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교육 전도사와 신학생 양성 과제...[1]
고신대 신대원 양낙흥 교수
"신학생 전도사 제도에 대한 비판"를 평가해 주셨으면
신대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신학생 전도사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도전받는 설교권
최근 어느 기독교 잡지에 존경받는 평신도 지도자요 경영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고려대 김인수 교수가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한 글을 기고했다. 그는 자신을 40년 이상 신앙 생활하면서 수많은 목사들의 설교를 접한 장로라 소개하면서 결국 “설교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현재 한국 목사들의 80%는 설교할 능력이 없으므로 차라리 평신도들 중에서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설교하는 것이 훨씬 은혜스럽고 교회를 세워가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설교의 능력과 은사가 없으면서 강단권만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오히려 교회를 “황폐화”시킨다고 단언했다.
김교수가 말하는 “설교의 은사”란, 문맥으로 볼 때, 오랜 세월 큐티 등을 통해 성경의 메시지를 바로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뿐 아니라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청중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도권에서 배출된 대부분의 목사들이 설교 능력이 없다는 그의 지적은, 오늘날 한국의 많은 목사들이 성령의 조명이나 권능같은 초자연적 차원은 고사하고, 가르치는 자로서의 기본적은 소양, 즉 성경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능력을 심각할 정도로 결하고 있다는 불만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서울 강남의 한 대표적 교회에서 대두되는 주장은 내일 즉시 수도권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된다 할 때 설교권을 평신도들에게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제도권 교회가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문제임에 분명하다. 특히 신학교들은 김교수의 지적을 더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오늘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가 이처럼 “들을 것 없는” 차원으로 전락한 이유로 김교수는, “어렵지 않게 들어가고 졸업할 수 있는 신학교” 그리고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는 목사 안수”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 한국의 신학교”가 교인들의 영혼의 문제를 다룰만한 “자격을 가진 목사들을 얼마나 양성했다고 생각하는가?“고 한국의 신학 교육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설교의 결정적 중요성
만일 사회와 교회의 60대 지도층 인사의 이러한 지적이 사실무근의 것이 아니라면 한국 교회는 이것을 계기로 목회자 자질 문제를 한번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의 설교가 왜 평신도들로부터 이처럼 극단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 분석을 해 보아야 한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예배의 중심은 말씀 선포다. 설교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예배가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는다는 것이다. 또 장로교 전통에서 목사는 “말씀과 성례의 종”이라 불리운다. 목사직의 본질은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이라는 것이다. 성례는 일 년에 서너 차례로 끝난다. 그렇다면 개혁 교회에서 목사는 사실상 “설교의 종”이라는 의미가 된다.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없다면 목사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또 가장 실용주의적으로 말하더라도 오늘날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목사의 교회가 부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목회자 자신들의 평가에 의하면, 현대 도시 목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종종 70%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면 신학교 입장에서는 어떻게 설교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역량이 있는 졸업생들을 배출할 수 있을까? 대체로, 자질있는 목사의 배출은 삼단계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첫 단계는 자질있는 신학생의 선발이다. 둘째는 선발된 학생들에게 양질의 훈련을 제공하는 과정이다. 셋째는, 일정한 기준에 미달되는 신학생만을 졸업시키는 일이다.
신학생 선발이라는 첫번째 과정 및 목회 후보자로서의 최소한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신학생을 걸러내는 세번째 작업은 주로 신대원에서 감당해야 할 일이므로 교단에 호소할 부분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선발된 신학생들을 자질높은 목회자로 양육하는 두 번째 작업은 현재의 상황 속에서 단지 신대원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적합한 교과과정을 개발하고, 양질의 강의를 제공하며,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인격적, 영적 모범을 보이고 개인적 상담과 지도를 수행하는 것 등 이 단계에서도 신대원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것들은 좋은 목회자 양성을 위한 작업의 일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신대원이 아무리 신학생들에게 바람직한 교육을 제공하려 하더라도 원천적으로 그것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외적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학생 전도사 제도의 문제
오늘 신대원에서 자질있고 잘 준비된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데 결정적 걸림돌이 되고 있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신학생 전도사 제도다. 이 제도 때문에 목사후보들이 좋은 설교자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 영적 훈련 시간의 거의 절반이 때이른 “목회 실습”에 배당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대 한국 교인들의 교육적, 상식적 수준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다. 지적 수준이 향상된 교인들은 당연히 목사로부터 적절한 지성적 수준이 있는 설교를 기대하게 된다. 물론 단지 지적이고 논리적인 설교가 은혜를 끼치는 설교는 아니다. 좋은 설교에는 영성과 영감,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본적 논리나 핵심적인 주제도 없는 설교가 “은혜”스럽거나 “영적”이기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의 많은 설교들이 기초적 논리와 중심되는 포인트를 결하고 있다.
