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창인 목사님 소천
굳건한 신앙절개·한때 4만명 출석교회 일궈… 목양일념 故 김창인 목사의 삶·신앙
2012.10.02 20:57
김창인 목사는 1917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매일 새벽 새벽제단을 쌓았던 어머니(김택신)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으며, 보통학교 시절 신약성경을 14회 통독할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의주읍 북화동교회와 상단교회를 담임하던 이기선 목사로부터 ‘세상의 부귀를 분토처럼 여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영육간의 부자를 만들어 주신다(世上富貴 如糞土 上帝能力 自然富)’는 글귀를 받고 굳건한 신앙절개를 배웠다. 김 목사는 중학교 시절부터 성경실력을 인정받아 교역자가 없는 시골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곤 했다. 또 음악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노래경연대회를 휩쓸기도 했다.
1936년 의주군 청천교회에 전도인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37년 해천교회의 전도사로 정식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북지방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한 이기선 목사와 함께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 이북 재건교회 운동에 참여했으며, 46년 황해도 황주에서 재건교회를 설립해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48년 공산당의 치하에서 신앙자유를 지키기 위해 서울로 내려와 장충동에 재건교회를 설립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52년 부산 동일교회 성도들이 서울에서 모였고 김창인 전도사가 53년 10월 이 교회를 맡게 된다. 당시 통일교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는데 교회 명과 비슷하다고 해서 56년 충현교회로 개명했다.
김 목사는 57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했으며, 교회는 60년대 초까지 장년수가 750명이 넘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김 목사는 63년 장년성도 1750여명일 때 예장 합동 교단에 가입했으며, 교회설립 10주년을 맞아 ‘천국일꾼을 키우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를 교회의 영구적 표어로 제안했다.
영감 있는 강단과 탄탄한 구역조직으로 충현교회는 급성장했으며, 60년대 말 등록교인이 4000명에 이르렀다. 70년 현재의 서울 역삼동 대지 9000평을 매입했다. 김 목사는 ‘천국일꾼 양성’이라는 목회철학에 따라 70년대 이미 유치부 초등부 새신자부 대학부 산업전도교육부 등으로 세분화할 정도로 교육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충현교회는 당시 교단 내에서 급성장하는 교회로 주목을 받았다. 김 목사는 충현교회 설립 17년 만인 70년 총회장에 선출됐다. 77년 북한선교회를 설립하고 북한 동포 복음화, 대공 지하선교 활동, 귀순용사 선교 등에 나섰다.
84년 강남으로 교회를 이전할 때는 장년 예배 출석인원이 1만명이 넘기도 했다. 교계에선 ‘예장 통합에 영락교회가 있다면 예장 합동엔 충현교회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대형교회로 성장했으며, 한 때 출석교인이 4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출석하는 교회로 널리 알려졌다.
87년 새성전 입당예배를 드렸으며, 이 때 원로목사에 추대되면서 퇴직금과 사택 등 재산 일체를 교회에 헌납해 많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됐다. 그러나 후임 목회자였던 이종윤 신성종 목사가 각각 3년여 만에 중도 하차해 논란을 빚었다. 후임자 내정에 아들을 내세움으로 담임목회 대물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지난 6월엔 “목회 경험이 없고 목사 기본 자질이 돼 있지 않은 아들을 무리하게 지원해 목사로 세운 것은 나의 일생일대 최대의 실수”라면서 공개적으로 세습을 회개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 목사의 강점은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에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되는 일에는 어떠한 반대에도 진행했다. 매일 40∼50장의 성경을 통독하고 세상 명예 및 물질의 욕망을 경계하며 본을 보였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설교로도 정평이 나 있다.
정일웅 총신대 총장은 “김창인 목사님은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기도로 큰 교회를 일군 장로교회의 원로”라고 평가했다.
故 충현교회 김창인 원로목사 아산병원에 빈소 마련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장으로 장례 진행
2012-10-02 19:14 | CBS TV 보도부 조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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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준 것을 후회한다"고 공개적인 회개를 했던 충현교회 김창인 원로목사가 2일 새벽 노환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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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엔 골라 보자!" 한가위 풍성한 공연 상차림뮤지컬 "맨오브라만차" 연장 공연, 류정한 합류1953년 충현교회를 설립해 3만여명이 출석하는 강남의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김창인 원로목사가 95세를 일기로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소천 했다.
故 김창인 목사 아내인 박명식(91세) 사모는 고인이 임종을 맞기 전 날 "예수님이 저기 보여요. 천국이 보여요"라고 말하고 아주 온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故 김창인 목사는 1938년 신사참배 반대성명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해방 후에는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핍박을 받기도 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고인은 북한선교회를 설립했고 대한성서공회 이사장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장 등을 지내며 교회 연합 사업에도 힘썼다.
그리고 1986년과 1988년 세계복음화대성회 총재를 지내며 교회 부흥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은퇴 후 아들 김성관 목사에게 무리하게 교회를 물려주는 실수를 저질렀고, 임종 4개월 전 이를 공식적으로 회개하고 눈을 감았다.
고인은 지난 6월 12일 경기도 이천의 한 교회에서 열린 원로목회자 위로 예배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질이 없는 아들을 목회자로 세우는 무리수를 둬 하나님과 교인들에게 상처를 줬다"고 고백했다.
충현교회의 세습은 고인에게 큰 멍에였다.
고인은 미국에서 살던 아들을 뒤늦게 신학공부를 시켜 1997년 충현교회 담임목사로 세웠지만, 부자지간은 끊임없는 갈등에 휘말렸고 세습을 회개한다는 기자회견 뒤에는 관계가 더욱 악화됐다.
