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양낙흥 교수님의 이의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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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양낙흥 교수님의 이의제기



양 낙흥 교수님의 이의와 해명서를 읽고

이광수 목사 /부암로교회 원로



마음 아픈 사건 앞에서 저도 마음에 쓰림을 경험하며 조심스럽게 펜을 잡았습니다. 용기 있게 논평할 마음은 없지만 그러나 꼭 밝혀야 할 말씀인 것 같아 용기를 내었습니다.

양 낙흥 교수님은 “입수 가능한 사료들을 근거로 가감 없이 첨삭함 없이 진술했으며 필자 자신이 예단해 놓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취사선택 하는 비양심적이고 반역적인 작업은 아니며 교단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밝은 면은 감추고 어두운 면만을 남긴 과장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료들을 수집하여 충실하게 살피었고 여기에 근거한 편협됨이 없는 진술을 했고 공정한 해석을 했는데 오류라는 평가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료됩니다. 다른 역사적인 사건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이지만 기독교 역사에서도 흔하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정확하지 못한 평가가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예리하게 판단하고 분석하는 역사학자로서는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함은 너무도 당연하고 변경 할 수 없는 사실일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제가 살펴본 사료들과 교회사에서도 대다수 학자가 고려파와 한 상동 목사에 대해 정확한 평가, 좋은 평가에 심히 인색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더욱 그 당시에는 다수가 신사참배와 깊은 관계가 있었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신사참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주 적은 소수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사료의 대부분이 이러한 관점의 문헌일수 밖에 없겠지요? 지금 한 목사님을 잘 알고 있는 분과 그분의 제자들이 아직 많이 생존해 있습니다. 저도 여러 해 한 목사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양 교수님은 한 목사님을 한 번도 뵌 적도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들은 적이 없었으니 이러한 문헌은 한 목사님을 익히 아는 역사학자가 다루었으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2) 인간이 어찌 허물이 없겠습니까만 제가 알기로는 그분은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고 거룩함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며 주 앞에 서는 그날을 생각하고 경건하게 살았으며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우러름과 존경을 받는 성자였습니다.

3)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어른은 그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회인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시무하셨고 한국의 교계가 신사 참배의 물결에 휩싸여 떠내려 갈 때 고고하게 버티고 견디어 내신 어른이시며 우리 교단의 설립은 주님이 하셨지만 한 목사님을 통해 하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사실이라 해도 그 분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을까 조심 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또한 고전 8장9절의 “내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함” 과 고전8장 13절의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형제로 실족하지 않기 위하여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 ”고 말한 바울 사도와 같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이러한 마음을 교단 신학대학원 교수가 소유하고 후배를 양육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이 글을 씁니다.

2011년 09월 13일












>> "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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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 특별위원회 조사 결과 보고서에 대한 이의와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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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낙흥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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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낙흥 교수는 현재 연구학기로 호주에 가 있는 중 코람데오닷컴에 소개된 특별위원회의 보고를 총회 운영위가 받은 기사를 읽고 이에 대해 이의와 해명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 글은 총회장 앞으로 보내는 글이기에 서신 형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코닷의 독자들도 함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게재하기로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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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경하는 총회장님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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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안에서 삼가 평안을 빕니다. 본인은 외국에서 연구 학기를 보내고 있던 중 본인에 대한 특별위원회 조사 결과 보고서가 운영위원회에 제출되었고 운영위원회는 특별위원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몇 가지를 결의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서와 결의는 총회장에게 전달되고 총회장은 그것을 또한 본인 뿐 아니라 이사장, 총장, 신대원장에게 참조로 발송했습니다. 또한 특위보고서와 운영위 결의 내용은 교계 언론에도 그 전문이 게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이미 공론의 장으로 넘어간 것으로 간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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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위원회가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을 사용하여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며 교단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러한 정당한 권한 행사에 순복해야 할 것입니다. 단 조건은 공회의 결정이 거짓 증언과 허위 보고가 아니라 진실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공회의 결정이 보고자들의 왜곡과 조작의 영향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 결정은 법적 유효성에 원천적인 하자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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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은 특별위원회 보고서를 읽고서 깊은 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특위의 조사 보고서의 많은 부분들이 진실한 진술이 아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특위의 서면과 면담을 통한 질의들에 대한 답변에서 본인의 연구 발표가 교회의 선생이라 칭하는 신학 교수로서, 특히 교단의 과거와 현재를 주의깊게 살피고 진단하면서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 신대원 교회사 교수로서의 사명감의 발로라는 점을 누누이 전달했었습니다. 그러한 진정성은 글과 말을 통한 본인의 답변을 사심없이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영위에 제출된 특위의 조사보고서는 특위 질의에 대한 본인 답변의 진의를 고의로 외면하고 핵심적인 진술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뿐 아니라 때로 그것을 왜곡, 과장, 심지어 변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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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본인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만다면 그것은 자칫 특위의 보고 내용들을 본인이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접한 일반인들은 그것을 모두 진실한 보고로 받아들이게 될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만일 본인이 여기서 이러한 왜곡을 외면해 버린다면 앞으로도 교회의 중요한 결정들이 보고자들의 조작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극히 불행한 전례를 남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점들에 대한 우려들로 인해 본인은 특위 보고서의 내용들 중 사실과 크게 상이한 부분들을 해명하여 교단의 형제자매들에게 진실을 알릴 책임이 당사자인 본인에게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이 특위 보고서에 대한 이의서를 제출하오니 총회장님께서 살펴보시고 진실이 밝혀지고 교회의 질서가 바로잡히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굳게 서게 해 주실 것을 앙망합니다. 해명 순서는 편의상 특위 보고서의 항목 순을 따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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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자는 분리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강변하고 있으나 양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는 한상동 목사와 교단지도자들을 분리주의자로 규정짓고 있는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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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은 어떤 책이나 글에서도 분리주의자라는 말을 한상동 목사나 교단에 대해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장로교 역사상 분열과 관해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을 입수 가능한 모든 사료들을 근거로, 그리고 그것들을 가감이나 첨삭함 없이 충실하게 진술했을 뿐입니다. 발견된 자료들 중 일부를 필자 자신이 예단해 놓은 특정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취사선택하는 비양심적이고 반역사적인 작업은 본인의 연구 방식과 가장 거리가 먼 일임을 하나님 앞에서 증언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본인의 명예가 함께 걸려 있는 본인이 속한 교단 역사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목적으로 그 밝은 면을 감추거나 축소하고 어두운 면을 날조, 과장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건전한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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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양심적 역사 서술을 읽은 독자들이 스스로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성격에 대해 나름대로의 인상을 받고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까지 저자가 책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저의 역사 서술이 정확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충실한 사료 수집, 그리고 수집된 자료들에 대한 정확하고 공정한 해석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것이 제기할 가치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역사 기술과 관련하여 그 핵심적 질문 외의 다른 의문과 불만들은 모두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감정 문제에 불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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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본 저서의 집필의도가 설립자도 범죄하고 실수하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수집과 약점을 드러내는데 치중하고 있다. 그 결과로 진리에 순종하는 데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순교정신과 생활의 순결을 소중히 여기는 교단 소속의 목회자나 성도들의 자긍심에 치명적인 손상을 준다는 점이 가장 우려스러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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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언급했지만, 어느 교단에 속한 학자이든 자기 교단과 그 교단의 역사적 지도자를 흠집내어야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역사 연구에 착수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속한 집단--가족, 학교, 교단, 국가--에 대해 방어적이고 긍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꼭 학자만이 아니라 양식 있는 모든 인간이 자기가 속한 단체의 역사의 일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단체의 과거사의 어두운 측면들에 대한 발견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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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의 저서의 자료 수집과 집필 의도가 한상동 목사도 범죄하는 인간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특위 보고서의 주장은 순서가 역전된 것입니다. 한상동 목사도 육신의 몸을 벗는 순간까지 죄성의 잔재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한낱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의 계시와 개혁주의 인간론의 초보적 진리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정도의 사실을 밝히기 위해 신학자가 긴 세월을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고 악한 일일 것입니다. 본인이 비록 심히 부족하고 어리지만 그러한 상식적 사실을 복창하기 위해 수년간의 세월을 바쳐 연구에 몰두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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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위 보고서는 마치 본인이 한상동 목사를 고의로 음해하고 깎아 내리려는 불순한 동기에서 연구에 착수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위와의 면담에서도 밝힌 바이지만 본인이 성인이 되기 전에 소천 한 한상동 목사를 본인은 단 한 번도 보거나 그 존함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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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교단 구성원이든 자신의 교단 역사 속에 자긍심을 가질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이든 단체든 그 과거 속에 훌륭한 업적과 장점들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는 동시에 회개해야 할 행적이나 유감스러운 과오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다윗, 베드로, 아브라함 등이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에 과오와 실수가 있었다 해서 자긍심에 치명적 손상을 입는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자긍심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에 근거한 것이어야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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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한상동 목사를 만나 뵙거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인품이 온화하시고 겸손하시고 양보할 줄 아는 본받을만한 분으로 알고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아왔는데 양 교수의 저서는 한상동 목사를 독단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양보할 줄도 모르고 더구나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무책임하고 한심한 사람으로 느껴지도록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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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한상동 목사에 대한 위의 부정적 형용사들은 저자가 아니라 보고서 작성자들이 사용한 것들임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게다가 특위 보고서는 필자의 책 어디에서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되었는지 전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어떤 책을 읽고 특정 인물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과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책의 내용이 충분한 사료들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분석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을 읽은 독자들이 그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인상을 받는 것에 대해서까지 저자가 책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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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가지, 특위 보고서의 진술은 한상동 목사에 대한 개인들의 사사롭고 단편적인 만남에 기초한 이해는 모두 정확한 것인 반면 학자가 공적 사료에 나타난 한 인간의 공적 행적을 기초로 그를 평가하고 묘사한 것은 모두 부정확하고 최소한 신빙성이 덜한 것이라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 봅니다.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는 교역자들도 자기 교인들과 만나는 순간에는 한없이 친절하고 부드러울 수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스쳐가는 사적 만남에서는 다른 이들에게 겸손, 온유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공적 문제에 있어서는 독단적이고 불합리한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손자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할아버지가 일국의 독재자인 경우들이 흔합니다. 역사서는 어떤 인물의 사적인 영역보다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모습을 주로 다룹니다. 교회 문제와 관련된 결정들은 모두 공적인 영역에 속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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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저서의 핵심은 ‘분리는 나쁘다. 두 번씩이나 분리한 고신 교단은 책임을 통감하고 하나님과 한국장로교 앞에 무조건 회개하고 무조건 합쳐야 한다. 이런 교단은 존재 의의가 없다’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저자는 교단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잘못인줄 모르고 있는데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로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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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의 글과 말에 대한 왜곡 내지 날조의 대표적 사례들 중 하나입니다. 본인은 장로교의 일차 분열이 분명 총회의 축출의 결과라고 저서에서 여러 번 지적했으며 답변서에서도 그 사실을 누차 밝힌 바 있었습니다. 신학적 명분이 없는 1963년의 “환원” 사건에 대해서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고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한국 장로교회와 화해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조건” 회개하고 “무조건” 합쳐야 한다는 식의 막무가내 식 표현을 쓴 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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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교단은 존재 의의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보고서의 주장에 대해 본인은 분개합니다. 그것은 저자가 쓴 적이 없는 표현으로서 특위 보고서가 만들어 본인의 입에 넣어 준 “중상”이요 “음해”입니다. 수십 만 명이 속해 있는 교단이 존재 의의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성격의 일이지 한낱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있는 단정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필자는 답변서에서 분명히 밝혔었습니다. 본인이 “선지자”로 자처한다는 말도 또 하나의 왜곡이요 심지어 인격적 조롱으로 들립니다. 선지서가 완성된 마당에 무슨 선지자가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단지 한 집단의 중요한 역사적 과오들에 대해 회개를 권고하는 일이 과거 선지자들의 역할 중 하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초보적 지식에 속하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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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 저서를 읽으면 본 교단 소속 독자들은 죄가 깨달아지고 회개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갈등이 생긴다. 왜냐하면, 타 교단의 학자들도 한상동 목사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 교수는 우리 교단 성도들에게 은혜 되는 부분은 거의 생략하거나 간단하게 언급하고 부정적인 부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집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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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회개의 촉구가 정당한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인 경우 그 메시지를 들은 사람이 반발만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설교자의 회개의 권고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라면 그 메시지를 듣고 갈등과 반발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모두 설교자의 잘못 때문이라 단정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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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교단의 학자들이 한상동 목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점들을 본인이 생략했다고 하는데 누가 어떤 평가를 했으며 본인이 생략한 것인 무엇인지 적시하지 않는 이런 식의 고발이 근거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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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서에 나타나는 두 개의 전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상동 목사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은, 누구에 의한 것이든, 순수한 것이요, 부정적인 진술은 모두 불순한 동기에서 쓴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또, 한상동 목사에 대한 자신의 기존 지식과 일치하는 역사적 진술은 모두 선한 것이요 그것과 상이한 내용은 모두 악한 것이라는 전제가 특위 보고서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들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만일 역사학자들이 그러한 선입견과 전제를 가지고 역사 연구를 한다면 과연 그가 학문적 가치가 있고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것은 의도를 가진 부정직한 작업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까? 대중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부분을 그대로 되풀이 진술하는 책이 무슨 학문적 가치를 가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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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위 보고서는 본인이 한상동 목사의 “부정적인 부분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밝히지만 저는 한목사님이 돌아가시기까지 한번 먼발치에서라도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심지어 그 이름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생애 중 어두운 부분들이 제 책 여러 군데에 소개되어 있다면 그것은 저서의 부제가 보여 주는 대로 책의 초점이 한국장로교 분열 과정을 추적하는 데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의 내용의 성격상 분열에 관련된 한목사님의 행적이 자주 언급되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것입니다. 한국 장로교회와 고려파의 분열에 대해 논할 때 한상동 목사님을 제외하고서 그 작업을 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믿는 분들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고려파 역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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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한상동 목사의 가장 중요한 공로인 일제 하 신사참배 반대를 위한 희생과 영웅적 투쟁, 그리고 젊은 시절과 옥고를 치를 때의 남다른 경건의 모습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상동 목사의 최대의 공로와 장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기술했다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한상동 목사의 중요한 장점 중 일부가 본의 아니게 누락되었다면 그것을 아는 분들이나 다른 연구자들이 향후 다른 기회를 통해 부각시키면 될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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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양 교수는 교단 내에서 이런 문제가 제기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주게 된 결과에 대해 유감스럽고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했으나 사실에 근거해서 쓴 것이기 때문에 다른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주장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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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자적 양심의 산물로서의 연구 결과에 대해 그것이 오류나 허점이 있는 것임이 학술적 연구 결과에 의해 규명되기 전에 그것을 철회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를 범하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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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양 교수는 한상동 목사의 조카 교수 임용 탈락에 큰 영향을 받아 환원이라는 중대한 일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결국 혈연과 핏줄에 대한 애착, 기대 등 한국적인 기질이 독단적으로 환원을 결정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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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본인의 근거 없는 주장이나 억측이 아니라 여러 관계자들이 환원의 결정적인 사유로 지적하고 있는 점임을 제 책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본인도 그러한 관점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점 외에도 저는 구 고려측이 “환원”에 이르게 된 다른 중요한 요인들을 병기했었습니다. 즉 큰 교단인 승동측과 합한 후 총회, 노회 등에서 요직과 직책을 주로 승동측에 빼앗긴 구 고려측 인사들의 불만도 환원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삼박사의 귀국도 한상동 목사로 하여금 구 고려측의 독자적 인적 자원만으로 다시 고려신학교를 운영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여 고신 복교를 결정하고 궁극적으로 “환원”을 결행하는 데 영향을 준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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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저 자신도 오랫동안, 순교를 불사했던 출옥성도가 “조카의 교수 임용 요청에 대한 거부”라는 사사로운 이유 때문에 교회의 일치를 해치는 결단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로 여겼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도 객관적인 자료들이 보여 주는 사실은 출옥성도라 해서 꼭 평범한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 자신 그러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심히 서글프고 가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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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양교수가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전국에 신사불참배자들의 검거원인과 동기가 한상동 목사의 강성발언과 적극적인 움직임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 이유는 한상동 목사의 강성발언 이전에도 이미 신사불참배자에 대한 검속과 순교자가 있었고, 주기철 목사는 이미 1년 전에 검속이 되어 고문을 당했다. 