논리적 연결성, 그리고 중심 주제가 결여된 설교를 낳는 근본 원인은 교육의 부실이다. 즉 논리적 사고와 효과적 표현 능력의 결핍이 무기력한 설교를 낳는 중요한 한 원인이다. 글쓰기를 요체로 하는 기본적 지성의 훈련도 없다는 인상을 주는 목사가 이미 모든 권위에 대한 의심과 비판에 익숙한 현대 교인들에게 지도력을 갖기는 어렵다. 혹 이삼십년 전이라면 몰라도 현대와 미래의 교회를 위해 소명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기본적인 사고 능력이나 논리적 표현력조차 없다면 어떻게 그 소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신대원 교육의 실상
신학생들의 지성을 개발하고 학적 소양을 강화하는 것은 신대원의 고유하고도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목회자들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목회 책임을 감당하기에 급급한 현실을 감안할 때 목회자의 학문적 자질을 개발하는 것은 신대원 과정이 사실상 마지막 시기이다. 그런데 신학생의 지성적, 신학적 훈련이 신대원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슬픈 일이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우리 신대원이 주로 학적 훈련에만 치중해서 영적, 인격적 훈련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신학생들에 대한 신대원의 영적, 인격적 훈련이 부족한지 어쩐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그것은 또 하나의 다른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신대원의 지적, 학적 훈련은 심히 미흡하다는 것이다.
교육학의 초보적 지식이지만, 고등교육이란 단지 교수의 강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학 이상 수준의 교육에서 강의는 단지 그 과목의 기본 지식을 전수하고 방향을 제시할 뿐이다. 그래서 선진국의 신대원생들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시간은 하루 평균 두세 시간에 불과하다. 하루 중 나머지 시간을 그들은 도서관에서 스스로 자료를 찾고 읽고 글을 쓰는 데 보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정을 이수할 수가 없다. 이들은 삼 년동안 전적으로 신학교에 머무르면서 장래 목사가 되기 위해 준비한다.
그런데 우리 실정은 어떠한가? 우리 신대원생들의 신학 훈련의 거의 전부는 강의듣는 것뿐이다. 그들은 깊이있고 폭넓게 신학 서적을 읽고 자신의 영혼과 신학적 주제들과 장래의 목회를 위해 여유있게 사색할 시간이 없다. 그들이 학교에 머무르는 시간의 대부분은 강의실에 앉아서 강의 내용 노우트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들은 학교에서 보내는 삼일 반 동안 17-20 시간의 강의를 소화해야 한다. 새벽 여섯 시에 시작되는 기도회를 마치고 식사 한 후 오전 아홉 시에 강의를 듣기 시작하면 저녁 대여섯 시까지 점심 시간과 경건회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계속 강의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 취침 때까지 몇 시간은 퀴즈 보기 위한 준비나 숱한 과제물 처리에 바쳐야 한다.
우리 신대원 과정이 3년이라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일 년 반이다. 왜냐하면 우리 신대원 교육은 화수목 그리고 금요일 오전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금요일 정오가 되면 매주 모든 학생들은 평균 왕복 13-14 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도표 1 참조). 이 여행은 다음 주 월요일 저녁이나 밤에 끝난다. 자기들이 봉사하는 교회가 있는 부산, 경남 지역으로 왕래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요일 오후는 내려가는 길에 소비된다. 미처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이들은 금요 심야 기도회에서 찬양 인도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토요일은 자기가 맡은 부서에서 주일 설교 등을 하기 위한 준비로 정신이 없다 (하루만에 설교가 제대로 준비되겠는가?) 주일에는 새벽기도회(봉고차 운전)에서부터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다.
