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대학생 등 선교단체와 교회의 관계 - SFC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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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대학생 등 선교단체와 교회의 관계 - SFC를 중심으로



SFC(학생신앙운동), 과연 교회를 위한 단체인가?
- 목회자가 보는 SFC -

황원하 목사

시작하는 말: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 황원하 목사

산성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

저는 이 글에서 SFC(학생신앙운동)에 대해 느끼는 점, SFC에게 바라는 점, 그리고 SFC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하여 평소에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저는 지금 SFC 운동원들, 간사들, 동문들, 지도위원들 등에게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내용이 제법 공격적일 것이고 표현도 다소 거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SFC가 원래의 정신을 회복하여 진정 교회를 위한 단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가면서까지 욕먹을 일에 뛰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글을 읽으시고 반성을 하시거나, 비판을 하시거나, 변호를 하시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하시거나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1. SFC는 전도해야 합니다.

제가 SFC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은 SFC가 “전혀” 전도하지 않는 단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SFC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등록하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에 대하여 몇몇 동료 목회자들에게 물어보아도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SFC가 진정 교회를 위한 단체라면 정작 교회에 가장 큰 도움을 주어야 할 부분이 전도일 것인데, SFC는 이 부분에 관심이 없거나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교단(총회, 노회, 교회, 성도)에서 SFC에 해마다 상당액의 후원금을 보내고 있지만, SFC는 전도라는 결과로 보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SFC가 선교(전도)단체로서 전도하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과 힘을 투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자기들 나름대로 전도를 하겠지만 열매가 별로 없다는 것은 시급히 시정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부터라도 SFC는 전도에 가장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안일하게 교단의 학생들을 데려다가 인원을 채우고 적당히 모임을 만들어 구색을 갖추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 학생들을 데려와서 훈련시켜 교회로 보내어 주십시오. 그게 SFC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SFC가 전도에 힘쓰면 교회 교역자들이 SFC를 보다 긍정적으로 볼 것이고 교단의 지원도 보다 더 활발해질 것입니다.


2. 교회 학생들을 허락 없이 데려가도 됩니까?

SFC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반성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간사들이 개 교회 교역자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함부로 교회 학생들을 데려 가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선교단체에 가입을 하면 정작 교역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물론 좋아하는 교역자들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선교단체가 학생들을 잘 훈련시켜서 그 교회의 일꾼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학생들을 데려가서 자기들의 일꾼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상하게도 “교회를 위한 선교단체”가 아니라 “선교단체를 위한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양자의 관계 설정은 오랜 과제입니다)!

그나마 SFC는 교회를 위한 조직체라는 생각에 안심을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러한 안심은 점차 불만으로 바뀌어 갑니다. SFC에 소속되어 있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개교회의 충성학생들입니다. 그런데 SFC 역시 다른 선교단체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을 훈련시켜서 자기들을 위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고, 따라서 시간과 여유에 한계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교회에 소홀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와 가까운 관련을 맺지 않고 있는 단체라면 모를까, SFC는 고신교단에 소속되어 있고 교단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스스로 교회를 위한 조직체라고 열변하면서도, 실제로 간사들이 교역자들로부터 아무런 허락이나 동의를 받지 않고 학생들을 데려다가 훈련을 시키며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교역자들이 SFC에 가장 크게 바라는 것은 SFC가 불신 학생들을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SFC가 교역자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남의 학생들을 데려다가 양육을 하고, 게다가 온갖 종류의 모임에 참여하게 하며, 나아가서 SFC 자체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까? 간사들은 교단의 학생들이 SFC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반드시 담당 교역자에게 연락하셔서 허락과 양해를 얻으십시오. 그게 교회를 위한 선교단체의 도리입니다.



