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담임목사 자리가 없습니다.
황원하 목사
이번 기획기사의 주제는 목사 수급에 대한 논의입니다. 목사 수급의 불균형이 만들어 내는 현상중 두드러진 부목사의 연령이 고령화되는 추세에 대해서 토론을 하려고 합니다. 담임 목사로 나아갈 자리는 한정되었고, 또 개척하는 것도 여건상 어려움이 있는 현실에서 부목사들이 한 교회에 오래 사역하고 있습니다. 부목사로서 장기적으로 사역을 하는 부목사님들은 이런 현실에서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견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황원하 목사가 현재의 전반적인 상황을 짚어보고, 이세령 목사가 목사와 부목사라는 현재의 구도에 대한 원칙적인 문제점을 이야기 해 봅니다. 그리고 이운연 목사가 목사 후보생을 배출하는 신대원과 신학생 정원 감축 문제를 다루어 봅니다. 함께 생각해 보고 좋은 교회 질서를 위한 논의의 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코닷연구위원장-
목사들의 암울한 현실
▲ 황원하 목사
대구산성교회담임
코닷연구위원
목사로 부름을 받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정 기간 동안 부교역자로 지낸 다음에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담임목사가 되든지, 선교사가 되든지, 교회를 개척하든지, 신학교 교수가 되든지 할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여러 다른 길들이 있을 것이며, 심지어 목사의 일을 그만 두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교단(사실상 한국교회 전체)에는 목사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우리 교단의 목사들(특히 젊은 목사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아는 대로 적어 보겠다. 필자가 잘못 알고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1) 부교역자들의 숫자는 부족하다. 그래서 작은 교회나 시골 교회는 부교역자 청빙에 애를 먹는다. 어떤 시골 교회는 오랫동안 부교역자 청빙 광고를 냈지만 아무도 연락해 오지 않아서 아예 청빙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시골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은 신대원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부교역자 시기에는 자녀들이 대부분 어리기 때문에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라도 시골에 가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신대원 정원을 늘린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2) 나이 든 부교역자들은 다른 교회 부교역자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섬기고 있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은퇴를 하거나 다른 교회로 이동을 하고, 그 교회에 새로운 담임목사가 부임하게 되면 기존의 부교역자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임지를 옮기는 경우가 있다. 이때 젊은 교역자들은 다른 교회 부교역자로 쉽게 가지만, 나이 든 부교역자들은 다른 교회 부교역자로 가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뒤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가게 되면 대개 자기보다 젊은 사람이 선임 부교역자로 있기에 일할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3)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경우에는, 지원자가 너무 많고, 서류들을 많이 요구하고, 심사 기준이 상당히 높고, 심사 기간도 꽤 오래 걸린다. 교회로서는 최상의 목회자를 청빙하기 위해 신중을 기하는 것이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지원하는 목사들은 이런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상당한 정신적, 물질적, 시간적 어려움을 겪는다. 필자도 예전에 경험해 봐서 아는데 정말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어떤 목사들은 소위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학위과정 공부를 하거나 해외유학을 하는 경우가 있다.
4) 어떤 목사들은 교회를 개척한다. 그들 중에는 개척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잘 준비하여 개척하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다.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대단히 귀한 일이지만, 또한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래서 개척을 해보지 사람은 그 어려움을 모른다고 한다. 큰 교회에서 분립개척을 하면 그나마 낫지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들끼리 개척을 하면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비록 좋은 위치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요즘 사람들이 개척교회에 잘 오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개척교회가 그리 쉽게 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과 재정이 없는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목사와 가족에게 심각한 스트레스가 생길 수 있다.
5) 어떤 목사들은 사역의 방향을 교회 외에 다른 곳으로 돌려 보기도 한다.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목회 외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병원 원목 사역도 있고, 장애인 사역도 있고, 노숙자 선교도 있고, 학원 선교도 있고, 교도소 선교도 있고, 해외 선교도 있다. 특히 노령화 사회에 들어서면서 관련된 사역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실로 이런 일들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으며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고 안정된 자리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잘 하던 목사들 중에서도 담임목사가 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제법 있다.
소명에 대한 회의와 인간적 자괴감이 생긴다.
