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진주 서부경남 교회사/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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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진주 서부경남 교회사/선교사


진주, 서부경남 선교사


진양교회 http://blog.naver.com/wss18404/120008261734














금번 진주노회 제89회 정기회는 진주노회가 설립된지 45주년을 맞이하는 가운데 홈페이지 개설에 즈음하여 진주지역에서의 기독교 전래 과정과 진주노회의 조직과정과 발전에 대해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은 퍽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주지역에 복음이 전래 된 시기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으나, 진주노회가 설립되기까지의 기독교 전래의 역사적 근원을 조명 해 보았다.

진주는 서부경남의 중심도시로서, 또 1925년 이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로서 경상남도 지역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유가적 정신이 강한 보수적인 도시로서 특히 배일사상이 강했으며, 민족 의식과 민족교육 의식이 강했던 도시였다.

그러나 이곳에 기독교가 전래 된 후 복음운동은 인접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이 글에서는 진주지역 기독교 선교 초기에는 경상대리회, 경상노회, 경남노회를 거처 진주노회로의 설립과 해방후 교회의 분열과 합동과 그리고 환원. 그 이후의 진주노회의 발전에 대해 계략적인 과정을 언급하였다.

1. 기독교의 한국 전래와 선교활동

한국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고찰할 수 있으나,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제물포에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라 목사가 입국한 것을 공식적인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에 기독교 복음의 접촉을 보통 100-200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2세기 이전에 한국과 기독교의 접촉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보통 근대 이전의 접촉으로 8-9세기경 중국을 통한 경교(景敎,Nestorian)와의 접촉, 1593년 임진왜란을 통한 접촉,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 등을 들 수 있다.

개신교의 경우 한국에 성경을 처음 전해 준 사람은 영국인 바실홀(Basil Hall)은 1816년 9월1일 백령도와 청도(靑島) 근방에 상륙하여 그곳 주민들에게 한문성경을 나누어주었다. 군산만에 들어가 그곳 관리들에게 성경을 전하였고 약10일간 다도해 근방을 순항하였고 추자도에도 상륙하여 성경을 전한 듯하다. 1832년에는 "칼 구츨라프(Carl Gutzlaff)"가 독일 루터파 선교사로 내한했던 첫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공식적인 선교사가 아니라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통역관으로 온 것이다.

그는 중국에 선교하던 개척선교사 로봇 모리슨(Robert Morison)의 친구였다. 그는 1832년(순조32년)에 로드 암허스트호(Rord Amherst)를 타고 압록강 지역과 한국의 서해안을 탐사하였는데 백령도와 대청도 그리고 소청도에서 정박하였을 때 성경을 반포하여 복음의 씨를 뿌리는 놀라운 역사였다. 그 후 1866년 8월말에 토마스 목사가 미국상선 제너럴 셔만호(General Sherman)에 통역의 자격으로 승선하여 대동강에 올라 왔다가 순교하였다. 그 당시 한국의 정세는 대원군 섭정 아래 카톨릭 탄압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계속하고 있었다. 토마스 목사가 처형당하기 전에 가지고 왔던 성경을 나누어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순교하였다. 그때 목격자 중 12세 소년이었던 최치량(崔致良)이 신자가 되었다. 그후 화란, 영국인등에 의한 접촉이 있었고,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교회의 형성에 기여한 선교부는 만주지방에서 선교하였던 스코틀란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1872년 중국선교사로 파송된 존 로스(John Ross.羅約한) 멕킨타이어 (McIntyre,馬勤泰)등은 만주 우장(牛莊)지방에서 1874년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1881년 한국인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고, 서상륜(徐相倫)의 도움을 받아서 1882년에 최초의 한글 성경, 곧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백홍준, 서상륜에 의해 1883년부터 매서 전도가 시작되었다. 1887년에는 첫 한국어 신약성경본인 [예수셩교젼서] (Ross Version)가 간행되었다.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으므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한국선교를 시도하였던 바 후일의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여러 접촉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개신교의 한국 선교는 1880년대 이후에 비로써 이루어졌다. 장로교회의 경우 1884년 이래로 미국의 북장로교(1884).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1889), 미국 남장로교(1892) 카나다장로교회(1897)를 통해 선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들 4대 장로교 선교부는 1893년 선교부간의 연합체인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했는데 이들은 상호 협의와 합의를 거처 선교지역을 분활하였다. 이 분활 안을 보통 "예양 협정" (Comity Arrangemen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선교부간의 인적, 재정적 낭비를 막고 단시일안에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는 제령,강계,평양,서울,청주,안동,대구,등 평안도,황해도 경상북도 지역을 맡게 되었고,미국 남장로교는 전주,군산,목포,광주,순천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을 맡았다. 또 카나다장로교(후에 카나다 연합교회)는 함경도지방과 간도지방을 선교구역으로 하였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선교부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로 불리었는데 이들은 부산과 경남지역을 선교구역으로 하였다. 그래서 진주지방은 호주 선교부의 관활지역이 되었고 호주 선교부에 의해 이 지방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2. 호주장로교 선교부와 경남지방선교

1) 호주선교부의 선교활동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두번째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의 빅토리아주 장로교회(Presbyterian Chruch of Victoria)였는데 한국선교는 1889년 10월 데이비스 목사(Rev.Joseph Henry Davies)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T.Davies)양에 의해 시작되었다.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하여 선교사로 일한지 22개월 후에 귀국하여 멜보른 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오필드 문법학교(Caufield Grammar School)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일했다. 그는 다시 인도 선교사로 가려고 했으나 한국선교의 긴박성을 알리는 중국주재 영국성공회 선교단체인 씨 엠 에스(CMS)소속인 월푸(John R.Wolfe)주교의 편지를 읽고 한국선교를 자원하게 되었다.

성공회에 속해 있던 그는 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장로교로 이적한 후 에딘버러의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신학수업을 마친 후 1889년 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그는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 hip Union)의 파송을 받고 1889년 8월 21일 멜보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한 여행을 시작하였고 그해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10월 4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였고 언더우드(H.G.Underwood). 헤론(Dr.Heron)등과 함께 생활하며 한국어를 습득하였다.

