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말, 제 곳으로 갔다는 말로 대치하자.
신원하 교수의 완성된 논문을 기대하며
천헌옥 목사 /편집인
필자가 목회 초년에 당한 어이없는 일이 있다. 심방을 와 달래서 갔는데 어머니 권사님이라고 소개를 받은 8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계셨다. 그런데 평생 예수를 믿고 권사로 교회 봉사를 잘 하셨던 분인데 예수를 잊어 버렸다고 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예수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예수님 예수님 하고 부르세요.”하고 권면했다. 그러자 그 할머니 권사님이 “예수가 누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필자는 목사 초년병이었기에 이런 사실 앞에 참으로 난감했다. 무슨 말을 하고 나왔는지 아무 기억도 없다. 아마 30년 전의 일이었으니 그때는 치매라는 병명이 나기 전이었기에 노망이 났다는 말로 진단했다. 그 할머니 권사님은 가족이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집을 나가 길에서 아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또 하나의 아픈 추억이 있다. 참으로 친한 친구가 어느 날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평소에 그가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해만 지면 집밖을 나가기 싫어했고 어두움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후배에게서 그런 공갈과 협박을 받았는데 천성이 착한 그는 그런 말을 가슴에 담아두다가 대인기피증 등 노이로제에 걸렸고 결국 페닉 상태에 빠져서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우울증이라는 정신적인 질병과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지옥 간다"는 말을 한다. 과연 치매라는 질병에 걸려 “예수가 누고?”라는 말을 하는 사람과 정신적인 질병으로 인하여 자살을 한 사람에 까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노망이 났다고 할 당시는 그것이 질병이라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뇌세포가 일부 죽어 기억을 망각하는 질병으로 밝혀지면서 치매는 질병으로 분류되었다. 극심한 노이로제와 우울증 역시 질병이다. 질병으로 죽는 것에까지 우리는 지옥 간다는 말로 상처를 주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제 곳으로 갔나이다."
성경에 자살한 사람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 가장 지탄 받는 대표적인 사람은 가룟 유다이다. 성경에는 과연 이 자살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유다의 자살 이후 유일하게 유다의 이름을 거명한 사람은 베드로인데 그는 유다에 대해 말하기를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행1:24)라고 했다. 여기 ‘곳’이라는 단어는 τ?πο?(t?p?s)인데 단순한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지옥을 가리키는 의미는 없다.
예수님은 유다를 가리켜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고 아주 완곡하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경 어디에도 자살한 사람을 가리켜 지옥에 갔다는 직설적인 선언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우리보다 신학이 약하고 잘 몰라서 그랬을까?
지옥에 갔다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선포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나 하실 수 있는 선언이다. 죄인인 사람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을 가리켜 지옥에 갔다는 말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성경에서 그런 표현이 없는데 우리가 그런 선포를 한다면 그것은 월권이다. 그러면 뭐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다만 베드로와 같이 제 곳으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표현이지 않을까 싶다. 그 곳이 어디인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살은 자범죄이다.
자살은 분명 죄이다. 신원하 교수도 그의 연구초안에서 자살은 죄라고 단정했다. 자살도 분명 범죄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범죄이다. 그는 그 죄를 회개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과연 회개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효력이 적용될 것인가는 신교수가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잘 밝혀 줄 것이라 믿는다. 자범죄 때문에 이미 원죄를 용서 받은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논리는 연구를 해볼 가치가 있다.
다만 제언하는 것은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보다는 "제 곳으로 갔다"는 말로 대치해 썼으면 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신원하 교수가 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자살가족의 목회적 돌봄과 과제에서 그의 의중을 살펴 볼 수 있다.
남은 자들을 위하여
우리는 과연 뒤에 남은 슬픔에 빠진 가족들에게 자살은 지옥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목회자가 과연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안 보이는 공간(특히 인터넷)에서는 용감하게 잘라 말하겠지만 자신의 가족이나 교회의 성도 중에 그런 자가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가?