3. 간사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역할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SFC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도대체 SFC가 “간사중심체”인지 아니면 “학생중심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SFC가 학생들의 자생적 운동체라는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간사들에 의해 교육을 받는 피교육 집단이라는 성격이 매우 강해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날 간사들은 선생이며, 학생들은 간사들에 의해 교육을 받고 간사들이 시키는 일을 하는 피교육자일 뿐입니다. SFC 정체성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 아마 내부적으로 상당히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간사와 학생”의 역할 설정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사와 교역자”의 역할 설정에 관한 것입니다. 학생들 양육은 개 교회 교역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간사들이 학생들 양육을 별도로 합니까? 학생들 양육은 간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SFC 간사들은 교역자들이 미처 하지 못하는 현장(학교)에서 교역자들의 업무를 위탁받아 학생들의 활동(특히 전도활동)을 도와주어야 하며 교역자들이 위임한 분량과 정도만큼만 학생들을 교육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SFC가 정말로 교회에 소속된 단체이고 교회를 위한 단체라면 간사들은 반드시 교역자들로부터 상당한 양의 신학적.목회적 지도를 반드시 받아야 하며(그래서 총회나 노회에 SFC 지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지만 말입니다), 교역자들이 허락한 분량과 내용으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SFC 자체의 일꾼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SFC 간사들은 교역자들로부터 학생들을 위탁받아 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이지 학생들을 자체적으로 지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간사가 양육의 주체가 아니라 교역자가 양육의 주체입니다.



4. 간사의 자질에 대해서도 좀 말해 봅시다.

교회의 교역자들은 담임목사의 지도와 감독을 받습니다. 담임목사 역시 총회, 노회, 시찰회, 그리고 심지어 교인들로부터도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와 감독을 받습니다. 교역자들은 매일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회에 나와야 하며, 교회의 온갖 업무를 봐야 하고, 자기 교구를 심방해야 하고, 담당하고 있는 교육부서를 살펴야 하고, 설교(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상당기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심지어 교역자들은 담임목사나 선임자로부터 따가운 질책과 야단을 종종 듣기도 합니다. 영혼을 제대로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이처럼 고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SFC의 간사들은 어떻습니까? SFC 간사들이 학생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키는 문제에 있어서 교회 교역자들의 허락과 양해를 얻지 않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가 간사의 자질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간사들(특히 평신도 간사들)이 어떤 훈련을 받는지, 어느 정도의 영성과 지성과 인성을 겸비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체계에 의해서 움직이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간사들의 자질 문제를 함부로 말하기가 꺼려집니다. 묻고 싶습니다. 현재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하는 간사가 얼마나 되며, 설교(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개 교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있으며, 지역의 대표간사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도와 감독을 받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제 겨우 20대의 간사들이 비슷한 20대의 학생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입니다. 저는 20대 간사들이 같은 나이대의 학생들을 대하면서 “아이들”이라고 호칭을 하는 것이 굉장히 못마땅합니다. 나이가 든 목회자들도 20대 청년들을 대할 때 그렇게 쉽게 부르지 않습니다(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간사들은 학생들을 너무 쉽게 대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저는 지역의 간사들이 지역 대표간사의 책임 하에 엄청난 양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간사들은 반드시 지역 목회자들(지도위원들)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그분들로부터 상당한 양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5. 기타 문제들

1) 출판부에 대한 문제

현재 고신교단 안에는 여러 개의 출판사가 존재합니다. 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 것인데, 여기서는 교재에 대해서만 말해 봅시다. 도대체 교회는 총회교육원에서 나온 교재와 SFC출판부에서 나온 교재 중 어느 것을 사용해야 합니까? 이번에 총회에서는 교육원의 것을 주교재로 사용하고, SFC의 것을 부교재로 사용하라고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결정입니다. 대다수의 교회가 겨우 한 가지 교재를 사용하기에도 벅찬 판인데, 어떻게 두 종류의 교재를 각각 주교재와 부교재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정하기 어려우니까 그냥 적당히 넘겨버린 비현실적인 결정입니다. 게다가 고신교단의 QT집 종류도 세 가지나 됩니다. 교육원의 “복있는 사람”, “월간고신의 QT집(GT)”, SFC의 “날마다 주님과”가 그것입니다(복있는 사람과 날마다 주님과는 본문이 같음). 어느 것을 써야할 지 정말 헷갈립니다.


