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구원은 은혜지만, 구원 상실은 우리 교만과 게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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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구원은 은혜지만, 구원 상실은 우리 교만과 게으름


인간의 구성요소



인간의 구성요소를 연구함에 있어서 일반 학자들은 성분적으로 나누지 않고 물질적으로만 나눕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염두에 두고 성분적인 면으로 인간을 바라보아야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간을 정확히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면 인간은 성분적으로 육과 영이 결합된 존재로 말하고 있습니다. 육은 물질적인 육과 비물질적인 육(이성)이 있는데 이것을 통틀어서 육체라고 합니다.



1. 육, 육신.(σ?μα)

성경에서 육이라 할 때 단순히 물질적인 육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육신, 육정, 육의 요소, 육신에게 소속된 것 전부’를 모두 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계 안에서도 가견적인 물질은 육으로 알고, 육성, 육의 요소 등의 이성에 속한 비물질적인 요소는 영(靈)이라고 착각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는 말씀이 있는데, 이 육신의 정욕은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입니다. 비물질이지만 그러나 영은 아닙니다. 영이 아닌 이유는 ‘육신의 정욕’이란 우리 속의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는 성질 성분을 말하는데 이것이 우리 속의 하나님의 요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요소인 ‘영혼’을 거스리는 것이니, 하나는 타락된 인간의 요소요, 하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요소로서 이 둘이 절대 같은 질의 영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우리 속에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롬8:6) 육신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도 못하고, 순종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원수(약4:4)라고 했습니다.



영과 육을 한 마디로 분리해서 말한다면 죽음 저 넘어 천국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은 영이요, 천국에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육입니다.



2. 영.(퓨뉴마)



? 재료.

사람의 제일 내부에는 영이 있으며, 이 영은 비록 물질계 안에 있지만 그 재료는 물질이 아니라 영물입니다. 물질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만 영물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신령한 존재입니다. 사람에게 영이 필요한 것은 물질계 세상에서 신앙훈련이 끝나면 영이 본격적으로 활동할 곳은 영계인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 위치.

영은 마음 안에 거주합니다. 영이 성령님을 좇아 마음 안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통해서 몸을 다스리며 →몸을 통해서 외부 만물을 다스립니다. 즉 영은 개개인의 인격의 주체성이요, 본분적 책임적 권위적 주체성이지만 인간의 무형적 활동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이성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몸과 마음과 영을 합해야 인간이므로 이 요소들을 나누어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 가치와 위치는 아주 다릅니다. 영은 그 사람 내부에서 주격입니다. 영이 주인이고, 마음과 몸은 각각 차원을 달리하며 영을 보필하는 영이 사용하는 기관입니다.(롬8:10, 16, 고전2:13-14)



? 특성.

첫째, 하나님의 형상.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는데, 이를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영은 하나님과 같은 속성을 가졌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영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속성의 차원은 다릅니다.(창2:7)



둘째, 단일성의 존재.

영은 복합체로 된 물질과는 달리 단일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쪼개거나 나누지를 못하고, 이 부분은 병들고 저 부분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로 죽을 때도 단번에 죽고, 또 중생될 때도 단번에 중생이 됩니다.(롬8:1, 히7:27, 9:25-26, 10:1-2)



셋째, 하나님만 전용.

영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만 사용하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영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악령이 영으로부터 심신을 빼앗아 우리의 심신을 사용했지만 심신의 주격이 되는 영은 악령이 죽이기만 했지 그 영을 자기 소유로 삼아 사용하지는 못합니다.



이 영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그 순간 작동을 완전히 멈추게 됩니다. 이 영 속에서 영을 움직이고 다스리는 존재는 하나님(성령님)뿐입니다.(롬8:16, 고전3:15, 요일5:18)



넷째, 사람의 주격.

사람은 영과 마음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물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몸과 마음을 통틀어 육체라고도 합니다. 이 몸과 마음을 거느리고 주인노릇을 하는 우리 속의 주체는 영입니다. 따라서 이 영이 죽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죽은 것이고, 영이 살아 있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육체나 마음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은 영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신앙적인 면에서는 한 번 중생된 사람은 육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분류하고, 그 영이 죽어 있으면 육이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입니다.(롬8:10-14, 고전3:11-15)



얼핏 잘못 깨닫게 되면 이성을 영으로 착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성이 주격인 것처럼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절대 자유성이 보장되어 있되 단순한 자유자가 아닌 ‘의존적 자유자’인고로 이 이성은 인간의 주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1. 영의 분류.(속성)

동물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물에게도 비물질성은 있습니다. 엡 2:1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이라는 말씀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이란 중생하기 전의 영, 즉 타락한 영을 말하는 것인데 만일 이성이 영이라고 한다면 미중생자는 이성이 죽은 상태이므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아야 할 텐데 미중생자도 이성은 살아서 움직입니다. 따라서 이성은 영이 아닙니다.



