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목사 청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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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목사 청빙제


담임목사청빙의 문제점과 대안


노상규 목사




“담임목사 청빙 : 본 교회에서 사역할 목사님을 모십니다.

1.제출서류 이력서,자기소개서,주민등록등본,신대원졸업증명서

2.보내실 곳 000도 00시 00읍 001리 000번지

3.문의 000-000-0000 ***장로

대한예수교장로회 00교회”




“담임목사 청빙 : 본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교단 00노회에 소속된 교회로서 고신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며 개혁주의 신앙을 확립하여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생활원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본 교회 담임목사님의 정년퇴임에 따라 위의 사명과 소명의식을 가진 담임목사님을 아래와 같이 청빙하고자 합니다.

@자격 1.연령 : 만40세 이상~55세 이하 2.학력 : 정규대학 졸업 후 본 교단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분 3.경력 : 본 교단에서 목사 안수 후 5년 이상 담임 또는 부목사 경험이 있으신 분

@ 제출서류 1.자필이력서(3개월 이내 촬영한 본인 사진 첨부) 1부 2.본인 소개서(성장배경, 가족사항, 목회경험을 중심으로 A4용지 3매) 1부 3.사모 소개서 1부 4.주민등록등본 및 호적등본 각1부 5. 노회소속증명서 1부 6.대학이상 학교 졸업증명서 각1부 7.건강진단서(사모포함, 종합병원 발행)1부(단, 요청 시 추후 제출함) 8.목회관 및 목회계획서 제출(A4용지 3매)1부 9. 현재 사역중인 교회의 주보 및 최근 설교 CD 혹은 동영상 2회분

@ 제출기한 : 2010년 00월 0일(금) 당일 소인 유효

@ 제출처 : 000-000 **0도 00군 00읍 00리 00우체국 사서함 0호

대한예수교장로회 00교회 청빙위원장 000

@ 참고사항 1. 제출된 서류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2. 서류는 반드시 등기우편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3.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를 이력서 상단에 기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4. 선임된 분은 개별 통지합니다. 5. 연락처 : 00교회 청빙위원장 000장로(H.P000-000-0000)

대한예수교장로회 00교회 담임목사 청빙위원회”


최근 우리교단지인 기독교보 광고란에 실린 “담임목사 청빙” 내용이다. 처음 교회는 시골의 작은 교회이고, 두 번째 교회는 시골이지만 역사와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진 교회이다. 두 번째 교회의 광고의 내용은 담임목사 은퇴로 후임 목사를 청빙하기 위한 광고인데, 담임목사가 교회를 이동하거나, 사고가 생겨서 유고시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광고를 하고 있다. 흔히 우리 교단지에서 볼 수 있는 광고의 내용이다. 도시의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는 두 번째 것에 박사학위증, 저서 등도 요구를 한다. 대부분의 교회가 이렇게 교단지에 광고를 한 후 적게는 20~30명의 지원자들의 서류를, 많게는 70~100명의 서류를 받게 된다.


이 후의 소위 청빙(? 필자는 이것은 청빙이라 할 수 없고, 모집이라 보기에 ?표를 한다.)절차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청빙위원들이 모여서 나름 만든 기준을 따라 서류심사를 하게 된다.

“이 목사는 졸업한 대학이 3류 라서 탈락!”

“이 목사는 건강 상태가 의심스러우니 탈락!”

“이 목사는 목회 비전이 시원치 않으니 탈락!”

“목사는 좋은데 사모가 안 되겠는데, 탈락!”

“이 목사는 자녀들이 셋이나 되네, 아이쿠 안 된다 안 돼, 탈락!”

이렇게 서류심사를 통해 탈락자를 구분하고, 선택된(?) 남은 후보자 7~10명쯤의 CD설교나 동영상 설교를 청빙위원들이 같이 시청을 한 후에 각기 의견을 교환하거나 만든 체크리스트를 따라서 점수를 매기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취합하여 총점을 매긴 후 3~5명으로 후보군을 압축을 한다. 그리고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목사들에게 연락을 하여 “주일 오후나 수요일에 설교를 하러 오실 수 있나요?”하고 물어 스케줄을 짠다. 그리고 한 분 한 분이 와서 설교를 할 때마다 온 교인들은 설교에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채점을 하게 된다. 특히 책임을 맡은 청빙위원들은 초롱초롱한 눈빛과 함께 귀를 활짝 열고 설교하는 목사의 일거수일투족을 한순간도 놓지 않고 보면서 점수를 매긴다. 그리고 설교자에게 사례 봉투를 건네며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보낸다.


이렇게 최종 후보군의 설교를 다 들은 후에 청빙위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그 중에 한 명을 담임목사로 청빙키로 결정을 하고, 공동의회를 열어 최종적인 결정을 한다. 그런데 이 때 청빙위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투표를 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일정한 표를 얻지 못하여 이제껏 진행 했던 것은 무효로 하고, 처음부터 청빙절차를 다시 밟는 교회도 보았다. 다행히 청빙위원들의 마음도 모아지고, 공동의회도 통과가 되고 나면, 정기노회나, 임시노회를 열어 청빙절차를 밟게 된다. 그래서 청빙하는 교회가 속한 노회가 먼저 청빙절차를 밟고, 오게 될 목사가 소속한 노회에 청빙조회를 한 후 그 노회에서 가도록 허락이 되면 드디어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담임목사 청빙”인가? 필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청빙이 아닌 모집이다.


이런 절차를 따라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 목사들이 청빙이 아닌 모집에 응하게 됨으로 스스로 리더십과 권위의 상당한 부분을 잃은 상태에서 사역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는 자신의 리더십이 세워지기까지 청빙한 교회의 리더십들의 눈치를 볼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그럼으로 자신이 가진 권위나 리더십을 다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되어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주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할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둘째, 청빙한 교회의 성도들도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를 통해 은혜를 받기 보다는 평가자의 자리에 서기가 쉽다는 것이다. 새로 부임한 목사가 우리가 기대했던 목사인가? 우리 교회의 전통을 잘 이해하고 보존해갈 목사인가? 설교는 잘 하는가? 사모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등의 관점에서 목사를 평가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셋째, 청빙위원들에게 부담이 된다. 그 목사를 지지하며 청빙한 분들이나 다른 후보 목사를 지지하였던 분들이나 모두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담임목사가 실수를 하게 되거나,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다른 후보를 지지하였던 분들은 담임목사와 그를 지지하였던 분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고, 그 불만을 표출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의 갈등요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넷째, 담임목사를 자주 교체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청빙해온 목사로 인해 갈등이 생기거나 목사의 실수가 있을 때에, 담임목사를 내보내고(?) 다시 광고를 하면 수 십 명의 지원자가 있을 것이니 무슨 걱정이냐?라고 하면서 담임목사를 쉽게 교체할 여지를 주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교단 내에 이런 교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섯째, 대부분은 그렇지 않겠지만 청빙 받은 목사가 경쟁했던 목사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거나, 스스로 교만해 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청빙 받지 못한 목사들은 자존감에상처를 입거나 교회나 남을 비판, 비방할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방법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방법대로 하였을 때,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청빙에 응하였다면 1차 서류전형에서 탈락될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사모에 대해 소개할 것이 없다. 예수님은 학위도 없다. 현실적으로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강도사가 되고, 훈련을 받은 후 목사가 되면 충분한 것이다. 박사학위나 저술자료 등을 요청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사도 바울은 종합병원 진단서를 제출하면 자동 탈락이다. 교회가 새로운 담임목사를 모시는데 병약한 분보다는 건강한 분을 모시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약한 자를 들어서 쓰시는 하나님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세상에 어디 완전한 방법이 있겠는가? 그러나 몇 가지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 본다.