2) SFC 운동원들의 정체

저는 SFC 운동원들을 볼 때마다 “일꾼”이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이들은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전국을 다니면서 모임을 가지고, 방학 때에는 온갖 종류의 수련회와 일에 동원됩니다. 게다가 일부 학생들(위원들?)은 수련회 때 집회장에 아예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노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SFC가 주말에 학생들의 모임을 가지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렇게 하면 개 교회의 일정에 많은 지장이 생깁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개 교회는 철야기도회, 청년들 자체모임, 찬양대연습, 교사훈련 등을 합니다. 그러니 SFC는 학생들이 주중에 학교생활을 할 때에만 활동을 하게 하고, 주말에는 그들의 교회로 돌려보내어서 교회에 충실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날 SFC 운동원들이 지금처럼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일까? 신앙에 도움이 될까?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덕이 될까?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지나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3) 한기총 해체 운동이라니?

얼마 전 교계신문에 SFC가 “한기총 해체 운동”을 벌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화가 많이 났습니다. 한기총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독교 기관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대표적인 연합체입니다. 교단에서도 공식입장을 선뜻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이 엇갈려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최근 한기총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이며, 각자가 이에 대하여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는 것은 자유이지만(저도 개인적으로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교단이 어떤 입장을 정하기도 전에 학생들의 모임인 SFC가 먼저 나서서 해체 운동을 벌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순수한” 학생들의 신앙모임이 말입니다. 도대체 교계 어른들의 모임인 한기총 사태에 대해 어린 학생들이 얼마나 알고 있기에 그런 해체 운동을 벌였어야 했는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이 일을 시작했나요? 아니면 누군가가 이 일을 시작하라고 뒤에서 시켰나요?


4) SFC가 학생들의 신앙 울타리?

간사들은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SFC에 들어갔으니 그나마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고 설득하려 하지만 그것은 일선 교역자들의 목회적 수고를 무시하는 생각이며, 게다가 대게 SFC에 들어갈 정도의 학생들은 SFC에 굳이 가지 않아도 신앙을 잘 지킬 수 있는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간사들은 모든 상황에 대하여 철저히 교회의 지도를 받고 교회를 위하여 일하시기 바랍니다. 고신 교단은 지금 SFC에 상당한 양의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총회, 노회, 교회, 성도들의 헌금이 SFC에 보내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느 교단이 SFC만큼 한 교단의 엄청난(?)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선교단체들이 이런 SFC의 모습을 상당히 부러워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는 SFC가 교회를 위한 단체라고 믿으면서 후원합니다. 그러니 간사들은 자신들의 본분을 정확히 알고 교회를 잘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간사들은 SFC에 가는 것을 오히려 만류하는 고신의 교역자들이 많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맺는 말: SFC, 과연 존재감이 있는가?

과거에 SFC는 확실히 공헌을 많이 했습니다. SFC의 존재감은 실로 지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만일 지금 SFC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에 문제가 생깁니까? 대학복음화에 지장을 초래합니까? 학생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까? SFC의 존재감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간사들과 운동원들과 관계자들은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어쨌건 SFC는 고신의 아들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입니다. 그래서 저는 SFC를 사랑하고 SFC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간 SFC에서 여러 차례 강의를 했고, SFC 출판부에서 책을 두 권 냈으며(혹시 이 글 읽으시고 불매운동 벌이지는 마십시오), SFC의 일에 적극 협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금년에는 저희 교회가 SFC를 위해 매월 수십만 원의 선교비를 지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모두 SFC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SFC가 예전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위한 단체가 되어 주십시오. 학생들을 전도해서 교회로 보내어 주십시오.



