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손양원과 김구, 국기경례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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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손양원과 김구, 국기경례 반대


부경교회사 연구
제27호 (2010.7)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용서와 화해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이 상 규 (본회 회장, 고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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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기 경례 반대
해방 후 손양원 목사와 관련한 한 가지 중요한 일은 국기경례 문제를 심각하게 간주하고 이의 시정을 위해 힘썼다는 점이다. 국기배례(경례) 문제는 해방 후 한국교회가 직면한 중요한 현안이었다. 특히 1949년 경기도 내 봉일천(奉日川) 공립초등학교에 재학하던 41명의 학생이 신앙양심에 근거하여 국기경례를 거부한 일로 퇴학처분을 받았을 때, 그리고 문교부당국자가 이를 당연한 조치로 언명했을 때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간주했다.
이런 현실에서 손양원 목사는 이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하고 국기경례는 배례이며, 이것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일제하에서의 경험에서 얻는 확신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제하에서도 ‘우상숭배 하는 나라는 다 망했다’며 국기 배례를 반대하였고, 국기 경배를 요구받았을 때, “나는 세계역사상 성경과 상식으로 볼 때 우상숭배하는 나라는 다 망했다. 그러니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는 나는 망하는 축도경례(祝禱敬禮)를 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고 말하면서 ‘국기 경례’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특히 손양원 목사는 1949년 11월 3일 저녁 8시 부산 광복교회에서 행한 “국기 배례”(겔 14:1-11)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국가 멸망의 원인이 우상숭배 하는 일에 있다고 전제하고 국기에 대한 배례는 진정한 의미의 국기 사랑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신전(神前)에서 배(拜)하고 인간 앞에 예(禮)하는 것인데, “국기에 머리를 숙이거나 경례를 표함은 지나친 잘못이다. 인격을 지닌 인간이 국기에 다하여 배(拜)나 예(禮)를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으로 숭배하면 이로 인해 멸망할 것이라.”고 설교했다.
당시 교회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국기에 대한 주목례(注目禮)’로 경의를 표하도록 통일시켜 주도록 요청한 것이다. 그것이 만일 어렵다면 적어도 신자에 한하여서는 어떤 경우에든지 ‘주목례’로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정부가 주장하는 바처럼 국기배례가 종교적 행사도 아니고 사람끼리 하는 인사로도 볼 수 없고 오직 ‘국가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라면 저두배례(低頭拜禮)는 의례관습상으로도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군인이나 그 유사단체는 거수례(擧手禮)로, 일반인은 주목(注目)으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손양원 목사는 국기경례는 국가 지상주의로 발전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 점은 국가 상징물을 신격화했던 로마제국이나 일제군국주의의 사례를 헤아리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손양원 목사는 국기경례문제의 시정을 위해 1949년 장로교 총회가 선정한 6인 위원의 한 사람으로 당시 문교부장관 안호상, 국방장관 이범석을 순방하고 국기배례 문제의 시정을 촉구하였다. 또 국회를 방문하여 국기반대의 이유를 설명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여 국기경례를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시정하도록 했다. 이런 일련의 노력으로 국기에 대한 배례의식은 주목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4. 김구와의 교분
손양원 목사와 관련하여 한 가지 특기할 일은 김구 선생과 깊이 신뢰하고 상호협력 하는 관계였다는 점이다. 손양원은 백범 김구(1876-1949)와 아주 근친한 관계였다. 손양원은 1949년 11월 3일 저녁 8시 부산 광복교회에서 행한 “국기배례”(겔 14:1-11)라는 제목의 설교 중에서, “김구선생과 나는 근친한 사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에 의하면 백범은 자신이 설립한 학교의 교장으로 손양원 목사를 초청했을 만큼 각별한 관계였다고 한다. 그 학교가 서울 염리동에서 시작된 어린이 교육기관 창엄학원이었다. 이 학교가 개원하게 된 때가 1949년 3월 14일이었다. 이 때 손양원은 애양원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비록 연령적으로는 김구 선생이 26년 연배였으나 김구는 손양원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존중했다. 손양원 또한 김구 선생을 충심으로 존경하고 신뢰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견고했다.
김구와 손양원이 어떤 경로로 근친한 관계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김구는 자신보다 26년 아래인 손양원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김구는 손양원의 동생이었던 손의원 목사에게도 1949년 3월 자신의 책, ?백범 일지?를 선물했는데, 책 서두에 “손의원 목사 기념... 김구”라는 헌사를 남겼다. 이 점은 손양원 목사의 가족들과도 깊은 교제를 나누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김구가 언제 기독교 신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유저를 종합해 볼 때 1903년 2월 경 우종서(禹鐘瑞)의 권유로 기독교 신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우종서는 1910년 평양신학교를 제3회로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 개종 이후 김구는 황해도 장련읍의 광진(光進)학교 라고 불리는 작은 학교에서 기독교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치면서 기독교적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주색장이로 배회하던 백남훈을 전도하기도 했다. 1904년 당시 김구는 진남포 감리교 엡웻 청년회 총무였다. 청년회 총무자격으로 1905년 서울 상동감리교회에서 개최된 교회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전덕기 목사를 비롯하여 이동녕, 이승길, 최재학 등을 만나게 된다. 이 회합이 신민회 창건운동으로 연결된다. 교회 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상동교회에서의 결의에 따라 1909년 김구는 황해도 문화의 양산(楊山)학교 교원이 되었고, 곧 그는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고 학무총감이 된다. 이때부터 그는 황해도 내를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고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기독교 신앙은 김구의 신념과 사회적 활동의 이념적 기초가 된다.
1911년에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일제검거에 연루되어 김구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김구는 일생동안 기독교 정신으로 살았다. 북장로교 선교사인 한위렴(William B. Hunt)이나 군예빈(Edwin Wade Koons) 등과도 절친하게 지냈고 이들은 김구에게 신부를 소개하기도 했다.

