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신사훈 박사,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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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신사훈 박사,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from Liberal Arts/Theology 2008/08/21





신사훈 申四勳 SHIN, SAMUEL SHA-HOON
(1911년 6월 17일(음력) ~ 1998년 9월 22일(양력), 향년 88세)

어린 시절부터 많이 들어온 질문이 있을 것이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에 와서까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왔다.

그럴 때마다, 대답하기 애매했던 것은,
내가 대답하는 인물에 대해 상대방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종대왕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도 스스로 찾아서 공부했고
그의 위대성을 높이 평가하고, 실제로 존경하고 있으나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자면 지금부터 소개할
신사훈 박사님이 되겠다.

신사훈 박사님의 자세한 약력은 조금 아래 있으니
내 개인적인 내용부터 적겠다.

신 박사님은 내 부모님의 선생님이기도 하셨다.
내 부모님은 같은 교회에서 만나 결혼을 하셨는데
바로 그 교회 목사님이 신 박사님이셨다.
따라서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 박사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이후 태어나서도, 그 교회를 계속 다니면서
박사님께서 돌아가시는 때도 같이 했다.

물론 박사님께서는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었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고 생의 마지막 몇 년은 극심한 고통 속에 병 중에 계셨기 때문에
나와 깊은 교류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예배가 끝나면 앞으로 걸어나가
다른 어린 학생들과 함께 박사님과 악수를 했던 것과
그 때마다 아이같이 웃으시며 우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것이다.
그 얼굴과 목소리가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다.

박사님에 대해서 나중에 알게 된 사실들은
대부분 부모님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인데,
그것들 만으로도 존경스러운 인물로 각인되기에는 충분했다.

언제나 시대와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지조를 지키고
늘 하나님만을 섬기셨다는 얘기와,
그와 관련된 일화들,

집의 주소를 묻거든 "하늘나라요"라고 대답하라 하셨다는 것과
돌아가시기 직전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남기신
"명철하여라 그리고 깊이 생각하여라 그리고 행동하여라"
라는 짧고도 핵심적인 말씀을 접하노라면

언제나 내 삶을 돌아보는 동시에
채찍질하게 되는 것은
늘 고마운 일이다.

여신도들이 임신했을 때, 헌금에서 집에 돌아갈 택시비를 돌려주셨다는 얘기
불쌍한 이웃을 늘 도와주셨다는 얘기들,
언제나 불쑥불쑥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구하는 자들에게
늘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그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고통을 함께 나눴다는 얘기.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셨기에,
동시에 너무도 훌륭하게 주님 앞에서 사셨기에,
수많은 모함과 고난을
오직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 이겨내신 얘기들을 듣노라면
이 겨례와 시대의 참 의인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예배 중에 고난 찬송을 부르실 때
자주 눈물을 흘리셨다는 얘기,
그러시면서 "이 찬송을 부르고 눈물이 나지 않는 당신들이 이상하다" 하신 말,
"예수 나를 위하여", 웬말인가 날 위하여"
를 부르시던 목소리는 아직 내 귀에 생생하다.

또한 신 박사님께서 쓰신
"사도바울의 구속론"을 읽은 순간,
그 첫 문장부터
그의 참 학자 됨과
참 신앙인 됨이 깊이 느껴졌다.
늘 공부할 때는 "완벽성"과 "정확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는 말을 떠올리게 되면서
단어 하나 하나에 힘이 있고
논리는 정확하며
방대한 지식과
꼭 필요한 말만 쓴 것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대학에서) 한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 날은 스승의 날이었는데
송구스럽게도 학생들이 꽃을 준비하지 못했다.
학생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 수업을 마치시며 한마디 하셨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지요? 꽃다발이 없네요?
여러분 괜찮습니다.
제가 어찌 스승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스승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도 분명 사람이라,
그 추악한 모습,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면
참 스승이라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꽃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
참 스승은 현재 살아있지 않은 사람으로 삼으십시오.
예수나 간디, 부처, 공자와 같은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으세요.
그것이 스승의 날의 의미입니다."

나는 비록 신 박사님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고
그 사상을 모두 공부한 적도 없지만
그는 언제나 내 마음에 살아있고
하늘나라에서도 나를 바라보고 계시리라 믿는다.

주님의 사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이러한 의인이

꼭 멀리서 다른 나라 유명한 사람들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이 한민족 가운데도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이 글을 올려본다.

* 아래 내용은 우리 집에 있는 책에서 발췌한 것인데,
신 박사님의 약력을 소개한 것이다.
인터넷에 이미 있을 줄 알고 검색을 해봤으나
전혀 그 내용을 찾을 수 없었고
더욱이 신박사님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조차 없었기 때문에
(사진도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 위의 사진도 겨우 찾았다)

이렇게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지만
감히 송구스러움을 무릎쓰고 글을 올려본다.
혹 아래 글이 저작권 상 문제가 있다면 조치를 취하겠다.

글이 꽤 길지만 (괜히 전부 타이핑 했겠는가)
소중하다.
하나하나 모두 중요하고
글씨도 작기 때문에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몇 번에 나누어 읽어도 좋다.