2012년 0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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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찾아 교회를 떠나는 기독청년들!

정진경 목사 - 울산지역 SFC 대표간사




위기의식?


▲ 정진경 목사

울산지역 SFC 대표간사

최근 몇 년간 SFC(학생신앙운동)는 “신입생오오” 운동을 전략적으로 펼쳤다. 이 운동은 각 지역의 대학 신입생들을 조사하여 대학 SFC로 연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신입생들의 경우 대학 SFC 뿐만 아니라 고신교단 교회로 연결하는 목적도 있다. 특히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신입생들이 고신교단 교회에 정착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의 성과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만, 운동에 대한 필요성은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SFC가 이 운동을 전략적으로 펼치는 이유는 기독청년들이 선교단체와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기독청년들이 선교단체와 교회를 떠나는 현상은 일반적이다. SFC와 고신교단 교회도 이 흐름에서 빗겨날 수 없다. 기독청년들이 떠나는 시점이 많은 경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이다. 이 시기에 교회를 떠나는 사례가 많다. SFC는 이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신입생오오”운동을 펼쳤다.



“청년 대학생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위기감!

기독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은 1990년대 후반을 넘어오면서 두드러졌다. 그 위기의식은 한국교회의 양적성장이 멈추면서 오는 위기의식과 함께 커져온 것이다. 각종 조사 기구에서 발표되는 통계자료가 그 위기의식을 더해준다.

통계청 2005년 발표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20세에서 29세 인구는 7,333,970명이다. 그 중 개신교 인구는 1,309,816명이다. 약 17.8%로이다. 아래 표1)가 그 비율을 자세히 보여준다.

1) 통계청 2005년 발표자료이다. 통계청 자료는 홈페이지(http://www.kostat.go.kr)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통계는 청년층이 다른 연령층보다 개신교 비율에서 낮은 것을 보여준다. 이런 통계에 대한 분석이 교회지도자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청년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위기인가? 숫자가 줄어드는 것에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현상이다.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렇다면 위기는 숫자의 감소가 아니라 수를 감소시키는 원인이다. 그리고 위기의식은 바로 그 원인에서 가져야 한다. 대안을 찾는 것도 그 원인에서 시작해야 한다.



누가 교회를 떠나는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위기의식 속에서 교회지도자들이 가지는 생각이다. 그래서 왜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가에 대한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분석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떠나는 청년들이 누구인가? 대상이 모호하다. 한국에서 20대를 보내고 있는 청년 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20대에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교회에서 헌신하는 청년들을 말하는 것인지? 그 대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 또한 모호하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원인을 찾기에는 그 이유가 피상적이고, 일반적이다.

이상화 목사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3가지 이유』에서 책 제목처럼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3가지 이유2)를 들고 있다. 그 책에서 말하는 33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이 누구인지 의문이 든다.

2) 이상화 목사가 주장하는 이유 몇 가지를 소개한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니 허무맹랑한 것 같아 교회에 갈 수가 없다.” “반드시 교회라는 특정한 장소에 나가서 예배드려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가지 않는다.” “교회에 가면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고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해서 가기 싫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서로 충돌하는 교리들 때문에 혼돈이 생겨서 교회에 가기 싫다.” “딱 부러지지 않고 물에 물 탄 듯한 자기합리화의 색깔이 농후한 교리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교회에 가지 않는다.”

《전국 청년목회 컨벤션 2002 자료집》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회교육백서》에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지극히 현상적인 이유만을 말하고 있다. 청년들을 위한 재정, 세대차이, 교육 기자재와 소통의 문제를 들고 있다. 이런 문제로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이 누구일까?

20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했을 때는 그들이 가지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20대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이라 할 경우 범위가 넓어서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 이상화 목사가 주장하는 33가지 이유와 《전국 청년목회 컨벤션 2002 자료집》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회교육백서》에서 분석한 자료가 여기에 해당될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해 볼 대상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교회에서 헌신하고 있는 청년들이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며, 여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의 미래이며, 현재 교회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청년들이 교회를 왜 떠나는가?

