하다시피 하여 성남교회로 옮겨가게 되었지요. 성남교회에 있을 때 저에 대한 사상 감찰이 해제되었습니다. 그 동안 요주의 인물로 늘 감시를 받았는데, 좌익사상에도 등급이 있었어요. 저는 특종 보다는 아래인 ‘갑종’으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해제되어 더 이상 감시를 받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가진 후 그런 것 다 버렸으므로 내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떠났지만 공식적으로 해제되니 홀가분해졌습니다. 성남교회서 8년간 시무하고 한학수 목사님이 시무할 당시 교회 시련이 있었는데 그 때 교회를 사임하고 그동안 하지 못한 공부를 하기 위해 고려신학교에 와서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제30회롤 졸업했지요.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이자 하나님의 인도로 살아왔습니다.



이 교수 : 신학교를 졸업 한 후에는 서울 영동교회로 가셨지요? 영동교회 30년사를 보니 능력 있고 인품 좋으신 사역자를 모신다고 전도사님을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더군요. 그 때 벌써 교계의 신임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최 관장 : 부끄럽습니다.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대구에서 김주오 목사님과 박복달 전도사님을 만났는데 신학공부도 했으니 서울로 가라고 충고해 주어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갔는데, 그 교회가 영동교회였습니다. 김경래 장로님도 뵙고, 또 그 때 손봉호 교수님도 뵙게 되었지요.



손 교수님은 그 때 집사셨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집사님이 설교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분의 설교가 복음적이었고, 특히 말씀하시는 데로 실천하시는 것을 보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일마다 새신자들이 몰려와 교회가 건실하게 성장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 수요예배, 전체교인들을 돌보는 일 등을 담당했습니다. 노회는 빨리 담임목사님을 모시라고 했지만 한해 두해 미루다가 박은조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지요. 저는 영동교회에서 12년간 시무했습니다. 그 후에 영동교회가 한영교회를 개척할 때 다시 그 교회로 파송되어 7년간 일했습니다.



이 교수 : 그 후에 여전도회관 관장으로 오셨던가요?



최 관장 : 그렇지요. 조수옥 권사님이 저더러 와서 여전도회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인애원에서 손봉호 박사를 강사로 집회했을 때도 조 권사님께서 손 박사님께 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해요. 그래서 순종하기로 하고 1997년에 이곳으로 왔지요.



이 교수 : 관장님이 이곳에 오신 후 건물도 짓고 지금의 회관을 조성하게 되었지요?



최 관장 :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부임했을 때는 대지는 구입한 이후였는데, 회관도 세우고 식당도 건축하고 주변 환경도 정비하게 되었지요. 후원자도 있었고 도와주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이 교수 : 전도사님께서는 특히 우태숙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습니다만 당시 여성 지도자들의 활동이 어떠했다고 보십니까?



최 관장 : 우리 교단 여성지도자들이 대단한 활동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박인순 박복달 명향식 표지현 조수옥 권사님 등 귀한 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집회를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특히 우태숙 선생을 많이 따르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만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셨지요. 죄를 책망하시면 회개가 터져 나오고, 회개할 때 사람의 얼굴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바느질할 때 천조각 하나 가져간 것 까지 회개했으니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이런 정신이 우리 교단을 이어온 신앙정신이자 우리가 계승해야 할 신앙유산이라고 봅니다.



우태숙 선생님은 주부로 계시다가 전도자로 활동하셨는데 성경학교에서 공부한 일은 있으나 체계적으로 공부한 분은 아니지요. 그래서 그 분을 흠잡기 위해 왔던 사람도 결국은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뉘우치고 돌아갔으니 대단한 역사였습니다. 여성이라고 위 강단에 서지 못한다고 하여 아래 강단에서 설교했지만 장소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러 회개운동이 대구, 경북지방 고신운동의 중요한 특징이었고, 이것이 고신교단(회)의 신앙정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 : 관장님께서 우리 교단 신앙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재작년으로 기억합니다만 우리 교단 60주년을 앞두고 있으니 우리 교단(회) 여성 지도자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책을 편찬하면 좋겠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저 나름대로 여러 분들의 여정을 찾아보니 생물연대마져도 바르게 알려진 것이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앞으로 여성 지도자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국여전도회관 관장님으로 특히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최 관장 : 예, 이곳 시설은 이름 그대로 여전도회관으로 일생동인 전도사로 사셨던 분들을 모시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일하다보니 강당, 식당 등을 준비하고 수련장으로 발전하였고, 연 약 1만 명, 때로는 수천 명이 이곳을 다녀갑니다. 세태가 그렇긴 합니다만 요즘은 재미있고 많이 모이는 것을 중시합니다만, 저는 이곳에 오는 이들이 내적으로 변화되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변화를 주는 기관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 신학교육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론이나 인간 사상을 가르치기보다는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 본문에 친숙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경을 알아야 내 영혼도 살고 남의 영혼도 살게 합니다.



이 교수 : 오늘 이렇게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귀한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1929. 8. 5. 경북 김천에서 출생

?1947 경북 김천 고등여학교 졸업

?1956. 3. 대구고려고등성경학교 졸업

?1976. 2. 고려신학대학원 졸업(제30회)

?1989. 2. 아시아연합신학대학원 (문학석사과정) 졸업



?1948-50. 경북 김천 봉계초등학교 교사

?1955-56. 대구 남성교회 전도사

?1957-64. 밀양삼문교회 전도사

?1965-71. 대구성남교회 전도사

?1972-76. 밀양 금곡교회 전도사

?1977-89. 서울 영동교회 전도사

?1990-97. 서울 한영교회 전도사

?1997- 현재 창녕 전국여전도회 회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