아무래도 부목사로 있다가 가장 무난하게 자신의 진로를 찾아가는 것이 담임목사의 자리이다. 담임목사가 되면 나름대로의 비전을 펼칠 수 있으며, 안정된 마음으로 지낼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이전보다 낫게 생활할 수 있다. (필자가 너무 세속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의 부목사들은 담임목사가 되고 싶어 한다. 심지어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들조차 지금 보다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해 보자.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담임목사 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현재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아니 고통 받고 있는 목사들이 우리 교단에만 해도 수백 명이 족히 넘을 것이다. 필자가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교회 숫자는 정해져 있고 목사 숫자는 자꾸 늘어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교회를 섬기는 일 외에 다른 영역의 목양적 사역들로 눈을 돌리면 좋기는 하겠는데 문제는 재정(돈)이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재정이 필요하고, 특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하기 위해서 재정이 필요하고, 심지어 신학교 교수가 되기 위해서도 학위과정을 마칠 수 있는 재정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다 사역에 걸맞은 사명감과 영적인 능력과 필요한 자질을 갖추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만일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특수한 분야에 뛰어들어서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재능을 가진 목사들이 제법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게다가 목사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사명감을 가지고 목회를 하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 그래서 목사에게 넉넉한 생활비가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쪼들리면 가족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일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부담을 가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참으로 교회들이 목사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주면서 이런 다양한 사역들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면 좋겠지만 교회도 재정을 사용해야 할 곳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런 일들에 그리 많이 지출할 수가 없다. 교회의 사정을 잘 모르는 분들은 교회의 그 많은 재정을 다 어디에 쓰느냐고 물어볼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짧은 기간이나마 목회를 해 보니 교회의 지출용처가 너무 많다. 지출이 언제나 수입을 능가한다. 집안 살림살이도 그렇지 않은가!
필시 목사의 진로는 목사의 소명과 연관된다. 현재 목사들 가운데는 임지가 없어서 사역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반 직업을 가지는 분들이 꽤 있다. 즉 상당수의 우리 동료들이 그동안 갈고 닦아 온 재능과 은사를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더욱이 생계를 이어갈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목사의 직을 내려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목사에게 임지가 없는 현실은 목사의 소명을 뿌리째 흔들어 버리고 목사에게 엄청난 인간적 자괴감을 안겨다준다. 목사가 신학교 문턱을 나섰을 때 가졌던 불타는 사명감이 개탄스러운 현실 때문에 꺼져가고 있는 것이다.
총회에서 이 문제가 꼭 다루어지기를
그렇다면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필자는 총회가 적극 나서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정치인들도 취업문제와 실업문제를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물론 필자는 목사의 직분이 세상의 직업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사들이 임지를 얻지 못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하는 현실에 대해서 총회가 관심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총회 총대들은 대체로 연배가 높고 안정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 몰라도, 수많은 젊은 목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이 사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경험이 미천한 젊은 목사이기에 지금까지 우리 총회가 이 문제를 다루었던 적이 있는지 모른다. 심지어 누가 이 문제를 발의라도 했던 적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 별다른 대책이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중대한 사안이 총회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활발하게 토론된다면 보다 진일보한 생각들과 방안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부디 다가오는 교단 총회에서 이 문제가 꼭 다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총대님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012년 0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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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 의견
황원하
[2012-08-18]
이성구 목사님의 댓글에 감사하면서
이성구 목사님의 댓글에 감사하면서
댓글을 읽고 그냥 있으려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몇 자 적어봅니다.
목사님은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니 저의 변명성 댓글을 충분히 받아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목사님도 잘 아시다시피 글이라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고, 같은 글이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읽힐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의 생각이 아직 많이 미성숙해서 지적받을 것도 많으니 .... 앞으로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목사님의 댓글에 대한 저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저는 총회에 충고한 것이 아니라 부탁드렸습니다. 글의 투가 좀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2) 목사님께서는 제가 주장한 것과 제가 현실을 기술한 것 사이를 구분하시지 않고 계신 듯합니다. 이건 제가 표현을 잘못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저의 생각은 댓글에 달린 목사님의 생각과 대체로 비슷합니다.
3) 신대원 정원 문제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일부의 주장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저는 현재 신대원 정원을 정확히 모르고 있고 신대원 정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4) 저도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시골교회와 작은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여러 차례 일했고 그때의 추억을 귀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시골교회에 부교역자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요즘 젊은 (일부) 부교역자들이 시골교회나 작은 교회에 잘 가지 않으려 한다는 현실을 적었을 뿐입니다. 물론 모든 교역자들이 시골에 가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아닐 겁니다.
