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김의환 목사님 소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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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김의환 목사님 소천...[1]


恩石 김의환목사,향년 77세의 일기로 소천
진리의 순결과 연합의 신학적 균형을 이루며 사역하시다 천국에 입성하다


코닷





恩石 김의환목사가 향년 77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故김의환 목사는 1953년 3월에 충현교회 원로목사인 김창인 전도사와 동도교회 원로목사인 故 최훈 전도사, 총신 학장을 역임했던 차영배 전도사와 함께 부산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 박사, 이상근 교수, 한부선, 한상동, 박손혁 목사를 만나 신학의 폭을 넓히고 이후 미국 웨스트민스트를 거쳐 탬플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총신대학교와 칼빈신학교에서 후학에 전념하다 지난 5월 1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다음은 리폼드뉴스의 기사전문이다.


▲ 고인이신 김의환 목사 ? 리폼드뉴스




“교회사는 항상 교회의 순결(Purity)과 연합(Unity)의 사이에서 움직이는 진자(振子)의 움직임을 목격하여 왔다. 순결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연합이 깨지고 연합을 너무 강조할 때 순결에 오염이 온다. 진리의 순결과 그 진리를 지키는 보수(保守)의 정신없이 연합은 진리의 순결을 파괴하며 훼손하게 된다.”(김의환)

진리의 순결과 연합의 신학적 균형을 이루면서 한 시대 하나님의 귀한 종으로 쓰임 받았던 恩石 김의환 박사가 향년 77세의 일기로 10일(월) 오후 2시 30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입성했다.

그동안 폐와 신장에 문제가 있어 서울순천향의대 부속 순천향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회복되지 못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안실(특2실)로 모셔졌으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입관식예배는 13일(목) 저녁 8시에 진행되며, 발인예배는 14일(금) 오전 9시에 드린다. 장지는 천안 가족공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유가족으로 강원순 사모와 3남2녀의 자녀가 있다.

고 김의환 목사는 1933년 11월 19일에 전남 장흥군 대덕읍에서 태어났으며, 1951년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에 고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9월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커버넌트(Covenant)신대원에 입학하였으나 1년 후인 1960년에 미국 칼빈(Calvin)신대원에 진학하여 졸업했다(B.D.) 1963년에는 미국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대원 신학석사(Th.M.)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66년에는 미국 템플(Temple)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미국 개혁장로회 필라델피아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미국에서 철학박사학위 취득과 목사안수를 받은지 1년이 지난 후인 1967년 3월에 총신대학교 조교수로 총신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부교수(1969년), 정교수(1973년)로 사역하다 1976년 총신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2년부터 미국 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학장(82-95)을 역임하였으며, 1985년에는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초빙교수가 됐다.

1995년 다시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부름을 받아 1999년까지 총장을 역임한 후 2002년에 칼빈대학교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2002-2007).

특히 고인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 그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새한교회(68-72)와 에덴교회(72-75)를, 미국 나성한인교회를 개척시무했다(1976-1995). 1999년에는 성복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사역하기도 했다(1999-2002).

또한 고인은 1968년 RES(암스테르담 회의) 한국측(합동)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으며, 1971년에는 아시아연합신학대학원 설립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로는 도전받는 보수신학 외 다수가 있다.

고 김의환 박사는 전남 장흥군 대덕읍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에 입하기 전에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고 고달프게 자랐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칠 무렵에 어머니는 고향인 서부 경남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어머니를 따라 진주고등학교에 전학을 하게 됐다. 진주고등학교 재학중에 6.25를 만났다. 진주에 까지 인민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고인은 피난도중 인민군에 붙잡혀 격전지로 끌려가게 됐다.