손양원은 해방 이전부터 독립운동가 김구를 알고 있었으나 김구가 손양원을 알게 된 것은 해방 이후로 보인다. 아마도 해방 후 손양원의 신사참배 거부와 옥중 투쟁에 대한 행적을 듣고 구국정신에 동감하는 손양원에 대하여 상당한 신뢰를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할 점은 김구 선생이 암살되기 꼭 3개월 전인 1949년 3월 26일 손양원 목사와 만났고, 이 자리에서 손 목사에게 한 편의 글을 써주었다. 이 날은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31주년이 되는 해였고, 안중근(1879-1910)이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지 39년이 되는 해였다. 이 때 백범의 나이 74세였다. 이 날 써준 시는 손양원 목사에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인용하고 애송했던 조선 후기의 문인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의 시였다.

踏雪夜中去(답설야중거)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발걸음을 어지러이 말 것은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遂作後人廷(수작후인정) 뒤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백범은 이 글이 서산대사 휴정이 남긴 선시(禪詩)로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백범은 장로교 목사에게 스님의 시를 선사한 셈이다. 손 목사에게 위의 휘호를 남긴 때로부터 약 20일이 지난 1949년 4월 17일자 (서울신문)에 쓴 칼럼을 보면 김구는 손목사의 인품을 깊이 흠모했음을 알 수 있다.


(전략)... 여수 교회의 손양원 목사의 사적을 듣고서 나는 그 분의 종교가다운 온정과 자비심에 탄복하고 경의를 표했다.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이다. 그는 무고한 동포들을 학살한 좌익 소아병자를 완전히 고쳐서 선량한 인간이 되게 하였다.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학살한 좌익 학생에게 온정과 원호의 손을 쥐어 주면서 회유시킴으로서 다수의 좌익 사람들로 하여금 잔인한 파괴 행동을 버리고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이 땅의 정치가들에게도 손 목사와 같은 아량과 포용성과 수완이 있다면 공산주의도 이길 수 있고 남북통일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감정을 삼가고 이지를 발휘해야 한다.


이 글 속에서 백범의 공산주의관을 엿볼 수 있고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기독교적 사랑뿐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포용하여 인간성을 회복하게 한 손양원 목사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김구의 정신이나 손양원의 신앙은 다르지 않다. 앞서 간 사람이 후대에게 어떤 모범을 보일 것인가? 김구가 마음에 새겨 둔 정신이란 앞장 서 걸어가는 이가 가져야 할 마음 자세를 보여준다. 그가 유념한 정신은 조국에 대한 충의만이 아닐 것이다. 도덕과 윤리, 그리고 신의를 지키고 대의를 따르는 지도자다운 면모가 보인다. 그에게는 얕은 간계나 사사로움은 상상할 수 없다. 손양원 또한 그러했다. 그가 사사로움을 구했다면 애양원보다는 목회 성공의 세평을 쫓아갔을 것이고, 두 아들을 살해한 이들을 용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신앙적 대의(大義) 때문에 후대에 존경을 받고 오늘 우리에게도 선한 모범을 주고 있는 것이다. 손 목사가 김구의 마음에 감동을 준 것은 앞서 걸어가는 신앙인의 아름다운 흔적이었다.
김구 선생이 1948년 8월 15일자로 쓴 휘호도 비록 그 대상은 다를 수 있어도 삶의 방식은 손양원과 다르지 않다.

善竹橋頭血(선죽교두혈) 선죽교에 낭자한 핏자국을 보고
人悲我不悲(인비아불비) 사람들은 슬퍼하나 나는 슬퍼하지 않노라
忠臣當國危(충신당국위) 충신이 나라의 위기를 만나
不死更何爲(불사갱하위) 죽지 않고 또 무엇을 하리오.

김구의 시가 충신의 대의를 말하지만 손양원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버렸던 점에서 김구와 손양원 두 사람에게는 26년의 세월의 벽을 허무는 내적 일치를 경험했을 것이다. 앞서 걸어가는 이가 남길 것은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대의를 따르는 선한 모범이다. 지도자라 하는 이가 유념해야 할 어른의 가르침이다.


맺는 말

손양원 목사가 순교한 후인 1950년 10월 29일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그를 추모하는 예배가 개최되었을 때 설교자였던 박형룡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위대한 경건인이요, 전도자요, 신앙의 용사요, 나환자의 친구요, 원수를 사랑한 자요, 성자이다. 긍의 일생은 기도로 호흡 삼고, 성경으로 양심을 삼아 영적 만족과 감사, 충만함으로 찬송을 끊지 않는 희생의 경건인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부흥사경회를 통한 감옥에서의 전도 등으로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그는 부흥회를 5년 남짓하여 약 60여회를 인돟T다. 그리고 그는 또 위대한 신앙의 용사로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수년 간 옥고를 치른 분이다. 나환자의 위대한 친구로 부산 나병원 전도사로 교육을 시작한 이래 여수 애양원과 나환자 교회에서 남은 여생을 헌신했다. 또 그는 원수를 사랑한 위대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고 오히려 자식으로 삼아 회개시켰다. 그는 양떼를 위해 의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신 위대한 순교자이다.


손양원 목사는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믿음으로 사셨고,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 대한 확신으로 살았다. 이것이 그의 신학이었다. 그는 이 신학적 기초 위에서 사랑과 화해와 용서를 가르친 한국교회의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