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이만열, 고신, 보수 출신의 좌파 시각 - 8강
역사의식 가지고 책임 있게 살아라
이만열 장로 해방 후 한국 교회사 마지막 강의 이야기
데스크 승인 2012.03.06 16:11:28
김태훈 (hooni0320)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이만열 장로의 해방 후 한국 교회사 특강 마지막 시간은 수강생들의 소감 나눔으로 시작되었다. 한 명씩 일어나서 짧게 한마디씩 이야기했는데, 대체로 "기대한 만큼 잘 배웠고 유익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한편 "교회사의 질곡과 어두운 면을 알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는 소감도 있었고, "내가 있는 교회에서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짤막하게 나누었다. 곧 이어 이 장로는 바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지난주에 다루었던 통일 운동과 민중신학은 좀 알지만 (오늘 다룰) 해방, 여성신학은 잘 모른다"고 밝히며, "그냥 (강의안에) 서술되어 있는 것을 (읽어) 보면서 설명 붙이는 것으로 (강의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이만열 특강 마지막 시간에도 많은 청년이 참석해 8주간의 강의 내용을 갈무리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지배자 논리 대변한 해방신학 비판자들의 주장 비판해
먼저 해방신학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남미의 상황을 언급했다. "지배 질서의 유지에 가톨릭교회와 신학이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며, "우리나라 신라, 고려 시대의 종교도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병자호란 이후에 성리학 질서와 관련된 북벌 사상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동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남미 신학은 지배 질서로부터의 해방에 대해서는 관심 없었다"고 꼬집으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해방신학이 나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이 장로는 "한국 신학이 어떤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던졌고, "주류 신학은 한국인이 창도한 것도 없거니와 외국에서 들여온 것만 옹호한다"고 답했다. 또한 "그래서 예언자적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아주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해방신학은 남미의 민중들이 억압받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게 되면서, 민중의 고통에 연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실 사회의 억압과 종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해방신학의 핵심 과제였다. 이 대목에서 이 장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이것만 알면 다한 거다. 더 이상 할 것도 없다"며 농담을 던졌다. 싱거운 농담에 가볍게 웃은 후 이내 "그러나 책에 나와 있으니까 더 알아보자"고 말하며 남은 진도를 향해 달렸다.
1970년대 초반부터 해방신학이 국내에 소개되었지만 관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고, 초기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해방신학은 비판하는 진영에 의해 논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보수 우익 성향의 학자들은 언론을 통해 해방신학을 비판하고 무료 강좌를 열기도 하는 등 위험성을 알렸으며, 군사정권도 관변학자들을 동원하여 공격했다. 이에 대해 이 장로는 "해방신학의 내용이 제대로 소개되기도 전에 비판 작업만 무성했다"고 말했다. 이어서 "비판 작업은 전체를 다 소개하지도 않고 필요한 부분만 떼어 내서 이야기한다"고 꼬집었고, "먼저 비판을 적극적으로 했던 덕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가 된 면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교회의 비정치화를 주장하는 보수 진영의 학자들은 해방신학의 성격과 방법론, 내용 등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해방신학을 신학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면서 기독교 신학은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장로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런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학은 뭐냐? 지배자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 아니냐"고 일축하면서, 해방신학 옹호자들을 대변했다. 옹호자들은 어떠한 신학도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신학은 역사적 상황과 실천을 중시해야 하고 억압 때문에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에 대해 우선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이 장로는 "(다른 입장에 대해) 통찰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독려했고, "모든 학문은 그 당시의 상황, 문제의식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해방신학에 대해 조금 치우친 평가가 내심 마음에 걸렸던지, 이 장로는 "소개가 아니라 지지 발언같이 들리는데, 괜찮다. 내 입장이 그렇다"며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다. 나아가 개인적인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기장 측 정책 협의회에 가서 "민중신학이 최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기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제일 보수 측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기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고신 측에서는 기피 인물이자 경계 인물이 되었다"며 혀를 찼다.