5) 저는 목사의 소명에 대해서 이 목사님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글의 성격이 담임목사 수급에 대한 것이고 목사들의 입장에서 요즘의 어려운 상황을 적다 보니 다소 인간적으로(?) 비춰졌을 뿐입니다.
이성구
[2012-08-18]
확신에 찬 소명의 문제인가, 화려한 소망의 문제인가?
연구자의 글은 오늘 고뇌하는 젊은 목회자들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제기된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 너무 많다. 연구자가 지적하는 점은 조목조목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필자는 먼저 연구자가 결론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목사의 일자리 문제를 총회가 해결하도록 노력하라는 충고(?)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위 연구자의 분석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문제점에 대한 고찰>
(1) 목사를 위한 총회인가, 교회를 위한 총회인가?
연구자는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로 교단에는 "목사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만약에 이 표현이 오늘 우리 교단의 젊은 목사들이 교단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목사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의 판단으로는 ‘목사가 가고 싶고 일하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골라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교단은 목사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곳인가? 총회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우선순위가 목사 일할 자리 만드는 일인가? 아니면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가 잘 준비되고 소명감 있는 목사를 필요에 따라 부르는 것인가?
목사는 교회의 부름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신학공부 아무리 하여도 교회의 부름이 없으면 목사가 될 수 없고 목사로서의 사역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목사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목사가 존재한다.
목사로서의 소명은 내가 강력하게 느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고, 철저하게 주변의 인정, 나아가 교회의 부름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아니라 평범한 신앙인으로서 얼마든지 복음전도와 개혁주의 교회 건설에 힘쓸 수 있다. 목사는 교회의 부름으로 소명의 확인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요즘 많은 직장은 40대에 정년을 맞기도 하고, 길어야 50대 중후반에 그만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목사라고 해서 영구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가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것 아닐까? 목사는 왜 교회의 부름이 멈추었는데도 끝까지 목사여야만 하는가? 목사는 왜 재교육을 통해 다른 일에- 재취업을 할 수 없는 것일까? 목사는 철저하게 교회의 부름에 의하여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갈수록 한국교회 안에 노골화되는 현상처럼 목사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듯한 생각과 행동은 버려야 한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 아니겠는가?
연구자는 신학대학원과 총회가 임의로 정한 신학대학원 정원에 관한 냉정한 고찰은 생략한 채 총회가 모든 목사의 일자리 창출에 우선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2) 작은교회, 시골교회는 부교역자가 갈 수 없는 곳인가?
연구자는 오늘 우리 교단의 시골교회의 고민과 젊은 목회자들의 고민이 상충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부교역자를 구하고 싶은 비교적 작은 교회나 시골교회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부교역자를 얻을 수 없는데,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결론 내린다. 젊은 교역자들은 자녀들 교육문제로 시골이나 작은 교회로 갈 수 없다는 논리를 그대로 인정한다. 그래서 아무리 신대원 학생수를 늘려도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앞의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 일이다. 연구자는 아이들은 모두 도시에서 자라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들을 가진 젊은 목사들은 전부 도시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쉽게 내린다. 일할 자리가 없어 ‘소명에 대한 회의와 인간적 자괴감’이 생기는 상황이, 결국 아이들 탓에 시골교회나 작은 교회 부교역자로 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주님이 들으실 때 어떻게 반응하실까?
필자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시골에서 자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얼마나 좋은 추억거리를 내게 주었는지 모른다. 그 때를 생각할수록 나는 행복을 느낀다. 지금 국가는 시골아이들이 대학에 쉽게 갈 수 있도록 온갖 조치를 다하고 있다. 시골 중고등학교, 이장 경력을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랑스러운 이력으로 내미는 오늘이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이유를 들면서 총회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 찬송은 완전히 잊어버렸는가?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다 중국공안에 잡히는 분들의 이야기가 순교정신 잇는 고려파 목사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글이 너무 길어지니 여기서 줄여보자. 다른 문제는 시간이 나는 대로 살펴보자. 오늘 언급하는 목회자의 수급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언감생심 목회자 과다의 문제를 ‘취업문제’나 ‘실업문제’ 수준에서 총회가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명에 대한 냉정한 점검, 은사와 자질에 대한 엄격한 잣대, 진정한 교회의 부름 (갈데없으니 우선 안수는 받게 해 준다는 식의 부름은 곤란하다)은 자주 확인되어야 한다. 스스로 속을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많은 나 자신인가? 교회의 부름, 주님의 부름을 가장 최우선시 하는 총회와 신학교, 목사지망생의 태도 변화가 절실한 오늘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