서울서 5개월을 보낸 후 아직 선교사가 없는 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한 그는 메리는 서울에 남겨둔채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서울을 떠난 그는 수원, 과천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등 충청도지방을 거쳐 경상도지방까지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1890년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페렴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그는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인 4월 5일,오후 1시경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한국에 온지 겨우 6개월 만이었다. 당시 부산에 체류했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J.S.Gale)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 영선동 뒷산에 매장하였다.

그의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데이비스를 파송했던 청년연합회는 1890년 7월 23일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한국에 선교사를 다시 파송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또 1890년 창립된 장로교 여선교회연합회(P.W.M.U.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도 데이비스양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1891년에는 청년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멕카이 목사(Rev.J.Mackay)부부와 여선교회 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세 사람의 미혼선교사인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퍼셋(Miss Mary Fawcett)양 등 5명의 선교사들이 1891년 10월 내한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부산진에 주택(선교관)을 마련하고 한국인과 접촉하기 시작하였고 구체적인 전도활동을 개시하였다. 그후 1894년에는 아담슨(손안로,Rev.A.Adamson), 1900년에는 엥겔(왕길지 Rev.G.Engel), 1910년에는 메킨지(매견시,Rev.N.Mackenzie), 메크레이(맹호은,Rev.F.Macrae), 1911년에는 멕크라렌(마라연,Dr.C.McLaren)등 여러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부산, 경남지방에서 값진 봉사를 하였다. 호주 장로교회는 1889년 데이비스를 파송한 이래로 1940년 와킨스(왕영애,Miss I.Witkins)양을 파송하기 까지 7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들은 부산에 선교기점(1891)을 마련한 이후 인접한 경남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결과로 진주(1905), 마산(1911), 거창(1913), 통영(현 충무.1913)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 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등 3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호주 선교부의 선교지부와 관할지역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교지부
설치연도
관할지역

부산진지부
1891
부산, 초량일원, 동래, 울산, 언양, 양산, 김해, 밀양,창영, 기장, 울릉도

진주지부
1905
진주일원, 사천, 곤양, 하동, 남해, 삼가, 산청, 의령

마산지부
1911
마산일원, 함안, 칭원, 창원

통영지부
1913
통영일원, 거제, 공성, 진해, 용남(통영군)

거창지부
1913
거창일원, 안의, 함양, 합천, 초게




2). 진주지방에서의 기독교의 전래

진주는 경상남도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적 중심이었고 1925년 이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였다. 또 이곳은 사회신분상 계급의식이 강했고 경남지방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곳이었다. 선교사들이 볼 때 이 지역은 서부 경남지역에서 중심 지역일 뿐만 아니라 이곳의 복음화는 인접지역 선교를 위해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진주지역 선교를 경남지역의 타지역보다 우선시 하였다.

① 진주지방 첫 선교사 커를(Dr.Hugh Currell)

진주지방에서 사역한 첫 선교사는 1902년 내한한 커를(Dr.Hugh Currell)의사 인데 그는 호주에서 온 최초의 의료 선교사였고 진주지방에서 전도한 첫 외국인이었다. 그는 1915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13년간 이곳에서 일하면서 진주지방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의사이자 목사이기도 했던 그는 1902년 5월 19일 내한하였다.

아일랜드 북부지방인 안트림(Antrim)에 인접한 카를로이(Carnlough)에서 출생한 그는 1892년 벨파스트(Belfast)에 있는 아일랜드 왕립대학교(Royal University of Ireland)의 퀸스(Queens)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고 의사가 된 그는 만주지방으로 가서 선교사역에 동참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 당시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만주지방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하고 있었고 또 의료선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호주로 인도하였다. 1889년 호주로 이주한 그는 빅토리아주의 벤딩고(Bendingo)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아브람 (Kyabram)에서 일반의로 2년 6개월간 일하였다. 그후 그는 한국선교사인 아담슨을 만나게 되면서 한국선교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담슨으로부터 한국, 특히 부산 경남지방에서 일할 의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한국선교를 자원하였다.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은 그는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YMFU)의 파송을 받고 1902년 5월 19일 내한하게 되었다.

커를의사가 내한 함에 따라 호주 선교부는 전도와 교육활동에 이어 의료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커를 의사는 1902년 10월에 작성한 1902년 5월부터 9월까지의 사역에 관한 보고서에서 자신은 한국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 부터 진료를 시작하였다고 했고 몸이 심히 아픈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환자들을 돌보아야 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시약소를 쓸만한 공간이 없었으므로 부산진의 일신여학교의 작은 교실 하나를 빌려 사용했는데 매일 평균 20여명에게 치료를 해 주거나 약을 나누어주었다고 했다.

커를이 한국에 온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1902년 9월에는 부산과 경남지방에 콜레라가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 일본을 통해 유입된 이 때의 콜레라 때문에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를은 약품과 소독약을 분배하고 주사를 놓아주며 치료에 임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공헌이었고 한국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1903년 엥겔목사와 함께 기장, 기찰, 암평 지역으로 의료순례여행을 다녔고, 아담슨과는 양산지역으로 순회하며 치료와 시약을 베풀었다.

이 당시 부산지방에는 일본인 의사도 있었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운영하는 작은 병원이 있었기 때문에 부산지방에서 사역하던 커를 의사는 진주지방으로 옮겨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시약소 마저도 없는 경남지방의 다른 곳으로 가서 봉사하는 것이 보다 뜻 있는 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부산을 떠나 진주로 갔는데 이것이 진주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을 개설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커를 의사 내외가 자신의 조수였던 박성애(1877-1961)부부와 함께 부산을 떠나 진주간 때는 1905년 10월 20일이었다. 이들은 진주성 내면 4동(북문안)에 있는 정 경철씨 소유 초가집을 임시 거주지로 얻었고 이곳에서 이 지방 복음화를 위한 전도,의료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② 전도활동과 첫 교회의 설립