여성 목사 안수 문제에 대한 소신 밝혀
이어서 강의 순서에 따라 여성신학을 다루었다. 1960년대 제2차 페미니즘의 열풍과 더불어 등장한 서구 여성신학은 1975년 세계 여성의 해를 기점으로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페미니즘은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여러 학문 분야의 지적 지도를 바꾸어 놓았는데, 이 장로는 "오늘날 공천할 때에 여성 비율을 의무화시킨 것도 페미니즘이 가져온 결과"라고 말했다.
여성신학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1970년대 후반과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1980년대를 다루면서 이 장로는 "이름만이라도 외워 두라"며 주요 여성신학 연구 단체와 그 활동을 설명했다. 이어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거시적인 사회 변혁의 프로그램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여성 문제에 강조점을 두는 여성운동이 부상했다"고 말하며, 여성 교회의 창립 이야기와 여성의 경험을 반영하는 "여성주기도문"의 번역 작업을 소개했다.
1990년대 여성신학이 기존 교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 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노력의 귀결로서 여성 안수 허용이라는 실질적 성과를 분석했다. 대표적으로 장로교 통합 측은 1933년 총회에서 여성 안수 허용 안건이 처음 상정된 이후 60여 년 동안 유보해 오다가 1994년에 마침내 여성 안수를 허용했다. 이 장로는 당시 여성 안수 문제를 촉발시킨 김춘배 목사의 사례를 소상하게 설명했다.
김 목사는 여성 안수 반대 주장의 근거가 고린도전서 본문 내용을 재해석했다. 동성애, 불륜 등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말썽 많던 여성에게 잠잠하라고 조언한 맥락이었다. 바울은 굉장히 거셌을 가능성이 큰 고린도 교회 여성들에게 국한하여 잠잠했으면 좋겠다고 쓴 것이므로, 2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 모두 보편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이 장로는 "한국 여성신학이 가부장적 교회 권력에 저항하여 성취한 역사적 성과의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미국에서의 경험담도 들려주었다. 1992년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연구 학기를 하던 중 호주 카드넌트신학교 교장과 여성 안수 문제를 이야기했다. 화란 개혁교회 소속이던 그는 칼뱅신학교를 중심으로 여성 안수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며, 그들은 1년간 연구위원회를 통해 연구를 한 후 92년에 총회에서 채택하기로 했다. 그에 대해 이 장로는 "보수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안수 허용 여부의 문제는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평가하며, "구약 사사 시대 여성 지도자 드보라가 나오고, 신약 일부에서는 여성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는 등 충돌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성 안수 문제는 "그 지역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두고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성에게) 폐쇄적인 곳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문화와 지역 등을 밀접하게 연관시켜서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합동과 고신은 (아직도) 여성 안수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하며, 보수 교단 내에서의 갈등도 소개했다. "전반적으로 체제 안정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큰소리치지만, 그중 다른 의견을 가진 진보적인 사람은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말씀대로 살자는 것에는 동의하는데, 문자 그대로 지키려면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은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을 주일학교 안에서도 지키면, 여성 선생님도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어서 "주일학교 여 선생은 되고, 여 목사는 안 된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고 역설하며, "무엇이 옳다 그르다에 대한 입장 표명은 곤란하니까, 다만 지키려면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원칙론을 고수했다. 나아가 "자신 없으면 여러 갈래를 통해 성경이 제시하는 것을 평등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며,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남녀평등"이라고 강조했다.
