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안식일, 주일 역사와 고찰, 찬반

일반자료      
쓰기 일반 자료 초기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신학] 안식일, 주일 역사와 고찰, 찬반


1.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논의
韓???의 安息日-主日論? 원래 이 논문은 작금(昨今)에 벌어지고 있는 한국교회내의 안식일-주일 논쟁을 성경적-역사적 관찰을 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가 분열이나 정죄의 아픔이 없이 관용과 이해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려는 목적을 갖고 저술되었다. 이러한 방대한 목적을 위해서는 신구약에서의 안식일관련구절들에 대한 연구, 속사도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안식일-주일관의 변천에 대한 교회사적인 연구흐름을 분석하는 장황한 언급들을 다루려고 하였으나, 필자에게 주어진 지면과 시간관계상 개략적인 언급과 해결책제안으로 그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우리말로 된 안식일-주일에 대한 최근의 자료들은 양용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서울: 이레서원, 2000)와 목회와 신학 2001년 3월호에서 특집으로 다루었던 <안식일에서 주일성수까지>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본 논문을 준비하면서, 몇가지 이유들로 해서, D. A. Carson(편), From Sabbath to Lord"s Day: A Biblical, Historical, and Theological Investigation (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s, 1999)를 직접적으로 참조하였다. 첫 번째는 목회와 신학에 게재된 From Sabbath to Lord"s Day의 내용 중에서 일부만 채택하여 어느 정도는 요약적인 번역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원 저자들이나 그 책의 의도를 "완벽"하고 충분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는 점이 있고 양용의 교수도 이 책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책은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한계점 때문이다. 양용의 교수의 책에 대한 필자의 서평은 <뉴스앤조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http://www.newsnjoy.co.kr). 필자가 논의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From Sabbath to Lord"s Day를 직접사용할 경우는 영어로 저자이름과 페이지를 표시하고 우리말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한글로 저자이름과 페이지를 표사하여 출처를 밝혔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성기문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건강교회운동 총무(現). 대구에서 안식일에 관한 글을 발표할 수 있게 해주신 여러분께 이 기회를 통하여 감사를 드린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롬 14:1, 10).“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골 2:16-17)필자는 이미 주5일근무제논쟁 주5일근무제에 대한 필자의 입장은 본 자료집에 첨부되어있다. 참조바란다. 을 통하여 새로운 안식일-주일논쟁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이번 대구에서 발생한 안식일과 십일조와 관련된 목사제명문제가 오히려 한국교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접하는 교회들에서의 신학-교리논쟁은 대부분 신구약성경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혼돈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이 교회사 속에서 해석학적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대립 혹은 수정발전되어왔다. 이러한 이견(異見)에 대한 문제는 종교개혁이나 교단분립이나 지속적인 교단내의 갈등을 불러일으켜 왔다. 한국교회에서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공적 논의가 철저하게 금기시되었거나 억압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소위 ‘아름다운’ 교단적, 혹은 한국교회적 전통의 수익자(?)로 남으려는 부단한 노력들을 경주해 왔지만, 이것은 진지한 연구와 토론을 통하여 아름다운 교리와 전통으로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각한 고민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학문적, 공개적 대화에 대한 요청마저도 아름다운 전통과 교단적 일치, 혹은 교회의 건덕(健德)을 위해서 묵살되어왔던 한국교회의 ‘전통’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심각한 안식일논쟁은 예수 당시(예, 마 12:1-14; 눅 13:10-17; 14:1-6; 요 5:1-18)와 초대교회(예, 골 2:16-17; cf. 롬 14:5-8; 히 4:1-11)에서도 있었지만, 교회사적으로도 안식일 논쟁은 그 역사가 깊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우리가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신약내에서의 일요일(혹은 주의 날)과 안식일과의 관계성을 살펴볼 뿐만 아니라, 교회사적인 이해와 발전도 살펴보아야 한다.다음의 구분은 Carson(1999:14ff.)의 것을 따랐다.1) 전통적인 청교도적 안식일-주일엄수주의: W. Rordorf-J. Franke-R. T. Beckwith &W. Stott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안식일인 토요일이 일요일인 주일-안식일로 전이되었다고 주장한다.2) 수정된 청교도적 안식일-주일엄수주의: P. K. Jewitt가 대표적인 인물로 전이의 개념보다는 초대교회의 일부 일요일준수의 관습에 근거하여 주장하였다.3) 제7일안식교의 안식일-토요일엄수주의: S. Bacchiocchi가 안식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일요일예배는 초대교회의 산물이 아니며, 태양숭배의 제의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 반(反)안식일 엄수주의:D. A. Carson(p. 16)등이 주장한 것으로, 세부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진다: ① 신약에서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전환신학(‘transfer" theology)을 발전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② 안식일준수가 창조시부터의 원리로 보기는 어렵다 ③ 신약의 저자들이 의식법과 윤리법으로 구분하였다고 보지 않는다 ④ 주일의 준수는 2세기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⑤ 일요예배가 기독교인의 안식일은 아니다.1. 구약에서의 안식과 관련된 제도와 절기들 해롤드 드레슬러, ‘구약에 나타난 안식일계명들,’ 목회와 신학 2001년 3월호, pp. 72-83; 양용의, pp. 27ff.구약에 안식일 개념이 한가지로 유지되어왔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약 속에서도 안식일의 개념은 변천되었으며 구약의 안식일 개념은 다양한 하부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는 개략적으로 그 의미와 하부요소들을 나열하고 그 신학적 의미와 내용을 정리하는데 그칠 것이다. 또한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관련주제들은 속죄일로서의 안식일(fp 25:2-7; 26:34-35)과 안식년(레 25:2-7; 26:34-35)에 관한 것이나 여기서는 시간관계상 다루지 않을 것이다. 1.1.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된 안식일 규정(창 2:1-3; 출 20:11; 31:17)안식(싸바쓰)의 개념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원리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안식일준수라는 개념이 창조원리에서 등장하는 것도 아니며 법제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양용의, p. 30.오히려 창세기본문은 창조사역완성과 갱신의 의미의 안식이 나타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안식이란 단순히 일의 정지나 사역의 그침의 의미보다는 기존의 일의 마무리(終結)와 새로운 일을 위한 원기회복(refreshment)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낮과 밤이 반복되는 6일의 순환과는 다른 시작과 끝이 없는 7일째의 안식은 그 개념이 쉽게 종말론적인 개념으로 확대(擴大)되기도 한다. 드레슬러, p. 77.7일째날을 복주시고 거룩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의 일환이었다는 점도 말해준다. 다시 말하자면, 7일과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선언과 행위로 말미암아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의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양용의 교수의 견해(p. 32, n. 18)처럼, 이러한 적용은 예수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에 적용될 수 있다.안식일규정으로서의 법제화는 창세기보다는 출 20:11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안식일은 언약의 표이며 언약준수의 시금석으로 작용한다(출 31:12-17; 겔 20:10-26; 22:8; 26; 23:28).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노동이 인간의 노동과 대조되어 인간의 측면에서의 노동과 쉼의 개념과 대조되어 입법화되었다. 중요한 점은 특히 출 34:21; 23:12에서는, 모든 노동하는 존재들(주인과 가족과 종과 동물들까지도)에 대한 배려가 나타난다. 주석적인 논의는 필자의 ‘安息日論爭: 너는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를 보라.이러한 개념들은 안식년에서 발견되는 가난한 자들과 땅과 들짐승에 대한 배려까지도 포함된다고 하겠다. 여기서의 안식일의 거룩성은 “무차별적으로” 노동에서의 쉼(즉 창조의 원리의 회복)을 상기하는 것이고 준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애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창조원리의 적용과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정의의 집행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안식에 대한 거부는 단순히 날짜를 지킴으로서 얻는 종교적 만족감이나 탁월성의 보상이라기보다는 창조섭리에 대한 거부로 여겨져서 사형이 집행되었다(출 31:12-17). 추가적으로 신 5:12-15에서는 이스라엘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새창조적인 개념에서의 안식의 개념 이러한 안식의 개념은 여호수아서 등 역사서에서 잘 드러난다.과 노예의 중한 짐으로부터의 놓임을 기념하는 날로서의 휴식이 강조되었다. 1.1.2. 제의적 규정들(레 23:3; 민 28:9-10; cf. 레 24:5-9)과 세부적인 금기사항들(출 16:22-30; 35:3; 민 15:32-36) 역사서에 나타난 안식일에 관련된 회합(왕하 4:23; 11:4-12; 대하 23:1-11; cf. 왕하 16:18)과 제사(대상 9:32; 23:28-31; 대하 2:3; 8:13; 31:31; cf. 느 10:34)도 참조하라. 안식일에 대한 세부규정들은 느 10:32[10:31]; 13:15-22를 보라.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섭리 혹은 구속사적 업적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예배하는 일들에 대한 규정 드레슬러, p. 75.도 있으며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이 안식(일)의 주관자시며 그 안식의 거룩성이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언약의 당사자인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법적인 구속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안식일준수의 거부는 언약파기에 따르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드레슬러, p. 78f.