한 선교단체 간사의 고민은 교회에서 헌신적인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선교단체 간사는 학생들에게 교회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교회의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가르쳤다.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들어내야 하는지도 함께 나누었다. 교회의 역사, 교회의 예배, 교회의 교제, 교회의 선교, 교회의 정치에 대해서 가르치고 나누었다. 그가 열심히 가르친 이유는 교회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가지고 학생들이 교회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 발생했다.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청년이 교회에서 부적응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 학생이 교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 되고, 교회를 섬기기보다는 교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선교단체 간사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은 교회 안에서 성경적 설교와 가르침, 교제와 나눔, 교회 정책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가 성경적 가르침과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르침과 원리를 따르는 것 같았다. 이런 비판적 시각은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점점 교회에서 부적응 자가 되어가고 교회의 “안티 세력”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교회를 잘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점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자기가 섬기던 교회를 떠나야 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이 학생의 문제 앞에 선교단체 간사는 고민에 빠졌다. 교회를 옮기라고 할 것인가? 그 교회에 남아 섬기라고 할 것인가?



어떤 교회를 찾고 있는가?

교회를 떠나는 것을 고민하는 학생에게 소위 말하는 ‘교회 이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랑의 메신저라고 자처하는 교회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 교회에 가기가 싫다.” “교회에 가면 “하지말라!”는 것이 너무 많고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해서 가기 싫다.” “너무 따분하고 지루해서 교회에 가기 싫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를 떠날지 고민하지 않는다.

교회를 떠나 교회를 찾고자 하는 학생에게 교회 안에서 단순히 “들어나 보이는 모순”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체험이 없어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 “성경 안에 서로 모순되는 듯한 말씀에 대해서 덮어놓고 믿으라니 답답해서 교회에 가기가 싫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 교회에 갈 필요성을 별로 못 느낀다.” 이런 이유는 그들의 신앙으로 넘어설 수 있다.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른 말씀 선포와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이 실현되는 교회 정치이다.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이 찾고 있는 교회는 성경적 가르침과 설교가 있는 곳이다. 교리가 실현되는 교회이다. 교회 운영의 원리가 성경적 가르침에 따라 실천되는 곳이다.



기독청년들 교회를 떠나 교회를 찾고 있다!

기독청년들은 교회를 찾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찾기 위해 교회를 떠난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찾는 교회가 필요하다.

비 기독청년들도 자신의 흥미의 대상이 교회가 아니라 존경의 대상으로 교회를 찾고 있다. 비 기독청년들도 자신의 흥미를 채워지고, 관심을 만족시키는 교회 즉 흥미의 대상이 될 만한 교회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존경할 수 있는 교회를 찾고 있다. 이 시대, 이 사회 안에서 존경할 수 있는 교회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존경할 만한 교회가 필요하다.

결국 해답은 교회이다. 교회가 바로 설 때 기독청년들 뿐만 아니라 비 기독청년들도 교회로 돌아올 것이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110:3).” 이 날을 소망해 본다.



2012년 0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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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학생신앙운동을 바라보면서
젊은 야성이 다시 일어나는 운동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세령 목사








▲ 이세령 목사

코닷연구위원장

최근 대학 SFC를 함께 하던 후배를 만났다. 그는 지금 모교의 경영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모교 SFC의 지도 교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학생 때부터 다니던 서울 중앙교회의 안수 집사로 섬기면서 대학부장을 맡고 있다. 이 형제를 만나 대화하면서 서로 기억을 나눈 두 가지가 있다.