페이스북을 하면서 깜짝 놀라는 일이 있다. 그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누구누구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만 한 사람이라고 뜨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놀란다. 본인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알고 있는 친구의 친구를 통해 연결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따지고 보면 남이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렇다면 한 마디의 말은 자신도 모르게 퍼지고 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주 안에서 한 형제이고 자매인데 우리는 남은 가족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감싸 안아야 하지 않겠는가? 눈에 안 보인다고 인터넷에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상처를 받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설교에서 혹은 인터넷에서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을 듣거나 본다면 남은 가족들의 마음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생체기를 다시 긁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냥 제 곳으로 갔다고만 말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지 않겠는가하고 생각해 본다. 문둥병이라는 단어가 상처가 된다고 한센병이라고 해 달라는 청원은 우리가 곱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죽은 자들에 관한 평가나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남은 자들에 대한 보살핌과 위로자로서 저들을 격려하며 함께 영생의 길을 가는 것만이 의무요 책임이다.
자살을 예방하는 것은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은 자살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지막지한 말로 자살을 예방하려는 태도는 마치 몽둥이를 들고 위협을 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자살을 예방해야 한다.
가족 중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병원 치료를 받게 하거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으로 그를 감싸 안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자살자를 가진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그를 감싸 안으면서 위로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할 일일 것이다.
신원하 교수의 글은 의외로 평신도들에게서 난타를 당하였다. 신학자의 글에 대한 평은 신학자가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한다. 신학자들의 견해의 차이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박의 글이라도 논리적으로 어떤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반박하고 토론해야 한다.
댓글도 예의를 갖추어 써야 한다. 마구잡이로 감정풀이를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한다. 말과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차근히 그의 주장을 살피지 않고 애초에 난도질을 해버리면 신학자들도 사람인지라 움츠리게 되고 무엇을 말하기에는 대단한 용기를 내야 하는 그야말로 옛날보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어진다. 우리는 신학자들이 마음 놓고 연구한 바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쳐 하나의 신학이 정립될 수 있도록 협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2011년 06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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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헌옥
[2011-06-17]
불신자의 장례예배를 인도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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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주간 외국에 출타한 목사님 교회에 주일 예배를 맡아 가는데 그 교회에 장례가 났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분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교회에서 와서 장례예배를 드려 주면 좋겠다고 해서 담임목사가 안계시니 대신에 제가 가기로한 것입니다.
가면 안 될까요?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불신으로 죽었으니 지옥갔다고 말할까요?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갑니다. 왜 가느냐고 하면 죽은 자를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안 가면 그들은 누구를 불러 장례를 치를까요? 불신으로 죽었으니 할말 없다 그러니 네들 알아서 하라고 하면 그들이 받을 상처가 얼마나 클까요? 믿음이 약한 자들은 그런 상처로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목사가 불신자나 자살자의 장례예배에 갔다고 할말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그보다 더한 사람 붙들고도 전도하는데요. 슬픔을 당한 성도들은 교회가 와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습니다. 목사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면 더욱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갑니다.
내일 전할 말씀은 히11:13-16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자는 말씀입니다. 고인은 나그네로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수고를 그치고 고향인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소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한 성을 예비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죄인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십시다.
저는 말씀이 남은 사람들과 성도들에게 은혜가 될 것을 믿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찾아가 위로하는 것으로 된다고 봅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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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훈
[2011-06-17]
제 곳으로 갔다.
곳=지옥
베드로가 그런 뉘앙스로 말하고자 하면
다른 표현은 없었을까요?
τ?πο?(t?p?s)가 과연 지옥도 의미하는 걸까요?
베드로가 좀 정확히 말씀하셨으면 이런 혼란이 없었을텐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제 각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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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수
[2011-06-17]
자살한 집에 장례집례를 안하는 겁니다
...
자살한 사람은 생명 포기이며
예수님의 죄 용서와 생명주심을 거부함에 있어
보통 자연사한 불신자와 다름없는 신앙 없는 교인으로서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봅니다.
기독교인이라도 불신자와 꼭 같은 불신앙자가 교회 안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유다는 "제 길로 갔다"는 자기 길은 무슨 길입니까?
부드럽게 말하자는 말이나 성경표현대로 하자는 말은 얼마든지 가하나
그 길이 지옥이냐 천당이냐? 를 말함에 성경신학적 결론이 무어란 말입니까?
지옥갔다로 읽지 말라는 말이라면 틀렸다는 주장입니다.