-

출처: 『철로 신사훈 박사 기념 논총집』, 성산출판사, 9-24쪽.

철로(鐵爐) 신사훈 교수 년보 및 저서

목사 신사훈 철학박사, 교수 (1911년 6월 17일(음력) ~ 1998년 9월 22일(양력))



신사훈 박사의 이력과 그 동안의 업적과 금후 이룩할 사업계획서

1) ① 신 박사는 한국의 판소리의 완성자 이시며 동양의 세익스피어라는 신재효(申在孝) 선생의 직계증손 ② 그분의 저서원본들을 소유 ③ 4-5세 때 그 부친에게서 ㄱ+ㅏ=가, 가+ㄱ=각 식으로 국문을 몇 시간 학습, 이튿날 그것을 완전 독파 ④ 그때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음 ⑤ 재효 선생의 넓고 깊은 학문과 큰 덕 까닭에 그 가문에서 위인과 학자인 신 박사가 나왔다고 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임 ⑥ 5세 때부터 한문서당에 다녀, 무 결석, 수석



2) 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1920년) 일어 통역 ② 만11세 때 모친병환 사망 전 수개월 동안 극진 효도 ③ 5년간 무 결석, 무 지각, 5년 개근상을 홀로 탐 ④ 우등, 수석 5학년 수료(‘25) ⑤ 일어독본 10권을 한 자리에서 완전암송 ⑥ ’대학자가 된다‘는 말을 들었음.



3) ① 고창 고보에 검정 수석입학(25년) ② 2학년 때부터 영어신약 성경을 매일 3장씩 한 번도 빠짐없이 5년간 22회 독파 ③ 그 때(26년)부터 교회 출석. 주일학교 교사 ④ 교회 야간학교에서 수학과 일어를 매주 2일씩 무보수 교수 ⑤ 매일 한번도 빠짐없이 5년간 산기도(모양성) ⑥ 1년 후(26년 수세) ⑦ 그 때부터 주일설교 ⑧ 고창 고보 농구센터 ⑨ 그 때 수학 중 제일 어려운 삼각함수에 혼자 100점 받음 ⑩ 5년간 영문법학습 ⑪ 주일 이외의 매일 30분간 운동 ⑫ 그 밖의 시간들에는 다 공부(하루 4시간만 잠) ⑬ 우등, 수석, 졸업(30년 2월) ⑭ 그 야간학교 교장(30년 3월~31년 2월) ⑮ 그 1년간 교회에서 자면서 기도(‘사무엘’이란 이름을 얻음)



4) ① 미국 교수들의 원서사용과 영어 강의로 동양 제일이란 일본 동경 청산 학원 신학부에 수석 입학(31년 4월) ② 그들에게서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영어 등을 ③ 일본 교수들에게서 히브리어, 독어 등을 배웠으나 교과서들만 읽고 말았으므로 ④ 신 박사가 그때 (31년)부터 어학을 수학적으로, 그 원어들에 있는 몇 개 안되는 ‘중요문자들(key-letters)"로 완전 마스터하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방법을 고안, 창작하기 시작 ⑤ 1988년에 그 세계적으로 독특한 희랍어 문법책을 출판, 히브리어의 자음 다음에 h를 추가시키면 그 자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신 박사가 이용, 박=Park 이 아니라 Bhagh 등도 발표했음 ⑥ 희랍어, 라틴어, 히브리어, 독어, 영어 등을 대학생에게 그때(31년)부터 교수 ⑦ 일어 중 제일 어려운 그 고문을 일본 고교생에게 교수 ⑧ 동경 조선 YMCA 이사, 종교부장, 교회임원(33년 4월~37년 3월) ⑨ 탁구선수권 ⑩ 본과 우등, 수석졸업(37년 3월) ⑪ 지금(90년) 17-18개 언어들을 앎



5) ① 대학(동경 청산학원) 졸업 후 입학의 미국 뜨루 신학교에 도착(37년 12월 8일) ② 공부하면서 희랍어 교수(32년 2월~42년 5월) ③ 그때부터 미국 신학생, 대학생, 교수들에게서 “신 박사”란 말과 ④ “신 박사 머리는 사진판과 같다.” ⑤ “신 박사는 날 때부터(born) 학자, 날 때부터 선생과 날 때부터 신사입니다.”란 말을 들었음 ⑥ B.D.(summa cum laude)(최고우등) 수석졸업(40년 5월)(뜨루신학) ⑦ 희랍어상(40년 5월)(뜨루신학) ⑧ 학술상(41년 5월)(미국신약 신학학회) ⑨ 팔레스타인 연구상(42년 5월)(미국감리회 외국 선교부) ⑩ 박사과정(40년 9월~42년 5월)수료(42년 5월)(뜨루신학) ⑪ 37년 12월 8일~42년 5월까지 전액 장학금과 상금으로 연구