필자는 이 형제가 가진 신실함을 기억하고 있다. 대학 시절 학원 SFC가 조직되고, 아침 기도회를 매일 모였다. 지방 출신이던 이 형제가 아침 기도회를 참석하는 일이 부담이 되었다. 강의 시간 전인 아침 8시에 모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숙집에 밥을 먹으려면 아침 기도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이 형제가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자신의 결단을 나누었다. 이제 기도회에 참석하겠다고. 이것은 매일 아침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이것이 그 형제에 대해서 내가 가진 특별한 기억이다.




그런데 오랜 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는 중에 교회 생활에 대한 것이 있었다. 서울 중앙교회 대학부가 지금도 잘 모이고 충실한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함께 주변 사람들과 기억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지인에게 서울 중앙 교회 대학부가 30여년이 지나기까지 오늘의 왕성함에 틀을 놓은 장본인이라고 소개했다. 정말이다. 저가 후배들을 챙기고 격려하면서 성경공부를 비롯해서 잘 지도하고 인도했다. 유학을 다녀와서도 다시 중앙 교회로 돌아가서 대학부 부장으로 지금도 봉사하고 있다.




서울 서문 교회 대학부와 대조가 된다. 현 고려 신대원 교수의 거의 절반 가량을 서울 서문 대학부 출신들이 봉사하고 있을 만큼 서문 대학부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왕성함을 유지하고 회복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이 후배가 서울 중앙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려워서 당시 선배였던 저에게 여러 번 교회를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필자가 "너는 거기에 있어야 한다"라는 말로 격려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잊어먹고 있었다. 정말 잘 했었구나 라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전국 학생신앙운동은 개혁주의 교회 건설과 학원의 복음화가 목표이다. 과연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잘 잡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와 평가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1. 교회 자치 기구로서 학신의 위상의 변화 이해

최근 들은 소식에 의하면 지구(시찰별)와 지방(노회) 교회 연합 조직으로서 학신이 와해되고 있다. 조직을 형성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람과 관심이 없다. 왜 그런가?




필자가 중고등부 시절에는 성인들과 함께 오전예배를 함께 드렸다. 그리고 중고등부 모임은 그 이전에 9시부터 모임을 가졌다. 전도사님의 강의를 듣고, 또한 자치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또한 토요일에도 모임을 가졌다. 예배를 독립적으로 드리지 않았다. 필자가 서울 성원교회 출신인데, 당시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교회로서 전도사님을 배치해 주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담임 목사님을 모시기만도 벅찬 환경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들이 성장하고, 교회의 재정적인 환경이 나아지고 반대로 학교와 학생들의 상황이 변화되었다. 그래서 교회들은 중고등부를 따로 성인들의 예배에서 분리하기 시작했다. 예배가 분리된다는 말은 중고등부 예배를 위한 전임 사역자를 필요로 한다. 부모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러 와서 나눠 예배를 드리기에 당연히 다른 목회자가 필요하다.




여기서 중고등부는 교육적 배려를 받는 기관으로 위상을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교육적 책임을 맡은 사람 즉 전도사님이나 강도사님 혹은 목사님들의 의지와 교사들의 회의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조직이 개입하면 그 조직이 역할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가게 된다. 주체적인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선한 의도로 본 것이다. 학생들이 가진 자발적 가치보다는 교육적 의미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어 왔다. 그러나 결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흐름이 성공적이었는지는 평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중고등부 학생들이 자치력을 상실하고, 교육을 받는 피대상자로서만 여기는 현재의 상황은 교육이란 관심의 산물이다. 이것은 학생 신앙운동과의 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교육을 받는 대상으로서 중고등부는 자치적인 운동력으로서 SFC의 활동을 잃어버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래서 매월 가졌던 순회 헌신 예배가 사라지고, 학생들의 조직으로서 지구나 지방 학신이 소멸되는 현실이 되었다.




나아가 교육적인 의도로서 수련회 마저 기획이 되고 훈련이 되었다. 교육의 일관성을 위해서 교육을 맡은 목회자의 의도에 적합한 수련회를 찾게 되면서 학신 수련회의 가치는 절감되었다. 이제 지방 혹은 지역 수련회에 중고등부가 참여하는 것은 희소하게 되었다.




