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내수동교회 박희천, 옥한음, 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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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내수동교회 박희천, 옥한음, 오정현


[목자의 고향] 오정현 목사와 서울 내수동교회

2011.11.23 21:11




“역사의 중심은 교회… 섬김의 길을 인도한 곳이 본향”

“나의 사랑하는 책 지금 해어졌으나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내 어린 시절은 찬송가 그대로였다. 내게는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성경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시던 성경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손자 사랑의 으뜸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계셨던 것 같다.

내가 서너 살 되던 때부터 무릎 위에 나를 앉혀 놓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리고 늘 성경을 덮으시며 나에게 해주시던 말씀은 목회자의 길로 예비하신 하나님과 나만의 묵계가 되지 않았나 싶다.

“현이는 모세같이 되거라. 모세같이….”

가난했지만 기쁨이 있던 시절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의성.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다니던 교회는 의성 삼분교회였다. 그 당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웠던 어머니 같은 교회로 큰 교회는 아니었지만 시골 교회에서 부친 세대에 20여명의 목사가 동시에 나왔으니 대단한 영풍이 불었던 곳이다. 그곳에서 증조할머니께서 처음 예수를 믿고 할아버지께서 그 신앙을 이으셨다.

할아버지가 가졌던 믿음의 행보를 좇아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 가족은 가야제일교회를 개척하게 된 아버지(오상진 목사)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 나이 일곱, 교회는 부산의 변두리 가야동 난민촌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교회 바로 아래에는 암자가 있었는데 나와 동생들이 지나갈 때면 누군가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큰 아이들이 위협하면서 때리기도 했다. 단지 예수쟁이가 지나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당시 목회자 가정이 다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가족 역시 배를 곯아야 했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며 자라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철없는 나에게 일상에서 우선은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런 배움 때문인지 예배의 경건이 몸에 배게 되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개척교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무릎이 시려오곤 했지만 학교에 갈 때도 교회에 들러 기도를 하고 등굣길에 나섰다. 동생(오정호 목사 새로남교회)과 함께 성경 퀴즈대회에 나가 수상을 놓친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내 나이보다 많은 횟수만큼 성경을 읽었던 것이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등사기에 잉크를 묻혀 밤을 새워가며 교회주보를 만들었고 열여섯 살 때에는 난생 처음으로 주일학교 학생들 앞에서 설교까지 감당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가난한 달동네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경험해야 했던 십대의 시간들이었다. 민감하고 자존심 하나로 똘똘 뭉쳐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어려운 환경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낙심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의 값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은혜와 희생을 통해서 교회가 어떤 능력을 갖게 되는지 직접 목도하는 현장이 되었기에 나는 가난했지만 기쁨이 있던 시절 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1973년 입시를 위해 단신으로 부산을 떠나 서울의 학원에서 시작한 수험생활. 사직동에 얻은 하숙방은 얼마나 작던지 아침에 일어나면 문 밖으로 발이 나가 있곤 했다. 내 몸 하나 편히 뉠 곳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교회를 정하고 가장 먼저 새벽기도회부터 나갔던 곳이 내수동교회였다.

입시생이 새벽 기도에 나온다고 칭찬해 주셨던 첫 만남 이후 신앙의 야성을 키워주고 진실된 목회자상을 심어주신 박희천 목사님. 하루에 성경본문만 4시간 이상 통독하시며 성경을 거의 다 외우는 말씀의 부자. 하루에 7시간씩 공부하시는 집중력으로 매사에 진중함을 갖고 사람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하셨던 분. 나는 그토록 귀한 교회와 목회자를 만난 것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신학생이 아닌 나에게 대학부를 맡기셨던 것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맡게 된 대학부에서 고 옥한흠 목사님을 초청 강사로 처음 뵈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옥한흠 목사님을 나를 이끌어준 신앙의 멘토로 섬기게 되었다.

78년 옥한흠 목사님이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나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서 수양회 강사로 목사님을 모셨다. 귀국하자마자 내수동교회 대학부 여름수양회에 오신 목사님은 46명의 청년 대학생들을 향해 집회 기간 내내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셨다. ‘생명과 교제 기쁨’이라는 제목 앞에 우리 모두는 눈물로 회개하고 은혜 받고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대성통곡의 현장이었다. 그 집회는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다. 집회에 참석했던 46명 대부분이 헌신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지었던 죄를 다 고백하고 전도하러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전도하러 나가는 성령의 역사도 일어났다.

복음의 꿈 복음의 능력

여름수양회를 마친 후 두 달여의 시간이 흐른 9월 25일.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이 전국에 걸쳐 10만 명도 안 됐는데 46명의 형제자매들이 500명의 태신자를 전도집회에 데리고 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내 마음속에 ‘캠퍼스 사역만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내 일생을 바쳐야 되겠다’는 결심을 갖게 하였다. 이 결심을 옥 목사님께 말씀 드렸고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고 한 생애를 캠퍼스 사역에 바친다는 것은 무리다. 현실감이 없다”는 대답 후 나는 기도 끝에 뒤늦은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76년 대학부 형제들과 예수원 대천덕 원장님과의 만남은 또 다른 큰 도전이 되었다. 그 외진 곳에서 박하기로 소문난 음식만 먹고 살면서도 조국과 굶주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품고 기도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게 되고 성령 사역에 눈을 뜨고 난 후부터 영혼구원에 늘 절박한 심정이 들었고 복음전도에 관한 한 가슴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82년 미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8년여 동안 주일 새벽마다 병원전도에 매달린 것은 그 때의 열정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캠퍼스를 돌며 전도를 하고 ‘복음은 살아 있어 반드시 역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전도에 미쳤던 지난 시간. 지나간 과거의 피해의식에도 눌리지 말고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말고 다만 오늘 맞닥뜨린 삶의 환경을 극복하겠다는 정신으로 무장하게 해준 지난 현장은 복음의 꿈을 영글게 한 거룩한 고향이다.

세속 역사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역사의 중심은 교회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지난 시간. 마라토너의 긴 호흡과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오늘 내게 닥친 어려움이 어떻게 선한 결과를 가져올지 하나님의 반전 역사를 기대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지난 현장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케 한 영적인 고향이다.

나는 지난주 참으로 오랜만에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함께 지냈던 강남교회 송태근 목사, 부산부전교회 박성규 목사, 내수동교회 박지웅 목사와 내수동교회를 찾아 귀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이제는 각자 사역지에서 한국교회를 섬기는 중견 목회자가 된 우리는 청년 시절 순수한 복음을 만났던 고향 같은 이곳에서 지난날의 사명을 힘차게 외쳤다.

“우리는 땅끝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오직 한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1956 경북 의성 출생. 1970년대 대학 청년들의 영적 부흥을 주도했던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이끌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라대학교와 탈봇 신학대학원(M.Div), 미시간 칼빈 신학대학원(Th.M), 포체프스트룸대학교 신학부(Ph.D),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Resident Fellow)했다. 미국 남가주 사랑의교회를 섬기다가 돌아와 현재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저서로 ‘잠들지 않는 사역자’ ‘통찰과 예견’, ‘열정의 비전메이커’, ‘목회트렌드2000’,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라’, ‘새천년 사역의 패스파인더’, ‘사람을 세우는 설교’ 등이 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