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순교자 찾기인가, 만들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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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순교자 찾기인가, 만들기인가?


부산·경남 순교자 제대로 평가 안 됐다
일제때 상당수 희생… 개신교계 재조명서 소외
공식적 유적지 11곳 가운데 한 곳도 없어
"체계적 조사·연구 통해 "영적 자산" 보전해야"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맹렬한 종교다. 신앙의 절개를 꺾고 평안히 사는 길보다는 일사(一死)의 각오로 고난에 맞섬을 숭고한 가치로 여긴다. 순교자는 그래서 추앙의 대상이 된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의 이 이야기대로, 오늘날 기독교의 성세(成勢)는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자양분이 돼 왔다.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최근 한국 개신교계는 국내 순교자의 흐름을 찾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0년대에 이미 순교 혹은 순교자에 대한 정리된 입장을 보인 천주교에 비해서는 늦었지만, 지난 2월과 4월에는 각각 서울과 천안에서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순교학술세미나가 열리기도 했다.

문제는 이같은 국내 개신교계의 순교자 연구 혹은 정리 작업에 부산·경남 지역이 상당 부분 소외돼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가 현재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국내 개신교회 순교 유적지는 11곳인데, 그 중 부산·경남지역은 단 한 곳도 없다. 또 약력과 순교내역이 확인된 192명의 순교자 중 부산·경남 출신은 주기철(1897~1944) 목사, 조용학(1904~1940) 영수, 김상찬(1892~1950) 장로, 손양원(1902~1950) 목사, 박기천(1920~?) 전도사, 배추달(1926~1950) 집사, 이현속(1896~1945) 장로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경남은 물론 부산에도 체계적인 연구 조사가 이뤄진다면 상당수의 개신교 순교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상대적으로 북한군의 피해가 적었던 부산·경남 지역이니 만큼 그에 따른 순교자는 당연히 적겠지만, 신사참배 반대 움직임이 가장 극렬했던 만큼 일제 강점기 순교 행위는 많았다는 이야기다.

실제, 부산진교회 김경석 장로에 따르면 부산 기장군 출신의 최상림(1888~1945) 목사는 1938년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장으로서 신사참배를 용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된 후, 1945년 4월 30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불과 1주일 뒤 숨졌다. 분명 신앙을 위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숨졌지만, 현재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의 순교자 명단에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김 장로는 "늦은 감이 있지만 최상림 목사와 같은 순교자의 정신을 정립하고 후손들이 이어받도록 다양한 연구와 기념사업을 전개해 그들의 순교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와 관련 요즘 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가 있다. 장로회 마산노회 소속의 이금도(84) (은퇴)목사인데, 그는 부산·경남지역에 개신교 순교 유적지로 공식 지정된 곳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2005년 10월부터 장로회 차원의 순교자 기념교회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일제 강점기 신사 불참배 운동으로 투옥돼 순교한 이들은 평안도를 제외하면 거의 부산·경남 출신인데, 지금 부산·경남 교회들은 당시 순교자들의 영적 자산을 이어 받기는커녕 실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목사는 우선 자신이 속한 노회 차원의 성과를 목표로 마산노회에 순교자 기념교회 지정을 건의해놓은 상태다. 또 그 대상으로 마산의 제일문창교회를 비롯해 함안의 부봉교회·하기교회·칠원교회·사촌교회 등 5개 교회를 제안했다.

그중 제일문창교회는 최근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명한 주기철(신사참배 거부로 평양에서 옥사) 목사의 순교기념 교회로 정하자는 것인데, 주 목사는 1931년 7월부터,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 교회로 옮기기까지 5년간 문창교회에서 시무했다. 이 목사에 따르면, 주기철 목사가 당시 국내 개신교의 "메카"이자 일제의 박해가 엄중하던 평양으로 간 것은 조만식 장로 등의 간청에 따른 순교의 길이었다. 영적 부흥이 고조되던 문창교회를 떠나기 전 주 목사는 "죽음의 준비" "일사각오" 등의 설교를 연이어 했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자적 영성의 바탕은 사실상 문창교회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밖에 부봉교회 등은 당시 경남지역에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펼쳤던 이현속 장로나 서성희(?~1942) 전도사, 한국전쟁 당시 교회를 지키다 북한군에 총살당한 손양원 목사 등이 활동했던 교회들이다.

이금도 목사는 이와 관련 "새로운 순교자의 발굴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부산·경남 지역에서 기존 순교자의 흔적과 맥을 되찾는 노력도 시급하다"며 "요즘 교계의 젊은 사역자들이 교회의 외적 팽창에만 치우일 뿐 이같은 영적 성숙의 노력은 외면하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임광명기자 kmyim@busanilbo.com

/ 입력시간: 2007. 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