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호주 선교부 재산 처리
사라져버린 선교유산과 역사적 교훈 地域 敎會史 2009/07/0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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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일신 여학교
사라져버린 선교유산과 역사적 교훈
해방 후 부산과 경남지역에는 기독교교육학원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에게 희사받은 선교유산들이 남아 있었다. 설립이념대로 기독교정신의 바탕아래 기독교교육이 진행되었으며,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큰 힘이 된 게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선교기관들이 현재까지 남아있었다면 부산과 경남의 복음률은 지금보다 높아졌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 1980년에 접어들면서 학원의 운영이 힘들어지고 개인과 혹은 불신자들의 손으로 넘어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학교로 운영되곤 한다.
본보는 선교사들의 유산인 금성, 창신, 건국고등학교의 당시 시대적 상황을 돌아보면서 역사적 교훈을 삼고자 한다. 또 현재 남아있는 선교유산들을 돌아보며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기대한다.
금성중·고등학교
금성학원은 해방 후 1945년 10월 김상순 목사가 호주선교회로부터 일신학교를 임시 차용해 금성학원이란 이름으로 시작됐다. 당시 경남노회에서는 경남노회 기독교교육학원을 조직하여 호주선교사로부터 희사받은 여러 교육기지들을 근거로 기독교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마산의 창신중학교와 부산의 금성중학교가 그것이다.
금성중학교는 1946년 중학교로 공인을 받게되고, 1948년 경남노회 기독교교육학원을 설립한 다음 호주선교회로부터 일신학교재단을 양도받음으로써 1948년 금성중학교를 정식으로 인수하게 됐다. 한국전쟁때에는 피난민 수용소로 쓰였으며, 전쟁 후 1953년 양성봉 이사장이 취임함으로 학교는 본격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1954년에는 금성고등학교 3학급 설립인가와 중고등학교 야간부를 각각 3학급씩 설립인가를 받았다.
금성중고등학교는 매주 월요일 첫 교시에 전교생이 예배를 드렸으며, 월요일과 수요일, 토요일에는 운동장에서 전체예배를 드렸다. 11월 중순에는 1주일간의 추계 교내 신앙대부흥회를 가져 교사와 학생의 신앙심을 굳게 하는 동시에 전도의 기회를 마련했다. 또 성탄절에는 성탄축하 전시회와 성탄축하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1969년 문교부의 중·고등학교 분리령에 의거하여 고등학교가 신관으로 이전되었고, 1972년 8월30일에는 본관 9개 교실 증축공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실을 기하지 않은 학교 확장은 학교의 부실을 초래했다. 재단에서 보조금 하나 없이 학생 월 회비만으로 학교부지 매입과 교실증축을 하다보니 자연히 주변의 부지를 팔아 충당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은행 및 사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경남노회 기독교 교육기관산하 6개교(창신중학교, 창신공고, 건국중학교, 건국상고, 금성중학교, 금성고등학교)가 마찬가지였다. 이들 6개교는 모두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부산시교육위원회에서 직접 관선이사를 내세워 학교를 정상화하려고 노력했지만 해결되지 않아 결국 타인에게 넘어갔다. 금성중고등학교는 부산여상을 운영하던 김창덕 교장이 맡아 지금까지 학교를 운영해 오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학교였던 금성중고등학교가 기독교 색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학교설립이념이나, 학교운영을 살펴보더라도 ‘기독교 정신‘는 찾아보기 힘들다.