교회 연합으로서 학신이 가졌던 위상은 교회의 교육적 사명에 대한 역풍으로 필자는 평가한다.




2. 학원 SFC에 대한 이해

USFC의 조직은 80년대에 들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학원 학신 조직은 이미 학신 초창기부터 중고교와 대학도 일부 형성되었다. 그러나 학원 학신 조직이 시작된 것은 대학생 대회와 관련된다.




대학생 대회는 한국 대학 사회에 CCC와 같은 캠퍼스 선교 단체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다. 70년대 초반 CCC는 서울을 비롯해서 각 교회 대학부의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모임으로 사람을 양육한다는 개념으로 캠퍼스 운동으로 자리를 잡는다. 교회의 학생들이 이 운동으로 빠져나간다.




여기에 당시 김만우 목사를 비롯한 학신의 지도자들은 대학생들을 교회에 잡아두기 위해서 대학생 대회를 마련한다. 그리고 이어서 캠퍼스 운동을 전개한다. 대학부를 기반으로 한 캠퍼스 운동들이었다. 대구, 부산, 그리고 서울도 일부 캠퍼스에서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캠퍼스 운동으로서 학신 운동의 조직은 1980년 어간이다. 온천교회 안용운 목사가 교사로서 이 운동에 헌신하면서 학원 조직들이 전국적으로 생기기 시작한다. 이성구, 전성준 목사들이 간사로 뛰어들면서 학원조직들을 챙기고 격려하면서 학신 운동은 새로운 시기를 맞았다.




1983년 겨울 전국 학신은 USFC라는 기구를 지방 기구와 동일하게 위상을 시키고, 얼마 있지 않아 교회 연합과 학원 연합 부위원장 제도를 만들면서 양쪽의 틀을 형성해 왔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학신이 USFC라는 학원조직에 뛰어들고 캠퍼스 운동에 참여를 시작한 것은 교회를 지키기 위한 출발점이 분명하였다. 그 노력이 얼마나 성공하였는가는 평가해 보아야 하지만 의지는 분명했다.




필자가 학생으로 있던 시절이나 간사로 봉사했던 시절 그리고 이제는 목회하면서 한 번씩 간사팀이나 학생들과의 만남에서 여전히 공유되는 일정한 태도는 동일하다고 본다. 강령에 나타난 교회 중심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최우선적으로 보이는 지역교회 중심을 가리킨다. 여기서 벗어나는 순간 학신은 어려움을 가진다는 경고를 서로에게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학원 운동은 개혁주의 신앙의 중심을 관통하면서 정착되어 왔다. 즉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내려는 노력의 정착이다. 교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동료 그리스도인과 함께 세상의 질서에 대항하면서 살아내는 운동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이 개혁신앙 운동원들의 목표이다. 그런 원리에서 전도하고,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캠퍼스 운동이 밑거름이 되어서 사회에 나아가서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사역하고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운동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에서만 가두어진 복음주의 권의 신앙인이 아니라 개혁파 신앙인으로 교회과 세상을 함께 엮어가는 역할을 전국 학신과 학원 학신들이 감당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3. 간사 제도에 대한 이해

교회 교육의 강조가 곧 중고등부나 대학부를 지도하는 전문 교역자를 배치하는 것으로 일차적인 관심을 드러낸 것이 교회의 현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운동의 전문화와 지속성이란 관점에서 간사 제도는 시대적인 요청이었다. 그러나 이들 간사들이 학생 자발 운동이란 명제를 상실하면서 오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얼마 전 전국 초대 간사를 지냈던 김만우 목사님을 유럽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가 간사 시절 전국 학신 대회가 소집되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간사 제도에 대한 거부감으로 당시 학신 전국위원들과 선배들은 간사의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당시 선배들에게도 있었던 발언권이었다. 그만큼 당시에 학신의 학생 자발성이 대단했다. 그래서 김만우 목사님은 그 결정을 존중하고 선배석으로 가서 발언권을 얻어서 발언을 했다고 했다. 학생 자발 운동을 최대한 살리려 한 선배 간사의 충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간사 제도가 개혁주의 운동으로서의 정체성 유지와 교육과 양육의 심화, 지속성이란 관점에서 필요했다. 그러나 이 간사제도가 이런 학생 조직에 대한 배려와 교육과 자발성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질문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겠다.