6) ① 프린스턴 신학교(42년 9월~43년, 45년 2월~45년) ② 뉴욕대학과 스탠포드 대학에서 교수(42년~45년) ③ 재미 한국기독학생회 총무(42년~45년) ④ 제 2차 세계대전 때(39년~45년) 재미 한국인들의 분열을 막음 ⑤ 연합군이 일본 선공(先攻) 또는 차선책으로 일본과 독일 히틀러의 동시 공격을 미국인들에게 역설[그때 영국 등은 선 히틀러 공격을 주장] ⑥ 따라서 신 박사 까닭에 1945년 8월 15일 한국 해방(그러므로 한국 애국자들이 감옥에서 죽지 않았음) ⑦ 그리고 한국만이 동양에서 참 미국의 우방국임과 일본과 소련에 대한 경계를 미국인들에게 역설 ⑧ 그 때 미국인들은 한국에 문자와 역사 등이 있음도 몰랐는데, 신 박사가 많은 연설로 한국을 소개했음



7) ① 철학박사(45년 5월 28일)(뜨루신학) ② 학위논문 제목: 사도바울과 구속론 ③ 600여 원서 참고서들 중, 독일 원서 400여권 ④ “박사 중의 박사, 진짜 박사”란 말을 들었음 ⑤ 한국의 제5-6번째 미국 박사 ⑥ 한국 해방직후 월 300만원의 미군 군속직과 ⑦ 한국 파견의 미 교육 사절단 위원직의 사절 ⑧ 프린스턴 신학에서 계속 연구 ⑨ 그 도서관의 독일 원서들을 홀로 다독 ⑩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테니스 선수권



8) ① 신 박사의 미국무성의 단독 특별 교섭으로 시민들 중 첫 번째로 원서들을 더 많이 사 가지고 귀국(46년 10월) ② 그때 일본 동경은 미 공군 폭격으로 폐허와 다 거지가 된 일인들 ③ 청산학원 신학부 와다나베 교수에게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받음 ④ 감신대 학장(46년 10월~47년 3월) ⑤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대학원의 종교학과 주임교수 30년간(47년 4월~76년 8월 31일) ⑥ 그 부임 때 그 대학 그 과 재학생은 1명(권진성) 뿐이었는데 ⑦ 신 박사의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독어, 영어 등과 여러 가지 깊고도 넓은 학적 과목들을 계속 강의, 서울대에세 제일 좋은 학과로 만들었고 ⑧ 서울대 10대 명강의 교수들 중 첫 번째로 신문에 보도되었으며 ⑨ 이 사실이 미국, 화란, 서독, 영국 등에 알려져 ⑩ 신박사의 추천서들로 그 직계 제자들 중 20여 명의 외국 박사들이 배출됨 ⑪ 그 문리대 언어학과 교수들과 전 문교부 장관과 서울대 총장도 신박사에게서 라틴어, 희랍어, 독어 등을 배운 사람들이 있고 ⑫ 여러 신학교, 대학교 교수들 중 신 박사의 제자들이 많음 ⑬ 여러 대학교, 신학교와 교회들에서 많은 특별 강의, 강연들과 초청교수 ⑭ 300여편의 지상논문 발표 ⑮ 46년~50년 6월 25일까지 서울대 학생교회 목사



9) ① 50년 6월 25일때 좌익 서울대 총책에게서 “저는 신 박사님을 존경합니다”란 말을 들었고 ② 그 직후 국립 전북대학교 총장 발령을 받았으나 거절 ③ 고등고시위원(55년~60년)



10) ① 58년 8월 27일~9월 9일 일본 동경에서의 제 9회 국제종교사학회에 한국의 유일한 대표로 초청 받아 참석 ② (14개국 서양학자 120명, 15개국 동양학자 80여 명, 일인 400여명의) 첫 전체 회의 석상에서 (동경대 불교전공) 일본 교수 나까무라가 “성경의 불전 유래”와 “불교위 보살 진리만 현대 세계 구원의 유일한 방법임”의 논문 발표, 그때 신 박사 홀로 학적과 실제적인 완전 반박 ③ 그때 그 모든 외국 학자들의 대 환호성과 박수 갈채와 발들로 마루를 계속 크게 두드림의 대 감탄을 받고 ④ 그때 그 일본인은 그 석상에서 깊이 머리를 숙여 신 박사와 전체에게 사과했음 ⑤ 신 박사의 여러 원어들의 인용 논문 발표, 대 감탄을 받았고 ⑥ 많은 난제들을 해결해 주었으며 ⑦ 일본신사의 도리이를 일본인들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신 박사가 한국 공자 향교의 홍살문의 모방이란 답에 전원이 대 감탄 ⑧ 일본 수상 기시에게 신 박사가 많은 어학들을 아는 유능한 한국 학자로 소개됨 ⑨ 신 박사가 동양종교학회 5개 임원 국들 중 한국을 세 번째로 들게 했음 ⑩ 일인들이 국제 대회에서도 나쁜 수작을 했는데, 신 박사의 서울대 교수의 서울을 scone(호트 게이트의 일종)으로 발표, 수정하라고 신 박사가 몇 번이나 말했으나 듣지 않았음. 악한 자들 임.