첫째, 총회기구의 활용이다. 총회본부에서 교단 목회자들에 대한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필요가 있다. 물론 이미 교단 목사들은 총회에 이력서를 제출함으로 그 자료가 비치되어 있는 줄 안다. 이 이력서의 내용을 입력하여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임지이동, 신상변동 등의 내용을 수시로 업그레이드를 하여 교단 목사들에 대한 최신정보를 갖추고, 교회가 요청할 때 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밑 자료가 갖추어지면, 목사의 나이, 가족관계, 학력, 경력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총회 내에 특별 위원회를 만들 수 있다. 일반 상임위원회와는 달리 교단에서 인정받는 목회자(은퇴목사 포함)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기구를 만들어 그들이 우리교단 목회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시로 수집하고, 정리하여서 교회가 요청할 때에 추천하거나,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 비밀 보장을 바탕으로 부목사들이 담임목사로 섬기기를 원하거나, 현 담임을 하고 있는 목사들 중에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임지를 옮기기를 원하는 분들이 이 위원회에 의사를 전달하거나, 준비된 양식을 작성하여 제출하면 위원회가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교회의 요청이 있을 때에 적절히 연결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담임목사가 은퇴를 앞두게 되면 적어도 5~7년 전부터 그 교회가 다음 담임목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교회 부목사 출신이나, 현 부목사 중에 교회에서 검증된 분 중에 한 분을 은퇴하는 담임목사가 천거하여 청빙절차를 밟으면 되는 것이다. 최근 우리 교단에서 이런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현행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 제도이고, 무리수가 적은 청빙절차이다.

넷째, 담임목사의 유고 등 갑작스럽게 담임목사를 청빙해야 할 경우에는 그 교회의 청빙위원들이 그 교회를 잘 아는 교단 내의 명망 있는 분을 찾아 천거를 받아 청빙절차를 받을 수 있다.


위의 방법들로 청빙하는 교회가 필요로 한 담임목사에 대한 자료를 갖추게 되면 그 분들을 불러 설교나 면접을 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청빙위원들이 그 목사를 찾아가 교회의 형편을 알린 후 청빙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말 그대로 청빙이 되는 것이고, 청빙 받은 목사는 부임 후에 바로 리더십을 갖추고 사역에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청빙위원들이나 교회가 갈등 없이 새로운 담임목사의 리더십 하에 은혜롭게 서로를 섬기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목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목사로 부름을 받았으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지해야 한다.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고, 사람을 의지하기 시작하는데서 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목사는 정말로 하나님과 교회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스스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자. 교단신문에 목사청빙광고가 났는데, 정말로 모든 목사가 청빙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 교회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임지를 기다리고 있는 목회자를 찾아 청빙을 하지 않겠는가! 목회를 하다가 실패를 할 수도 있다.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새로운 임지로 부르실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목사로 부르셨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일터로 당신의 종들을 보내실 것이다. 이에 대한 절대 믿음이 필요하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자마자 복음 전도자로 나섰다. 그러나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 때문에(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는 아라비아의 경험과 낙향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고향 다소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바나바가 그곳까지 찾아와서 그를 안디옥교회로 청빙하여 갔던 것이다. 바울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이 부름 받은 목사의 임지를 책임지실 것이다. 그 때까지 훈련기간이라 생각하고, 때를 기다리며 주님과 교회의 부름을 기다릴 수는 없을까!


2010년 09월 15일




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 의견


황창기 [2010-09-18]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주심에 감사
노 목사님의 제안을 읽고 신선하게 느낍니다. 문제점이 에사일이 아닌데... 대책이 없어보이는 중에 귀한 제안 감사합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 바랍니다.














청빙위원회의 청빙은 청빙인가, 초빙인가, 아니면 채용인가?


코닷연구위원회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채용하는 형식으로 목사를 청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교회는 목사를 청빙하는 것인가 아니면 채용하는 것인가? 청빙과 채용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만일 목사를 청빙하는 것이라면 채용하는 형식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며 반면에 채용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청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단(고신) 헌법 교회정치 36조는 ‘목사의 청빙’을 다루고 있으나 청빙 절차만 있을 뿐 그 말에 대한 정의가 없다. 필자가 알기로는 ‘청빙’(請聘)이란 ‘청할 청’에 ‘찾아갈 빙’의 합성어로 ‘찾아가서 청한다’ 즉 ‘부탁하여 부름’을 의미한다. 반면에 ‘채용’(採用)이란 ‘캘 채’에 ‘쓸 용’의 합성어로 ‘캐내어 사용한다’ 즉 ‘사람을 골라서 씀’을 의미한다.


부탁하여 부르는 것과 사람을 골라서 쓰는 것은 의미상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 목사 청빙은 다양한 공채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 내에 팽배해져 있는 불신 풍조이다. 장로는 목사를 믿지 못하고 교인들은 장로들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목사 청빙에 있어서 핵심 역할을 감당해야할 당회 대신에 새로운 임시 기구인 ‘청빙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청빙위원회’의 조직은 아마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볼 때 가장 민주적인 제도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에서 이제는 거의 당연시 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회를 불신하여 만든 ‘청빙위원회’치고 담임목사의 청빙을 문제없이 단번에 잘 해결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 아니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왜 그럴까?


담임목사의 청빙 문제로 대부분의 교회들마다 골머리를 앓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담임목사의 권한이 거의 절대적이며 이 권한이 지나치게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장로가 목사의 이런 권한을 자신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목사에 대한 사적인 반감 역시 결코 덜하지 않는 중대한 원인이다. 여기서 목사와 장로의 공통적인 문제는 갈등의 주범이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인 경우가 많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신이 그런 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교회 공동체를 위한 ‘공적’인 생각이 앞서할 위치에 있는 주요 직분자들이 사적인 욕심이나 감정 때문에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번 시작된 갈등은 쉽게 해소가 되지 않는다. 당회원 사이에 발생한 갈등은 결국 신자들이 당회를 불신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장립집사의 역할과 당회원의 아내가 아닌 권사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래서 교회 직분자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갈등과 반목은 아무리 좋은 교역자가 온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따지고 보면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신앙적이기 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오히려 신앙적으로 의로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교회의 내분은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과정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래서 보다 합리적인 청빙 방법을 찾게 되고 그 방법으로 청빙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된다.


하지만 목사를 좀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청빙하기 위해 조직된 청빙위원회는 과연 목사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청빙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그와 같은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당연히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개모집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공개모집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민주적이고 객관적일까? 우리나라는 국가가 실시하는 시험을 통한 공개채용(예를 들면, 행시, 사시, 외무고시, 공무 시험 등) 외에는 채용 과정에서 객관성이 무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대기업의 공채조차도 인맥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성도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청빙위원들이 가능한 사심(私心)을 배제하고 교회를 위한 신앙적 공심(公心)을 발휘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굳이 여기서 미주알고주알 캐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좀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목사를 청빙하기 위해 만들어진 청빙위원회가 왜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이며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구로 쉽게 변질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의 심성 자체가 객관성과는 조금 거리가 멀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비뚤어진 파당적 의협심이 공심보다는 사심으로 기울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거듭나지 못한 심성, 지나치게 인간적인 개성이 교회를 위한 공적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주범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바른 신앙의 부재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청빙위원회가 그렇게 객관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심사숙고하여 목사를 청빙(?)했다면 아마도 그들 입장에서 그 목사는 그 교회를 위해 최고의 목회자일 것이고 최고의 목회자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청빙위원회를 통해 청빙(?)된 목사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청빙된 목사보다 낫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실례가 얼마나 되는가? 청빙위원회를 통해 초빙(?)된 목사의 목회 사역 역시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을 순전히 목사 개인의 자질 탓으로만 돌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청빙위원회가 과감하게 버린 전통적 방법으로 청빙된 목사나 청빙위원회를 통해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초빙 내지는 채용된 목사나 다른 것이 무엇인가?