원로목사의 소천 소식을 전해들은 교회측은 이를 성도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장례와 관련된 의사도 표명하지 않았다.
결국 장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장례예배는 오는 6일 빈소가 마련된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드려지며 의정부 동두천 "부활의동산"에서 안식에 들어간다.
김창인 목사, 최대실수 세습 사과하고 떠나다.
코닷
▲ 故 김창인 원로목사
지난 6월 “목회 경험이 없고 기본 자질이 되어있지 않은 아들을 무리하게 담임목사로 세운 것은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참회하여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충현교회 김창인 원로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1916년 생으로 올해 96세로 눈을 감은 故 김창인 목사는 고려신학교 제11회(1957)를 졸업한 고신인이었지만 합동 후 잔류하여 계속 합동에 머물면서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대형교회 중의 하나인 서울 역삼동 충현교회를 설립 성장 시켜 은퇴하고 원로가 되었다.
평북 의주 출신으로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른 김창인 목사는 1948년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하여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한상동 목사를 만나 고려신학교를 졸업했다.
1953년 서울 충무로에서 충현교회를 개척 역삼동으로 이전하여 김영삼 장로를 장립하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김목사는 구수한 찬양과 독특한 설교로 합동과 고신을 넘나들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장애인 선교단체인 밀알선교단 설립에 일조하면서 장애인 선교와 복지에도 큰 힘을 보탰다.
1987년 만 70세 정년은퇴를 하면서 아들 김성관 목사를 후임으로 세우면서 세습 1호가 되었고 이 일로 교계와 사회에서 비난거리가 되었다.
故 김창인 목사의 별세 소식은 아직 교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3일(수) 저녁에나 공식적으로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장례식을 교회장으로 할지 총회장으로 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발인은 10월 6일 예정이고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예식장 25호실이다.
2012년 10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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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한 신앙절개·한때 4만명 출석교회 일궈… 목양일념 故 김창인 목사의 삶·신앙
김창인 목사는 1917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매일 새벽 새벽제단을 쌓았던 어머니(김택신)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으며, 보통학교 시절 신약성경을 14회 통독할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의주읍 북화동교회와 상단교회를 담임하던 이기선 목사로부터 ‘세상의 부귀를 분토처럼 여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영육간의 부자를 만들어 주신다(世上富貴 如糞土 上帝能力 自然富)’는 글귀를 받고 굳건한 신앙절개를 배웠다. 김 목사는 중학교 시절부터 성경실력을 인정받아 교역자가 없는 시골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곤 했다. 또 음악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노래경연대회를 휩쓸기도 했다.
1936년 의주군 청천교회에 전도인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37년 해천교회의 전도사로 정식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북지방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한 이기선 목사와 함께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 이북 재건교회 운동에 참여했으며, 46년 황해도 황주에서 재건교회를 설립해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48년 공산당의 치하에서 신앙자유를 지키기 위해 서울로 내려와 장충동에 재건교회를 설립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52년 부산 동일교회 성도들이 서울에서 모였고 김창인 전도사가 53년 10월 이 교회를 맡게 된다. 당시 통일교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는데 교회 명과 비슷하다고 해서 56년 충현교회로 개명했다.
김 목사는 57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했으며, 교회는 60년대 초까지 장년수가 750명이 넘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김 목사는 63년 장년성도 1750여명일 때 예장 합동 교단에 가입했으며, 교회설립 10주년을 맞아 ‘천국일꾼을 키우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를 교회의 영구적 표어로 제안했다.
영감 있는 강단과 탄탄한 구역조직으로 충현교회는 급성장했으며, 60년대 말 등록교인이 4000명에 이르렀다. 70년 현재의 서울 역삼동 대지 9000평을 매입했다. 김 목사는 ‘천국일꾼 양성’이라는 목회철학에 따라 70년대 이미 유치부 초등부 새신자부 대학부 산업전도교육부 등으로 세분화할 정도로 교육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충현교회는 당시 교단 내에서 급성장하는 교회로 주목을 받았다. 김 목사는 충현교회 설립 17년 만인 70년 총회장에 선출됐다. 77년 북한선교회를 설립하고 북한 동포 복음화, 대공 지하선교 활동, 귀순용사 선교 등에 나섰다.
84년 강남으로 교회를 이전할 때는 장년 예배 출석인원이 1만명이 넘기도 했다. 교계에선 ‘예장 통합에 영락교회가 있다면 예장 합동엔 충현교회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대형교회로 성장했으며, 한 때 출석교인이 4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출석하는 교회로 널리 알려졌다.
87년 새성전 입당예배를 드렸으며, 이 때 원로목사에 추대되면서 퇴직금과 사택 등 재산 일체를 교회에 헌납해 많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됐다. 그러나 후임 목회자였던 이종윤 신성종 목사가 각각 3년여 만에 중도 하차해 논란을 빚었다. 후임자 내정에 아들을 내세움으로 담임목회 대물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지난 6월엔 “목회 경험이 없고 목사 기본 자질이 돼 있지 않은 아들을 무리하게 지원해 목사로 세운 것은 나의 일생일대 최대의 실수”라면서 공개적으로 세습을 회개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 목사의 강점은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에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되는 일에는 어떠한 반대에도 진행했다. 매일 40∼50장의 성경을 통독하고 세상 명예 및 물질의 욕망을 경계하며 본을 보였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설교로도 정평이 나 있다.
정일웅 총신대 총장은 “김창인 목사님은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기도로 큰 교회를 일군 장로교회의 원로”라고 평가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기사입력 : 2012-10-03 오전 9: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