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국인 우리 속의 분열 유전성 / 민족성
LA 두 한인회장과 100년 전 닭싸움
입력 : 2010.08.31. 양상훈 부국장
6월 30일 미국 LA에선 두 명의 한인회장이 같은 시각 다른 장소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두 사람은 한인회장 선거에 나섰으나 분란이 벌어져 결국 각각 취임식을 가졌다. 한인회는 둘로 갈라졌다. 두 취임식장은 길 하나 사이였다. 서로 LA의 유력 인사들을 초청해 상대를 제압하려고 총력전을 벌였다고 한다.
결국 LA 시장은 두 한인회장 취임식에 다 참석해야 했다. 그 광경을 본 사람은 "미국인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는 표정인 듯했다"고 전했다. 이쪽 한인회장 취임식에 참석해 인사한 다음에 길 하나를 건너 다른 한인회장 취임식에 참석해 또 억지 덕담을 했을 LA 시장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생활에 바쁜 교민들에게 한인회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모이기만 하면 너무도 분열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한인회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각지의 한인회 상당수가 이와 비슷한 내부 분열을 안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재외국민이 국내 선거에 투표하게 되면 이 분열은 더 심해질 것이다.
미국 교민들은 "다른 나라 출신들은 돈을 모아 더 중심가로, 더 큰 빌딩으로 진출하는데 한국인들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다른 나라 출신들은 동업하면 성공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인들은 동업하면 원수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민이 갈라져 대립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심하다고 느낀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LA 한인회 문제를 두고 우리 DNA에 분열 인자(因子)가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면 비약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올해는 조선이 분열로 망한 지 100년 되는 해다. 그해 1910년에 일본의 한 만화가는 우리나라의 모습을 닭들이 "여름 파리떼"처럼 서로 싸우고 있는 닭장으로 그렸다. 그 싸움이란 것은 나라가 가야 할 노선을 놓고 다툰 것이 아니라 전부 국내 권력을 놓고 물고 뜯은 것이다. 그 알량한 권력이란 것이 송두리째 없어질 판인데도 우리끼리, 가족끼리 분열해서 죽어라고 싸웠다.
그 후에도 이 무서운 "분열 속성"이 우리 피에 그대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일은 끊임없이 벌어졌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중공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중국에 의해 나라가 또 망할 그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부산에서 정치 파동을 벌였다. 한쪽은 대통령 더 하려고, 다른 쪽은 막으려고 개헌을 둘러싸고 치고받았다. 그러고도 망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미군이 만든 기적이었다.
적(敵) 앞에서 분열하는 우리의 "오랜 전통"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천안함 피격이 북한의 소행인 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김정일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의 상대편이 이 사건으로 득을 보는 것이 싫은 것이다. 국내 상대편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100년 전 조선 내부도 바로 이런 식으로 싸웠다.
천안함 침몰로 우리 군인 46명이 죽었는데 대북 결의안을 우리 국회가 다른 나라들 의회보다 늦게 채택했다. 그나마 4분의 1은 반대했다. 우리 내분은 이 지경이다. 어느 당이 "마지 못해" 낸 다른 결의안엔 북한의 책임을 묻는 어구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어이없는 결의안에 그 당의 장관 출신들이 동조했다. 어느 정권에서든 "장관"이라면 국정을 책임졌던 사람이다. 그 정도의 경험과 양식이라면 천안함 사건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그 "결의안"에 손을 들고 나선다. 살아온 길까지 버리고 패싸움에 휩쓸려 들어 핏대를 세운다.
크게 보면 남·북도 중·일(中·日)이란 "역사적 적" 앞에서 분열해 있는 것이다. 어차피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 손에 맡겨졌다. 100년 전에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분열해 싸웠다. 지금 우리는 가진 것은 적지 않지만 분열해 싸우는 것만은 여전하다. 이 분열 속성이 우리가 건너야 할 마지막 강(江)처럼 보인다. 가장 물살이 거세고 제일 깊은 강이다. 우리를 무서운 위험에 빠트리고 끝까지 괴롭힐 강이다. 그러나 통일과 선진국은 이 강 너머에 있다. 이 강만 건너면 더 이상 일본에 사과 따위를 요구할 이유도 없다.
