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2. 오종덕 - 성경을 가르친 사람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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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덕(吳宗德)
고신교단에서는 가장 성경을 잘 알고 성경의 오묘를 바로 밝힌 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코 오종덕 목사라고 할 것. 오목사는 그렇게 성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 그렇게 그는 성경을 사랑하였고 성경과 관계 깊은 분.
그는 1891년 4월 14일,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송양리 521번지에서 오달전씨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 부친은 중농에 속하여 농토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머슴을 둔 농부. 집안이 부요했기 때문에 유년 시절 오종덕은 생활에 별 걱정없이 성장. 그의 나이 7세에 모친이 병환으로 별세. 이후 집안이 기울고 계속되는 가뭄과 흉작으로 농사도 가축도 잘 되지 않아 집안이 가난. 농토를 팔기를 시작.
1901년 8월 2일, 10t가 되면서 삼성소학교 입학. 1904년 4학년 중퇴. 이후 독학. 학식과 덕망이 높은 집을 찾아 이를 제의하여 세경 대신 글을 배우겠다고 전달. 이리하여 한문을 익히고 사서삼경을 수학. 1903년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받고 제일 먼저 부친과 형제 전도. 1905년 4월 25일, 방위량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믿음생활에 진력. 1908년 11월 5일, 순안군에 있는 세부측량학교에 입학. 기술을 배우게 됨. 1909년 1월 17일, 측량학과를 수료한후 5월 1일 측량학교 산술과에서 공부, 수료와 함께 평원군 공전면 신화동에 있는 화평소학교에교원으로 취직, 교사가 됨.
1912년 7월 20일, 교직을 그만두고 평양에 있는 공립보통학교 하기교원강습소를 통해 정식교사 자격증을 갖기 위함. 1914년에 공립보통학교 하기강습소 수료, 1912년 9월 2일 대동군 부산면 태양동 숭봉소학교에 교사로 아동들을 가르쳤고 1915년 1월 10일 교직 사면. 1915년 2월 1일 임시 토지 조사국 양성소에서 공부하고 6월 30일 수료, 7월 1일 토지조사국 서기로 2년간 활동하다 사면. 1917년 3월, 수원 군청 축산조합 서기, 9개월 만인 11월 26일 퇴직. 1918년 1월 일본 나가야에 있는 토기회사에 취직하였고 1921년 12월 한국에 나와서 1922년 9월 20일 김순덕과 결혼. 그때 오종덕은 32세 부인은 18세, 영수의 딸로 신앙심이 강한 처녀.
이때부터 오종덕은 신앙심이 더욱 깊어져 일본에서 돈을 상당히 모아와서 대구에 자리를 잡고 고물상으로 사업을 하여 상당히 기반이 든든해 가던 중 동업하던 친구가 재산을 모두 가지고 없어짐. 갑자기 빈털터리가 된 오종덕은 너무 크게 실망한 나머지 달성공원에 올라가 죽으려 하였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 내려오고 다시 빈손으로 시작, 고물상을 밑바닥에서부터 시작 11개월 반에 회복되고 정미소를 하게 됨. 이때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아 언제까지나 재물을 얻었다가 잃고 다시 얻었다가 이렇게 되풀이 되는 인생을 살다가 끝날 것인가를 생각하여 모든 것을 정리. 뜻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세상일을 그만 두고 복음전도에 나서기 원함
1928년 3월 14일, 제22회 평양신학교 졸업 그해 6월 7일에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6월 10일 현중교회에 위임목사로 부임, 2년 만에 사임, 대구중앙교회 위임목사로 부임, 그때 1930년 6월 22일의 일. 1937년 10월 30일, 대구 중앙교회를 사면, 이유는 신사참배 문제의 심각한 유혹. 차라리 도시교회를 떠나 시골로 가면 신사참배 거절이 쉽겠다고 생각, 1937년 11월 2일, 철산군 백양면 풍천교회로 갔고 농촌이라 하여 신사참배를 면할 처지가 못되었으며 1938년 9월, 총회를 앞두고 심한 압력을 받게 됨. 8월 10일, 오종덕목사는 비장한 결정을 내려 교회를 사면하고 산에서 기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서서 직접 대항하며 투쟁하다가 순교를 당하느냐, 아니면 알지 못하는 지역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성경연구를 하면서 때를 기다릴 것이냐 하는 문제로 기도.
결론이 내려져, 직접 반대를 하면서 투쟁하는 것보다 피하여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성경연구를 하여 때가 오면 후학들을 가르치기로 작정, 1938년 8월 교회를 사면, 평양 근교에 있는 농촌으로 들어가서 땅을 마련하고 농사일을 시작, 소년 시절 농사하던 일을 살려 농사일에 종사하면서 성경을 밤낮 연구, 7년의 세월을 보내고 그가 성경에 능하다는 소문이 교회들에게 전하여졌고 젊은 전도자들이 찾아오기도 하였으며 오목사는 찾아오는 그들에게 성경을 열심히 가르침.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게 곳곳에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교회 재건 운동이 활발. 오목사는 11월 1일 대구로 내려와 침산교회를 맡았고 1년간 시무하며 성경강해에 주력, 일제 수난시 농촌에서 성경연구에 몰두한 것이 이때를 위함인 줄 알고 성경학교 세울 것을 다짐. 1946년 1월 대구고려고등성경학교를 설립, 교장에 임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찾아왔으며 성경학교는 잘 되었고 전국적인 규모로 확장. 부산에서 출옥 성도 주남선 한상동 목사 등이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하고 내려오라는 전갈이 오고 1948년 7월 30일 대구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직을 사면하고 부산으로 내려오고 고려신학교 강사로 도우면서 부산에서 고려고등성경학교를 설립키로 하고 준비, 마두원선교사가 부민동에 땅을 마련해 주어 콘센트교사를 세우고 성경학교 개교.
1948년 11월 27일, 부산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직을 맡았고 성경학교는 대단한 규모로 발전하여 일반 중고등학교 과목까지 가르치기에 이르럼. 1951년 9월, 대구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 1953년 9월 30일 사면. 1961년 4월 18일, 대구 태성로교회를 임시로 시무, 다음 해 4월에 사임. 1968년 3월 20일, 서울 고려신학교 전임강사로 들어가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고 1969년 4월 12일 서울 고려신학교 교장이 되었고, 그해 경북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서울에 머물면서 수정교회를 설립. 오직 성경뿐. 부산에 있던 부동산을 다 처분하여 고신교단에 헌금하고 그는 많은 교회를 개척하며 어려운 교회들을 보조.
그는 자신이나 가족인 가정을 위해서는 별로 돈을 쓰지 않았으며 가정살림은 김순덕 사모가 장사로 마련하였고 선교사들의 지원으로 자녀들은 공부, 그가 받은 사례금은 개척교회 세우는 일과 보조하는 일에 다 들어갔고 그는 강의용으로 신구약성경이 모두 교안으로 작성. 그의 신구약 교안은 전 35권. 1932년 1월 30일에 "선지자와 메시야 교리"란 저서를 비롯하여 1959년 10월 8일, "계시록" 교안이 나오기까지 35권의 교안이 전해짐.
1979년 1월 7일 세상을 떠났고 마지막까지 쇠약한 몸으로 누워서 마이크를 쥐고 설교를 소리로만 내보내기까지 하였으며 "내가 죽거든 비석에 "이 사람, 오종덕은 성경을 가장 사랑하고 경제를 좋아한 사람이다"라고 써 달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