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일본과 기독교, 역사와 비교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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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일본과 기독교, 역사와 비교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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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일본의 기독교와 역사를 참고하는 자료로서는 필요하나, 일본과 한국에 기독교의 고대 전래에 대한 자료와 설명은 너무 비성경적이므로 조심해서 읽을 글입니다. 올리는 이유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유형 중에 기독교를 정면에서 반대하지 않고 희석을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비교 종교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런 유형의 유혹을 우리가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관련 자료 차원으로 올립니다. 일본 선교의 열망이 지나 쳐서 성경과 구원론을 떠나 무조건 일본과 기독교를 연결 시키려는 글입니다..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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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독교 박해사
일본 기독교의 박해는 역사의 유례가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시도되었다.


일본 기독교의 박해는 역사의 유례가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시도되었다. 마치 주머니속의 쥐를 잡듯이 철저하게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도구가와 막부에서는 힘에 의한 박해가 효과가 없음을 알고 불교를 어용종교로 하여 전국적으로 전 국민이 불교의 어느 종파에 소속하도록 명을 내렸다. 불교에 의하여 일본인의 마음을 지배하기로 생각하고 1640년 6월에 사청제(寺請制)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 국민을 절의 어느 종파에 소속하여 신분증을 발급 받도록 한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결혼을 하거나, 취직을 할 때, 또는 여행을 다닐 때에는 반드시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하였고 불소지자는 처벌 받게 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을 색출하고 박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절에 등록하도록 한 것이 일본 호적제도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1638년 9월에는 기독교인을 발견하여 신고하는 자에게는 상금을 주어 밀고하도록 장려하는 보상금 제도를 실시하였다. 1659년 6월에는 기독교를 완전 박멸하기 위하여 5인조 제도를 이용하였다.

이 제도는 5인중에 한 사람이 밀고하면 밀고한 사람 외에 전원 처벌하고 외부에서 밀고할 경우에는 5인 전원을 처벌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상호 감시하는 체제를 통하여 교인들을 색출하여 처벌하였다.

이렇게 박해하여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1695년 6월에는 그리스단 친족 개종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은 한 가족 안에 교인 한 사람이 발견되면 전 가족에게 그리스단이란 표시를 붙이게 하고 결혼한 사람일 경우에는 양가에 표시를 붙여 특별 경계하도록 했다. 남자일 경우에는 친자 7대까지 여자일 경우에는 친자 4대까지 감시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 순교한 자들이 약 2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토록 잔인하게 박해를 계속하던 도구가와 막부도 드디어 무너지고 명치유신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때에 히라다 아쯔다네(平田?鳳)가 기독교 교리를 도용하여 이론 무장한 복고정신을 건국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고, 또한 1890년에는 유교적 이론을 골자로 하는 교육칙령을 제정하였다. 명치유신정부는 기독교 영향을 배제하기 위하여 일본인의 마음을 천황과 신도사상으로 지배하는 독제국가를 만들었다. 

그 후에 국내뿐만 아니라 대동아공영권이라 하여 동남아세아 제국을 침략하여 신사를 세우고 그 나라의 민족을 지배하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불복하는 자를 처형하였다.

이 때에 한국인을 비롯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1640년에서 1859년까지 지하 기독교 운동을 제외하고는 거의 근절되고 말았다. 1600년에서 1945년 까지는 기독교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반대는 일본 정치의 정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결과로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큰 박해를 받아 처형되거나 추방되었고 교회는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에 온 선교사들은 합법적으로 정치적 체제에 복종하도록 가르쳤고, 그만큼 종교도 정치체제에 복종하게 되었다.

모든 봉건적인 지도자들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충성을 요구했고, 기독교를 장차 정치와 사회적인 위험한 존재로 판단하여 박해를 계속하였다. 핍박 때에는 선교사들이 순교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직접적으로 무력에 저항하기를 꺼려하여 스스로 고난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2009년 01월 08일












일본의 개방정책


명치정부(明治政府)는 도구가와 막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사교로 인정하여 계속적인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명치천황(明治天皇)은 외국의 문물을 받아 드리기 위한 수단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인들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오래 동안 쇄국장책을 일관하여오던 명치정부는 서서히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고, 1858년 7월에는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문의 8조에는 일본에 있는 미국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에 전념할 수 있으며 거유지에 예배당을 건립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거유지내의 그리스도교의 활동을 법적으로 보장하였고 선교사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도록 규정하였고, 이 조약의 발효는 일 년 후인 1859년 7월에 성립되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미국 성공회의 선교사인 J.리긴스와 그의 동역자인 C.M.윌리암스가 나가사키(長崎)에 개신교의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상육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서 10월에는 미국장로교회 계통의 선교사인 J.L.헤본 의학박사와 11월에 미국의 개혁파 교회의 선교사인 S.R. 브라운 등이 가나가와현(神奈川縣)에 상육하게 되었다.
그 후에 계속해서 대부분 미국의 선교사들이 태평양의 파도를 넘어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1859년에 로마 카토릭 선교사들이 일본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고, 또한 개신교와 동방정교회의 선교사들도 들어오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열심히 가르치고 전도했지만 일반 국민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대할 뿐이었다. 초기에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였다.

그 후 1865년에 베루나-루 프친 챤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 박해수난자 기념회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에 숨어있던 많은 신자들이 나타나 부활절 예배에는 1500여명이 함께 모여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1873년(명치6년)에 명치정부가 파송한 이와쿠라(岩倉具視) 일행이 유롭을 시찰 중에 있었는데 이 때에 나가사키(長崎)의 우라가미(浦上)에서 외국인 기독교인 박해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알게 된 외국의 공사들이 일본정부에 몰려와 항의를 하게 되었고, 정부에서는 외국의 비위를 거스릴 수 없어서 마지못해 천주교 금지령을 철회하게 되었다.

1873년 2월에 그리스단 금제의 법령이 철거되기 전까지 약60여명의 선교사들이 일본 각처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동경과 요코하마(橫浜)을 중심으로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일본 정부에서는 “마을마다 배우지 않는 집이 없고, 집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는 이상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국적으로 교육을 보급하였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일본성서협회를 설립하여 일본어 성서를 발간하게 되었고, 1872년에 일본에 최초로 개신교 교회인 요코하마교회(現:海岸敎會)가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의 중심은 학교 교육과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엄밀하게 선교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많아도 좀처럼 믿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도구가와막부 때에는 불교에 의하여, 명치정부이후에는 신도(神道)에 의하여 사람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전원 불교 신자인 동시에 진자(神社)의 씨자(氏子)라고 하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는 기독교는 일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고 있다.

일본인에게 “왜 기독교를 받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고 묻는다고 그들은 단순히 “우리는 일본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신비로운 종족이다.



2009년 02월 06일












일본 선교사들의 활동(1)





1873년 2월에 그리스단 금제의 법령이 철폐되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여전히 기독교에 대하여 냉담하였다.

기독교의 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될수록 기독교 배척에 대한 사회적 풍토도 크게 고조되었다. 또한 기독교를 사교로 배격하는 운동이 신도, 유교, 불교의 관계자들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그 당시에 유행되었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되새겨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예수교의 신자가 되었답시고 일본의 주체를 잊어버리는 놈들, 예수를 국왕보다 존경하는 놈들, 예수를 믿는답시고 가업을 태만히 하는 놈들, 예수를 믿는답시고 조상을 숭배하지 않는 놈들, 신궁을 무시하고 예수에 열심히 미쳐있는 놈들, 세계에 하나님밖에 없다고 말하는 놈들,” 등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배척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들의 기독교 배척의 소리가 유형무형으로 기독교를 탄압하는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서구문명에 대한 동경심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이 교육기관과 의료사업을 통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문명의 고도의 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영어와 서양 학문을 배우면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기독교의 감화를 받게 되었다.

정성어린 진료활동에 인격적인 감화와 현대의학에 의한 치료의 효과 등은 일본 민중들이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187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는 외국인 거주지나 도시에서 지방 마을과 농어촌으로 확산 되었고 귀족층에서 농민층으로 확대되었다.

872년 9월에 두 번째로 동경에, 1874년 4월에 고베(神戶)에, 1874년 5월에 오사카(大阪)에, 1875년 7월에는 미다(三田)에, 1876년 10월에는 우에다(上田)에 차례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 속담에 “가죽은 탐이 나고 범은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박해 당시에 일본인들은 기독교의 문화와 서양의 고도의 지식을 탐하면서도 아무도 접근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 1865년 11월 5일에 병중에 있던 야시노 모도다가(失野元隆)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일본 개신교 신자로서 최초로 J.바라 목사를 통하여 세례를 받게 되었다.

1866년 2월에는 구마모도(熊本)의 성중의 무사이었던 소무라(壯村助右衛門)가 C.M 윌리암스 선교사를 통하여 두 번째로 세례를 받았고, 1866년 5월에는 무라다 와가사(村田若挾)가 세 번째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복음의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진통의 과정은 너무나 잔인하고 비참하였다. 오랜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3인의 세례자가 탄생하였다. 우리는 일본에 기독교의 여명이 밝아오기 까지는 수많은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노고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 최초로 도입되었던 선교단체는 복음주의적 기독교 단체이었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기독교는 웨슬레(J.Wesley1703-1791)의 감리교회 운동이었다. 1872년 미감리교회 선교부에서 일본 선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메클레이(R.S.Maclay1824-1907)목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세계는 우리의 교구라는 웨슬레의 말과 같이 우리 선교국은 새로 전개된 선교의 분야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많은 고난이 있으나 이것을 극복해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계에 비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은 우리 앞에 일본 선교의 문을 열 수 있게 하셨다. 이 기회에 일본에 선교하는 일은 우리들의 임무이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의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기대하여 본다.


2009년 03월 02일








일본 선교사들의 활동(2)




영국의 복음주의자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선교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동시에 미국에서는 복음주의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선교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쏟게 되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의 미국은 서부개척, 남북전쟁, 자본주의 발전에 의하여 근대 국가로서 통일을 이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청교도적인 신정정치는 이미 과거로 퇴쇠하고 많은 사람들은 계몽사조나 공리주의에 친근감을 느껴 종교적 무관심,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충격을 받고 방향을 전환하려고 시도한 것이 대각성운동이었다.

대각성운동이란 모든 세속화에 대한 복음주의 운동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지배의 질서 중에서 인간에 관심을 가졌고, 전적 타락에 의한 죄책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다는 엄격한 윤리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더 널리 해외에 확장시키고, 죄의 함정에 빠졌던 이교도를 회심시켜 인도하고,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믿고,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이 일에 적극 참여한다는 선민의식과 사명감을 불태우며 해외로 파송되었다. 이 당시에 일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대부분 대각성운동을 전개하던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19세기 후반에 대각성운동의 대표적인 설교가는 무디 목사(D.L.Moody:1837-1899)이었다.