월요일이 되면 일반 목회자들과 달리 좀 쉴 시간도 없이 또 짐을 꾸려 천안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화요일 아침이 되어도 아직 정신의 기어를 교회에서 학교로 완전히 전환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가운데 있다. 화요일 저녁 무렵에야 겨우 자신이 학교에 와 있다는 사실에 적응된다. 수요일 아침에 비로소 정신을 차려 공부에 좀 집중해 보려 하면 금방 목요일이 된다. 그리고 다음날 금요일 오전이면 다시 기차로, 버스로, 자동차로 장거리 여행을 떠난다. 그러면 다시 정신의 기어를 교회로 바꾸어 넣어야 한다. 이런 스케줄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차분히 공부하고 영성을 개발할 수 있겠는가? 물론 건강에도 심각한 지장이 있다. 얼마 전에 우리 신대원생 열명이 헌혈을 하러 어느 병원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 팔 명은 헌혈 부적격 판정을 받고 돌아 왔다. 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과로가 그 원인이었다.
다른 교단 신학생들도 우리 신학생들처럼 주말에 교회 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우리 교단의 경우가 가장 심각하다. 왜냐하면 합동이나 통합측에서는 이미 영남, 호남 등의 지방 신학교들이 인가를 받아 학생들이 주로 신학교가 소재한 지방의 교회들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매주 먼 타지역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다.
비성경적, 비장로교적, 비상식적, 시대착오적 관행
신학생 전도사 제도는 성경적 근거도 없고 교회사적 전례도 없으며 특히 장로교 전통과는 극단적으로 대립된다. 역사적으로 장로교 전통은 교육과 훈련의 과정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다룰 자격을 부여하는 일에 가장 강하게 반대해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신학생 전도사 제도는 신학생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신학생은 피교육자이지 교육자가 아니다. 신대원생은 목회를 위해 준비해야 할 사람이지 지금 당장 목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성인 목회든 미성년 목회든 목회를 당장 감당할 수 있다면 신대원 교육은 불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생각, 즉 신학생들도 지금 당장 목회를 할 수 있지만 단지 조금 더 잘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신학교에 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즉 신대원 교육을 필수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요 받지 않더라도 목회하는 데 별 지장이 없지만 받으면 “약간” 더 나을 수 있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인식이 많은 신대원생들로 하여금 신대원 교육에 해이하고 안일한 태도로 임하게 한다. 자신들은 소명을 받았으므로 이미 당장 목회하고 설교할 자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신학교육은 목회를 위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여긴다는 것이다.