유다가 제길로 갔다 = 유다는 지옥갔다, 이렇게 읽는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살한 교인이 있다면 목사는 당연히 장례 예배? 집례 못하는 거로 믿어요.
그러면 유가족은 어쩌지요?
그그야 자기네들끼리 회개를 하든 뭘 하든 할일이고...
목회자는 생명에 관련하여 가르치며 훈계할 자로
자살한 자 유가족에게
1)제길로 갔으니 나는 모르겠다 하겠어요?
2)지옥은 아마.... 안 갔을거요? 라고 해야 해요?
3)남은 유가족도 자살할만하면 할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지 않겠습니까? 이러면서
자살한 자 이해하는 말로 유가족을 위로(?) 합니까?
어떤 말로 위로하고 장례예배 설교를 할 참인가요?
저는 답이 없다고 보고
자살자 장례집례는 목사가 할 일 아니라고 결론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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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필
[2011-06-17]
한편으로는...
말씀하신 내용에 대부분 동감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청년 목회를 할 때 생각이 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어수룩하고 모자라 보이는데 머리는 비상한 청년이 하나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매일 밤에 전화를 걸어서 "정말 자살하면 지옥하냐"며 수 십 분에서 한 시간 여를 물어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동역하던 다른 목회자에게도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고 하더군요. 물어보는 뉘앙스는 자살을 하고 싶은데 지옥을 갈까봐 못하고 목회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조그만 틈이라도 보이면 행동으로 옮기려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뭔가 불분명한 뉘앙스의 말은 자살을 방조하는 거나 마찬가지 결과를 가지고 오기에 매일 밤 참 진땀을 뺐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은 자들에게는 배려가 필요한 것이 분명하나 당사자에게는 매우 신중해야 하고 전 어떻게 해서라도 자살은 막고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위협을 해선 안 되겠지만, 설득이라는 것이 결국 표현의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긴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잘 아시겠습니다만 목회적으로는 참 어려운 문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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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호
[2011-06-17]
"제곳으로 갔다"
성경말씀인 "제곳으로 갔다"로 대답하는 것이 좋겠다는
위 글에 공감하고 동시에 댓글 강 목사님 글에 공감하면서...
한 목사님은
제 6계명인 "간음하지 말찌니라( You shall not commit adultary)"는 말씀에 대해 침묵해야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떠나버린다고 하였다.
제 6계명 "살인하지 말찌니라"(You shall not kill) 이 말씀 역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의지(You shall)가 표현된 말씀인데, 요즘은 이 말씀 설교를 할 때 거론 될 " 자살" 문제에 대해서도 아마 침묵해야 될 찌 모르겠다.
그 다음은 무엇을 침묵해야할 것인가?
목회 케어적 차원, 상담할 때 대 놓고 특정적인 자살한 어떤 그 교인을 지목하여
"자살했으니 지옥행이다" 라고 말 할 지도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지도자는 당연히 삶(영생)의 메뉴얼인 성경에 나와 있는 삶과 그 원리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
자살자의 결국은 난제에 속하는 문제이지만
그 사람이 달고 있던 교인이라는 교회 직분자라는 명찰을 관점으로
또는 어려움을 당한 그 유가족을 위로한다는 목회 상담적 관점에서만
인간적인 여러가지 이유와 변명을 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 (왜곡)시키는 행위를 경계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좀더 진지하게 열린 마음으로 목회에서 경험한 사례나
성경연구를 통해 확신하는 예들을 더 활발하게 나눔으로
더 큰 확신과
더 영적 통찰력을 얻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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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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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구원을 오해해서 오랜 세월 참으로 혼동의 시대를 살며 흑암 속에 있던 형제 교단들이 속속 이 노선 교리의 세계 언저리에 머뭇거리다 한 사람씩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오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은 기쁨으로 다음 내용을 소개합니다. 무식하고 단순하며 솔직한 사람이면 한 번 듣고 해결할 일을, 유식하고 잘 나고 계산이 많다 보니 교단적으로 어두운 시기를 자초했습니다. 신원하 교수님은 누군 줄 모르나 고신에서 가장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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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의 죄는 모든 죄 중에서 유일하게 확실하게 회개하지 않고 끝을 맺는 죄입니다. 이미 천국 갈 기본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건설구원의 행위 여하로 인하여 우리의 천국 구원이 다시 흔들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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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선 목사님이 소개한 세계 전통의 정통 신학은 천국 갈 사람은 알면서 고의로 죄를 짓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으므로 "자살"이나 "사고사"를 놓고 늘 모순에 싸여 고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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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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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원하 교수, 모든 자살한 사람은 지옥 간다고 단정해 말할 수 없다.