커를의사 부부와 그의 조수인 박성애 부부는 남도 제일의 양반도시이자 배일(背日)사상이 강했던 이곳에서 전도하는 일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견했으므로 우선 의료활동을 통해 간접선교를 중시하였고 또 교육활동을 통해 어린아이와 청소년 그리고 부녀자를 대상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이곳 진주의 인구는 약 4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전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의 의료활동 때문에 이 지방에서 신임을 얻게 되자 전도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곧 거주지를 봉래동으로 이전하였고 이곳에서 초신자들을 모아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05년 설립된 진주교회(옥봉교회라고도 불렸음)였다. 커를의사가 진주에 도착한 지 2개월후인 1905년 12월에 쓴 보고서에서는 당시의 전도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이곳에서의 저의 사역은 실로 많은 관심을 얻고 있습니다.그래서 처음부터 큰 격려를 받고 있으며 전망은 매우 밝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믿는자의 수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매 주일마다 3차례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평균 20여명의 남자와 7명의 부녀자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노방전도와 쪽복음서를 판매하는 매서전도도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한옥이 이 지방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일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입니다." -

진주지방에서 첫 집회가 시작된 때는 1905년 이지만 조직적인 집회가 시작된 것은 1906년 부터였다. 커를의사와 박성애부부가 전도한 이들이 첫 회중이 되었고 이들은 이 지방 뿐만이 아니라 인접한 지역에서의 복음운동에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진주지방에서 첫 세례식이 있었던 때는 1907년 6월 23일이었다. 이날 10명의 성인과 어린아이가 유아세례를 받음으로 진주지방 첫 수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해에 약 30여명이 학습을 받음으로 진주교회는 날로 성장하여 갔다.

박성애는 후일 전도사로(1907), 장로로(1915)봉사하였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지방 첫 한국인목사가 되어 (1919) 진주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었다.

③ 의료활동

커를과 박성애는 첫 거주지인 진주성 내면 4동(북문안)에 있는 초가집의 방 한칸으로 시약소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이 지방에서의 의료활동의 시작이었다. 커를은 시약소를 중심으로 의료, 보건 증진을 위해 봉사하였는데 비록 시설과 장비가 미약했으나 후일 병원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연평균 7,000 명이 의료혜택을 받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당시 이 지방의 가장 흔한 질병으로는 피부병과 종양, 폐결핵, 눈병 등이었는데 이것은 주거환경과 비위생적 환경에서 오는 것이었으므로 환경개선, 위생교육, 검역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를은 이 지방에서의 병원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추진하였다. 호주 장로교 여전도회가 1906년 6월 825파운드를 보낸 이후 호주 교회의 계속적인 지원으로 1913년에는 경남지방 최초의 병원을 개원하였는데 이것이 봉래동에 설립된 "배돈 병원"(Mrs.Paton Memorial Hospital)이다. 이 병원은 호주장로교회의 탁월한 선교사였던 페이튼 선교사의 부인의 서거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녀의 이름을 따라 배돈 병원으로 명명된 것이다. 병원설립이 준비되고 있을 때인 1910년 간호사인 클라크양(Miss F.L.Cler- ke)이 내한하여 진주로 배속되어 커를를 도왔고 1911년에는 의사 멕클라겐 (Dr.C.I.McLaren)에 내한하여 진주 배돈병원에 배속되었다. 한국명 마라연으로 잘 알려진 멕크라렌은 당시 한국에서 유일한 신경정신과 의사였는데 1911년부터 그리고 1939-1941년은 진주 배돈병원에서 1923-1938년까지는 서울 세브란스병원과 의전에서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다. 1918년에는 여의사 데이비스양(Dr.E.J.Davies)이 내한하여 진주 배돈병원에서 봉사하였다. 그녀는 이미 1910년 내한하여 부산의 일신여학교에서 봉사한 언니(Miss M.S. Davies)와 함께 근 30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였는데, 이들은 한국에 온 첫 호주 선교사였던 데이비스 목사의 조카들이었다. 배돈병원에서는 진료만이 아니라 간호사 양성에도 힘을 썼는데 처음에는 간호사는 여성들에게 적절한 직업이 아니라는 오해 때문에 지원자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과부와 문맹자를 간호사로 교육시켰고, 1930년대부터는 지원자가 늘어 자격을 갖춘 여성을 교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39년에는 간호사 손양과 이양을 호주 멜보른에 유학을 보냈는데 귀국후 손양은 세브란스에서 이양은 배돈 병원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 병원 원장으로는 커를(1915년까지), 멕크라렌(1915-1923), 테일러(Dr.W.Taylor,1923-1938),데이비스(Dr.J.Davies,1938-1941)가 봉사하였다. 배돈병원은 경남 유일의 병원으로서의 이 지방 의료선교의 중심지였다.

④ 교육사업

커를의사 부부는 이곳에서 의료사업의 시작과 함께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노력의 결과로 설립된 학교가 이 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시원 여학교(The Nellie R.Scholes Memorial School)였다. 이 학교는 커를의사가 진주에 도착한 그 이듬해 그의 집에서 진료소를 열고 집 정원에서 인접한 지역 아이들을 모아 초등교육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6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 진주에 세워진 첫 근대학교의 시작이었다. 1907년에는 교육학을 전공한 스콜스양(Miss Nellie R.Scholes 柴校長)이 진주에 파견되었는데, 그녀는 이 지역 교육책임자로서 1919년 4월 사망시까지 값진 봉사를 하였다. 커를의사 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 학교를 시원 여학교라고 명명한 것도 1907년 이래 12년간 교장으로 봉사한 스콜스선교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학교에서 일한 선교사로는 캄벨(Miss A.M.Campbell,甘梅義) 커(Miss. E.Kerr,巨怡得), 클레크(Miss F.L.Clerke.可佛蘭西)등이었다.

이 학교는 1921년 당시 재학생이 250여명에 이를 만큼 크게 성장하였고 이 지역 유일한 여학교로 명망을 얻었으나 역시 신사참배 거부이유로 일제에 의해 학교 폐쇄령이 내려져 1939년 폐교되고 말았다.

진주지방에는 시원여학교와 더불어 남학생을 위한 광림학교 역시 호주선교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노진현목사, 한상동목사는 목사가 되기전 이 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한 바 있다. 호주선교부가 운영하는 남자학교는 일정기간이 지난 후 한국인 교회에 운영을 위임한다는 정책을 견지하였지만 광림학교만은 호주선교부 예산으로 유지되어 왔다. 당시로서는 진주의 한국인 교회가 광림학교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주선교부는 세계 대공항의 여파로 광림학교 운영에 필요한 선교비 충당에 어려움이 있어 1929년 광립학교를 폐교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결정이었으나 진주의 배돈병원 운영이 보다 시급하였기 때문에 호주선교부로서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광림학교가 폐교된 이후 학교건물은 경남성경학교가 인수하여 사용하였다.