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와 새 이스라엘백성이 맺은 언약의 조건이 안식일준수였는가, 즉 안식일준수가 그리스도의 언약의 표였는가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cf. 드레슬러, p. 82. 1.1.3. 선지서에 나타난 안식일준수의 특징들(사 1:13; cf. 호 2:13; 사 66:23; 겔 45:16-17; 46:1-12)마찬가지로 그러한 안식의 본뜻과 그에 대한 제의적 규정들과 세부적인 금기사항에 대한 일종의 적용으로서 선지서는 안식일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제의와 삶과 무관한 성일(聖日)과 절기와 희생제물과 안식일의 준수는 무가치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호 2;13; 사 66:23; 사 1:13; 호 2:13; 암 8:5; cf. 사 56:18). 또한 안식일의 위반 형벌(사 56:1-8; 58:13-14; 겔 44:24)과 축복(사 56:1-8; 58:13-14; 겔 44:24)이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인 것처럼 여겨진다. 안식일이 언약준수의 표일 수는 있지만, 안식일 준수가 곧 언약 그 자체는 아니다. 정리컨대, 구약에서의 안식일준수의 개념은 인류애와 신학적인 내용적 특징을 갖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야웨와의 언약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며 단순한 쉼의 문제뿐만 아니라, 야웨에 대한 경배와 찬양적 요소들도 포함하였다. 구약에서도 안식일에서 일을 해야할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노동행위는 중지해야 했다. 그날에 감사와 찬송과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선포와 노래로 기뻐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것 같다(시 92편). 그러나 이러한 안식일의 예배와 찬양적 목적은 일주일 전반에서의 표편적인 의무를 축소하거나 대체하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와 종말론적 안식일 앤드류 링컨, ‘신약성경에서의 안식일과 안식 그리고 종말론,‘ 목회와 신학 2001년 3월호, 106-119신구약중간시대와 예수시대의 유대교의 안식일은 수많은 규정들의 확대와 문자적 준수를 발견하게 된다. 양용의, pp. 75ff.; C. Rowland, pp. 44-55.이러한 경향성은 지극히 세밀한 결의론적 조항들의 산출과 안식일위반에 대한 관대한 이해의 발전, 그리고 언약적 의미와 축제적 성격의 강조가 결여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배경과 구약적 배경 속에서 복음서에서는 안식일의 주관자이시며 안식을 이루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등장한다.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나타난 안식일개념에 대해서는, 양용의, pp. 211ff.을 보라. 사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개념에 대해서는, Carson, pp. 58-97을 보라.이것은 전혀 새롭거나 율법을 파괴하는 행동이나 이해가 아니었다. 소위 율법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과의 갈등도 선별적 문자주의 혹은 규례주의자들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하였다는 점도 상기되어야 한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의 관심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였다면, 예수의 관심은 “왜 안식일을 지키는가?”였다. 양용의, p. 468.일견 예수의 안식일의 완성은 인류애적인-정의적인 개념보다는 안식일의 주관자로서 종말론적인 완성의 측면에 더 강조점이 있었던 것 같다. 양용의, p. 469.예수는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가르치셨고 실제의 사역(귀신의 축출과 다양한 치유사역들, 이삭을 베어먹을 때의 교훈, 안식일 회당에서의 희년복음의 선포 눅 4:21. 이는 안식개념의 확장인 희년의 시작을 예수께서 자신의 공사역에 대한 시작의 선포로도 볼 수 있다.등)을 통하여 안식일의 참 의미를 청중들에게 전하려고 하셨던 것처럼 보인다. 복음서 사이에서의 차이점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양용의, pp. 371ff.를 보라.또한 예수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처럼 자신도 안식일에서도 일한다고 말한다. 이는 전혀 모순되는 행동은 아니다. 바울에게서 안식일-주일관은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그에게 있어서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을 따랐으며 성령의 법에 의존하였다. 바울은 갈 4:10, 롬 14:5, 골 2:16에서 안식일등의 날 준수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Lacey, pp. 160-195를 참조하라.단언할 때, 날을 지키는 것과 지키지 않는 것으로 신앙의 척도로 판단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점이다. 이것은 자유의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의 종말론적 안식관은 히브리서에서 더 현저하게 발견될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안식의 성취와 현재적 안식화(安息化), 그리고 미래적 안식의 약속으로 구분될 수 있다. 링컨, pp. 114ff.다시 말하자면,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안식은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함으로 현재적으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며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창조시에서 제시되었던 종말론적 안식(eschatological rest)은 완성될 것이다. 링컨, pp. 112ff.2.1 신구약에서의 ‘주의 날’의 개념구약에서 ‘주의 날’은 주로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심판과 징벌의 날을 의미하였다. 신약에서는 안식후 첫날이라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기도 했지만,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계1:10에서 단 한번 사용된다. Richard Bauckham(p. 227)에 따르면, 계시록의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①종말론적인 주의 날; ②안식일(토요일); ③ 부활절; ④ 일요일 중의 하나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우리는 지나치게 불완전한 증거들을 갖고 신약본문들내에서 전이신학이나 토요일-안식일준수관(제7일안식교도들은 이점을 주장한다)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속사도시대때 등장하는 문헌들에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안식일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의 날이 매주 행해지는 특정한 예배의 날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특정한 예배의 날(일요일)의 기원이 신약시대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일요일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는 역사적 확증과 신념은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안식후 첫날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는 점만으로 기독교의 일요예배의 기원을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배와 모임의 측면에서의 초대기독교인들의 집회는 적어도 유대인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일시적이었을지라도, 안식일모임과 기독교인들의 가정모임이 병존했던 것처럼 보인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의 안식일과 일요일과 율법과의 상관관계를 논한, M. Max B. Turner, pp. 100-157를 참조하라.어쨌든 계시록에서의 주의 날이 일요일이라는 특정한 날일 수는 있으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날과의 연관성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예배모임을 규정짓는 것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주권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가 ‘주의 날’로만 축소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또한 고린도전서(고전 16:2)에 나오는 일주일의 첫날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인들의 집회날이거나 예배중에 헌금을 내라는 증거본문이 아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오해하고 있는 구절들 중의 하나다. Lacey, 184ff를 보라.비록 그것이 소위 일요일에 받았던 요한의 묵시였을 지라도, 요한 계시록의 종말론적 교회관과 예배개념은 우리의 주일예배의 그것과는 스케일의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앞서 말한대로, 초대교회공동체 내에서 유대인의 안식일과 기독교인의 주의 날에 대한 대조적인 이해가 태동하였다고 볼 수는 있지만, 양용의, p. 433.신약의 신앙공동체가 주의 날이 안식일을 대체하거나 계승하는 날로 보았다는 확고한 증거는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안식일의 연장이라는 개념도 찾을 수 없다.3. 신약시대이후의 안식일-주일논쟁 양용의, pp. 421ff.; Bauckham, pp. 251-298; idem, pp. 300-309; idem, 312-341.속사도시대(주후 120-400년경)-- 얼마 남아있지 않는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유대인의 안식일준수와 기독교인의 주일에 대한 차별적 추구는 점차로 명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과 단절>의 의식은 후대에 가서 <차별과 연속>의 의식으로 변천하였던 것 같다. 초창기에는 (이그나티우스의 경우에) 안식일적 개념은 극명하게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신약시대에 나타나는 율법주의적 경향이 속사도시대때 더 극심해졌기 때문에 양용의, p. 432.사용되었던 극약처방일 수도 있다. 안식일준수가 정죄되었고 주의 날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조는 후대에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전이”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도 부인될 수 없다. 양용의, pp. 433f.바나바의 경우는 상당히 알레고리적으로 구약을 이해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미래적인 성취로 이해하였다. 그는 일요일을 축하의식과 부활승천을 기념하는 날로 보았다. 디다케는 주의 날에 거룩한 식사를 하고 죄를 고백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마지막으로 디오그네투스 서신에서도 유대교의 안식일준수에 대한 반대의 논증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추가로 일요모임 혹은 예배에 대한 증거들은 산발적인데, 다음과 같다. 소아시아 버두니아 지방총독을 지낸 플리니 플리니의 서신(10:96)는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서신(109년)에서 황제의 칙령을 따라 모든 일요일의 저녁집회를 금지하자, 기독교인들이 저녁식사시간에 모이는 것을 그만 두었다고 보고한다. 이후로 비두니아 지방의 일요일 저녁집회는 사라지고 나중에 제국 전체로 확대된 것 같고 결과적으로 일요일 아침예배로 이전되었다고 본다. 유광덕, 교회사밖에서 만나는 재미있는 교회사이야기(서울: 처음, 2002), 216-8그는 기독교인들이 지정된 날 동트기 전에 미리 모여 모임의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저스틴(Justin) 역시 자신의 변증서 1 Apol. 65 에서 일요일 아침에 예배를 보았다고 명시하였다. 중세-- 일요일이 쉬는 날로 공표된 것은 주후 321년 콘스탄틴대제의 칙령에 의해서다. 명확한 의미에서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전이신학(轉移神學)은 330년이후 유세비우스의 시편 91편주석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에게도 그 전이는 예배적 측면이었지, 안식의 측면은 아니었다. 