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고신역사 - 이상규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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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고신역사 - 이상규 교수님



한상동 목사는 어떤 분이었을까?
이상규 교수의 연재작, 고신역사의 뒤안길,1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교회사학)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의 수려한 필치로 고신교회의 역사, 그 숨겨진 뒷 이야기를 엮어가는 “고신역사의 뒤안길”이라는 연속 사설(史說)이 연제됩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되, 오늘의 안목으로 해석하는 고신역사의 뒷담화가 우리에게 흥미를 더해 줄 것으로 기대 됩니다. “고신역사의 뒤안길”은 2주에 한번씩 새로운 글로 독자들을 방문하게 될 것입니다. -코닷-



고신역사의 뒤안길,1



▲ 한상동 목사

한상동 목사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내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주제였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한사람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한 사람을 지나치게 추앙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 분에 대한 ‘믿음’과 그 분의 ‘역사’ 사이를 오가며 한목사님은 어떤 분이었을까를 두고 고심하며 여러 문헌들을 검토한 일이 있다. 그런 연유로 한상동 목사님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요게시 차다가(Yogesh Chadha)가 「간디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간디의 새로운 전기를 썼듯이, 정직하고도 객관적인 그의 내면의 세계를 정리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나는 한상동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대한 일이 많지 않다. 단지 학생의 신분으로 그를 대하고 그의 설교를 들었을 뿐이다. 그런 주제에 한목사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도 한계를 느끼지만, 칼빈 얼굴 한번 못 본 주제에 칼빈을 논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래도 나는 학생대표의 한사람으로 한목사님과 대화한 일도 있고, 설교도 듣고 훈시도 들었으니 나의 소회를 공소지설(空疎之說)이라 탓하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는 한목사님이 하셨던 3가지 말이 늘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왜 신학을 공부하려고 합니까?

그 첫 말씀이 신학 공부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한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1971년 2월이었다. 고등학생 때 우연하게도 본훼퍼의 「나를 따르라」(Nach Forge)를 접하게 되면서 신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학교 도서관에서 「기독교사상」이라는 잡지를 읽으면서 ‘신학’이라는 학문이 세상과 별리하는 종교적 담론이라기보다는 역사와 문화, 철학과 사회를 아우르는 고상한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던 나는 서울에 있는 학교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기독교사상」의 필진들이 대부분 그 학교 교수들이었기에 나는 그 학교가 가장 좋은 학교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친 그해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가서 도봉구 수유리에 있는 그 대학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건물 정면 상단 벽에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아 왔다. 찻길 도로에서 학교로 향하는 길목에 핀 개나리꽃이 인상적이었고, 강의실 복도 벽에 걸려 있던 노 신학자들의 사진이 나에게는 숙연함으로 닦아왔다. 서울에 연고만 있었다면 아마 나는 그 학교로 갔을 것이다. 막상 서울로 가려하니 기거할 곳조차 없었고 궁리 끝에 누님이 계신 부산으로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그 결과 고려신학대학에 지원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고려파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셨고, 그것이 한목사님과의 첫 대면이었다. 물론 그가 한상동 목사였다는 점은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의 면접 첫 마디가 “왜 신학을 공부하려합니까?”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학문의 근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이런 비슷한 말로 둘러댔고 결국 고신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고려신학교에 입학 한 후 나는 여러 번 후회했다. 우선 학교 교사(校舍)나 시설도 보잘 것 없었고, 솔직히 수업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교회인지 대학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우선 답답했다. 그 체제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하나님은 나의 세류의 야욕을 꺾으시고 고신의 사람이 되게 하셨다. 그 후에 이런 저런 학문의 가로(街路)를 지나며 언제나 나를 권려했던 말은 왜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이 언제나 나를 상기(想起)했고 신학이라는 학문의 길을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제가 뭐 압니까?