▲이 장로는 민중신학을 높게 평가했고,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신학적인 입장을 거침없이 밝혔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나라다
마지막 단원으로 "새로운 신학과 사회참여" 부분을 살펴보았다.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이해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복음 전파를 통해 개인의 삶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이는 "사회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로잔언약에서 제기된 하나님나라와 사회참여, 그리고 선교의 상호 연관성을 다룬 1975년 서울선언, 1983년 미국에서 국제복음주의연맹의 결의문을 다루면서 이 장로는 "종래에는 미래만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고 생각한데 비해, 현재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고 인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종래는 나라의 영토 개념만 다루었는데,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이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1930년 감리교의 교리에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나라라는 입장이 나오는데, 장로교는 1974년 로잔 대회 이후에야 나왔다"고 소개하며, "자신은 장로교인이지만, 장로교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또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진보적 입장을 수용하게 된 배경도 다루었다. "빈부 격차, 경제 정의와 관련된 사이더의 기독교 윤리관은 손봉호에게 영향을 주었고, 상황화와 해방신학에 대한 하비 콘(Harvey M. Conn)의 전향적인 해석은 이만열이 민중신학을 높이 평가하고 민주화에 참여하는 데 큰 격려가 되었다"고 기록된 강의안을 읽으면서, 이 장로는 하비 콘과의 개인적 만남을 소개했다. "웨스트민스터 선교학 교수인 콘은 빈민, 창녀촌, 흑인촌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분인데, 1982년에 한국에 왔을 때 대화 해 보니까 많이 통했다"고 말하며, "(콘은) 해방신학에 대해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진보적 해외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은 사회참여를 모색하던 젊은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으로) 1986년 기독교문화연구회와 <대학기독신문>과 <복음과상황>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복음과상황> 관련된 강의안에도 이 장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 장로는 직접 부연 설명을 했다. 이 장로가 김진홍 목사와 함께 주도하여 1991년에 발행한 <복음과상황>은 교회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어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편, 이 장로는 김 목사와 관련한 개인적인 만남, 동역 그리고 헤어지는 사건을 길게 들려주었다.
예정된 종료 시간이 다 되어 남은 부분에 대해서는 "그 밖에 신학적인 것 아니지만, 기독교 문학, 찬송가 번역, 기독교와 사회문제, 미래를 두고 고민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다루지 못했다"고 말하며 갈무리하였고, 이어서 수강생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총 네 명의 수강생이 준비해 온 질문을 정성껏 하고, 이 장로도 친절하고 꼼꼼하게 대답해 주었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에 수강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의 실존적인 고민과 자기 이유를 찾고 싶은 마음이 진실하게 담긴 좋은 질문들을 던졌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 생생한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그 문답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질문 1 - 지역 교회 청년부 목사 조00 : 시대에 따라 교회가 노동, 민주 운동 등을 주도했는데, 이 시대에 와서는 역사가 거꾸로 갔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독교 세력에 의해서 민주화가 거꾸로 갔다는 위기의식이 있다. 이 시대에는 어떤 이슈와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가.
답변 1 : 교회가 나아가야 할 시대적 과제가 있다. 늘 이야기하지만, 시대를 바라보는 의식은 역사적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한말에는 반봉건 사회 개혁, 일제 침략기는 국권 수호 의식, 일제하는 국권 회복 독립운동, 해방 이후에는 식민 잔재 청산과 민주적 기틀 수립과 민족 화해 문제, 60년대 이후에는 민주화 인권 운동, 80년대는 통일 운동, 90년대는 북한 돕기 운동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오늘날의 과제는 무엇이냐. 몇 년 사이에 역주행을 많이 했다. 민주화, 인권, 통일 문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특히 4대강에서도 보여 주듯이 반생명과 반환경의 역주행이 심각하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과제는 과거에 추진했던 것을 우선 일상적인 과제로 삼는 것이다. 특별히 이 정권 전부터 기독교가 분열과 분파에 편승해서 전면에 많이 나왔는데, 이제는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하나의 치유의 방법으로서 민주화, 인권 등의 기본적 과제 위에서 역할을 다시 설정해야 하고, 그 후에 교회 자정 운동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자정 능력이 없어졌는데, 이런 식으로 나가면 가능성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700~800년 이상, 유교가 500년 이상, 기독교는 120여 년 지속됐는데, 기독교가 과연 200년을 채울 수 있을까 고민된다. 200년을 채우기 위해서는 가난 실천을 해야 한다. 때로는 청빈, 절제 및 절약도 요구된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이야기하면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정말 필요하다. 교회로서는 작은 교회 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기독교적 가치관과 신앙을 풀뿌리로 만들기 위해서 대형 교회로는 불가능하다. 그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운동을 통해 신앙을 토대로 한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질문 2 - 지역 교회 담임목사 박00 : 김진홍 목사에 대해서 (질문이 있다). 다른 자리에서는 (질문) 못 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가능하리라 본다. 김 목사가 바른 영성을 세우려 노력하며 교회의 체면을 세울 수 있는 분이라 여기며 존경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 무너져 내리는 것 볼 때 너무 아쉽고, 매우 실망스럽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원인 진단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혹시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면 알고 싶다.