그는 전쟁터 한 복판에서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살려만 주시면 예수를 믿겠다”는 기도였다. 혹독한 6.25전쟁 중에 예수를 믿게 되었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예수를 영접함으로 인생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왔고 결국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법학도가 되려고 했지만 신학도가 되고 싶은 마음은 결국 일생을 남의 죄를 좇는 검사의 삶으로 살기보다 오히려 사죄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그는 1953년 3월에 부산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고신에 입학할 때 충현교회 원로목사인 김창인 전도사와 동도교회 원로목사이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훈 전도사, 또한 총신 학장을 역임했던 차영배 전도사와 함께 입학했다. 고려신학교에서 당시 교장이었던 박윤선 박사를 만났고 교수로 이상근, 한부선, 한상돈, 박손혁 목사를 만났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신학수업 이후 1966년 3월에 목사안수를 받은 후 54년 동안 신학교에서 목회자 후보생들을 양성하는 일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목회사역, 기타 여러 사역들을 성실히 감당하시다가 2010년 5월 10일 오후 2시30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입성하였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예식장 ☎ 02-2227-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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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간속에
은석 김의환 박사의 삶과 신학














오광만 지음






















그의
시간속에
은석 김의환 박사의 삶과 신학


In His Time: The Life and Theology of Dr. Kim, John Euiwhan





















서론







서론

한국교회의 많은 신학자들에게 은석 김의환 박사는 아마도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역사신학자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미국 유학가서 역사 신학 분야로 신학석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한국에 돌아와 평생 교단에서 교회사 교수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교회사 교과서를 썼고, 교회사와 관련한 수많은 논문을 신학잡지에 기고했으며, 여러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다.
그러나 은석은 역사신학 한 분야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경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학 등 신학의 전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그 분야에서 다루는 주제를 가르치고 실천했다. 그의 사역 역시 교수사역을 비롯하여 집필, 기독교사회운동과 목회와 선교 등 두루 망라하였다. 그래서 어느 한 분야에서 은석을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은석은 신학의 전 영역에서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삶의 전 영역에서 그가 가진 신학을 실천한 종합적인 사역자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은석이 이 종합적인 신학과 사역을 교회를 위하여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글과 가르침과 필드사역 등은 주님의 거룩한 교회에 속한 학자로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고 교회가 지닌 현실 문제를 지적하고 교회에게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은석을 “교회의, 교회를 위한 통합신학자”라고 명명하고 싶다.1)

1) “통합신학자”라는 용어는 덴버신학교의 두 교수인 고든 루이스와 브루스 데머리스트가 그들의 공저 ?통합신학?, 1권(2009), 2권(2010), 3권(2011),김귀탁 옮김(서울:부흥과 개혁사)에서 사용한 “Integrative Theology"라는 용어에서 빌려왔다. 루이스와 데머리스트는 통합신학의 관점에서 매 신학적인 주제들을 문제 제시, 교회 속에 등장한 다양한 견해, 성경의 가르침 조직화, 변증적 대응, 삶과 사역에 대한 적용의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증명한다.