LA의 두 한인회를 가른 길 하나도 그런 강일 것이다. 두 한인회 사이를 흐르는 강을 상상하면서, 100여년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인은 자립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자립하고 있는가. 미군 없이 우리끼리 단결해 나라를 지키고 통일할 수 있는가. 한인회장 취임식 두 곳에 가야 했던 LA 시장은 이 의문에 대해 그날 느낀 것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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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본 조선인… 불쾌하지만 때론 불편한 우리의 초상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국문학
입력 : 2010.08.28 03:17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
다카하시 도루 지음|구인모 옮김|동국대출판부|280쪽
1만8000원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조선총독부 지음|김문학 옮김|북타임|445쪽|2만5000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책 두 권 제국주의자 오만·편견으로 가득
부정부패·公私 혼동 지적엔 "뜨끔"
"조선의 관리들은 관직에 있으면서 공적인 마음가짐 없이 오로지 이를 기회로 삼아 제 한 몸과 제 집안의 사적인 이익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국가는 아무리 국고의 수입을 늘려도 대부분은 중간관리의 뱃속을 채우고, 백성을 착취할 새로운 항목만이 더해질 뿐이었다."
근거 없이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건만, 그것이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서적에 실려 있다면 왠지 불쾌하고 언짢아진다. 일본인 학자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쓰고 1921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인"과 관련된 그의 논문 2편을 엮은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를 읽노라면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일본 지식인의 시선에 분개하게 되지만, 한편으로 숨기고 싶은 비밀을 들킨 것처럼 뜨끔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다카하시는 동경제국대학 한학과(漢學科)를 졸업하고 1903년 한성관립중학교 교사로 한국에 부임해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귀국할 때까지 조선총독부 촉탁·시학관, 경성제국대학 교수, 혜화전문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조선의 언어에서 설화·속담·민요·사상·종교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연구했다. 그의 조선학 연구 초기 저술인 "조선인"은 조선의 지리·지질·인종·언어·사회·역사·정치·문학·예술·철학·종교·풍속 등을 고찰해 일본인과 다른 조선인의 10가지 특성을 도출한다.
다카하시는 "조선인의 대표적인 특성인 "사상의 고착성(固着性)"과 "사상의 종속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또 다른 특성인 형식주의, 심미(審美) 관념의 결핍, 문약(文弱)함, 당파심, 공사(公私)의 혼동 등은 조선인이 근대학문을 배우고, 일본인의 통치를 받다 보면 개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관용과 위엄, 순종, 낙천성 등은 조선인의 아름다운 자질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카하시가 조선인의 미덕이라고 칭송한 특성을 읽는 것도 썩 유쾌하지는 않다. "조선인만큼 모든 일에 순종하는 민족은 드물 것이다. 국가는 중국의 통제에 순종하여 복종했고, 상류 사대부들은 국왕의 권력에 복종했고, 중인과 상민은 계급제도에 순종하여 사대부의 압제에 복종했다. 백성들은 관청의 명령에 복종하여 얼어 죽고 굶어 죽지 않는 한 세금을 바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다카하시가 조선인을 비하하거나 왜곡하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쓴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척박한 땅에서 부패한 관리들의 폭정을 받으며 순종해온 조선인을 동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은 문명한 민족이고 조선인은 미개한 민족이라는 선입견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두 민족의 특성과 차이를 객관적으로 규명하지는 못했다.
한 개인의 특성을 규명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민족 단위의 특성을 규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다카하시가 조선의 특성이라고 지적한 "사상의 종속성"만 하더라도, 조선의 사상이 독창적이라는 사례도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사상 역시 종속적이라는 점을 입증할 사례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은 1927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대외비 조사자료로, 일본인은 물론 러시아인·미국인, 그리고 조선인 자신의 견해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앞서 살펴본 다카하시의 "조선인" 내용도 상당 부분 인용돼 있다. 한국어로 간행된 잡지 기사까지 수록돼 있는 것을 보면, 식민지배의 기초자료에 해당하는 조선인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은 조선인의 특성을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기술하기보다는 조선인에 대한 내·외국인의 다양한 견해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중 긍정적인 특성은 선량하다거나, 잔인성이 없다거나, 정조(貞操) 관념이 높다는 정도이고, 대부분은 나태·비위생·방탕·표리부동 등 부정적인 특성으로 일관된다.
""빌릴 수만 있다면 이자가 아무리 비싸도 기꺼이 돈을 빌리는 것이 조선의 하류계급 사람들이다." 이는 조선에 오랫동안 체류하고 있는 일본인 대금업자가 한 말이다. … 빌린 돈의 이자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빌리기만 하면 그 뒤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찰나의 만족, 여기서 넘어서는 일은 없다."
조선을 식민통치한 주역인 조선총독부에서 간행된 두 권의 책이 조선인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국주의자들의 우월감과 피지배 민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책을 읽는 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들 책에 기술된 조선인의 "특성"은 조선인이 스스로의 특성을 규정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그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민족적 특성을 설명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두 책을 읽으면서 진정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편견에 가득한 일본인이 조선인의 악덕(惡德)이라고 주장한 특성을 100년이 지난 오늘날 "나"에게서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