담임목사이건 부목사이건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은 공개채용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청빙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빙이나 채용이라고 해야 옳다. 그리고 사례라는 말 역시 현실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용어이다. ‘목회자 생활비’ 내지는 ‘급여’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물론 합리적인 것이 항상 성경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진리 문제나 건덕(建德)의 문제가 아닌 이상 고칠 것은 고치는 것이 좋다.


만일 교회가 계속해서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해야 한다면 목사초빙 내지는 목사채용이라고 용어로 고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란 그 의미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청빙’이라는 말을 고집하고 싶다면 청빙이라는 용어에 맞는 내용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가 목사를 초빙 내지는 채용한다면 더 이상 성경이 요구하는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운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초빙과 채용은 민주적인 사회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목사 청빙이라는 성경적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빙 내지는 채용된 목사에게 성경적인 목회자이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초빙과 채용의 방식으로 성경이 요구하는 목회자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청빙위원회를 만들고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이 아직도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그런 방법을 도입한다고 해서 목사청빙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것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빙위원회와 공개채용의 형식이 이전의 전통적인 목사청빙 방법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새로운 다른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 어쩌면 방법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당회에 대한 불신과 교인들 상호간의 불신이 청빙위원회를 조직하게 하고 공개적인 모집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 위에 건설되어야 할 교회가 불신 때문에 분열과 혼란을 겪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교인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당회가 있는데 왜 장로교회는 청빙위원회라는 새로운 임시기구를 만들어야 하는가? 혹 청빙위원회는 장로회라는 교회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임시기구가 아닐까?


청빙이란 개혁교회가 가진 좋은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담임목사를 모실 때 먼저 지역교회의 당회가 교회의 사정과 형편을 충분히 고려하되 자신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목회자를 찾는다. 그리고 당회원들은 주위의 가까운 교회의 목회자나 명망 있는 목회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하여 후보를 결정한다. 이것이 역사적인 개혁교회가 추구해온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이다. 당회원들이 가능한 사심이 아닌 공심을 발휘한다면 아마도 당회는 청빙위원회라는 새로운 임시기구를 조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신뢰받는 역할을 수행하고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목회자를 찾고 목회자는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교회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교회가 우리 자신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적인 사심이 앞서기 보다는 신앙적인 공심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09월 14일




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 의견

이광수 [2010-09-15]

귀한글 감사 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동감 하는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필자의 부족한 소견으로 몇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1)“목사의 권한이 거의 절대적이다” 라는 말은 “절대적인 경우도 있을수 있다” 등으로
수정 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는 교회도 목사도
많기 때문입니다.
2)“초빙 혹은 채용으로 모신 목회자에게 성경적인 목회를 기대하는것은 어불성설이다“ 라는 말은 “기대하는것은 문제가 있겠지요” 등으로 고첬으면 더 바람직 하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3)청빙 방법에 문제가 많은것도 시인하며 더 바람직한 방법과 철차를 도입하는 것을 찬성 합니다.
4)그렇지만 필자의 소견으로는 우리 주님께서 인간의 치졸한 청빙방법 까지 협력하여 역사해 가심을 믿고 목사청빙 배후에 하나님께서 세밀하고 선하게 자기 뜻을 이루시는 손길이 있음을 알고 “선하게 인도해 주십시요 “라고 합심하여 온 교회가 간절하게 회개하며 기도하고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5)고후 3장 2절에 바울 사도는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 성령의 역사가 바울의 사역을 증거하는 편지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걸어온 목사의 목회의 발자취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근거로하여 청빙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 합니다. 감사 합니다.














청빙이란 무엇인가?
- 목사의 입장에서 -


정주채 juchai@chol.com



필자가 어느 교회 임시당회장으로 있던 때의 이야기다. 그 교회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목사들을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장로들이 모여, 목사들이 스스로를 천거하며 제출한 이력서들을 펴놓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분은 이력서도 쓸 줄 모르는 것 같애....” “하아, 이 분은 경력이 화려하구만. 경력이 화려한 사람치고 제대로 일 잘하는 사람 드물지. 안 그래?” “이 분은 내가 잘 아는 목사님을 통해 자기를 좀 잘 소개해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을 했다더군.”

필자는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참으로 민망하였다. 사실 그 교회는 담임목사를 청빙한다고 어떤 광고도 낸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력서가 20통 가까이 들어왔다. 목사들이 잡(job)을 구하는 사람들처럼 행동하여 스스로 청빙의 의미와 무게를 추락시키고 있었다.

1. 청빙의 의미

청빙은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교회가 대행하는 것이 청빙이다. 성령강림 이전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파송하셨다. 또 선지자들에게 계시로 말씀하셔서 그가 세우실 자들에게 기름을 붓게 하시고 일을 맡기셨다.

그러나 성령강림 이후에는 달라졌다. 직접적인 부르심이나 제비뽑는 방법이 교회를 통하여 선택케 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언제나 함께 하심으로 모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교회임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받드는 권위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지만, 역시 개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온전치 못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교회가 모여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고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이것이 더 완전하고 객관적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시는 일을 하신다. 개인적으로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를 통하여 그 소명이 확인되고 확정된다.

이것은 목사청빙뿐 아니라 일반 직분자들을 선택하고 세울 때도 똑 같이 적용된다. 교회가 직분자를 선택할 때 투표를 하는 것은 단순히 민주주의를 따르는 행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 사상에 따라 백성들이 그들의 대표자를 선택하고 세운다는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투표한다. 그러나 교회가 회의를 하거나 투표하는 것은 여론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어 이런 경건을 잃어버리고 인본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다. 사람을 세우는 교회도, 세움을 받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세우심에 대한 신앙과 경외심이 없다. 그러기에 심지어 선거운동을 하는 기이한 일까지 벌어지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자신이 선택되지 못하면 사람들을 원망하고 물의를 일으키는 희한한 일까지 희한하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청빙이 무엇인가? 청빙은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수행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믿음과 경건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한갓 인간 놀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청빙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꾼을 세울 때 기본적으로 갖는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빙은 그것을 받는 자나 하는 자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믿음과 경건이 있어야 하며, 거기에 합당한 품위가 있어야 한다.

2. 목사들이 먼저 청빙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다.

근년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추었다. 그러나 교회가 한창 성장하던 7-8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신학교들은 계속 성장(?)하여 지금은 연간 일만 명에 가까운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 중에서 목사로 임직하는 사람들이 6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목사들은 많고 교회는 적어 갈 곳 없는 목사들이 많다.

사실 신학교를 나왔더라도 교회의 부름이 없으면 장립을 시켜서는 안 된다. 비록 본인은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수업을 했다하더라도 교회를 통하여 그 소명은 확인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고 내적인 부르심은 교회적인 외적 부르심을 통하여 확정된다는 원리이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 - 장로교의 경우 노회와 총회를 포함하여 - 는 이런 중요한 기능과 권위를 상실하거나 방기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래도 법적인 요건을 갖추려는 노력은 남아있다. 예를 들어 지교회의 부름이 없으면 노회가 어떤 특정 지역이나 기관이나 사역에 전도자로 파송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이 크게 남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디에서도 부름이 없고, 또 노회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무조건 전도목사라는 명칭으로 장립을 시키는 것이다. 목사로 안수를 해 줄 터이니 스스로 책임지고 일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목사직의 경박함과 타락(?)이 일어나고 문제는 심각해진다.