한목사님의 말씀 중에 늘 남아 있는 또 한마디 말이 “제가 뭐 압니까?”였다. 고려신학대학에 입학한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한목사님을 뵙게 되었다. 경건회에서는 그의 설교를 들었고, 경건회가 끝나면 그가 학교와 관련된 광고를 하기도 했다. 교사 한 구석에 있는 탁구장에서 탁구 치는 모습도 보았고, 교수실 주변을 오가며 교단의 어른들과 숙의하는 모습도 본 일이 있다. 그런데 한목사님이 학생들 앞에서 늘 하던 말씀이 있었다. “제가 뭐 압니까!” 나는 이 말을 들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참 겸손하신 말씀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한편 그래도 대학의 학장의 위치에 있는 분으로서 적절치 못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도 큰(大)배움터(學)에서 학장님이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하니 배움은 기대하지 말라는 말인가? 신학의 길에 입문하며 학문의 길에 매진하고자 했던 우리에게는 의외의 말씀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신앙과 삶을 몸으로 체달한 관후한 자기 성찰의 말씀으로 알지만, 솔직히 그에게 있어서 지적 추구는 미약했다. 하기야 서구의 기독교신학, 특히 루터교 전통에서 영적 삶의 기본 토대는 지적 추구를 중시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도(Oratio)와 묵상(Meditatio)과 시련(Tentatio)을 중시했다. 지식과 정보에 대한 앎은 별것 아닐 수도 있다. 신학연구의 기초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신학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묵상이나 시련이라는 것은 삶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 인식의 중요성을 지적한 말일 것이다.

이런 저런 불만도 있었고 학교에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점이 있었기에 그 앎의 욕동을 뿌리치지 못하고 서면의 시립도서관, 대청동의 미국문화원 등을 찾아다니고 보수동과 서면 뒷길의 고서점을 전전하다 보니 말석이지만 선생노릇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뒤돌아보니 “제가 뭐 압니까!”하는 말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말(言)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칫 된 줄로 알고 선줄로 알 수 있는 나의 은밀한 교만, 그 욕동을 내파(內破)하는 경구가 아닌가? 아직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내면의 고백이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힘이 아닐까?



불타면 다 없어집니다.

“세상의 종말이 오면 다 불타고 없어집니다.” 한목사님의 설교에서 몇 번 들은 말이지만 이것이 그의 주요문(core word)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빈번하게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나는 이 말을 수긍하기를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내세지향성이 없지 않았겠지만 지나친 현실부정은 개혁주의적이 아니다. 한국의 영성가들, 전천년주의자들, 현실부정적인 신비주의자들, 분리형 구조를 지향하는 이들이 주로 견지했던 입장이 바로 이런 현실부정 위에 자리 잡은 내세지향주의이다. 세상의 종말이 오고 세상이 불타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삶이 무의미한가? 그렇지는 않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만 이 자리는 적절치 않다.

사실 한목사님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의지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상동의 상(尙)을 상(相)으로 표기한 경우에도 시정의 의지가 없었던 것 같고,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글 중에 자신이 직접 쓴 글은 거의 없다. 고려신학교 설립과 관계된 문서는 박윤선이나 송상석의 글이었고, 심지어는 자신의 옥중기 「주님의 사랑」이 일인칭의 자필기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박윤선의 대필이다. 그의 화란 방문을 앞두고 급하게 만들어진 「고신학보」(1972. 3)에 게재된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과 “소위 고려파가 생기기까지”는 고신의 시작, 한상동목사의 신사참배 반대 등과 관련하여 빈번하게 인용되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지만 이글은 사실은 한상동목사의 글이 아니라 당시 국문학을 가르쳤던 정홍권 목사의 글이다. 한목사의 별세 후 그의 수기본 설교집 4박스 약 50여책이 고신대학 도서관에 있었다. 그 설교노트를 기초로 만든 설교집이 심군식의 편집으로 만들어진 「신앙세계와 천국」에 이은 한목사의 두 번째 설교집 「고난과 승리」였다. 이 설교집 제목도 사실은 내가 제안한 것을 전호진박사가 좋다고 하여 붙여진 제목이다.