무디 목사는 예수의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을 역설하였고,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에 대한 복음을 외쳤다. 또 구원을 결단하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고, 그것에 의해 개인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문제까지 해결된다고 호소하였다.

일본에서 활약한 순복음파 지도자들 중에는 무디 목사의 감화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의 선교의 역사는 1549년 8월 15일에 카토릭 계통의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루가 가고시마(鹿?島)에 상륙한지 458년이 되었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1859년에 미국의 감독교회와 장로교회 및 개혁파 교회의 선교사들이 상륙하여 선교가 시작된지 148년이 흘렸다. 2004년도 기독교 연감 통계에 의하면 카토릭 계통의 교회는 1,027(전도소39 포함)이며, 교직자는 1,716명이며, 신자수는 477,624명에 이른다.

개신교 계통의 교회는 8,156(전도소73 포함)이며, 목회자10,035명이며, 신도수는 642,969명에 이른다. 전체 신도수는 교직자를 포함하여 1,132,344으로 일본 전체 인구에 비하여 0,887% 정도이다.

일본 기독교의 성장률은 종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1%선을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가 일본에 전래되어 458년의 세월이 흘렸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3,000여명의 선교사들이 헌신하였지만 1%선을 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임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인들은 서구 문명을 쉽게 받아들이고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토착화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자기들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항상 거리감을 두고 있는 신비한 나라이기도 하다.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뚜렷한 이유는 없지만 단지 일본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본인들의 종교관은 신앙의 태도로 보기보다 민족정신과 결부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일본에는 800만의 온갖 잡신들이 우굴거리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신이 될 수 있다는 범신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유일 신관을 이해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일본인들을 위한 새로운 선교 전략과 더불어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기대할 뿐이다.



2009년 03월 19일










일본 순교지 방문



일본에 여행 오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이 왜 잘 사는지에 대하여 매우 궁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온갖 잡신들이 우굴거리는 우상의 나라인 일본이 어떻게 세계경제대국이 되었을까 의아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늘 망설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이 대부분 가난하고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비하여 일본은 유별나게 잘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나가사기(長崎)에서 멀리 떨어진 오오시마(大島)라는 지역에서 동경으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던 니시다(西田修一) 집사가 있었다.

이 분이 살던 오오시마(大島)라는 동네는 옛날 도구가와(德川) 막부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를 피하여 숨어살던 지역이었다.

이 분의 권유로 나가사기(長崎) 주변의 섬들을 함께 방문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되었다. 나는 순교지 방문을 통하여 일본이 잘 사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축복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무서운 박해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가사기(長崎) 주변에 있는 여러 섬들의 깊은 산골에는 순교당한 사람들의 무덤이 십자가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집권자들의 손이 닿지 않는 외 딴 섬으로 피신하여 비참하게 죽어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를 안내하던 니시다(西田修一) 집사도 바로 숨어 살았던 그리스단의 후손이었음을 자랑스럽게 고백하였다. 나는 일본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현장들을 방문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믿음의 조상들이 흘린 순교의 피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적인 축복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자원이 없는 나라이다. 일본은 원자제를 수입하여 제품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대국이 된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축복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한 순교의 피를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다.

출애굽기20:6에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에 대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기독교의 박해는 몇 백 년을 두고 줄기차게 지속하여 온 역사에 유례없는 박해사임을 이미 말씀드렸다.

아직도 일본인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기독교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비록 일본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도 동일한 측면에서 이해되어진다.

우리의 조상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는가에 대하여 역사를 통하여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들어서 동방의 빛이요, 영적인 제사장의 나라로 축복하여 주셨다.

마지막 시대에 한국을 통한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적의 나라로 축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하신 축복은 개인이나 민족을 통하여 동일하게 역사하심을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된 모든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음을 일본의 기독교의 역사를 통하여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다.



2009년 03월 31일











유대인의 방랑


일본이란 나라는 생각할수록 더욱 신비로운 베일에 쌓여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신비로운 베일을 풀면 풀수록 더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 전부터 일본인과 유대민족의 동조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 화제를 모우고 있다. 옛날 유대 민족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일본 민족의 실상을 풀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유대의 통일왕국시대에 솔로몬 왕은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인도까지 항해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구약성경에는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배로 수송한 내용들이 기록되어있다.(왕상5:7-18)

솔로몬 왕은 해상을 통한 수송력을 이용하여 당시에 귀한 자재들을 모우고, 가장 우수한 건축기사들을 모집하여 성전 건축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방(현재, 아프리카 지방)에 동(銅)의 광산을 가지고 그 곳에서 동을 수입한 내용들이 자료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로 볼 때에 솔로몬 왕은 그 당시에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아프리카를 일주하여 인도양에 이르고 인도까지 교역한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 왕 이후에 나라가 둘로 분열되어 남쪽에서는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유대나라(2지파)를 세우고, 북쪽에는 여로보암에 의하여 이스라엘(10지파)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10지파의 동맹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은 250년간 지속하다가 BC721년에 앗수리아에 의하여 망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지금부터 약 2700년 전 앗수리아 제국에 의하여 멸망한 이스라엘의 10지파 중 일부분은 유대나라로 귀순하였지만 대부분의 부족들은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들의 침략과 약탈이 없는 지상의 낙원을 찾아서 방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의 불안과 공포가 없는 완전한 삶의 공간을 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흩어진 10지파의 사람들은 항로와 육로를 통하여 인도, 중국, 한반도 등을 거쳐서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 왕 당시에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로를 통한 항해력이 충분히 있었다고 추측하여 본다.

당시에 세계 최대의 종교와 문화와 기술을 가진 민족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유랑민족이 되어 세계 전역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 속에 잃어버린 자기들의 동족을 찾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스라엘 공화국의 역사학자인 요세프란 사람은 잃어버린 10지파의 동족을 찾기 위하여 동쪽으로 추적하여 여행을 계속하던 끝에 일본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는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유대인들의 생활습관, 풍속 및 종교의식 등이 유일하게 일본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요세프 학자는 일본의 전국을 다니면서 너무나 신기한 현상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 매년 행하는 종교적인 의식의 축제들이 일본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침 잃어버린 고향에 다시 찾아 온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고대 일본에 온 유대인들의 흔적을 찾아보면서 수수께기 같은 역사의 실마리를 함께 풀어보고자 한다.



2009년 04월 16일












디아스포라 민족


고대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고 말았다. BC721년에 앗수리아 제국에 패망하여 대부분의 귀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들의 대부분은 귀족계급, 직능계급, 지식계급, 정치가 등 혁명의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모두 포로로 잡혀 갔기 때문에 민족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유능한 인재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앗수리아의 한적한 곳으로 강제 분산시키었다. 추방당한 이스라엘 벡성 중에는 도망자도 있었고, 앗수리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집단 이동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앗수리아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이 그대로 그 땅에 머물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또한 BC586년에는 남아있던 유다나라가 바벨론에 패망하여 모든 귀족들과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들은 70년 후에 다시 자유를 얻어 본토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42천명이 귀환하여 제2의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때에 귀국한 사람들은 유다의 2지파(유다지파, 베냐민 지파) 뿐이었고 나머지 10지파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앗수리아에 잡혀간 10지파의 종족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아직도 숨겨진 베일 속에 쌓여 있다. 오늘날까지 그들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방은 모연하다고 한다.

아마도 포로로 잡혀간 그들은 강제적으로 개종을 강요당하는 일이 없는 땅, 학살이 없는 거주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 지상의 낙원을 찾아서 세계 각 지역을 찾아 유랑한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상의 낙원을 찾아서 대 모험의 여행을 감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대인들은 앗수리아와 바벨론에 패망한 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지역을 찾아서 점점 더 먼 나라에까지 여행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시아의 깊은 곳으로 찾아 들어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관용하고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같은 기독교인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이교도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미워하여 배척할 뿐만 아니라 박해를 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의 힌두교는 유대인에 대하여 어떤 박해도 가하지 않았다. 실크로드에 따라 동으로 가면 갈수록 관용도가 높았고, 평화로운 땅이 많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비유대인으로서 크리스챤이었던 스코트란드 상인 마구레오드(N. Mcleod)는 명치유신의 초기에 요코하마에 내일한 후 일본역사를 조사 연구했다.

그는 일본고대사를 연구한 후에 일본 고대사의 축소판이란 귀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일본 각지에서 행하는 제식(祭式)을 조사하고 생활풍속, 식물, 의복, 그 외 여러 가지 전통적인 행사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그는 동양의 많은 나라가운데 일본인만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와 행동양식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2500년 전 유대인의 12지파가운데 10지파가 동방 세계에 추방되어 흩어져 버렸는데 그 종적을 알 수 없었지만 일본인들의 문화와 생활양식 속에서 유대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실크로드의 발생지인 유대와 실트로드의 제일 마지막 땅 일본에서만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중간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중근동지방이나 중앙아시아 지방에서는 유대적인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일본인은 유대의 잃어버린 10지파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믿었고, 또한 유대인의 순수한 혈통이 일본인들 속에 흐르고 있다고 믿었다.



2009년 05월 03일









실크로드의 개척자



고대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민족이 된 후 실크로드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들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어 전 세계로 방랑하면서 실크로드를 개척하게 되었을 것이다.

실크로드란 비단(명주)길을 의미하는데 동방에서 서방으로 건너간 대표적인 상품이 비단이었기 때문에 실크 무역을 위하여 개척한 길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주전1445년경에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부터 명주를 사용한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다.(출26:1.31-37. 27: 28:)

에스겔 선지자는 말하기를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에스겔16:13)고 했다.

고대 유대인들은 비단제조와 귀금속 장식 및 염색 기술은 그 당시에 세계 최고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훌륭한 기능을 가진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 방향은 대개 세 지역으로 추적하고 있다.

첫째 방향은 중앙아시아를 넘어서 중국지역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깊은 곳으로 흘러갔다고 추정한다. 둘째 방향은 아라비아의 사막지대로 사라졌는데 행방이 모연하다고 한다. 셋째 방향은 아프리카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특히 에치오피아의 흑인들은 지금도 자기들은 유대인들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중국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실크제조업과 염색 공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는 문서가 남아있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들어가는 곳마다 그들의 기능과 특수한 기술을 통하여 산업이 활성화되고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흩어진 유대 민족이 돌아오는 환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이사야49:12)고 예언하고 있다. 어떤 성경학자는 “시님 땅”은 중국 또는 중국에 있는 어떤 지역을 가르친다고 해석하고 있다.

AD817년경 아라비아인 아블 가심(Abul Kasim)이란 지질학자의 기록에 의하면 AD700년 전후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여행한 상인들은 전부가 유대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문화적으로 매우 탁월한 민족이며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민족이었으며 각 지역의 풍속과 습관 등을 익숙하게 습득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했다.