구체적인 부름 없이 안수는 받았고 갈 곳이 없으니 억지 개척을 하거나, 어느 교회가 한 곳 비면 그 교회에 청빙을 받으려고 취업을 하듯이 치열하게 노력을 하게 된다. 중대형 교회들에는 덜 하지만 소형 교회들에는 담임목사가 비면 지원서[이력서]가 수십 통씩 들어온다고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도 경건도 다 뒷전이 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회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 그 일을 수행하는 조심성과 경건을 잃어버리고 고용주와 같은 행세를 하게 되었다.

3. 교회가 자신들을 위하여 다시 청빙의 품위를 살려야 한다.

1) 목사청빙의 현실
근래에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청빙과정을 보면 회사들이 직원을 채용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중소교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목사를 청빙한다.

우선 교단 신문 등에 청빙광고를 낸다. 거기 보면 요구하는 제출서류가 있는데, 이력서, 자기소개서(여기다 목회철학, 비전 등을 진술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주민등록등본, 신학교졸업증명서, 목사장립확인서, 추천서 등이다.

이런 서류들이 들어오면 청빙위원들이 모여 서류를 검토하고, 일단 청빙대상자를 압축한다. 압축된 명단을 가지고 위원들이 각기 여러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분들을 설교자로 초청해서 설교를 들어보고, 면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로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다. 어떤 교회들은 일차 선정된 목사들을 차례로 초청해서 설교를 듣고, 면접(?)을 한다. 청빙위원들은 심사위원처럼 되고, 목사는 지원자가 된다. 필자가 아는 교회들 중에는 같은 날 청빙 대상자들을 다 초청해서 차례로 면접을 한 교회도 있고, 심지어 어떤 교회는 설교 후 교인들이 다 모인 가운데 청문회(?)를 한 교회도 있다.

목사청빙이 이렇게 품위 없이 이루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목사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많고 지원자도 많으니 교회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잘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장로들은 "믿을 수 없는 목사들이 많은 것이 현실 아니냐"고 말한다. 이해가 된다.

그러나 목사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이다. 성경은 목사를 양무리의 목자로 비유한다. 이런 지도자를 청빙하는 일은 그 직분과 권위에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유익하다. 교회가 직원을 채용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목사를 청빙하고서야 어떻게 그를 존중하며 그의 가르침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영적인 권위가 서지 않는 목사로부터 어떻게 신령한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2) 품위 있는 목사청빙 방법은 없나?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어떻게 하면 경건과 예절을 갖추어 합당한 사역자를 선택하여 청빙할 수 있을 것인지를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이에 그 절차와 유의할 점들을 생각해 보자.

청빙위원회가 구성되면 무엇보다 먼저 기도회를 가져야 한다.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합당한 자를 보내주시도록 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목사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자"라고 한다. 이것이 지금은 목사를 구별하고 높이는 말로 사용되고 있지만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시고 파송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의를 하거나 투표를 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와 깊은 경건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동역자들의 추천을 받는 것이 좋다. 청빙광고를 통해 들어오는 이력서에 의존하기보다 주변에 있는 목회자들로부터 추천을 받는 방법이 안전하다. 혹은 자원해서 보내온 이력서를 참고한다 할지라도 그분들을 잘 아는 분들은 역시 동역하는 목사들이므로 천거를 받을 수 있다. 어떤 교회는 스스로 이력서를 보내온 목사에 대해서는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보았는데, 목사청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에 대한 천거를 받으려면 선배, 연배, 후배 목사들에게 다 물어봄이 좋겠고, 현 시무교회나 이전 시무교회의 교인들에게 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부목사의 경우는 담임목사가 추천하고 당회(혹은 청빙위원회)가 결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때론 담임목사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목사를 청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교회에 아무 유익이 없고 문제만 더 커질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구든 의도를 가지고 사역자를 이용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셋째로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나 가능하면 초청해서 들어보기보다는 시무하는 교회를 방문하거나 인터넷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보는 것이 좋고, 더 중요한 것은 한번의 설교보다 평소에 그의 말씀사역이 어떠하며 그 열매가 어떠한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설교 한번 들어보고 판단하기는 일은 매우 어렵다. 평소에 성실한 설교자인데도 어떤 경우는 반응이 좋지 않을 수도 있고, 평소에는 말씀 사역이 약한데도 한두 번은 매우 은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청빙대상이 압축되고 접촉순위가 대략 정해지면 청빙위원들이 해당 목사를 만나 대화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의 형편을 이해해야 청빙여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언제나 살피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경건의 자세이다.

결언
교회의 영성이 추락하니 인본주의가 크게 득세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전의식(神前意識)은 점점 사라지고 경건은 말만 남은 상황이 되고 있다. 특히 교회가 사람을 세우고 부르는 일이 세상 정치세계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지니 교회의 모든 법과 제도도 껍데기만 남았다. 한국교회가 본류에서 너무나 크게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의식이 있다는 사람들, 소위 교회 갱신론자들 가운데도 교회를 하나님의 신이 주재하시는 신령한 공동체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적고, 교회갱신을 단순히 민주화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만 많다. 주의 일에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기보다 세상적인 자를 가지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먼저 교회가 말씀과 기도로 거룩성을 회복해야 한다. 민주적인 방법이나 절차 자체보다 그것을 통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신앙과 경건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곳에 “청빙”인들 어찌 “구직”이나 “채용”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이 없으면 청빙은 머지않아 현대판 시모니가 되고 말 것이다.















복음의 은혜가 목사 청빙에도 적용되기를...
청빙 논의의 정리 - 추천을 요청하는 공고를 하자.


이세령 leesr624@gmail.com



목사의 청빙은 교회가 말씀 즉 복음을 영접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선물로 직분자를 불러 세우시듯이 목사를 불러 세우신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교회에 주신 목사를 즉 말씀을 영접한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교회의 부름 즉 외적 소명이 중요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교회적 질서가 전부는 아니지만 목사가 지원 하게 만드는 공고를 함으로 점차 왜곡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조명하면서 목사 청빙의 바른 입장을 논의하였다. 논의의 결과 떠오르는 것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목사들의 자료 D/B의 필요성
교회의 목사를 청빙해야 할 때 현재 교단에 있는 목사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데이타베이스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요한 교회의 상황에 대처할 필요를 전체 교회가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총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2. 지원하는 방식의 공고에 대한 이해
여러 논자들은 기독언론에 목사의 청빙을 공고하는 현실이 청빙의 적합한 방식일까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시장 경제 원리 방식인 회사가 직원을 채용하는 방식으로는 말씀의 영접으로서 목사를 청빙하는 원래의 취지를 훼손한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교회들이 목사 청빙에 있어서 목사들이 지원하는 방식의 공고를 지양하면 좋겠다. 거듭 목사들이 자천하는 방식이 되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는가?

