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 (김광렬 교수 著) 서평
기독신문 2000/9/27 1314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김광렬 교수,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서평
총신대학교 신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는 김광렬 교수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제출했던 박사 학위 논문에서 가졌던 관심을 우리 상황에 더 맞게 고쳐 써서 그 동안 여러 곳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으고, 또 일부를 보충하여 귀한 책을 출간했다.
귀국 후 수년 동안에 발표된 논문들이지만 기본적으로 학위 논문에 기초해 있고, 계속해서 구원과 성화라는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쓰여진 이 글들은 논문집으로보다는 훌륭한 한 권의 단행본으로서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이 책은 한국 교회 조직 신학의 두 번째 세대의 성숙해 가는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초기 한국 신학자들이 서구 개혁파 신학을 잘 번역, 번안하여 소개했다면, 이제는 더 진전해 가는 서구 개혁파 신학을 반영하면서 이전의 개혁 신학을 좀더 창의적으로 전진시키고 있는 두 번째 세대 조직신학자의 역할을 김 교수가 이 책에서 훌륭하게 감당했다고 생각한다. 이 서평에서 나는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이 책에서의 김 교수의 공헌을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 구원과 성화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 견지하고 있다
김 교수는 20세기 후반에 나타나고 있는 미국 개혁신학계의 발전을 잘 반영하면서 구원과 성화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은사인 개핀 등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입장의 충실한 반영자라고 할 수 있다. (1)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대한 전통적 논의에 대한 대안으로 김 교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으로 구원의 서정을 원형적으로 접근하여 이해하려는 개핀 등의 입장을 따르며 구원의 서정을 논의하고 있다. (2) 그리고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임을 분명히 하여(28), 이런 접근법이 그리스도 중심의 접근 방식(28, 37)일 뿐만 아니라, 성령 중심의 접근법이기도 함을 잘 시사하고 있다. (3) 이와 연관하여 김 교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개혁주의적 입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구약 시대의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세대주의 신학자 샤퍼(Chafer)에 반해서, “구약 시대를 포함해서 오순절 전에도 중생의 역사가 있었고, 따라서 그와 같은 성령님의 중생 역사로 인하여 구약 성도들도 구원을 받은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고(226), 또한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 사역을 개개인들의 성도들에게 적용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도 신, 구약 속에서 모두 존재한다고 본다”는 분명한 입장을 잘 표현한다(217). 또한 오순절주의의 성화론을 논박하면서 진정한 중생을 성령 세례와 함께 보는 개혁주의적 입장을 잘 드러낸다(183). 이와 연관하여 오순절 신학의 “제2의 축복의 신학”의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한 바른 비판(273, 275), “내적 음성”의 계시에 대한 바른 비판(274), 감정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276) 등에서 그의 개혁신학적 태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적적인 은사들은 “사도들에게만 제한된 역사”라고 하며, “교회의 기초가 세워지고 성경 말씀의 계시가 종결된 이후에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고(274) 개혁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4) 중생에서의 인간의 수동성을 강조하면서 “중생케 되는 것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는 지적도(51, 339)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도 개혁신학적 입장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중요한 표현으로 인정될 수 있다. 더구나 중생에서의 죄의 인지적 영향 제거를 언급하면서 중생에 인지적 측면이 있음을 밝힌 것은(51f.), 앞으로 개혁신학계에서 이 측면이 폭 넓게 발전되기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시사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중생자는 그의 감정, 욕구들도 과거와 다른 새로운 방향성을 지닌 감정과 욕구들을 느끼며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는 지적도 매우 훌륭한 것이다(53). (5) 중생의 뿌리에서 온 회개와 신앙의 밀접한 연관성을 설명하면서 “모든 참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이라고 잘 표현한 것도 개혁신학의 입장에 충실한 것이다(58). 그리고 믿음의 단지 도구적 성격에 대한 강조(65)도 칼빈적 믿음 이해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6)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표현은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고 밝히고 있는 것은(32) 성경에 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7)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심판대 앞에서의 최종적 선언을 칭의의 ‘이미’와 ‘아직 아니’로 설명하고 있는 것도 개혁신학적 논의를 따르는 매우 중요한 통찰의 표현이다(41). (8)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신자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162) 과거의 개혁신학자들도 부정확하게 썼던 용어의 사용을 머레이와 후크마의 논의를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바꾸어 사용하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개혁신학적 논의의 하나임을 강조해야 한다.