답변 2 : (나도) 잘 모른다. 김 목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81년경 해직 기간에 미국 갔다가 돌아왔을 때다. 목회자들에게 역사 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 전화가 왔다. 그들이 진짜 역사 공부를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월급도 못 받고 있으니 만나서 위로하려는 목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김 목사도 옥에 갇힌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도우려는 생각이었을 것 같다. 여하튼 6개월 정도 같이 역사 공부를 했었다. 그 후 두레장학회의 이사로 초청했는데, 장학금 지급 문제에 대해서 말과 실천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느꼈다. 또한 대외 활동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출세 지향적인 성품이 있는 것 같았다. 사회적 지위에 대한 마음도 큰 사람이지만, 귀가 여린 면도 있다. 이렇게 느낀 것들을 어느 날 정식으로 가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엄중 경고도 겸했다. 김대중, 노무현에 대한 비판이 지나칠 정도였다. 이명박 후보 시 당선을 위해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다.
지금은 갈라져 있는데, 뉴라이트의 역사의식과 내 역사의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이 정권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다르다. 삶에 근거해서 역사의식이 그렇게 형성된 것 같다. 하지만 과거에 일을 같이 했던 것처럼 다시 같이 일할 수 있기를 원한다.
질문 3 - 대학원생 이00 : 요즘 통일세 논란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냐? 또한 통일 준비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답변 3 :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이 정권의 잘못이 상당하다. 통일에 대한 플랜과 주요 노력들을 어떻게 이행하려 한다는 설명이 전혀 없다. 그런 것 없이 통일세 논의를 하니까 국민들이 반대하는 것이다. 누가 신뢰하겠나? 다른 건 몰라도 6·15 공동선언에서 낮은 단계의 통일은 굉장히 중요했다. 또한 10·4선언은 6·15를 굉장히 구체화시킨 것이다. (10·4 선언의 내용대로) 서해특별평화지대를 만들었다면 연평도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명박 정권은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못 한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많은 돈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에도 돈이 엄청 많이 들었다. (참고로) 나는 개성공단 같은 것을 100개 정도만 만들면, 실질적인 통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통일세 반대 의견에는 굳이 통일할 필요 없이 지금 상태로 잘 지내자는 젊은 사람들의 정서도 영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세 반대하는 것은 역설적 의미에서 현명한 판단이다. (정권을) 믿지 못하겠으니 반대하는 것이다.
질문 4 - 대학생 이00 : 불편한 진실과 같은 사회적 이슈를 알리고 사회에 참여를 할 수 있는 실천적,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하다. 편이 갈라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균형 맞출 수 있나? 최근 탈북자 북송 문제에 대해 송환 반대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많은 사람이 관심 안 가져서 어려웠기도 했는데, 이념을 떠나서 생명의 소중함을 가지고 참여 독려를 했는데도 가치관적인 주장이라는 이유로 극보수로 몰리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답변 4 : 관심 갖는 분야의 NGO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 그 단체에 속해 있다 보면 내부 토론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회비를 내는 모임이면 더욱 안 한다. 조그마한 헌신도 안 하면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편 가르기 판단을 먼저 한다. NGO에 참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혜가 필요하고 하는 일에 대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된다. 돈 내면 관심이 적극화된다. (참고로 나는) 은퇴한 지 9년 되었고 학교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한 달에 NGO단체에 회비가 평균 100만 원이 넘는다.