3. 자리가 비워졌고, 따라서 적절한 목사를 추천을 해 달라고 공고.
목사들이 지원하는 양식의 공고를 지양한다면 대안이 무엇이겠는가? 주변에서 해당 교회 당회나 청빙 위원회에 적합한 목사를 추천하는 방식이 좋다는 일치된 견해이다. 그런데 실제로 오늘날 교회의 수가 많고 목사의 수가 많다. 우리 교단이 크지 않지만 그럼에도 전체를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청빙의 문제는 한국 장로교회 전체의 문제이다. 따라서 목사를 청빙하는 교회가 이 사실을 공지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럼으로 같은 교회들이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면 협력할 수 있다.

그래서 공지가 필요하다는 것과 자천이 아닌 추천이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는 두 변수를 잘 조화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추천을 요청하는 공지를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적합한 담임 목사를 추천해 달라고 교회 앞에서 공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변에 그 교회를 잘 아는 분들이 또 적절한 목사를 추천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그래서 추천이 되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접촉을 나누면서 청빙 절차를 밟게 된다. 현재 논의의 중심에 있는 것이 목사가 지원함으로 생기는 말씀의 영접으로서 목사의 청빙이란 의미를 퇴색시키는 문제이다. 또한 교회도 말씀을 받는 자세라기 보다는 회사 직원 공채 과정과 같은 갑을 관계에 서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따라서 주변에서 좋은 목사를 추천함으로 교회는 추천을 받아드리는 자세로서 추천된 분들을 중심으로 청빙과정을 밟으면 된다.

그리고 추천을 할 때 어떤 내용을 추천해야 하는가는 교회의 형편을 따라서 공지할 수 있다. 그리고 추천자가 이런 필요를 성실하게 추천함으로 청빙의 과정에 신뢰를 더 하여야 하겠다.

4. 청빙 결과를 공고하고, 본인의 수락 여부를 공고한다. 그리고 부임을 공고.
일단 추천을 공지하여서 전 교회에게 알렸다면 사후에 결과도 공지함으로 교회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일반적으로 개혁교회들은 청빙 절차를 밟아서 청빙 대상이 결정되면 이를 기독 언론에 공지를 한다. 물론 본인에게도 통고를 한다. 그러면 본인은 수락의사를 일정기간 가지면서 표시한다. 이것 역시 해당 교회는 물론 기독 언론에 공지를 한다. 그럼으로 교회의 청빙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온 교회가 알게 된다. 우리 교회가 이런 과정까지 필요한지에 대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나 일단 공지를 한다면 전체 진행을 공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기독 언론은 목사 청빙의 추천이나 청빙 대상자 확정, 그리고 청빙 수락 여부에 대한 공지를 교회 소식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부임이나 위임에 대한 공지까지 함으로 완료된다.

5.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목사 청빙 공고와 지원이란 현실적인 관행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추천을 공고하고 청빙의 일련의 과정을 공고하는 방향으로 축을 돌릴 때에 생기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다.

1) 현재 질서로 인한 교회와 목사들의 상처의 치유로서 복음의 은혜
현재의 공고와 지원이란 방식을 통해서 목사의 권위가 많이 실추된 현실이다. 여기에 실제적으로 많은 목사들이 교회의 청빙 과정에서 이력서와 필요한 서류들을 낸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논의들은 청빙 공모를 했던 교회들과 지원을 경험했던 목사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아니다. 현실적인 우리 교회들의 선택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교회 질서를 이끌려는 중심을 이해해 달라.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교회가 가진 복음적 질서를 세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복음적 질서라는 표현은 복음의 은혜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생활과 질서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가치가 바로 복음이다. 시장 경제적인 질서는 안 된다. 복음의 말씀을 영접하는 행위로서 청빙 행위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신학교를 위해서 값없이 헌금하고, 신학교는 교회를 위해서 말씀의 사역자를 배출했다. 이런 가운데 교회는 값없는 은혜로 주어지는 말씀의 사역자를 받는 질서를 만들자. 그리고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의 은혜를 가지고 교회의 부름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에 철저히 의존하는 태도가 복음을 설교하는 자들의 태도이다. 교회의 목사 청빙에 있어서 교회와 목사 양측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서 복음적 수용의 태도를 가지는 방식이 추천의 방식임을 상기해 보자. 교회가 추천을 교회들에게 요청하고 받으려는 태도가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목사도 추천된 결과를 수용하는 태도가 나타나게 된다. 목사 청빙에 이런 복음적 태도가 스며들도록 우리 교회 질서를 가꾸어 가기를 소망한다.

2) 과도한 졸업생들.
현재 청빙 과정에서 공모와 지원의 현실은 목사들의 수가 교회 수 보다 많은 것에 원인이 있다. 신학교는 여러 필요에 의해서 수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목회자의 은퇴, 선교사나 기관 목사들의 필요, 또한 개척 등의 교회 성장의 현실을 감안하면서 신대원은 졸업자 숫자는 잘 조절하는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란다. 물론 도시 교회, 혹은 중 대형 교회들이 강도사나 젊은 부목사를 구하는 일은 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안다. 이런 당장의 필요나 요청에 굴복해서 전체적 수급에 실패하면 안된다. 신대원이 스스로 조절 못한다면 결국은 교회나 노회가 이를 총회에 상정하고 결국은 지시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것이다. 막연하거나 혹은 너무 추상적인 태도는 좋지 않다. 교회에 적합한 수의 사람들을 잘 훈련시키고 배출하는 신학교가 되기를 바란다.

3) 담임 목사 이외에도 청빙은 유효한가?
이번 논의에서 주로 담임 목사 청빙을 다루었지만 그러나 교회의 모든 직분은 동등하고 마찬가지로 교회의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다. 따라서 부목사나 강도사, 그리고 전도사 또한 선교사를 세우는 일, 기관 사역자들 모두 마찬가지이다. 만약에 담임 목사만의 문제로 다룬다면 교회가 철저한 일관성을 결여한 것이다.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들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글을 정리하면서
앞서 언급한 대로 현재의 목사 청빙 질서를 복음을 영접하는 행위로서 회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측면에서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목사를 개 교회로 위임해서 보내는 노회나 총회가 중심이 되어서 인력 D/B를 만들고 적절한 사람을 소개하고 추천하고 세워야 하겠다.

추천이 최상의 방식이지만 그러나 여기에도 타락한 죄성은 작용할 수 있다. 즉 추천에 있어서 사심이 들어간다. 또한 추천자와 후보자간의 관계에서 이미 자천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것을 다 막을 길은 없을 것이다. 교회가 가진 복음의 은혜에 자신들을 머물러 두기를 소원하는 중심이 필요하다.

이상과 같이 그 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대안을 제시해 보았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있어야겠다. 목사 청빙에 대한 모임을 열어서 목사 자신들이나 개교회들의 관심과 청빙의 의미를 확인시킬 필요가 있다.