그 당시에 실크의 길은 전부 유대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당시에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라틴어, 프랑스어, 로시아어 등을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었다고 한다.

유대 상인들은 어디에 무엇이 필요하며 또한 그 곳의 상품을 어디에 가지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풍부한 상업적인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육상과 해상의 경로를 거쳐서 광범위한 무역 통상경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 상인들이 실크로드의 경로를 개척하여 중간 지점마다 유대인들을 상주시키고, 그 지방의 특산물과 그들의 문화와 생활 풍속 및 습관 등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였다.

기원전후로 전 세계로 흩어져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오직 유대인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어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생존의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사업의 천재성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들이 사는 지역을 풍요롭게 했을 것이다.



2009년 05월 20일









고대 중국에 온 유대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너무나 신비롭고 놀랍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여 가시는 손길을 느끼게 괸다. 하나님은 고대 유대인들을 열방에 흩으시고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역사 속에 숨겨두셨다.
고대 유대인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일은 역사 속에 숨겨둔 하나님의 비밀을 풀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일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유대인들을 통하여 성취하여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뿐이다.

인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이 타락한 후로 계속되어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성취하여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게 된다. 고대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방랑하는 유랑민족이 되게 하신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에는 모든 것이 필연적인 사건이지 우연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어 전 세계로 유랑하면서 실크로드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일부의 유대인들은 중국 대륙에 진출하여 직물공업과 염색업 및 보석 가공 등으로 정착하게 되었고, 그들만이 보유한 특수한 기술을 인정받게 되었다.

고대 유대인들은 정통적인 문화와 종교를 보존하면서 대체로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서방과의 교역을 위하여 실크로드를 개척하게 되었고 그 길을 따라서 경교의 교도들이 중국 선교의 문을 열게 되었다. 원래 경교는 시리아 게르마니키아 출신인 네스토리우스가 428년 콘스탄티노풀의 대주교가 되었고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된 종파이다. 로마에서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파는 5세기경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국왕의 비호를 받아 교세를 확장하였다. 7세기경 페르시아가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네스토리우스파는 아라비아 북부, 인도, 몽고, 중국 대륙에 진출하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의 중국 선교는 635년(당태종9년)에 대진국(大秦國:로마, 또는 페르시아를 중국어로 지칭)의 선교사 아라본(何羅本)의 일행이 당나라 장안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경교의 선교사인 아라본(何羅本:Araham)을 단장으로 한 선교단은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당 태종의 환대를 받으면서 포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경교라는 명칭은 781년에 건립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진상(眞常)의 도(道)는 현묘(玄妙)하여 이름 짓기 어려우나 그 공용이 소창함을 보아 감히 경교라 칭한다”는 비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네스토리우스파의 경교는 당 태종의 칙령에 의하여 638년에 국비를 들여서 대진사(大秦寺)라는 사찰을 지어주고 전국 각지로 포교활동을 확장하게 되었다. 경교가 중국에 정착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는 당나라와 밀접한 교류가 활발하던 시대이었다.

그 당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과 통일 이후에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경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경주 불국사에서 경교의 돌십자가와 마리아상이 출토되어 이러한 유물들을 통하여 경교의 전래설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교 돌 십자가 마리아상
경주에서 발견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8-9세기)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 불상 모양의 이 마리아상은 중국 경교와 한국 불교의 교류 및 경교 전래의 근거 유물이다.



2009년 06월 08일










당시대의 경교활동



기독교는 원래 유대교를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그 발상지는 예루살렘이며 중근동(中近東) 지방에서 발생한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진 종교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교라는 기독교는 사실상 유대계 기독교의 한 종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경교도들의 행동은 유대교적이며 유대의 문화적 사상을 중앙아시아 깊은 곳까지 전파한 공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력은 중국 사회뿐만 아니라 고대 일본 사회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경교 신자들의 대부분은 유대문화에 심취한 사람들이었고, 유대인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도 바로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사상과 신앙에 대한 투쟁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유대교적인 종교의식과 율법사상을 배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추측하게 된다.

경교 신자들의 대부분의 행동 양식은 완전한 유대적인 것으로 유대의 전통적인 행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이 남긴 종교적인 유물과 문화적인 유산을 통하여 이해하게 된다.

네스토리우스파 경교는 638년 당의 태종(太宗 在位626-649))에 의하여 수도원 설립이 허가되었고, 당 태종의 비호 아래서 교세가 계속 확장되었다. 781년에는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세울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다. 이 비문에는 경교의 중요 교리와 역사가 기록되었고, 황제에 대한 상찬과 그 당시의 사제와 수도사들의 이름 및 직위 등이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 석비는 845년의 박해령(迫害令) 후에 메몰되었다가 1625년에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의 서북에 있는 당나라 수도 장안의 대진사(大秦寺:경교의 사찰)의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경교는 200년간(600-800) 왕성한 포교활동을 통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지만 845년경에 회창금교령(會昌禁敎令)이 발효되면서 경교 사원이 파괴되고 토지와 재산이 몰수되는 등 경교승들이 환속되고 말았다.

879년에는 황소의 난 때에는 경교도 30,000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 후 경교는 중국에서 끊어지게 되었고 살아남은 경교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거란, 몽고, 신강,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약 200,000명의 경교도들은 박해로 인하여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 일부가 일본으로 도래(渡來)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동경대학의 사헤끼 요시로(佐伯好郞)박사는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경교학자로서 오래 동안 경교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경교박사로 공인된 사람이다. 사헤끼 박사는 중국에서 왕성하던 경교가 실패하게 된 원인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외국인의 종교로 시작하여 끝까지 외국인의 종교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중국 본토인들의 평신도와 성직자를 양성하지 못하였고 민중들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중국에 상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교가 불교 경전의 용어를 그대로 달습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를 토착화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경교의 선교사들이 어려운 한문을 바로 이해하여 기독교적인 교리를 바르게 설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선교 현장에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기도 한다.



2009년 06월 29일







고조선에 온 유대인

고조선 시대는 우리들의 환상의 세계이다. 단군신화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우리들을 환상의 세계로 유혹할 뿐 그 실체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역사학자들 가운데는 고조선을 창건한 단군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단지파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12지파중 단지파는 BC1073년경에 고대 이스라엘의 최북단 헬몬산 남쪽 기슭에서 동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산북로를 경유하여 BC1065년경에 중국 서북부 우왈 알타이 산맥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얼마 동안을 정착한 후에 몽고를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반도의 나라에 들어와 대동강변에 정착하여 고조선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아직은 정식으로 공인된 학설이 아니기에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지만 신비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풀어가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진다. 이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는 아마도 단군이라는 이름이 야곱의 아들가운데 단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되어진다.

또한 고조선의 단군(檀君)이란 이름은 제단을 쌓는 자의 역할을 감당한 사람을 상징하기도 한다. 고조선의 유물가운데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제(祭)를 올린 천단제(天檀祭)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국 기념일을 “하늘이 열렸다”는 의미로 개천절(開天節)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유대인들만이 유일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건국기념일을 개천절(開天節)이라 하여 축하하는데 이 말을 사용하는 민족은 오직 한국과 유대나라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고조선은 당시에 중국대륙을 비롯하여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고조선 시대의 유물로 대동강 유역 평양근교에서 출토된 기와에 고대 히브리어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부터 벽돌을 굽는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에(출5:) 기와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들은 자기들의 후손들이 모국어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와에 고대 히브리어의 문형을 새겨 놓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금도 중국 서북부의 도화촌(陶瓦村)에 오래된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데 이 종족의 어린이들의 복장이 신비롭게도 한 민족의 색동옷과 너무나 비슷하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의 고유 명절이나 축제의 날에는 색동옷을 입는 오래된 전통과 풍속이 아직도 그대로 전래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색동옷에 대하여서는 야곱의 아들가운데 특별히 요셉을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혔다(창37:3)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의 오랜 전통가운데 팥죽을 먹는 습관이 전해지고 있는데 유대인의 풍속과 너무나 비슷하다고 한다.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서 팥죽으로 유혹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도 유대인들은 팥죽을 먹는 풍속이 그대로 전래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고조선을 창건하신 분이 단지파의 후손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조선시대의 유물들을 통하여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고대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어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그들이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한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바라보게 된다. 고조선의 단군신화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롭고 놀라운 환상의 세계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단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사적 역사에 경탄할 뿐이다.



2009년 07월 22일












고대 가야국에 온 유대인

한반도의 고대국가인 가야국이 기독교 국가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화제가 된 바 있었다. 조국현 목사(가야문화연구가)는 기독문화세미나를 통하여 “사도 도마가 인도를 거쳐 가야국에 들어와 전도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이었던 도마가 인도로 건너가서 선교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선교학적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서도 많은 증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도 도마에 대한 기록으로는 “도마행전과 도마복음서”가 있으며 인도에는 선교의 발자취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인도의 군다포로스(Gundaphorus)왕의 사신인 합반을 따라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증명되면서 인도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인도와 교류가 있었던 가야국에도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보는 견해일 것이다. 왜냐하면 경북 안동 평은동에 있는 분처 바윗에서 도마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86년에 기독교 사학자인 유우식 집사에 의하여 도마상이 발견되었는데 “두 손을 가슴에 대고 있는 모습과 히브리적인 발상인 발가락을 선명하게 표현한 형상이며 무엇보다 히브리어 문자가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자를 판독한 결과 글자는 네 글자로 되어 있고 뜻은 “도마의 손과 눈”이라고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흥미로운 사실은 가야국의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은 서기 48년에 인도 아유타 왕국의 공주이었다고 한다. 인도의 공주가 어떻게 해서 가야국의 왕비로 오게 되었는지 수수께끼와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하는 유물로서는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김수로 왕릉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김수로 왕릉에는 한반도 유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데 코끼리와 연꽃과 물고기 문형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의 문형은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도의 향취가 풍기는 이국적인 모습이기도 한다. 또한 물고기 문형에 대해서는 로마시대에 핍박을 받던 그리스도인들이 비밀표시로 사용되었던 것을 상기하게 된다.