또한 신사불참배로 순교한 자들에게 “어이없이 청천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는 표현은 순교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무례한 폄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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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위 보고서에 대해 심히 유감스러운 점 중 하나는 특위와의 면담 시는 물론이고 특위 질의서에 대한 답변서를 통해 동일한 질문과 문제 제기에 대해 누차 충분한 설명과 해명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을 전혀 접하지도 못했던 것처럼 동일한 공격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물론 한상동 목사의 강성 발언 이전에도 있었지만 전국적 신사불참배 운동의 본격적 전개를 위한 한상동 목사의 제안과 실천 후 일제의 감시와 검거가 한층 강화되었다는 사실은 믿을만한 기존 사료(한상동 목사의 처남인 김사엽 장로의 회고, 한국교회사학자들의 책)에 근거한 것입니다. 영주와 안동에서 체포되어 고초를 당한 25명의 성도들은 신사 참배 반대에 관한 어떤 활동도 한 적이 없는데 단지 갑자기 방문한 한상동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에 관한 권고를 듣는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검속, 투옥당하고 일부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뿐입니다.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신사불참배자들에 대한 기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위 보고서가 필자의 진의를 왜곡, 중상하는 것에 유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양식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러한 표현을 쓸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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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 근원적으로, 설사 어떤 역사 교수가 나름대로 양심껏, 그리고 능력껏 연구해서 발표한 글에 본의 아니게 어떤 부정확한 부분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것이 총회와 공회가 나서서 그 학자에 대한 징계를 논해야 할 사안이 될 수 있을까요? 역사적 연구물이 사실과 거리가 있는 진술을 하고 있다면 그것을 학적으로 증명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완벽에 미달되는 연구물을 발표하는 학자는 항상 공회의 징계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게다가 필자의 의도를 왜곡, 중상하면서까지 공격하는 것은 공회의 거룩함에 손상을 입히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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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본 저서가 학생들을 받아들이는데 혼란을 일으키고 있고 이 책을 읽는 분에게 교단 정체성을 잃게 만드는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사실에 근거하여 쓴 책이기 때문에 학생들과 성도들이 읽고 잘못된 것을 알고 회개하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논리다. 이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고수하며 그 기준으로 역사해석을 하면서도 자신의 견해가 객관적이라고 여기는 과대망상적 사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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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도 특위 질의에 대한 답변서와 특위와의 면담 시에 누차 해명한 내용입니다만,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 중 하나는 공교회의 정체성이 경건이 아니라 신학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랑스러운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과거의 체험이나 단회적 사건이 교회의 정체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교회의 결정적 차이는 교회가 가진 신앙고백이요 근본적 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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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 중 하나인데 그것을 개인의 “고정관념”이라 매도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된 발상인지 의문입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과연 누구인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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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대망상적 사고” 라는 표현은 거의 인신공격적이고 명예훼손에 가까운 말인데 공적인 문서가 타인, 더군다나 학자에 대해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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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양 교수는 잘한 부분은 축소하고 잘못한 부분은 확대하고 있다. 책의 주제가 분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한상동 목사도 분열에 관련된 부분만 쓸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이는 매우 부정적인 사고에서 나온 그릇된 비판논리이다. 그러므로 ‘한국장로교회사’는 교단의 아름다운 전통과 신앙유산과 자긍심을 훼손하고 왜곡시킬 소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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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리의 비약이 많아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지만 결국 본인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역사를 불공정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본인의 학자로서의 양심, 그리고 그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에 대한 이러한 모독적인 내용을 공석상에서 함부로 발표하는 것에 유감을 금하지 못합니다. 특위 보고의 전반적 특징이지만, 사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근거와 논리적인 진술은 전혀 없이 자신의 감상과 결론적 주장만 제시하는 것은 일반의 납득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어떤 “잘한 부분”을 축소하고 어떤 “잘못”을 확대했다는 것인지 진술함이 없이 방대한 사료들에 근거한 학적 연구 결과를 함부로 폄훼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야말로 공회로서 무책임하고 경솔한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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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차 언급하지만, 한상동 목사에 대해서는 분열에 관한 것만 기술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출생, 성장, 교육, 목회, 신사참배 반대 투쟁, 출옥 후의 신학교 설립 등 그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거의 모두 언급했습니다. 단지 책의 초점이 한국 장로교 화해와 일치의 모색을 위한 한국 장로교회의 형성과 분열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므로 분열에 관련된 부분은 보다 상세하게 취급되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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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고신교단을 대표하는 총회가 WCC를 반대하며 2013년도 WCC 부산총회 자체를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있는데 양 교수는 거기에 들어가 개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피력하고 있다. 고신교단의 전체 방향을 역행하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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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보고서 작성의 전형적인 방식들 중 하나인 “왜곡”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들 중 하나입니다. 첫째로, WCC와 관련하여 본인이 받았던 인상은 우리 총회가 WCC의 실상과 실체에 대한 충분한 연구 없이 일종의 군중 심리에 의해 그것을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 누가 그것에 대한 책임있는 학적 연구를 하거나 그 연구 결과를 무게 있는 논문이나 책으로 출판한 적이 있습니까? WCC 창설이 1948년인데 겨우 2년 지난 50년에 40대의 박윤선 교수가, 주로 칼 매킨타이어의 글에 근거하여 <파수군>이라는 잡지에 간단히 쓴 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우리 교단이 WCC에 대해 발표한 처음이자 거의 마지막 글인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매킨타이어가 미국 교회사에서 어떤 식의 부정적 평가를 받는가 하는 것은 이미 미국의 역사가들이 증명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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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교단이 제대로 된 연구와 조사도 없이 WCC를 비난하고 반대하기만 하는 것은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단체의 문제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는데 한쪽만 부각시키는 것도 불공정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우리 교단이 충분한 연구도 없이 그것을 과격하게 반대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 아니라 봅니다. 합동측이라면 그렇게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교단은 자신들의 기원 자체를 WCC에 대한 반대에서 찾고 있으며 WCC 부산대회를 유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통합측 교단과 범사에 경쟁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도 없고 WCC에 대한 학적인 연구 경험도 없는 우리 교단의 일부 인사들이 WCC 반대에 극단적인 열심을 내는 것은 과연 어떤 이유 때문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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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사 약간의 연구가 있었다 하더라도 다른 학자들이 보기에 그것이 불충분하거나 부정확 면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책임 있는 연구 결과 다양성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학자들이 해야 할 당연한 본분의 일부 아닙니까? 더군다나, 본인은 WCC에의 무조건적 가입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만일 한국 교회가 WCC를 신학적으로 개혁할 자체 역량이 있다고 판단된다면”이라는 단서 하에 거기에 들어가 개혁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묻는 질문성 제안을 던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특위 보고서는 마치 본인이 무조건적 가입을 주장한 것처럼 진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학자가 한국 교회와 소속 교단을 위한 자기 연구의 결과를 발표하고 그것에 대한 최선의 대책이라 여겨지는 바를 양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징계 받아야 할 사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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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은 연구 결과물인 논문을 통해 WCC의 신학적 문제점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2010년 6월의 기독교학술진흥원의 공개학술 세미나에서 WCC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는 한국교회가 WCC 총회에 시정을 요구하기로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수백 명의 방청객들이 그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본인에 대한 공교회적 징계를 운위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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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학문은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유익하게 하는 범위를 지킬 때 허용되는 것이다. 교회의 권리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해서도 안 되지만 학문의 자유가 교회의 권리를 침해해서도 안 된다. 양낙흥 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는 학문의 자유를 남용하여 교단의 권위와 정신을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으로 교단 정신을 왜곡하였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원 교수로는 부적합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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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주장만 있지 논거는 없는 판단입니다. 첫째, 본인의 연구물들이 누구에게 무슨 피해를 주었다는 것입니까?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교회에 피해를 준다면 진실을 감추고 어용적 칭찬으로 일관하는 역사서가 교회에 유익을 준다는 말입니까? 학자의 역할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며 역사학자의 사명은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것 이상으로 역사학자가 인류와 교회와 사회에 큰 유익을 주는 길은 없습니다. 모든 진실과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진실과 학문적 진리는 항상 인류와 교회에 큰 유익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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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권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역사적 진실을 감추고 허상 위에 자부심을 누리고 우월감을 유지하며 다른 교단을 계속 무시하는 것입니까? “교단의 권위와 정신”을 어떻게 침해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특위 보고서에는 아무런 구체적 서술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무리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부정적인 점을 지적하면 “교단의 권위와 정신”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도대체 진실 앞에서 침해당하는 “교단 권위와 정신”이란 어떤 것입니까? 뻔히 예상되는 엄청난 반발과 일신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연구 결과를 양심적으로 발표하여 교단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학자가 신학대학원 교수로 부적합하다면 그러한 신학대학원에 적합한 교수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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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본 위원회는 이런 책을 고려신학대학원 학생들에게 읽게 하면 새로 배출되는 교단 목사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며, 교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고 설립자나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나 교단 소속 목사로서 자부심을 가지는데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고 일치 가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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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적 자부심이나 자랑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입니다. 자부심이나 존경심은 모두 진실에 근거한 것이어야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허상에 근거한 자랑은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유익이 아니라 치명적 해독을 끼칩니다. 이미 역사가 증명한 바이지만, 학문적 연구 결과는 물리력이나 교권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연구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진지하고 전문적인 또 다른 학자들의 또 다른 연구들에 의해 그 부정확성이 입증될 때 비로소 사라지는 법입니다. 중세 로마 교회의 교권이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결국 제거할 수 없었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역사적 지식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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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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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위 조사보고서에 대해 본인이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특별위원회의 질의에 대해 본인이 문서상으로나 구두로 본인의 연구와 발표는 교단의 미래를 염려하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누누이 밝혔으며 그러한 진의가 삼척동자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고도 거듭해서 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위 보고서는 그러한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묵살하고 마치 본인이 교단을 파괴하고 교단의 지도자를 음해하기 위한 악의에서 수년간의 연구를 수행한 것처럼 몰아가려 애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자로서 교단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방식인 학적 연구와 그 결과의 양심적 발표를 특위가 이처럼 왜곡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의문입니다. 혹 그것이 자신들의 인간적 이익에 부합하는 기존 교회 질서에 대한 집착은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에 하나 교계에서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진 형제들 사이의 화해에 대한 성경적 권고를 거부하는 일이 있다면 두렵건데 그것은 성령님을 심히 근심케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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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파는 해방 후부터 1952년에 교단을 창설할 때까지 결코 장로교로부터의 분리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대한예수교장로회 안에 남기를 열망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총회의 교권적 횡포로 인해 대한예장에서 축출 당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주장해 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분리 상태를 이상적으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현재 한국 장로교회가 242개의 교단들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유감스럽게 여기고 슬퍼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의 하나됨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가 애초에 결코 분리를 원한 적이 없었으며 타의에 의해 축출된 결과 어쩔 수 없이 독자적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우리의 기존 주장이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게 될 것이며 또 그것의 진실성이 입증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의 모든 대한예수교 장로회라 칭하는 다른 교단들을 거짓 장로교회라 보지 않는다면, 즉 우리 교단이 대한민국 땅에 있는 유일한 참 장로교회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고신 교단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국의 다른 참 장로교단들과의 화해와 연합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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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한 것이든 잘못한 것이든 밝은 부분이든 어두운 부분이든 과거의 역사는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제시되고 기술될 때 그 역사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최대의 유익이 된다는 것이 저의 학자적 확신이요 그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입니다. 우리가 견지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분명 기독교의 사활을 좌우하는 근본적 교리상의 차이가 존재하는 경우 이외의 모든 교회 분열을 잘못된 것으로 경계합니다. 그것은 칼빈의 교회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강조점들 중 하나입니다. 만일 우리 교단이 여전히 칼빈 신학을 우리의 신앙 표준으로 삼고 있다면 1963년의 명분없는 분열인 소위 “환원”을 회개하고 신학과 신앙고백이 일치하는 한국 장로교회들과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결자해지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비록 그것이 괴롭고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진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솔직히 고백할 때 소망이 있을 것이며 그 반대의 태도를 취한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 믿습니다. 본인은 학자들의 양심적 연구 결과가 모든 관련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진정한 유익을 가져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반면 진실을 은폐하고 허위를 부각시키는 행위의 결말은, 비록 당장은 자기 단체를 사랑하는 행위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조만간에 큰 불행과 비극의 원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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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자의 연구 결과에 대한 최종 판단을 총회운영위원회가 감당한다는 것도 본인의 짧은 상식에 의하면 부적절한 일입니다. 운영위원회는 재정상의 긴급한 결정 같은 비상 의제를 다루기 위한 일종의 비상 기구일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진실 규명 같은 공회의 일반적인 의제를 검토하기 위한 목적과는 거리가 먼 비헌법 기구인 줄 압니다. 그럼에도 총회는 작년 본 건을 운영위원회가 최종 판단하도록 하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의에 도달했습니다. 책이 출판된지 이미 수년이 지나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위험이 있는 대상도 아닌데 이처럼 비상한 절차를 통해 역사적 진실에 대한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과연 순리적인 처사인지 저는 깊은 의문을 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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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보건데 특별위원회 보고서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들이 가진 기존 지식은 절대적으로 옳고 그것과 일치되지 않는 모든 견해는, 설사 그것이 학자의 수년간의 진지하고 전문적이고 양심적인 연구 결과라 할지라도, 잘못되고 틀린 것이라 예단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근거에 의해 그처럼 절대적인 확신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 건은 마지막으로 총회 재가 절차를 남겨 두고 있는 줄 압니다. 아무쪼록 현명하신 총회장님께서 특위 보고 내용과 저의 진술 양자 중 어느 것이 진실하며 어느 것이 거짓된 것인지 여부를 확인해 주시기를 삼가 청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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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9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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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수)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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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낙흥 교수의 '고신총회의 역사성과 정체성 입장에 대한 부산노회 보고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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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수 장로(고신대 前사무처장, 부산부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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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다시 문제를 제기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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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년 봄 정기노회가 종료된 직후 모 장로님께서 2010년 4월 부산노회에 보고된 자료 [양낙흥 교수의 고신총회의 역사성과 정체성 입장에 대한 부산노회 보고서]를 손에 들려주었다. 내용을 반복해서 몇 번이나 읽어보았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전문위원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았다. 목사 위원들은 상당한 학문적 능력을 갖춘 분들임을 직감했다. 문제는 한 권의 저서를 읽고 올바른 서평과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왜 부산노회가 전년도 총회에서 [양낙흥 교수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총회신학부가 보고한 것을 총회가 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이 문제를 재론하여 진실성과 사실 여부를 명백하게 밝히려고 하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필자는 아직까지 그 누구와도 이 문제를 두고 어떤 의견을 나누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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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노회가 이의를 제기한 초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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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 가운데 이미 코닷에는 양 교수의 저서와 관계된 부산노회의 결정을 우려를 넘어 비판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글이 올라왔음을 목격한다. 여하튼 공동체의 일원은 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회의장 밖에서 반대 입장을 피력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양식임에도 이의를 제기함으로 오히려 파장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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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2009년도 총회 이후에 출판된 듯한 양 교수의 저서는 [분석과 판단]이라는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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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저서의 주제(책 이름)를 그냥 [한국 장로교회사]라고 하지 않고 [한국장로교회사 : 형성과 분열과정, 화해와 일치의 모색]이라고 했을까? 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독자들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느낌을 받게되는 중요한 인상은 무엇인가? 좀 색다르게 주장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를 직감했다. 이번에는 마음먹고 고신의 정체성에 손을 좀 보고, 분열의 중심이라고 규정하고 싶어 하는 저자의 학자적 고집이 도사리고 있음이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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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노회의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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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노회의 결정은 한상동 목사님께서 평생 시무하신 교회가 있고, 역사성이 있는 노회원들에게는 자존심과도 결부됨으로 그 주장과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우리 교단이 진주의 성남교회로부터 출발했지만, 고려파 역사에 있어서 교단의 신앙의 중심은 부산의 한상동 목사님, 대구의 오종덕 목사님, 거창의 주남선 목사님을 중심으로 마산에는 손명복 목사님, 조수옥, 주경순 권사님과 대구서문로 교회에는 박복달 선생 등이 계셨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먼저 깨닫고 아기 예수를 찾아갔든 것과 비견하는 동방박사 세 사람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박사의 가르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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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노회를 보는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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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부산노회의 결정은 우리 교회와 교단을 사랑하는 심정에서 출발하였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흐트러진 교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많은 분들이 우려하는 신학의 자유주의 지향 물결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이제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상당히 여론화 되어 있는 상황에서 부산노회의 결정은 상당히 의욕적이고 용기 있는 결단으로 평가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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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을 잘 유지 보존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신학과 정체성을 이탈하는 학자들은 반드시 순화교육을 받도록 하든지, 아니면 축출해야한다는 분명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교수라는 철 밥통을 악용해서 교회를 두려워 할 줄 모르는 학자를 교단이 묵인 한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신학과 정체성, 역사관은 변질될 수밖에 없다. 설립자의 신앙 사상을 반대하는 자가 그분께서 세우신 교육기관에서 버젓이 군림하는 것은 설립자에 대한 모독이요, 반동이 아닌가 싶다. 