통일 운동, 새터민 장학 사업, 외국인 근로자 지원 등 후원하는 분야가 많아서 복잡하기도 하지만 도우면서 사니까 사는 재미가 있다. 한 군데라도 열정을 쏟게 되면 자기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관심 가지면 좋겠다. 관심 가지고 하나를 뚫고 나가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게 된다. 실천 없이는 자기 설득도 되지 않는 법이다.
(내가) 외국인 근로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역사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관계를 공부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능력이 출중해도 대우를 제대로 못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월급도 반밖에 못 받고 멸시와 천시를 받았던 것은 바로 (일본과)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역사 공부를 통해 깨우쳤더니, 국내 외국인 근로자의 문제가 보였다. 88년 올림픽 이후 코리안 드림을 통해 환상을 가지고 입국한 외국인들은 거의 불법 체류자 되어 3D 업종에서 일한다. 동남아인들은 65%가 대졸자로서 그 나라에서는 엘리트들이다. 우리나라가 그들을 제대로 대접하면 대외적 인권이 향상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렇게 설움과 학대를 받았던 우리가,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면, 같은 이유로 다른 민족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받은 대로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분노가 일어나서 관여를 해 온 것이다. 역사의식이 삶의 현장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질의응답까지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수강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이 장로는 숨을 한번 고르더니 출석률에 대한 냉철한 자평부터 했다. 처음에 63명이 등록했는데, 최후 30명 정도가 남은 것은 보통 때보다 높은 비율이라며, "대개 1/3만 남는데, 이번 강의 최종 출석률 성적은 굉장히 좋은 편"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해방 후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말하며, "대부분 체험했다고 생각하지만 역사적 재해석으로까지는 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뒤 맥락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가의 영역이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항상 역사의식을 가지고 책임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도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지난 두 달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진행된 8번의 강의의 대단원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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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부패에 기독교인들 책임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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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열 장로의 해방 후 교회사 특강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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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스크 승인 201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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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훈 (hooni0320)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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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열 장로는 해방 후 신학교가 교단 분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 교단에 두 개 이상 신학교를 세운 것은 교단 내에 파벌을 형성한 주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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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앤조이> 후원으로 기독청년아카데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만열 장로의 "해방 후 한국 교회사 특강" 두 번째 시간에는 신학교 재건 역사와 미 군정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했다. 이 장로는 이날 감기에 심하게 걸려 목소리가 온전치 않았지만, 70세가 넘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더 가열찬 기운으로 두 시간가량의 강의를 소화했다. 푸른역사 강의실에 빼곡히 모여 앉은 60여 명의 기독 청년들이 마음을 모아 힘을 불어넣어 주며 열심히 배우려는 비장한 기운도 가득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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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교 재건과 교단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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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장로는 먼저 "해방 후 신학교는 교단 분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서로 세력화해서 하나의 신학교 만들었다. 한 교단에 두 개 이상의 신학교를 세운 것은 교단 내에 파벌을 형성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고 말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해방 직후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재건과 함께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재건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일제 잔재 청산 문제와 교회 재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과 분열이 잦아지면서 신학교 재건 문제도 교권 쟁탈전의 한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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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신학교가 교단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총회 직영 신학교를 졸업해야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로는 "신학교가 총회 직영이 되면서 교단 지도부를 구성하는 정치 세력의 신학적 성향이 신학교 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고, 신학교가 교단 정치에 휩쓸리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학교가 교단의 지원하에 있으면 교단의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교단이 원하는 신학으로 신학교를 제압하고 있다.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는 교단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있다. 