진주지방에서 일한 선교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괄호안의 연대는 진주지방에서 일한 기간임) 커를(거열후,Dr.H.Currell,1905-1915), 켈리(Miss Kelly,1907-1911), 엘리스 니븐(Miss Niven.1924-1927) 스콜즈(Miss Scholes,1907-1919, 리알(Rev.Lyall 1909-1916), 클라크(Miss Clerke,1910-1920), 데이비스(Miss Davies,1913-1915). 메크레(Rev.Macrae,1910-1913),메크라렌(Dr.McLaren,1911-1923,1939-1942).캄벨(MissCampbell,1911-1922).켈리(Rev.Kelly,1912-1913).나피아(MissNapier,1920-1935),라이트(Rev.Wright,1924-1928).커닝햄(Rev.Cunningham.1013-1927).랭(MissLaing1913-1932),에베리(MissEbery,1918-1919),데이비스(Dr.Davies,1918-1941),멕코기(MissMcCauge,1930-1940),커(MissKerr.1921-24,1927-28).츄르딩거(Rev.Trudinger.1925-280),엔더슨(Rev.Anderson.1033-35).딕슨(MissDixon.1025-36,37-38).던(Miss Dunn.1936-37).볼란드(RevBorland,1929-32,35-39),에드거(MissEdger,1934-41),코트렐(Rev.Cottrell,1933-35),스타키(Rev.Stuckey,1935-40),아우만(Miss Aumann.1939-41).

3. 경상대리회, 경상노회, 경남노회 하에서의 진주지방교회

1) 경상대리회 시대

주한 네 장로교 선교부는 선교지역 분활 정책에 따라 각기 다른 지역에서 선교하였지만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선교부간의 협의와 합의에 따라 1907년에는 하나의 노회, 곧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노회가 직접적으로 한국의 전국 교회를 관장하기 어려웠으므로 그 휘하에 7 대리회(경충, 평북, 평남, 황해, 함경, 전라, 경상)를 두기로 하였는데 경상대리회는 그 7 대리회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진주지방의 교회는 경남지방의 다른 교회들과 함께 경상대리회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될 당시의 경상대리회 산하의 교회수는 186개 목사는 9명, 장로는 6명, 세례교인은 13,110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독노회가 조직된 직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인에게 목사 안수를 베풀었는데 이들 7인 곧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은 장로교 첫 목사가 되었다. 경상대리회 시대 초기에 장로가 된 분으로 심취명, 정덕생, 이현필, 김봉명, 김응진, 이윤팔 등이 있었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를 보통 경상대리회 시대라고 부른다.

2) 경상노회 시대

노회가 조직된지 4년이 지난 1911년 모인 독노회에서는 1912년에는 7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시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1911년 12월 6일 부산진 예배당에서 경상노회가 조직되었다. 17명의 목사와 10명의 장로들이 모인 이날 창립 노회에서는 왕길지 목사를 노회장으로 홍승한을 서기로 선출하였다. 이와같이 각 대리회가 노회로 개편됨에 따라 1912년 9월에는 [죠션야소교 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진주지방은 부산 경남의 다른 지역과 함께 1907년 이래로 [경상대리회] 관할하에 있었으나 1912년부터는 [경상노회]의 치리하에 있게 되었다. 이해(1912.9)총회에서 보고된 통계에 의하면 경상노회에는 목사 18명, 장로 18명, 조사 40명 교인수는 23,985명,남녀 전도인은 21명, 예배처소는 457개처였다. 1916년 6월 22일 대구 성경학교에서 모인 제12회 경상노회에서는 노회를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총회에 청원하였다. 경남지방의 교회가 경상노회 관할하에 있던 1912년부터 1916년까지를 보통 경상노회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3) 경남노회 시대

그후 1916년 9월 2일 하오8시 평양 신학교에서 열린 장로교 제5회 총회에서는 경상노회가 노회분립을 헌의하다. 총회가 이를 허락하여 가결되니 경상남, 북도의 교회를 관장하던 기존의 경상노회를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분리 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조직할 임시회장으로 경북에 홍승한, 경남에 왕길지씨를 임명하고 재산을 경북에 5/3, 경남에 5/2로 나누게하다. 이 결정에 따라 경남노회는 1916년 9월 20일 부산 일신여학교 강당에서 조직되었다. 이날 목사 14명(이중 3사람은 한국인 목사였는데, 그들은 심취명, 김기원, 정덕생 이었다). 장로 11명이 모인 창립노회에서는 왕길지 선교사가 노회장으로, 정덕생 목사가 서기로 피임되어 경남노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창립 노회에서는 부산-마산, 통영-진주, 거창등 3시찰회를 두고 교회를 관할하기로 하였다. 이 경남노회는 1943년까지 존속되다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고 해방후 다시 재건되었다. 진주지방의 교회는 부산과 경남지방의 교회들과 함께 1916년부터는 경남노회 관할하에 있었다. 경남지방에서 교역자가 된 초기 인물로는 심취명, 박성애, 정덕생을 들 수 있다. 그외에도 박성애(1919), 박영숙(1919), 김도식(1920), 김응진(1921), 김길창(1923), 김만일(1924), 박승명(1924), 한익동(1924)이 목사로 여병섭(고성읍), 박윤민, 권재학을 1918년에는 오형선, 송상호, 장종일, 최윤기, 이천오, 변기상, 이상소를 1919년에는 주현성, 배원기, 최사옥, 김덕경, 김석호, 안성욱, 오규욱, 안정순, 주남도, 서해을을, 1920년에는 강우경, 김래봉, 김복식, 허진장, 연식지, 김수정을 1921년에는 김길창, 이흥필, 최상림, 박시순, 우명두, 강상은 등을 각각 장로로 장립하였다. 이들이 이 지방 초기 장로들이었다.

