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목사와 설교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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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목사와 설교 자격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눅12:42)

faithful and wise manager whom the master puts in charge of the his servants to give them their food allowance at the proper time?"

오늘 본문은 충성되고 지혜로운 관리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관리인의 책임은 주인의 종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양식은 한 번만 주고 끝나는 배급이 아니라 때를 따라 정규적으로 나누어 주는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관리인은 그 집 종들에게 때꺼리를 배급하는 책임을 맡은 일인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제대로 충실히 하는 것은 본문에 의하면 큰 상을 받는 일입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관리인이 그 일을 충실히 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큰 상, 주인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상을 받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양식은 비유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비유하는 말입니까? 그것은 영적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함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청지기는 종들, 즉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자입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매주일, 그리고 정해진 기회에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은 복이 있는 일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큰 상급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 양식이나 어쨋든 양식을 나누어 주기만 하면 상을 받을까요? 끼니마다 멀건 씨레기 죽을 끓여 주거나 라면만 끓여 주는 청지기도 상을 받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오늘날 모든 설교자들은 다 하나님의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설교자들은 매주일 낮과 밤, 수요일 밤, 새벽 등에 자기가 설교해야 하는 순서에 결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설교를 하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민 목회를 하는 어떤 목사는 일주일 간 스키 여행 간다고 수요일 예배를 자주 장로에게 맡기다가 교회에서 쫒겨났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목사들이 적어도 예배에 결석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메뉴가 무엇이든, 그리고 영양가나 맛이 어떻든 꼬박꼬박 음식을 주기만 하면 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상을 받는 청지기는 단지 양식을 꼬박꼬박 나누어 주기만 하는 청지기가 아니라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양식을 나누어 주기만 한다고 지혜롭고 충실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영양가있고 맛있는 양식을 나누어 주는 청지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종들이 먹고 건강을 유지하고 기쁨으로 그 집의 일을 힘있게 의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청지기입니다.
주께서 오실 때 상을 받는 설교자는 단지 매주 몇 번씩 설교 시간을 메꾸고 때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받아 먹고 힘을 얻고 기쁨에 넘치며 주를 위해 더 충성되고 힘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양질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주님 오실 때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면 오늘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대부분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에 속한다고 느낍니까? 아니면 종들에게 양식을 주기는 하는데 멀건 씨레기 죽만 나누어 주는 청지기에 속한다고 느낍니까? 그래서 종들이 모두 영양실조에 걸려 비실거리고 자기 몸 하나 가누기 어렵기 때문에 주를 위해 힘있게 일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형편에 처하게 하는 그러한 부류라고 느끼십니까?