너무 심하다고 할 정도로 교단의 간섭을 많이 받는다"며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신학교와 교단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래서 합동신학교처럼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신학교도 생겼다"라며 본인이 공부하고 가르치기도 했던 학교를 소개했다. 이 장로는 박사과정 중에 1985년에 합동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생들에게 교회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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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영감설 강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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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축자영감설과 목적영감설에 대한 신학을 소개해 주었다. 성경의 한 글자 한 글자에 영감이 있다는 주장과, 구원의 목표에 대한 영감이라는 두 주장을 칠판에 직접 기록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바르트 이후에 보편화한 영감설은 원어 성경 자체의 영감설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입장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읽는 사람에게 말씀해 주시는데,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뜻이다. 한편, 비평학은 문자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 문화에 대한 것도 따진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이라기보다 상대적인 말씀이 된다. 예를 들어 구약의 보복법이 함무라비 법전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축자영감론자들은 "그렇게 볼 수 없으며, 두 법이 의도하는 것은 다르다고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성서신학에 대한 전이해가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간단하게 풀어서 쉽게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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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 미 군정과 기독교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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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교회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분단과 기독교와의 관계" 부분을 다루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하며 구부러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실제로 한국사 연구자들 가운데 분단과 관련해서 기독교에 책임을 묻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이념적으로 반공을 주장했고 휴전 당시에도 휴전을 반대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로는 "이런 문제는 민족사에서 기독교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기독교의 위상 또한 그렇다. 극우적 지도자의 교회(김홍도 목사의 금란교회 같은 교회)는 지금도 이념적으로 너무 극우의 입장에 치우쳐 있다. 남북 관계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며 김홍도 목사가 작년에 "쓰나미가 하나님의 심판"이라 말했던 것을 극우적 관점의 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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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서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적과 싸우기도 하지만, 신약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습은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나눠 주고 양보하고 매 맞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따르는 것이 기독교다.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부활의 승리가 올 수 있다. 기독교 정당에서 주장하는 것도 그래야 한다. 종북 세력 척결을 위해 기독교가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오늘날 반복되는 역사적 과오를 질타했다. 또한 "교회 내에 아직도 극우주의자들이 더러 있다. 참 안타깝다. 안타깝다"며 안타깝다는 말을 연신 거듭했다. 아픈 가슴을 애써 쓸어내리는 듯한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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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미 군정과 교회의 우호적 관계에 대해서도 직격탄을 날렸다. "성공회와 구세군을 제외한 대다수 교단은 미국에서 전래하였다.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미국인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교회는 대체로 친미적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미 군정에서 일한 한국인 관료 중에 기독교 신자가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많은 기독교인이 미 군정의 관료나 통역으로 일하며 이른바 통역정치를 통해 해방 정국에서 긴밀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며 준비한 PPT 강의안을 세밀하게 읽었다. 또한 "미 군정 소속의 선교사와 선교사 후손들은 군정청의 관리나 고문이 되어 교회에 큰 힘이 되었고, 이에 미 군정은 친기독교적 태도를 보였다.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 등의 미 군정 담당자들도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건국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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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열 장로가 목감기에도 불구하고 60여 명의 기독 청년들에게 열강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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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 우호적인 미 군정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는 일제 재산의 처리 문제였다. 일본 종교 단체들이 남기고 간 많은 재산이 미 군정의 관할을 받는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었는데, 그 자리에 교회나 학교와 같은 백 개가 훨씬 넘는 기독교 시설이 들어섰다. 그에 대한 실례로 "영락교회도 터를 잡았을 때에 그런 식으로 얻었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일본 신사와 조합 교회의 재산 대부분이 기독교에 불하되었던 사실은, 오늘날 그 정당성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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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탁통치에 대한 교회의 태도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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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관계를 충분히 고민하며 생각해 볼 여유 시간 없이 강의는 계속 이어졌다. 