4. 일제하에서의 교회, 해방과 교단의 형성

1)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한국은 거듭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오다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라는 강압에 의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무단통치를 단행하였고 경찰과 헌병대를 일원화하여 "헌병 경찰 제도"를 만들어 조선인을 혹독하게 통치하였다. 1910년에는 "범죄 즉결법"이라는 무서운 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반도사]를 편찬. 식민사관을 정립하였고, 조선통치를 이념적으로 합리화하려고 시도하였다. 후일에는 한국어의 사용 금지는 물론 한국인 고유의 성마저 쓸 수 없도록 강요하는 소위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은 일대 수난을 맞게 되었다.

일제 통치 기간 많은 한국인이 징용으로 전쟁터로 탄광 노동자로 징발되어 자유와 인권이 유린 된 채 이국의 하늘에서 죽어갔고 초등학생에 지나지 않은 12살 아이에서 50대 여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의 부녀자들이 정신대란 이름으로 전장으로 끌려갔다.

이 기간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것이었다. 일제의 조선통치와 기독교 정책은 일관되게 "분할을 통한 다스림"(Devied and Control)이었다. 특히 1925년 이래로 신사를 건립하고 1935년 이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인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일대 탄압과 수난의 역사를 엮어 갔다. 신사참배 강요는 1935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분열, 무력화시키고 식민 통치 방해가 되는 기독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시행된 일제의 정책이었다. 1937년으로 접어들자 시국은 더욱 암울해지기 시작하였다. 7월에는 중. 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9월 6일은 애국일로 정하여 일본국기 게양, 동방요배가 신사 참배와 함께 요구되었다. 그해 10월에는 황국신민서사가 제정되어 모든 모임에서 암송토록 요구되었다. 그리고 "일면일신사"정책을 수립하여 곳곳에 신사를 세웠다.

이와같은 일제의 정책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하였으나 탄압과 회유에 못이겨 다수의 교계 지도자들이 마지못해 친일적 배교의 길을 갔다. 그러나 주기철, 고흥봉,이기선, 한상동, 주남선, 최덕지 등은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고 저항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경남지방 경우 한상동, 손명복, 이약신, 박경애, 조수옥, 최덕지, 이찬수, 이현속, 주남선, 최상림, 황철도등이 신사 불 참배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또 선교사로서는 한부선(Rev.Bruce Hunt). 함일돈(Rev.F.Hamilton), 마라연(Dr.C.McLaren), 테메시(Miss Tate), 허대시(Miss D.Hocking)등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지도 후원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진주지방에서는 강문서, 이현속, 황철도,그리고 미라연, 서덕기(Rev.J Stuckey)선교사 등에 의해 신사참배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진주지방의 중심교회인 진주교회에 강압적으로 신사참배에 동의하는 결의를 하게 하고, 호주선교부와의 협력을 단절하는 문서를 발표하도록 한 일은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천주교(1936.5.25), 감리교(1938.9)는 굴복하였고. 당시 대표적인 교단이었던 장로교는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 라고 하여 이를 가결하는 큰 수치를 범했다. 이때 발표된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 적성을 다하기로 期함.-"

우를 성명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1938년 총회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했으나 전국에서 신사 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신사불참배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생활의 순결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고된 싸움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 경남, 지방의 경우, 한상동, 최상림, 손명복, 조수옥, 최덕지 등에 의해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이들도 1940년 "일제 검거"에 의해 투옥되었다.

이 시 투옥된 신자는 약 2,00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50명 정도는 옥사했고 해방 후 30여명이 출옥하였다. 이때 출옥한 인사로는 고흥봉, 김린희, 김형락, 김화준, 박신근, 방계성, 서정환, 손명복, 안이숙, 양대륙, 오윤선, 이광록, 이기선, 이인제, 이현속, 장두희, 조수옥, 주남선, 최덕지, 채정민, 한상동 등이었다.

2) 경남노회의 해체

경남노회는 1916년 9월 20일 조직되었고 그 동안 일제의 탄압하에서도 굿굿이 발전해 갔으나 1943년 5월26일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탄압했던 일제는 1942년에는 각 교파가 그 고유한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1943년 5월 5일에는 한국교회를 일본기독교 안에 편입시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개편함으로서 1912년 조직되었던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즉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었던 김응순은 1943년 5월 7일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여 발전적이라는 이름하여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해체하여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개편하였다. 따라서 총회장은 직제상 통리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그해 9월에 개최된 장로교총회는 "제32회 총회"가 되지 못하고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제1회 창립총회"란 이름으로 회집되었다.

이와같은 과정속에서 경남노회도 해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916년 조직되었던 경남노회는 1943년 5월 26일부러 해체 된 것이다. 소위 일본기독교 조선교구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창목사 명의로 발표된 다음의 문건은 이 때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 당시 문헌중 경남노회 해체와 관련된 것을 소개하고져 한다.

拜界, 時下 聖戰에 於建施를 慶賀附記(배계, 시하 성전에 이건사를 경하부기) 하나이다.

진자 조선 기독교 각파 합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파 자체가 과거의 불비한 조직을 해소하고 현 일본 기독교단 규칙을 기준해서 우리 반도계의 최적당한 규칙을 작성하여 거 5월 5일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발전적 해소를 하고 이에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을 결성하게 된 것입니다. 교단 통리로는 좌천필근씨가 당선되었고 불초교제가 연성국장겸 경남교구장으로 임명되고, 금성동준씨가 경남 부 교구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후로 더욱 불초 소생을 위하여 선한 지도있기를 바라마저 않습니다. 그래서 제1회 경남 교구회를 시급히 개최코자 하와 좌기와 여히 통지하나이다.