신학생 전도사 제도는 불합리한 제도이다. 한 사람이 전심전력을 필요로 하는 일을 동시에 두 가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래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 공부와 영성 훈련에 전심전력하는 것은 만만한 과업이 아니다. 목회 사역도 전력투구를 요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이 어려운 두 작업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신대원생들은 공부와 목회 두 가지에 다 부실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신학생 전도사 제도가 언제 어떻게 한국 교회에 도입되었을까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세기 말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에 들어와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면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그때는 한국에 아직 신학교도 적었고 그 교회들을 목회할 한국인 목사도 부족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학업 중인 신학생들이라도 주말에 목사없는 지방 교회에 내려가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다시 신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이 지나 전국적으로 목사가 수만명이 되고 무임 목사의 수가 교단마다 수백 명씩 되는 21세기가 되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는 변화된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신학생들을 본격적인 교역자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도사 제도가 소위 “목회 훈련이 된다!”는 반론의 허구성
많은 사람들이 “그러나 좋은 목사가 되려면 단지 학문만이 아니라 목회 실습, 즉 현장 훈련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전도사 제도는 긍정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적 훈련과 개인적 영성의 함양만이 아니라 목회“실습”이 필요하다. 의사, 판검사, 변호사,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에도 실습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실습은 일단 소정의 이론 학습 과정을 필한 후에 이루어진다. 생각해 보라. 의과대생이 예과 일학년이나 본과 일학년 때부터 진료 행위를 하는가? 법대생이 법학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재판을 하고 소송에 관련하는가? 교사들이 사범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일학년 때 교생 실습을 하는가? 인간의 재산과 육체적 생명, 혹은 세상 지식을 다루는 분야에서도 일정 기간의 이론적 훈련을 마친 후에야 그 분야의 유급 종사자로 나서거늘 하물며 우리가 입버릇처럼 외치는 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다루는 목회는 왜 기본적 학습도 끝내지 않은 학생들에게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목사직을 경홀히 여기는 위험한 인식의 표현 아닌가? 목회 “실습”은 마땅히 소정의 신학적, 영적 훈련을 필한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목회 훈련의 기간으로 마련된 것이 바로 2-3년의 강도사 기간이다. 실습은 그 이삼 년의 풀타임 훈련이면 족하다. 이론을 공부할 때는 충실히 이론을 공부하고 실습을 할 때는 실습에 전념해야 한다. 기본적 이론 수업도 안 된 가운데 실습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미성년자 목회 경시 풍조의 문제성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 모른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성인이 아닌 미성년 교육 부서를 책임지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도 개혁주의 전통과 상식에 어긋하는 주장이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에서 “말씀”을 다루는 것은 일정한 교육 과정을 필하고 자격 시험을 패스하는 등의 요건을 구비한 목사들에게만 맡겨야 하는 중요한 일로 간주되어 왔다. 목사들에게 독점적 강단권을 인정하는 전통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칼빈주의 교회들에서는 교인의 미성년 자녀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교육하는 일도 목사들이 담당해 왔다. 종교 교육의 나머지 부분은 부모들 책임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받게할 때 바로 그 일을 하겠다고 서약한다. 그런데 칼빈주의를 자처하는 한국장로교회는 어떠한가?
미성년자들의 종교 교육을 아직 피교육자들인 신학생들에게 일임해 버리는 개혁 교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도 없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소아과 진료는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담당하는가?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가장 다루기 어려운 환자들이 소아들이다. 영혼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린 영혼들을 다루는 데는 더 큰 조심성과 자격이 필요하지 않은가? 왜 한국 교회는 미성년들 교인들을 아직 그들 자신 피교육자들인 신학생들이 맡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너무나 안이한 발상이 아닌가?
이 혼탁한 시대, 타락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불안정한 청소년들에게 종교 교육을 실시하는 어려운 일을 자기 공부를 하기에도 힘겨운 상황에 있는 신학생들이 감당하기에는 무리다. 신학생들은 수십, 수백명의 다른 영혼을 책임지고 돌볼 위치에 있지 못하다. 사실 신학생들의 목회는 실효성이 거의 없다. 그것은 “신학생에게 자녀들을 맡겨 놓았으니 뭐가 되고 있겠지.”하는 교인들의 자기최면일 뿐이다. 일 주일에 한시간, 그것도 단체로 만나서 되는 일이 뭐가 크게 있겠는가?
3년 간의 신대원 기간은 대부분의 신학생들에게 인생의 마지막 정규 교육 기회이다. 이 기간동안 최선을 다해 학적, 영적, 인격적 수련을 쌓아도 졸업 후 실력있는 목회자로서 일할 수 있을지 어쩔지 기약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기간의 절반을 사실상 교회 “아르바이트”하는 데 투자하고서 어떻게 21세기의 목회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목회와 설교가 그렇게 쉬운 일인가?
교단이 미래의 목회자 양성 비용을 담당해야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신학생 전도사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신대원 3년 동안은 만사 제쳐 두고 모든 학생이 장래 목회 준비를 위한 영적, 학적 훈련에 전념하게 해야 한다. 주말마다 열 몇 시간씩 여행하느라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차분히 한 장소에 머물면서 책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영성과 지성을 개발해야 한다. 교회 봉사는 외국의 경우처럼 주일에 평신도 수준의 봉사로 끝내어야 한다. 목회 실습은 강도사 기간에 집중해야 한다.
