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애양원의 파시즘적 운영
"여수 애양원 긍정적 평가 많지만…"
최병택 교수, 한국기독교역사학회에서 개항기 의료선교에 대해 발표
이범진
“기독교 병원은 영리주의가 아니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 밑져 가면서 사업정신으로 해가는 것이다. 전라도의 나병원은 정부로서도 아직 힘쓰지 못한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이 구료 사업은 기독교의 큰 공적이다.”
1934년 11월, 천도교 계통의 잡지 <개벽>에 실린 글이다. 이렇게 한센병 요양소는 당시에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연구사적으로는 아직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라고 한다.
이에 공주교대 최병택 교수가 9일 새문안교회 언더우드교육관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 발표자로 나섰다. 여수 애양원의 사역을 통해 의료선교 활동을 되짚은 그는, 특히 한센인 격리정책을 ‘파시즘적 격리주의’라고 평가한 정근식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료들을 제시함으로 여수 애양원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 공주교대 최병택 교수는 "한센병 요양소를 통한 의료선교 활동의 전개"를 발표했다. ? 이범진
최 교수는 먼저 “소록도가 취했던 파시즘적 격리주의와는 달리 선교사들이 운영한 한센병 요양소는 퇴소가 허용된다는 원칙아래 운영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재정적 형편에 따른 것이었지만, 선교라는 목적에 따른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조선의 지식인들과 언론들도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데 대부분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격리 그 자체는 하나의 의료행위로써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소록도 갱생원이 취했던 ‘물리적 폭력’의 모습도 광주나병원(여수 애양원의 전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한 선교사들이 설립한 한센병 요양소를 선교에 이용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기독교계 한센병 요양소의 의료진은 목회자가 아니라 전문 의료인인 경우가 많았다”는 말로 대응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한센병치료에 있어서 최선이라고 여겼던 격리주의와 대풍자유 주사법을 채용하면서, 환자들에 대한 전도와 목회는 한국인 목회자에게 맡겼다는 것.
최 교수는 이어 당시의 의료선교가 대중들에게 긍정적으로 비추어 졌다며 1925년 <개벽>에 실린 글귀를 소개했다.
“양반 정치의 해독으로 국내의 문화 발전과 외국 문명을 수입할 길이 암암하였는데, 기독교가 들어와 외국 문명 수입에 큰 도움을 주었고…기독교가 들어올 당시에는 의술로는 오직 신농유업(神農遺業)의 한방술이 있을 뿐이오 나무 껍질이나 풀뿌리나 무당 판수로써 오직 병을 고치는 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는 한센병 환자를 ‘죄악’으로 병을 얻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유통되기도 했단다. 기독교적 죄악관과 한센병이 관련되기 시작했다는 것. 이를 두고도 적지 않은 이들이 기독교의 의료선교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최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당시의 의료선교사들이 한센병 환자를 죄악으로 감염되는 병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은 없다”며 “오히려 자비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최 교수는 당시 여수 애양원의 환자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수동적이었다”고 봤다. 당시 애양원의 모든 정보는 교회를 통해서 전달되었기 때문에 출석하지 않을 경우 구호품 분배 등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배와 성경공부에 참석했다는 설명이다. 이에 그는 “거의 모든 정보가 새벽기도 시간을 통해 공지되고, 숙소에서의 생활 역시 성경공부 중심으로 흘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교회 예배에 불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러한 애양원의 질서에 반항하는 ‘세력’도 생겼다. 이들은 교회에 불을 지르고, 목사 퇴진 운동을 벌이는 등 주체적으로 큰 불만을 나타냈다. 결국 당시 교회를 맡았던 김응규 목사는 신사참배를 했다는 빌미를 잡혀 애양원을 떠났다.
이어 최 교수는 “이후에 부임한 손양원 목사는 외부 출입이 잦았기 때문에 교회 장로를 중심으로 한 자치 조직의 권위가 더 커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조직이 억압적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간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다음은 최 교수가 소개한 당시의 증언.
“그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질서를 잡으면서 비인권적인 일이 많았죠. 무조건 힘으로 그냥 다들 뭐. 선교사들은 제지를 하지 않아요. 선교사님들은 주로 순천에 가 있었어요. 병원에서 근무한 다음 퇴근해가지고 가고 여기 안에는 부장들을 두고 관리를 했단 말이에요. 내가 여기 와서도 사람을 전봇대에 묶어놓고 그렇게 험악했어요. 자기들이 그냥 법이고 힘있는 사람들이 때리면 뭐라 못하고.”
이에 따라 신앙생활이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경직된 신앙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최 교수의 주장이다. 목회자와 환자 사에 위계적 권위로서 ‘신앙지도’가 존재했다는 것.
▲ 사회자 송현강 교수(왼쪽)와 논평을 맡은 ucla 한국학 박사과정 김성해 씨. 가운데는 발표자 최병택 교수. ? 이범진
그는 “애양원을 통한 한센병 환자 구료 사업은 결과적으로 볼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료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 하다”면서도 “그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기보다 피동적인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주입받은 이들이 많았다”며 현재 진행되는 기독교 선교도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