담임 목사 청빙에 대한 몇 가지 제안


강영안 장로




▲ 강영안 장로

서강대 철학과 교수
두레교회 장로
현재 미국 칼빈 칼리지 초빙 교수

땅위에 사는 동안 좋은 사람을 만나 삶을 함께 나누는 만큼 큰 복이 어디 있겠는가. 부부 나 사제(師弟), 선후배나 친구뿐만 아니라 목사와 성도 사이에도 사랑과 신뢰와 상호 소통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 친구 문제로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듯이 목사님들 가운데는 성도들 문제로, 성도들 가운데는 목사님 문제로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우리 기독교계 경향 가운데 우려할 일은 평신도들만 모이는 교회가 이제는 점점 낯설지 않게 보인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 가운데서도 대부분 전문직에 종사하는 3, 40대 젊은이들 가운데 이런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동기가 현실 교회에 대한 실망이고, 현실 교회에 대한 실망은 대체로 담임 목사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는 것을 자주 본다. 성도들의 은사를 충분히 인정하고 활용하기 보다는 목회자 독단으로 일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모습이나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다거나 말씀 사역에 열심을 내지 않고 다른 일에 관심을 더 많이 둔다거나 하는 것들이 성도들에게는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된다. 목회자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많이 늘어나면 날수록 목사 청빙 문제는 어려워진다. 조건이 늘어나고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워지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이다. 목회자 문제로 열 가정이 한꺼번에 나와 따로 예배를 드리는 그룹이 있었다.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어느 목회자를 그 교회에 추천을 해서 보냈는데 청빙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청빙 과정에 중심 역할을 했던 장로에게 사정을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들이 듣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고 했다.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으며, 소형 교회를 지향하기를 성도들은 기대를 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았으며, 설교가 성도들의 관심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람을 잘못 봤을 것이라고 말은 하긴 했지만 좋은 목사님 모시려는 열망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이 목사 청빙에 직접 관여해 본 일은 두 번 있었다. 한번은 1980년대 초반 네덜란드 유학 시절에 암스테르담 한인교회에서 목사 청빙에 관여한 일이었고 또 한 번은 90년대 후반 경기노회 소속 두레교회 당회를 도와 청빙에 관여한 일이었다. 두 번의 경우 역할과 주안점은 서로 달랐다.


암스테르담에서 목회자를 초빙할 때, 주로 관심을 둔 것은 절차였다. 목회자를 초빙하자면 교회가 종교 기관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정관기초위원회를 만들었고 내가 서기를 맡아 정관 초안을 만들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교회 헌법을 읽고 교회법과 교회정치의 역사를 자세히 공부한 때가 이 때였다. 아직도 한인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그 때의 정관을 보면 목회자 청빙과 관련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자세하게 규정이 되어 있는 것은 정관을 만든 동기가 목사 청빙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관이 공동의회에서 통과된 뒤, (다시 내 손으로) 번역하여 네덜란드 법무부에 교회를 종교 법인으로 등록하였고 그 뒤에야 청빙위원회를 구성하여 청빙 절차를 밟았다.


암스테르담 한인교회는 어느 특정 교단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단에 추천을 부탁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교인들이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 세 분에게 추천을 요청했고 그 결과 지금은 명덕교회에서 시무하고 계시는 장희종 목사님을 추천받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어려움이 생겼다. 청빙위원 가운데 친지를 통해서 추천받은 목사님을 끝까지 고집한 가정이 생겼고 이 분들이 교민으로 오래 생활한 분들과 함께 자신들의 안을 관철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결국 공식 결정과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으로 청빙위원회가 애초에 결정한 통로를 통해 추천받은 장 목사님을 초빙할 수 있었다. 청빙 과정에서 특정 인물을 거론하기 전에 절차를 정해 두고 절차를 따라 일을 진행함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이 때 배웠다고 하겠다.


두 번째 경우는 두레교회였다. 초대 목회자였던 정근두 목사님에 이어 장희종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97년 10월 장목사님이 명덕교회로 결정되어 갑자기 옮기게 되는 일이 생겼다. 당시 두레교회 장로님들은 대부분 독립교회였던 일신교회에서 나온 분들로 고신측 목회자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장로님들은 나에게 적합한 목회자를 찾아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두레교회가 어떤 교회로 자라가야 하며 어떤 목회 스타일이 가장 알맞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때 떠오른 키워드가 세 가지였다. ‘지역 목회’, ‘청년 목회’, ‘현실 목회’였다. 목회학 시간에는 아마 이런 단어가 사용되지 않겠지만 두레교회가 처한 상황에서는 장로들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목회자도 지역을 섬기는 일과 청년들을 키우는 일, 그리고 현실 속에서의 성도들의 구체적이고 일상적 삶을 성화시키는 목회에 관심을 둔 분을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한다든지, 영성에 뛰어나야 한다든지, 인품이 좋아야 한다든지, 가정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물론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두레교회는 당시 청빙 위원회를 따로 구성하지 않았다. 장로들이 모두 청빙위원으로 역할 했고 그 가운데 나는 여러 통로를 통해서 추천을 받는 일을 맡았다. 그래서 세 분의 이름을 장로들의 모임에 제출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임시 당회장을 맡은 분이 따로 추천하는 분이 있었기에 그 분도 보기로 했다. 그래서 한 분은 주일 설교와 오후 특강을 하고, 특강이 끝 난 뒤 전 교인들과 한 시간 반 개인의 삶과 가정, 목회철학 등에 관해서 질의토론을 할 시간을 가졌다. 다른 한 분은 수요일 저녁 설교 후, 한 시간 정도 질의 토론할 시간을 가졌다. 두 분 모두 훌륭했고 교회로서는 과분한 분들이었다. 청빙절차가 끝난 뒤, 임시당회장을 맡았던 목사님이 주일설교를 한번 하시겠다고 하셔서 오셨는데, 어떻게 목회자를 불러놓고 질의 토론을 할 수 있느냐고 질책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두 경우 모두 교단 신문에 광고를 내거나 하지 않고 가능한 인맥을 동원하여 교회에 가장 적합한 분이라 생각되는 목회자를 찾았다. 교육 배경이라든가 학위라든가 언어 능력이라든가 요즘 사람들이 자주 거론하는 조건을 내세우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네덜란드 안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전통을 잘 이해하는 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내 개인적으로는 고신측 목사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두레교회 경우는 고신 교단 소속이기 때문에 고신 신대원을 나온 분으로 기본적 자격은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은 청년들 중심 목회, 지역을 섬기는 목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삶 속의 선교사로 성도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세울 수 있는 목회가 가능한 분을 찾으려고 애썼다.


***


신학적 관점에서 이미 목사 청빙과 관련된 논의를 몇 분이 하셨고, 그리고 나에게 요청한 내용이 교회 장로로서 청빙에 관한 의견을 피력해 달라는 것이었기에 나의 한정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목사 청빙을 하고자 할 때 당회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의 절차를 규정하는 일이다. 청빙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할지, 청빙위원회는 어떤 방식으로 활동할지, 가능한 목회자의 명단을 어떻게 만들지, 어떤 순서를 따라서 적합 여부를 판단할지, 당회에는 몇 분을 추천해서 올릴지, 당회에서는 어떤 절차를 통해서 공동의회에 제출할 최종 후보자를 정할지 등을 먼저 정해야 한다. 이미 이러한 규정이 되어 있는 교회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교회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2. 절차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교회의 현 상황에 대한 파악과 미래 비전에 대한 이해이다. 개체 교회는 지역에 따라, 계층 구성에 따라, 구성원들의 연령대에 따라 그 특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어떤 교회나 기본적으로는 비전이 동일하지만 지역과 인적 구성에 따라 세분화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작업은 연역적일 수밖에 없다. 성경의 원리,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 정신, 고신 교단의 특성, 개체교회의 자원과 역량 등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3. 가능한 후보 명단을 만들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밟을 수 있다. 문제는 우선 가능한 인물을 찾는 일이다.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목사 안수를 이미 받은 분 가운데 부목사로 섬기고 있는 분들의 명단을 확보하는 일이다. 소속 노회나 가까운 노회 소속 교회의 부목사들 가운데서 가능한 후보 명단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일 가까운 노회에서 찾을 수 없다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노회 부목사 가운데서 찾는 일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목회를 잘 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청빙 대상으로 삼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4. 그러나 문제는 명단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해당 교회에 적임자인지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 담임 목사, 신학 교수, 동기들을 통해서 나이나 배경, 경험, 사역에 대한 평가, 사람 등에 대해서 알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본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노회 차원에서 이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되 아직 담임 목회를 하지 않는 분들의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예컨대 교단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만일 청빙이 필요한 교회가 있을 경우 그곳에 들어가 자료를 보고 확인하여 가능한 후보를 물색하는 일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5. 마지막으로 교단 신문에 목사 청빙 광고를 내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담임 목사를 청빙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한 교회와 임지를 찾아야 할 목회자가 다 같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는 상황에서 교단 신문에 광고를 내는 방식이 선호되는 것을 현재로서는 중단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느 교회에서 목회자를 찾고 있는지, 어떤 목회자가 올 수 있을지 목회자나 해당교회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나의 대안은 공석이 생긴 교회에 관한 정보와 목사 안수를 받을 강도사와 부목사에 관한 정보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노회 차원에서 찾는 것이다. 정말 공정하게 할 수 있다면 신학교를 졸업하는 강도사부터 교회에서 사역하는 부목사에 이르기 까지 사역지가 필요한 분들과 목회자가 필요한 개체 교회 사이를 연결해 줄 수 있는 부서를 노회 안에 두고 담당 목사와 장로를 세우는 것이 제도적으로 필요할지 모른다. 시장 경제 방식이 목사 청빙에 지속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2010년 09월 12일