심지어 6세기까지 일요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는 교회법적 시도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일요일적 안식일엄수주의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나온다. 그는 스콜라철학적 자연법이론에 근거하여 십계명은 자연법이므로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의식법적인 측면(7일)은 폐지되었으나, 도덕적 측면(노동의 금지)은 유효하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시대--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스콜라철학적 안식일엄수주의를 강력히 공격하거나 포기하였다. 예를 들어서 장 칼뱅(기독교강요 2.8.28-34)은 안식일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으며 폐지되었고 일요일예배의식은 편의와 질서를 위한 것이지만, 일요일의 휴식은 예배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일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고 양용의, p. 16.일요일-안식일준수라는 “교회규정을 고수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들보다 세배나 더 유치하고 육욕적인 안식일 엄수주의적 미신”이라고 말할 정도였다(2.8.34).종교개혁이후시대--불행하게도 17세기이후에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이전의 안식일엄수주의로 회귀하였고 한국장로교신앙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소요리문답, 예배모범 등) 자세한 논의는 양용의, pp. 480ff.를 참조하라.에는 전형적인 그러나 더 심한 청교도적 안식일엄수주의가 내포되었다. 이후에도 이러한 청교도적 안식일주의외에도 이와 유사한 운동들은 제7일안식일침례교나 제7일안식일재림교에 의해서 날짜가 변경된 채로 유사하게 주장되었다. 우리가 이러한 개괄적인 연구를 통하여, 구약적 안식일과 유대교적 안식일, 기독교적 안식일간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러한 기독교안식일의 개념은 오히려 유대주의적-스콜라철학적 안식일엄수주의-청교도적 안식일엄수주의일뿐 성경적인 안식사상이나 바울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이나 심지어 요한 칼빈의 안식일준수에 대한 이해와도 상응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4. 결론개인적으로 필자는 본 논문을 정리하면서 더 확고한 안식일-주일관을 나름대로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은 Carson의 견해들을 따르는 것이 더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동의는 건전한 안식관에 대한 공유와 실천적 대안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 상황 속에서 몇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1)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측면에서 모든 대화나 화해는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내에서 이러한 세부적인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동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의 동질성과 형제애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2)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발생하는 교회 내에서의 정죄와 갈등과 분열은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불건전하며 합당한 대처방안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의 개념에 대한 충분한 논의없이 이러한 다양한 주장들에 대한 억압이나 무관심으로 대처하거나 일부 대형교회들이 구상하듯이, 주말교회나 전원교회로 주5일근무제등 안식일-주일에 대한 논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물론 기존교인들의 휴가욕구와 기존교회들의 일요일예배참여유도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지방이나 농촌지역의 교회들과 연계하여 도움을 주고 섬기는 프로그램보다는 일부 대형교회들이 휴양지나 지방에 “분점”교회나 예배의식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3) 안식일-주일논쟁이 이해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제3자들에 의해서도 학술적이고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4) <일요일에 세속적 노동의 중단과 예배의식에 참여 및 교회봉사>라는 측면보다는, <쉼과 예배, 그리스도와 구원, 종말적 임재> 그리고 <정의와 자비와 인권> 양용의, p. 497.이라는 신구약성경의 안식의 개념의 이해와 실제화가 본 논의의 중심으로 다루어야 한다. 5) 소위 주일예배는 한시간 정도의 ‘예배’ 퍼포먼스 그 이상이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 Lincoln, 405: 그는 제의적 예배란 교회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지만, 예배란 교회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주권적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기독교인의 일요일예배의식이란 특정한 ‘하루’동안 나머지 6일의 삶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즉, 그리스도의 주권인정과 주권의 확장)와 그가 우리에게 마련해주시는 안식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신앙공동체내에서 실현되고 예시되는 한에서만 의미가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식은 신약시대의 공동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의 한 부분과 영역이었지, 삶과 괴리된 현재와 같은 하나의 ‘지켜야’ 할 의식(儀式)이었던 적은 없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의 의미는 단순히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의 의식적 차원도 아니고, 선별적이고 자의적인 측면에서의 안식일엄수주의가 아니라, 창조의 질서와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본래의 뜻이 인지되고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 5 -安息日論爭: 너는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 본 원고는 <복음과 상황>에 게재되었던 것을 일부 정정한 것이다. 필자가 초고를 준비하는데 일부 재정적인 도움을 주신 유정섭 목사님께 이 기회를 통하여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한다.들어가는 말오래전에 이미 일부 보수적 기독교목회자들 사이에서 <주5일근무제>가 주일예배참석 교인수의 감소를 부추겨 결과적으로 교회재정을 악화시킬 것에 대한 우려와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터라, 지난 8월 13일에 한기총의 <교회발전연구 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종윤 목사(교발연의 위원장이다)의 <주5일근무제>반대 2001년 8월 13일자 조선일보 기고란[6면 상단왼쪽]에 서울교회[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담임 이종윤 목사의 "週5일 근무"재고를 촉구하는 글는 이미 예견된 문제였다. 이러한 주장은 예상대로 많은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고 최근의 한 <주5일근무제>에 관한 토의에서도 보듯이, 심지어 개신교 내에서 보수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마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이견과 의견대립의 불씨를 여전히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종윤 목사의 반대발표문이 기고되었을 당시에 필자도 여러 가지로 그의 주장에 대한 허구성을 이미 밝힌 바 있으므로 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co.kr)에 "한기총의 노동관 재고를 요청한다"와 "한기총의 주5일근무제가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의 허구성"이라는 기사를 낸 적이 있으며, 8월 17일 CBS의 오후프로그램에서 주5일근무제논쟁에서 주5일근무제찬성쪽 입장에서 전화토론에 참여한 바 있다. 여기서는 기존의 필자의 주장을 요약하고 이후에 좀 더 연구한 바를 첨가하는 것으로 본 글을 마칠까 한다.주5일근무제 반대의 요지와 비판다음은 필자가 정리한 이종윤 목사(한기총의 교회발전위원회)의 <주5일근무제>반대결의사항의 요지다.첫째로, <주5일근무제도>는 6일간 열심히 일하고 7일째를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키라고 한 십계명의 한 계명을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를 쉬는 것이 성경적 진리이며 일반화된 규정인데 기독교인이나 세상사람들이 서구의 잘못된 제도를 수입한다는 것이 염려된다. 둘째로는 향락산업과 소비성향을 부추길뿐이다. 세계최고수준의 165/175일(반년)의 휴가를 갖게 만드는 서양의 타락한 노동관의 도입을 의미할뿐만 아니라, 특별히 불건전한 휴가와 청소년문제, 그리고 놀고먹자는 식의 안일한 사회의식이 점차 팽배할 것이다. 또한 긴휴가로 인해서, 교회를 공동화(空洞化)시키거나 예비신자들이 교회 나가기가 어렵게 된다. 셋째로, 산업경쟁력의 약화가 우려된다. 근면과 절제의 정신은 일제시대부터 기독교인들의 덕목이었고, 이미 칼빈과 청교도주의의 무한한 욕구에 대한 절제와 생활 속의 향락을 억제해야한다고 역설했는데 <주5일근무제>는 이에 반하는 행위일뿐이다.필자가 이미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그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몇가지로 분석해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필자의 "한기총의 노동관 재고를 요청한다"를 참조하라.1) 이종윤 목사의 주장은 성경적인 노동관과 안식관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없다(자세한 논의는 아래를 보라). 6일간 일하고 7일째에 안식하라는 말씀의 의도는 노동의 신성성과 휴식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하시는 말씀일 뿐이다. 만약 자구적(字句的)인 6일간의 노동을 고수하려면, 하나님의 지엄하신 말씀을 지킬 자가 누가 있으랴? 예를 들면, 국경일이나 휴일, 그리고 휴가가 끼어있을 경우는 어떤가? 심지어 아파도 안된다. 일만해야하는 6일 동안에는 친지나 친구를 방문해도 안된다! 또한 이런 식으로 한다면,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기독교인들도 그 계명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날짜가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은 휴가도 가지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쉬지말고 일주일에 6일간을 꼬박 일하다가, 금요일저녁부터 토요일 저녁때까지 일을 금해야 한다. 그뿐인가, 성경에는 하루에 얼마동안 일하고 나머지는 쉬라고 되어있지 않으니, 24시간 연속으로 일을 해야한다. 잠을 자서도 안된다! 2) 잘못된 연구결과를 통한 한국의 노동현실의 왜곡과 근거없는 주장의 유포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주장 자체가 역사상 유례없는 터무니없는 발상일뿐만 아니라, 과연 <누구를 위한 영적 전쟁인가?>가 의심스럽다. 현재 한국산업사회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볼 때, 몇 일을 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냐보다는 그 휴식의 질이 문제라고 본다. 주5일 근무제가 서구의 타락한 노동관이며 인간의 향락문화의 주요인(主要因)이므로,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과 논리는 역사적으로도 검증된 바도 없으며, 오히려 사회적으로 소수이지만, 종교계와 경제계의 기득권층의 일방적인 논리가 아닌가 한다. 인간의 향락문화가 발달한 것은 정당한 노동관과 휴가관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게다가 노동계의 정당한 권리주장과 요구에 따른 정부의 수용을, 다양한 정치경제논리를 갖고 반대하는 주장들에 오히려 종교적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가하는 의구심이 들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휴식은 노동의 대가이지만, 현대와 같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이 없는 한, 질 높은 휴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건전한 소비문화창출은 오히려 자본주의논리로 무장한 언론매체나 재계나 일부 부유층에 의해서 확산되고 악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쉽게 말하자면, 돈이 있어야 매주 주말에 향락산업을 부추기고 소비성향을 크게 자극할 것 아닌가? 