11) ① 서울대학 문리대 교수 파당을 신 박사가 막아냈는데, 60년 4월 19일 때 이희승 파가 불의, 불법의 장병길을 도와주었으므로, 신 박사가 홀로 완전 타도(신 박사 논문집의 “통일교 찬양의 교수 일동의 성명서”의 신 박사 반박문 참조) 이(李)가 신 박사에게 뒤에 사과 ② 그 직후 신 박사가 서울대 기독 학생들에게(통계작성, 국산품애용의) 신생활 운동에 대한 강연 ③ 그들이 59년도의 커피 밀수 총액 10여 억 달러 등등을 발견, 발표 ④ 중앙청 앞에서 양담배 불사르는 운동 전개 ⑤ 다른 단체가 그것을 계승 ⑥ 어느 정당의 신조 운동도 그 영향임 ⑦ 지금 이 신생활 운동이 절실히 요구됨



12) ①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 직전 정계와 사회의 대 혼란 ② 청년들이 국회단상 점령 ③ 이북 김일성의 재 남침 기도 ④ 그 때 신 박사가(내적 인간 개조와 외적 사회 개혁을 동시적과 평행적으로 추진시켜야만 한다는) “현대 지상 과제인 이중개혁”을 여러 곳들에서 발표 ⑤ 그것이 신 박사의 논문집에 수록된 독특한 세계적인 것임 ⑥ 그 뒤 바로 군사혁명 ⑦ 그러나 그 혁명도 실패(이중 개혁이 아니었으므로) ⑧ 지금은 이 개혁이 지상과제임.



13)
(1) ① 1963년 6월 함석헌 씨가 조선일보 첫 면에 “박정희 물러가라.” ② “미국과 소련군대들의 한국 철수” ③ “한국의 영원 중립론”과 ④ “천국과 지옥이 없다.”란 말들과 글로 떠들었음 ⑤ 그 때 서울대학생들도 거의 다 중립론자였다 ⑥ 정부에서 기마병을 동원시켰어도 함을 막지 못하였다 ⑦ 한국에서 함을 막을 사람은 신 박사밖에 없다고 다 말했으나 ⑧ 오해를 받을까 하여,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⑨ 사태가 심각하고 ⑩ 교역자들의 요청과 ⑪ 중립론을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 편으로 보고 있었음(김혁, 나는 김일성의 스파이였다, 참조)을 전혀 모르는 중립론자들 이였으므로 ⑫ 신 박사가 “국난타개책”의 논문을 조선일보 63년 7월 26일~8월 2일 제1면에 발표(7회) ⑬ 그 때 한국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그것을 다 읽고 대 감탄 ⑭ 함은 그 첫 글에 쑥 들어갔다 ⑮ 그 뒤 조선일보에서 신 박사에게 허튼 수작 ? 신 박사가 그 사람에게 엄중 항의하자, 그 사람은 깊은 사과를 신 박사에게 했다

(2) ① 그 뒤 바로 국무총리 김종필씨가 국회의원을 신 박사에게 파송 ② 공화당의 제 2인자이며 대통령의 고문인 “전국 재건본부 부장”을 신 박사가 하시라 했으나 ③ 신 박사는 “내가 왜 그런 시시한 것을 해?” 하고 답변, 거절하자 ④ 그는 머리를 푹 숙이고 돌아갔다.



14)

(1) ① 서울대 신문사에서 서울대 교수를 보고 공산주의 비판 논문 기고를 아무리 간청했으나, 1 명도 응답자가 없어, 신 박사에게 간청, 거기에 4번 투고 ② 법무부에서 좌익 죄수들을 위한 월간잡지 ‘샛길’에 한번도 공산주의 비판 논문을 발표 못 했으니, 신 박사에게 간청했으므로 2번 기고 ③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의 신 박사 제자가 진짜 빨갱이들이 수감된(대전) 대덕 교도소 간부로 있을 때, 서울대 철학과 교수 박종홍에게 공산주의 비판 논문 기고를 간청했으나, 못 쓴다 고 말해, 신 박사에게 간청, 4번 기고했다 ④ 어느 신학교 출신의 신 박사의 제자가 좌,우익합작의 토인비의 공산주의비판을 읽고 실망했는데, 신 박사님의 논문집에 수록된 그것을 읽고 이제는 그도 공산주의 비판에 자신을 얻었다고 신 박사에게 말했다(다음 조항참조) ⑤ 76년 8월 31일 국민훈장을 받음