그런 분에 대해서는 일단은 우리 신학교에 임용하지 말 것과 선지동산에 존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견해가 고려파 사람들의 대다수 의견이라는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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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자의 소신주의와 교파의 정체성과의 불합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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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주장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이나 소신이 개혁주의적 신학과 고려파 교단의 정체성을 역행하는 주장이라면, 존중할 만한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보통 사람이 혹 한 두 마디 실수를 했다면 그냥 넘어갈 수가 있겠지만, 다른 분도 아닌 신학교의 교수 입장에서 자신의 역사관에 대한 소신을 내세워 소속 교단의 정체성을 끝까지 부정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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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 그런 분이 교단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은 자이거나, 장로로 장립한 자라면 상황은 또 좀 다르다. 왜 안수 받을 그 때에, 신학교에 처음 임용될 그 때에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묻고 싶다. 그 때 다 인정하고 서약한 것을 이제 와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왜곡된 주장을 하기에 앞서 우선 변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학자의 양심을 내세워 끝까지 주장을 굽일 수 없다면, 교단을 떠나면 되는데 라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음을 왜 모르는가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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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의 입장과 요구는 무시되어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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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히 전국의 교회와 노회는 총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를 후원하고 재정적인 역할을 분담하는 입장에 있다. 특히 우리 장로들도 전국교회의 신령한 면을 살필 책임이 있다. 신학교는 우리 교회의 교역자를 양성하는 선지동산이다. 그런 면에서 법인 이사회와 교회는 소속 학자들의 주장이나 신학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이탈 정도를 제도적으로 방지할 방안을 강구해야 할 시점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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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노회 연구 위원들의 학문적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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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노회 연구위원들이 보고한 양 교수의 저서에 대한 학리적 논박이나 비평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미 충분한 서평이 나왔다고 본다. 연구위원들은 3년의 대학원 과정 신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외에서 학술적으로 연구한 경력들은 이미 학자적 자질을 갖춘 분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수 능력도 갖춘 분들이기 때문이다. 기초학문을 넘어 자연과학 분야 같은 경우는 매우 세분화 되어 있지만, 문제의 그 저서는 국문 판으로 출판되어있고, 신학 도들을 위한 교과서적 권장 텍스트라는 측면에서 이 저서가 상당한 위험성이 있음이 주지의 사실로서 밝혀졌고, 노회원 전체의 상당한 지지를 받아 정중하게 결정까지 된 사실임을 우리는 유념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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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경우에도 논지에 대한 학리적 논박이나 외부의 또 다른 객관적인 비평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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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문제는 [어떤 논지에 대한 학리적 논박이나 비평]의 과정을 거쳐야 종료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논지(論之)는 [따져 말하는 것]에 불과하고, 학리적 논박(學理的 論駁)은 [학문상의 원리나 이론의 잘못된 것을 쳐서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 교회가 분석하고 검정해야할 정체성의 검정이라는 본질적 사유에는 해당 밖의 논제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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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개인이나 가정에도 소위 이념이나 사상 같은 것이, 또는 정신이나 전통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논란을 벌이고 따지고, 자신의 원리나 이론을 내세워서 내가 옳거니 잘했느니 하는 주장은 오히려 낭비적이고 불필요하다. 부산노회의 전문위원들의 보고서는 교단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정신이 담겨있다고 하는 만큼 그 뜻이 숭고함으로 일단은 교단 총회의 결정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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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적 논증이나 정체성 부인을 확인 검정하고자 하는 문제를 정치적인 수작내지는 술수로 이해한다면 이는 너무나 엄청난 오차가 상존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원래는 정치가 참 좋은 것인데,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어떻게 표현할 방법은 없지만, 기독교의 정치는 교회를 잘 다스려보고자 하는 뜻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역으로 해석하고 또 자기 논리식으로 포퓰리즘 정치를 주장하면 절대로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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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파의 연합 사업은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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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몇 년 전 필자가 부산기독교장로총연합회의 공동회장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동안 기독교연합 사업에 대해 무관심했든 시각을 벗어나 유익한 점도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나마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유일한 기독교연합기구이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서로 우두머리를 하려고 하는 다툼도 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연합회의 일은 하고 싶은 사람에게 맡기면 일이 잘 돌아간다. 기억나는 것은 그때 T교단의 대표들이 교단명칭을 적을 때 왜 우리 장자교단 이름 서열을 뒤로 했느냐고 항의하는 일이 있었는데, 회장 교단을 먼저 적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이해를 시킨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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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인이나 교파까지도 각자의 정체성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의도는 존재의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어떤 이유로든 나를 낳은 부모님을 비방하거나 거역하면 순수한 줄로만 알았든 것들이 반증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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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거기다가 다른 이유나 이론을 같다 붙이거나 인용해서 말하면, 제3계명이나 제9계명을 본의 아니게 어기는 경우가 있음으로 신중하고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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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많은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대부분 하나님의 이름을 빌리거나 교회 를 위해서라고 하는 단서를 달고, 내세우기도 하면서 자기 괴변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분의 삶에서 정말 신뢰성이 발견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가? 남의 허물을 말하기에 앞서 자신의 경건에 힘쓰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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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까지 우리교단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그럼으로 더욱 이 교단의 역사성과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은 아주 중요하다. 마치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신앙이 무의미하듯 큰 건물만 있고 바른 신학과 정신이 없다면 언젠가는 모든 것이 훼손되고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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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는 관선 때 영어와 같은 몸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관이 다른 곳으로 팔아 넘어가지 못하도록 많은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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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는 개혁되어졌기 때문에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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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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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에도 교회의 개혁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 장로교회의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끊임없이 갱신을 지향하는 교회 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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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본성 교회 대문에 두 번째의 95개 논제 [면제부와 그 신학적 전제들에 대한 비판]의 글을 붙임으로서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최종적인 권위로 정립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에 맞서서 로마 가톨릭은 수차례에 걸쳐 종교회의를 열었는데, 1545년에서 부터 1563년까지 무려 18년간이나 계속되었다. 1563년에 종료된 트렌트회의는 오늘 날의 로마 가톨릭교를 있게 한 중요한 황당무게한 종교 회의이다. 트렌트 회의의 주요 결정 사항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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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한 방책을 강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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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전통은 성경에 상응하는 권위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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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성례는 7가지이며, 미사는 이미 죽은 자를 위해 드리는 진정한 희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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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2종 성찬 즉, 평신도들이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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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칭의는 은혜와 신자 사이의 협력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선행에 기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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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주의 깊이 살펴야할 것은 트렌트 종교회의는 루터가 저항하였던 중세의 교회와는 사뭇(아주 딴판으로) 다르다. 트렌트회의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반동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당시 루터를 비롯한 이를 부인하였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의 종교개혁 당시의 교회는 그래도 전통적 기독교 즉, 기독교의 전통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트렌트 종교회의 이전의 중세교회는 그나마 전통적 기독교를 이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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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런 주장이나 견해는 고려파의 역사성과 신앙의 전통성이 아니라는 점을 보다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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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오늘 우리 식구 중 일부는 입으로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 그 실상은 저쪽으로 좀 가있다는 말을 다른 유수한 신학교교수들에게서 우려 섞인 말을 자주 듣는다. 부분적인 것을 마치 전체적인 것인 냥 비판하는 것도 문제가 좀 있긴 하지만, 그런 의혹을 조금이라도 받는 것 자체가 염려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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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보관했던 1946년의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문에는, 분명히 [개혁주의 신학교 건설]을 문자적으로 표방하고 있었다.(2006년 3월 명예 퇴직시 각종자료와 함께 김성수 총장에게 기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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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총회가 신학이나 사상을 검정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교수들에게는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도록 하고, 새로운 고백을 받아 내는 방법도 일차적인 조치를 취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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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개혁주의 입장에 있는 많은 학자들이 부산 벡스코에서 열릴 WCC 세계대회를 비판하는 성명서가 연일 계속되는 시점에 우리 학자들은 아직도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를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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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문적 논증(論證)에 있어서 자유와 방종은 다르다. 그리고 다양성과 통일성은 떨어 질 수 없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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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문적 논의에 있어서 자유와 방종은 엄연히 구분된다. 교파가 운영하는 곳에서는 주어진 학문의 자유가 적어도 최소한의 자율(自律,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절제함)이라는 범위 내에서 만 가능하다. 교파가 정한 기준을 벗어나거나 이탈하면 방종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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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이나 정체성에 대한 학문적 논란은 교파가 운영하는 곳에서도 다양성을 인정하나, 반드시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는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예술에 있어서도 통일성이 없으면 작품으로 인정을 받지를 못한다고 한다. 다양성의 통일성이란, 동질성 ? 일관성 ? 총체성이라고 하는 주어진 법칙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통일성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공감이라는 공통점이 반드시 뒤따른다. 그런데 하물며 교파가 운영하는 교육현장에 다양성의 통일성이 결여된다면 그런 상황은 묵인하고 그냥 넘길 수가 없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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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의 과제를 두고 모두가 함께 노력하되, 그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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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의 현대적 의미는 구조의 점진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폭력적이거나 어떤 전복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럼으로 우리 교회의 개혁과제는 개혁주의 的 신학을 지키는 문제와 정체성 확립을 훼손하려고 하는데 대해 초점을 맞추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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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상동 목사님을 대면해서 그분의 신앙인격을 경험해 보지 못한 먼 후예들에게 우리는 그분을 고무 찬양하라고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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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평생 지켜본 삼일교회의 김은도 장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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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이 내가 약한 그것을 자랑하노라고 했듯이, 그분 또한 한사람의 연약한 인간으로서 [주여!] 하시면서 늘 울부짖었고 [나는 죄인입니다]를 반복해서 기도하셨다. 교인들이 열 가지 스물 가지를 지적하면 [형님! 나는 그보다도 부족한 것이 더 많습니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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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만 나의 주장은 종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항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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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우리는 그분이 그때 거기 없었다면 우리도 여기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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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기회에 우리는 우리 교회의 역사성을 보존하고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할 필요성이 확보된 샘이다. (2010.5.11.코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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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양낙흥)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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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60....................'..........'............
: : : ....................
: : : 88)양 낙 흥*
: : : 1. 머리말
: : : 대한예수교장로회 세칭..고신측' 사람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한국 그
: : : 리스도인들은 현재의..고신' 교단이 1950년대 초 한국 장로교 제1차 분열
: : : 로 말미암아 생긴 교회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칭..합동측'이라는 교
: : : 단은 1959년 한국 장로교 제2차 분열의 결과로 생긴 두 교단1) 가운데 하
: : : 나인..승동측'의 후신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으
: : : 로부터 약 반 세기 전인 1960년..승동측'과..고신측'은 교단을 연합하여
: : : 한 교단을 이룬 적이 있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소위..합동' 교단은 1963
: : : 년까지 약 3년 간 존속되었다. 그러다가 그것은 1963년 구..고신측'의 상
: : : 당 부분이 재분리해 나감으로..합동측'이라는 속칭은 재분리해 나간 구
: : : ..고신측'의 상당 부분을 제외한 남은 그룹, 즉 구..승동측' 전부와 구..고
: : :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88)
: : : 1) 현재의..통합'측 장로교단의 전신인..연동측', 그리고 현재의..합동측' 장로
: : : 교단의 모태인..승동측'이 그것들이다.
: : : 1. 머리말
: : : 2. 합동의 배경
: : : 3. 합동의 성사
: : : 4. 고려신학교 복구와 고신측의 “환원”
: : : 5. “환원”에 대한 반대
: : : 6. 맺음말
: : :
: : : 140 연구논문
: : : 신측' 잔류파로 이루어진 집단에게 돌아갔다. 재분리해 나간 구..고신측'
: : : 상당 부분으로 이루어진 그룹은..고신측'이라는 명칭을 다시 찾아 사용하
: : : 면서 자신들이..합동' 이전의 고신측 교단을 그대로 회복했다는 의미에서
: : : 그 재분리가..환원'이라고 주장했다.
: : : 피상적이고 파편적이거나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진술들을 제외하고 이
: : : ‘합동'과 재분리의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자세한 진상은 거의 반 세기동
: : : 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2) 양측 다 별로 명예롭지 못한 과거를 가능한
: : : 한 기억하거나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한국교
: : : 회사에서 무려 3년이나 지속되었던 그..합동'의 사실은 대다수 한국 장로
: : : 교인들에 의해 마치 역사 속에 아예 존재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 : : 되었다. 우리는 어언 반 세기 전에 있었던 이..합동'과..환원' 사건을 어
: : : 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허순길은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 자체를 부정
: : : 적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승동측 지도자들이 “정략적인 성향”의 소유자들
: : : 이며3) “신앙생활의 실상”이 고신측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 : : 신학과 교리가 같은 것은 사실이나 “삶이 다르며” 승동측의 “삶이 신앙고
: : : 백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양측이 교회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불가
: : : 능”하다는 것이었다.4) 허순길은 또..합동'으로부터 구 고신측의 “환원”을
: : : 축하한다. 교회 분열을 통해 또 하나의 장로교단이 형성된 것을 그는 주의
: : : 자비하신 섭리로 해석한다. 환원은 하나님께서 “교회[고신]와 [고려]신학교
: : : 를 없애려는 어두운 세력”을 이기시고 참된 교회와 가장 위대한 신학교를
: : : 다시 찾으신 사건이라 기뻐하는 것이다.5) 한편 남영환은 “합동은 바람직”
: : : 했고6) 환원도 그러했다는 입장에 서 있다. 구 고신측의 “환원”이 한국의
: : : 2) 이것에 대한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다소 일방적이기는 하나, 남영환,..한국
: : : 교회와 교단 : 고신 교단사를 중심으로.., 소망사, 1988, pp. 483~502 ; 허순
: : : 길,..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 1946~1996..,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1996, pp.
: : : 139~170이 있고, 주로 회의록, 선언문, 취지문, 해명서 등을 수집해 놓은 자료
: : : 집 성격의 것으로, 정규오,..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 교회사(상).., 한
: : : 국복음문서선교회, 1994, pp. 261~285가 있다.
: : : 3) 허순길,..50년사.., p. 145. 그러나..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를 통해 승동측
: : : 과의 합동에 임하는 고신측의 동기가 처음부터 불순했다는 사실을 가장 선
: : : 명하게 지적한 사람은 바로 허박사 자신이었다.
: : : 4) 허순길, 위의 책, p. 145ㆍ149ㆍ156.
: : : 5) 허순길, 위의 책, p. 170.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1
: : : 개혁주의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것이다.7) 과연 구
: : : 고신측의 “환원”은 빛의 세력의 회복이요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의 소생이
: : : 었는가? 아울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양 교단은 왜..합동'을
: : : 생각하게 되었는가? 구 고신측의 상당 부분은 왜..합동' 교단을 이탈하여
: : : 독자적인 교단을 만들었는가?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 분열이었는가? 이
: : : 분열의 책임은 어느 측에 있는가? 본고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
: : : 고자 하는 시도이다.
: : : 오늘 한국교회에는 장로교단들이 백 수십 개를 헤아릴 정도로 교회 분
: : : 열과 교단 난립이 극심하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 : : 분열을 극복하고 교회의 일치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
: : : 러한 상황 속에서, 1960년대..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과 재분리의 역사
: : : 를 고찰하는 것은 여러 점에서 시사적이다. 양 교단 합동과 재분리 사건의
: : : 발단과 진행 및 결말의 과정을 자세히 고찰할 때 우리는 어떤 경우에 교
: : : 단..합동'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지, 따라서 교회 일치를 시도할 때 그것
: : : 을 어떠한 동기에서 시도해야 하며 어떤 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에
: : : 대한 교훈을 얻게 된다.
: : : 2. 합동의 배경
: : : 1959년 제44차 대전 총회에서 연동측과 결별한 승동측은 내부 수습에
: : :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60년 8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한 승동측 목
: : : 사들이 고신측 목사들과 만나자는 제의를 해 왔다. 양측이 만난 자리에서
: : : 박형룡은 “눈물을 흘리면서 1947년에 한상동 목사와 헤어진 것은 자신이
: : : 크게 잘못 생각하였던 것”이라 토로하면서 양측이 힘을 합쳐 “개혁주의
: : : 보수 신학을 위해 새로이 출발하자고 간곡히 제의”했다.8) 두 교단의 “합
: : : 동”을 전격적으로 제의했던 것이다. 박형룡측과 헤어져 고신측 교회인 서
: : : 울중앙교회에 다시 모인 한상동 일행은 “오늘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그
: : : 6) 남영환, 앞의 책, pp. 490~491.
: : : 7) 남영환, 위의 책, p. 501.
: : : 8) 남영환, 앞의 책, pp. 470~471.
: : :
: : : 142 연구논문
: : : 들보다 무엇이 낫다고 하겠느냐는 소리에 모두가 동감”했다.9) 그때부터
: : : 합동은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양측 지도자들은 “신학과 신앙이 동일한” 두
: : : 교단이 나뉘어져 있을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합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 : : 뜻”이라 강변하면서 추종자들을 교회 일치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불과 서
: : : 너 달만에 양 교단의 합동이 이루어졌다. 양측이 이처럼 합동을 서두른 이
: : : 면에는 각자가 처한 난감한 상황들이 작용했다.
: : : (1) 승동측의 곤경
: : : 후에 승동측으로 불리게 된 복음주의연맹(NAE) 측의 대부 박형룡 박사
: : : 와 그의 추종자들은 삼천만환 사건으로 인해 도덕적 이미지에 상당한 타
: : : 격을 입었다. 비록 대외적으로는 연동측과 결별의 주된 이유가 세계교회협
: : : 의회(WCC) 가입을 둘러싼 신학적 문제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박
: : : 형룡의 삼천만환 사건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 : : 서로 정당성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측 사이에서 주한 외국 장로교 선교
: : : 부들이 한결같이 연동측을 지지하고 그 편으로 가 버렸다. 즉 한국 장로교
: : : 선교 초기인 19세기 말부터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
: : : 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그리고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승동측과 연동측
: : : 의 대립 속에서 일제히 연동측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선교사들과 그
: : : 들의 자금에 의해 운영되던 신학교, 대학교, 언론사 등 모든 교회 계통 기
: : : 관들이 연동측으로 넘어 갔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승동측으로서는 결정적
: : : 인 타격이었다. 당시까지 신학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한국 장로교회에 절대
: : : 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등 외국 장로교회들이 이제 대한예수
: : : 교장로회의 정통성이 승동측이 아닌 연동측에 있다고 선언하고 나섰던 것
: : : 이다. 국가든 교회든 정부의 합법성에 대한 국제적 인정이란 그 정통성과
: : : 관련하여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승동측은 이제 국제적 인정을 상
: : : 실하고 고립되어 버렸다.