오히려 <주5일근무제>는 자기개발과 가정을 돌아보고 무너진 가족관계나 건강관리 등으로 건전하게 사용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창조적인 휴식은 오히려 건전한 노동문화와 산업경쟁력강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본다. 또한 기독교인이라면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며, 쉬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중의 하나다. 3)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일부 대도시대형교회들에 의한 개교회 이기주의적 발상이 존재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악한 일이다. 한국교회들은 성장이데올로기에 빠져서, 같은 교회교인들이 아닌 한, 다른 모든 기독교인들을 형제나 이웃이 아닌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대화나 배려, 혹은 연합이나 후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면에서 자기가 속한 교회의 교인수의 감소와 그에 따르는 헌금의 격감은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라도 결사저지(決死沮止)해야 하는 일로 여겨진 것이다. 대다수, 아니 대형교회들이 과연 한국의 열악한 노동현실에 대해서 진심어린 관심과 영적인 투쟁을 했던 적이 있던가? 이제 와서 이기적인 발상으로 노동문제에 대해서 편향적인 의견을 강요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사회의 불신자들과 건전한 여론으로부터 일부대도시의 대형교회가 한국사회의 기득권-보수수구세력의 대변자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오인(誤認)하게끔 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교회발전위원회의 <주5일근무제>반대시도는 철회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실현과 한국교회의 건전한 노동문화정착에 대한 이해확보를 통하여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일부 기독교계의 몰지각한 시도들이 초래하는, 복음의 선한 의도와 선교활동의 건전한 통로를 파괴할만한 위험성을 배제시키려는 노력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하겠다.성경이 말하는 노동과 안식일 M. R. Alterman, Form and Meaning in Exodus 20-23 in the light of its Ancient Near Eastern Literary Context (unpublished Ph.D. diss., Mid-America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1998); Gnana Robinson,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Old Testament Sabbath: A Comprehensive Exegetical Approach (unpublished Ph.D. diss., University of Hamburg, 1975); David Noel Freedman, The Nine Commandments: Uncovering a Hidden Pattern of Crime and Punishment in the Hebrew Bible (New York: Doubleday, 2000); 노희영, 최근의 십계명연구(서울: 은성, 1995); N. D. Osborn과 H. A. Hatton, A Handbook on Exodus (New York: UBS, 1999)이제 출애굽기의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개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우리가 다루려는 안식일에 관한 말씀은 10개의 말씀들 중에서 부모에 대한 공경과 더불어 유일하게 긍정으로 시작하는 계명들이다. 물론 그 내면에 부정형(否定形)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신명기의 안식일계명은 야웨가 이스라엘을 구출해낸 구속사건과 관련이 있고, 출애굽기의 안식일규정은 창조사역과 관련이 있다. 물론 두 본문들간의 비평적 관계성 "다른 전승," "이 계명이 종에게도 적용되는가에 대한 설명(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바로에게서 노예였다는 점)," 아니면, "단순히 안식일의 중요성의 재배열(reassignment)에 기인한 것인가?"(Freedman 2000:60).은 쉽게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경우에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의 문제점은 여전히 안식일에 일을 금하는 것의 의미와, 일이란 무엇인가? 이 계명의 위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이다. 출애굽기의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본문(출 20:8-11)싸바트(안식)의 날을 기억해야함으로 노희원, 230, 그것을 거룩하게 지켜라 Alterman(117)은 이 구절을 오히려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로 이해한다. 문제는 안식일의 강조점이 기억하는 것인가,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에 따른 차이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8절).6일은 너는 노동(타보드)을 하고 네 모든 일(콜-므라케테카)을 행할 것이나(9절),제7일은 네 하나님 야웨께 싸바트다. 너는 모든 일(콜-므라카)을 행하지 말라.너나 네 자녀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10절).왜냐하면, 6일간, 야웨께서 하늘들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만드셨으나, 위의 "행하다"에 사용된 것과 같은 동사(아싸)다7일째날에 그가 쉬셨다.그러므로 야웨께서 싸바트의 날을 복되게 하여 그것을 거룩케 하셨다(11절).안식일계명의 구조a v. 8 거룩한 안식일로 기억하라는 야웨의 명령b vv. 9-10a (인간의 수준): 6일간의 일(아싸)과 안식일b" v. 11a (하나님의 수준): 6일간의 창조(아싸)와 안식일a" v. 11b 야웨의 복과 안식일을 거룩케함출애굽기에 나온 십계명의 노동관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부분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첫째로, 6일간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는 하나님이 6일간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의 유비가 무엇인가? 물론 첫번째 질문과 두번째 질문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첫번째 질문부터 해결해보자.본문은 6일간은 노동을 하고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었으나(물론 여기서의 일은 노동을 포함한 모든 일상적인 행위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6일의 일과 행위들은 명령형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할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Osborn과 Hatton, 476) 안식의 날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행하지 못하고 쉬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어떤 일에 대한 언급보다는 모든 구성원들이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가 강조된다(총 6개의 부류들; 나, 자녀들, 남종, 여종, 가축, 심지어 집에 머무는 객). 아마도 당사자 외의 다른 사람들도 일을 하지 말라는 금령은 자신은 안식일을 지키지만, 자기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들을 노동의 굴레 속으로 내몰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가족 구성원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노희영, 최근의 십계명연구(서울: 은성, 1995): 234여기서의 7일째의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과정과 비교되어서 정당화되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6일동안 창조의 일은 노동을 포함한 인간의 일상적인 행위들과 대비되는 것은 아니다. 9절에 나오는 동사들을 살펴본다. 필자가 "노동하다"로 번역한 단어(아바드)는 섬기다, 땅을 경작하다 등의 의미로 쓰이며, "행하다"로 번역한 단어(아싸)는 만들다, 행하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아마도 이 두 동사는 어떠한 직업의 사람이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농부였다면, 농사로서의 노동을 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노예였다면, 주인을 섬기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문맥에서는 노동이라는 말이 반드시 고용인이나 피고용인을 막론하고 땀을 흘려 일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 같다. 또 하나 "행하다"는 말은 노동하다라는 표현과 유사한 면도 있고 다른 면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것을 행하다). 물론 "만들다"의 의미도 있지만. 일반적인 측면에서, 명사로서의 "일"은 예술적인 일이나 성전에서의 일이나 생업을 유지하기 위한 부류의 일을 말하지만, 네 "모든 일"(콜-므라케테카)이라는 목적어를 꾸며주고 있다는 점에서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네게 속한 모든 일, 혹은 너를 위한 모든 일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언급은 창 2:2의 므락토 아쉐르 아싸(그가 한 모든 일)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노희영, 최근의 십계명연구 [서울: 은성, 1995] 230).. 여기서의 문제의 핵심은 개역성경에 있는 "힘써"라는 표현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본문이 "살살," 혹은 "쉬어가면서" 일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6일간의 노동과 일이 의무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7일째에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나머지 6일간 열심히 일할 것을 강조하거나 명령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Contra 노희원, 최근의 십계명연구(서울: 은성, 1995):230.즉 본문은 일상적인 노동과 7일째의 노동의 금지를 구조적으로 대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노동의 일상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7일째 되는 날에는 쉬라는 명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네게 속한 그 "모든 일"(9절)을 행하기를 금지하고 있다. 두번째 질문을 살펴볼 차례다.6일간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말씀의 유비가 이 문맥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자. 하나님이 문자적으로 6일간 (내내) 일하셨다면,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6일간 일하여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논증 자체가 지나친 문자주의(literalism)라는 점을 상기시켜야 하며, 문맥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11절도 7일째에 일에서 해방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논증들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사역을 언급하고 있는 것뿐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6일간 일했던 것처럼 너희도 일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1장의 논리만 봐도 하나님은 매일 24시간씩 꼬박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추가적으로 신 5:12ff.