로마시대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무서운 박해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비밀표시로 사용된 것이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헬라어는 “익투스”로 이 말의 첫머리 글자를 풀어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물고기의 형상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암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가야국의 김수로 왕릉에 조각되어 있는 물고기의 문형은 기독교적인 상징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은 인도에서 이미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 당시에 인도에는 사도 도마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었고 교회가 크게 융성했기 때문에 아유타 왕국의 공주인 허황옥은 기독교인이었음을 추측하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황당한 이야기들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일본에 들어온 유대인들의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검증되어져야할 필수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고대 유대인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일본 땅에 정착하게 되었고 유대적인 종교의식과 문화를 전수하였는가를 발굴하는 매우 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2009년 08월 15일












신라에 들어온 경교



경교가 중국에 들어온 때는 당태종 시대이다. 이때는 신라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수행하려고 당과의 외교를 공고히 하고 활발하게 교류하던 때이었다. 그 당시 신라는 해마다 학승(學僧)들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고, 귀국할 때는 불교관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문과 사상 등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귀국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통하여 경교도 신라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하는데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 191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경교의 비석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조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경교는 당나라의 황제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주마다 경교의 사찰을 세우고 포교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에 세워진 경교의 비석은 845년경에 경교에 대한 박해령이 내린 후에 매몰되었는데 이와 똑같은 모조품이 금강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신라 때에 이미 경교가 전파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경교의 유물이 경주 불국사 경내와 안압지에서 돌십자가와 마리아상이 발견되었고,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서는 구리로 만든 십가가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1595년에 천주실의를 쓴 마태오 리치가 명나라에 처음 왔을 때 기독교의 흔적을 찾는 중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하였다는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신비롭게도 한글로 기록된 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고 설명했다.

영국 여류 고고학자인 고든(E.A. Gordon)은 기독교의 동양전래 및 기독교와 불교의 교류에 대한 연구에 전념한 사람이었다. 고든(E.A. Gordon)은 오래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경주의 불국사의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羅漢像)의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석굴암의 전실 양 벽에 부조되어 있는 팔부신장(八部神將)중 두 상의 모습은 폐르샤 무인상이며 석굴암 내부에 조각되어 있는 형상을 보면 발에 신은 샌들과 손에 든 유리잔 등 경교의 유산임을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사학자인 유우식 집사는 “첨성대의 외향은 면류관을 쓴 여왕의 모습이며 벽에는 아기 예수를 뜻한 것으로 추정되는 얼굴이 암각화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첨성대 위에는 “아기 앞에 절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첨성대는 하늘에 천제를 드리는 제단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첨성대는 천체를 관측하기에는 너무나 불합리한 면이 많다는 지적이 일부 과학자들 사이에 계속 제기되어 왔다고 한다. 또한 하늘의 천체를 관측하는 첨성대가 들판에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더욱 왕릉 앞에 설치되어있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원래 묘지 앞에는 죽은 자를 위한 제단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하늘의 신께 천제를 드렸던 곳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마침 근간에 필자가 첨성대와 석굴암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한번 더 주의 깊게 관찰하여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다만 필자는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유물과 가야 왕국의 기독교적인 흔적과 신라시대에 창건된 불국사에서 돌십자가와 마리아상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인류 역사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찾아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 속에 숨겨 놓으신 놀라운 계획을 추적하는 것은 구속사적인 면에서 매우 귀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이 기독교 역사의 기적을 이룬 배후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적인 손길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2009년 08월 31일












한국인의 정체성(1)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홍수 심판으로 모든 인간이 멸절되었고 오직 노아 가족 8인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세계 모든 인류는 노아의 후손들을 통하여 형성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 민족의 뿌리도 분명히 노아의 후손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근원을 추적하는 일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과연 우리 민족의 시조는 누구이며 그 근원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고대 역사에는 우리 민족의 근원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단군신화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설적인 우화일 뿐이다.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근원을 추적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세상에 악이 관영하므로 BC2458년경에 물로 온 지구를 심판하시고 인간을 멸절하셨다. 그 당시에 의인으로 인정받았던 노아만이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방주를 만들고 그의 가족만이 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게 되었다. 40일 동안 주야로 비가 내려 164일 동안 온 땅이 물에 잠겼고, 물이 빠진 후 방주는 아라랏산 정상에 정착하게 되었다.(창8:4)

노아는 아라랏산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축복하시고, 다시는 물로 인류를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무지개로 언약을 삼으셨다.(창9:13)

노아에게는 셈, 함, 야벳이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동양인들 가운데 특히 한국인은 셈의 장자인 엘람과 차자인 앗수르의 후손으로 추적되고 있으며, 유대인은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의 자손 중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창11:10-32)

한국인은 노아의 축복받은 셈의 자손으로 유대인보다 장자적인 입장에 있는 민족임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엘람과 앗수르의 자손은 지금의 터키 지역인 아라랏산 부근에 살다가 BC2357년에 일어난 바벨탑 사건 이후에 동방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학계의 계산에 의하면 고조선의 건국이 BC2333으로 추정하므로 바벨탑 사건이 일어 난지 불과 24년 후에 만주에 도착한 셈족의 후손들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본다. 강화도의 마니산에는 단군의 왕검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천제단(天祭檀)이 유물로 남아있다.

우리 민족은 20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던 민족이었는데 왜곡된 역사로 인해 우리의 진실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불교와 유교가 전통 종교인줄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원래 하나님을 믿던 민족이었고, 노아의 장자인 셈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전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예는 고인돌을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발견된 지역으로 전 세계의 고인돌의 약50%가 한반도와 만주 땅에 산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 고인돌은 죽은 사람을 위한 무덤이라고 생각하여 왔는데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고인돌은 무덤이 아니라 원래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단이었다고 한다.

제단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는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우리나라 전 지역에 고인돌이 산재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 조상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종교적인 민족임을 대변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약 3만여 개의 고인돌이 있는데 전북 고창군과 전남 화순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일대의 고인돌 유적 등으로 지난 2000년도에 유네스코로부터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9년 09월 19일







한국인의 정체성(2)




옛날부터 우리 마을의 언덕 위에는 몇 백 년 묵은 고목나무가 있었다. 이 고목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토지와 부락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삼고 돌단을 쌓고 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도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에 천연기념물(273호)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주민들이 복을 비는 서낭당 구실을 하고 있다.

사학자 최남선 선생은 “단군은 신단수(神檀樹)아래 제사를 지낸 제천자(祭天者)이었다”고 말한다. 지금도 시골의 산길을 가다보면 돌을 쌓은 서낭돌무더기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돌단을 쌓고 절하는 것은 하늘을 숭상하고 자연에 경배하는 원시 신앙의 원형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 시대로부터 유일신을 믿던 경건한 민족이었음을 많은 고증들을 통하여 증명하고 있다. 단군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렸던 천단(天壇)의 제단이 있었고 생활의 풍속가운데도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많이 전승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에 어떤 시냇물이든지 십자가를 긋고 그 물을 자유롭게 마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왜냐하면 어떤 시냇물이든지 십자가를 긋고 그 물을 마시면 해독이 된다는 풍속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일신에 대한 종교의식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문화와 풍속은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고조선과 가야국에 유대인들이 들어 왔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면 왜 그들에 대한 문서나 자료가 전무한 것인가?

그 당시의 기독교적인 문서나 자료를 발견할 수 없는 이유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호국종교가 되어 다른 종교들을 말살하려는 정책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적인 모든 문서와 자료들은 다 소각되었지만 돌로 만든 비석이나 기구들은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와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고려 말에 승려인 일연 김견명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시대의 장군이었던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는데 이것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회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인간의 조상이 곰이었다는 근거 없는 설화를 넣어 역사를 왜곡시켰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환웅(하나님의 아들)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굴속에서 견디라고 했는데 곰이 21일 동안 견디므로 여자가 되었고, 여자는 사람으로 변한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고 했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왕인 인종 때에 김부식이 삼국시대에 대해 저술한 가장 오랜된 역사책이다.

삼국사기는 불교와 유교적인 관점에서 저술하므로 고조선 때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누락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 민족의 참된 역사를 왜곡하였지만 중국에 있는 우리 민족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은 결코 변경시킬 수가 없었다.

중국의 고대사에는 분명히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숭상한 경건한 민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시월이 되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말씀을 읽으며 밤에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했다.

중국의 삼국지에 의하면 “성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天神)께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이라 했고 그 제천자(祭天者)를 수두”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전에 이 땅에 들어와 한국인의 풍속과 정서에 깃든 일종의 토속화된 종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고대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2009년 10월 13일









한국인의 정체성(3)



필자의 어린 시절에만 하여도 산기슭 마다 토지와 부락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서낭단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높은 산에서 하늘과 사람과 만나 대화하는 신령한 장소로 성별하여 산신제를 올렸다. 부족이 이주하면 반드시 정착지의 가장 높은 산을 찾아 산정에서 천신(天神)께 제사를 올린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마을마다 신산(堂山)과 신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드렸고 산기슰마다 서낭단을 만들고 일상의 기원을 드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민간 종교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것과 상통하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조상들이 계절마다 부락 공동체의 종교적인 대제전이 행해졌는데 이것을 신인공락(神人共樂)의 놀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행사를 계절제(Season festival)라고 하는데 봄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것과 가을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를 성대하게 드렸다고 한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낙종기의 제전을 5월에 추수기의 감사제를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하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가무와 음주로 주야로 쉬지 않고 즐거운 축제를 드린 기록이 남아있기도 한다.

아마도 이러한 종교적인 의식은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맥추절과 수장절(감사절)을 지키라는 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고,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술 마시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무제 때의 사람이었던 동방삭(東方朔)은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에 “태연하게 앉아 서로 범하지 않고, 헐뜯지 않고, 사람에게 근심이 있으면 서로 구해 주는 선인이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또한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교시하는 내용이 성경의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져도 새지 아니한다.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 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이와 같은 내용들은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는 민족임을 깨닫게 한다.
고대 우리 민족이 지켜오던 법으로서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마침 십계명과 너무나 유사함을 느끼게 된다.
1. 너희는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라.
2.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사랑하라.
3.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4.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5. 서로 시기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라.
6.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도둑당한 집의 노비로 삼는다.
7.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서 갚아야한다.
8.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우리민족은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귀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은 유일신을 믿는 민족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나 유교를 전통종교로 생각하고,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인식하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므로 마지막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제사장의 민족으로 거듭나기를 원한다. 또한 한국인의 기원을 밝히고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므로 우리의 긍지와 자부심을 되찾고자 한다.