그만큼 다루어야 할 중요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순서대로 국가 재건 시기 신탁통치 논쟁에 대해 다루었다. "세 가지 노선(중도파, 좌파, 우파) 가운데 한국교회 대다수가 따랐던 것은 친이승만계 노선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남한의 교회는 반탁 및 단정 노선을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했다. 교회는 당시 한국 사회의 다양한 건국 운동 세력과 대화하거나 연계 맺기 어려웠다. 당시 우파가 압도적이었던 교회 내에서 좌우 합작을 주장하는 일은 금기에 가까웠다. 당시 중도파나 좌파가 절대다수를 점했던 남한 전체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종교들의 정치적 태도와 비교해 보더라도, 해방 정국에서 개신교의 일관된 우파 성향은 두드러졌다"며 다소 복잡하게 꼬였던 교회의 신탁 논쟁에 대한 견해를 간단히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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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여 이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담도 밝혔다. "영락교회 같은 곳에서 통일 문제를 강의하면 살벌함을 느낀다"고 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강의를 하면,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에 대해서 무엇을 아느냐"고 물어보며 따졌다고 한다. 부모가 북한에서 희생당한 모습을 보고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역사적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강하게 있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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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지금 와서 과거 신탁통치 문제를 더 지혜롭게 처리해야 하지 않았냐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해방된 지 67년이 지났는데도 통일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통일 정부를 세우려고 투표를 했다면 공산당 지지자가 더 많이 나타났을 것이라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한 이 장로의 입장은 "만약 당시 신탁통치 반대 세력이 강했다면, 북한도 같이 반대했더라면 통일이 일찍 이루어졌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반탁론자들이 희생당하고, 남한에서는 친탁론자들이 희생당했다. 당시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오히려 반탁으로 일원화되었다면 통일이 빨라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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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기독교인들의 책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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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주장이 해방 정국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며 기독교 국가 재건론의 화두를 던졌다. 초대 정부의 기독교 영향력은 정부 내 고위직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초대 국회의원 208명 중 약 21%인 44명이 개신교인이었을 정도다. 이는 당시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이 5%에도 미치지 못했던 점에 비춰 보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여기서 "이승만 정권 내의 높은 기독교인 비율은 그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적지 않음을 말해 준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하여 앞의 여러 통계와 설명 내용을 제시한 것"이라며 기독교인들에게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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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던 미 군정, 교회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 해방 정국의 열띤 국가 재건 분위기 등도 기독교인들이 현실 정치 및 건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는 "하지만 정치와 선거 같은 여러 민주적 제도에서 기독교 정신이 잘 드러나야 하는데, 부정 선거 등으로 잘못된 사례를 남김으로써 기독교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 시기에 민주주의를 근착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해방 이후 한층 제고된 기독교의 위상과 풍부한 교회의 인적 자원은 기독교인들이 해방 공간에서 많은 정치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며 긍정적 역할도 짚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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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교회사의 재밌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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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북한 교회의 입장은 시간상 빨리 넘어갔는데, 대신 이 장로가 북한에 방문하여 직접 본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김일성 어머니인 강반석의 무덤에 한문 성이 진주 강(絳)으로 쓰여 있다. 원래는 편안할 강(康)이어야 하지만 잘못 쓰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자에게 지적하긴 했지만 듣고 고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또한 "북한 기독교 인구의 1/3이 가입한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의 1기 총회장이 김익두 목사이다. 황해도 신천박물관에 가보니 첫 방에 "미제 앞잡이 선교사 놈들"이라는 글귀를 적어 놓았다. 옆에 그 앞잡이가 된 한국 사람을 나열해 놓았는데, 거기에 김익두도 포함되어 있다"며 생생한 경험담을 소개해 주어 수강생들의 주의를 환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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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이 장로는 1982년 미국을 여행할 때부터 시작한 여행 기록을 담은 여행 일기 중 민족 통일 문제와 관련된 일기를 모아 <민족통일여행기>(지식산업사, 2005년)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이 장로가 저술하거나 관여한 서적과 많은 학술 자료들을 살펴보면 얼마나 깊고 오래, 또한 폭넓게 연구하고 활동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가히 "걸어 다니는 역사 교과서, 살아 있는 교회사"라고 불릴 만하다. 공적으로 출판 및 발표된 내용 외에 이 장로 개인이 깨닫고 경험한 내용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직접 듣고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이 벅찼다. 이 장로가 강의 말미에 "시간 맞추는 재주가 없어서…"”라며 질의응답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강의를 마친 것을 미안해했지만, 수강생들은 적잖은 배움과 감동을 받은 덕에 "괜찮다"고 무언(無言)의 감사 인사를 건넸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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