이 설교집을 만들기 위해 그의 설교노트를 검토하면서 놀란 것은 한목사님의 설교집에서 설교 전문을 다 기록한 것은 (나의 관찰이 정확했다면) 단 한편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요약문이거나 제목만 있거나 설명이 곁들어 있다 해도 전문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그 시대의 관행이었다고 이해한다. 그래도 「고난과 승리」에 실린 그의 설교문은 사실은 나와 동료들이 한목사의 설교 대지(大旨)에 살을 붙여 만든 일종의 반(半)창작물이다. 물론 한목사님의 정신이나 대의는 유지되었다고 보지만 한목사님의 설교문으로 보기에는 진정성에 의문을 갖는다. 내가 기술한 한목사님의 설교문은 사실은 내 생각, 내 방식의 설교문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심군식목사님의 경우는 어떠했느냐고 내가 질문했을 때 그는 이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의 질문을 받은 그는 난감한 듯 멀리 처다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편찬된 찬송가에는 한상동 목사님의 작시한 것으로 알려진 한편이 찬송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면 그것은 한목사님의 시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목사님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두 가지, 곧 삶의 여정과 글인데, 그는 전자를 남겨주었지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지 않았다. 이 점이 한목사님을 헤아리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가장 어려운 난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목격자들, 한목사님 주변 인사들의 증언은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사실 한목사님은 종말이 오면 세상은 불타고 없어지게 된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 글을 남기지 않는 일차적 이유인지, 글쓰기에 대한 무관심이 보다 근원적인 이유인지는 차치하고라도 그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던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남이 할 일이고 나는 주님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긴 것이 아닐까? 한목사님에게는 우리와는 다른 신앙의 비범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세상사로부터의 초연함으로 해석하고 이런 점에서 그를 “무명에의 의지”로 산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든 이에게 적용되지만 그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송상석 목사 측과 대립하던 시기에는 그 이전의 삶의 여정과는 다른 일면이 있었고 그 점은 늘 나에게 해결해야 할 숙제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명리를 쫓고 명예에 연연하여 내면의 양심을 뿌리치며 권력을 탐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불타면 다 없어진다.”는 현실 초극적인 영적 관후함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자기를 들어내지 못해 안달하고, 사리(私利)를 쫓아 교권을 이용하고 부질없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목사님의 목소리는 훈계가 될 것이다. 부질없는 명예를 좇아 “아침부터 우리 정치함으로서 저녁까지 씨를 뿌리는” 이들에게 나도 한번 말해주고 싶다. “불타면 다 없어집니다.”



2010년 08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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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 세 사람과 고려신학교 복교
고신역사의 뒤안길, 2



고려신학교의 복교로 시작된 고신의 환원은 고신교회 역사에서 주요한 분깃점이 된다.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고 교단 환원을 의도했을 때 당시 고신의 세 학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이들의 태도는 한상동 목사의 고려신학교 복교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

3인 공동 성명서

이런 점에서 ‘동방박사 세 사람’으로 불리던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박사의 궤적은 우리의 흥미를 끈다. 고려신학교 5회 동기생들인 이 세 사람의 삶의 배경과 성격, 상호간의 인간관계, 정치적 성향, 그들 간의 협력과 경쟁의 역학구도, 그리고 한상동, 송상석 두 분과 그들이 속한 노회와의 관계 등에 대한 심리적 환경은 196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의 고신 교회와 대학, 그리고 고신 교단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그들의 인간관계는 어떠했을까? 그리고 고신의 합동과 환원 등 고신교단의 주요사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우리들에게 1963년 2월 25일자로 발표된 3인 공동명의의 성명서는 흥미로운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성명서

1. 우리 세 사람은 일찍이 고려신학교에서 양성을 받은 동지로 뜻한바 있어서 신학을 좀 더 연수하여 한국교계에 미력으로나마 이바지 하자는 약속을 하여 왔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고로 유학을 마치고 미숙한 자들로 자인하면서도 귀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계정세를 보니 저들의 생각과는 달리 정착할 수 없었고, 환경의 강력한 지배가 우리들의 입장을 좌우하게 되며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떠나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교계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감을 주는 형편이 되었으므로 적지 않는 괴로움을 가져왔습니다. 하나가 둘이 서 있는 자리로 가느냐? 둘이 하나가 서 있는 자리로 가느냐?가 우리의 당면한 과제였지만 동지규합은 소지관철(所志貫徹)의 비결임으로 결국 3인이 약속하여 행동하기로 하였습니다.



2. 우리는 고려신학교 복구(復舊)의 방법은 가하지 않았다고 하겠으나 그 동기는 순수하고 그 정신이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3. 우리는 신학교를 운영하는 이사회와 학교의 교육과 행정을 담당하는 교수회의 책임 한계를 엄격히 할 것을 확보하고 제단을 구성하여 구태를 벗어난 새로운 운영방침 수립을 확인하고 고려신학교에서 세 사람이 동역하기로 하였습니다.