(1) 타락 이전의 영.

타락 이전의 영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격적인 실체로 지음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원형이시라면 인간의 영은 그의 모형입니다. 모형적인 인간의 이 영은 인간으로서는 완전성이지만 하나님과 같은 본질과 본성적 무한적 절대적 완전성은 아닙니다. 또한 타락 이전의 영은 가범성적이요 가사성적이지만 완전 멸절성은 아닙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영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한 영이요,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이 내주해서 결합적 상태로 있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영은 진리와 영감의 접선상태에 있었던 것뿐입니다. 접선상태에 있다는 말은 단절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타락 이전의 영은 절대 자유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릴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리는 것이 동시에 영감을 버리는 것이니 진리와 영감을 버림은 곧 하나님과 단절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과 단절됨으로써 인간 속에는 부패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영이 진리와 영감에서 단절되는 찰나가 영의 타락이요, 죄의 기원이요, 인간 타락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와 영감으로 하나님과 접선되어 유기적 피동적으로 활동했던 영이 진리와 영감을 버림으로 하나님과 능력적 생명적 연결이 단절이 되고, 단절됨으로 말미암아 인간 속에는 부패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2) 타락 이후의 영.

타락 이후의 영은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이므로 영행이 완전히 중단된 무활동의 존재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 무활동 존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타락 이후의 영은 의행이고 선행이고 간에 활동중단 상태입니다.



이렇게 타락된 영은 죄와 사망에게 완전히 포로 되어서 무활동 상태로 인간 개체 속에 존재해 있게 되었으니, 타락된 이 영은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못하는 한 악령이나 마귀에게 피동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의존적인 존재이면서 하나님과 접선 상태에 있었던 영이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한 번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영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과 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사성 가범성적인 이 영이 범죄를 하자 하나님으로만 움직이는 단일성의 이 영은 당장 활동을 멈추게 된 것입니다. 즉 영이 죽은 것입니다. 한편 심신은 의존적 자유자이므로 자기의 영이 죽어 활동을 중지한고로 이 영에게 붙들려 움직이는 대신 자기를 붙들고 있는 악령을 좇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중생된 영.

타락된 영은 인격의 주격자로서 죽은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살아날 수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데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행을 입어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의 모든 죄책임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대형으로 허물과 죄로 포장되어 있던 것이 완전히 벗겨지고, 그리스도의 대행으로 그리스도의 본질과 본성대로 성분적으로 의로워짐으로 진리와 성령이 영속에 들어와서 결합하여 내주해 계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중생이라, 거듭남이라’ 합니다.



타락 이전의 영은 무죄성의 실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된 가범성적 사상성적 모형적 영입니다. 반면에 중생된 영은 타락 이전의 영의 성분 성질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 결합, 영원히 내주하는 영입니다. 따라서 타락 이전의 영은 하나님과 끊어질, 단절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중생된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의 중보적 결합으로 구속을 입고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진 것이니 이 영 자체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끊어지고자 하는 성질도 없고, 또 이 결합성은 그 누구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제 중생된 영은 절대적으로 단독적 활동기관이 아니라 성령님과 결합된 상태로 성령님과 유기적 피동적 활동의 기관이니 이 상태의 영행은 전부가 의행이지 죄행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된 중생된 영의 행에 죄행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도 죄행이 있다는 말이 되니 이는 성립이 될 수 없는 말입니다.



또한 만일 중생된 이 영행에 죄행이 있다고 한다면 이 영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라 악령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주격이 되어 영행이 나오는데 이 영행이 어떻게 죄행이 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믿는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중생된 영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몸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성과 몸이 영행으로 사는 것을 의행이요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라 하고, 이성과 몸이 육성을 따라 옛사람으로 사는 것은 전부가 죄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4) 성장되어 가는 영.

성장하는 존재는 인간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처럼 성장하는 존재는 신령계와 물질계를 총망라하여 없다는 것을 성경이 계시하고 있습니다. 천사나 마귀는 성장이나 번식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영은 물질적인 육신이 성장을 하듯이 성장을 합니다. 인간의 육의 성장은 가식적이요 가견적인 반면에 영의 성장은 지혜 지식적 성장, 도덕적 성장, 능력적 성장으로써 불가견적 무형적 성장입니다. 영의 이 성장에 따라 활동이 다르고, 모든 감성이 달라지니 여기에는 자동적으로 쾌락성 향락성이 달라지는(커지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이 감성은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임을 알고 그 성장성을 바로 잡아 바른 성장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이 물질세상에 사는 동안에 해야 할 일은 영적 자기를 성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① 물질로 성장하는 인간.

