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선교, 지역, 교파 -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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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선교, 지역, 교파 - 한국교회사



한국초기 선교에서의 지역성地域 敎會史

2012/04/04 00:53


http://blog.naver.com/kjyoun24/60159549562















한국초기 선교에서의 서울과 평양


지금 서울과 평양은 그 대립이 극단에까지 가있다. 같은 민족인데도 어느 다른 나라보다 더한 적대감과 증오감으로 차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한국 초기선교 상황 그리고 훨씬 뒤에도, 서울과 평양의 갈등은 그 대립양상이 한국교회가 겪은 가장 가슴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당시 평양은 모페트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계 선교사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서울은 언더우드를 비롯한 약간은 개방적인 선교사들이 몰려 있었다. 서울계 개방적인 선교사들이라는 말은, 그들이 복음전파 이외에도, 의료나 교육, 산업과 같은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에까지 교회가 구원의 손길을 뻗어야 한다는 소신이 넘쳤기 때문이다. 이런 지리적인 차이가 실상 신학적인 차이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신앙에서 지리적인 요소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사실 장로교의 선교지역으로 평양을 중심으로한 서북(황해도 평안도) 지역이 여러 선교기관들 간의 합의로 배정된 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서북 지역은 본래 고구려 지역으로, 조선조에서는 경원되던 곳이다. 더구나 19세기 초 홍경래란 이후에는 서북 지역 사람들이 중앙정부의 의구심과 미움을 사서,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등용이 안 되는 수모를 겪어온지 오래였다. 후에 기독교의 교세가 가장 왕성한 지역으로 손꼽히던 정주나 선천 지역사람들은 조선조에서 과거시험 급제자가 가장 많이 배출되었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도 등용의 문이 막히고 있었다. 서북 홀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초기 선교사들은 서북인의 기상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까지 높은 평가를 예외 없이 남기고 있었다. 선교 성공의 배경에 그 지역사람들의 기품과 기골, 그리고 역사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 그 지방은 소작인의 수가 비교적 적고, 대개는 자작 겸 지주, 아니면 자영업자들이었다. 따라서 아쉬울 것이 없었던 셈이다. 독립적인 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영명하고 강력하고 늠름한데도 그 실력을 발휘할 곳이 없었다. 기독교가 들어오자 그들은 몰려들었다. 조직이 있었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가 뚝 터진 물결처럼 몰려드는 인파로 차고 넘치고 충천했다.


반면에 서울은 조선조의 왕실과 조정이 있었고, 그래서 세도 높은 사람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교 이념을 정치나 행정에서 집행하는, 체제와 전통의 담당자들이었다. 막강한 권력의 집중된 곳이었다.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드리지 아니하는 이상 교회는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런 판국이라면 교파 배경이 다르더라도 손잡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위 에큐메니칼한 교회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신앙의 보수주의는 수정될 수밖에 없다. 신앙이 다른 교파간의 협력은 무엇인가는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문제가 밝혀진 셈이다. 서울과 평양의 교회는 이미 다른 길, 상반된 길, 피차 불신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는 정황 속에 있었다. (2010.7.17.한국장로신문 / 민경배 목사)



한국교회 지역성 문제


한국교회의 교세분포를 지역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한국교회의 전체 교세 중 장로교회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3분의 2가 서북에 치중되어 있었다. 역시 미국의 막강한 선교사 수가 그런 형상을 낳았을 것이다. 장로교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도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와 호주가 있었고, 미국 장로교 선교사도 남북의 장로교가 따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는 압도적이었다. 감리교도 미국에서 왔지만 남북 감리교 정도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한 사람도 파견되어 오지 않았다.


그러니 뒤이어 들어온 성공회나 성결교회 그리고 침례교회는 파송한 선교사의 수가 워낙 적었고, 선교비도 넉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들어온 선교부 지간의 지역분할, 곧 교계예양정책으로 전국 지역이 다 나뉘어 있어서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그들의 교세 약세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교계예양의 지역분할은 행정구역처럼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서북과 비서북 지역 간의 사회적·정치적 상극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그것 때문에 한국교회의 지역적 특성이 형성되고, 심지어 나중에는 교회 분열의 배경 역할도 하게 된다.


가령 서북지역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 조치는 장로교회로서는 천행의 기회였다. 그 지역은 청일전쟁·러일전쟁이 치러진 곳이었다.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군수물자 운반이나 인력 동원, 지역 자원의 수급, 이런 것들이 작용하여서 상당한 금융과 물자가 유통되고 있었다. 그런 곳에 장로교가 들어간 것이다. 더구나 전쟁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거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기독교 조직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보호와 안전의 길이기도 하였다. 이 지역은 나중에 장로교 통합측의 지역적 근거지가 된다. 서북 지역 중 영변 일대는 미국 북감리교가 담당하였다.


한편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가 처음 맡았으나 1930년대 캐나다 본국에서 여러 교파 합동의 연합교회가 성립되어 그 연합교회가 맡게 되었다. 함경도의 진취적인 성품에 연합교회의 자유주의적 신학이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우리나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모두 그 지역 출신들이다. 이 점은 후에 다시 밝힐 기회가 있을 것이다.


경북 지역은 미국 북장로교가 맡았다. 보수적인 지역 특성이 그대로 기독교에도 상당 부분 도입되었다.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호주선교부-주)가 경남지역을 맡았는데, 미국 남장로교 자체가 보수적인 데다가 영남지역이 또 그래서 그곳 장로교는 강력한 보수진앙의 장로교 고장으로 굳혀졌다. 후에 고려파가 여기 들어선다. 호남지역 역시 미국 남장로교가 맡았다. 하지만 농촌 지역이 넓게 퍼져 있어 교세발전은 느린 편이었다.


서울·경기·충청지역은 대개 미국 북감리교가 맡았다. 경인지방은 성공회가 선교하였고, 강원도는 남감리교가 맡아 선교하였다. 하지만 이런 조치에서 5천명 이상의 도시는 예외로 하였다. (2010.7.24.한국장로신문 / 민경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