(2) ① 지금 한국 대학가에 좌익 독서회가 깊이 침투 ② 깊은 학문성과 실제적인 심각성의 공산주의 비판을 정확히 할 교수가 대학교에 없기 때문에 큰 문제다. 마르크스는 유대계 독일인이었으므로 유대계 사상과 공산주의 의 경험이 있어야만(그리고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독어, 영어 등도) 비로소 그 비판을 정확히 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완비한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③ 그리고 89년 말의 동,서독의 장벽 붕괴와 ④ 동서양 공산국가들에서의 그 주의의 붕괴이나, 남한에서의 그 기대는 착각임은, 지금 남한에서 하나도 올바른 것이 없고, 남북한 통일 후 좌익들의 불의,불법의 방지책이 지금 전무 ⑤ 특히 타국 공산주의자들은 자국위주의 것들인데, 한국은 사대사상, 외세이용, 자체분열 임으로 안 된다. 북한 김일성은 세계 최대의 악질 공산주의자이다 ⑥ 그러므로 통일이 결코 문제가 아니라, 참 통일 가능성의 훈련과 그 실력 배양이 급선무이다 ⑦ 공산주의 체험자들은 피상적인 통일론을 타기한다 ⑧ 뜻 있는 사람들이 참 통일론 동등의 논문 발표를 신 박사에게 간청, 곧 하려 한다 ⑨ 87년 안전기획부원 2명과 치안국 직원 1명이 대학생 대모 방지책 문의로 신 박사를 방문, 그때 신 박사는 그들에게 ⅰ) 각계각층의 부정, 부패와 ⅱ) 빈부 차이와 사치 일소 ⅲ) 그 뒤 좌익 학생들의 애국자들과의 면담 ⅳ) 그래도 그들이 듣지 않을 때에는 쌀값이 올라가니 가두지 말고, 부모들을 불러 그 중 몇을 이북으로 보내면 된다고 말하자 ⑩ 그때 그 3인들은 똑같이 그들 손으로 다리를 치면서 “신 박사님에게서 비로소 처음으로 그런 정확한 대책을 들어 대 감탄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15)
(1) ① 현대 세계의 최대 사탄은 곧 국,내외적으로 혼음, 가정파괴, 타인의 노동력과 재산의 착취. 한국과 세계의 지배를 꿈꾸는 문선명과 그 통일교인데 ② 문은 예수를 “개새끼, 자가부하, 예수는 육적 구원을 완성시키지 못 했으나, 자기가 혼음으로 시킨다.”고 국내외로 떠들고 있는데 ③ 그 파 명칭이 “세계기독교신령협회”다 ④ 56년 봄, 그 파 여 간부 강현실 이가 신 박사에게 와서, “한국의 신학과 종교학의 최고 권위자이신 신 박사를 그 파 최고 고문으로 그 파에서 추대했다”하기로, 일축했다.

(2)
① 1968년 9월 9일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그 원장 강원용은 문선명과 그 파 간부들을 초청 ② 감리교신학교 장홍현설은 ‘통일교 원리에 일부 타당적 논리가 있다’고 말했고, 문 앞에서 “기독교와 통일교와 화해하도록 해 주시”란 기도를 드렸고 ③ 강은 그 파가 ‘이단이 아니다’라, 운운했다 ④ 조향록은 ‘통일교가 기독교의 한 종파다’, 등등의 말을 일간 신문들에 까지 보도되었다(신 박사의 ‘통일교의 정체와 그 대책’ 참조) ⑤ 그리하여 전 기독교계와 일반 사회가 몹시 놀람 ⑥ 기성교계는 또 속수무책, 여러 사람들의 간청으로 신 박사가 그해 10월 30일과 11월 1일 밤 동숭동 서울대 강당에서 그 기독학생 주최로 500여명 청중에게 통일교 비판 강연을 했다 ⑦ 11월 1일 밤 그 파 김영진(무직, 61세)이가 자기 손에 오물을 발라, 신 박사에게 바름 ⑧ 그때 서울대 박사과정 종교학과의 신 박사 제자가 김을 구두발길로 차 죽이려는 것을 신 박사가 큰 소리로 말렸다 ⑨ 청중들의 간청으로 신 박사가 그 뒤 40여분 강연을 계속 ⑩ 임한경 박사가 신 박사 보고 “대한 민국의 정의의 구현체는 곧 신사훈 박사님이십니다”라고 그 교정에서 그후 신 박하에게 말했음 ⑪ 그 사건 조직의 통일교 교도 김옥희는 그 뒤 연탄가스로 사망했다

(3)
① 1975년 4월 통일교가 2억5천만 원을 남한 대도시에 뿌리고 다닐 때, 기성교계는 또 속수무책 ② (합동)총신학생회장의 간청으로 “성명서-통일교(교주 문선명)는 적 그리스도다.”(4월 11일)라는 1대 양면논문을 신 박사가 써주어, 그 신학생들이 서울에 40만장,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40만장 ③ 다른 신 박사의 논문 40만 장을 어느 교회 부목이 뿌려(장로회 신학교 부탁의 것) ④ 총 120만장으로 통일교의 마각이 국내외로 다 드러났다.(다음 글 참조)

(4)
① 신 박사의 그 4월 11일 논문을(통일교 까닭에 미국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잃어버린) 500여 세대의 미국 반문파(反文派) 댚자가 입수(75년) ② 그것을 영역 시켜, 76년 4월 5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신 박사를 만나 ③ 서양학자들도 쓸 수 없는 논문임에 대 감탄 ④ 신 박사가 영어로 통일교 비판 논문을 써 주면, 그가 그것을 책과 영화화하여, 전 세계에 보급키로 약속 ⑤ 한국에서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신 박사 밖에 없다고 주한 어느 미국 장교가 자기에게 말했다고 신 박사에게 말했음.