물질인 육체는 비물질적인 영과 결합된 존재입니다. 물질인 육체는 물질계에 존재하는 동안 하나님의 자연은총의 혜택을 입어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물질의 성장과 동시에 기능과 지능적인 면이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의 성장은 자연계시입니다.



② 지능적인 면이 성장하는 인간.

인간이란 본래 출생 당시부터 지능적 혹은 기능적으로 완전한 자도 없고, 아울러 기능 면이나 지능 면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완전에 도달한 자는 없습니다. 인간은 지능 면과 기능 면이 출생과 함께 영점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죽음의 선에 도달하기 전까지 모든 인간 개개인의 성장률은 동일하지 않고 같은 시간, 같은 환경, 같은 시대 속에서도 각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현존 세상에 있는 인간 중에 물질인 자기의 신체를 세계 최고의 거인으로 성장시켰다 할지라도 기능 면과 지능 면에 성장을 못했다면 인격적으로 자신보다 더 많이 성장한 자에게 결국은 이용을 당하고 마는 것을 볼 수가 있으니 우리 인간은 물질인 신체성장을 위주로 하는 것보다는 기능 면과 지능 면을 성장시키는 것이 그 효력성이 시간적으로 더 장구하며, 더욱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③ 죄악적으로 성장하는 인간.

일반적으로는 사람의 성질을 곧 죄악성으로 보지만, 성질은 성질이고 죄악성은 죄악성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각자의 선천적인 성질은 시대의 영향이나 부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모든 인간은 본래 출생 시부터 동일하게 원죄의 책임 아래서 출생하게 됨으로 죄악성은 출생 시에는 동일합니다. 성질이 유순하고 강퍅한 것이 출생 시와 출생 후에 차별이 있으나 인간의 출생 시의 원죄는 누구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출생한 이후부터 각자 자기 속에 죄악성이 성장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 받을 이 죄악성은 인간의 신체가 주야로 성장하고 있음과 같이 우리 속에서 성장해 가고 있는데, 이 말은 사람이 출생한 이후로 더 완악하여지고 강퍅해지고 잔인성이 성장해 간다는 말이 아니라 20대 이전보다 20대 이후에 사람이 성질적으로 많이 유순해졌다 할지라도 그 속에 죄악성은 성장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의 성질이 강퍅해 보이면 그 사람의 죄악성이 큰 것이요, 그 사람이 유순한 것만큼 죄가 적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적으로 성인이라, 선인이라 할 정도로 유순하면 유순한 것만큼 죄악성이 적고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는 그대로 죄악성을 많이 성장시켰고, 많은 심판거리를 건설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공자는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도를 받고 그 길을 가는 자가 많기 때문에 공자가 살았을 때보다 죽은 후에가 그 심판이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악성이라고 볼 수 없으나 하나님의 척도에는 그 죄가 무한히 큰 것입니다.



성질이 고약한 사람과 유순한 사람 중에 누가 구원을 더 잘 이루겠습니까? 구원의 힘은 둘 다 똑같이 써야 합니다. 인간 보기에는 착하지만 그 속에는 죄악성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악성이 성장하지 못하게 하려면 이성과 몸이 진리와 영감에 피동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적극적인 신앙생활입니다.



④ 신의 성품으로 성장하는 인간.

일반 피조물들은 단순물체만 성장을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인간 속에 보이지 않는 죄악성이 성장하고 있고, 또 우리 인간은 신의 성품인 구원(성장구원)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화구원은 계속적이니 이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계속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시간과 환경과 사건과 내 이성과 몸이 들어서 죄악성으로 성장되기도 하고, 또한 나의 이성과 몸이 진리와 영감에 순종해 나갈 때는 내 속에서 신의 성품이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즉 내 이성과 몸이 옛사람과 결합되어 있을 때에는 죄악성이 성장해 가고, 이성과 몸이 새사람과 결합되어 있을 때에는 구원이 성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둘이 성장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의 형상인 우리는 원형이신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고 하는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성품으로, 즉 그의 지혜 지식성으로, 그의 도덕성으로, 그의 능력성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얻은 것으로서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속에 죄악성 심판성이 성장하고 있음에도 인간을 바로 알지 못해서 내 속에 무엇이 성장하고 있는지를 모른 채 자기의 일생을 살아간다면 그 날에 가서 자기가 성장시켜 놓은 죄악성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그 날이 오기 전에 지금 여기서 성장해서는 안 될 죄악성이 성장하도록 두지 말고 진리와 영감을 좇아 원형이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성장시키고 가야 할 것입니다.