에서는, 안식일의 근거가 이집트에서의 쉼 없는 고통의 노동현장에서 벗어나게 해준 대가로 6일간 행하는 모든 "일"의 금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출애굽기나 신명기의 문맥에서) 그것을 하나님이 창조사역에서나 구속사역의 주인이신 것처럼 안식일에 모든 일 행하기를 중지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출애굽의 구속사역도 6일만에 완성하고 7일째 쉬셨던 것처럼 모든 일 행하기를 중지하라는 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마치는 글위에서 필자가 논증한 것처럼, 십계명상의 안식일이 오직 7일째날만이 일주일의 노동으로부터 쉴 수 있는 인간의 안식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라거나(즉 안식일 외에는 절대로 쉬어서는 안된다는 이해) 6일간 쉬지말고 무조건 일만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문은 최소한도 인간이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점(또 이 말은 안식일에는 무슨 일이든지간에 절대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을 말해주고 있다. 신약은 오히려 안식일을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기만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안식일도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날로 삼고 있다. 율법주의에서 탈피하여, 안식일은 인자(人子)를 위해서 있으며 Freedman 2000:64생명을 구하는 일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의 이기적인 노동의 금지규정은 신구약중간시대로 갈수록 율법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쿰란 문서들에 따르면, 음식을 준비하는 일, 사람이 사는 도시의 한계를 벗어나 1000 큐빗 이상 걷는 일, 봉인된 그릇을 여는 일, 출산하는 동물을 돕는 일, 걷는 동안 아이를 안고 가는 일, 구덩이에 빠진 동물을 구하는 일, 그리고 전쟁에서 방어만 하는 일에 대한 규정들이 나타난다. 예수의 이해는 건전한 구약의 안식관에 근거하였다. 즉 예수는 구약시대에도 노동의 금지규정에도 불구하고, 성막을 지었으며(출 20:8-11) 출산을 도울 수 있었으며, 안식일에 할례를 베풀었던(난지 팔일만에) 구약의 "일"의 기준을 바르게 이해하였으며, 그에 근거하여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쳤으며, 제자들이 이삭을 베어먹는 일(막 2:25-26)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언약적 측면에서 사람을 온전한 관계에 이르게 하는 구약의 할례를 예로 들어서, 한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일은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요 7:21-23). 이런 온전케하는 규정인 안식일 규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막 2:27). 오히려 그런 면에서 안식일에도 일할 필요가 있지만, 안식일이 아닌 때도 쉴 필요는 있다. 이것이 십계명의 안식일규정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기독교인에게 일요일이 안식일인가하는 점과 일요일마저도 종교적인 예배의식과 봉사 때문에 격무(?)에 시달리는, 기독교인은 일주일 중 어느 날에 안식을 해야 하는가?장 칼뱅의 주석에 따른 舊約十一租와 新約獻金 이것은 필자가 <뉴스앤조이>에 수개월동안 연재했던 <한국교회의 십일조논쟁>의 부록의 일부의 개정본이다. 원래 게재되었던 원고는 각주부분이 전부 생략되어있었는데, 이 원고에서는 전부 첨가하였고 일부분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성기문그래서 레위지파 사람들의 생계비는 십일조로 해결되었다. 여기에 근거하여 가톨릭 신부들은 어리석은 주장을 내세운다. 즉 마치 자기들이 제사장직을 가진 자들인 것처럼 십일조가 당연히 자기네 몫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치 그들은 자기네가 모든 경작지[즉, 교인들의 모든 소득] 중 십분의 일의 소유주인양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자기네들이 속인(俗人)이라고 일컫는 자들[즉, 평신도들]이 자기들의 소작인(小作人)들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카톨릭 신부들이 십일조를 자기들의 소용(所用)으로 삼는 것과 토지들을 소유하여 그 경작세(耕作稅)를 받는 것은 망령된 것이다. 카톨릭신부들이 “제사직분이 바뀌었으니, 율법도 반드시 바뀔 것이다”(히 7:12)라는 말씀을 부정직하게 뿐만 아니라, 무식하게 인증하는데, 이 히브리서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율법에서 레위인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셨던 것들은 무엇이든지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레위인 제사장들의 권위와 직책은 그리스도안에서 그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이 멍텅구리 카톨릭 신부들은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합당한 영예를 마치 그리스도에게서 도적질하듯이 자기들이 찬탈해 간다. 만일 그 카톨릭 신부들이 자기들의 직무를 합당히 수행하고 모든 세상적인 사업을 포기하면서, 전적으로 백성들을 교육하는 일과 그 밖의 착하고 충실한 목자로서의 모든 직무들을 수행하는데 몰두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사회의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바울이 바로 말씀한 바대로, 구약에서 제단(祭壇)에서 봉사했던 제사장들에게 제물이 소유물로 주어졌던 것과 같이 오늘날 복음의 사역자들에게도 생계비가 지급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고전 9:14). 그러나 이러한 구실 아래 카톨릭 신부들이 부당하게 십일조를 마치 자기들의 소유물인양 착복하며, 더구나 몰염치하게도 토지와 다른 재원을 축재하고 있다(칼뱅의 민 18:20에 대한 주석 중에서) 2권 4. 244-5머릿말지면상의 한계와 방대한 연구의 부족으로 인해서, 종교개혁시대의 개혁자들의 관점들 일부사람들은 마틴 루터가 십일조를 용인(容認)했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는다. 그러나 필자는 루터가 십일조를 교회보다는 세속정부에 낼 것을 주창하였으나,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을 다 다루어보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 장에서는 칼뱅의 주석들 한국에는 두 종류의 칼뱅주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필자는 편의상 성서원에서 나온 칼뱅주석(서울: 1999)을 참조하였다. 이후에 언급될 인용문들은 발행된 권수와 원래의 책권수, 그리고 페이지만 언급하도록 하겠다(성서원 칼뱅주석 제몇권, 원래주석책 제 몇권, 그 책의 몇번째 페이지; 예, 2권 4-II, 17). 만을 고찰함을 통하여, 존 칼뱅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할까 한다. 여기서는 가급적 필자 자신의 견해는 자제하고 칼뱅 자신의 견해를 철저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요한 칼뱅의 성경주석은 물론 당시의 종교개혁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십일조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한국장로교회에 큰 교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의와 칼뱅의 주석들을 가까이하라는 권면을 통하여, 한국장로교회가 칼뱅에 무지하고 칼뱅(마찬가지로 칼빈주의의 정통노선)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우려섞인 비난(非難)과 자조(自嘲)가 사라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구약 십일조와 성전세규정들에 대한 칼뱅의 이해 칼뱅은 구약 모세오경의 주석을 창세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책별, 장별로 하지 않고, 십계명(Ten Commandments)의 순서를 중심으로 주제별로 나눠서 강해와 설교, 기도의 순서로 전개하였다. 역사서의 경우에서는 칼뱅이 주석하지 않았음으로 언급하지 않는다.창세기주석 우리가 다루는 창 14:18ff.와 28:20ff.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한글판 I.1.370ff.와 I.2.173ff.에서 찾을 수 있다.에서, 칼뱅은 아브라함의 멜기세덱에 대한 만남과 십일조를 드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논조들을 취한다. 우선적으로 아브라함을 맞아 떡과 포도주로 위로하고 복을 빈 멜기세덱의 두가지 행동을 두가지 직분으로 나눠서 설명한다. 카톨릭의 해석을 반박하면서, 떡과 포도주는 그냥 손님을 영접하고 위로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누차 밝힌다(pp. 370-1). 특이하게도 살렘(Salem)이 후대의 예루살렘(Ir-Salaym)이었을 수 있다는데 동의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점도 밝힌다. "나는 살렘이 예루살렘이라고 이해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쉽사리 믿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만약 누가 그 도시는 평야에 위치해있다는 것으로 보고 상반된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한다면, 나는 그것에 반대는 하지 않겠다‘(pp. 371-2).그러나 여기서의 칼뱅의 일차적인 주된 관심사는 카톨릭과의 논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시작도 끝도 없는 사제직의 승계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칼뱅은 일회적으로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의 사제직에 대한 인정과 하나님께 선물을 드린 것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서 칼뱅은 필자와 의견이 다르지만, 대략적인 의미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께 선물들을 드림으로 그런 첫 번째의 열매로서 자기의 모든 소유물을 하나님에게 헌납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자원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쳐서 그의 사제직을 존경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일은 그렇게 생각없이 허겁지겁 잘못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적절하게 추론하기를 이 비유에서는 레위지파에 속한 사제직이 그리스도의 사제직보다 하위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서는 하나님이 이후에 율법하에서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바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아브람의 시대에는 그 십일조는 단순히 감사에 대한 맹세이며 표로서 바쳐진 거룩한 제물이었다. 그러나 아브람이 노획한 것들의 십분의 일을 바쳤는지 또는 자기가 집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들의 십분의 일을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지고 아낌없이 썼거나 그가 실오라기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노획물들의 십일조를 바쳤을 것이라는 생각은 적절하지 않으므로 나는 오히려 이 십일조가 그의 재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어떤 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이것이 매년마다 바치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고 나의 판단으로는 그가 멜기세덱을 하나님의 대사제으로 인정하려는 목적으로 멜기세덱에게 즉시[필자주: 번역본에는 또 한번으로 번역되었는데 잘못이다; once] 이 선물을 헌납했다고 본다.’(pp. 276-7)칼뱅은 기본적으로 야곱의 서원에 대해서 긍정적인 관점을 고수한다. 어쨌거나 야곱의 서원물들 중에 마지막인 십일조를 칼뱅은 다음의 인용문에서처럼, 야곱이 “구제와 도움의 용도”로 사용하겠다고 서원(誓願)한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pp. 176-7):그 다음에는 십일조의 드림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한 의식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자선의 의무가 추가된다. 