이 정도 되면 이제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면 신학생들의 학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신학생들이 교회 봉사를 하는 대가로 각 교회들이 전액, 혹은 반액의 등록금을 보조해 왔다. 만일 신학생전도사 제도가 사라지면 그들은 어디서 학비를 조달할 것인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문제는 재정 능력이 아니라 의지가 있는가이다.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우리 교단의 서너덧 교회가 힘을 합쳐 신학생 한 명만 책임지면 된다. 우리 교단 교회가 1500 교회요, 신대원생 숫자가 300-400명이라면 4-5 교회가 한 신학생을 보조하면 된다. 신학생 일 년 학비는 500만원 이하이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어떤 교회는 한꺼번에 열 명의 신학대학원생 학비와 생활비도 전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투자는 궁극적으로 학생들이나 신학 교수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교단 교회들과 교인들을 위한 것이다. 충실하게 훈련된 신학생들은 불과 몇 년 뒤에 그 교회들의 강단을 충실하게 함으로써 교인들의 영혼에 말할 수 없는 큰 축복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그보다 더 값있는 투자가 어디 있겠는가? “신학생들에게 돈을 준다면 당장 교회 일을 시켜야지 일도 안 하는 사람에게 왜 돈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 근시안적이고 옹졸한 생각이다. 그것은 인재 양성과 장학의 중요성에 대한 기본적 인식도 없는 몽매한 사고다.
“신대원생들이 교육 전도사 노릇을 하지 않으면 교회의 교육 부서는 누가 맡을 것인가?”하는 걱정스런 질문도 당연히 예상된다. 자녀들 신앙 교육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교회들은 교육 목사를 채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교단의 무임 목사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한 전임 교육 목사가 신학생들이 맡고 있는 여러 교육 부서를 책임진다면 교인들의 재정 부담이 그리 크게 증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교인들의 재정 부담이 증가한다 하더라도 이 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장래를 위해 교인들은 그러한 경제적 짐을 져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건 교회들 형편을 너무나 모르고 떠드는 안일한 소리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교인들 형편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녀들의 세속 교육을 위해 한 달에 몇 십만원씩 기꺼이 내면서 그들을 학원이나 과외에 보내고 있다. 그 돈의 몇분지 일만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투자한다면 교회는 교육 목사들을 충분히 청빙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자와 대동소이하지만 더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교단에서 신대원 운영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방법이다. 문자 그대로 교단이 신학교를 “직영”하는 것이다. 즉 총회가 신대원에 대한 현재의 각 교회 경상비 0.75% 지원을 3%로 증액하기로 결정하면 문제는 끝난다. 현재 신대원 일년 예산이 약 32억 정도요 그 중 교단 지원금이 8억 정도 된다면 그 지원을 네 배로 증액하면 신학생들이 등록금을 전혀 내지 않더라도 신대원은 운영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이런 말을 하면 또 누군가는 “그건 일선 교회들 경제적 형편을 너무나 모르고 떠드는 소리다!”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가? 미국의 CRC 교단(화란 개혁파들의 후손 교단)은 교회 예산의 거의 절반을 상회비로 부담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학교, 대학 운영, 세계 선교, 대사회적 사업 등 모든 큰 일들을 교단 총회 책임 하에 수행하게 하고 있다. 그것이 본래의 장로교적 방식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지나치게 개교회주의적이다. 상회비를 개 교회 예산의 50% 씩 내는 교단도 있는데 우리는 교단의 미래를 책임질 신학생 교육을 위해 3%도 낼 수 없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고신 신학과 신앙을 온 한국과 전 세계에 전파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일 수 있는가?