: : : 선교사들이 승동측에 등을 돌린 것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박형룡에게 커
: : : 다란 심리적 타격을 안겨 주었다. 1948년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와 결별하고
: : : 상경했던 서너 가지 이유들 중 하나는 주한 4대 장로교 선교부(미남장로교,
: : : 9) 남영환, 위의 책, p. 471.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3
: : : 미북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들을 모
: : : 두 배제하고 오직 미정통 장로교회와만 관계를 가지자는 한상동의 주장에
: : : 대한 불만 때문에 그는 서울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
: : : 다. 주한 4대 장로교 선교부가 속한 본국의 교회들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지
: : : 도적 회원 교회들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1920~30년대에 있었
: : : 던 미장로교 내의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의 전말을 누구보다 소상히
: : :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누구 못지않게 보수적 근
: : : 본주의 노선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은 시종일관 포용적인 국제
: : : 관계를 주장해 왔다. 그러한 포용적 국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그는 그들
: : : 로부터 막대한 재정 지원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에 의해 신학교 부지의
: : : 구입과 건축을 계획할 수 있었다.10) 그런데 자신과 그처럼 친밀한 관계를
: : : 유지해 오던 주한 외국 장로교 선교부들 전부가 1959년 총회 이후 승동측
: : : 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연동측의 손을 들어 주었다.
: : : 박형룡의 승동측으로서는 무언가 국면 전환을 위한 돌파구를 찾아낼 필
: : : 요가 절실했다. 집단의 세력을 보강하고 명분을 만회할 수단이 절실히 요
: : : 청되는 시점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고심 끝에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보수
: : : 대연합이었다. 즉 10년 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축출된 고신측을
: : : 회유하여 그들과 합침으로써 당면한 난국을 극복해 보자는 것이었다. 승동
: : : 측으로서는 고신측과의 합동을 통해 몇 가지를 기대할 수 있었다. 첫째,
: : : 승동측이 보수 신학의 선봉으로 알려진 고신측과 합하여 한국 장로교회를
: : : “보수 대 진보”로 재편성함으로 일반 앞에 1959년 장로교회 분열의 일차
: : : 적 이유가 박형룡 삼천만환 사건 같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교회
: : : 협의회와 관련된 “신신학” 혹은 “에큐메니칼” 운동 등의 신학적인 것이었
: : : 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11) 그것을 통해 승동측 지도부는 연동측과의
: : : 분열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재결합에 대한 “청년들, 소장파 목사들, 부인
: : : 들” 등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12) 둘째, 순교적 전통을 가진 고신측과
: : : 의 합동은 박형룡의 삼천만환 사건으로 추락된 승동측의 도덕적 이미지를
: : : 10) 허순길,..50년사.., p. 143.
: : : 11) “사설 : 승동측은 왜 고신측과 합하려는가?,”..기독공보..1960년 11월 14일.
: : : 12) “사설 : 고신승동 양파의 합동은 가능한가?,”..기독공보..1960년 10월 24일
: : : ; “사설 : 승동측은 왜 고신측과 합하려는가?,”..기독공보..1960년 11월 14일.
: : :
: : : 144 연구논문
: : :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었을 뿐 아니라 연동측과의 정통성 경쟁에서 승동측
: : : 의 명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셋째,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 : : 있었다. 고신측은, 작은 교단이기는 하나 교리적 정통을 표방하는 미정통
: : : 장로교회(OPC)와 친선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승동측이 고신측과 합동
: : : 하게 될 때 그들은 최소한 하나의 외국 교회와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13)
: : : 미정통 장로교회와 교류함으로써 그들은 미국 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 연
: : : 동측 손을 들어준 주한 장로교 선교부들을 신학적 자유주의로 몰아 버리
: : : 고 전년도 한국 장로교 분열에 관한 그들의 판단을 무시해 버릴 수 있었
: : : 다.
: : : (2) 고신측의 곤경
: : : 한편 당시, 공교롭게 고신측도 승동측 못지않게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
: : : 었다. 허순길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고신측이 “탈진 상태”에 놓이게 되었
: : : 던 첫번째 이유는 경기노회 문제 때문이었다. 고신측 경기노회는 일제 시
: : : 대 신사참배의 과오를 범한 사람들에 대해 교단이 좀더 관대한 태도를 취
: : : 할 것을 주장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뿐 아니라 그 노회의 주류는
: : : 교회당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한 세속 법정 소송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박
: : : 윤선과 견해를 같이 하고 있었다.14) 그리하여 충현교회 김창인, 동도교회
: : : 최훈, 내수동교회 박희천 목사 등 경기노회의 지도급 인사들을 비롯한 19
: : : 명의 경기노회 목사들이 교단으로부터 “행정 보류”를 선언하고 자신들을
: : : “보류 노회”로 부르는 상태에 있었다.15)
: : : 고신측이 승동측의 합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두 번째 이유는 박윤선
: : : 13) 허순길,..50년사.., p. 144.
: : : 14) 그들과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고신측의 주류들 사이에는 지방색의 차이도
: : : 작용하고 있었다. 박윤선 교수의 소송 반대 주장에 동조하여 1950년 대 말
: : : 고신측으로부터 행정 보류를 선언함으로 경기노회..보류측'이라 불렸던 고신
: : : 측 경기노회 주류에 속했던 김창인, 최훈, 박이천 목사 등은 대부분 이북 출
: : : 신들이었던 반면 한상동을 위시한 주남선 등 고신측의 주류들은 대부분 경남
: : : 출신이었다.
: : : 15) Bong Rin Ro, “Division and Reunion in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 : : 1959~1968,” Th.D. dissertation, Concordia Theological Seminary, St, Louis, 1969.
: : : p. 79.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5
: : : 교수의 이탈 후 교단의 여론이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식일 문제로
: : : 박윤선 교수를 떠나보낸 고려신학교는 학사 일정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못
: : : 하는 등 학교 운영이 파행을 겪고 있었고 학생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 : : 박윤선을 추방하는 데 동참했던 교단의 일부 지도급 목사들을 제외한 대
: : : 다수 고려신학교 출신 목사들과 일선 교회의 중진 교우들 중 “박윤선 목
: : : 사를 지지하는 세력”은 과거의 자기들 스승을 사소한 사유로 교단과 신학
: : : 교에서 떠나게 만든 교단 지도부의 처사를 수긍하기 어려웠다.16) 박윤선
: : : 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상동은 외국에 유학 중인 고신 출신 교수 후보
: : : 자들, 즉 홍반식ㆍ오병세ㆍ이근삼 세 사람에게 신속한 귀국 가능성을 타진
: : : 했으나 그들은 당장, 혹은 조만간 귀국할 정도로 학위 취득 과정이 진척되
: : : 지 못했다고 회신해 왔다. 따라서 박윤선의 공백으로 인해 야기된 신학 교
: : : 육의 파행 상태는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될 길이 없어 보였다.17)
: : : 이처럼 고신측 지도부가 사면초가 상태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던
: : : 바로 그 무렵인 1960년 8월 승동측이 고신측에 양측의 합동을 제의해 왔
: : : 다.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승동측 지도자들이 “눈물로 호소하면서” 보수
: : : 대연합을 호소해 왔던 것이다. 자력으로 신학교를 운영하고 교단을 이끌어
: : : 가기에 역부족임을 실감하기 시작한 고신측 지도부로서는 박윤선 축출의
: : :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들에 대한 교단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그 난관을 극
: : : 복할 수 있는 기막힌 호재를 만난 셈이었다. 고신측이 승동측의 합동 제의
: : : 에 기꺼이, 그리고 그처럼 신속하게 응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이 처한
: : :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는 말이다.18) 남영환이 지적하고 있듯
: : : 이, “한상동 목사가 승동측과의 합동을 성급하게 추진한 것은 박윤선 교장
: : : 16) 송상석,..법정 소송과 종교재판.., 경남법통노회, 1976, p. 71.
: : : 17) 남영환, 앞의 책, p. 379.
: : : 18) 남영환은 또 고려측이 승동측 제의를 수락하게 되었던 배경과 관련하여 본
: : : 래 고려측이 독자적 교단으로서의 존립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
: : : 다고 지적한다. “고신 교단도 내부적으로 몹시 시달렸고 박윤선 목사도 떠난
: : : 뒤라, 우리의 본래 목표가 교단 형성이 아니라 개혁주의 보수 신학을 이
: : : 땅에 확립하자는 데 있었던 만큼,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여타 지도자들이 과
: : : 거를 회상하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고 나와서 따로 앉았던 고신측 8명
: : : 의 목사들도 이 때는 한 사람도 이의가 없었다.”(남영환, 앞의 책, p. 476) 고
: : : 려측 지도자들 자신들조차 별개의 교단으로서의 고려파의 존립을 한국 교회
: : : 사 속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 : :
: : : 146 연구논문
: : : 의 고려신학교 사임 이후 야기된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처방”이었다는 것
: : : 이다.19) 송상석의 표현을 빌면, “신학교육기관인 고신 내에 본의 아닌 논
: : : 쟁이 표면화되어 고신 종래의 지도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될 무렵에 합동문
: : : 제가 대두되었으므로 조기 합동을 이루게 되었다.”20)
: : : 3. 합동의 성사
: : : 비록 조산이기는 했었지만 양측의 합동 과정에서 절차적 합법성은 온전
: : : 히 확보되었다. 1960년 9월 20일 부산 남교회에서 모인 고려파 제10회 총
: : : 회는 합동추진연구위원 9명을 선정하여 승동측과의 합동을 검토하도록 결
: : : 의했다.21) 총회가 파한지 약 한 달 뒤인 동년 10월 25일부터 26일까지 양
: : : 일 간 대전중앙교회에서 승동측 합동추진위원회 양화석 위원장 외 9인과
: : : 고려측 합동연구추진위원회 황철도 위원장 외 8인이 회합을 가지고 합동
: : : 원칙, 합동 방안, 합동 시일 등을 논의하고 확정했다.22) 먼저 “합동 취지
: : : 및 선서문”이 작성되었는데 그것을 통해 그들은 두 교단이 합동하는 이유,
: : : 혹은 합동해야 하는 당위성을 밝혔다. 한 마디로 말해, 양측은 “신앙과 신
: : : 학이 같으므로” 합동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감격적이고 시
: : : 적인 말들로 표현되었다.
: : : 때가 되매 친구는 찾아오다. 신앙의 동지, 보수 사상의 뜻 깊은 일꾼들 우
: : : 리는 큰 힘을 얻었고 큰 기쁨과 큰 위로의 선물을 담뿍 받게 되었다. 질이
: : : 같으면 서로 합하고 성이 같으면 서로 응하는 것이 물리학의 원리라면 신앙
: : : 이 같고 신학 체계가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똑 같은 두 총회가 함께 뭉치지
: : : 못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이제는 전진이 있을 뿐이고 후퇴는 없을 것이
: : : 다.……우리는 우리 겨레 앞에서도 솔선수범코자 주 안에서 진리로 하나되는
: : : 두 총회 합동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23)
: : : 19) 남영환, 앞의 책, p. 491..497.
: : : 20) 송상석,..법정 소송과 종교재판.., 경남법통노회, 1976, p. 74.
: : : 21)..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 제10회록.., p. 267. 합동추진연구위원은 황철도
: : : ..윤봉기..한상동..박손혁..송상석..추국원..전성도..조수완..남영환이었다.
: : : 22) Ibid., pp. 286~289.
: : : 23) 정규오, p. 270.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7
: : : 합동의 명분은 타당하고 거창했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들이 진
: : : 리 안에서 연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 : : “합동 취지 및 선서문”은 자신들의 “합동”된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
: : : 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유일한 집단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대한예수교장
: : : 로회 제45회 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제1회 총회로 창립된 총회
: : : 로부터 일본 교단과 신사참배를 제외한 동일성을 유지하고 그 전통을 계
: : : 승한 유일한 대한예수교장로회 법통 총회임을 선언한다.” 이것이 의미한
: : : 바는 물론, 연동측 총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정통성을 갖지 못한다는 말
: : : 이었다.
: : :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1952년부터 거의 10년에 걸쳐 대한 예장 주
: : : 류측 역사와 별개로 진행되었던 고신 교단의 역사를 과연 어떻게 처리할
: : :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이원적인 사실(史實)”로 수록한
: : : 다는 다소 어색한 방식으로 해결되었다.24) 당시로서는 그 이상 특별한 묘
: : : 안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합동 이전에 해결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
: : : 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950년대 초 한국 장로교 주류가 고신측을 총
: : : 회로부터 축출했던 과거사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양측의 합동추진위
: : : 원들은 “1951년 5월 25일 제36회 총회의 경남법통노회에 대한 결의와 총
: : : 회장의 포고문은 이를 취소한다”는 간단한 말로 처리하고 넘어가 버렸
: : : 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측은 그것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 : : 않았다. 아마도 합동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그것에 걸림돌이 될 까다로
: : : 운 태도를 취하는 것을 자제했을 것이다.
: : : 그러나 과거사와 관련하여 고신측이 자신들의 행위에 일관성을 가지고
: : : 자 했다면, 그리고 신사참배 죄에 대한 통회자복과 자숙을 그토록 집요하
: : : 게 요구했던 과거의 자신들의 처신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 : : 한, “합동” 전에 꼭 짚고 넘어 갔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해방 직후부
: : : 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5년 간 고신측이 계속해서 문제시해 왔던
: : : 바 일제하 한국 장로교의 신사참배 죄과 청산에 관한 것이었다. 한상동을
: : : 필두로 한 고신측은 애초부터 신사참배의 과오를 범한 목사들이 두세 달
: : : 24) 정규오, p. 271.
: : : 25) Ibid.
: : :
: : : 148 연구논문
: : : 간 기도원에서 참회하면서 자숙하는 일종의 권징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 : :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고신측은 이제 승동측과의 합동 전에 그들의
: : : 신사참배 과거사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고신측은 이제 신사
: : : 참배의 과거사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천명한 셈
: : : 이 되었다.
: : : 당시 합동에 대해 공식적 반대를 표명한 개인이나 단체는 없었다. 양측
: : : 의 절대 다수 구성원들이 합동에 찬성했다. 고려측은 총회 정회 후 노회의
: : : 수의(遂意)를 거쳤는데 모든 노회가 그 연합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26) 합
: : : 동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강변하는 일에
: : : 있어서는 한상동 목사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해 11월 28일 부산대학교
: : : 학생신앙운동 주최로 부산 남교회에서 열린 합동강연회에서 한상동 목사
: : : 는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동해야 할 이유”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 자
: : : 리에서 그는 그 전 해 대전 총회에서 승동측과 연동측이 분열된 것을 “분
: : : 명히 하나님이 하신 일”로 단정했다. 장로교회의 대분열이 “한국에 정통
: : : 신앙을 그대로 전수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었다. “한국교회
: : : 의 신앙 보수를 위해서” 그는 고려측과 승동측 “양 진영이 합해야” 한다
: : : 고 역설했던 것이다.27) 합동은 불법이나 외부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
: : : 이 아니라 쌍방의 자발적 합의에 의해 성사된 것이었다. 신설된 세칭 “합
: : : 동” 교단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연합된 합법적 교단이었음을 부인할
: : : 수 없다.”28)
: : : 전술한 바와 같이, 12월에 고려측과 승동측이 최종적으로 합동 총회를
: : : 개최하기 전인 10월 양측 합동추진위원들이 대전에서 준비 모임을 가지고
: : : “합동 서약과 원칙들”이라는 이름 하에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한 합의에 도
: : : 달한 바 있었다. 이른바 “합동 방안”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제3항에 있는
: : : 신학교 문제에 대한 합의였는데 그 본래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신학교
: : : 일원화: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로 하고 동수의 이사를 선출하
: : : 26)..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제10회록.., p. 293. 1960년 12월 13일 서울
: : : 북창동의 흥천교회당에서 열린 고려측 제10회 총회 속회에서 보고된 노회 수
: : : 의 결과는 총 6노회에서 합동에 찬성한 표가 178표, 반대표가 불과 8표, 기권
: : : 이 2표로 거의 만장일치였다.
: : : 27)..파수군..105호, 1960년 12월호, pp. 61~62.
: : : 28) 박응규,..한부선 평전.., 그리심, 2004, p. 424.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49
: : : 여 경영케 한다.” 그리하여 합동 총회가 개최되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 : : 양측은 총회 밑에 단 하나의 신학교를 두는 데 합의하고 있었다. 그 합의
: : : 를 볼 때 고신측은 고려신학교를 포기할 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
: : : 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신학교 설립자로서 사실상 고신측의 절대적 지도
: : : 자였던 한상동 목사는 합동에 임하면서 고려신학교의 존재를 절대적인 것
: : : 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 : 그러나 합동의 마지막 순간, 정략적 계산이 빨랐던 송상석 목사가 신학
: : : 교 단일화 합의에 제동을 걸었다. 양측의 합동 총회가 열리기 몇 시간 전
: : : 인 1960년 12월 13일 오후, 고신측 10회 총회의 2차 속회가 서울 흥천교회
: : : 당에서 열려 그 날 저녁에 있을 합동 총회를 위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
: : : 었다. 합동추진위원회가 제시한 “취지 및 선서문”을 검토하던 송상석을 비
: : : 롯한 일부 고신측 인사들이 그 중 신학교에 대한 합의 부분에 주목했다.
: : :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를 운영한다는 문구가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
: : : 교에 폐합한다는 의미임을 간파한 그들은 그것을 총회 직영으로 “일원화”
: : : 한다는 문구로 수정하여 제출했다.29) 합동 이후 구 승동측이 고려신학교
: : : 의 폐쇄를 시도할 경우, 합동 서약에 명시되어 있는 신학교 “일원화”란 용
: : : 어의 의미는 총회가 한 이사회 하에서 서울 총신과 부산 고신 양자를 모
: : : 두 운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고려신학교의 존립을 유지하려 했던
: : : 것이다.
