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공회의 원어론에 대한 좋은 글 - 요21:15-17 '사랑'의 원어 구별 필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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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공회의 원어론에 대한 좋은 글 - 요21:15-17 '사랑'의 원어 구별 필요 없음


공회는 원어를 잘 몰라도 성경 전체를 통해 일반신학계의 원어 지상주의를 배격해 왔는데, 신학을 한 사람들은 무식하다며 냉소해 왔습니다. 고신의 글을 소개합니다. 원어 지상주의를 경고하며 구체적으로 제시한 자료를 살펴 보셨으면. 원어를 모르고는 해석할 수 없다는 이들이 가장 자주 들고 나오는 성구 중의 하나입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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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1:15-17에서 사용된 ”아가파오” 와 ”필레오”


이병구 목사





머릿말

한 신학생이 “요한복음 21:15-17에서 사용된 ‘아가파오’와 ‘필레오’ 라는 두 헬라어 동사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내게 질문했다. 이 본문에 대한 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취급된 해묵은 과제이지만 오늘은 “한글 두 역본 비교해서 읽기”(요한계시록)를 잠시 접어두고 이 주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Moise,s Silva가 그의 책 성경어휘와 그 의미(Biblical Words and Their Meaning)에서도 밝히듯이, 굳이 어원 연구를 할 필요가 없는 단어에 대해서도 종종 어원을 따지는 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가 오래 전에 그의 과목을 수강했을 때, 그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자기 아내가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성경원어 학자인데, 왜 설교 시간에 성경원어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냐?”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설교 시간에 헬라어 어원 얘기, 아니 헬라어는 되도록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는 우선 헬라어 어원을 쉽게 말할 수가 없고 (헬라어 사전 자체도 비평해야 하기 때문에) 혹은 언급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며, 또 단어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미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헬라어의 “에클레시아”(교회)를 전치사 “에크”(밖으로)와 “칼레오”(부르다) 의 합성의미로 보는 것, 즉 교회는 (세상) “밖으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 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어원적 오류(etymological fallacy or root fallacy)라고 말했던 것 같다. D. A. Carson도 그의 책 석의적 오류들 (Exegetical Fallacies)에서 이와 비슷한 어원적 오류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머릿말이 이렇게 긴 이유는 요한복음 21:15-17에서 사용된 “아가파오”와 “필레오”에 대해서도 동일한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1]



본론

1. 요21:15-17에 나오는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의미에 대한 해석 약사[2]

오리겐 (Origen)이 이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했던 것 같지만,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등 대부분의 헬라어 교부들은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하지 않았다. 어거스틴 역시 두 단어의 뜻을 특별하게 구분하지 않았으며 종교개혁시대의 헬라어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Erasums, Grotius).

주로 19세기의 영국 학자들, 특히 트렌취(Trench), 웨스트코트(Westcott)와 플러머(Plummer)등이 이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했다. 특히 트렌취는 1880년에 신약성경의 동의어들(Synonyms of the New Testament)이라는 책의 한 장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관계를 다루었다. 그는 헬라어 역사가 크세폰 (Xenophon, 435-355 BC)의 문헌과 로마 철학자 시세로(Cicero, 106-43 BC) 및 성경 외의 고전 헬라 작품들에서 두 단어가 구별되어 사용된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런 구분을 요한복음 21장에 적용하였다. 1881년에 웨스트코트는 요한복음 주석을 발간했는데, 그 주석에서 그는 “아가파오”를 “보다 높은 사랑”(higher love)으로 “필레오”를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 (the feeling of natural love)으로 설명하였다. 이후에 스픽(Spicq), 렌스키(Lenski)와 헨드릭슨(Hendriksen) 등이 이 견해를 수용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한국의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그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해서 설교하거나 설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버나드(Bernard), 모팻 (Moffat), 본스벤(Bonsirven), 불트만(Bultmann), 바렛(Barret), 브라운(Brown), 모리스(Morris), 핸첸(Haenchen)과 비어슬리-머레이(Beasley-Murray등 근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견해를 거부하였다.



2.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두 단어들의 사용 용법

독자들이 잘 알다시피,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파악할 때에 일반적으로 공시성(synchrony)과 통시성(diachrony)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전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문맥상의 의미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더 나아가, 사전을 사용하면서도 틀린 의미를 부여할 때가 있지 않은가? 가령, 외국어의 초보자가 단어의 의미 범위(semantic range)가 넓은 단어의 뜻을 사전을 통해 알고자 할 때에 정확하고 적절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난제가 될 때가 있다. 그 때 도움을 주는 것이 문맥이다. 근접 문맥 속에서 의미 파악이 어려울 경우 원접 문맥 전체(책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문제가 되는 두 단어들이 요한복음 전체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1) “필레오”의 사용 용법
(1) 요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
(2) 요11:3: “이에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서서 사랑
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신다는 나사로 누이들의 판단
(3) 요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한다는 유대인들의 판단
(4)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사람의 자기 생명 사랑
(5)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세상의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 대한 사랑
(6) 요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1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 2제자들에 대한 성부의 사랑
(7) 요20:2: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2) “아가파오”의 사용 용법
(1)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세상)사람들에 대한 성부의 사랑
(2) 요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성부의 성자 사랑
(3) 요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사랑 (가정법)
(4) 요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나사로와 그 누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5)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제자들끼리의 사랑과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


3) 잠정적 결론

요한복음에서 두 용어는1 성부의 인간 사랑, 2성부의 성자 사랑, 3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 4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사랑등에 상호 교환적으로 구분없이 사용되었다. 즉, 요한은 요한복음에서는 이 두 단어를 의미상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만약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아람어로 이루어졌다면 헬라어의 이 두 단어를 구분하여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둘 다 기본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는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70인역에 사용된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사랑한다는 하나의 히브리어를 두 단어로 번역했다(비록 “아가파오”가 더 자주 사용되었지만).[3] 두 헬라어 단어의 상호교환 사용은 적어도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의 글쓰기 방식을 반영하는 듯 하다. “내 양을 치라” 와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도(“양”이라는 단어와 “치라”와 “먹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3.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사용 용법

요한1서에 “사랑한다”는 말이 수 차례 등장하는데 모두 “아가파오”만 사용되었다. “아가파오”는 (1)하나님의 사람 사랑, (2) 사람의 하나님 사랑, (3)사람의 사람 사랑(크리스챤의 형제 사랑)과 (4)사람의 세상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즉 “아가파오”라는 단어는 어떤 형태의 사랑을 뜻하든지 상관없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사랑을 뜻하는 단어는 주로 “아가파오”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19에서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필레오”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결론

요한은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때에는 “아가파오”를 자주 사용하는 듯 하다. 그는 그 단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이 단어는 “고상한 사랑”이나 “하나님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되지 않는다. 사도요한의 글 속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상호 교환되어 특별한 의미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경 언어의 어원이나 의미에 대해서 과장하거나 남용하지 말라는 (물론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 모세 실바(Moise,s Silva)의 충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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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A. Carson은 그의 책 석의적 오류들에서 본문의 두 단어의 의미와 오석(misunderstanding)에 대해서 다소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 NET Bible, 2013-14. 본글의 많은 내용은 NET Bible의 글을 번안 소개한 것이다.

[3] NET Bible,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