셋째, 교단의 재력가들에게 호소한다. 재산이나 유산의 일부를 신학교에 기증하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는 전교생 100%에게 전액 장학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박사 과정 150명에게는 매달 생활비까지 천 불 이상 지원한다. 이 돈이 다 어디서 왔는가? 교단 교인들의 기부와 유산 기증에 의한 것이다. 그 기금이 무려 7000억인데 그 이자로 전임 교수 50명에게 봉급을 지급하고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반면 인근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는 학생 수가 프린스턴과 비슷한데 전임 교수 수는 10여명 남짓이다. 학교 재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학교의 신학 발전의 정도가 비교될 수 있겠는가? 늘 강의와 채점만 하고 있는 학교 교수들과 연구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여 연구와 저술에 집중하고 있는 신학 교수들 사이에 학문적 업적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지 않겠는가?
혹자는 그래도 우리 교단은 다른 교단보다는 낫다고 자위한다. 다른 큰 교단들은 단 한 푼도 신학교에 보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 교단은 몇몇 교단들보다 분명 앞서 있고 그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만족할 형편은 전혀 아니다. 60점 이하는 낙제인 시험에서 40 점을 받은 학생이 자기 옆의 학생은 20점 받았다고 만족할 것인가?
결어
오늘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이 평신도들로부터 설교권을 도전받게 된 최대의 이유들 중 하나는 불합리의 덩어리인 신학생 전도사 제도에 있다. 신대원 시절에 목회 실습이라는 명분으로 학문적, 영적 소양을 훈련할 기본적 시간을 상실당한 것이 오늘날 목회자들이 급변하는 시대에 설교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된 결정적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이런 식으로 신대원 세월을 부실하게 보낸 신학생들이 장차 성경 공부와 독서, 그리고 고등 교육으로 훈련된 엘리트 평신도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그리고 그러한 추세는 앞으로 더 강화될 것이다. “프로”가 프로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려면 아마추어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차원에 있어야 한다. 아마추어보다 실력없는 프로는 아마추어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다.
신학생 전도사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이것은 비성경적이고 비장로교적이며 비상식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제도다. 이것은 복음주의의 약점 중 하나인 반지성주의의 표현이다. 좋은 목사가 배출될 때 최대의 수혜자는 교단 교회들과 교인들이다. 자질낮은 목회자가 배출될 때 최대의 피해자도 교인들이다. 신학생들의 학비를 위한 장학금 부담은 교인들이 지출할 수 있는 비용 중 가장 귀하고 현명한 지출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영혼을 위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교단은 신대원 운영을 위한 지출을 대폭적으로 증액해야 한다. 좋은 목회자 양성은 지상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요 가장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신학생 전도사 제도를 폐지할 때의 대안
신학생 전도사 제도는 개선되어야 할 것이 아니고 폐지되어야 한다. 성경에 신학생 전도사 같은 직분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교회사에서 신학생을 유급 교회 직원으로 임명한 경우가 없다는 형식적 이유 외에도, 피교육 과정에 있는 신학생이 (아무리 미성년자들의 영혼이라 하더라도) 다른 영혼들을 돌보는 무거운 책임을 지는 목회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이 배움을 마치기도 전에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교역자 자격을 부여받을 수 없다는 자명하고 상식적인 이유 때문이다.