소화 5월 14일 경남교구장 김길창(인)

경남교회 각 당회장 전

경남교구회 소집통지

1.일시:소화 18년 5월 25일 오후 2시 상치회

동년 5월 26일 오후 2시 교구회

2.장소:부산부 중도정 항서교회당 " -

3) 경남 노회의 재건과 총회의 재건

일제하에서 해체 개편되었던 총회와 노회들이 해방과 함께 다시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해방후 부산에서는 신앙부흥준비 위원회가 구성되고(1945.9.2) 교회의 기구적 재건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1945년 9월 18일 경남재건노회가 부산진교회당에서 조직되었고 그해 11월 3일에는 제47회 경남노회가 부산진교회에서 소집되었다. 주남선목사가 노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노회 재건운동과 현실은 이기선, 채정민,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목사등 신사참배거부로 평양 형무소에 수감중인 수십명의 교역자들은 6,7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일본의 패망을 내다보고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교회재건의 방안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① 수도원을 건설하여 일제의 탄압밑에 신앙양심을 더럽힌 교직자들을 수양시켜 새 출발을 가지게 할 것

② 신사참배 거부로 폐쇄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하여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참된 교역자를 양성할 것

③ 대전도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도자를 대량 양상할 것

그러나 이들이 해방의 기쁨을 안고 교회로 달려 왔을 때 현실은 너무나 판이하였으니, 현직 교직자들의 대부분은 통회의 기색은 별로 없고 도리어 교권에 집착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동년 9월 18일 모임에서 그 실천 방안으로 현 교직자들의 자숙안을 내었으니

첫째, 목사 장로 전도사는 일제히 자숙에 옮겨 일단 교회를 사직할 것,

둘째, 자숙 기간이 지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하여 시무 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숙안이 잘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으므로 제47회 경남노회에서는 전 재건노회 임원의 총사직을 요구하고 출옥성도인 주남선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한 것이다.

1946년 7월 9일에 모인 임시노회에서는 신학교(고려신학교) 설립을 논의하다.

그리고 타 지역에서도 노회가 구성되자 1946년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제32회 총회(이름을 일컬어『제1회 "남부총회"』가 회집되었다. 한국 전역을 관장하는 총회로 모여야 했으나 분단으로 인해 사실상 이북의 교회와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남한만이라도 총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 남부총회로 모인 것이다. 이날 총회에서는 배은희 목사를 총회장으로 함태영목사를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함으로 총회가 재건되었다.

4) 해방과 교회 쇄신운동

1945년. 제2차대전의 종식과 함께 조선은 일제 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해방은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적 자유를 얻는 날이었으므로 조선인에게는 감격적인 날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해방후 교회 재건운동과 쇄신운동은 해방된 조국에서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당연한 요구였다. 이 교회쇄신운동은 무엇보다도 바른 신학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한상동목사와 주남선목사는 1946년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참다운 신학교육 없이는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고려신학교가 정식 개교된 때는 1946년 9월 20일이었다.부산진의 구 일신여학교에서 개교되었다.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함께 경남노회안에서 교회쇄신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는데 이 일은 한상동, 주남선 등 신사참배를 반대, 투쟁했던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친일, 부일 협력자들 곧 신사참배에 응했던 인물들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교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충돌하게 되었고 부산, 경남지방에서는 큰 문제가 야기되었다.

교회재건을 주장하는 이들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바른 신학의 확립, 회개와 자숙을 통한 교회쇄신운동을 주장하였으나 친일적인 교권주의자들은 교회재건 원칙을 거부하고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므로 저들의 약점을 만회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경남노회는 한상동 목사 등 고려신학교와 출옥성도를 지지하는 일파와, 김길창 목사 등 교권주의자를 지지하는 일파와, 심문태, 노진현, 이수필 목사 중심의 중간파로 분열되었다.

제48회 경남노회가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회장에 김길창 목사가 피선되다, 이 노회에서는 지난 노회의 『교려신학교』인정 취소론을 제안하여 인정결의에 대한 재론과 신학생 추천도 취소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한상돈목사를 중심한 노회산하 67개 교회의 반발이 커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1947년 3월 10일 구포에서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노회장 이하 전원이 권고사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박형룡박사와 고려신학교의 관계

당시 고등비평을 인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요 장로교의 근본 교리인 예정론에 대하여 전연 흥미를 갖지 않는 알미니안리즘(Arminianism) 경향의 신학자인 김재준 교수가 주도하는 조선신학교에 대처하기 위하여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설립을 구상한 신학교의 기성회를 조직하고 한국 보수 신학의 권위자인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추대하여 『고려신학교』를 설립키로 결정하고 1946년, 7월에 남영환전도사를, 1947년 4월에는 송상석목사를 특사로 만주 봉천에 파송하여 박박사의 승낙을 얻는 한편, 경남노회 자체에서도 정지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박형룡박사의 귀국이 예상보다 늦어지자, 1946년 9월 20일에 박윤선목사를 교장으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이듬해인 1947년 10월 14일에 송상석 목사의 안내로 무사히 귀국한 박형룡박사는 교장직에 취임하였다. 노회와 총회를 기반으로 하지않는 교회 재건을 부정하는 박형룡 박사는 메이쳔의 신학사상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신학교 재건에 있어서는 4장로회 선교부(미국 남,북장로회, 호주, 카나다)와의 합의를 기본 조건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신학교 설립자와는 견해의 많은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교로 승격시키는 문제와 선교사들과의 의견차이로 1848년 4월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서 현 총회신학교의 전신인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여 총회산하 모든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기를 소원한 그의 의지를 관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길창, 권남선 목사 등은 1948년 9월 21일 부산항서 교회당에서 기존의 교회조직을 이탈하여 별도의 경남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때에 결의사항 :「 44:21로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다.」그 후 1948년 12월 7일 경남노회 제50회에서 주요사항 :「고려신학교에 대한 인정취소 결의를 재확인하다.」 이것이 경남노회의 분열의 시작이었고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의 시작이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장로교 총회문제로 비약되었다.

남한지역 장로교회의 조직체인 (남부총회)는 이 문제를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당시 총회는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경기노회 인사들이 교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진리운동을 분산시켜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경남노회를 3개 노회로 분리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6.25동란 중에 소집된 장로교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한 경남노회(이를 "경남법통노회"라고 했다) 대표들에게는 총회장 입장도 허락하지 않은 채 총회에서 축출하고 말았다. 즉 총회는 김길창 목사가 임의로 조직한 경남노회측 대표를 경남노회 총대로 인정하고 말았다. 결국 다수의 친일적 인사들의 반대로 교회 재건을 위한 노력, 곧 교회쇄신운동은 좌절되었고 신앙적 정기를 바로잡지 못했다. 마치 일제하에서의 친일, 부역행위자를 처단하지 못하므로 민족정기를 바로 잡지 못한 경우와 같다. 이것은 비극적인 결정이었다.