: : : 양측이 부랴부랴 서둔 결과 드디어 합동이 공식화되는 날이 왔다. 1960
: : : 년 12월 13일 오후 5시 30분 서울승동교회에서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
: : : 총회가 열렸다. 그리하여 승동측이라는 교단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
: : : 다. 마찬가지로, 고신측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단도 이 땅 위에서 완전히
: : : 사라졌다. 8월에 승동측이 고려측에 교회 연합을 제안한지 불과 넉 달만의
: : : 일이었다. 양측은 각자의 독자성을 기꺼이 포기함으로써 세칭 “합동”이라
: : : 는 하나의 새로운 교단을 만든 것이었다. 합동 총회 임원으로는 총회장 한
: : : 상동, 부회장 김윤찬 목사가 당선되었다. 서기, 회록 서기, 회계로서 정(正)
: : : 은 승동측 임원을, 부(副)는 전 고신측 임원을 추대키로 했다. 신학교 이사
: : : 장에는 노진현, 부이사장은 한상동이 선출되고 양측에서 각각 12명의 이사
: : : 29)..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총회 제10회록.., p. 294.
: : :
: : : 150 연구논문
: : : 를 인준했다.30)
: : : 4. 고려신학교 복구와 고신측의 “환원”
: : : 박형룡은 한 교단 내에 하나 이상의 신학교가 존재할 때 그것이 교단
: : :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 : : 한국교회의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신학교가 단일화되지 않으면 교단
: : : 의 화합이 어렵습니다.”31) 그리하여 호남노회와 충청노회를 비롯한 9개 노
: : : 회는 1961년 9월에 소집될 총회에 신학교 단일화의 시행을 촉구하는 헌의
: : : 안을 제출해 두고 있었다. 합동 후 1년 만에 열린 제46회 총회에서 한상동
: : : 목사는 전년도에 이어 총회장으로 2년째 연임되는 예외적 대접을 받았다.
: : : 반면 총회 나머지 임원 선출에서는 구 고려측 인사들 중 오직 전성도 목
: : : 사만이 회록 서기로 선출되었을 뿐 다른 자리는 모두 구 승동측 인사들에
: : : 게 돌아갔다.32) 공천부 보고는 구 고신측 총대들의 맹렬한 반대로 공천부
: : : 로 회부되었는데, 상비부 총 15부 192명 위원들 중 구 고신측 출신은 21명
: : :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서로 알려진 정치부에 구 고신측 인
: : : 물은 단 한 명이 들어가 있었고 고시부에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33)
: : : 그것은, 허순길이 지적했듯이, 구 승동측 총대 수가 구 고신측 총대 수보
: : : 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니 어느 정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었
: : : 다.34) 그러나 이 때부터 고신측의 불만이 고조되어 경남노회의 정 모 목
: : : 사는 “불법한 총회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퇴장해 버렸다.35) 고신측
: : : 인사들 사이에서 “합동 후회론”이 터져 나왔다.36) 총회가 “신학교를 연내
: : : 30)..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합동) 제45회 속회록.., p. 68.
: : : 31) 1962. 4. 20. 박형룡과 명신홍이 정통장로교 한국 선교부에 보낸 편지. 박응
: : : 규,..한부선 평전.., p. 422에서 재인용.
: : : 32)..대한예수교장로회 제46회 총회록.., pp. 6~7.
: : : 33) “고승측 총회 일대 소란 : 합동 후회론 등 제기되며 회무 진행,”..기독공
: : : 보..1961년 10월 2일.
: : : 34) 허순길,..한국장로교회사.., p. 454.
: : : 35) “고승측 총회 일대 소란 : 합동 후회론 등 제기되며 회무 진행,”..기독공
: : : 보..1961년 10월 2일.
: : : 36) Ibid. ; “부산총회 스냅: 합동 후회론,”..기독공보..1961년 10월 2일.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1
: : : 로 단일화”하기로 가결하자 구 고신측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 : : 그 해 12월 28일 신학교 이사회는 고려신학교의 단계적 폐쇄를 통한 신
: : : 학교 단일화를 명령했다. 사립 고려신학교를 서울의 총회신학교에 흡수 통
: : : 합시키라는 이사회의 지시에 순응하여 부산 고려신학교와 서울 총회신학
: : : 교 교수들은 서울에서 연합 교수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합의했
: : : 다. 첫째, 서울 총신은 본교로 하고 부산 고신은 분교로 한다. 둘째, 부산
: : : 분교에서는 더 이상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으며 고신에 재학 중인 졸업반
: : : 학생들은 서울 총신으로 올라가서 공부하고 거기서 졸업하게 한다(부산 고
: : : 신의 즉각적 폐쇄가 아니라 당시 재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그 존속을 인정함으로
: : : 써 경남노회의 요청을 상당 부분 들어주었던 것이다). 셋째, 교장 제도를 윤번
: : : 제 교수 회장제로 바꾼다. 연합 교수회의 이러한 결정에 따라 박형룡 박사
: : : 가 먼저 1년간 교수회장을 맡았고 부산 분교장에는 박손혁 목사가 취임했
: : : 다. 그리고 새해부터 안용준, 오병세 교수는 서울 본교에서, 홍반식, 이상
: : : 근 교수는 부산에서, 그리고 한상동 목사는 서울, 부산 두 곳 모두에서 가
: : : 르치도록 결정했다.
: : : 고려신학교 재학생들 대부분은 신학교 폐합에 반발했다.37) 1962년 3월
: : : 신학기를 맞아 등교한 이들은 교문에 고려신학교라는 간판이 제거되고
: : :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라는 새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상동
: : : 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총회장으로, 그리고 동시에 신학교 이사회 부이
: : : 사장으로 있었던 그가 “학생들의 간절한 호소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
: : : 신학교 폐교를 통한 신학교 단일화를 앞장서서 추진했기 때문이었다.38)
: : : 그러나 이미 이루어진 총회, 이사회, 합동교수회의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
: : : 었다.
: : : (1) 한상동 목사의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
: : : 1962년 9월 20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합동 후 두번째 총회(제47회)가
: : : 37) 그 해 가을 한상동 목사가 전격적인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을 한 후 찬반 의
: : : 견이 분분해지자 학생들은 여론 조사를 했다. 결과는 복교 찬성 53명, 반대 6
: : : 명, 중립 65명이었다. 허순길,..한국장로교회사.., p. 464.
: : : 38) 허순길,..한국장로교회사.., p. 461.
: : :
: : : 152 연구논문
: : : 개최되었다. 임원 선거 결과 한상동 목사는 총회장 직에서 물러나고 구 승
: : : 동측 인사들인 이환수ㆍ박찬목ㆍ정규오 목사 등이 각각 총회장, 서기, 부
: : : 서기 등의 요직을 석권하게 되었다. 구 고려측 인사로 임원에 선출된 사람
: : : 은 회록 서기 전성도 목사뿐이었다.39) 총회가 파한 후 한상동 목사는 “고
: : : 려파 총회를 복구 환원하겠다”는 말을 측근에게 흘리고는 부산으로 내려
: : : 가 버렸다.40) 총회가 폐회된 지 보름 쯤 지난 1962년 10월 13일 경 한상
: : : 동은 부산 시내에 있는 몇몇 목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느닷없이 고려신학
: : : 교를 복구하겠다고 선언했다.41) 전혀 뜻밖의 발표에 충격을 받은 대다수
: : : 참석자들은 그것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42) 그것은 이미 가능하지도 적
: : : 법하지도 그리고 순리적이지도 않은 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럼
: : : 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나흘 후인 17일, 한상동 목사는 총회신학교 부산
: : : 분교 (구 고려신학교) 경건회를 마친 자리에서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시절
: : : 을 마감하고 합동 전의 고려신학교로의 복귀한다고 선언하면서 한 주일
: : : 후인 23일부터 모든 학생들은 고려신학교 학생으로 등교하라고 지시했
: : : 다.43)
: : :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단지 고려신학교의 복구만이 아니라 “승동측으로
: : : 부터 고신측의 환원을 의미하는 첫 신호”로 받아들여졌다.44) 고려신학교
: : : 복구를 선언한 바로 다음 날인 10월 18일, 한상동은 부산 시내에 있는 구
: : : 고신측 교역자들과 장로들을 부산 송도교회당에 소집하고 고려신학교를
: : : 복구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총회와 총회신학교가 부
: : : 패하여 “우리,” 즉 구 고신측도 동화 속화될 터이니 정화의 희망이 없다는
: : : 것이었다. 구체적인 예로서 그는, 총회신학교 시험에 부정 행위자가 있었
: : : 으며 기숙사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 : : 둘째, 총회신학교의 교수회장 윤번제가 교장제로 번복될 우려가 있다. 셋
: : : 39)..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록 11-2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부,
: : : 1971, p. 25.
: : : 40) 정규오, p. 275.
: : : 41) “고신 복교 계획을 포기 : 대의 명분 없다고 판단,”..크리스챤신문..1962년
: : : 11월 5일.
: : : 42) 김상도, “고려신학교 복교 운동의 전망,”..파수군..제129호, 1963년 4..5..6
: : : 월호, pp. 14~15.
: : : 43)..크리스챤신문..위의 글 ; 김상도, 위의 글.
: : : 44) 남영환, pp. 494~495 ; 허순길,..50년사.., p. 159.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3
: : : 째, 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의 삼천만환 사건에 대한 해명이 없다.45) 그
: : : 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구 고신측 지도자들은 그 세 가지 전부를 전혀 설
: : : 득력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장시간 논의 끝에 그들은, 한상동 목사의
: : : 제안이 “교파 분열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사설 신학교” 설립에 관한 것으
: : : 로서 고려신학교 복구의 “정당한 대의명분”이 없다고 결론지었다.46) 그들
: : : 은 대신 세 가지를 결의했다. ① 부산에 총회신학교 분교를 설립해 줄 것
: : : 을 총신 이사회에 건의한다. ② 고신 복구를 반대한다. ③ 교리 진리 문제
: : : 가 아닌 어떤 교회 분열도 반대한다.47) 심지어 구 고신측 목사와 장로들
: : : 다수조차 고신 복구가 순리적인 일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 : : 들은 그것을 시도하는 한목사에게서 “교회 분열” 시작의 조짐을 느끼고
: : : 있었다.
: : : 한목사가 고신 복구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접한 총회신학교 이사회는 부
: : : 산에서 긴급히 모임을 가졌다. 마침 한상동 목사가 대구에 출타 중이었기
: : : 때문에 그들은 회의 장소를 대구로 옮겨 한상동 목사를 초청한 가운데 황
: : : 철도 목사 사택에서 속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이사회는 그 전 해 12월
: : : 18일의 이사회 결정을 번복하여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를 폐지하지 않고
: : : 영구히 존속시키기로 결의하여 한상동 목사를 달래려 했다.48) 그러나 한
: : : 목사는 그 제안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1962년 10월 22일, 한상동은 옛 고
: : : 려신학교 이사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고신 복구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어
: : : 내려 했다. 그러나 심지어 전 고려신학교 이사들조차 한목사의 제안에 동
: : : 의하지 않았다.49) 실망한 한상동은 그 다음 날인 23일 전 고신 이사들을
: : : 앞장 세워 다시 부산 시내에 있는 구 고신측 교역자들을 삼일교회당에 긴
: : : 급 초청했다. 모임에 참석한 자들이 고신 복구안을 두고 투표한 결과는 찬
: : : 성 7표, 반대 21표로 반대가 찬성의 무려 3배에 달했다.50) 구 고신측 목회
: : : 자들의 의향을 확인한 바로 그날 밤 과거의 고신 운영 주체였던 구 고신
: : : 이사회가 다시 자체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고신 복구 반대 7, 찬성 2로
: : : 45) 김상도, “고려신학교 복교 운동의 전망,” p. 15 ;..크리스챤신문..위의 글.
: : : 46)..크리스챤신문..위의 글.
: : : 47) Ibid., pp. 16~17 ;.... 크리스챤신문..위의 글.
: : : 48) Ibid., p. 17.
: : : 49) Ibid., p. 17.
: : : 50) Ibid ;..크리스챤신문..위의 글.
: : :
: : : 154 연구논문
: : : 반대가 압도적이었다.51) 그러나 그들은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의 유지에는
: : : 찬성한다는 입장을 정하고 해산했다.
: : : 구 고신측 목사 장로들 뿐 아니라 심지어 구 고신 이사들 절대 다수가
: : : 고려신학교 복구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상
: : : 동 목사는 신학생들이 고신 복구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내었다52)는 사실을
: : : 근거로 자기 의사의 관철을 강행했다.53) 한번 “뺀 칼을 다시 꽂을 수 없
: : : 다”는 명분 하에 한상동은 11월 5일 신학교 정문에 걸려 있던 “총회신학
: : : 교 부산 분교” 현판을 떼어 내고 “고려신학교” 현판을 걸었다.54) 다음날인
: : : 11월 6일 한상동 목사는 자신의 사회 하에 고려신학교 복교 예배를 인도
: : : 하면서 11월 20일부터 수업을 시작한다고 공포했다.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 : : 에서는 이상근.홍반식 두 교수가 수업을 진행 중이었으나 학생들은 자기
: : : 들 중 고신 복구를 지지하는 이들이 다수라는 사실을 근거로 두 교수의
: : : 수업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면서55)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와 고신 복구 반대
: : : 파들을 건물로부터 축출하려 했다. 한상동의 노선에 찬성하는 이들은 11월
: : : 5일 부로 학교 건물을 한상동 개인 명의로 등기 완료해 놓고 학교 건물이
: : : 한상동의 재산이니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는 건물에서 나가라고 요구했
: : : 51)..크리스챤신문..위의 글.
: : : 52) 1962년 10월 31일 고려신학교 학우회 이름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는데 5개 항
: : : 으로 된 그 성명서의 핵심은 “합동”이 유지되어야 하며 고려신학교는 복구되
: : : 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 본 장로교의 합동을 재확인하고 이를 고수한다. 2.
: : : 합동 원칙을 준수하며 신학교의 일원화를 재확인한다.” 즉 “합동을 재강조하
: : : 기 위하여” 부산 고려신학교를 폐쇄하지 말고 총회신학교와 “동등한 입장”에
: : : 두고 운영하는 것이 합동 당시 “일원화”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라는
: : : 말이었다. 그러나 이 성명서에도 모순이 있다. 학생들은, “구 고신 이사회는
: : : 고신 폐합 조치에 선봉이 되어 오늘의 결과를 초래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 : : 본교 (고신)를 완전 복구시켜 놓고 새로운 이사를 구성, 일체를 인계하시고
: : : 은퇴하실 것”을 요구함으로써 구 고신 지도자들인 고려신학교 전 이사들이
: : : 승동측과의 합동 시 고려신학교의 폐쇄에 동의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 : : 학생들은 또 박윤선을 다시 교수로 채용할 것을 요구했다. 총신대학교 100년
: : : 사 편찬위원회,..총신대학교 100년사.., 총신대학교, 2003, pp. 624~625. 한편
: : : 허순길은 학생들이 합동의 유지를 주문한 부분은 삭제한 채 고신 복구를 주
: : : 장하는 부분만 인용하고 있다, 허순길,..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p. 495.
: : : 53) 김상도, “고려신학교 복교 운동의 전망,” p. 17.
: : : 54)..크리스챤신문..위의 글.
: : : 55) 김상도, p. 17.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5
: : : 다.56)
: : : 부산 분교에서의 정상 수업 진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총회신학교 이사
: : : 장,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교수 및 교사(校舍)대책 위원들은 긴급 연석 회
: : : 의를 열고서 성명을 발표했다. 요지는 첫째, 합동 이후 양 교단의 재산은
: : : 합동된 총회의 소유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그러한 마당에 구 고
: : : 신 이사 몇 사람이 과거 고신 재산인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건물의 소유
: : : 권을 주장하여 부산 분교의 교수와 학생들을 폭력으로 추방한 것은 비양
: : : 심적일 뿐 아니라 불법적이라는 것,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당
: : : 한 처사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부덕한 일이므로 수업을 잠정적으로 미
: : : 정통장로교 선교사들의 부산 사무소 건물에서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미 정
: : : 통장로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건물을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를 위해 빌려
: : : 주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 사태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 : : 부산노회였다. 임시 노회로 모인 부산노회는 장시간 토론 끝에 고려신학교
: : : 가 불법이라고 규정했다.57) 한편 구 고신측 지도자들 중에 고려신학교 복
: : : 구에 반대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김상도는 파숫군에 쓴 글에서 고신 복
: : : 교의 부당성을 네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명분이 없다. 학교 문제는 교리
: : : 가 아닌 행정에 관한 일이다. 둘째, 복교 방법이 “불법적”이다. 셋째, 성경
: : : 적 원리에서 떠난 지도이다. 넷째, 고려신학교 복구는 “그 귀결점이 교회
: : : 분열”이다. 그는 칼빈의 교회론을 따라, 교리나 진리 문제가 아닌 교회 분
: : : 열은 “성경이 절대로 용납하지 아니하는 큰 죄”라고 지적했다.58)
: : : 한상동 목사는 이 때 이미 합동을 파기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던 것
: : : 으로 보인다. 그 무렵 부산노회 교섭위원과 총회신학교 이사 두 명이 한상
: : : 동 목사를 방문하여 합동 원칙인 신학교 “일원화”에 의하여 신학교 문제
: : : 를 해결함으로써 비극적 교회 분열을 막자고 권유했다. 그러자 한상동은
: : : 56) Ibid., pp. 17~18.
: : : 57) Ibid., p. 18.