필자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비결은 오직 성경 밖에 없음을 확신하면서 성경을 통한 한국인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 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사도행전17:26-27)



2009년 11월 13일








한국인의 정체성(4)


셈의 장자인 엘람의 이름의 뜻은 높은 곳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내란 말은 사나이의 준말인데 곧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제1의 인류역사는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지만 제2의 인류의 역사는 홍수 후에 방주가 정착한 아라랏산에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아라랏산은 높이가 5,165M로 홍수 후 노아의 방주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며(창8:4) 이곳에서 노아가족들은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았을 것이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다가 점차적으로 아라랏산의 고개를 넘고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산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이 결속하여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온 지면에 흩으시므로 작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창11:9)

셈의 아들인 엘람과 앗수르의 자손들이 아라랏산을 넘어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몽골을 거쳐 만주 땅에 정착했으며, 그 후 한반도, 일본까지 뻗어갔다고 추측하고 있다. 여기에서 정든 사람을 두고 이별의 슬픔을 안고 떠나야만 했던 한 많은 아리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리랑이란 말은 원래 아라랏이란 말의 변형이라고 하며 아라랏산에서 시작된 이별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아리랑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많지만 이별의 한을 간직한 노래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아리랑의 고개를 넘고 넘어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아리랑 민족인지도 모른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멋과 얼이 담겨있는 상징적인 언어이기도 하지만 디아스포라 민족의 고통스러운 애한사(哀恨史)를 표현하기도 한다. “아리 아리랑, 스리 쓰리랑”이란 가사도 나그네의 삶이 아리고 쓰리는 이별의 아픔을 표현한 애절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리랑의 슬픈 역사를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민족의 뿌리를 찾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므로 마지막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대하드라마 연개소문에 자주 등장하는 대화 가운데 “우리는 천손(天孫)의 자손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는 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바로 고조선을 창건하신 분들은 천손의 자손인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형성하시고 고조선을 창건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이 고대 일본에 들어와서 어떠한 문화를 형성하였는가를 추적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일본의 역사와 문화는 우리 민족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은 일본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 민족을 마지막 시대에 온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한 제사장의 민족으로 또한 선교의 나라로 세워주심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사건 속에 우리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노력할 뿐이다.

2009년 12월 02일







고대 일본에 온 한민족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나름대로 한민족의 흐름을 추적하면서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여 보았다. 우리는 전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적인 운명을 지닌 아리랑 민족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민족적인 운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민족의 실체가 바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은 반만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

5000년의 역사 속에 우리 조상들은 아라랏산으로부터 하산하여 중국의 대륙을 거쳐서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고 일본으로 흘려들어오게 된다. 일본인의 기원에 대하여서는 일본인들도 이해할 수 없는 알송달송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의 야요이시대(?生時代:BC300-AD300)에 한반도로부터 한민족의 도래인(渡來人)들이 들어와서 야요이문화(?生文化)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 이전부터 일본인은 한민족과의 혼혈이 되어 형질적인 변화를 이루면서 현재의 일본인의 원형을 형성하였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오래전에 저희 교회에서 일본신학대학의 학장을 모시고 집회를 개최했을 때에 그 분의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 분이 말하기를 “한국과 일본은 한 형제의 나라이고, 한국이 형님이고, 일본이 동생일 것이다”는 매우 의미 깊은 말을 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고대역사와 문화는 한민족이 들어와서 형성하였다는 사실이 많은 고증을 통하여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좀 더 정직하고 솔직하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왜냐하면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왜곡하고 숨기므로 인하여 더욱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고대역사에는 도래인(한민족)들의 정착한 발자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야몬드 교수는 “일본인의 뿌리”에 대한 논문을 통하여 현재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민족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일본인의 기원과 일본 건국의 뿌리는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일본에 전수한 민족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한편 일본 땅에 남아있는 우리 문화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상당 부분 역사를 왜곡하여 고대 한반도가 그들 문화의 뿌리가 아니라 다만 경로였음을 부각시키려고 자신들에게 문화를 전해준 사람들을 도래인(渡來人) 또는 귀화인으로 격하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고대 일본에 단순히 선진문화를 보급할 뿐만 아니라 일본나라를 건국하는데 크게 공헌한 민족임을 깨닫게 한다.



2009년 12월 23일










고대 일본에 온 가야인(1)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참으로 가까운 나라임에 틀림없다. 청명한 날에는 부산에서 대마도(對馬島:쓰시마)가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거리이다. 대마도는 한반도에서 49,5킬로미터 이지만 일본 규슈에서는 132킬로미터나 떨어진 섬이기에 한국측에 더 가까운 섬으로 한국적인 정취와 역사가 숨쉬는 곳이기도 한다.

대마도는 일찍부터 대륙과 일본 본토를 잇는 국경의 섬으로서 대륙문화를 일본에 전하는 창구 역활을 감당한 곳이기도 하다.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는 책을 저작한 홍윤기 교수는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동족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일본은 한반도에서 정변이 일어나거나 신변의 위협이 있을 때는 곧 바로 피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는 가야왕을 추념하는 신사가 있는가 하면 백제신사(百濟神社), 신라신사(新羅神社), 고려신사(高麗神社) 등이 그대로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의 고대 왕국들이 망하게 되면 왕족들이나 귀족들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일본으로 피신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한반도의 고대국가들 가운데 일본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가야국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수로의 일행이 지금의 낙동강인 황산강 하류에 도착했을 때에 변한의 족장들이 수로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우고 그 나라의 이름을 가락국 또는 금관(金官)이라고 했다.

금관이란 가락국이 제철산업을 크게 일으키고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주변 국가들에 철을 보급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후일에 신라가 가락국을 김해(金海)라고 불렸는데 영토는 비록 작지만 모든 바다에 쇠를 공급한 해상왕국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대가락국은 일본에도 세력의 본거지를 두고 멀리 말레이반도와 인도까지 교역하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기에 그 당시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고대역사를 연구한 이종기(95에 작고) 선생은 “2000년 전 가락국의 두 여인이 동북아의 해양 실크로드를 장악했는데 한 여인은 수로왕비이였고, 또 한 여인은 수로왕의 딸인 묘견공주로서 일본 고대왕국의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고 말했다.

가야공주가 일본으로 건너간 때는 서기 103년에 가락국이 해상별국(海上別國)으로 위세를 떨치던 시기였다고 한다. 가야공주는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 고대왕국이었던 야마이국의 초대 여왕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얼마 전에 일본의 텔레비전방송국에서 오키노시마(沖の島)에 국보급의 유물들이 산재되어 있는 현장을 방영한 일이 있었다. 그 섬은 대마도와 북규슈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지만 아무도 상륙할 수 없도록 국가에서 철저하게 봉쇄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그 섬에는 고대 가야인들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 위한 군사전략기지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가야 유물의 보고(寶庫)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섬을 봉쇄한 이유 중에 하나는 왜곡된 역사적 사실이 탄로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가는 반드시 역사의 진실이 밝혀질 것을 기대하면서 가야국을 통한 일본의 문화적인 배경과 종교성에 대한 진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2010년 01월 14일









고대 일본에 온 가야인(2)



가야국은 서기 42년에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의해 건국되어 520년간 존속하다가 서기 562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신라와 병합되기 전 까지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와 더불어 막강한 해상왕국으로서 철기문화를 꽃피우고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왕실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가야지방과 일본열도, 특히 규슈와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인구가 적고 미개척지이었던 일본열도는 가야인들에게는 개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가야란 말은 원래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 나라의 국호를 물고기란 의미를 가진 가야국으로 하였는지 추적하면 할수록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락국을 창건하신 분은 김수로왕이었는데 그의 왕비가 된 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인도의 아유타국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와서 선교하였고 왕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때에 아유타국의 공주이었던 허황옥은 사도 도마에게 세례를 받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가락국에 도착한 허황옥은 수로왕에게 자신의 신분과 온 목적에 대하여 삼국유사에 기록된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본다.

“금년 5월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말씀하시기를 어제 밤 꿈에 함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 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씀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 가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지라 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곧 이곳을 떠나 그리고 가라 하시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실(史實)을 근거한 내용이지만 그 당시에 상제라는 말은 하나님을 뜻함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가락국에 왔음을 분명히 밟히고 있다. 외경이지만 도마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 도마가 인도에 들어가 처음 전도하여 세례를 준 사람이 인도의 공주이며 뒤따라 왕과 왕비도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허황옥의 배가 처음 도착한 곳을 가락 사람들은 주포(主浦)라고 했는데 주님의 포구라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가 그리스도인이었다면 물고기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란 비밀의 암호를 물고기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김수로왕의 왕릉에는 물고기의 문장이 있으면 그와 똑같은 문형이 일본의 가야왕을 추모하는 신사에도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김수로왕의 공주인 묘견공주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규슈로 진출하여 나라를 세우고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 건국의 정신이 기독교적인 배경을 간직하고 있음을 기억할 때 더욱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

가야국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은 최근에 발굴되는 유물들을 통하여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경상북도 영풍군 평은면 왕유리의 낮은 언덕 위에 사도 도마의 석상이 발견되면서 가야국이 고대 기독교 국가이었음을 제기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2010년 02월 01일












고대 일본에 온 백제인


지난 두 번에 걸쳐서 가야국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옛 역사 속에 숨겨진 우리 민족의 환상적인 세계를 그려보았다. 가야국이 물고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국호를 정한 것을 보면 초기 기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 같다. 가야국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상왕국이었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개척정신이 매우 강하였다고 본다.

가야국이 고대 일본으로 진출하여 정치, 종교, 문화를 창출하는데 크게 공헌한 민족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사실이다. 고대 일본은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하여 대륙의 문물을 받아 드리고 토착화시켰다고 본다.

가야인들에 의하여 한반도의 고도의 문화와 철기문물을 받아들이고, 백제인들을 통하여 종교(불교)와 학문 등을 전수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고대 일본에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친 나라는 백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왕실의 고대 천황들은 대부분 백제에서 건너 간 왕족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월드컵 공동주최를 앞두고 일본의 아키히도(明仁) 천황은 “일본 천황계는 백제 왕족의 후손들이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으로 한국과 일본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일본의 천황이 한 말로서는 자존심이 강한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왕의 용기있는 솔직한 고백에 감격할 뿐이다. 왜냐하면 고대 일본에는 백제의 왕족들이 들어와서 일본왕실을 장악하고 천황계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2004년도에 교토시(京都市)의 역사박물관장과 교토산업대 교수를 겸임하고 있는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씨는 “2004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에서 발굴된 금제 귀고리와 장신구 같은 유물들은 일본 나라(奈良)의 후지노키(藤ノ木)고분 출토 유물과 아주 흡사하다. 이것은 교토를 중심으로 한 일본 고대문화의 원천이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들에게서 비롯됐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토가 1천년 동안 일본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한반도의 선진 문화에 있었다. 일본고대 문헌에 기록된 하타씨(秦氏)는 도래인들로서 교토 서쪽 가도노가와(葛野川) 일대에 농업에 혁명을 일으키고, 하타가문을 위한 씨족사찰로 만든 것이 고류지(廣隆寺)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역사 속에 일본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백제에서 건너간 왕인박사일 것이다. 지금도 오사카(大阪)에는 왕인 박사를 기념하는 신사가 있고, 백제왕을 추모하는 신사가 건립되어 있다.