5 교회의 분열과 연합

1)제1차분열(고신측)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이를 일컬어 『남부총회』라한다.)는 1946년 6월 12일부터 4일간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회장:배은희 부회장:함태영),

주요 결의사항 : ① 장로회 헌법은 남북이 통일 될 때까지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② 제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이를 취소한다. ③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 신학교로 한다. ④ 여자장로직의 설정문제는 남북통일 총회시까지 보류한다. 제34회 총회 1948년 4월20-24일 새문안교회당에서 주요결의사항 「고려신학교에 대한 총회의 결의」"전남노회로부터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냐는 문의가 제출되었으므로 비로소 총회는 이 문제를 취급하게 되었다. 당시 정치부장 김관식목사는 답변에서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제35회 총회 새문안교회당에서 「여러노회로부터 고려신학교에 대하여 제출된 문서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①지난번 제34회 총회에가 발표한대로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하등관계가 없다. 노회가 이 신학교와 관계를 가지는 일은 총회 결의에 위반되는 일이니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며 경남노회 분규에 대한 제문제는 전권위원5인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여 심사처리케 한다. ② 전권위원 : 김세열 송희용 김현정 김재석 서정태 제36회 총회가 1950년 4월 21일-25일 대구제일교회당에서 「유회-경남노회 회원권문제로 갑론을박 하다가 경남노회 총대를 보류해 놓고 목사45인, 장로43인으로 개회를 한 후 경남노회 문제와 조선신학교 문제로 소란이 야기되고 회의도중 경남 삼분노회 장로중 이홍필씨가 불법등단하여 질서를 문란케 하매 회장(권연호)이 비상정회를 선언하다.

속회 - 1950년 6월 25일(주일) 사변이 일어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격게되고 모두 남으로 피난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제36회 총회 1951년 5월 24일 부산중앙교회당에서 속회를 열다.(회원89명) 당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도 반성(회개)의 기미는 없고 극도로 문란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고신측(후일, 경남법통노회)과 경남노회간 회원권 문제가 상정되고, 고신측을 제외한 경남노회가 총대로 승인되자, 고신측은 그들만의 노회를 조직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소위 『경남법통노회』의 시초이다. 이로 인하여 곳곳에서 교회쟁탈전이 치열하게 되었다.

부당하게 축출된 인사들은 일년동안 총회와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1952년 4월 29일 대구에서 회집된 제37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경남법통노회 총대를 끝내 받아주지 않고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단체와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법통노회의 대표자 엄주신 장로의 고별 선언으로 고신측은 총회에서 완전히 이탈하였다. 이로부터 5개월이 지난 1952 년 9월 총회는 한상동 목사에게 초량교회의 명도를 요구하였다. 당시 500여 교인의 90%이상이 한상동 목사를 지지했지만 그는 말없이 초량교회를 떠나 그해 10월 14일 부산 삼일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 교회는 그 이후 고려신학교와 고신교단 운동의 중심적인 교회가 되었다.

총회에서 축출된 경남법통노회 인사들은 별도의 조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총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고신교단의 출발이었다. 이날 선출된 임원은 회장 이약신목사, 부회장 한상동 목사, 서기 홍순탁 목사, 회록서기 오병세목사 부서기 윤봉기 목사, 회계 주영문 장로 부회계 김인식 제씨였다. 총로회에서는 한국교회가 범한 신사참배의 죄를 자백하고 자숙하기 위한 3주간의 특별집회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3주간의 자숙의 기간을 보내고 1952년 10월 1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발회를 공식 선포하였다.

이 당시 고신교단 곧 총노회에 속한 교회는 320여개 교회였고 이중 90% 정도가 부산,경남 지역에 위치한 교회였다. 이 당시 진주를 중심한 지역, 곧 후일의 진주노회 관활지역의 교회들로는 다음의 교회들이 있다.

진주
진주교회,성북교회,성남교회,초전교회(4개처교회)

의령
의령교회,갑을교회,칠곡교회,상일교회,부곡교회,정동교회,용점교회, 중곡교회,마산교회,성삼교회,서암교회(11개처)

고성
중앙교회,덕호교회,대하교회,다옹교회,계산교회,신생교회

통영(삼천포)
거제교회,동림교회,성상교회,지세포교회,삼거교회,백천교회, 가배교회,지평동교회,유게교회,칠천도교회,연사교회,죽로교회,이목교회,제일교회,장평교회,노산교회,창우교회,장승포교회,송진교회,구영교회,황포교회,농소교회,신명교회,원평교회,화삼교회,욕지교회(26개처)

진양
반성교회,남산교회,농막교회,평촌교회,가산교회,관봉교회,소욕교회,주암교회,이곡교회,하촌교회,봉곡교회,승산교회,동지교회,봉평교회,대곡교회,말암교회,덕의교회,죽산교회,용산교회,신풍교회(20개처)

하동
중앙교회,회개교회,악양교회,황천교회,남산교회,고전교회,진정교회,진교교회,장암교회,북천교회,옥종교회(11개처)

사천
삼천포교회,정의동교회,학촌교회,계양교회,곤양교회,중정교회,원덕교회,원사교회(8개처).

산청
산청교회,오부교회,생광교회,덕산교회,단계교회(5개처)

남해
남해제일,용소,상주,상신,서대,장포,내산(7개처)

이상의 교회는 약 85개의 교회로서 진주지방은 고신교단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2) 기장측 분리해 나감(1953년)

제38회 총회 1953년 4월 24일-29일,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회장/명신홍 기장측 분리하다.

3) 1956년 경남노회에서 3개 노회로 분리됨

경남노회는 1956년에 이르러 (부산을 중심한 경남노회, 마산을 중심한 마산노회, 진주를 중심한 진주노회) 3개노회로 분립되어지니 주후 1956년 6월 19일에 진주노회 제1회 정기노회가 진주교회당에서 회집되어 초대 노회장 황철도목사, 부노회장 조수완목사, 서기 정순국목사, 회록서기 정봉조목사, 회계 정상엽장로, 부회계 조성진장로를 선임하였고, 상비부는 헌의부, 신학부, 재정부, 임사부, 전도부, 학무부등 6개 부서를 두었고, 시찰부는 4개로 진주시찰, 동북시찰, 서남시찰, 거창시찰 이었다.

4). 통합측 분리해 나감.