(5)
① 76년 8월 17일~18일 미국 반문파 대표자가 또 신 박사에게 와 ② 문을 미국에서 고소 걸었으니, 통일교 비판 영어녹음 카세트 3통을 신 박사에게 간청 ③ 8월 13일 조선호텔에서 해주자, “탁월한 음성입니다. 정확한 발음입니다”라고 대 감탄, 그날 미국으로 갖고 가 ④ 미국전역에 그것을 방송 ⑤ 그 까닭에 그 때부터 미국에서 통일교는 기독교도 종교도 아님이 확정되어 ⑥ 84년 문선명 이가 징역 11개월을 삶 ⑦ 78년 4월 13일 미국 반문파가 신 박사에게 또 와, 신 박사의 그 논문이 미국 국회에 상정되어 대 감탄을 받았고, 많은 미국인들이 신 박사님을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⑧ 75년부터 미국, 영국, 화란, 일본, 독일 등등에서도 신 박사에게 편지들과 인편이 와서 자기들을 도와주고, 통일교 비판 논문을 보내달라고 간청.

(6)
① 그런데 76년 11월 18일-19일 강신명의 새문안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에서 신 박사를 (전혀 근거 없는)‘무임목사(신 박사가 새싹교회 목사인데라’ 하여 불법제적 ② 그 파 이태용 목사 말에 의하면, 강이 박정희에게 3억을 얻어먹었고(박은 신 박사 까닭에 대통령이 된 사람인데, 그가 통일교를 키워 주었으므로)(미국잡지보도) ③ 강은 일제시대 열렬한 신사참배자이었다고 이가 신 박사에게 말했음 ④ 신 박사가 “한국교계백서”를 강 파에게 주었더니, 그들은 혼비백산 ⑤ 그 글이 신 박사의 논문집이 수록되어 있음.

(7)
① 통일교에서 탈퇴한 김영희가 통일교를 고소하자(78년) 김을 통일교가 투옥시킴 ② 78년 19월 4일 서울 종로 YMCA에서 한국 기독교 대표자들의 회의, 신 박사보고 통일교 비판 논문을 써 주시면 전국에 뿌리겠다고 간청 ③ 신박사를 통일교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만장일치 선출

(8)
① 미국 반문파 대표자(76년)와 한국 기독교 대표자들(78년)의 요청으로 신 박사가 세계 독특의 “통일교의 정체와 그 대책”(78년 12월 9일 발행), 90년 4월 현재 10,600여부가 국내외로 다 나가, 극찬을 받고 있고, 그 영역을 여러 나라에서 요구하고 있음 ② 79년 1월 15일 통일교가 신 박사를 그 책으로 고소하자, 기성교회들은 다 도망쳐버림 ③ 그날 통일교의 고소 대리인인 황인태가 동대문 경찰서에서 “자기가 김영희와 탁명환을 다 처리했다. 지금 한국에 사람 하나(신 박사)만 남아 있다”고 말했는데 ④ 통일교에 완전 굴복한 탁명환(78년 9월 19일 조선일보)이가 도처의 부탁으로 썼다는 그의 “통일교의 실상과 그 허상”(79년 11월 25일)에서 신 박사만 허위로 비판, 통일교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9)
① 1979년 4월 24일 밤 남대문교회에서 2,500여명의 청중에게 신 박사가 통일교를 비판할 때, 40여명의 통일교 교도들이 신 박사를 쇠파이프로 죽이려 했는데 ② 그 2,500여명은 다 도망쳤고 ③ 신 박사교회의 집사들만 신 박사를 따라왔음 ④ 신 박사가 그날 밤 진단을 받고 ⑤ 그것을 때는 대(4월 26일) “그렇게 맞고도 안 죽은 것이 기적입니다.”라고 그 병원장이 말했거니와 ⑥ 그러므로 신 박사를 산 순교자라 말한다 ⑦ 그런데 검찰에서는 그런 자를 다 무죄 석방했다는 두 통지서들을 신 박사에게 보내, 그것들과 그 진단서들을 갖고 있다.

(10)
① 1979년 1월 15일~1985년 1월 25일까지 신박사가 그 불의, 불법의 18회 공판들을 받았거니와 ② 20여명의 통일교 증인들과 ③ 판. 검사들을 신 박사가 법정에서 다 침묵시켰다 ④ 81년 1월 15일부틔 세계 형사 재판 공판 기록들 중 최고의 것은 신 박사의 제 1-7회 공판의 “통일교의 비판과 내 공판 경과보고”를 발표 ⑤ 85년 1월 15일 재판으로 신 박사의 승리로 끝났는데(대검찰 종장의 말), 다음 것이 일어났다.