저간(這間) 교회에 불안을 끼친 우리들의 부족한 점을 관용해 주시고 앞날의 지도와 편달을 바라오며 이로서 우리의 소신을 외람되게 교계에 성명하는 바입니다.

1963년 2월 25일

右 홍반식 (인)

이금삼 (인)

오병세 (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946년 9월 설립된 고려신학교를 모체로 1952년 9월 고신교단이 태동했고, 그로부터 꼭 8년 만인 1960년 12월 13일에는 일 년 전 분열된 승동측과의 통합을 통해 ‘합동교단’으로 새 출발하게 된다. 고신과 승동측이 통합하게 되자 양 교단이 운영하던 신학교의 통합은 불가피했다. 고려신학교는 승동측이 운영하던 서울의 총회신학교와 병합되어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로 남게 되었다. 여기서 그간의 역사를 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합동이 이루어진 배경에 대해서도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고신교단이 승동측과의 합동을 단행하고 신학교의 통합운영이 진행되는 그 격변기에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등 고신의 세 아들들은 유학중이었다. 이들이 유학 후 고려신학교 교수로 일하기 위해 해외에 가 있는 동안 국내에서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세 사람의 성명서에서 말한 “환경의 강력한 지배”였을 것이다.

경남 진해 출신인 홍반식(1918-1993)은 1951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4년 4월 미국으로 떠나 칼빈신학교(Th.M)를 거쳐 드랍시대학교에서 “히브리성경에 나타난 저주 형식과 고대 셈족문서”라는 제목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1961년 8월 11일 귀국했다. 귀국한 그는 곧 고려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경북 봉화출신인 오병세(1926- )는 1956년 9월 도미하여 컨콜디아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구약에 있어서 보편적 구주의 주제로서의 여호와의 왕권”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61년 8월 31일에 귀국하여 바로 고려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곧 고려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단일화 구상에 따라 부산의 고려신학교는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가 되었고, 안용준과 오병세교수는 1962년부터 서울 총회신학교에서 강의하기로, 이상근과 홍반식교수는 부산분교에서 강의하도록 내정되었다. 부산 분교장은 박손혁목사였다. 부산의 분교는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고 졸업반은 서울에서 공부하게 하되, 교수들은 점차적으로 서울로 옮겨가기로 한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근삼 박사가 귀국했다. 이근삼(1923-2007)은 고려신학교를 졸업 한 후 1953년 12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고돈대학과 카버넌트신학교를 거쳐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기독교와 신도민족주의의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1962년 7월 박사학위를 받고 그해 9월 2일 귀국했다. 그러나 전기한 홍반식, 오병세 박사와는 달리 그는 총회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지 못했다. 총회신학교에는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한철하, 이상근 등의 교수가 있었기에 또 다른 조직신학 교수를 초빙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근삼박사가 총회신학교 교수가 되지 못한 점에 대해 한상동 목사는 매우 상심했던 것 같다. 사실 이근삼은 한상동 목사가 담임하던 부산 삼일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박윤선 목사의 주례로 한상동 목사의 처조카와 결혼했으므로 이근삼은 한목사의 처조카 사위였다. 총회신학교 교수가 되지 못한 이근삼은 감천에 있던 칼빈학원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칼빈학원은 흔히 칼빈대학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1954년 10월에 설립된 고려신학교 예과과정에 준하는 각종학교였다.