: : : 58) Ibid., p. 21. 그러나 이 성명서를 발표한 지 7개월이 지난 1963년 6월에도
: : : 한상동 목사는 여전히 고신 이사직에 머물러 있었을 뿐 아니라 고신에서 교
: : : 수까지 하고 있었다. 김상도는 그것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전국 교회와 교인
: : : 들 앞에 책임있게 공표한 결의와 성명을 이렇게 휴지화하고 식언하면서도 진
: : : 리 운동이니 총회 부패 운운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한상동 목사만이 아니라
: : : 구 고신 이사 전원도 학생들의 성명서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대로 이사직을
: : : 유지하고 있었다.
: : :
: : : 156 연구논문
: : : 구 고신 이사회가 신학교 일원화 방식을 거부하기로 이미 결의했다고 말
: : : 하면서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인준해 주도록 노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즉
: : : 총신 이사회와 구별된 별도의 이사회 밑에서 고려신학교가 완전히 따로
: : : 운영될 수 있도록 총회의 인준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합동 시
: : : “일원화”란 용어를 통해 구 고신측이 신학교에 관해 관철하고자 했던 목
: : : 표보다 더 나간 것이었다. 합동 시에 송상석을 위시한 구 고신측이 신학교
: : : 의 “일원화”란 말로 의도했던 것은 한 이사회 관할 하에 총신과 고신 두
: : : 신학교가 존속하는 것이다.
: : : 한편, 학생들이 성명을 발표한 며칠 후인 11월 한상동 목사는 학생들의
: : :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다음의 문구가 포함된 성명서를 전국 교회 앞으로
: : : 발송한 바 있었다.
: : : 敎弟는 이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실책을 인정하고 고려신학교를 도로 찾
: : : 아 놓고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앉을 것을 당초부터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 : : 학생들 앞에서 그들의 성명서를 환영하여 이 사실을 공언한 바 있고 고신 이
: : : 사회에는 정식으로 사표까지 제출해 두었으니 곧 수리될 것으로 믿고…….
: : : 또 수리되지 않는다 해도 敎弟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결심이니 변치
: : : 않을 것입니다.
: : : 한상동이 사실상의 교회 분열을 의미하는 고려신학교 복구를 선언한 이
: : : 유는 무엇이었을까? 불과 2년 전에 합동을 결심했던 그가 마음을 바꾸게
: : : 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상황이 바뀌었다는 한상동
: : : 의 인식이 작용했다는 설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상동이 승동측과의 합
: : : 동을 결심했던 결정적 요인은 박윤선의 고신 이탈로 말미암아 신학교 운
: : : 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 : : 고신 출신 세 사람이 유학을 마치고 학위를 받아 돌아왔다. 홍반식과 오병
: : : 세가 1961년에 귀국하여 각각 서울 총회신학교와 부산 분교 교수로 일하
: : : 고 있었고 이근삼도 1962년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다. 말하자면, 이제 고
: : : 신 출신 교수들이 확보되었으니 다시 고려파들이 모여 독자적으로 신학교
: : : 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59)
: : : 둘째는 교권에 대한 애착설이다.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당시 고신 복구
: : : 59) 남영환도 그러한 사실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남영환, p. 498.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7
: : : 에 반대했던 어떤 목사는 한상동이 고신 복구를 원했던 이유들 중 첫 번
: : : 째는 “주도권”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즉 합동 초기에는 신학교 이사가 양
: : : 측 동수였으나 얼마 후 이사 구성 비율에 불균형이 나타났고 특히 한상동
: : : ㆍ한명동 형제가 이사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다.60)
: : : 한상동이 고신 복구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로 여러
: : : 관측자들에 의해 지적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1962년에 화란 유학을 마
: : : 치고 귀국한 한상동의 양자 이근삼 박사의 총신 교수 임용이 박형룡 교장
: : : 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사실이다. 남영환은 이근삼에게 총신 교수직이 부여
: : : 되지 않았던 것이 고려신학교 복구를 출발점으로 구 고신측 교회 다수가
: : : 재분리하게 된 “실제적 동기”들 중 하나였다고 적고 있다.61) 송상석도 동
: : : 일한 견해를 피력한다. 이근삼 목사를 총회신학교 교수로 채용해 달라는
: : : 제청이 이사회에서 거부당하자 한상동은 “느닷없이” 총신이 세속화되었다
: : : 는 구실을 제시하면서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62)
: : : 한상동 본인으로서는 정당성이 충분한 일이라 여겨 결행했을지 모르나
: : : 이근삼의 교수 채용 여부에 대해 그와 같은 깊은 관심이 없었던 다른 모
: : : 든 이들에게 있어 그의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은 돌연했을 뿐 아니라 상식
: : : 과 법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이루어진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개혁
: : : 주의 정통 신앙과 생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합리한 방법”으로 이루어
: : : 졌다는 것이었다.63) 그것의 불법성은 당시 홍반식ㆍ이상근을 비롯하여 그
: : : 직후에 있게 될 구 고신측 재분리에 가담하지 않고 합동된 교단에 잔류했
: : : 던 많은 구 고신측 목사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홍반식 교수는, 결국 최종
: : : 순간에 복교 대열에 합류하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그것을 “돌발적이고 비
: : : 합법적”이라 보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복교에의 동참을 주저했다.64) 그러나
: : : 60)..크리스챤신문..위의 글.
: : : 61) 그러면서도, 남영환은 구 고신측의 공식적 주장에 동조하여, “보다 근본 문
: : : 제”는 승동측의 “다수의 횡포”였다고 지적한다.
: : : 62) 송상석,..법정 소송과 종교재판.., 경남법통노회, 1976, p. 72.
: : : 63) 허순길,..50년사.., p. 147.
: : : 64) 홍박사가 고려신학교에 합세한 것은 복교 선언 후 여러 달이 지난 1963년 2
: : : 월 25일의 일이었다. 남영환, p. 497. 오병세, 박손혁, 이근삼 세 사람이 복교
: : : 에 합류한 것도 1962년 12월 17일이었으므로 고려신학교는 약 두 달 동안 교
: : : 수 없이 표류한 셈이었다. 그 학기는 거의 파행으로 끝났던 것이다. 허순길,
: : : ..한국장로교회사.., p. 465.
: : :
: : : 158 연구논문
: : : 김상도가 지적했듯, “과거 십 수년 한 솥 밥을 먹었던” 고신 출신들의 “그
: : : 친밀감, 우정, 동지 의식”은 하루 아침에 변할 수 없는 뿌리깊은 것이었다.
: : : 따라서 그들은 객관적인 판단에 입각하여 냉정하게 자신의 길을 택하기보
: : : 다는 단지 구 고신측이 다시 뭉쳐야 한다는 감정적 호소에 반응할 수밖에
: : : 없었다.65) 한상동 이후 고신의 제2 세대 지도자가 되었던 오병세ㆍ이근삼
: : : ㆍ홍반식 세 박사는 한상동의 복교 선언이 있은 몇 달 후인 1963년 2월
: : : 25일 복교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성명했다. “우리는 고려신학교의 복구 방
: : : 법은 가하지 않았다고 하겠으나 그 동기는 순수하고 그 정신이 한국교회
: : : 를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66)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고신 복
: : : 구가 “순수”한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어떤 식으로 한국 교회에 대한
: : : “사랑”의 표현이 되는지에 대한 언급은 그 성명 속에 없었다.
: : : 한상동 목사에 의한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은 모든 이들에게 구 고신측
: : : 의 “환원”의 전주곡으로 받아들여졌다.67) 특히 당시 부산노회 내의 구 고
: : : 신측 목회자들 사이에서 분열의 움직임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럼에
: : : 도 불구하고 고려신학교 복구주의자들은 교회 분열만큼은 절대로 시도하
: : : 지 않는다고 장담하고 있었다.68) 1963년 2월 5일 대전중앙교회당에서 회
: : : 집된 전국 노회장과 증경 총회장 및 총회 임원회 연석 회의에서 모 목사
: : : 는 고려신학교 복구가 “총회 분열”을 목적으로 한 행동이라 비난했다. 송
: : : 상석은 그것을 부인했다. 고려신학교 복구를 기점으로 구고려파가 재분리
: : : 함으로 구승동측을 “낭패케” 하는 것은 “도의상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일
: : : 뿐 아니라 “기독교의 행동 원리에도 맞지 않는 일”이므로, 그러한 “고의적
: : : 분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69)
: : : 한편, “합동된” 부산노회는 교회 분열을 막기 위해 부심했다. 그들은 불
: : : 법적 방식으로 이루어진 고신 복구를 합법화하는 동시에 교회 분열을 막
: : : 는 방안을 강구하여 그것을 1963년 3월 정기노회에 제시했다. 그 방안이
: : : 란, 양측의 합동 시부터 송상석을 비롯한 구 고신측 일부가 요구했던 대
: : : 65) 김상도, “고려신학교 복교 운동의 전망,”..파수군..제129호, p. 22.
: : : 66) 성명서의 제 2항, 남영환, p. 496.
: : : 67) Ibid., p. 159.
: : : 68) Ibid.
: : : 69) 송상석,..법정 소송과 종교재판.., 경남법통노회, 1976, p. 72.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59
: : : 로, 단일 이사회가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 두 학교를 운영한다는 의미의
: : : “일원화”를 기하는 것이었다. 총신 이사회에서도 그러한 방법에 의한 신학
: : : 교 문제 해결을 한상동에게 제안한 바 있었고 진주노회도 그러한 해결책
: : : 을 총회에 건의하기로 가결했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의 복교 선언 이후
: : : 구 고신 이사회는 이제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총회신학교
: : : 이사회와 상관없는 완전 별개의 이사회 하에서 운영되는 고려신학교를 인
: : : 정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70)
: : : (2) 부산노회 구 고신측 일부의 환원과 그 “취지문”
: : : 그러던 중 1963년 6월, 합동 총회의 고시부는 1963년 2월에 고려신학교
: : : 를 졸업한 5명71)이 강도사 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
: : : 다. 그들은 총회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한상동 목사의 복교 선언을 듣고
: : : 1962년 12월 18일 총신을 이탈하여 부산으로 내려가 고려신학교를 17회로
: : : 졸업한 이들이었다. 남영환에 의하면, 이 일이 “고신측 환원 운동에 결정
: : : 적인 동기가 되었다.” 구 고려측 인사들 사이에서 그것을 두고 총회에 가
: : : 서 왈가왈부하지 말고 조용히 “환원하자”는 견해가 득세하게 되었다는 것
: : : 이다. 그리하여 각 노회의 구 고신측 교회들은 이른바 “환원”을 시작했
: : : 다.72)
: : : 그리하여 각 노회의 구 고신측 교회들은 이른바 “환원”을 시작했다. 선
: : : 두에 선 것은 부산노회 내의 구 고신측 교역자들이었다. 1963년 7월 29일
: : : 그들은 이른바 “환원 발기회”를 조직하고 “노회 환원 취지문”을 발표했다.
: : : 그 글은 합동한지 3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그들이 여전히 자신들
: : : 의 과거 소속 집단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론에서, 합동
: : : 후 승동측이 “합동 서약을 위반하고 합동 정신과 이념을 무참하게 짓밟
: : : 고” 있다는 비난으로 포문을 연 그들은, 그 상태가 계속되면 구 고신측 출
: : : 신들의 “장래가 심히 암담하고 비참할 것”이라 전망했다. 구 고신측이 지
: : : 적한 구 승동측의 “합동 서약 위반”이란, 뒤에 상술하겠지만, 주로 교회의
: : : 70) 김상도, pp. 19~20.
: : : 71) 남영희, 이지영, 진학일, 최만술, 최진교.
: : : 72) 남영환, p. 498.
: : :
: : : 160 연구논문
: : : 주도권이나 교권에 관련된 것들에서 자신들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불만이
: : : 었다. 그러한 요인들이 자신들의 “장래”를 “심히 암담하고 비참”하게 만들
: : : 것이라 분개하는 표현들은 이들이 교권과 주도권 문제에 얼마나 깊은 관
: : : 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취지문”은 또 그 실체를 지적함이 없
: : : 이 새 교회에 마치 신학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언급했다. “해방 후” 구 고
: : : 신측이 견지하던 “신앙 노선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 : : 를 이 암흑으로부터 구출해내고” “정통 신학 교육”과 “진정한” 칼빈주의
: : : 교회 건설, “경건 생활의 재건설”을 위해 환원한다는 명분을 제시하고 있
: : : 는 것이다. 그러나 합동으로 인해서 어떤 “암흑”이 교회에 임했으며, 정통
: : : 신학 교육, 칼빈주의 교회 건설, 그리고 경건 생활에 어떻게 지장이 초래
: : : 되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취지문은 아무런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 : : 본론에서 “노회 환원 취지문”은 승동측이 위반한 합동 서약의 구체적
: : : 사항들을 열거했다. 그것은 주로 파당적 이해 관계에 대한 쟁점들이었다.
: : : 첫째로 신학교 문제를 언급했는데 그것과 관련된 그들의 불만 사항은 ①
: : : 신학교의 “일원화” 결정을 일 년도 못 가서 “단일화”로 바꾸었다는 것, ②
: : : 이사회 구성에 있어 양측 동수제를 폐지했다는 것, ③ 신학교육에 있어
: : : “질보다 양”에 치우쳤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정치” 문제라고 취지문은 지
: : : 적했다. 거기에는 다시 당파적 이익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두 가지가 포
: : : 함되었다. ① 다수의 횡포가 자행되는 것, 즉 부산노회가 합동 원칙을 어
: : : 기고 노회 명칭과 회수를 다수결로 결정한 것, ② “고신에 협조하는 교회
: : : 와 교역자를 탄압한 것”, 즉 동일교회의 교역자 청빙을 방해했고 제2 영도
: : : 교회에 전권위원을 보내어 고신을 지지하는 교역자와 교인을 탄압했다는
: : : 것, 또 고신 교수들을 강사로 청했다 하여 학생신앙운동(SFC) 전국대회를
: : : 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신앙 노선 문제에 대한 지적이었다.
: : : “합동된” 교단이 칼빈주의를 버리고 “세속주의, 타협주의, 편리주의”로 나
: : : 갔다는 것이었는데 역시 그러한 비판의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환원 취
: : : 지문에는 교권에 대한 관심과 소수파로서의 구 고신측 인사들의 피해 의
: : : 식이 동시에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합동 노회와 총회가 “고신측 지도자들
: : : 을 제거함으로써 완전히 교권을 장악”하려 하고 있으며 “고신측의 그림자
: : : 까지라도 한국교회에서 지워 버리려” 하고 있다고 그들은 불평했다. 그러
: : : 나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합동 총회의 총회장은 한상동 목사였다.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61
: : : 결론에서 취지문은 “우리는 합동 전 노회와 총회로 돌아간다”고 선언하
: : : 면서 합동 시의 고신측 총회장(송상석 목사)에게 환원 총회 소집과 환원 선
: : : 언과 교단의 재조직을 요청했다. 아울러 부산노회의 환원은 8월 8일 부산
: : : 남교회에서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공고되었다. 노회 차원의 선언이었지
: : : 만 합동 전 “총회”로 돌아간다고 확언한 것을 보면 단지 부산노회만이 아
: : : 니라 이미 전국의 구 고신측 교회들과 지도자들 사이에 재분리에 대한 합
: : : 의가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 : 5. “환원”에 대한 반대
: : : 구 고신측의 이러한 전반적 재분리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구 고
: : : 신측 인사들, 특히 중견급 목사들 사이에서 한목사의 교단 “환원” 혹은 재
: : : 분리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저항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1963년 8월 5일 부
: : : 산노회에 속한 구 고신측 교역자 23명의 명의로「노회 환원 취지문에 대
: : : 한 해명」이라는 성명이 발표되었다.73) 구 고신측 교역자들로서 고려신학
: : : 교 복구와 교단 환원에 대한 반대자들에 의해 작성된 그 성명서는 한상동
: : : 목사의 행보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 성명에 의하면, 그들은
: : : 고려신학교 복구가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며 그것이 필연적으로 “비
: : : 극적 교회 분열”로 연결될 것이라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1962년 가을
: : : 총회에서 총회장에 세 번 연임하는 데 실패한 한상동 목사가 갑자기 총회
: : : 와 신학교가 부패되었다는 구실을 내세우면서 고려신학교 복구를 선언했
: : : 다고 그들은 비판했다.
: : : 성명자들은 한상동을 비롯한 구 고신측 지도부의 비일관성을 지적했다.
: : : 3년 전인 1960년 12월 13일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할 때 한상동을 비롯
: : : 한 구 고신측 지도자들은 “합동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그
: : : 것에 공감한 그들은 그 “지도를 받아 감격과 감사를 가지고 순종”했다. 그
: : : 73) 정규오,..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 교회사(상).., 한국복음문서협회,
: : : 1983, pp. 278~283. 여기에 서명한 목사들은 김장원, 황보연준, 이제만, 최대
: : : 연, 김경연, 차문제, 최천구, 한대식, 김덕곤, 최진수, 이상근, 김원주, 최종린,
: : : 김을길, 김성환, 황종운, 박유생, 정해동, 이갑득, 김상도, 우하섭, 김갑석 23명
: : : 이었고, 강도사는 이근신, 김의장, 박윤성 3인이었다.