(11)
① 그런데 1987년 통일교가 정부에 압력을 넣어, 통일교에서 대학설립인가를 받아 ② 지금 한국의 유일한 의인인 신 박사만 남아 있으므로, 신 박사를 막기 위해, 1989년 5월 30일 제 19회 공판을 재개(판사 강용현) ③ 89년 6월 27일 강이 신 박사 보고 “박사님의 질의서를 잘 읽고, 통일교가 나쁨을 잘 알았으니, 그 재판을 잘 하겠습니다”라고 전화로 신 박사에게 말했는데 ④ 89년 12월 26일의 26회 선고에서 10월 징역, 학자와 연로하므로 2년 집행유예를 선고 ⑤ 신 박사가 그에게 항의 ⑥ 그는 무답 ⑦ 89년 12월 28일 항소했다(다음 글들 참조) ⑧ 94년 7월 5일 제 28회 공판에서 면소(사실상 승소) 판결을 받았다.

(12)
① 정경식 검사의 공소장(79년 5월 24일)과 ② 89년 12월 26일의 강용현 판사의 판결문에 전부 허위 글들이 있었으므로 ③ 90년 3월 8일 신박사가 그들을 다 구속, 그 불의.불법의 재판을 완전 기각시키라는 항소문과 ④ 만일 2주일 안에 그 문서 담아 오지 않으면, 신 박사가 그것들을 국내외에 다 공개 ⑤ 통일교와 그 재판 관련자들과 현 정부를 유엔과 국제 사법 재판소와 세계학계에 고발, 기소시키겠는데, 신 박사가 그렇게 해도 좋으냐는 중요 질의서를 법원들과 정부관계 기관장들에게 신 박사가 제출했다. ⑥ 79년 7월 문공부 종무국 장이 신 박사보고 “검찰이 종교란 종자도 몰라서, 신 박사님을 기소시켰으니 국내외로 신 박사님이 그것을 공개하시면, 대한민국의 수치가 되므로 참아주시라”고 간청 ⑦ 81년 12월 22일 정형근 검사도 신 박사에게 같은 말을 했기 때문에 신 박사가 참고 있었다 ⑧ 지금 통일교에게 매수된 한국 교역자수는 5천명, 대학교수는 600명, 공무원들은 3천명이라 한다 ⑨ 지금 한국에서 신 박사와 그 새싹교회만 통일교와 싸워 이기고 있다.




16)
(1) ① 1977년 봄, 몇 전도사들과 장로들이 신 박사에게 와 “지금 각계 각층이 다 썩어, 저희들이 어디에서 신학을 하고, 어느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까 당황하고 있으니, 신 박사님이 세계 최고 수준의 총신과 교단을 세워 주십시오.”란 간청을 했으므로 ② 77년 9월 26일부터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독어, 영어 등의 연습 문제들의 영역과 계속적인 강의들과 넓고, 깊은 원서들의 사용의 강의들을 지금(90년)까지 계속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한 예장(총합) 총신 교장, 대학원 원장, 그 총회장과 ③ 한국 성경,신학원어 연구회 회장을 신 박사가 하고 있다 ④ 세계 다른 어느 나라에도 이런 것은 일절 없다 ⑤ 정부에서도 그 인가를 받으라 하나, 교육은 자율적인 것이므로, 미국에서도 1964년까지 문교부가 없었으며, 지금 그것을 폐지하자는 이론이 있으므로 신박사는 인가를 받지 아니한다 ⑥ 참 신학교가 제일 주요 사업이며 ⑦ 대학교와 신학교가 제일 중요하다 ⑧ 신학교에서 성경과 신학의 원어들이 제일 중요한데, 미국 신학교에서도 그것들을 선택으로 한 학기만 강의 해주나, 신 박사의 총신에서는 계속 강의, 필수로 한다.



17)
(1) ① 현대 국내외의 중요 문제들은 공산주의, 남북한 통일, 무역, 일본의 경제침략, 노사, 지방색, 민주주의, 사치, 부정부패 등등 인데, ② 뜻 있는 사람들은 신 박사만 이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안들을 다 가지고 있으므로, 그 논문 발표들을 독촉하고 있으니, 그렇게 하겠으며 ③ 신 박사가 이미 다 발표한 “현대 지상과제인 이중개혁” ④ “신생활 운동” ⑤ “공산주의 비판” ⑥ “국난타개책” ⑦ “학계”와 ⑧ “교계”의 백서, 등등에 다 있다. ⑨ 죄지으면 출세는커녕, 사회출입도 못하게 해야되며 ⑩ 하나님의 세계창조본연의 질서는 “만물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그러나 사람은 그 (하나님)자신을 위해 지으셨다.”는 만물 위에 사람이, 사람 위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창조본연의 질서이다 ⑪ 그런데 공산주의에서는 물론, 현대 가짜 민주주의도 올바로 시정되어야만 하고, 자본주의도 그러하다.

(2) ① 대학은 그 나라의 최고 지성의 본산지인데, 지금 대학교가 완전히 부패되었으며 ② 교수 채용이 정치적, 파벌적이요 ③ 대학교의 목적은 숭고한 인격도야와 심오한 학문연구 인데, 지금 이것 등이 하나도 없다 ④ 인문계의 완전한 도서준비와 ⑤ 이공계의 완전 설비가 중대한 대학 시설인데, 형편없고 ⑥ 대학생들이 엉망이다. ⑦ 따라서 대학교의 대수술이 급선무이다.