둘째로, 현대의 여러 구원론을 밀도있게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개혁주의적 구원론에 충실하면서도 (특히 그의 관심 영역인 성화론과 관련해서는) 현대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구원론에 대한 밀도 있는 성숙한 신학적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논의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는 자들 사이의 토론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논의들이 성경적 성화관에 대한 더욱 온전한 이해를 얻기 위한 발전적 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김 교수의 말 가운데서도(98, 315), 우리는 다양한 복음주의자들과 대화하면서 보다 성경적 방향으로 교리를 발전시키려는 개혁주의 신학 작업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화론을 고찰하면서, 고전적 루터교의 성화론(제5장)과 웨슬리주의적 성화론(제6장), 19세기 미국의 성결 운동과 케직 사경회의 성화론(제8장), 오순절주의의 성화론(제10장)을 개혁주의적 성화론과 비교하면서 고찰하고, 종국적으로는 ‘결정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에 대한 머레이의 입장을 좋은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따르고 있는 것은(제7장, 9장, 11장) 한국 교회 제2세대 개혁주의 조직신학이 다양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와 대화하면서 좀더 성경적인 개혁신학적 입장을 제시하려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고 여겨진다.
셋째, 개혁신학과 성경신학의 연결을 제안하고 있다
김 교수는 전통적 개혁신학을 보스 등에 의해서 제안된 성경신학과의 연관성 가운데서 전개할 것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개혁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면서(300), 보스(Geerhardus Vos), 머레이(John Murray), 클라인(Meredith G. Kline), 개핀(Richard B. Gaffin) 등의 신학 작업에 따를 것을 강하게 제안하고 있다. 특히 그는 종말을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하는, 즉 교회의 현재 상태를 포함하는 종말 개념으로 보게” 한 보스의 공헌을 말하는 개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런 성경신학적 통찰을 “종말론에서뿐만 아니라, 기독론, 그리고 구원론과 같은 논의들 속에서도 … 새로운 회복”을 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303). 이는 보스와 개핀의 중요한 지적을 아주 잘 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적용의 하나로 칭의가 “종말론적인 의”라는 것을 개핀을 따라서 잘 제시하고 있다(73, 85).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에서도 김 교수는 “이미 도래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304)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역시 같은 이해를 잘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故)박형룡 교수조차도 벌코프에게 충실하여 이점에 대해서 정확한 지적을 하였다는 것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도 (박형룡도) … 신자들은 이미 임재한 천국에서 살고 있으며, 영생이 원칙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들을 언급했었기 때문이다”(307). 이제 문제는 이런 통찰을 지적하는 신학자들과 함께 우리의 일상적 종교 언어의 사용에서 이런 종말 개념과 하나님 나라 개념을 실제로 반영하느냐 하는 것이다.
넷째, 조직신학은 실천적 사역임을 보여주고 있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정상적인 조직신학은 매우 실천적인 사역임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독자들이 온전한 의미에서 “주만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도록 하려는 관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1, 12, 317). 그의 글에서 그가 결론에서 말하고 있는 “한국 교회 안에서 구원과 성화에 대한 이해가 개혁 신학의 가르침 속에서 좀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자리잡아 가기를” 바라는 염원이 잘 나타나 있다(317). 특히 성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것이 “현실적인 중요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에서도(93, 94) 이런 실천적 관심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형적인 개혁신학자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가르침과 글들 속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를 “‘신학과 실천’ 혹은 ‘교리와 삶’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와 작업”이라고 말하고 있음에(153) 유의하라. 이처럼 바른 신학은 매우 실천적이다.
이상의 네 가지 측면에서 이 책은 좋은 개혁신학서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김 교수의 논의는 개혁 신학적이고, 다양한 복음주의 전통들과 긍정적으로 대화하는 신학이며, 성경신학과 유기적 관계를 나타내는 건강한 조직신학이고, 매우 실천적인 신학이다. 만일에 김 교수와 우리 모두가 이 네 가지 특성에 끝까지 충실해나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영광스러웠던 개혁신학을 오늘 이 땅 가운데서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몇 가지만을 사족으로 지적해 본다.