일본말에는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시시하다, 가치가 없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일본말로 백제를 구다라(百濟)라고 말하는데 “구다라나이”라는 말은 “백제가 없다”는 뜻인데 즉 백제가 만들지 않은 것은 아무 쓸모가 없고,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백제의 왕인 박사는 일본 천황의 초청을 받아 한문과 불교를 전수한 사람으로 고대 일본을 재건하는데 크게 공헌함으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2010년 02월 20일









고대 일본에 온 고구려인


가나가와현(神奈川?)에 오이소(大磯)라는 해변 동네가 있다. 오이소(大磯)라는 항구는 고대 일본에 고구려인들이 상륙한 해안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이소(大磯)라는 이름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우리들의 눈길을 끈다. 이곳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고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귀국하였다. 그런데 부모님께 문안만 드리고 바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난 남편이 몇 달이 걸리고, 몇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므로 부인이 매일같이 해변에 가서 먼 고향을 바라보면서 “오이소, 오이소 빨리 오이소”하고 통곡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 해변의 이름을 오이소(大磯)라고 지었다는 애절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이소(大磯) 고마신사(高麗神社) 오이소(大磯)는 옛날부터 한반도에서 온 유민(流民)들이 관동지방으로 들어오는 상육지점이기도 했다. 지금도 이곳에는 고마신사(高麗神社)가 있고, 마을 뒤편에는 고마산(高麗山)이 있어 고구려인들의 발자취를 느끼게 한다. 오이소(大磯) 해변을 통하여 상륙한 고구려인들은 차츰 관동지방으로 들어가 현 사이다현(埼玉?)히다가시(日高市)에 정착하게 된다.

동경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히다가시(日高市)의 고마역(高麗) 앞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란 빨간 장승이 서있다. 히다가시(日高市)를 중심으로 고마가와(高麗川)라는 냇물이 흐르고, 고마촌(高麗村)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은 일본에 사는 재일 동포들에게는 고향의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한다.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에 각각 신라에 멸망당하고 대부분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망명하여 무사시노지역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속일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무사시노 지역은 716년경에 동경 주변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망명객들과 유민(流民) 등 1,799명이 황무지를 개척하였으므로 그 지역을 고마군(高麗郡)으로 불렸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고구려 사람들을 고마인(高麗人)이라 불렸고, 이곳을 고마군(高麗郡) 또는 고마촌(高麗村)이라 하여 지금도 옛 이름 그대로 부르고 있다. 그 당시에 일본에서는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들을 받아 들였고 그들을 우대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하여 선진의 문물을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이다현(埼玉?)이루마군(入間郡) 히다가시(日高市)로 되어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고마군(高麗郡) 고마촌(高麗村)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도 고마신사(高麗神社)가 있는데 고구려의 약광왕(若光王)을 기념하는 신사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약광왕의 59대손인 고마(高麗)씨가 사찰의 신궁으로 그 대를 이어가고 있다.

고구려가 신라에 망하자 고구려의 약광왕(じゃっこう王)이 왕족과 귀족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오이소(大磯) 해변으로 상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일본인들에게 철기제조, 건축, 공예 등 각종 기술을 전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2010년 03월 08일












고대 일본에 온 신라인



고대 일본에 들어온 삼국인(고구려. 백제. 신라)들의 경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추측된다. 고구려는 서해를 거쳐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와 도쿄인근의 오이소(大磯)해안으로 상륙하여 사이타마현(埼玉縣)에 정착하였다.

백제는 남해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긴키(近畿)평야의 중심지인 오사카(大阪)로 상륙하여 다케노우치가이도(竹內街道)를 따라 나라(奈良)지방에 정착하였다. 신라는 동해를 거쳐 니가타(新潟)의 사도(佐渡)섬을 거쳐 일본전역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고대 일본에는 두 부류의 유민(流民)들어 들어왔는데 왕족과 귀족들로 구성된 최고위층들과 또 한편으로는 극악의 무리들이 도망하여 온 곳으로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나라의 정변이 일어나거나 왕권이 바뀔 때마다 학문과 덕을 갖춘 고위층의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망명하였을 것이고, 또한 본국에서 사람을 살해하거나 중죄를 지어 도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도망쳐 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일본 왕실은 야마도(大和)정신을 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어떠한 사람들이라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단 그들이 일본에 들어와서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으면 일본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공헌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오래전에 한국에서 방영한 대하드라마 “연개소문”에는 연개소문의 부친 연태조가 일본 왕실의 스승이 되어 학문과 천문을 가르쳤다고 했다. 또한 김춘추가 신라의 왕이 되기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고 옥에 갇히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일본 왕실에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의 왕족들과 귀족들의 인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고대 일본에 들어온 백제인들은 학문과 불교 등 생활 전반에 필요한 도구들을 생산하여 공급하였고, 고구려인들은 말타기, 싸움, 그리고 농업을 가르쳤으며, 신라인들은 건축과 미술을 전수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신화에는 일본 개국의 대표신인 스사나오노미코토(素盞烏尊)과 그의 누이인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는 신라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본의 고문서에 의하면 스사나오노미코토(素盞烏尊)는 신라신으로 일본의 이즈모(出雲) 땅으로 건너가 일본의 개국신으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고대사에 의하면 “스사나오노미코토(素盞烏尊)는 신라국의 군주로 관련지어서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서 숭배했다.… 스사나오노미코토(素盞烏尊)는 처음에 신라에 계셨고, 그곳은 우두주(牛頭州)인 소시머리((ソシモリ, 曾尸茂梨)로서 강원도 춘천부이다.… 스사나오노미코토(素盞烏尊)을 뒷날에 부르기를 우두천황(牛頭天王) 또는 신라명신(新羅明神)으로서 … 지금도 쿄우토(京都) 굴지의 사당인 야사카신사(八坂神社)에 모시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존숭을 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도 일본의 전 지역에 신라신사(新羅神社)가 산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고대 일본에 끼친 신라인들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 같다.

2010년 03월 27일











고대 일본에 온 유대인


▲ 이청길 목사
동경성서교회
재일본한국YMCA 부이사장)

고대 일본 민족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나라는 역시 한국과 유대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고문헌에 가장 많은 자료들과 유물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유물은 일본의 불교를 통하여, 유대적인 유적은 일본의 신사를 통하여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우리 민족을 통한 일본 선교의 정당성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여 보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유대민족을 통하여 일본에 끼친 영향력들을 찾아보면서 선교의 실말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앞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고대역사를 바탕으로 한 필자의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세계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일본의 고대역사는 일본인 자신도 어렵다고 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알송달송한 역사임에 틀림없다. 일본의 고대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조차도 바르게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 있는 이름에다 무리하게 한자(漢字)로 메꾸고 일본식의 발음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열되는 일본인의 이름조차도 우리로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고대 한반도는 대륙과 일본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수행하므로 모든 문물의 종착지는 일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AD70년경에는 유대 나라가 로마에 폐망한 후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어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마지막 종착지로서 정착한 곳이 바로 일본이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전개되는 파노라마를 통하여 일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국의 신라시대에 진하승(秦河勝)의 가문이 일본으로 귀화하여 경도를 창건하는데 크게 공헌할 뿐 아니라 원시 기독교의 문화를 창출하였다고 한다. 원래 신라 사람이었던 진하승이란 사람은 일본에 들어오면서 하다가와가쯔(秦河勝)라는 이름으로 고대 일본역사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진하승(하다)은 중국에서 귀화한 것으로 한일 역사가들에 의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진실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일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진하승 가문은 경건한 유대인 경교 교도로서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에 귀화한 사람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다가와가쯔(秦河勝) 가문을 기념하는 신사에는 조그마한 연못가운데 세 기둥(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이 세워져 있는데 그 곳에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다가와가쯔(秦河勝) 가문은 도자기, 양잠, 직물 등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였기에 경도에 정착한 후 양잠(養蠶) 직물업을 통하여 경제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경도의 사찰가운데 고류지(廣隆寺)을 창건하였고, 대부분의 신사를 건립하는 일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경도(京都)는 일본에서 비단 제조업으로 가장 유명한 지역이며 황실의 옷감은 대부분 이곳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2010년 04월 22일







일본인의 여름 축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뜻으로 사계절에 신제(神祭)를 드리는데 특별히 7월17일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독톡한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행사는 창세기8:4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하는 성서적인 바탕을 근거로 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지었음을 한탄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더라고 했다.(창6:5-7참조) 그러나 당시에 노아는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요,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여 잣나무로 방주를 짓게 하고 노아의 가족들과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어 생명을 보존하도록 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대로 방주를 다 짓은 다음 노아의 가족과 생물들이 방주에 들어 간 후에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시고, 사십주야로 비가 쏟아지게 하시므로 땅위에 코로 숨 쉬는 모든 생물은 다 죽게 하셨다.

홍수에 구원받은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의 제물을 드리고 감사드렸다. 이것을 기념하여 유대인들은 매년 7월17일에 시온산에서 전통적인 하제(夏祭:여름축제)를 드린다.

이와 유사한 행사로 일본에서는 기온사이(祗園祭)라는 여름축제를 매년 7월에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특히 기온사이(祗園祭)의 총본부인 교토기온신사(京都祗園神社)에서는 매년 7월17일에서 한 주간 동안 성대한 기온사이(祗園祭)의 축제를 실시하는데 배모형의 미코시(神輿)가 신비롭게 느껴진다. 이 때가 되면 일본 전국에서 축제에 참가하기 인파들로 가득차고 여름의 축제의 열기로 흥분하게 되는데, “기온”이라는 말은 원래 시온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가 처음 일본에 왔을 때의 일이다. 한참 여름축제가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어느 지방에서는 미코시(神輿:가마)를 메고 환성을 지르면서 강을 도강하는 축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언약쾌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가는 환상적인 모습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일본에 여행오시는 분들 중에도 이러한 광경들을 목격하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되어진다.

이와 같은 축제는 원래 유대인들이 모세가 홍해바다를 건너간 것과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간 것을 기념하여 드리는 축제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행사가 일본 전역에서 행하고 있는지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면서 이 땅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출14: 여호수아4:7)



2010년 05월 14일










일본 신사의 구조


일본 신사(神社)의 구조를 살펴보면 볼수록 고대 이스라엘의 성막과 너무나 닮은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의 신사(神社)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신비로운 베일에 쌓여있다.

다만 유사한 공통점들을 통하여 베일에 쌓여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 노력할 뿐이다. 옛날에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세계 전역에 흩어져 유량민족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일부의 지파들이 일본에 건너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고대 일본에 유대인들이 남겨 둔 흔적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가령 일본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사의 구조를 보아도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외국 관광객들은 일본의 신사를 찾게 된다. 신사에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두 기둥을 보면서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보아스, 야긴)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어느 신사에 들어가든지 입구의 왼편에는 반드시 수반에 물이 넘쳐흐르는 물두멍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입과 손을 씻고 정결케 한 후에 배전(拜殿)에 참예하도록 되어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30:19-21에 보면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깨끗이 씻은 후에 제단에 나가므로 죽음을 면하도록 한 규례가 있다.