신학생들은 신대원 3년 동안 만사 제쳐 두고 장래 목회 준비를 위한 영적, 학적 훈련에 전념해야 한다. 주말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주 중에도 교회 일과 (섬기는 교회가 지방에 있는 경우) 교회로의 왕복 여행 때문에 시간과 정력을 과도히 소모할 것이 아니라 차분히 책읽고 성경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영성과 지성을 개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교회 봉사는 외국 신학생들의 경우처럼 주일에 성실한 평신도 수준의 봉사로 끝내어야 한다. 목회 실습은 졸업 후 강도사(준목? 혹은 교단에 따라 전임 전도사) 기간에 집중해야 한다. 강도사 제도 자체가 바로 그 목회 실습을 위한 인턴 기간으로 의도된 것이다. 성급하게 신대원 재학 중에 목회 실습, 혹은 현장 체험한답시고 신학적, 영적 훈련 시간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현장 경험은 안수 받은 후 수십 년간 할 기회가 있지만 신학적 영적 훈련은 신대원 기간이 지나면 어려워진다. 특히 학문적 훈련은 대부분의 경우 신대원 졸업 후에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와 훈련에만 전념해도 벅찬 것이 신대원 교육 과정이다. 그런데 동시에 수십 수백명의 다른 영혼들을 책임지는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공부도 감당키 어려운 처지에 교회 사역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러면 신대원생 학비는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이쯤 되면 이제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면 신학생들의 학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신학생들이 교회 봉사를 하는 대가로 각 교회들이 전액, 혹은 반액의 등록금을 보조해 왔다. 만일 신학생 전도사 제도를 폐지하면 그들은 어디서 학비를 조달할 것인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문제는 재정 능력이 아니라 의지가 있는가이다.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서너덧 교회가 힘을 합쳐 신학생 한 명만 책임지면 된다. 예를 들어, 교단 교회가 1500 교회요, 그 중 재정적으로 자립하는 교회가 절반, 즉 7-800 개이며, 교단 직영 신학교의 신대원생 숫자가 300-400명이라면 1-2 교회가 신대원생 한 명만 책임지면 된다. 신학생 일 년 학비는 500만원 이하요 생활비 보조를 매월 50만원 정도씩 한다면 일 년에 신학생 일 명에게 지원하는 금액이 천만원 내지 천 이백만원 정도다. 재정 자립된 교회 한 두 개가 힘을 모아 미래의 자기들 목회자 양성을 위해 그 정도 지출을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가? 오히려 그것은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지출 아닌가? 필자는 한꺼번에 열 명의 신대원생 학비와 생활비를 전담하는 교회도 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식은 결코 비현실적인 제안이 아니다. 신대원생의 교육을 위한 투자는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요 일선 교회들과 교인들을 위한 것이다. 충실하게 훈련된 신학생들은 불과 몇 년 뒤에 그 교회들의 강단을 충실하게 함으로써 교인들의 영혼에 말할 수 없는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신학생들에게 돈을 준다면 당장 교회 일을 시켜야지 일도 안 하는 사람에게 왜 돈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 근시안적이고 옹졸한 생각이다. 그것은 인재 양성과 장학의 중요성에 대한 기본적 인식도 없는 몽매한 사고다.
“신대원생들이 교육 전도사 노릇을 하지 않으면 교회의 교육 부서는 누가 맡을 것인가?”하는 걱정스런 질문도 당연히 예상된다. 자녀들 신앙 교육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교회들은 교육 목사를 채용해야 할 것이다. 전임 교육 목사 한 사람이 현재 여러 명의 신학생들이 맡고 있는 여러 교육 부서들을 책임진다면 교인들의 재정 부담이 그리 크게 증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교인들의 재정 부담이 증가한다 하더라도 이 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장래를 위해 교인들은 그러한 부담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건 교회들 형편을 너무나 모르고 떠드는 안일한 소리다!”고 외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교인들 형편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녀들의 세속 교육을 위해 한 달에 몇 십만원씩 기꺼이 지출하면서 그들을 학원이나 과외에 보내고 있다. 그 돈의 몇 분지 일만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투자한다면 교회들은 전임 교육 목사들을 충분히 청빙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방법은, 교단 총회 차원에서 신대원 운영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방법이다. 문자 그대로 교단이 신학교를 “직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교단은 이미 지금도 총회 차원에서 매년 각 교회 경상비 0.75%를 신대원에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 교단 경우 지원 비율을 3%로 증액하기로 결정하면 재정 문제는 완전 해결된다. 현재 그 교단 신대원 일년 예산이 약 40억 정도요 그 중 교단 지원금이 9억 정도 되므로 그 지원 비율을 네 배로 증액하면 신학생들이 등록금을 전혀 내지 않더라도 신대원은 운영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이런 제안을 하면 또 누군가는 “그건 일선 교회들 경제적 형편을 너무나 모르고 떠드는 소리다!”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가? 미국의 CRC 교단(화란 개혁파들의 후손 교단)은 교회 예산의 거의 절반을 상회비로 부담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학교, 대학 운영, 세계 선교, 대사회적 사업 등 모든 큰 일들을 교단 총회 책임 하에 수행하게 하고 있다. 그것이 본래의 장로교적 방식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지나치게 개교회주의적이다. 상회비를 개 교회 예산의 50% 씩 내는 교단도 있는데 우리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신학생 교육을 위해 3%도 낼 수 없단 말인가?