왜냐하면 야곱은 세가지 순서를 열거하기 때문이다. 곧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이다. 둘째는 외면의식적으로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경건을 돕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 고백한다. 세번째로는 봉헌이 아니오는데 그는 이로써 자기 형제들을 친절히 돕는 일에 정진한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십일조는 이 세 번째에 해당된다.출애굽기주석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출 30:11-16과 38:24-31은 칼빈주석(한글판) 2.2.474ff.와 3.5.289ff.에 나타난다.에서, 칼뱅은 반 세겔에 대한 언급에서 속전으로 들려진 반세겔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유일하신 왕으로 인정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죄에 대한 속죄와 속상의 의미로 사용되도록 했다는 점은 자신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소유이신 것의 고백과 자신들이 행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로서 기능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또한 속전의 공평성(레위기에 나와있는 제물들의 차별성과는 달리, 재산의 정도에 따라서 달리 내지 않는 점)은 죄에 대한 개개인의 문제에 있어서 경중이 없고 차별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레위기 27:30 30절에 대해서는, 칼빈주석(한글판) 2권 4.246-7을 보라.에 대해서 칼뱅은 레위인의 십일조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곡식의 십일조를 화폐로 낼 때, 1/5를 더하여 내도록 한다든지, 가축의 십일조는 화폐로 내지 못하게 한 것은 헌납자들이 잔꾀를 부리지 못하게 하려함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레위인들에 대한 배려의 예가 말 3:8에 나타난다고 본다.민수기주석 18:20-21(2권 4.242ff.), 21-23(2권 4.220ff.), 25-32(2권 4.253ff.)에서, 칼뱅은 18장에 대한 언급에서, 오경의 십일조 규정에 세가지 십일조의 국면들이 있었음을 언급한다. 그는 십일조의 관행이 이미 족장시대에도 있었다고 전제하고, 모세시대의 십일조 규정의 차이점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나안땅을 주셨다는 점과 회막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레위인들에게 대가를 줄 필요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칼뱅에 따르면, 하나님의 십일조의 주인이셨으며, 레위인들의 분깃이기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십일조가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p. 244). 여기서 칼뱅은, 이러한 유비로 가톨릭신부들이 십일조를 받을 것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지적한다. 또한 제사장에게 내는 십일조에 대해서도 몇마디한다. 칼뱅은 레위인들의 탐심과 부정적으로 버리게 하시기 위한 목적으로도 이 십일조규정이 제정되었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적절한 보수인 십일조 ‘레위인들이 제사장들에게 드리는 제2단계의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린 후에는 레위인들은 모든 죄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은 레위인들로 하여금 제2의 십일조 드리는 일에서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엄히 훈계하시고 계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일 레위인들이 바쳐야 할 제2의 십일조를 조금이라도 횡령한다면 이것은 신성모독의 죄에 해당한다고 선포하고 계신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죄를 범한다면 죽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제사장에게 드릴 성물을 더럽히는 것은 온 백성의 명의로 봉헌한 모든 것들을 더럽힌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p. 255).는 어느 곳에서나 어떠한 식으로도 소진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신명기주석 14:22, 28(2권 4. 247-9); 14:23-26(2권 4.105ff.); 18:1-8(2권4.256ff.); 신 26장(2권 3-I:484ff,; 349ff.); 특별히 26:12,14,15(2권 4. 249ff.)에서, 칼뱅은 14:8-29에 대한 언급을 먼저 다루어보자. 22절의 언급에 대해서는, 땅을 소유로 받은 자들이 마땅히 소유로 받지 못한 자들을 돌봐야한다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23절의 언급을 십일조, 서원물, 낙헌제물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야웨가 택하실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여긴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을 동의하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부분을 이스라엘의 전지역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거둬서 냈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편리한 대로 인근지역의 십일조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나머지 더 먼 지역에서 모여진 것은 그곳에 따로 모아 두었지만 이것도 예루살렘에서 모두 집계를 내서 마지막에 레위인 가족 수에 따라서 동일한 분배가 이루어졌던 것’이라고 주장한다(p. 106). 그러므로 칼뱅은 각 지역의 추수터에서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가 거둬졌고 사제들을 위한 십일조가 성소(예루살렘?)로 보내졌다고 믿는다(p. 106). 축제의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고 모호하기도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야웨 앞에서의 소진‘을 성소의 거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 장소는 하나님 예배자들이 전 지역으로부터 와서 예배 드릴 만큼 하나님께 성스러운 곳이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배에 대한 순수한 준수를 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로 다른 장소 때문에 백성들이 여러 방향으로 거짓된 미신에 이끌리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as if it had been said, that the place should be sacred to God, to which the worshippers of God might come from the whole land. Yet He commands, in the meanwhile, the pure observation of His worship; lest a diversity of places might draw away the people in various directions to false superstitions)’(pp. 106-7).28절에 대해서, 삼년마다의 십일조를 언급하면서, 그는 이스라엘역사에 세 종류의, 즉 땅의 소득의 3/10을 적어도 십일조로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매년 1/10을 여러 종류로 나눠 쓰도록 하나님께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p. 248). 그리고 황송하게도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배려하도록 하신다고 이해한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이년 동안 잘 준비하여 가난한 동족들과 이방인들과 함께 그 몫을 분배하여 갖는다는 것은 매우 공정한 배려이다. 레위인들은 풍부하게 받은 십일조 중 그 일부를 삭감받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사치스런 생활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자기들이 받는 십일조의 12분의 1정도를 매년 저축해야 된다는 결론이다. 요컨대 매 7년마다 한 해는 특별히 레위인들이 자기들의 소득으로 받은 십일조를 자기들만이 갖지 않고 그 십일조를 고아들과 과부들과 나그네들과 기타 가난한 자들로 나누어 가진다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굶주림을 당한 자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를 축복하시리라”(29절).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로 하여금 관대하도록 권고하신다’(pp. 248-9).칼뱅은 신 26:12-15을 각각 ‘십계명서문’(26:1-11)과 ‘제1계명에 대한 의식상의 보충’(12-29절)이라는 큰 제목 하에서 다루고 있다. 전자는 맏물과 장자에 대한 언급이며 후자가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다. 지면관계상 맏물과 장자에 대한 언급 맏물과 장자에 대한 언급말미(p. 488)에 칼뱅은 이러한 규정이 포로이후에 등한히 되었고 말 3장에 다시 언급되었다고 말한다.은 생략하기로 한다. 십일조를 바친 후에 야웨 하나님은 맹세와 고백을 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서의 맹세는 “완수(完遂)의 자랑”이 아니라, “완수키 위한 소원(所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 250). 칼뱅은 ‘애곡하는 날’을 마음의 근심이 있는 날로 이해하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혹은 속되게 십일조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칼뱅은 개인적으로 장례의 애곡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오용했다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이해한다(p.. 252).말라기 주석 제 15권 30:315ff.에서, 칼뱅은 십일조와 맏물이 사제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규례라는 것을 인정하고 심지어는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는 우리의 탐욕은 일종의 신성모독(sacrilege)이라고까지 말한다. 다음은 pp 437-8의 인용이다: “...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그 사실은 분명했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 한 가지의 판결만으로도 그들의 유죄를 선포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시어 그들이 십일조와 첫 열매를 도적질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헌물을 바친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헌물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예배를 위해 정해 두셨던 자신의 몫을 마땅히 요구하시고 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바쳐 사제들을 뒷바라지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 일부를 사용하도록 제도화하셨으며, 또 첫 열매와 다른 물질을 자신에게 바치도록 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계속 모든 사물을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의 손으로부터 받은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시어 이전에 진설병을 차려 놓도록 하시고, 마치 잡수시고 마시는 것처럼 제사를 자신의 음식이라고 부르셨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이런 제도의 뜻을 생각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기리며 동시에 그분의 예배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는 지금 그들이 십일조를 도둑질한 것에 대해 고발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희생제사가 우리에게 규정되었음을 알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기도와 찬양 뒤에, 우리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불친절하고 그들의 궁핍에 도와 주기를 거절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참으로 악한 인간이며 잔인한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충성한 청지기이므로 우리의 죄는 더욱 고질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에게 더욱 풍성하게 대해 주신 것은 우리의 풍성함의 일부분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도록 하신 것이다. 