고려신학교 복교 선언

그런데, 한상동 목사는 1962년 10월 17일 수요일 느닷없이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선언했다.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에서의 경건회를 마친 직후였다. 이것은 고려신학교의 복교인 동시에 승동측과의 합동을 파하고 고신교단의 환원을 의미하는 첫 신호였다. 한목사는 총회신학교 부산분교 간판을 내리고 고려신학교 간판을 달았다. 이때는 양 신학교의 단일화 추진을 합의한지 채 1년도 되지 않는 때였고, 총회신학교 부산분교로 출발한지 7개월이 되는 때였다. 이근삼 박사가 귀국한지 46일이 되는 날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왜 갑작스럽게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선언하게 되었을까? 흔히 고려신학교가 폐쇄될 위기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영환은 한상동 목사의 내면의 이유는 처조카 사위인 이근삼 박사가 교수로 채용되지 못한 점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말한다.1) 송상석은 이 점을 더 강하게 주장한다.2)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은 예상보다 강한 파장을 몰고 왔다. 찬성과 반대가 비등하였고, 곧 상당한 논란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동방박사 세 사람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이근삼은 박손혁과 함께 즉각적으로 복교에 동참했다. 오병세는 처음에는 복교에 동참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는 복교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복교에 동참한 박손혁, 이근삼을 따라 1962년 12월 17일 복교에 합세했다. 복교에 가장 부정적인 인물은 홍반식 박사였다. 그는 복교 방식이 불법적이라고 생각하여 이상근과 함께 복교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들은 1960년의 승동측과의 합동에도 반대한 바 있었다. 그런데 무리하게 합동을 추진하더니 불과 2년도 못되어 신학교의 환원을 추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홍반식과 이상근 교수는 고려신학교 환원을 반대하는 6명의 학생들과 함께3) 고려신학교를 떠나 영도로 가서 별도의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부산시 영도에 위치한 신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한편 칼빈학원에서 일하던 이근삼은 고려신학교에 와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졸업반으로 서울에 가서 공부하던 10명의 학생 중 5명이 부산으로 돌아와 재학생과 합류했다. 그들이 남영희, 이지영, 진학일, 최만술, 최진교였다.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5명은 구용서, 김후조, 이금조, 옥치상, 최종국 등이었다. 고려신학교로 돌아온 5인은 12월말까지 수업하고 12월 17일 졸업식을 거행했다. 이들 5명이 바로 고려신학교 제17회 졸업생이 된다. 바로 이 때 오병세 교수가 환원에 동참하고 고려신학 졸업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홍반식은 고려신학교를 떠나 있었고 고려신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4) 그의 마음은 고신에서 떠나 있었고 한목사님의 복교선언은 독단적인 처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성명서에서 말하는 “환경의 강력한 지배가 ...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떠나있게 되었다.”는 상황이었다.




송상석의 홍반식 설득

이런 상황에서 홍반식 교수를 다시 고신으로 모셔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강구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고신의 아들이었고 고려신학교가 그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추진한 이가 송상석 목사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이가 지득용 장로였다. 송상석은 한상동 중심으로 합동이 추진될 때도 반대 의사를 지니고 있었으나 협력하였고, 고려신학교 복교나 고신환원도 부당하다고 여겼으나 한상동 목사를 지지해 주었다. 송상석 목사는 당시 재건국민운동 창원지부장이기도 했던 지득용 장로의 사무실에 와서 홍박사를 다시 고신으로 모셔 와야 한다며 협력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든 중 송상석 목사는 1963년 2월 18일 홍반식을 모시고 가덕도 소양보육원으로 향했다. 두 사람을 실은 배는 겨울의 세찬 바람을 가르며 30여분 후 가덕도 소양보육원에 도착했다. 송상석 목사는 소양보육원 설립자인 지득용 장로와 친분이 깊었던 관계로 그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는 홍반식 박사가 합동측 인사와 접촉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전화도 없는 저 외딴 섬 가덕도로 오게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송상석 목사는 홍반식 교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득용 장로는 두 사람의 긴밀한 대화를 위하여 대화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차와 음식을 대접하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완강하게 거부하던 홍반식에게 송상석은 두 사람이 한 사람 있는 곳으로 가기 쉬운가, 한사람이 두 사람 있는 곳으로 가기 쉬운가라고 말하면서 홍반식의 복귀를 권했다. 또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이 세 사람은 고신의 세쌍둥이라고 하면서 홍박사를 설득했다. 송상석은 지득용 장로 홍반식 박사와 식사하면서 비빔밥에도 밥과 고추장과 나물,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하듯이 이박사와 오박사, 그리고 홍박사 세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한다며 고려신학교로의 복귀를 간절히 요청했다. 드디어 수요일 오전, 곧 2월 20일 홍반식은 고려신학교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날이 수요일이었으나 가덕도에 남아서 쉬기로 했다. 수요일 저녁에는 소양의 식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송상석 목사가 사회하고 지득용 장로가 기도하고 홍반식 교수가 설교했다. 목요일도 가덕도에서 하루 쉬고, 금요일 곧 2월 22일 부산으로 나갔고, 송상석 목사, 지득용 장로 그리고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세 사람이 남포동에 있는 관해여관에서 만났다. 관해여관은 지득용 장로가 부산에서 일을 보고 당일 가덕도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 늘 쉬던 곳이기도 했다.