: : :
: : : 162 연구논문
: : : 러나 불과 3년이 채 되지 않은 지금 한상동 등은 구 고신측 교회들과 목
: : : 사들을 향해 교회 분열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 : 한상동 목사, 기타 목사들은 여출일구로 노회 석상에서나 또 교인들에게나
: : : “교회 분열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총회 산하 2천 교회라는 무대를 두
: : : 고 왜 나갈 것인가?” 등등의 말을 몇 십번 몇 백번 하였던가? 목사의 생명은
: : : 양심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이렇게 비양심적인 거짓말을 거침없이
: : : 하여야 하는가? 한국교회의 정통 신학 교육과 경건 생활의 재건설을 위하여
: : : 서는 거짓말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가?74)
: : : 성명자들은 “환원 취지문”이 “전부 거짓”이며 “순진한 교인들을 기만하
: : : 기 위하여 조작한 것”이라 비난하면서 이른바 구 승동측이 행한 “합동 서
: : : 약 위반”이라는 구 고신측 환원파의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들은
: : : 먼저 신학교 “일원화”의 약속을 “단일화”로 바꾸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 : : 그것은 한상동 목사가 총회장으로 있을 때 그가 앞장서서 이룬 일이다. 그
: : : 래서 당시 고신측 인사들 사이에서는 “불평이 적지 않게 있었다.”75) 한상
: : : 동 목사 자신이 주도해서, 혹은 최소한 그의 동의와 묵인 하에 그 일이 이
: : : 루어졌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구실로 교회를 분열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 : : 둘째는 이사회 구성에 있어 양측 동수제(同數制) 약속이 폐기되었다는 불
: : : 평에 대한 반박이었다. 이사 동수제 폐지는 총회가 아니라 이사전형위원인
: : : 한상동ㆍ황철도ㆍ노진현ㆍ박순룡 4인이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것이 이사
: : : 회를 경유하여 인준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일에 대한 책임은 전형위
: : : 원인 한상동, 황철도 두 사람에게도 있다.76) 셋째, 총회신학교가 “질보다
: : : 양을 중시”하는 신학 교육을 행한다는 비판에 대한 것이었다. 성명자들은
: : : “신학 교육의 우열은 장차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라고 자신감을 표명했
: : : 다. 부산노회가 합동 원칙을 어기고 노회 명칭과 횟수를 다수의 횡포로 결
: : : 정했다는 환원파들의 비난에 대해, 그러한 결정은 단지 다수결의 결과일
: : : 뿐이라고 환원 반대자들은 반박했다. “노회 유익을 위하여 다수의 의견을
: : : 따라 합동 원칙을 몇 노회 연기하여 시행하였다”는 것이었다.77) 교리나 진
: : : 74) Ibid., p. 279.
: : : 75) Ibid.
: : : 76) Ibid., pp. 279~280.
: : : 77) Ibid., p. 280.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63
: : : 리 문제가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그 단체의 유익이 되도록 행하는 것이
: : : 현명한 일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합동 원칙에 따르면, “일반 교회 행정
: : : 은 과반수로 가결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노회 명칭과 회수에 관한 문제는
: : : “일반 교회 행정”에 속하므로 다수결이 합법적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 : : 성명서는 두 가지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첫째, 구 고신측 인사들의 소
: : : 위 “환원” 움직임은 “환원이 아니라 분열이다.”78) 이유는 구 고신측 부산
: : : 노회의 목사와 총대 장로의 “다수”가 환원에 반대하고 고려신학교 복구를
: : : “불법”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79) 둘째, 소위 “환원”이라는 것은 단지 “교
: : : 권 운동”일 뿐이다.80) 구 고신측 “몇몇 목사”들이 교권을 누리기 위해 “식
: : : 언과 거짓말을 떡먹듯”하면서 “순진한 어린 양떼들을 기만하여 비극적인
: : : 교회 분규”를 감행한 것이다.81)
: : : 이 환원 반대 성명이 발표된 얼마 후인 8월 29일에도 구 고신측 목사
: : : 49명이 환원을 반대하는 또 다른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부산노회의
: : : 구 고신측 이탈 그룹은 “환원 노회”가 아니라 “분열 노회”라고 비판하면
: : : 서82) 그 분열이 얼마나 근거 없고 명분 없는 것인가를 지적했다. “교리와
: : : 성경상의 진리 문제가 아닌 교회 행정상의 의견 차이로 교회가 분열하는
: : : 것”도 잘못인데 하물며 “생리가 맞지 않기 때문에 분열하지 않을 수 없
: : : 다”는 것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 : : “인간의 생리를 더 중하게 생각하는” 인본주의이다. 그들은 그것이 “환원”
: : : 이라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라 단정했다. “합동”에 참여했던 구성원들 “대부
: : : 분”이 합동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환원”이라 부를 수 없을 터
: : : 인데 하물며 “과반수”가 합동을 견지하고 있고 단지 일부가 분열해 나가
: : : 면서 그것을 “환원”이라 부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83)
: : : 78) Ibid., p. 282.
: : : 79) 실제로 구 고신측 부산노회 소속 교회들 중 거의 절반이 “환원”에 동참하지
: : : 않았다.
: : : 80) Ibid.
: : : 81) Ibid.
: : : 82) Ibid., p. 283. 경북 지구 18명, 경기 지구 5명, 전라 지구 4명, 부산 지구 22
: : : 명으로 이 중에는 안용준..이인재..황보연준..박유생..강유중 같은 비중 있
: : : 는 구 고신측 목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 : : 83) Ibid., pp. 284~285.
: : :
: : : 164 연구논문
: : : (1) 결국 재분리되다!
: : : 성명서를 통한 반대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미 “환원”은 기정사실
: : : 화되어 가고 있었다. 8월 8일, 구 고신측 목사 23명과 장로 21명 등 44명
: : : 은 부산 남교회에서 구 고신측 부산노회의 환원을 감행, 김영진 목사를 노
: : :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어서 전라노회가 환원했고 9월 3일에는 경북노회, 4
: : : 일에는 경기노회, 10일에는 경남노회, 이어서 진주노회, 그리고 새로 조직
: : : 된 경동노회가 환원했다. 그리하여 1963년 9월 17일에서 20일까지 부산 남
: : : 교회에서 목사 36명, 장로 36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신 제13회 “환원 총회”
: : : 가 조직되었고 송상석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승동측과 합동하여
: : : 세칭 “합동파”로 불린 지 34개월, 거의 만 3년만의 일이었다.
: : : 합동 당시 고신측 총회장이었던 송상석 목사를 비롯하여 합동추진위원
: : : 들이었던 한상동, 황철도 목사는 합동을 주도했던 것이 “하나님과 교회 앞
: : : 에 잘못되었던 것”이라 교단 앞에 사과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고
: : : 신) 회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 : 합동 위원 사과: 하나님의 뜻인줄 믿고 1960년 12월 13일 승동측과 합동
: : : 함으로 우리에게 부닥쳐진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그 당시 합동 위원 대
: : : 표로 선정된 회장 송상석 목사와 부회장 황철도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각각
: : :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뼈아프게 사과할 때, 이 일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 : : 일인 줄 알고 온 회중이 함께 회개와 감사의 마음으로 이 사과를 받고 회무
: : : 를 진행하기로 가결하다.84)
: : : 불과 3년 전에 신학과 신앙이 승동측과 동일하므로 합동하는 것이 “하
: : : 나님의 뜻”이라 강변했던 바로 그 당사자들이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승동
: : : 측과의 합동이 알고 보니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밝히면서 이제는
: : : 헤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라 천명한 것이었다. 그 3년 사
: : : 이에 승동측이든 고신측이든 한 쪽에 어떤 신학적 입장의 변화가 일어난
: : :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과문에 나타난 바 그들에게 “부닥친 불미스러운
: : :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한편,
: : : 84)..대한예수교 장로회 제13회 총회(고신) 회록.., p. 33.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65
: : : 한상동 목사는 “전국 교회를 소란케 한 책임을 절감하고 사죄하는 의미에
: : : 서 은퇴 의사를 표명”했다.85) 아울러 일반 목사들과 장로들도 일주일간 자
: : : 숙하기로 결의했다.86) 단지 “합동”이 잘못된 일이었다고 규정함으로써 “환
: : : 원”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 : : 한편, 본래의 승동측 및 “환원” 반대파 구 고신측 일부로 이루어진 “합
: : : 동측”87)은 1963년 9월 19일 목사 97명, 장로 95명, 선교사 3명88) 도합 195
: : :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48회 총회를 열고 이수현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
: : : 했다. 이로써 1960년에 만들어졌던 세칭 “합동” 교단은 구 승동측 전부와
: : : 구 고신측 일부로 이루어진 다수파, 구 고신측 일부로 이루어진 소수파 두
: : : 쪽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 : : (2) 구 고신측의 손실
: : : “환원” 후 고신측의 교세는 합동 전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었다.89) 합동
: : : 85) 허순길,..50년사.., p. 170. 한상동은 그 후에도 70대 중반 소천할 때까지 고
: : : 려신학교 교장, 이사장, 고려신학대학 학장,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삼일교
: : : 회 담임 목사직을 수행했으므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셈이었다..
: : : 86)..대한예수교 장로회 제13회 총회(고신) 회록.., p. 33. “목사 장로 자숙: 합
: : : 동에 대한 모든 잘못되게 지도한 일을 심각하게 느껴 주 앞에서 깊이 회개
: : : 하는 마음으로 목사와 장로는 1963년 9월 23일부터 동 29일까지 자숙하기로
: : : 가결하다.”(단 특별한 경우에는 자숙 시일을 변경하여 실행해도 무방함).
: : : 87) 이 때부터 이들이 “합동측”이라는 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 : : 88) 이들은 미정통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한부선 선교사 등 구 “고신측”
: : : 의 전통적 혈맹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이 “환원”을 부당한 것으로 판단, 그것
: : : 에 동참을 거부하고 “합동측”에 잔류함으로써 고신은 국제적 교류를 완전히
: : : 상실해 버렸다.
: : : 부산 경남 경북 진주 경기 경동 전라 계
: : : 교회 수 69(100) 143(161) 70(121) 85(148) 21(23) 27 20(30) 445
: : : 당회 수 24 42 32 16
: : : 목사 수 32 35 38 17 7 7 5 116
: : : 장로 수 40 57 48 38 6 7 5 192
: : : 세례 교인 2900 3000 1100 1100 623 623 500 10246
: : : 89) 환원 당시의 고신측 교세는 다음과 같았다.
: : :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제13회 총회록..부록 44-47 (괄호 안은 합동 이전의
: : : 숫자).
: : :
: : : 166 연구논문
: : : 당시 590개였던 고신측 교회 수는 “환원” 후 445개로 줄어 150여 교회를
: : : 잃어 버렸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그것이 본래 교회 수의 1/4이었지만 내용
: : : 상으로는 부산, 경남을 제외하고 지역마다 규모있고 비중있는 교회들은 대
: : : 개 환원에 동참하지 않고 합동측에 잔류했다. 한부선은 “당시 환원한 교회
: : : 들이 대부분 경남 지역에 소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전에 고신측이 지
: : : 녔던 한국 교회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약화시킨 반면 “지역성을 더 강화
: : :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90)
: : : “환원”이 새 고신측의 장래에 미친 가장 큰 손실은 차세대 한국 교회와
: : : 교단의 지도자가 될 만한 그릇들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구
: : : 고신측의 유능한 중견 목사들 상당수가 “합동”된 교단에 잔류했다.91) 그리
: : : 하여 한부선 선교사는 “고신측이 무리하게 환원함으로 예전에 고신에 속
: : : 했던 많은 교회들과 훌륭한 지도자들을 상실했다”고 평가했다.92) “합동”
: : : 이전까지 고려신학교에서 봉사했던 교수들이 전원 총신에 잔류했다. 전 조
: : : 직신학 교수 이상근, 총무요 교수였던 안용준뿐 아니라 합동 이전에 이미
: : : 고신에서 사실상 축출되었던 박윤선도 “환원” 이후 총신 교수로 남게 되
: : : 었다. 고신의 혈맹과 같았던 한부선 선교사를 비롯한 간하배 등의 미정통
: : : 장로교 선교사들도 이제 새 고신측보다 주로 합동측을 위해 일하게 되었
: : : 다.93) 한 마디로, “환원”으로 인해 고신측은 실리도 명분도 다 잃어 버렸
: : : 던 반면 구 승동측은 합동을 통해 명분과 실리 모두를 강화했다.
: : : 6. 맺음말
: : :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하나됨의 가치에 대한 깊
: : : 90) Bruce and Katherine Hunt, Personal Annual Report, 1964(1964. 12. 31), p. 2.
: : : 91) 한국 장로교회의 가장 탁월한 목회자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충현교회
: : : 김창인 목사를 비롯하여 내수동교회 박이천 목사, 동도교회 최훈 목사 등은
: : : 그 일부에 불과했다.
: : : 92) Bruce and Katherine Hunt, Personal Annual Report, 1964(1964. 12. 31), p. 2.
: : : 93) 김영재, “고신 신학과 개혁주의 전통,”..기독교사상 연구.., 고신대학교 부
: : : 설 기독교사상 연구소, 도서출판 영문, 1996, pp. 121~122. 허순길에 의하면,
: : : 한부선은 구 고신측의 “환원”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발견할 수 없어 “승동측
: : : 에 속해 있었다.” 허순길,..50년사.., pp. 190~191.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67
: : : 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각 교단이 당면한 어려운
: : :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선택된 임시변통, 혹은 임기응변일
: : : 뿐이었다. 두 교단이 합동한 후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그 합동이 무산되었
: : : 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정략적 이해 타산이 일차적 동기가 된 연합
: : : 은 당연히 오래 갈 수 없다. 합동이 기대했던 만큼의 이익을 자신과 자파
: : : 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측은 바로 그 순간부터
: : : 합동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려하게 된다.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에
: : : 서 바로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국 교회에서 합동과 연
: : : 합을 시도하는 교단들 사이에서 언제든지 그러한 일이 재연될 수 있다. 그
: : : 런 의미에서 앞으로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교단들은 1960년대 초에 있
: : : 었던 이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의 역사를 주의 깊게 연구, 관찰하여 타산
: : : 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 : : “환원”이라는 말은 합동 이전의 구 고신측을 온전히 회복한다는 의미이
: : : 다. 그러나 1963년 구 고신측 일부의 재분리를 “환원”이라 부르기는 곤란
: : : 한 것 같다. 합동 후 두 교단의 속성은 서로 혼합되어 완전히 새로운 속성
: : : 을 가진 제3의 교단이 된다. 고신측, 승동측 양측이 합동하여 이루어진 새
: : : 교단은 이제 고신측도 승동측도 아닌 제3의 집단이었다. 그 새 교단에서
: : : 한 무리가 떨어져 나온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이전의 두 교단들 중 어느
: : : 하나와 온전히 동일시될 수는 없다. 노봉린은 1963년 고신측의 “환원”을
: : : “한국 장로교회 역사상 교리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혹은 심지어 교리
: : : 상의 이유를 가장하지도 않은 첫번째 대분열”이었다고 지적했다.94) 그러므
: : : 로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분리했다는 남영환의 주장
: : : 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 : : 재분리된 “고신측”이 개혁주의 전통을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으로 표
: : : 방한다면 적어도 교회론에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칼빈이 교회 분리의
: : :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는 유일한 경우는 기독교의 사활을 좌우하는 근본적
: : : 교리가 부정당할 때이다. 그 외의 어떤 사유에 의한 교회 분리도 칼빈은
: : : 가차없이 정죄했다.95) 그러나 “합동”된 교단으로부터 구 고신측 일부가 재
: : : 분리할 때 그들은 기독교의 중추적 교리는 고사하고 사소한 교리적 차이
: : : 94) Bong Rin Roh, “Division and Reunion,” p. 41. 91f. 서영일, p. 291에서 재인용.
: : : 95) 칼빈,..기독교 강요..제4권 1-2장을 보라.
: : :
: : : 168 연구논문
: : : 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사 구 승동측이 “합동 서약”을 어기고
: : : 신학교 이사직을 비롯한 교회의 “감투들”을 부당하게 독식했다 하더라도,
: : : 혹은 몇 사람의 신학교 졸업생에게 강도사 고시 응시 기회를 당장 거부했
: : : 다 하더라도, 심지어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교에 폐합하려 했다 하더라도,
: : : 그것들이 모두 기독교의 생사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 교리 문제가 아니라
: : : 는 점에서 개혁주의 교회의 분열을 정당화시켜 줄 사유는 되지 못할 것이
: : : 다. 한 교단 안에 몇 개의 신학교를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목회자 양성
: : : 행정에 관련된 사안일 뿐이므로 교회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합리적으로
: : : 판단하면 될 문제에 불과하다.
: : : ........
: : :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제10회록〉
: : :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록 11-2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부, 1971.
: :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합동) 제45회 속회록〉
: : :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6회 총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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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신 복교 계획을 포기: 대의 명분 없다고 판단,”〈크리스챤신문〉1962년 11월
: : : 5일
: : : (투고ㆍ접수일 : 2007년 7월 10일 / 심사완료일 : 2007년 8월 30일)
: : : ........
: : : 거의 누구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
: : : 어 버렸으나 사실은 무려 3년간이나 한국 교회사 속에 실재했던 대단히 중요한 사
: : : 건이 있다. 그것은 1960년대 초 고려파와 소위 “승동측”이라는 두 장로교단들이 합
: : : 동했다가 재결별한 사실이다. 수 백개의 교단이 난립하여 무수한 부작용을 낳고
: : : 있다는 지적과 함께 한국 장로교단들의 재결합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무려
: : : 반 세기 전에 있었던 장로교 연합을 위한 시도와 그 결과를 회고하는 것은 이 시
: : : 대 한국 장로교회에 중요한 시사를 줄 것이다. 양 교단은 왜 연합했다가 불과 3년
: : : 만에 헤어지고 말았는가? 장로교단들의 연합과 일치는 불가능한 일인가?