또한 우리의 풍성함의 일부를 가난한 자들이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성별하셨으므로 형제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주지 않는 것은 신성모독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는 구절처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칼뱅은 3장의 이전 절들에 대한 연속으로서 10절을 이해한다(pp. 440ff.). 선지자는 온 백성들이 가난한 자들과 필요한 자들에게 제대로 주지 않은, 모든 강탈한 물건들을 돌려놓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뱅은 백성들이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반쪽의 십일조를 사제들에게 제공했던 것으로 본다. “내” 집에 있는 양식(칼뱅은 고기[meat])의 용도에 대해서는 가난한 자들과 곤궁한 자들, 그리고 야웨 앞에서의 축제의 용도(신약적으로는 성만찬?)로 이해하는 것 같다. P. 441에 따르면: ‘선지자는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고 덧붙인다. 우리는 이런 표현법을 다른 곳[?]에서 설명했다. 앞에서[3:4-8절에 대한 칼뱅의 178번째 강의]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먹고 마실 것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이 아니므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유대인들이 떡과 희생제물 등을 바치고,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존전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점을 이미 지적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에 거하신다는 것보다 더욱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는가? 이런 사실은 율법 속에 자주 반복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님이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 식탁에 앉으면서 우리와 똑같이 떡과 다른 것을 잡수시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방법일 리가 없으므로 율법에서는 단지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며 기뻐하라”(신 2:18)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먹고 마시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시며, 또한 사람들은 우둔해서 미신에 빠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신에 대해 세상적인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 사제들과 가난한 자들을 대치시킴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에게 바치는 것을 그들이 사용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대치는 특히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자신에게 이끌려고 하시지만 사람들이 흔히 행하기 쉬우며 실제로 자주 그렇게 행하는 것처럼 합당하지 않은 것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도록 그들의 마음을 하늘에까지 올려놓기 때문이다.“신약의 구제헌금에 대한 칼뱅의 이해칼뱅은 신약주석시리즈를 내는데 있어서, 공관복음서의 경우에 모세오경주석시리즈처럼, 책별로 하지 않고 각복음서의 유사부분들을 대조형식으로 묶었다.마태복음주석 우리가 다루고자하는 마 17장과 23장은 각각 칼뱅주석 16.II.163ff.과 341ff.에서 인용하였다. 그러나 마 17장에 대한 이해에서 칼뱅은 반세겔의 세금을 국가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여 세금을 내야하는 것으로 교훈하고 계신 것으로 보기 때문에, 전자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에서, 칼뱅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의 비난을, “모든 위선자들이 몰두하고 있는 잘못, 곧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법석을 떨면서 율법의 주요 골자를 소홀하게 여기는 잘못을 들어 서기관들을 호되게 꾸짖고 있다”고 이해한다(p. 308).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는 여러 가지 임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위선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거짓 사랑을 위장하고 거짓말하는 일이 수월하다. 그러나 형제애의 여러 임무는 모두가 볼 수 있는 문제로써 그들의 속임수가 더 잘 드러나는 분야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에 대한 세세한 조목을 따지거나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시려 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공의, 친절 및 신의를 가지고 서로를 대할 때만이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이라는 간단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될 때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는 점을 증언하고 참 신앙에 대한 충분하고 올바른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p. 309). 이제 칼뱅은 본격적으로 23절을 다루면서, ”그리스도께서 공평과 자비 다음에 두는 십일조는 신성한 예배의 일부였으며, 어떤 면으로 볼 때, 그것은 두가지 예물이 포함되어있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곧 여기서 십일조와 구제, 신의 및 공의가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의 허구적인 성결성과 정직하고 일관된 사랑의 감정이 대조되고 있는 것이다. 역자주:이 문단은 평이성을 위해 필자가 번역을 수정하였다.최소한의 경비와 수고로 하나님을 달래 보겠다는 심산에서가 아니라면 왜 그들은 그처럼 십일조를 내는데 자발적이었겠는가? 그들은 진정한 뜻을 놓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내세우는 하찮은 조항의 법석은 결코 사랑의 여러 임무에 비길 바 못된다“(p. 309). 23절의 ‘이것들도 행하고 저것들도...’에 대한 설명에서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예수]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지켜야 하며 생략할 수 없지만 전체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핵심 문제를 지키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중심 문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문제를 가지고 법석을 떠는 것을 당치 않은 것으로 여기고 계신다. 일종의 가외[sic. 加外] 문제였다"(p. 310). 24절에 대해서는, ”그러나 바로 이것[sic. 낙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뱉아내는 행위]이 위선자들의 작태다. 그들은 심판, 자비, 그리고 신의는 무시하면서, 아니 전체 율법은 훼손하면서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빡빡하고 엄격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발에는 입을 맞추면서 거만하게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p. 310).사도행전주석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사도행전 2:43ff.과 4:32ff.는 칼뱅주석 18.I.118ff.과 176ff.에서 인용하였다. 에서 칼뱅은 우선적으로 2장 43절ff.에 대해서 신자들이 한 마음 우리말성경에서는 ‘다 함께 있어’로 번역되었으나, 칼뱅은 ‘동일하게’ 혹은 ‘하나로’(한 마음으로)로 해석한다(p. 120).으로 각자의 소유를 팔아서 공유하고 분배하였다는 표현에 대해서 몇마디 중요한 말을 남긴다(pp. 120-21, 여기서의 일부표현은 필자가 수정하였다.). “우리는 두가지 극단론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한편에서는, 시민생활의 질서를 핑계삼아서 자기들의 소유는 은닉하지도, 가난한 자를 속여 빼앗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중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함께 뒤섞으려고 하는, 상반되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Luke)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확실히 하나의 다른 제도를 유념하고 있다. 그는 ‘재물의 분배에 있어서 선택적이었다’라고 말한다. 만일 누구라도 모든 물건은 공유물이었기 때문에 자기만의 것을 소유한 자는 없었다고 반대론을 펴는 이에게는 아주 간단한 대답을 줄 수 있다. 즉 이 공유라고 하는 것은 바로 다음에 설명되고 있는 그 상황을 위하여, 즉 가난한 사람들이 각각 그 요구에 따라서 구제되어야 했다는 점에 한정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칼뱅은 4:32ff.를 설명한다. 그는 5천명이 넘는 교인들이 “성령”으로 하나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러한 내적 일치가 외적 적용에 이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확실히 우리도 그 순서를 지켜야만 한다. 즉 먼저 신실한 마음으로 피차 서로 사랑하는 일,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우리의 사랑이 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외적인 자선이라고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적절한 애정을 가졌다고 자만하지만 그러한 애정의 증거가 외적인 행위로 보여지지 않고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더구나 누가는 이야기가 나온 때에 다음의 사실을 지적한다. 즉 부자가 자기들의 재물을 자유롭게 분배함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실리를 생각하고 그 이상 더 나아간 것이 없었을 때 각자의 개인적 이익의 견지에서 그들은 한 마음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pp. 177-78).다음의 칼뱅의 언급(p. 179)에 대해서, 독자들은 좀 인용문이 길어지더라도 인내(忍耐)를 갖고 읽어주길 바란다. “부자들은 자기들의 토지에서 연간 수입되는 고정수입으로 형제들의 가난을 구제한 것만이 아니요 그 토지 자체까지도 아끼지 않을만큼 그들은 관대하였다는 것이다. 그 일은 그들을 전적으로 아주 발가벗기지 않고도 단지 그들의 고정수입을 얼마간 감소하는 것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의 말에서 우리가 역시 읽어내게 되는 일이다. 즉 그들이 그렇게 한 목적은 아무도 빈궁한 자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즉 그들은 각자의 [곤궁함의] 필요에 따라서 분배가 되도록 조심성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헌납 처분했다는 말도 아니고 재물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이 부분은 필자의 부연설명이다.