건국중·상업고등학교
건국학원은 1945년 이사장 송진률, 초대교장 송경영씨에 의해 설립되었다. 1963년 학교법인 경남노회 기독교육학원이 건국학원을 인수하여, 금성중고등학교같이 몸집을 불리며 발전해 왔다. 하지만 1983년 사하구 하단동 신축교사로 중·고등학교를 모두 이전하였으나 무리한 재정부담으로 경남노회가 학교운영에 손을 떼고, 가야고등학교 한오작 교장이 학교를 인수했다. 현재 건국중고등학교도 설립이념등에서 기독교 정신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다만 연혁에 경남기독교 교육학원 인수등이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마산창신중·고등학교
불신자의 손에 넘어간 금성중고등학교와 건국중고등학교와 달리 마산창신중고등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4개 학교와 같이 경남노회 기독교교육학원 산하에 있었고, 이사들은 모두 경남노회와 부산노회에서 파송된 장로들이었으나 부실학교가 되어 유지가 곤란하게 되자 이사회에서는 1977년 불신자들을 이사로 영입하여 경영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학교의 위기를 감지한 김기현 목사는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전권위원을 구성하여 1982년 학교를 관선이사회로부터 경남노회로 복귀시키는 결의를 하게 된다. 이런 결실을 보게 된 배후에는 당시 이규호 문교부장관의 배려와 조선출 목사와 김용대 장로의 노고가 컸다. 이후 경남노회에 복귀하여 강병도 장로의 책임아래 학교가 기독교 학교로 잘 운영되고 있다.
일신여학교
부산지역 최초의 사립학교로 알려진 일신여학교는 1895년 호주 여자 전도부가 설립하여 현재 동래여자고등학교로 지속되고 있다. 초창기 사립 일신여학교로 불리면서 발전을 거듭하다 일제시대 삼일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교사 3명, 학생 11명이 투옥되기도 했다. 1925년 동구 좌천동시대를 마감하고, 동래구로 학교를 이전하면서 동래일신여학교로 불렸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동래일신여학교가 폐쇄하게 되고, 이후 1940년 구산학원(현 학교법인 동래학원)이 학교를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신학교는 금성, 건국, 창신과 달리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학교가 넘어간 경우는 아니다.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일신학교가 교계를 떠난 이유는 욕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신사참배 문제로 호주선교부가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할 수 없었을때 경남노회 어른들은 학교가 당연히 교계 어른들의 손에 넘어올 것이라고 기대했고, 이 사실을 안 호주선교부는 경남노회가 학교를 잘 운영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애국유지인 구산학원 오태환씨에게 학교를 매매했다“고 말했다.
이밖의 선교유산들
나환자들을 위한 정착지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외국 화란 자매교회로부터 헌금받은 돈으로 구포지역에 70만평을 구입한 기독교협력회(설립자 한상동 목사)는 한상동 목사와 하병국 목사, 김진경 장로(연변과기대 총장)를 이사장으로 전전해 오다, 이후 故 김상원 장로(부산남교회)에 맡겨 운영해왔는데, 이 부지에 성도고를 설립했다. 하지만 성도고도 결국 부채로 인해 87년 김윤곤씨가 재단을 인수했다. 외국 선교회가 세우고, 현재 기독교 정신으로 남아 있는 선교유산은 일신기독병원(호주선교부)과 브니엘 학원(현 정선학원, 중아선교회)이 유일하다. 일신기독병원의 경우 출산을 기피하는 사회적 정서때문에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최근 외국계투자회사로부터 2천억원이라는 돈을 투자유치하기 위해 병원장과 이사회가 갈등을 빚었고, 최근 병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한 상황이다.
브니엘 학원(현 정선학원)의 경우 설립자측(박성기 목사)과 현 재단과의 법정 소송이 고등법원에 계류중이다. 법원측은 합의를 종용하고 있지만 설립자측을 대신하고 있는 브니엘 총회와 현 재단과의 시각차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심과 기도
과거 수많은 선교 유산들은 재정적 어려움과 욕심으로 인해 불신자나 개인에게 재단이 넘어갔다. 다행히 이중 마산창신학원의 경우 다시 교계가 찾아 현 강병도 장로가 잘 운영하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교계지도자들은 “비록 넘어간 재단들을 다시 찾을 수는 없어도, 현재 남아 있는 재단에 대해 관심과 기도로 잘 보존해 후손들에게 선교 유산으로 넘겨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선교유산에서 근무하고 있는 현장의 직원들은 교계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일신기독병원 모 직원은 “선교유산이라는 자부심보다 현재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더 크다. 교계가 선교유산 자체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어려움에도 관심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신대 이상규 교수도 “교회의 관심과 후원, 기도가 선교유산을 지킬 수 있다“며 일선교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참고문헌 부산노회사-통합> (2009. 7. 4. 한국기독신문 / 신상준)
교회사, 일신여학교, 금성중·고등학교, 건국중·상업고등학교, 마산창신중·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