단 세 명의 간사에 의해서 1980년대 전국 운동은 천여 명의 운동원들이 모이는 대학생대회를 치러 냈고, 오천 명이 모이는 중고대회를 치렀다. 그리고 전국에 수많은 학원 조직들을 일구어 내었다. 한 운동원 한 운동원을 돌봄이란 명제 앞에서 두개 정도의 캠퍼스를 맡은 간사 조직으로 발전하게 된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의 방식만이 최선일까?

물론 행정, 출판, 그리고 훈련원, 또한 고교 학원 조직 등 엄청나게 많은 역할을 간사진들이 많아서 진행되도록 하고 있다. 이제 이런 일들은 학생들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그럼에도 학생신앙운동의 본류에서 위치하는가? 다르게 말한다면 지원 조직과 본 운동 조직이 어떻게 조화를 가질 수 없을까?




간사 제도가 모든 캠퍼스 선교 단체들의 공통된 조직으로 정착이 되었다. 그런데 교회가 배경이 된 전국 학신의 경우 무엇인가 다른 방식이 없을까? 교회도 교육이란 이름아래서만 문제를 다루지 말고 학생들이 가진 자발성을 키우는 관점에서 SFC를 고려할 수 없을까?




4. 학생 자발이란 말에 대해서

자발성은 필자가 간사 시절 분명히 마음으로 정의를 규정하였다. 그것을 리더십의 창조적 수용이다. 전국 학신이 출발 할 때 이미 한명동, 박윤선 목사와 같은 이들의 리더십에 의한 운동이었다. 당시의 학생들이 창조적으로 이런 지도력을 창조적으로 수용해서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지나친 면이 있어서 교회 쟁탈하는 일에 학생들이 가담했던 불행한 사건들도 있었다.




자발성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시대는 아니다. 자발성은 바른 길에 대한 창조성을 가지고 적응하고 자신들의 길이라고 받아들이는 수동성도 포함한다. 물론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있어야 한다. 여기서 대화와 타협 그리고 이를 위한 현실 인식과 방향성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자라난 학생들이 이런 훈련에 익숙해 있어야 한다. 너무 돌보고 자란 이들이다. 교육적 배려에만 익숙한 학생들이 되었다. 여기서 학생 자발성이 성숙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현실이다.




글을 마치면서

전국학생신앙운동(SFC)는 언제나 필자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지금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현장이다. 저 세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바른 개혁신앙의 틀 안에서 잘 성장하게 하고 꿈을 심어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만이 이 세상에 소망인 참된 복음을 담고 있음을 잘 설명하고 가르치고 싶다.




비록 상처가 난 우리 교회이지만 그러나 이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소망은 복음에 대한 충성이다. 그리고 기도가 모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인 것을 함께 나누고 싶다. 여기서 한국교회의 지도력이 참되게 배양된다.




몇 해 전 한 대형교회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대형교회에서 리더가 배출되지 않는다. 한국교회 부흥 100주년을 맞아서 토로했던 말이다. 야성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이다. 편안하고 쾌적한 교육환경이 교육의 질을 높여주는 지름길인가? 학신이 가진 아름다운 소망 주님의 교회를 위한 열정과 헌신과 더불어 이제 교육적 배려와 삶의 장에 대한 바른 고려로서 캠퍼스에 대한 이해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꿈꾸어 본다.



2012년 02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