첫째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전통적 입장에 대해 제시되는 문제와 비판과 관련해서, 그런 입장의 현대의 극단적 대변자가 머레이(Murray)라면(20), 그에 대해서 과연 베르까우워가 말하는 비판이나(23, 24), 김 교수가 26쪽에서 제시하는 비판을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다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머레이의 이해를 과연 직선적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전통적 논의 방식의 대안으로 지적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은 김 교수가 인정하는 대로 이미 머레이가 강조하는 것이며(27), 사실 벌코프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과거 선배들이 사용한 구원의 서정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느냐는 것이 된다. 개핀이 잘 말하듯이 구원의 서정의 여러 요소들은 한 구원 사건의 여러 측면을 말하는 것이나, 과거의 신학자들은 (김 교수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그 각각의 요소들 사이에 놓여 있는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를 확보하려는”(18, 44-45, 71) 것이 아닌가? 심지어 후크마도 “중생이 … 믿음, 회개, 성화 등등에 대해서 원인적 우선 순위”를 지닌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전통적 신학자들도 어떤 것들은 “서로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될 수는 없다”(43)는 것을 밝히지 않았는가? 그러나 “구원의 서정” 개념을 계속해서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개혁신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논쟁 거리가 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개핀이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시사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다루지 않은 이 문제가 앞으로의 조직신학 논의의 중요한 논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통적 구원의 서정 논의가 신약적 종말론적 특성을 잘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논의는 매우 중요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머레이도 그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또 제기 될 수 있다.) 김 교수는 개핀, 베르까우워, 후크마 등에 동의하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으나, 어떤 점에서는 전통적 입장을 따르는 김 교수의 논의에 아직 설득되지 않은 신학자들과의 논쟁이 남아 있다고 여겨진다.
둘째로, 김 교수처럼 성경 신학과의 밀접한 연관성 가운데서 조직신학을 하려는 신학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아쉬운 점들을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다. (1) 고린도후서 5:17의 “새로운 피조물”(kaine ktisis) 개념을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336) 여전히 개별적인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데(48, 336), 이것이 피조계 전체의 새로움을 말한다는 보스의 말을 알고 있는 신학자에게서 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표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주해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구절들에 대해서 김 교수는 개혁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해석만을 선택하여 비교적 그 입장에 충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좋으나, 주해적 가능성을 다 제시하고 자신이 택한 해석이 지지되야 하는 이유를 좀더 밝히는 주해적 논의의 아쉬움을 나타내는 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3) 성경 신학적 종말관과 하나님 나라 개념을 비교적 정확하게 사용하면서도 때때로 한국 교회의 전통적 용어의 사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점은 매우 아쉬운 점의 하나이다.
셋째, 기독교 교육과 관련한 논의에서 중생과 중생 직후에 나타나는 처음 단계의 신앙과 회개는 교회 교육의 목적이 될 수 없지만, 계속되는 신자의 삶 속에서의 믿음과 회개는 교회 교육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논의는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계속되는 신자의 삶 속에서의 회개와 믿음도 ‘회심’(conversion)이라고 명명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제기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일반적으로 ‘회심’ 또는 ‘변개’(conversion)라는 말은 죄를 향해 나아가던 삶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으로 방향 전환하는 것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중생 후의 첫 단계에서의 회개와 믿음에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계속되는 삶에서의 회개와 신앙에 대해서도 회심이라는 용어가 과연 사용될 수 잇는가 하는 심각한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김 교수가 동의하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이런 의미의 회심은 하나님께서 중생을 통해 사람으로 하도록 하는 사역이므로 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교육의 주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보며, 인간 교사는 하나님의 교육(educatio Dei)의 조력자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중생과 회심이 불신자에 대한 교육의 목적이고, 성화, 즉 계속되는 믿음과 회개가 중생자를 위한 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 제기는 우리 모두가 좀더 성숙하고 온전한 개혁신학을 해 나가 우리네 교회를 좀더 잘 섬기기 위해서 하는 지적일 뿐이다. 부디 우리 모두가 이런 점들에 유의해서 김 교수님가 이 책 가운데서 잘 제시하고 있는 온전한 개혁 신학을 이 땅에서 전개하여 나갈 수 있기를 원하면서, 이 책의 진지한 일독을 여러 층의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권한다.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조직신학>
김은홍기자
입력시간 0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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