셋째, 한국 교회의 재력가들이 재산이나 유산의 일부를 신학교에 기부하는 방법이다. 한국 교회에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 축복을 남달리 크게 누리는 분들이 많다. 하나님이 주신 이 거대한 물질을 어디에 쓸 것인가? 미국 장로교 직영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는 주로 교단 교인들의 유산 기증과 재산 기부를 통해 700명 학생 전원 장학생화를 이루었다. 박사 과정 학생 150명에게는 매월 1000불의 생활비까지 지급하고 있다. 7천억에 이르는 학교 기금의 이자 수입으로 50 명에 달하는 전임 교수들을 비롯한 교직원 임금과 거대한 시설 유지 등 모든 지출을 완벽히 해결함으로 학교 운영 완전 독립을 이루었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바티칸 다음으로 부유한 종교 기관이 바로 프린스턴 신학교라고 한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교회들이 선교비에 투자하는 것은 크게 아까와하지 않는 것 같다. 큰 교회들은 매년 일 억에 달하는 선교비를 아낌없이 지출한다. 물론 그것은 아주 가치있고 마땅한 지출이다. 그러나 아무리 선교비를 많이 지출해도 파송되는 선교사들의 질적 수준이 낮다면 그 지출은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다. 막대한 선교비 지출이 가치있는 것이 되려면 그 선교비의 수령자인 선교사들이 질적으로 우수하고 충실한 일군들이어야 한다. 그러한 충성된 선교사가 어디서 양성되고 배출되는가? 다름 아닌 신대원에서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선교비보다 더 우선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는 곳은 신대원 교육이다. 문제는 방법이나 재원이 아니고 의지와 열심에 있다.
맺는 말
현재 한국 교회의 분위기를 볼 때 가까운 미래에 교단들 총회 차원에서 직영 신학교들 재정과 운영을 책임지자는 위의 제 2안이나 아니면 교회들이 두 세 교회씩 힘을 합쳐 제도적으로 신학생들 학비와 생활비를 책임지자는 제 2안을 결의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독지가들의 기부 방법은 아직 한국 사회나 교회에 기부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교인들을 잘 납득시키기만 하면 그래도 현재로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인다. 필자가 속한 교단에서는 신대원에서 금년 초부터 이 목적을 위한 기금 조성 위원회를 구성해서 신대원생 전원 장학생화를 위한 기금 조성 운동에 나선 결과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일선 교인들은 보다 자질있고 유능한 목회자 공급을 위한 신대원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공감한다.
인생이 좋은 목사 양성을 위해 기부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게 돈을 쓸 수 있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민족 교회와 사회의 앞날을 위한 영적, 정신적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것 이상 그 국가와 교회의 앞날에 더 도움이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 이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출이 얼마나 있겠는가? 현재 이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기는 영적, 도덕적 위기이다. 사회는 부패하고 국가는 항상 위태롭다. 도덕은 날마다 무너지고 인간성은 더욱 황폐되어 가고 있으며 문화는 너무나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성윤리를 비롯한 윤리는 거의 실종되어 야수와 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개혁되는 길 밖에 없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처럼 능력있고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가? 말씀의 사역자들인 목회자들 뿐이다. 우리는 언론에도 학교에도 사법부에도 기대를 걸 수 없다. 오직 교회와 설교자들이 이 배교와 타락의 물결을 말씀으로 저지하고 문화와 사회를 건져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그들이 영혼들을 멸망에서 건져낼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좋은 신학생들을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신대원 교육에 교회의 장래는 물론이요 민족과 국가의 장래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일을 위해 물질 축복을 받은 교인들의 헌신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사랑하고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열심을 가진 성도들은 바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핵심적인 방법들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