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 의견


이광수
[2010-09-15]
귀하신 강 장로님!
귀한글 감사합니다.
세계를 누비면서 고신인의 향기를 은은히 풍기시군요.
60년도 고신 대학보를 창간 할때 랍니다.
장로님은 한번에 여러편의 시를 투고 해서
저는 놀랐답니다.
아름다운 향기 지금도 ................



하만종
[2010-09-14]
최근에 살펴본 글중에 가장 현실적이고, 적용가능한 글이었습니다.
최근에 목사님 청빙과 관련해서 기사가 많이 나왔습니다.
지구촌교회와 할렐루야교회가 후임목회자를 선정했기때문에 국민일보 등에 관련기사가 많이 나왔습니다. 부산에 있는 호산나교회 역시 후임목회자 문제로 기사가 종종 나왔구요.

청빙에 관한 글들을 인터넷에서 100여편 살펴봤습니다.
그중에서 이성희목사님의 글과 지금 강영안교수님의 글이 가장 이해하기 쉽고, 적용하기 좋았습니다.

교회의 사례들이 대부분 비슷하기에 적용하기에 정말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저희 교회도 일의 절차를 규정하는 일에서 미숙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청빙위원회 구성과 절차를 건의했지만, 영적인 리더쉽이 부재인 상황에서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정관 마련은 더욱 힘들었구요. 그렇지만, 공감대 형성은 어느정도 되고 있다고 봅니다. 청빙위원회는 절차를 마련하고, 공정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모두가 공감하는 청빙이 될수 있도록 연구하고, 논의해서 규정을 마련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규정(정관)마련에서 자칫 타교회 정관 등을 참고하여 임기 등을 논의한다면 장로님들의 임기까지 논의될테고, 잘못전해져서 여파가 클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2. 교회의 상황 지역 계층 연령대 등을 고려해서 개교회에 맞게 청빙되어야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개교회의 정체성 역시 쉽게 논의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분은 구제에 중점을 두자, 어떤분은 선교에 중점을 두자, 어떤분은 말씀양육에 중점을 두자 등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이미 계층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연령대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 경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 영적인 리더쉽 부재속에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목사님을 모셔서 지역특성에 맞고, 성도 구성원의 특성에 맞는 우리교회만의 특성을 마련하자고 하는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빙으로 해결할순 없겠지요 ?

3. 이미 목회를 잘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청빙 대상으로 삼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울러 젊은 목회자에 대한 검증시스템 마련이 절실한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말한 교회 방향성이 마련되어 있다면 교회의 방향성과 함께 할 젊은 목회자를 공고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 좋은 목사님이라도 개교회와는 안맞을수도 있으니 시장경제방식과는 다르지 않을까요 ?
검증시스템이라는 것이 이력서나 제출서류에 나와있는대로라면 너무나 아쉬울것 같습니다. 임시당회장에게 질책을 받더라도 우리교회에 맞는 목사님을 모시기 위해 방향성과 정책을 나눌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쉽게도 많은 부목사님들이 개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으나 담임목사과의 관계가 좋지않아 임지를 옮기는 경우도 많기에 검증에서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기도 할것 같습니다.

4. 시장 경제방식이 목사 청빙에 지속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회보다 앞서가야 합니다. 목사의 신뢰도가 높아져야 합니다. 목사의 추천이 힘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의 말이라면 불신하지 않고, 틀림없는 것으로 인정할수 있어야 합니다. 공정성과 객관성은 사회가 교회보다 앞섭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사무엘의 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우리가 알수 있을까요 ? 어떻게 목회자를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청빙할수 있을까요 ? 기도는 기본이겠지만, 어떤 현실적인 노력을 해야 할까요 ?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파송과 추천의 원리는 천주교와 감리교에 많이 있습니다. 장로교는 민주적인 절차에서 장로들의 신앙 양심과 그들의 수준만큼 청빙될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10년 사역하고, 약속대로 사임하고, 사임하기 3년전부터 후임목회자를 위해 준비하고, 기초를 세워가는 100주년 기념교회의 이재철목사님 같으신 분들이 우리 교단에 많아져야 하는데, 한교회 30년을 자랑하는 목사님들이 많으셔서 아쉽습니다.

5. 인간의 한계에 많이 부딪혀 기도합니다. 무수히 많은 말들에 영향을 받고, 자꾸 토의하면서 갑론을박해보지만 유익하지 못한 것 같아 뒤로 물러납니다.
아뭏든 이번 청빙기사는 정말 도움이 됩니다. 함께 공유하고 그렇게 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세령
[2010-09-14]
추천해 달라는 해당 교회의 공지는 어떻겠습니까?
주안에서 강영안 장로님께
목사 청빙과 관련해서 목사의 자료를 비치하는 DB를 만들어 열람하자는 의견과 또한 현실적으로 담임 목사가 공석임을 알리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은 공감이 갑니다. 모집이 아닌 청빙의 방식이 유효하기 위해서 교회가 알린 공지를 통해서 그 교회에 사정을 아는 분들이 해당 교회 당회에 추천을 하는 방식은 어떻겠습니까? 따라서 저의 의견은 교회의 담임 목사의 공석을 알리고 주변의 분들에게 추천을 요청하는 알림을 하는 것입니다. 추천이 들어오면 그 추천에 의해서 청빙위원회는 교회에 합당한 분들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선임이 되고 공동의회를 거치고 나면 개혁교회의 경우 신문에 청빙을 공고합니다. 그러면 청빙을 받은 목사는 수락 여부를 또 공적으로 광고를 합니다(신문에서 실어줌). 이런 과정을 거치면 언론이란 기능을 거쳐서 모든 진행 사실들이 투명해 질 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핵심은 추천해 달라고 언론에 공지를 하는 것입니다. 추천으로 공지하자는 이 견해는 연구 위원회에서 주제 논의를 하면서 그리고 글을 나누면서 가졌던 공감대였습니다.










청빙위원회의 청빙은 청 빙인가, 초빙인가, 아니면 채용인가?