이와 같은 규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영원한 규례로 자손대대로 지킬 것을 명하셨는데 오늘날 까지 이를 행하는 일본인들이 신비롭기만 하다. 그리고 일본의 신사는 배전(拜殿)과 내전(?殿)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유대의 성막의 구조도 성소(拜殿)와 지성소(?殿)로 구분되어 있다. 일본 신사의 내전(?殿)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신주(神主)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별된 장소이다.

유대 성전의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차례씩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별된 장소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어느 신사에나 본당 입구에 헌금 상자가 놓여 있어 반드시 동전을 던지고 참례하도록 되어있다.

구약성경 역대하24:8-10에 보면 “이에 왕이 명하여 한 궤를 만들어 여호와의 전 문 밖에 두게 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반포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정한 세를 여호와께 드리라 하였더니, 모든 방백과 백성들이 기뻐하여 마치기까지 돈을 가져다가 궤에 던진지라”고 했다. 유대 나라의 요아스 왕이 여호와의 전을 중수하기 위하여 성전 문 밖에 헌금 통을 만들어 놓고 정한 세를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였다.

그 돈으로 성전을 수리하고 성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충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례가 일본의 전국에 있는 신사마다 그대로 달습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신사에 가든지 본당 입구에는 반드시 헌금 통이 놓여있고 동전을 던지고 참예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가장 유명한 이세진궁(伊勢神宮)과 아쯔다신궁(勢田神宮)은 물론이지만 오래된 신궁일수록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내부 양식과 비슷하다고 한다. 솔로몬 왕의 성전은 백향목으로 건축하였는데 일본의 신사에도 동일한 목재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성전의 지성소에는 모세의 십계명의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보관되어 있었다. 일본의 황실에서 대대로 전래되어 내려오는 세 가지 신기(神器)가 있는데 이 보물은 아직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지성소에 유치한 것과 유사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실로라는 곳에 신전을 세웠다. 유대인들은 신전에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신정정치를 하였다.

실로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제(祭)를 드리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장소가 되었다. 히브리어로 실로(성막)란 말과 일본어로 성(城)을 시로(しろ)라고 표현하는데 그 발음이 비슷하여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0년 06월 16일







일본 신사의 두 기둥




일본 신사(神社)에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기둥 문을 도리이(鳥居)라고 한다. 불교의 사철과 신사의 사원을 구별하는 방법은 들어가는 입구에 두 기둥이 있으면 신사의 사원이고, 없으면 불교의 사찰이라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일본에는 어느 신사에 가던지 들어가는 입구에는 반드시 두 기둥 문이 세워져 있다.

세워진 두 기둥의 형태도 다양하지만 단순하게 두 기둥만 세워져 있는 것이 가장 원시적이고 원형에 가까운 형태라고 한다. 또한 두 기둥 사이에의 위 부분에 큰 나무를 걸쳐 놓은 형태이거나, 또는 그 위에다 집단으로 만든 뱀 모양의 굶은 줄로 연결한 것도 있다.

기둥 문의 색깔도 백목(白木), 흑목(黑木) 또는 붉은 색으로 칠한 적목(赤木) 등이 있다. 후대에 와서 대리석이나 동(銅)으로 만든 기둥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신사의 들어가는 입구에 두 기둥 문을 세웠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언제부터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한 그 기원에 대해서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필자는 고대 이스라엘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두 기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뿐이다.

이 기둥에 대한 문헌은 구약성경 역대하3:15-17에 기록하기를 “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고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성소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 머리에 두르고 석류 일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그 두 기둥을 외소 앞에 세웠으니 좌편에 하나요 우편에 하나라 우편 것은 야긴이라 칭하고 좌편 것은 보아스라 칭하였더라”고 했다. 솔로몬왕이 성전을 건축하고 들어가는 입구에 두 기둥을 세웠는데 일본의 신사마다 세워진 도리이(鳥居)와 어떤 관계인지 신비롭기만 하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의 행사이다.

유월절의 유래는 출애굽기(12:1-12)에 기록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념하는 명절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의 설주와 안방에 바르게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 전역에 있는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처음 난 것을 칠 때에 집 문 좌우 설주에 피가 있는 집은 넘어가게 하여 재앙을 면하게 하셨다.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삼고 영원한 규례로 지킬 것을 명하셨다. 일본의 초기에 세워진 기둥들은 대개 붉은 색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사원 안에도 붉은 색으로 칠한 곳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두 기둥에 대한 유래를 찾기 위하여 교토기온신사(京都祗園神社)를 방문한 일이 있다. 왜냐하면 기온(祗園)이란 말이 시온에서 유래되었고, 기온사이(祗園祭)의 마쯔리(절기)가 유월절 축제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교토기온신사(京都祗園神社)의 경내를 지나서 높은 산위에 참배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입구의 두 기둥들에는 신의 문(神の門)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즉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옛날부터 일본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반드시 두 기둥의 문을 통과하여 참배하였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구약성경의 나타난 기둥의 높이가 35규빗인데 계산하여 보면 명치신궁(明治神宮)의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기둥 높이와 거의 비슷하다고 사실이 더욱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 (35규빗×45cm)



2010년 06월 28일







유대의 성막과 일본의 신사


모세 오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막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막에 관한 바른 이해가 없이는 모세오경(율법)의 깊은 뜻을 바로 깨달 수가 없을 것이다.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주야로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보여주신 식양(式樣)을 따라 그대로 지은 것이다.(출25:8-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날 장소로써 성막을 짓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려 가는 약도(略圖)이기도 한다. 성막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장소로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죄인들을 만나고, 죄인들과 말씀하시고, 죄인을 받아 주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거룩한 장소로 성별하셨다.

일본의 신사(神社)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거룩한 장소로 성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대교는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부터 존재했지만 일본의 신도(神道)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는 않다. 다만 고대 유대인들이 일본에 와서 신도(神道)를 만든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의식과 신도의 종교적인 의식들이 너무나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명치천황(明治天皇)의 손자이었던 고바야시 다가도시(小林隆利)는 명치천황(明治天皇)의 내친왕(內親王)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명치천황(明治天皇)의 명에 의하여 미국에 유학한 후 목사가 된 사람이다.

명치천황(明治天皇)은 고바야시 다가도시(小林隆利)의 어머니에게 “나는 천황의 권한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조사한 결과 일본은 신도(神道)이다. 그러나 신도는 원래 유대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하였다.

필자는 오래 전에 교또(京都)에서 유대교를 연구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고바야시 다가도시(小林隆利) 목사님을 만나 함께 대화하는 중에 들은 이야기들이다. 만일 일본의 신도의 신자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일본인구와 동일한 숫자인 1억 3천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인의 전 국민이 신도에 속한 씨족의 후손(氏子)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출생하면서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신도의 신자로써 등록되어진다고 한다. 또한 외국인들은 결코 신도의 신자가 될 수 없고, 오직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민족종교이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는 유대교는 더욱 철저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유대교에 등록하고 신자가 되지만 외국인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외국인이 개종하여 유대교를 받아 드리면 그 때부터 그는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이 되는 조건에서 가능하게 된다.

이 지구상에서 오직 유대교와 신도만이 민족종교로써 유일하게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와 유대교와 신도는 우상이 없다는 유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신사의 본당에는 털체(御幣:고헤이;신관이 정결케 하는 의식으로 사용하기 위한 막대기 끝에 가늘고 길게 자른 흰종이나, 천을 끼운 것) 거울, 검 등이 놓여있지만 우상은 아니다. 이것을 요리시로(衣代)라고 하는데 이곳에 신(神)이 강림하는 성스러운 장소로써 구별할 뿐이다. 다만 그곳에 임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숭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대 유대인들이 성막에 언약쾌를 안취하고 그 곳에 강림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동일한 형태이기도 한다. 일본 신사의 원형은 모세 오경에서 나타난 성막에서 유일하게 찾아 볼 수가 있다. 필자는 오직 유대인의 성막과 일본인의 신사 속에 숨겨진 신비로운 비밀을 통하여 일본 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고 싶을 뿐이다.



2010년 07월 19일











유대의 법궤와 일본의 미코시(神輿)



유대민족의 가장 위대한 역사는 유월절 사건일 것이다. 유월절 사건은 유대민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었다.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만들기 위하여 애굽에서 훈련하시고 때가 되매 그들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정착하게 하셨다.

유대민족은 애굽 땅에서 약 400년 동안 고도의 문화와 최고의 기술을 습득한 우수한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을 광야 생활을 통하여 행하셨다.

유대민족은 광야 40년을 통하여 애굽의 온갖 우상적인 습관들과 정신들을 개조시키고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으로 연단하시고 훈련하셨다. 그리고 철저한 신앙적인 교육을 강행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짓게 하시고 법궤를 만들어 안취하게 하셨다.

모든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법궤를 메고 행진하였다. 성막은 유대민족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만들기 위한 믿음의 산실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의 중심은 성막이다. 성막의 중심은 지성소이다.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이다. 법궤의 중심은 십계명이다. 유대인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사는 유일한 민족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일본인들도 신사를 중심으로 사는 민족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사계절의 때를 따라 지역마다 이색적인 마쯔리(祭:절기)의 행사를 행하고 있다. 마침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절기를 지키는 것과 비슷한 축제이다. 유대인들이 절기의 민족이라면 일본인들은 마쯔리(祭:절기)의 민족일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중심은 신사이다. 신사의 중심은 미코시(神輿)이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사실은 일본인들이 마쯔리(祭:절기) 때마다 메고 다니는 미코시(神輿)는 법궤와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유대의 법궤는 가로125cm 새로75cm의 크기로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미코시(神輿)도 동일한 크기와 형태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원래 유대의 법궤 위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천사)이 있는데, 미코시(神輿)에는 봉황새(닭)의 모형으로 되어 있다.


일본의 신화에는 닭은 새벽을 알리고, 어두움에서 빛을 가져다주고,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동물로 숭상되고 있다. 또한 성경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한 베드로를 일깨워 주는 닭으로 상징되고 있다.

하나님은 법궤를 매는 자들은 레위자속 중에서 고핫자손을 성별하여 메게 하셨다.(민수기4:15)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미코시(神輿)를 메는 사람들이 따로 구별되어 이들을 야라이 동자(八瀨童子)라고 불렸다. 이들은 일반 서민들과 구별하여 야라이(八瀨)라는 동네에 집단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마도 일본의 레위족에 속하는 무리들로 자기들만의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는 성별된 사람들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마쯔리(祭:절기) 때마다 미코시(神輿)를 메고 행진 할 때는 대북을 치고, 제금 등 고유의 악기를 치면서 환성을 지르고, 춤을 추면서 행사를 진행한다.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법궤를 메고 가는 모습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역대상15:28)고 했다.