한국 설교자들에 대한 평신도들의 인식
오늘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에게 자신들이 설교자들로부터 공급받는 매주의 영적 양식이 어느 정도 충실한 것이라 생각하느냐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 것 같습니까?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는 글이 최근 어느 기독교 잡지에 장문으로 기고되었습니다. 평신도 설교의 합법성에 대한 논의를 목적으로 씌인 이 글에는 오늘 한국 평신도들이 목사들의 설교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대체로 대도시의 엘리트 평신도들의 감각을 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설교듣는 능력에 있어서는 오늘 도시나 농촌이나 모든 신자들이 다 엘리트가 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것이 한국 설교자들에 대한 한국 교인들의 일반적 인식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명문대 경영학 교수로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요, 사회의 존경받는 지도층 인사입니다. 하바드 대학 출판부에서 그의 책을 원서로 출판할 정도로 탁월한 학자요 가정적으로도 가장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는 분입니다. 게다가 40년 이상을 많은 곳에서 많은 설교자들을 접하며 신앙생활을 해 왔고 기윤실 공동 대표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봉사라는 측면에서도 역할을 많이 하면서 60대를 넘은 원숙한 신자입니다. 이처럼 신중하고 겸손한 장로가 평소의 온건한 태도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한국 교회를 향해 메가톤급 원자탄, 아니 수소탄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그는 “목사들의 80% 정도는 신학교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40년 이상 수많은 곳에서 신앙생활 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나는 내 기준이 결코 높다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성도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 본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오히려 두렵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실제 오늘 한국의 많은 교회 담임 목사들이 불안한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교인들이 자기 담임 목사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대한 소문들이 너무 흔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설교를 비롯한 여러 면에서 목사들에 대한 교인들의 불만이 심각하다. 좀 나이가 든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경우에는 자기 목사가 빨리 은퇴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교인들도 있다.
한국 교회, 특히 한국의 목사들, 목사 후보생들, 그리고 신학교 담당자들은 우리 사회와 교회의 지도급 인사의 이 발언을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신학교는 그의 도전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 한국의 신학교들이 좋은 설교자들을 길러 내는데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한국의 신학교가” 교인들의 영혼의 문제를 맡을만한 “자격을 가진 목사들을 얼마나 양성했다고 생각하는가?”고 그는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표적 그리스도인 지식인으로부터 이처럼 심각한 말을 듣고서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 교회는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 교회와 목사와 신학교를 향한 하나님의 경종이요 경고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김교수의 도전장을 출발점으로 해서 한국 교회의 말씀의 종들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이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사와 목사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
김교수의 글의 요지는 목사들이 설교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차라리 은사 있는 평신도가 설교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고 간단히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일단 접어 두겠습니다. 어쨋든 몇 달 전 그 잡지와의 대담 중에 지나가는 말로 했던 그의 이 주장을 읽은 어떤 목사가 그 다음달 호에서 여러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첫째는 설교 면허증도 없는 자가 하는 설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반론입니다. 즉 “자기 몸은 의사 자격증 소지자에게 맡기려 하면서 왜 자기 영혼은 자격증 없는 자에게 맡기려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김장로는 깜짝 놀라면서 대답합니다. “원 세상에 당신이 제 정신으로 그런 소리를 하느냐? 목사 자격증과 의사 자격증을 같은 반열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한국의 목사들이 치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들은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입니다.
“의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능력을 검증받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검증에 합격하기 위해 얼마나 어려운 과정들을 거치는지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다.”고 김장로는 말합니다. 의사는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목사되는 것은 얼마나 쉬운 과정을 거치는지 누구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는 한국에서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누구나 어렵지 않게 목사가 되어 강단을 독점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지적하고 있다. 이런 말은 단지 한 사람의 인식이 아니라 목사들에 대한 우리 사회와 교인들의 인식을 대변하는 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목사는 공적 검증을 거친 적이 없는 자들?
의사는 검증된 자들이지만 목사는 검증되지 않은 인물들이라는 주장에 대해 혹자는 반발할 것이다. “무슨 소리야, 목사가 검증되지 않았다니? 목사 고시를 통과하고 노회에서 안수받는 것이 검증 아니란 말인가? 신학 대학원 M. Div. 3년이라는 제도적 과정을 다 통과한 것은 검증 아니란 말인가?” 과연 대학원 3년, 강도사 2년, 목사 고시라는 제도적 과정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결코 가벼운 검증 과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장로는 목사들을 검증된 적이 없는 자들로 간주한다. 그것은 목사되기까지의 과정에 이러한 절차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는 그 검증을 참된 검증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다. 그 검증이 너무나 허술하고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검증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 교회와 신학교들은 평신도들의 이러한 인식을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말 신대원은 검증된 자들을 입학시키고 졸업시키고 있는가? 신대원 입학이 너무 대충대충 이루어지고 있고 과정의 이수와 졸업이 너무 쉽게 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많은 평신도들이 알고 있다.

은사를 점검하지 않고 입학시키는 신학교?
한국에서 신학교 들어가는 것이 쉽다는 말은 한국 신학교들이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설교 적임자와 부적임자를 제대로 판단하지 않고 아무나 입학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김장로는 현재 한국 신학교는 “사람들의 은사를 점검하지 않고” 입학시키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즉 설교자로서의 기본적 자질이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입학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은사없는 자들을 아무리 가르쳐 보아야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가르치는 신학 교육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대체할 수 없다”고 그는 단언하는 것이다.
그러면 김교수가 말하는 설교의 “은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내용이 무엇인가? 물론 김교수는 은사라는 말로 초자연적 은혜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는 말씀을 “깨닫는” 은사를 언급하는데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단지 자연적 이해력이나 사고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 같은 초자연적 역사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장로가 주로 언급하는 것은 자연적 차원의 능력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 깊이있는 성경 “연구”를 통한 말씀 “분석”과 “정리”와 “전달”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의 의미를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간추리면, 독해력, 분석력, 조직력, 현실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적용력, 메시지를 조리있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communication의 능력이다. 김장로가 한국 신학교들이 설교의 은사가 없는 학생들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결국 comprehension, application, 그리고 delievery의 능력이 없는 후보들을 마구잡이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한국 신학교들은 설교자로서의 은사가 있는지 검증도 않고 아무나 받아 극히 형식적인 소정의 과정을 이수시켜 목사 후보들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가 계속될 경우 “함량 미달의 설교자는 계속 양산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 교회는 영적으로 더 황폐해질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단정한다.