코닷연구위원회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채용하는 형식으로 목사를 청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교회는 목사를 청빙하는 것인가 아니면 채용하는 것인가? 청빙과 채용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만일 목사를 청빙하는 것이라면 채용하는 형식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며 반면에 채용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청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단(고신) 헌법 교회정치 36조는 ‘목사의 청빙’을 다루고 있으나 청빙 절차만 있을 뿐 그 말에 대한 정의가 없다. 필자가 알기로는 ‘청빙’(請聘)이란 ‘청할 청’에 ‘찾아갈 빙’의 합성어로 ‘찾아가서 청한다’ 즉 ‘부탁하여 부름’을 의미한다. 반면에 ‘채용’(採用)이란 ‘캘 채’에 ‘쓸 용’의 합성어로 ‘캐내어 사용한다’ 즉 ‘사람을 골라서 씀’을 의미한다.


부탁하여 부르는 것과 사람을 골라서 쓰는 것은 의미상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 목사 청빙은 다양한 공채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 내에 팽배해져 있는 불신 풍조이다. 장로는 목사를 믿지 못하고 교인들은 장로들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목사 청빙에 있어서 핵심 역할을 감당해야할 당회 대신에 새로운 임시 기구인 ‘청빙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청빙위원회’의 조직은 아마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볼 때 가장 민주적인 제도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에서 이제는 거의 당연시 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회를 불신하여 만든 ‘청빙위원회’치고 담임목사의 청빙을 문제없이 단번에 잘 해결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 아니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왜 그럴까?


담임목사의 청빙 문제로 대부분의 교회들마다 골머리를 앓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담임목사의 권한이 거의 절대적이며 이 권한이 지나치게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장로가 목사의 이런 권한을 자신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목사에 대한 사적인 반감 역시 결코 덜하지 않는 중대한 원인이다. 여기서 목사와 장로의 공통적인 문제는 갈등의 주범이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인 경우가 많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신이 그런 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교회 공동체를 위한 ‘공적’인 생각이 앞서할 위치에 있는 주요 직분자들이 사적인 욕심이나 감정 때문에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번 시작된 갈등은 쉽게 해소가 되지 않는다. 당회원 사이에 발생한 갈등은 결국 신자들이 당회를 불신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장립집사의 역할과 당회원의 아내가 아닌 권사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래서 교회 직분자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갈등과 반목은 아무리 좋은 교역자가 온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따지고 보면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신앙적이기 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오히려 신앙적으로 의로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교회의 내분은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과정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래서 보다 합리적인 청빙 방법을 찾게 되고 그 방법으로 청빙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된다.


하지만 목사를 좀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청빙하기 위해 조직된 청빙위원회는 과연 목사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청빙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그와 같은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당연히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개모집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공개모집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민주적이고 객관적일까? 우리나라는 국가가 실시하는 시험을 통한 공개채용(예를 들면, 행시, 사시, 외무고시, 공무 시험 등) 외에는 채용 과정에서 객관성이 무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대기업의 공채조차도 인맥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성도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청빙위원들이 가능한 사심(私心)을 배제하고 교회를 위한 신앙적 공심(公心)을 발휘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굳이 여기서 미주알고주알 캐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좀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목사를 청빙하기 위해 만들어진 청빙위원회가 왜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이며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구로 쉽게 변질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의 심성 자체가 객관성과는 조금 거리가 멀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비뚤어진 파당적 의협심이 공심보다는 사심으로 기울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거듭나지 못한 심성, 지나치게 인간적인 개성이 교회를 위한 공적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주범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바른 신앙의 부재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청빙위원회가 그렇게 객관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심사숙고하여 목사를 청빙(?)했다면 아마도 그들 입장에서 그 목사는 그 교회를 위해 최고의 목회자일 것이고 최고의 목회자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청빙위원회를 통해 청빙(?)된 목사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청빙된 목사보다 낫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실례가 얼마나 되는가? 청빙위원회를 통해 초빙(?)된 목사의 목회 사역 역시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을 순전히 목사 개인의 자질 탓으로만 돌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청빙위원회가 과감하게 버린 전통적 방법으로 청빙된 목사나 청빙위원회를 통해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초빙 내지는 채용된 목사나 다른 것이 무엇인가?


담임목사이건 부목사이건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은 공개채용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청빙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빙이나 채용이라고 해야 옳다. 그리고 사례라는 말 역시 현실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용어이다. ‘목회자 생활비’ 내지는 ‘급여’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물론 합리적인 것이 항상 성경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진리 문제나 건덕(建德)의 문제가 아닌 이상 고칠 것은 고치는 것이 좋다.


만일 교회가 계속해서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해야 한다면 목사초빙 내지는 목사채용이라고 용어로 고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란 그 의미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청빙’이라는 말을 고집하고 싶다면 청빙이라는 용어에 맞는 내용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가 목사를 초빙 내지는 채용한다면 더 이상 성경이 요구하는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운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초빙과 채용은 민주적인 사회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목사 청빙이라는 성경적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빙 내지는 채용된 목사에게 성경적인 목회자이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초빙과 채용의 방식으로 성경이 요구하는 목회자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청빙위원회를 만들고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이 아직도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그런 방법을 도입한다고 해서 목사청빙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것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빙위원회와 공개채용의 형식이 이전의 전통적인 목사청빙 방법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새로운 다른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 어쩌면 방법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당회에 대한 불신과 교인들 상호간의 불신이 청빙위원회를 조직하게 하고 공개적인 모집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 위에 건설되어야 할 교회가 불신 때문에 분열과 혼란을 겪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교인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당회가 있는데 왜 장로교회는 청빙위원회라는 새로운 임시기구를 만들어야 하는가? 혹 청빙위원회는 장로회라는 교회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임시기구가 아닐까?


청빙이란 개혁교회가 가진 좋은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담임목사를 모실 때 먼저 지역교회의 당회가 교회의 사정과 형편을 충분히 고려하되 자신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목회자를 찾는다. 그리고 당회원들은 주위의 가까운 교회의 목회자나 명망 있는 목회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하여 후보를 결정한다. 이것이 역사적인 개혁교회가 추구해온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이다. 당회원들이 가능한 사심이 아닌 공심을 발휘한다면 아마도 당회는 청빙위원회라는 새로운 임시기구를 조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신뢰받는 역할을 수행하고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목회자를 찾고 목회자는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교회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교회가 우리 자신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적인 사심이 앞서기 보다는 신앙적인 공심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09월 14일




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 의견


이광수 [2010-09-15]
귀한글 감사 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동감 하는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필자의 부족한 소견으로 몇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1)“목사의 권한이 거의 절대적이다” 라는 말은 “절대적인 경우도 있을수 있다” 등으로
수정 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는 교회도 목사도
많기 때문입니다.
2)“초빙 혹은 채용으로 모신 목회자에게 성경적인 목회를 기대하는것은 어불성설이다“ 라는 말은 “기대하는것은 문제가 있겠지요” 등으로 고첬으면 더 바람직 하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3)청빙 방법에 문제가 많은것도 시인하며 더 바람직한 방법과 철차를 도입하는 것을 찬성 합니다.
4)그렇지만 필자의 소견으로는 우리 주님께서 인간의 치졸한 청빙방법 까지 협력하여 역사해 가심을 믿고 목사청빙 배후에 하나님께서 세밀하고 선하게 자기 뜻을 이루시는 손길이 있음을 알고 “선하게 인도해 주십시요 “라고 합심하여 온 교회가 간절하게 회개하며 기도하고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5)고후 3장 2절에 바울 사도는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 성령의 역사가 바울의 사역을 증거하는 편지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걸어온 목사의 목회의 발자취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근거로하여 청빙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 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