이날의 5인 모임은 3박사가 화합하기로 한 감동적인 모임이었다. 이 자리에서 송상석은 3인 성명서를 초안하여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고신의 세쌍둥이입니다.”는 식으로 시작 되는 문서였다. 송상석은 필력을 지닌 분으로 고신의 여러 성명을 초안했던 분으로 이런 일에 능했다. 그러나 지득용 장로는 세 사람의 성명서이니 세 분이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그 결과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이 세분은 고심 끝에 위의 성명서를 초안하고 헤어졌다. 주일 후 월요일인 2월 25일 관해여관에 다시 모였다. 이 자리에는 모임을 주선한 송상석 목사, 지득용 장로, 그리고 홍, 이, 오 세 분 교수, 그리고 박손혁, 한상동 목사가 함께 자리했다. 이 자리에서 세 사람이 작성한 성명서가 낭독되었다. 그것이 서두에 소개한 성명서이다.

이렇게 되어 홍, 이, 오 세 교수는 1963년 2월 신입생 선발을 위한 시험을 거친 후 3월부터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고려신학교를 재건하게 되었고, 박윤선 이후 혼란했던 고려신학교와 교단의 숙제를 풀어 가면서 고신의 역사를 만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일로 이들은 ‘동방박사 세 사람’이란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성명서의 정신

그런데, 이 3인의 성명서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첫 항에 보면 당시 환경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세 사람을 갈라놓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하나가 둘이 서 있는 자리로 가느냐? 둘이 하나가 서 있는 자리로 가느냐?”로 고심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는 “동지규합은 소지관철의 비결임으로 결국 3인이 약속하여 행동하기로 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이 세 사람은 고려신학교에로의 복귀나 총회신학교 교수로의 유임, 그 어느 것도 가능하고 그것은 신학적 문제이거나 윤리적인 문제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신학적인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양자택일이 가능한 선택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세 교수의 성명서는 고려신학교 복교가 신학적 일관성에 근거한 불가피한 결단이라든가 폐합보다는 복교가 더 윤리적 행위였다고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5) 단지 이들은 소지관철이라는 이름으로 동지규합에 응한 것뿐이라는 점을 고백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어느 것이 더 윤리적인가 혹은 행정적으로 정당한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 성명서 두 번째 항에서 한상동의 고려신학교 복교 방법은 부당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홍반식 교수가 강하게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도 “그 동기가 순수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데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근삼, 오병세교수의 즉각적인 복교동참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나온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진술의 진정성에 대해서 세 사람이 인식을 같이 했을까하는 점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든다. 예컨대, 홍반식의 경우 복교는 부당했지만 단지 ‘동지애’라는 차원에서 고려신학교 복교에 동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성명서 제3항에서 “학교의 교육과 행정... 책임 한계를 엄격히 할 것을 확보하고, ... 구태를 벗어난 새로운 운영방침 수립을 확인하고...”등은 홍반식의 요구였다는 점이다. 그는 우회적으로 한상동목사의 독단적인 학교운영방식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고 차후 이런 식의 경영을 피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사실 홍반식은 한상동목사의 방식에 대해 내심 불만이었고, 한상동 목사와의 관계에서 볼 때 이근삼, 오병세 보다 홍반식 박사가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어떤 점에서 홍반식 박사는 송상석 목사에게로 경도되어 있었다. 특히 이 점은 고신의 내분으로 부산노회를 배경으로 한 한상동과 경남노회를 배경으로 한 송상석의 갈등이 깊어질 당시 뚜렷이 드러났다. 송상석 중심의 경남노회가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고려신학교를 1975년 설립했을 때 미국에 체류하던 홍반식 박사는 그곳으로 갈 곳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점 또한 그의 송상석에게로의 경도를 암시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위의 세 교수 성명서는 고신의 역사와 그 이면의 인간관계를 헤아려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문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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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영환, 『한국기독교 교단사』, 494.

2) 송상석,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72.

3) 당시 부산 고려신학교 재학생 65명 중 복교 찬성이 53명, 반대가 6명, 중립이 6명이었다.

4) 이근삼박사 기념 문집,『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57.

5) 이상규, “1960년대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 『개혁신학과 교회』제20호(2007),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