(3) ① 김선기(金善琦)가 신 박사의 희랍어와 히브리어의 독특한 저작권들을 도용 ② 적반하장 격으로 신 박사에게 4가지 고소들을 걸어왔으므로(83년) ③ 저작권도 사법부에서 잘 모르고 있었으므로, 신 박사가 다 김을 물리쳤는데 ④ 그자는 경찰서, 검사와 법정에서 위증들을 했는데 ⑤ 그자가 목사요, 신학교 강사라니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다 ⑥ 지금은 꼭 제 2차 종교개혁시대이다.

(4) ① 신 박사는 지금 한국의 유일한 의인으로 국내외 여러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며 ② 영서(2000년 한글판 번역)의 사도바울의 구속론, 기독교와 불교, 세계적인 희랍어 문법책, 이단과 현대의 비판과 우리의 생로, 논문집, 공산주의 비판, 현대지상과제인 이중개혁, 내 조국 내 민족 내 강산, 니체 비판, 사신신학 비판, 통일교 활동에 대한 소위 교수 일동의 성명서 반박문, 한계 백서, 한국 교계 백서, 통일교 정체와 그 대책, 통일교 박멸책, 등의 저서들과 ③ 3백여개의 지상 발표논문들과 ④ 출판예정의 많은 원고들이 산적해 있다.

(5) ① 한국인들은 유교, 불교와 기독교들을 다 맛보았고 ② 일제 시대 세계최대 악의 식민지 정책의 맛과 ③ 1950년 6월 25일 때 공산주의를 다 경험했다 ④ 그리고 지금 서울의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과 교인들이 제일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⑤ 현대 최대 사탄인 문선명과 그 파인 통일교가 한국에서 나왔다 ⑥ 48년 대한민국 수립이후 이제까지 올바른 대통령이 한 명도 한국에서 나오지 못했다 ⑦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하나도 올바르게 된 것이 없다 ⑧ 이것이 곧 한국에 올바른 신학교와 대학교가 없어서, 국민들과 교인들을 올바로 고쳐놓지 못한 까닭이다 ⑨ 따라서 참 개혁인 현대 지상과제인 이중개혁이 절실히 요구된다 ⑩ 신 박사는 이제껏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나, 지조와 의리를 지킨 사람은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⑪ 지조와 의리는 생명보다 더 귀하다 ⑫ 현대인의 심령들이 부패되어, 그 사용하는 말도 부패되었다. 하거니와 한국에서는 점잖은 척 하는 자를 인격자라 하나, 인격의 정확한 학적 정의는 자아의식과 자아 결정인데, 전자는 진짜 하나님이신 진신 앞에서만 가능하고, 후자는 진신이시며, 하나님이신 영원자 앞에서 자기의 언행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⑬ 그리고 신약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예수께서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 하셨는데, 55년 신 박사가 세운 새싹교회만 그것을 담당하고 있다.

(6) ① 신 박사 서재에는 18개 언어들의 원서들과 ② 수많은 원서들과 ③ 출판될 중요원고들이 산적해 있으며 ④ 원문 주석의 한 시간 설교와 강연의 카세트가 800여 개 ⑤ 서울에서 제일 살기 좋은 창경원 곁과 3.1운동 선언서를 쓴 곳 밑의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3가 56-2번지의 3층 집 약 100평의 양옥건물을 1989년 9월 1일에 완공, 1990년 4월 21일 준공을 받아 ⑥ 그곳에서 어느 출판사도 출판 못하는 학적, 신앙적인 신 박사의 서적출판, 세계최고 수준의 예장(총합)총신, 한국의 유일한 참 교회인 새싹교회를 계속하고 ⑦ 국내외의 중요 책들의 출판과 ⑧ 유일한 참 종교인 기독교와 ⑨ 국내외적인 학적과 애국적인 출판을 계속하기 위하여 ⑩ 그 건물을 “신사훈 박사 기념관”으로 삼아, 누구도 그 건물을 팔지 못하도록 하겠고 ⑪ 영구보존의 기념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⑫ 그리하여 국내외적으로 진리, 의리, 참 애국, 참 민주주의 등등을 국내외로 선포하는 건물로 삼으려 한다. ⑬ 신 박사의 “한국 민족성의 근본적 개혁”이란 논문도 지상 발표되었다.






김광기 2012/01/31 20:25 address / modify or delete / reply
신사훈 박사님 명륜동 새싹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칠때 그때 배웠던 제자입니다. 그분의 시편 23편의 히브리어 성경을 눈을 감고 읊조리는 그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박사님이 그토록 원하던 본향으로 가셨군요. 그러나 그 가르침은 남아 저를 목회하게 만들고 저 또한 그길을 지양하면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 감동이었습니다.

아르티움 2012/02/17 23:38 address / modify or delete
반갑습니다.
주님 안에서 선한 싸움 이어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