제44회 총회 1959년 9월24일 하오7시 대전중앙교회당(회원251명) 개회선언은 하였으나 경기노회 휘원권 문제로 계속 정회를 거듭하다. 증경총회장 일동의 의견을 받아 동년 11월 24일 오후 7시까지 정회하기로 가결하고 그 전으로 경기노회 총대는 개선하여 오도록하다.

속회-1959년 11월 24일 오후7시 서울승동교회당에서(회원193명)

회장/양희석 부회장/나덕환 서기/박찬목 부서기/김삼대 회록서기/정규오

부회록서기/송희용 회계/김현보 부회계/배태준

주요결의 사항-①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하다.

5) 고신과의 합동

제45회 총회 1960년 9월 22일 오후7시30분, 서울 승동교회당(회원249명)

회장/고성모 부회장/김세영 서기/박찬목 부서기/장승찬 회록서기/정규오 부회록서기/황규석

회계/곽현보 부회계/배태준

주요결의 사항-

①신앙노선이 같은 고려파와의 합동에 관한 건은 합동하기로 가결하고 합동위원으로 고성모, 노진현, 정일영, 양화석, 이환수, 김윤찬, 배태준, 심 천, 정규오씨등 9인을 선정하다.

② 고신측파와 합동을 하기 위하여 무기정회하기로 가결하다.

(1) 속회- 1960년 12월 13일 오후2시 서울승동교회당(회원233명)

① 합동위원이 아래와 같이 경과를 보고하다.

ㄱ.합동추진위원회

a.예장측 - 위원장 : 양화석 서기: 정규오

위원 : 고성모 노진현 김윤찬 이환수 심 천 배태준 양성봉(박찬목)

b.고신측 - 위원장 : 황철도 서기: 윤봉기

위원 : 한상동 박손혁 송상석 추국원 남영환 조수환

ㄴ.회합 -1960년 10월 25일 -26일 대전중앙교회당에서, 동년 12월 12일

ㄷ.합동원칙-교리, 신학교 문제, 사업, 외국선교사, 합동방식을 상세히 보고하고 합동일자를

1960년 12월 13일 오후 6시 30분으로

ㄹ. 합동기념으로 찬송가를 편찬하기로 가결하다.

(2)합동총회(속회)

1960년 12월 13일 오후 6시 30분 승동교회당에서(회원 예장233명, 고신130명)

사회:예장측 총회장 고성모목사

회장:한상동 부회장 : 김윤찬 서기 : 박찬목 부서기: 전성도 회록서기 : 정규오

부회록서기: 서완선 회계 :곽현보 부회계 : 주영문

6) 제72회 경남노회(고신과 합동)

① 1961년 3월 7일 오후7시 초량교회당에서 (고신56명, 경남45명)

② 부산(고신)경남 합동노회

ㄱ.홍회가 합동하였으므로 노회도 합동하게 되매, 먼저 합동노회로 개회하다.

ㄴ.노회명칭-다음 총회의 결의시까지 『경남노회』로 하기로

ㄷ. 회수-72회로 하기로

ㄹ. 합동노회 규칙에 의하여 임원을 개선하다.

회장/박손혁 부회장/양성봉 서기/장승찬 회록서기/정길수 부회록서기/김영석

회계/백남조 부회계/주영문

ㅁ.부산노회(고신)의 제10회 회록은 이원적으로 수록하여 보존키로.

7) 고신측의 환원

① 경남노회 제76회 제1차 임시회 1963년 5월 17일 오전 10시 해운대 제일교회에서고려신학교 복교측과 교섭결과- 교섭위원인 김을길, 김장원, 한병기, 목사가 1963년 5월 6일에 고려신학교장 박손혁 목사와 한상돈 목사를 각각 방문하고 고려신학교는 합동원칙대로 복교해야 함을 간청하였으나 독립신학교로 복교하겠다는 강경한 주장으로 타협을 보지 못했다.

② 경남노회 제76회 제2차 임시회 1963년 8월 15일 오전 10시 염광교회당에서 이미 분열한 고신측의 일부 형제들을 찾아 권면하기로 하고 권면위원으로 최천구, 김덕곤, 박유생, 한병기, 최학림, 제씨를 선임하여 파송하기로 하다.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으로 한국장로교회에서의 보수적 기운이 농후하여졌고 그 결과 개혁주의 신앙형성에 큰 기대를 갖게 하였다. 연합 기간 중에 국제기독교 연합회(I.C.C.C)와 우호 관계를 단절하였고 장로교의 단일 교단 형성을 위한 재연합 운동이 추진되는 등 괄목할 만한 일들이 계속되었으나 1963년 9월 총회는 고신측의 환원이라는 기치아래 재분립되고 말았다. 그러나 과거 고신측 가운데서 약 200여 교회가 합동 총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468교회가 옛 고신측으로 환원하고 고려신학교를 복교하여 교단을 재정비 하였다.

고신측의 환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열거할 수 있으나 신앙생리와 교권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고려파 10년동안의 경건주의 신앙형태가 합동으로 말미암아 잠식당한다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배타적 생리가 적응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또 교권 문제가 크게 대두되어 직접적으로 분열의 불씨가 되었다.

환원한 고려파는 전 교단적으로 목사와 장로들이 1주간동안 자숙하기로 결의하고 교단 재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자 교려파의 환원은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운동을 약화 내지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나아가서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더욱 가속화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 언

우리 주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래 된지 1세기를 넘어 2세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순자들의 피가 적셔진 이 땅, 앞서간 신앙의 선각자들의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세워진 교회들, 그리고 선지의 동산을 통하여 배출되어지는 주의 종들의 헌신적인 복음전도가 우리나라를 축복받은 땅으로 일구어 놓았다. 이젠 가꾸고 보전해야 한다.

오직 개혁주의 정통 보수신학 위에 굳건히 세워서 세계를 복음화 하는데 총력을 기우려야 한다.

우리 진주노회도 국내전도와 세계선교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앞장서는 노회가 되어지기를 바란다. 역사와 교회사 속에서 길이 길이 빗나는 업적을 남기는 노회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세상 모든 족속이 구원을 얻기까지 힘차게 파이팅

할렐루야!

글쓴이 / 홈페이지 제작 관리(운영) 위원회

일 시 / 주후 200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