: : : 여러 정황과 진술들을 미루어 볼 때 1960년 당시 고신, 승동 양 교단의 합동은
: : : 같은 신앙과 신학을 가진 교회들 사이의 일치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순수한 연
: : : 합이라는 성격보다 각 집단 지도자들의 개인적 형편과 파당적 이익에 대한 고려에
: : : 서 비롯된 불순한 결합이었다는 성격이 짙다. 고려측은 당시 교단 지도부에 불안
: : : 요인으로 작용하던 환경들, 즉 예배당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의 부당성에 대한 경
: : : 기노회 주류의 반발과 이탈, 박윤선 교수의 고려신학교 이탈 등으로 인한 교단 내
: : : 부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으로 합동을 추진했던 측면이 강하다. 한
: : : 국 장로교 내의 소수파로서 홀로 서기가 한계에 도달한 가운데 다른 집단과의 연
: : : 합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편, 승동측은 그들 나름대로 못
: : : 지않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연동측과의 결별 과정에서 주한 외국 장로교 선교
: : : 부 전부가 연동측의 정당성을 인정함으로 자파의 도덕적 명분의 약화, 국제적 고
: : : 립, 국내외 교회들의 부정적 시각, 주요한 교회 기관들의 상실 등이 그것이었다.
: : : 그들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집단이라는 당당한 전통과 강경 보수라는 신학적 입
: : : 장을 가진 고려파와 합침으로 도덕적 명분을 강화하는 한편 장로교 분열이 연동측
: : : 의 신학적 자유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연동측과의 분열을 신학
: : : 적 정통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몰아가고자 했다.
: : : 합동을 통한 국면 타개에 급했던 고려파는 해방 후 그들이 일관되게 주장해 오
: : : 던 바, 신사참배 가담자들의 공적 참회고백, 자숙을 통한 정화 내지 권징 시행에
: : : 대한 일절의 언급 없이 승동측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교회 일치를 이루었
: : :
: : : 170 연구논문
: : : 다. 동시에 한상동은 신학교의 단일화 내지 일원화라는 합동 원칙에도 동의함으로
: : : 자신이 설립하고 애지중지했던 고려신학교의 독자적 존속조차도 합동을 위해 포기
: : : 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막상 합동한 후 고려측 인사들은 총회, 노
: : : 회, 신학교 이사회에서의 정치적 열세로 인한 교권적 소외감에 시달리면서 합동을
: : : 후회하기 시작했다. 한상동 목사의 양자인 이근삼 박사의 총신 교수 채용이 박형
: : : 룡 교장의 거부로 무산되자 그러한 고려측의 소외감은 극에 달했다. 한상동은 결
: : : 국 돌발적이고 독단적으로 고려신학교 복구를 시도했고 불만에 가득하던 많은 구
: : : 고려측 인사들이 그것에 호응했다. 한상동의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은 재분리, 혹은
: : : 소위 “환원”의 첫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 : : 합동된 부산노회의 여러 구 고려파 인사들이 구 고려파 교단 “환원”을 선도했
: : : 다. 그러나 같은 부산노회 안에 있는 상당수 구 고려파 인사들은 그것을 “환원”이
: : : 아닌 “분리”라고 비판하면서 그 분리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합동된 교단에 잔류
: : : 했다. 그러한 수는 전국적으로 구 고려측 수의 1/3-1/4에 달했다. 그 결과 고려파는
: : : 여러 교수들 및 중견 목사들 상당수를 포함한 수도권 및 전국의 150개 교회를 상
: : : 실하고 주로 경남에 편중된 지역 교단이 되었다. 그들은 주로 신학교 문제, 이사의
: : : 수 반분 등 교회의 “자리들”에 합동 당시의 약속을 승동측이 “다수의 횡포”에 의
: : : 해 위반했기 때문에 환원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 : : 칼빈은 교회 분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사유로서 기독교의 사활을 좌우하는 근
: : : 본적 교리가 부정당할 때라고 못박았다. 그러한 개혁주의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 : : 고려측의 “환원”에는 어떠한 주요한 교리적 신학적 이유도 제시된 것이 없고 주로
: : : 교권적, 개인적, 감정적 사유들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측이 제기
: : : 했던 불만들, 즉 교권에 대한 합동시 약속들에 대한 승동측의 위반이 사실이라 하
: : : 더라도, 개혁주의 교회론의 관점에서, 그러한 사유들이 교회 분열을 정당화해 주지
: : : 는 못한다는 것이다. 1960년대 고려측과 승동측의 “합동-환원” 사건을 통해 우리는
: : :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그리스도 집단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하나됨과 형제
: : : 사이의 교제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추진하는 순수한 교회 일치가 아니고 파
: : : 당주의적 고려에서 추진하는 교회연합운동은 지속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
: : : 는다.
: : : 주제어 : 한국 장로교회, 교단, 합동, 환원, 재분리, 승동측, 고신측, 한상동, 고려
: : : 신학교, 총회신학교, 박형룡
: : :
: : : 양낙흥 / 1960년대 장로교..승동측'과..고신측'의 합동이 재분리에 이른 과정 171
: : : Abstract
: : : The Reunion and Schism of the “Seungdong” Group and the “Koryo”
: : : Group in the 1960s
: : : Yang Nak-Heong
: : : Very few Korean Christians know that there was a period in the Korean church
: : : history when the so called “Koryopa” and “Seungdong” group were reunited and then
: : : split again. In the year 1960 they promptly reached the reunion and after less than
: : : three years were separated. What was the reason that the church reunion was so
: : : quickly broken. What led those two churches to be willing to the reunion? and Why
: : : did they departed from each other? Now that many words are uttered about the church
: : : unity and the reunion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es, learning about the history
: : : of the church reunion and re-split would be a great help for the Korean churches to
: : : prepare the reunion. In addition, the study of its process would reveal which party was
: : : responsible for the church split.
: : : The two churches were willing to the reunion in the thought that it would help
: : : them to get out of the troubles they were in at that time. “Seungdong” group was in
: : : trouble after their split from “Yeundong” group. All the missionaries in Korea sided
: : : with the latter, so they were deprived of all the international support and fellowship.
: : : Moreover, they were morally damaged because of the president Park Hyong Ryong's
: : : financial scandal. Actually the split from “Yeundong” group began from that. So they
: : : wanted to restore their lost reputation by the reunion with the “Koryopa.”
: : : On the other hand, “Koryopa” was in their own trouble at that time. After the
: : : actual dismissal of professor Yoonseun Park, Korea Theological Seminary was not
: : : functioning properly. Furthermore, they were going through an internal dispute and
: : : conflict on the issue of legal contest among Christians. Some significant group in the
: : : Kyonggi presbytery were in the state of actual split with the mainstream of “Koryopa.”
: : : That was the reason that they were so positive to the suggestion of reunion from
: : : “Seungdong.” group.
: : : Unfortunately, however, Koryopa found out soon that the reunion was very
: : : unfavorable for them in terms of the ecclesiastical power. Within two years, most of
: : : important positions in the presbytery and the general assembly were taken by the
: : : majority group “Seungdong.” The crucial incident was the president Hyongryong Park's
: : : denial of Dr. Keunsam Lee as the professor at Chongshin Seminary. Infuriated and
: : : feeling humiliated, Sangdong Han decided to restore Korea Theological Seminary which
: : : was originally founded by himself but were being incorporated into Chongshin
: : :
: : : 172 연구논문
: : : Seminary after the reunion. The restoration of the Korea Seminary was the beginning
: : : of the re-split of “Koryopa” and “Seungdong” group. Three years after the reunion, 2/3
: : : or 3/4 of the original “Koryopa” claimed to have restored their original organization.
: : : Key-words : Korean Presbyterian Church, denomination, union, schism, unity,
: : : Seungdong, Kosin, Sangdong Han, Korea Theological Seminary, Chongsin
: : : Seminary, Hyung Ryong Park
: : :
: : :
: : : >> " 님이 쓰신 내용 <<
: : : :
: : : : 장고신의 현대판 '분서갱유' 地域 敎會史 2011/08/06 16:37
: : : :
: : : : http://blog.naver.com/kjyoun24/60136573153
: : : :
: : : :
: : : :
: : : : 예장고신의 현대판 '분서갱유'
: : : : 양낙흥 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 회수·폐기 결정
: : : :
: : : :
: : : : 예장고신이 교단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며 회수·폐기하기로 결정한 양낙흥 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 (생명의말씀사 홈페이지 갈무리)
: : : :
: : : :
: : : : 한 권의 교회사 서적이 출판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예장고신(총회장 윤현주 목사)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이유다. 문제의 서적은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양낙흥 교수가 쓴 <한국장로교회사>다. 양 교수는 일종의 '분서갱유'라며 반발하고 있다.
: : : :
: : : :
: : : : 이번 사태는 부산노회가 2010년 제60회 총회에 헌의한 안건이 발단이 됐다. 부산노회는 양낙흥 교수가 교단의 정체성을 훼손했으며 교단의 기존 입장을 벗어나 WCC 운동을 옹호했다며, 양 교수의 신학을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산노회가 근거로 제시한 것이 양 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다. 논란 끝에 총대들은 특별위원회(위원장 이용호 목사)를 구성해 조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처분을 노회 임원들로 구성된 총회 운영위원회(운영위)에 맡기기로 했다. (관련 기사 : 학자, 교단에 충성하라?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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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특별위원회는 지난 6월 14일에 조사를 마무리하고 운영위에 4개항을 건의했다. 첫 번째가 양 교수로 하여금 <한국장로교회사>를 회수해서 폐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한국장로교회사>를 고신대학원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관계 기관에 양낙흥 교수의 순환 보직을 지시하고, 양 교수가 운영위에 사과하도록 했다.
: : : :
: : : :
: : : : 특별위원회는 징계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 양 교수가 교단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를 분리주의자로 매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별위원회는 운영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양 교수의 집필 의도가 설립자도 범죄하고 실수하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치중됐다. 그 결과 교단 소속 목회자나 교인들의 자긍심에 손상을 줬다"고 했다. 그리고 WCC에 대한 양 교수의 입장이 WCC와 2013년 WCC 부산 총회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교단의 의견에 역행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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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양 교수는 특별위원회의 조사에 대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발해 왔다. 이에 대해 특별위원회는 "학문은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유익하게 하는 범위를 지킬 때 허용되는 것이다. 양 교수의 <한국장로교회사>는 교단의 권위와 정신을 침해했다. (양 교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원 교수로는 부적합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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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양 교수는 징계보다 학문적인 검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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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에 대해 양낙흥 교수는 학문적 연구 결과는 치리회의 징계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연구물은 먼저 그 분야의 학자들의 토론과 논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한국장로교회사>에 대한 학술 토론이나 논문 등 학문적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연구에 오류가 있다면 먼저 정확한 사료를 제시하고 객관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 처벌받아야 할 일인지 의문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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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리고 양 교수는 위원회가 자신을 징계하려는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라 할지라도 교단 역사 가운데 잘못된 부분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징계 결정을 내린 것 같다. 그런 경우 학자에 대한 정당한 징계가 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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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편, 운영위는 지난 7월 회의를 열고 특별위원회가 양 교수에 대해 건의한 사항을 이행하기로 했다. 한 운영위원은 "서적을 회수·폐기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지 미지수다. 양 교수 스스로 조치를 취하게 해야 하는데 어려울 것 같다. 관계 기관이 나머지 사항을 언제 이행하도록 지시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2011.8.6. 뉴스앤조이 / 백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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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예장고신 60회 총회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부산노회가 제기한 양낙흥 교수의 '교단 정체성 훼손'과 'WCC 옹호' 혐의를 조사하기로 했다. ⓒ뉴스앤조이 백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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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학자, 교단에 충성하라?
: : : : 부산노회 "양낙흥 교수 고신 정체성 훼손"…양 교수 "학문적인 검증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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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예장고신(총회장 윤현주 목사) 제60회 총회 마지막 날인 10월 1일, 폐회 시간을 맞추기 위해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런데 부산노회가 헌의한 한 가지 안건이 논란이 됐다. 안건을 두고 총대들의 찬반 발언이 이어졌다. 지리한 공방 끝에 총대들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처분을 운영위원회에 맡기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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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안건은 고신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양낙흥 교수에 관한 것이다. 부산노회는 △양 교수가 교단의 역사를 왜곡하고 정체성을 훼손했다 △교단의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WCC 운동을 옹호했다며, 양 교수의 신학을 검증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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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60년대 초 합동과 고신의 '분리'에 관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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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부산노회는 교단의 정체성을 훼손한 근거로 양 교수가 지난 2008년에 쓴 <한국장로교회사>를 제시했다. 고신은 1960년대 초에 예장합동 교단과 통합했다가 3년 만에 갈라져 나왔다. 양 교수는 <한국장로교회사>에서 고신이 합동에서 다시 분리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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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상동이 승동 측과의 합동을 결심했던 결정적 요인은 박윤선의 고신 이탈로 말미암아 신학교 운영이 치명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된 상황이었다. (중략) 고신 출신 교수들이 확보되었으니 한상동으로서는 다시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다. (중략) 둘째는 교권에 대한 애착설이다.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당시 고신 복구에 반대했던 어떤 목사는 한상동이 고신 복구를 원했던 첫째 이유는 '주도권'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중략) 한상동이 고신 복구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로 여러 관측자들에 의해 지적되는 사실이 있다. (중략) 박형룡 총신 교장이 1962년에 화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한상동 목사의 양자 이근삼 박사의 총신 교수 채용을 조직신학 교수가 많다는 이유로 거부했다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사>, pp.660 ~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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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에 대해 부산노회는 "양 교수가 고신 총회를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명분 없이 분리주의자(한상동 목사)에 의해 세워진 분파주의 총회라고 규정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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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하지만 양낙흥 교수는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자신이 쓴 글의 핵심은 교단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양 교수는 "합동과 합쳤다가 다시 분리한 사건이 명분 없는 분열이었다고 지적했을 뿐이다. 교단의 근간이 되는 신학·교리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양 교수는 "고신의 과거에서 회개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다른 교단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손가락질만 할 것이 아니라, 고신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서도 겸손하게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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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WCC 옹호? 자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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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부산노회는 양 교수가 지난 6월 한국기독교학술원 공개강좌에서 발표한 논문도 문제 삼았다. '한국교회와 WCC'라는 주제로 개최된 강좌에서 양 교수는 당시 '제10차 WCC 부산 총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그는 WCC가 종교다원주의에 열려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진 한국교회의 상황과 WCC가 세계 최대의 기독교 연합 단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참여를 통한 개혁도 고려해야 할 방법 중 하나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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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바르 선언을 통해)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본격적으로 신학화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 (타종교에는) 왜 구원이 없는지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연구들을 살피고 그 문제점과 약점들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WCC는 설령 그것에 다소 교리적,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볍게 포기해서는 안 될 가치 있는 단체이다. (중략) 밖에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주도력을 발휘함으로 그것을 올바른 신학 노선으로 선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다" ('제10차 WCC 부산 총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pp.19 ~ 33)
: : : :
: : : : 부산노회는 WCC에 참여하자는 양 교수의 주장은 교단의 기존 입장에 반하는 것이라며,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양 교수의 신학적 입장에 의문을 표했다. 이들은 "WCC는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운동을 하는 단체다. WCC를 옹호하는 양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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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부산노회의 비판에 대해 양 교수는 WCC를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논문을 쓰기 위해 6개월 동안 WCC에서 발행한 문서와 관련 서적을 읽고 연구했다"며, "이번 연구는 WCC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였다"고 했다. 또 자신의 신학을 검증하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맹목적으로 WCC의 신학적 입장을 찬양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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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학문의 자유 침해 VS 학문 연구는 교단 입장 고려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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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양낙흥 교수의 '교단 정체성 훼손'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년 10월 고신대학원 개교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양 교수는 합동에서 재분리한 것을 고신 교단이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부산노회·북부산노회가 57회 총회에서 '교단 출범의 정당성을 부정했다'며 양 교수의 징계를 요구했다. 하지만 2년간의 연구 끝에 59회 총회는 '혐의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부산노회가 또다시 헌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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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부산노회 김종선 목사(초장동교회)는 지난 총회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그는 "신학위원회가 양 교수를 조사할 때 우리 노회가 관련 자료를 제대로 제출하지 못해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헌의안은 57회 총회에 제출한 것과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김 목사는 "양 교수의 주장이 옳다고 할 때 목회 현장에서 교단의 역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번 헌의안은 이에 대한 대책을 총회에 요구한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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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손성은 목사(부산삼일교회)는 교단 소속의 학자라면 교단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손 목사는 "양 교수가 학문적인 양심에 따라 연구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교단 신학교에서 일하는 교수는 일차적으로 교단의 정신과 정체성을 계승하고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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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양낙흥 교수는 지난 총회에서 결론이 난 사안을 다시 문제 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연구 결과에 대해 학문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곧바로 총회에서 검증하려는 시도를 우려했다. 그는 "우선 연구 결과를 학문적으로 검토하고 토론해야 한다"며, "기존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징계부터 하려 드는 것은 학문 연구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했다. 양 교수는 "과거를 정직하게 직면해야 교단이 발전할 수 있다. 교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과거의 잘못을 지적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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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총회 임원회는 지난 10월 7일 양 교수 건을 다룰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 9명을 선임했다. 정근두 부총회장(울산교회)은 "11월 19일에 열리는 운영위원회에서 위원을 승인하면 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다. 위원회의 활동 과정을 지켜봐 달라"고 했다. (2010.11.16. 뉴스앤조이 / 배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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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손성은 목사가 기사에 대해 반론을 게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손 목사는 자신의 논지가 "양낙흥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 고신 총회에서 의견을 교환하는 사람들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선 목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노회를 통해 총회에 질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양 교수의 연구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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