육체만 성장시키고 일반 지능성만 성장시키는 것은 자기 속에 죄악성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은 세상을 위해 경쟁을 하지만 우리는 구원건설에 경쟁을 해야 합니다.





ps: 구원 얻은 자도 죄 지으면 지옥 간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십자가 사건은 나의 영을 살리는 단회적인 사역인데(다 이루었도다) 중생한 자라도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육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다시 또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구원이라면 죽을 때까지 구원의 확신도 확정도 없이 살다가 죽어봐야 자신의 구원여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완료형)는 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완료형)라는 구원이 확정된 중생을 말하는 구원이?있고, "구원을 이루라, 해산함으로 구언을 얻는다, 자라라, 싸워라"(진행형, 미래형)?등등의 구원 얻은 자로서 이뤄가야 할 성화구원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구분하지 못한 채?중생한 성도들을 향해 이룰구원 성화구원적 측면에서?믿는 자도 죄를 지으면 마치 지옥게 아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거나 지옥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는 권고의 말씀을 성도들도 죄를 지으면 그대로 지옥에 간다는 말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 전제적으로 성경은 믿는 자들을 위한 구원의 말씀이라는 것만?알아도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중생한 자도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면 아주 잘 믿는 사람인데 그만 순간적으로 죄를 짓는 중에 회개할 기회도 없이 순식간에 죽어버리면 그 사람도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이 되니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실은 ‘천국은 가봐야 알지’ 라는 말과 다름없는 불신앙적이요 무책임한 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구원 얻은 사람도 죄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중생된 영의 성분과 성질이 어떻다고 하는 것과 성분적인 면에서 영과 육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하는 말입니다. 구원 얻은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중생한 영이 아니라 이성과 몸이 죄를 짓는 것이요, 중생한 영의 성분은 하나님의 질과 똑같은 성분이므로 중생된 이 영은 하나님이 죄를 짓지 않는 이상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죄로 오염될 수도 죄가 접근할 수도 없는 것이며, 하나님이 죽지 않는 이상 절대로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중생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면 중생한 그 영은 하나님의 질과 다른 것으로 중생이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로 통해서 구원을 얻은 자가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예정을 주장하는 사람이 택자라고 해서 구원 얻었으니 놀고먹자고 하겠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데서 하는 소리입니다.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고 하면 제일 먼저 하는 반론이 성도들의 죄를 조장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 속썩이는 자식임에도 언젠가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로 부모가 자식의 요구를 들어주니까 그 자식이 생각하기를 우리 부모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주니 더 망나니로 살겠다고 하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망나니짓을 하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부모의 사랑을 생각해서 그 악한 삶을 버리고 부모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문제를 천연적인 인간의 생각을 따라 세상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을지라도 극악한 죄를 지으면 사형에 처해지는 것처럼 구원 받은 자라도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는 중생한 영의 성질과 성분을 몰라서 하는 말이요, 영과 육의 구별을 하지 못해서(영이 죄를 짓는 것인지, 육이 죄를 짓는 것인지) 하는 말이요, 하나님과의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경험하지 못한데서 하는 말입니다.

‘영이 중생한 사람은 비록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의 질과 똑같은 성분으로 중생한 영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아직 성화되지 못한 이성과 몸이 죄를 짓는 것이니 거듭난 자가 이런 죄를 지으면 비록 마음과 몸이 이 땅에서 지옥과 같은 고통의 징계를 받기는 하겠지만 이 중생한 영은 지금 곧 죽어도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되지 지옥에는 절대로 가지 못한다’는 이 말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구원의 확신을 주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애정의 절대성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고 성도들로 하여금 죄를 더 짓도록 하는 말로 들린다는 것 자체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비록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갈 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바 되지 못한 생태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영원 전서부터의 하나님의 지고하신 사랑의 발로로 그리스도로 통한 자신의 구원을 예정하셔서 그 예정 안에서 구원(중생)해 주셨음을 진정으로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더라도 타락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보다는 ‘너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주님의 것이므로 이제 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옥엔 가고 싶어도 절대로 갈 수가 없고 천국의 영원한 백성이니 그 백성답게 살아라’ 하는 말씀에 더 감사 감격해서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바 된 구원 얻은 백성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 없이 그저 신학적 교리적으로 주입된 지식이나 세상에서의 경험을 따라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경계를 해야 할 일이지만 ‘주님께서 당신의 피값으로 사신 당신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지옥에 보낸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궁하고 무한한 사랑을 욕되게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