이 때에 다윗왕은 춤을 추며 즐겁게 뛰노는 모습이 등장하게 된다. 필자는 유대인들의 절기와 일본인들의 마쯔리(祭:절기)를 비교하면서 새로운 환상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중심은 지성소이고,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이다.”고 한다. 만약 일본인들이 말한다면 “세계의 중심은 일본이고, 일본의 중심은 교우또(京都)이고, 교우또(京都)의 중심은 신사이고, 신사의 중심은 미코시(神輿)이고, 미코시(神輿)의 중심은 빈공간이다.”고 할 것이다.

금세기에 유대의 최대의 과제는 잃어버린 법궤를 찾는 일이고, 일본의 최대의 과제는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일일 것이다. 일본 선교의 최후의 과제는 미코시(神輿) 속에 두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아 회복하는 일이다.


필자는 일본의 마쯔리(祭:절기)를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환상을 바라보며 일본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꿈을 꾸는 것이다.



2010년 08월 05일










유대의 절기와 일본의 마쯔리(祭)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일본의 신도(神道)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민족종교이다. 이스라엘이 절기의 민족이라면 일본은 마쯔리(祭)의 민족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드리는 여호와의 절기이다.(레위기23:4-5) 이스라엘은 년 초에 드리는 유월절을 시작으로 계속적인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전통성을 이어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다. 외지에 나간 유대인들도 이때가 되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죽기 전에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로써 여호와의 절기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일본에도 정초가 되면 전 국민이 신사에 참배하는 풍속이 있다. 필자도 오래전 정초에 명치신궁(明治神宮)에 갔다가 구름떼와 같이 모여드는 인파 때문에 곤욕을 치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신사의 배전 앞에 참배자들이 던진 동전들이 산과 같이 쌓여 있는 현상을 보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와 같은 행사는 일본 전국의 신사에서 동일하게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유월절을 이어서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초막절 등으로 여호와의 절기로 계속되어진다. 이 많은 절기 가운데 가장 큰 절기로 지키는 것이 유월절일 것이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기적으로 행하신 여호와 절기이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벡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념하는 절기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왕의 마음을 강팍케 하시고 마지막 재앙으로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처음 난 것을 다치도록 하셨다.(출애굽기12:11-14)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와 안방에 피를 발라 천사가 그것을 보고 넘어가므로 죽음을 면케 하셨다. 하나님께서 피가 있는 집은 넘어가게(유월)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에서 구원받았음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430년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감격스러운 절기이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의 유쿠우지방(琉球地方)에서는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마쯔리(祭)가 있다. 봄이 되면 소를 잡아서 그 피를 집에 들어가는 입구에 바르는 풍속이 있었다. 그것은 재앙이 피하여 간다는 유월절 행사와 너무나 닮은 행사이기도 한다. 지금은 소대신 돼지의 피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옛날에 소의 살생을 금지하는 금지령이 있었기 때문에 돼지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풍속을 시마구사라시(シマクサラシ)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재앙을 제거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의 절기보다 훨씬 더 많은 마쯔리(祭)의 행사를 일본 전국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본에서 행하는 마쯔리(祭)의 행사는 년 중에 294번이나 행하고 있으며 1월 정초부터 시작하여 일 년 내내 각 지역에 따라 특별한 마쯔리(祭)가 진행되고 있었다.
과연 일본 민족은 한 해를 마쯔리(祭)로 시작하여 마쯔리(祭)로 끝나는 민족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민족으로 결속되어 간다. 또한 일본 민족도 마쯔리(祭)를 통하여 결속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


2010년 08월 23일












유대인과 일본인(2)


이청길 ckleejp@hotmail.com





일본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유대인과 일본인의 동조론(同祖論)을 말하는 분들이 있어서 우리들의 흥미룰 끌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긍정하고 수용하기는 어려움이 많지만, 그래도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대일본에 유대인들이 온 흔적이 너무나 많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의 종교, 문화, 생활속의 풍속과 습관들을 통하여 너무나 성서적인 민족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종교의식과 신도의 종교의식의 유사점, 유대의 성막과 일본의 신사, 유대인의 절기와 일본인의 마쯔리(祭), 유대의 언약쾌와 일본의 미코시(神輿), 유대의 소금언약과 일본인의 소금의식, 유대인의 풍속과 일본인의 생활 관습, 유대의 국기(國旗)와 이세진궁(伊勢神宮)의 다윗의 문장, 유대의 제사장의 복장과 진자(神社)의 신관(神官)의 복장 등 필자가 조사한 것만으로도 고대 유일(猶日)관계가 얼마나 깊은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고대 일본의 인구가 600만이었을 때, 유대인 하다일족(秦一族)의 집단 19만431명이 일본에 도래(渡來)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 당시에 일본 황실에서는 고도의 문화와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그들을 우대하여 각처에서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일본의 농업의 새로운 기술도입과 고도의 기술을 전수하므로 일본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음으로 일본 황실의 특별한 혜택을 입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다일족(秦一族)의 수장이었던 하다가와가쯔(秦河勝)은 성덕태자(聖德太子)와 절친한 인연을 맺고 교오토(京都)에 경교의 사원인 우주마사절(現:廣隆寺)을 비롯하여 전국에 진자(神社)를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경에도 그들의 유적지로 알려진 미구니진자(三?神社:墨田區向島)에는 조그만한 연못에 셋 기둥(三柱鳥居)이 세워져 있으며 옛날 원시 기독교인들이 세례를 받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유대인으로서 크리스챤이었던 스코트란드 상인 마구레오드(N. Mcleod)는 명치유신의 초기에 요코하마에 내일한 후 일본역사를 조사 연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동양의 많은 나라가운데 일본인만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와 행동양식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2500년 전 유대인의 12지파 가운데 10지파가 동방 세계에 추방되어 사라져 버렸는데 그 종적을 알 수 없었지만 일본인들의 문화와 생활양식 속에서 유대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대백과사전”에는 잃어버린 유대의 10지파에 대하여 각 나라별로 조사 연구한 내용 중에 일본인과 유대인 관계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실크로드의 발생지인 유대와 실크로드의 제일 마지막 땅 일본에서만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근동지방이나 중앙아시아 지방에서는 유대적인 공통점이 전혀 없었지만 유일하게 일본에서만이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무엘 아브라함 그린버거(Samuel Abraham Greenburg)씨는 유대의 잃어버린 10지파는 실크로드를 경유하여 아시아에 이르고,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일본인은 유대의 잃어버린 10지파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믿었고, 또한 유대인의 순수한 혈통이 일본인들 속에 흐르고 있다고 믿었다. 최근에 유대인과 일본인의 동조론(同祖論)에 대한 실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 일본 속에 유대인의 흔적이 많다는 점
2) 양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 했다는 점
3) 두 민족이 선민의식이 강하다는 점
4) 유대는 우상 때문에 망한 나라요, 일본은 우상과 잡신이 가장 많은 나라이라는 점
5) 마음에 무덤을 간직한 민족이라는 점
6) 일시에 단결할 수 있는 민족성 등 이러한 유사점을 통하여 유일(猶日)동조론을 말하는 근거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정설이 없는 상태이다. 고대 일본인은 각 지역으로부터 도래한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친 민족은 유대인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2010년 12월 03일














모리야산(守屋山)의 전설


이청길 선교사 ckleejp@hotmail.com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리아산은 창세기22장에 기록한 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거룩하게 성별된 특별한 장소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재확인하기 위한 시험으로 100세에 얻은 귀한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생명보다 귀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다리고 3일 길이나 멀리 떨어진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곳에 도착하여 단을 쌓고 독자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놓고 칼을 잡고 잡으려고 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 수양을 잡아 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는 뜻)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창대하여 네 자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축복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모리아 산의 역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축복의 특별한 장소이다. 지금은 그 곳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거룩하게 성별된 장소이기도 한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일본에도 모리아산의 전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나가노현(長野?)에 스와다이샤(諏訪大社)라는 유명한 진자(神社)가 있고 그 뒤편의 산 이름이 모리야산(守屋山)이다. 스와진자(諏訪神社)는 모리야산에 강림한 모리야신(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세워진 진자(神社)라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스와다이샤(諏訪大社)와 모리야산(守屋山)을 몇 번 방문하면서 그 곳에서 매년마다 행하는 마쯔리(祭)의 모습이 창세기22장에 등장하는 내용과 너무나 닮았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모리야산(守屋山)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모리야사료관(守矢史料館)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곳에는 75마리의 사슴머리가 전시되어 있다.


왜 사슴 75마리의 머리를 전시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을 방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실마리가 풀릴 것 같다. 지금도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유월절 행사 때마다 양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데 사마리아인 사제에 의하면 과거에는 75마리의 양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사도행전7:14 참고)

특별히 전시한 사슴머리 가운데 귀가 찢어진 머리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여 제물로 바쳐진 사슴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스와다이샤(諏訪大社)에서는 매년 봄철에 온토사이(御頭祭)라는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신비로운 마쯔리(祭)와 동시에 미사구치(ミサクチ)라는 마쯔리(祭)를 행하고 있다.


이 마쯔리(祭)의 절정은 소년을 기둥에 결박하고 신관이 작은 칼을 휘둘면서 소년을 위협하고 있을 때에 다른 편에서 말을 타고 온 기사도가 포박당한 소년을 구출하는 극적인 장면이다. 마침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이와 같은 마쯔리(祭)의 행사는 명이지(明治)4년까지 시행해 오다가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중지되었다고 한다. 고대 일본역사의 연구가에 의하면 미사구치(御イサク蛇) 마쯔리(祭)는 이사구(이삭)을 신으로 섬기는 마쯔리(祭)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 뜻을 이해하는 일본인은 흔하지 않는 것 같다. 온토사이(御頭祭)의 마쯔리(祭)는 신(神)과 인간이 함께 어울려 친교하는 특별한 축제라고 전해지고 있다.


마침 아브라함이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을 잡아 제물로 드리듯이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희귀한 마쯔리(祭)이다. 스와다이샤(諏訪大社)의 산하에 약6,000개의 진자(神社)가 있지만 그들이 행하는 모든 마쯔리(祭) 속에는 성서적인 배경으로 한 내용들이 너무나 많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스와지방((諏訪地方)은 디아스포라민족이 된 이스라엘의 제2의 전설적인 고향인지도 모른다.

고대 일본에는 글자가 없음으로 먼저 말이 있었고, 그 뒤에 글자를 만들어 넣었기 때문에 참으로 알쏭달쏭한 이름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 모리야가계(守谷家系)는 78대손으로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2010년 1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