얼마 전 극동방송에 신학교와 신학 교육 문제로 장신대 총장과 대담을 두 시간 했다. 방송 중에 현재 한국 설교의 문제는 논리와 포인트가 없는 것이라 하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행자가 “바로 그겁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를 옮길 것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고 끼어들었다. 얼마나 공감이 되었으면 발언자가 말하는 중에 끼어드는 거의 없는 일까지 했겠는가? 결국 한국에서 목사되는 과정은 총체적으로 부실하다는 말이 됩니다. 자질과 자격이 엄격히 검증되는 단계가 없습니다. 형식상 제도는 있지만 그 시행은 지극히 허술합니다. 그것도 없는 것보다는 분명히 낫겠지만 필요한 정도에는 현저히 미달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허술한 절차 속에서 평생 자신과 교인들 양자를 다 불행하고 괴롭게 만들 청지기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신학지원자들의 책임
신학 지원자들이나 신학생들 자신도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신대원 면접 때는 다 소명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별로 그렇지 않은 가능성을 확인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명의 확인 방법 중 하나는 은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 혹은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중요한 확인 방법 중 하나는 됩니다. 과연 자신에게 설교자로서의 은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이해, 적용, 전달의 은사가 있는가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이 시대,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에 설교할 수 없습니다. 설교가 목회의 70%를 차지한다고 하는 시대에 설교 은사가 없으면 목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달리 별로 할 일이 없으니까 신학교 온 것은 아닌가? 요즘 명문대 나와도 취직이 어려우니까 상대적으로 만만한 신학교나 가야지 하는 식으로 왔다면 밥벌이하는 목사로 안주하기 십상 아니겠는가? 다른 일 몇 가지 하다가 실패하니까 목사 되는 것이 주의 뜻이라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닌가? 많은 경우 참된 소명은 자기 일들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에게 오지 실패하고 있는 중에 오지 않는다.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사람들에게 능력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종합적인 능력이 필요한 일이다. 지성, 인성, 영성이 겸비되어야 하고 신학적 성경적 지식과 함께 이 세상과 사회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효과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보통 능력으로 할 수 없고 보통 훈련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소명과 은사를 가진 사람이 양질의 교육과 밀도높은 훈련 끝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설교자들에게 힘든 시대이다. 교인들이 보통 똑똑하지 않다. 듣는 귀가 보통 발달되어 있지 않다. 많은 경우 목사들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다. 자기가 설교는 못해도 듣는 능력은 탁월하다. 며칠 전에 평소 아주 어리숙해 보이는 집사와 대화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0목사는 영성이 너무 없어요.”

신학교들의 회개 필요성
먼저 나를 포함한 신학 교수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실제로 김교수는 “현재와 같은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신학교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신학생 선발을 더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들의 소명을 더 꼼곰이 검토해야 하며 그들의 은사를 더 철저히 분별해야 한다. 내가 알기에 요즘 초중고교 교사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 교원 대학이나 사범대학에 가려면 상당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 사범대학 졸업 후 교원임용 자격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과연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가? 목사가 교사를 가르치는가, 아니면 교사가 목사를 가르치는가? 목사는 교사들의 스승 노릇을 해야 한다.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목사는 교사보다 몇 수 위여야 한다. 교사는커녕 교수, 박사, 의사, 변호사들에게도 그러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최소한 졸업할 무렵에는 인격과 지성과 영성에서 그리스도인 교사들보다 나은 인물이 되어 나가는가?
하나님의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공급하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청치기는 큰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청지기를 생산하는 신학교는 엄청난 상을 받겠지만 후자의 청지기들을 생산하는 신학교는 엄청난 벌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청지기든 청지기 학교 졸업장만 가진 자들을 생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신학교는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책임 추궁을 당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목사나 신학생이나 신학교나 모두 근신, 자숙하고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설교자로서의 은사도 없는 자를 아무나 입학시키는 한국 신학교
그러나 김교수가 신학교나 목사 제도와 같은 제도 자체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제도를 만든 것은 “잘한 일”이라고 인정한다. “당연히 그러한 과정과 제도를 통해 좋은 목회자들이 양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는 문제가 많다”고 그는 단서를 붙인다. 이유는