평등하게 분배된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재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배당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아무도 극단적인 빈궁 때문에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나바가 특히 이름을 들어 칭찬을 받은 것은 그가 자신이 소유한 유일한 토지를 팔았기 때문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도 모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없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가 이로써 우리에게 분명히 지적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기의 소유를 다른 사람을 전혀 고려함이 없이 자기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사사롭게 소유하지 아니하였고 필요한 자의 요구를 따라 공동으로 소유하려는 준비가 그들에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제 우리가 만일 이 말씀을 읽고서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철판보다도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 신도들은 자기의 소유재산을 아낌없이 기증하였다. 오늘의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노랭이 심정으로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요 잔인하게도 남의 것을 강탈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단순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내놓았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 취득하려고 천가지의 간교한 술책을 고안해낸다. 그들은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다. 우리는 하나님께 봉헌된 물건을 신성모독적인 대담성을 가지고 횡령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시절에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팔았다. 오늘에는 사들이려는 강한 욕망이 최고로 지배한다. 그 시절에 사랑이 각 사람의 개인재산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재산으로 만들었다. 오늘에는 몰인정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땅 위에 사는 것까지 시기하고 물이나 공기나 하늘의 공유까지 아까와하는 정도이다.”여기서 부자들의 재산헌납이 가난한 자들의 구제(교제, 혹은 섬김)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코자 한다. 이 공동체에 불어닥치는 시험은 부자(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구제용 재산을 일부 빼돌리는 사건이었다. 이 부분은 독자들이 각자 칼뱅의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고린도후서 8-9장주석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고린도후서 8-9장은 20.9.160ff.에서 인용하였다.에서 칼뱅은 바울이 고린도에 사는 기독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마케도니아교회들의 거룩한 선행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고 본다. 고린도 기독교인들은 시기심과 질투에 능(能)했고 마케도니야 교회들은 형제들을 돕는데 능했고 그러한 일을 “하나님의 은혜”의 덕으로 돌리고 있다는데도 능했다. ‘비록 궁핍한 자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 창찬할 만한 덕이라는 점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주는 것을 이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덕으로 돌리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것의 일부가 상실되어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우리 형제들을 도울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덕으로 돌려야 하며, 그것을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특권으로 여겨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게도냐인들에게 베풀어진 은혜는 두 가지였다. 그 첫째는 그들이 고통을 침착하게,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견뎌냈다는 점이요, 둘째는 그들의 작은 재물 가운데서 그들이 형제들에게 베푼 도움은 풍성한 재물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바울이 이 두가지를 다 주님의 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인간이란 모든 위로의 주인공이신 주님의 영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곧바로 넘어지고 말며, 확고한 신앙에 대한 뿌리깊은 결핍은 그것이 동일한 영의 은혜에 의해서 압도되기 전에는 항상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어서 사랑의 모든 임무로부터 우리를 붙잡아 놓기 때문이다’ (p. 161).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 일에 가난하고 궁핍한 마케도니야인들이 더 열심을 내였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비교적 풍요롭고 부했던 고린도인들과 비교할 때말이다. 게다가 마케도니야인들은 간청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으나 분에 넘치는 연보를 하였고 이제 고린도교인들에게는 바울이 간청을 하고 훈계를 하여야 했다. 기독교인들의 공동생활은 함께 거하는데 있는 것보다는, 공유(communion)와 공동분담(communal sharing)의 책임과 의무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비록 몸이 떨어져 있으나, 이 공동체의식은 형제를 돕고 구제하는 일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공동체의식의 원칙을 바울은 출애굽공동체에게서 찾는다. 어른들은 아이들이나 노약자들보다도 더 많이 거둘 수 있었고 가질 수 있었고 비축할 수 있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이제 여기서 이 아야기를 바울의 관심에 적용시켜보자. 주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가지는 양식에 대해서 호멜이나 다른 단위를 규정하지 않으셨지만, 우리에게 검약과 절제를 요구하셨으며 누구든 자신의 풍요 때문에 과도하게 되는 것을 금하셨다. 따라서 재물을 가진 자들은 그것이 상속된 것이든 자신의 근면이나 수고로 얻은 것이든, 쓰고 남은 것은 낭비나 사치용이 아니라 형제들의 궁핍을 덜어주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의 근원이 무엇이든 만나와 같다. 물론 여기에는 그것이 정말로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기만이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얻어진 재물은 만나의 명칭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 가운데서 보내시는 메추라기이다. 그리고 탐욕이나 신앙의 부족 때문에 과도하게 긁어모았던 만나가 당장에 썩어버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형제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산적된 재물은 저주받은 것으로서 곧 없어질 것이요, 그것의 소유자도 그것과 함께 패망할 것이라는 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pp. 170-71).9장으로 넘어와서, 우리는 바울은 연보를 쓰는 일에 구제나 도와준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섬기는 일이라고 하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 섬기는 일은 의무일 뿐이다. ‘돈을 제공하는 것에 비해 관용이 더 화려하게 묘사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단어(섬기는 일)를 자신의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바울은 신자들이 같은 몸 안에 있는 그들의 동료 형제들에게 신세지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서로간에 봉사할 임무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형제들을 도울 경우에 우리는 그들의 몫이 되는 우리의 봉사를 수행할 뿐이다. 반대로 성도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도 그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단순한 불친절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그들의 당연한 몫을 사취하는 것이다’(p. 177).바울에게 있어서 복(연보)이 탐욕(억지)과 대조되고 있다. 우리가 성도들 상호간에 축복을 하듯이, 물질(의 복)도 상호간에 나눠져야 한다. 당시의 파종습관에 맞추어 칼뱅은 적게 심는 자와 많이 심는 자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듬성듬성 파종하는 자는 적은 수확을 거둘 것이지만, 너그럽게 한움쿰씩 쥐고 뿌리는 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것으로 말하고 있다’(p. 179).씨뿌리는 자의 사명은 어떻게 넓게 많이 뿌려서 그 열매를 풍성히 얻을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요즈음은 씨를 뿌리러 나왔다는 사명의식을 망각하게 어떻게 하면 적게 씨를 뿌리고 남길까? 적게 뿌렸지만, 열매를 많이 거둘까라는 모순된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자원하는 심령과 자발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나 그것을 형제사랑함으로 형제를 섬김으로 하나님의 복을 더 받기를 원하고 있다고 칼뱅은 말한다.히브리서 7장의 주석 우리가 다루는 히브리서 7장은 칼뱅주석 20.II.152ff.에서 사용하였다.에서, 칼뱅은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제직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론으로 비롯되는 유한한 사제직과 멜기세덱의 영원한 사제직으로 대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비록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멜기세덱을 강조하고 있지만, 멜기세덱이 영원한 대사제직을 지금도 행하고 있다거나 ‘사도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그 사제 직분에 관해서 논술하고 있으므로, 여기에는 전혀 인간적인 억측이 끼어들 수 없고, 또한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어떤 지식을 찾는다는 것도 정당하지 못하다. 동시에 이 말씀에 따라 어떤 얼빠진 사람들이 천진하게 생각하듯이, 아브라함을 만난 바로 그 인물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결론지어서도 않된다. 이 진리는 그가 나타내는 인물, 즉 하나님의 아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pp. 158-9).‘그에게 영원히 십일조를 바쳐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심지어 유대인과 교회가 동일하게 아브라함을 신앙의 아버지라 부르고 아론의 사제직을 높이 취급하나,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에 비하면 하등(下等)한 것이며 유한(有限)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칼뱅은 저자가 아론의 사제직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에 대한 명백한 진술을 발견한다. 결론간단하게나마 우리는 칼뱅의 구약 십일조에 대한 이해와 신약의 구제헌금관을 살펴보았다. 필자가 보기에 칼뱅의 논의에 있어서 일부 불일치점이나 오류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나, 칼뱅의 입을 통하여 성경을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한국교회의 십일조논쟁>에 상당한 유익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석을 통해서볼 때, (신약의 헌금관과 아울러서) 구약의 십일조관을 성도간의 구제와 교제의 용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것이며 이러한 정신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마땅히 지켜야할 교훈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스위스의 개혁자 장 칼뱅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십일조관은 불행하게도 칼뱅의 견해와 “전혀(absolutely)” 부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