: 고신대학교 기독교상담대학원 학술특강에서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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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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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특강을 마치고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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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신대학교 기독교상담대학원은 2011년 6월 2일(목) 오후 6시 비전관 4401에서 ‘인간의 내적 고통과 자살에 대한 신학적 이해’라는 제목으로 학술특강을 개최하였다. 이날 학술 특강에서 신원하 교수는 ‘자살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목회적 돌봄’이라는 주제로, 문장환 박사는 ‘고후11:22-12:10에 나타난 바울의 자기정체성 인식, 그리고 삶과 사역의 스타일: 그리스도를 본받아 바울을 본받아 (ImitatioChristi,ImitatioPauli)’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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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은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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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원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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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학교(B.A.)
: 고신대학교신학대학원(M.Div.)
: 미국 칼빈신학대학원(Th.M.)
: 미국 보스톤대학교대학원(Ph.D.)
: 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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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원하 교수는 기독교 역사의 전통 가운데 가장 수치스럽고 협오스러운 죄로 취급되어 온 자살에 대해 자살의 현상과 원인,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자살, 교회가 자살을 정죄해 온 신학적 근거와 자살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인지에 대해서 성경을 근거로 세밀하게 고찰하였다. 그리고 자살이 지닌 윤리적 문제와 자살의 예방책, 교회의 자살가족을 위한 목회적 돌봄과 과제에 대해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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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교수는 자살이 죄라고 하는 교회의 주장을 정리하면서 (1) 자살은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2)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심각한 죄악이 아닐 수 없다. (3) 자살은 기독교의 신앙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4) 자살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안에 있는 소망을 거부하는 것이다. (5)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내신 미션, 자기 사랑과 자기 성장과 완성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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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교수는 성경에 자살한 삼손(삿16:23-28), 사울(삼상 31:3-4; 대상 10:3-4), 아히도벨 (삼하17:23), 시므리(왕상 16:18), 그리고 신약의 가룟 유다(마27:5-7)를 예로 들어 본문은 이들의 죽은 방식이나 그것의 의미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살 행위가 구원받지/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판단 내릴 충분한 성경적 근거는 없는 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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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청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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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신학적으로 보면 회개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회개라는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필수 조건은 아니라고 본다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획득되어지고 그리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다. 특정한 죄에 대해 회개하지 못했다하더라도,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그 구원을 빼앗기지 않는다. 만약 모든 죄에 대해 회개해야만 구원받는다고 하면 이것은 행위 구원과 공로사상으로 미끌어지게 되는 위험한 결과를 맞게 된다. 사람은 누구도 자기가 지은 죄를 다 회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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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어떤 큰 죄악과 실수를 범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의도적으로 부인하는 죄와 배교가 아닌 한 그것은 결코 배제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강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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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를 본받아 바울을 본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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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장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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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신학대학원 졸업
: 스텔렌보쉬대학교 박사
: 현 한소망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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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후11:22-12:10에 나타난 바울의 자기정체성 인식, 그리고 삶과 사역의 스타일에 대해 강의를 시작한 문장환 박사는 바울의 삶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약하고 수치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자신의 자화상과 자신도 당연히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자기정체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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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세상이 추구하는 길과 근본적으로 반대이며, 이 길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얻기 위한 가치관으로 사는 삶이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자화상을 보여주면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자신을 본받는 자화상을 가지라고 권고한다. 문장환 박사는 상담자들도 바울과 같은 자화상을 가지고 삶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오는 내담자들의 상담에 임하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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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특강은 기독교인으로서, 또는 기독교상담가로서 자살에 대해 가졌던 그동안의 편견에 대한 이해와 내담자의 내적 고통을 돌보아야 하는 기독교상담가로서 상담자가 어떤 자화상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명료하게 방향을 제시주어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두 분의 강의 내용은 논문방에 소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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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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