결국 설교의 은사 즉 달란트가 없는 자가 어떻게 신학교 가서 한국의 제도권 신학 교육, 그것도 부실한 교육을 받은 결과보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신앙인으로서 기본적인 이해력과 표현력, 사고력이 있으면서 오랫동안 꾸준히 신앙생활하면서 성경 연구한 사람이 설교자로서 더 적합하다는 것이 김교수의 논지다. 그런데도 목사가 강단권을 독점하겠다는 것은 “기득권 수호를 위한 교권주의”라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목사만이 강단에 서는 것은 분명히 ‘비성경적’” 이라고 그는 자신있게 단정한다. 그는 목사의 강단권 독점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가 황폐화되어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은사 없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은 교인들에게 너무 힘든 일이라고 불평한다.


은사와 소명의 관계
김교수의 은사론을 가만히 보면 결국 이것은 소명과 거의 일치한다. 하나님은 비상식적인 분이 아니시다.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주시면서 설교자로서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그런데 신대원에 오는 자들은 모두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 교인들은 설교자들 중에 설교 은사 있는 자가 절반은커녕 서너명 중에 한명도 안 된다고 느끼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국 교인들의 감각이 잘못인가? 아니면 소명받았다고 하는 자들의 감각이 잘못인가? 아니면 신학교들이 소명을 주장하는 자들의 말의 진위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개인주의의 위험성
김교수의 제도권 신학 교육에 대한 불신은 엄청나다. “사도들이 초대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전적으로 맡게 된 것은 3년 동안 주님과 가졌던 깊은 교제의 결과이지 바울처럼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구약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이 아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독학이 제도권 신학교 교육보다 낫다는 인식의 표현이다. 워낙 제도권 출신의 목사들이 역할을 부실하게 수행하다보니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겠지만 여기에도 위험은 있다. 신비주의, 분리주의, 개인주의의 위험이다. 이단과 분파의 위험이다. 어쨋든 이런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한국 교회가 불행하고 염려스런 상황이라는 증거다.
“은사를 따라 교회를 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면 한국은 불행히도 설교의 은사가 있는 자들은 설교자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고 다른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고 은사없는 자들이 소명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신학교에 가서 제도권에서 목사 자격을 얻었다는 말이 된다. 즉 한국에서는 하나님이 소명과 은사를 별개로 취급하셨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은 설교의 은사를 주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설교자로서의 내적 소명을 주시지 않고 (최소한 일찍 주셔서 그것을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시지 않고) 은사를 안 준 사람들에게는 소명을 주셨단 말인가? 물론 은사는 없으면서 스스로 소명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확신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히려 간단히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은사는 있는데 소명은 일찍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들이 정말 은사가 있다면 왜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주시지 않았을까? 결국 한국에서는 일찍, 적어도 40 이전에 설교자 소명을 주시는 일은 없다는 말인가?
김교수는 설교 은사가 있는 평신도들은 주위로부터 신학교 가라는 권고를 많이 듣지만 그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기도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그 길로 부르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그대로 남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평신도로서 삶의 현장과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국에서는 좀 유별나게 역사하신다는 말이 된다. 설교의 은사를 주시는 대상들은 주로 다른 직업의 소명을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교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직업에 주로 헌신하지만 부수적인 업무로서 설교 사역의 소명을 받는다. 즉 일차적 소명으로 설교의 부르심을 받는 경우는 없고 주로 이차적 사명으로 설교 사역의 소명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 한국에서 하나님은 일차적 사명으로 설교 사역의 소명을 주시는 일이 적은가? 설교 사역은 전심전력하기에는 너무 시시한 일인가? 그렇게까지 전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일을 주로 하면서 짬짬이 할 수 있는 일인가? 기왕에 설교자로 소명받았다 하는 자들이 대부분 실제는 은사도 없으면서 설교를 제대로 못하여 교회를 황폐화시키는 수준이라면 누군가가 대신 설교와 목회에 전적으로 헌신할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 아닌가? 일생을 걸고 전심전력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 아닌가? 아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믿지 않는가? 그렇다면 설교의 은사가 분명히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중요한 일, 그러나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이 일에 자기라도 나서서 헌신해야 하지 않는가?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 이 일의 일군이 확보되어야 하지 않는가? 경영학이나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들 아니라도 많지 않은가? 그리고 그보다 영혼을 구원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더 시급하지 않은가? 그런 일을 할 사람들보다 이 일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