먼저 필자가 은석을 “통합신학자” 라고 명명한 이유를 설명하겠다. 통합신학(Integrative Theology)은 신학의 주요 주제를 설명하면서 교회 안에 존해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조사하고(교회사), 성경의 관련 자료를 모으고(성경학), 포괄적인 체계를 세워 결론을 내리고(조직신학), 반대되는 견해들에 대응하여 그 결론을 변증하며(변증학), 그 결론을 삶과 사역에 적용하는(실천신학) 신학이다. 신학 자체가 종합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교회의 삶이 복합적인 것으로 구성되었기에 신학이나 삶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면 종합적인 사고가 필요한데 은석은 이런 종합적인 사고를 두루 구사하였던 것이다.
은석의 사역과 저술은 비록 그가 쓴 여러 책에서 개별적으로 또는 독립적으로 수행되기는 했지만 그의 사고와 글에는 기독교 진리의 변증, 성경적인 가르침 제시, 개혁신학적 교훈 지시, 교회의 실천적인 행동 촉구 등 통합신학에서 추구하는 방법과 관심사가 반영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은석의 전(全)사역은 통합신학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실제로 구현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필자가 은석을 “교회의, 교회를 위한 신학자”라고 칭한 데에도 이유가 있다. 은석은 분명 자신이 후대 사람들로부터 개혁신학자 또는 역사신학자라고 평가받기를 원했을 것이고, 은석을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런 식으로 부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은석을 교회와 관련하여 가치 매김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단 은석이 교단에 서서 교육자로 사역한 경우에도 목회에서 손을 놓아본 적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다. 은석은 심지어 전문적인(역사)신학자로서 사역을 하던 때라도 그가 염두에 둔 것은 교회였고, 은석의 신학 자체가 교회를 위한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은석은 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에 속한 신학자요 목회자의 심정을 가진 목사였다. 그래서 그는 신학과 목회, 학문과 실천의 상관관계를 늘 염두에 두었는데, 특히 모든 신학은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은석이 교회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은 그가 2003년 월간목회와 가진 대담 기사에도 나타난다. 그는 대담하는 중에 신학이 교회에 도움을 주고 교회 역시 신학 수준이 향상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는 문맥에서 “모든 신학은 실천신학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2) 은석이 평생 화두로 던졌던 자유주의 삭의 문제, 도전 받는 보수신학을 변증하는 문제,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우선순위 문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 문제, 선교에 대한 비전 등은 궁극적으로 교회 문제(목회학)에 모아진다.
은석이 “판단과 강단을 함께 섬길 수 있는 갑절의 복을 받았다”3)고 회고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듯이, 필자는 은석 김의환박사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통합신학적 사고를 교회에 적용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고 실제로 시행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은석의 저술과 사역을 중심으로 그의 통합신학적 관심사를 알아보고 그의 그의 신학적 관심사가 얼마나 교회에 집중되어 있는지를 제시하려고 한다. 먼저 은석의 생애와 교육과 사역을 개관하고, 그간 출간된 은석의 저술과 논문들을 소개하고, 은석의 신학적 관심사와 사상, 교회의 교회를 위한 신학자로서 은석의 사역을 서술할 것이다. 각각의 주제는 은석의 저서와 논문을 중심으로 은석의 입장을 요약하고 그 주제에 대한 은석의 평가 그리고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개할 것이다.






2)김신국, “대호/칼빈댁학교 총장 김의환 목사:모든 신학은 실천신학을 위해 존재합니다.” ?월간목회?319 (2003.3),87.
3)김신국,“모든 신학은 실천신학을 위해 존재합니다.”79.









그의
시간속에

은석 김의환 박사의 삶과 신학

In His Time: The Life and Theology of Dr. Kim, John Euiwhan














제 1부:

은석 김의환 박사의
생애와 사역










1장
생애와 교육과 사역

(1)출생과 성장(1933-1959년)
은석 김의환 박사는 1933년 11월 19일 전남 장흥군 대덕읍에서 부친 김동석과 모친 강달막 사이에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은석은 부모님이 불신자였기에 어린 시절에는 복음에 접촉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단지 총명(聰明)한 아이로만 성장하며 대덕읍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그는 매우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었다. 은석이 여섯 살 때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 후 은석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은석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족은 경남으로 이사했다. 은석은 진주에서 고등학교(진주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 은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매형이 고등고시를 준비하다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매형이 남긴 법학서적을 읽으면서 법조계에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은석의 생애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에 6.25동란을 맞아 피난을 가다가 인민군에 붙잡혀 격전지로 끌려가게 된 사건이다. 그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께 “살려만 주시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기도했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아 살아나 예수님을 믿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은석은 주님을 영접하자마자 진주봉래동교회(현, 진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를 신앙으로 지도하신 분은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황철도 목사였다.
은석은 매주일 복음적이고 힘이 넘치는 황목사의 설교의 능력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다가 은석은 1951년 봄 황목사의 “자신만만한 실패”(마26:69-75)라는 제목의 설교와 부흥사였던 박재봉 목사의 “베드로의 신앙고백”(마16:1-18)이란 제목의 설교를 듣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던 중 은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2년간) 교편을 잡았다.

1953년 3월, 은석은 2년간 몸 담았던 교직생활을 뒤로하고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김창인, 최훈, 차영배, 정문호, 김성환 목사 등 장차 한국교회에 귀하게 사용될 친구들을 만났다. 고려신학교에는 박윤선 목사가 교장으로, 이상근,한부선,한상동,박손혁 목사가 교수로 있었다.
은석은 신학교 재학 시절에 범천교회 장년 주일학교에서 사도행전을 가르쳤다. 그 때 그는 세계 선교에 눈을 떴다.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 거주하던 범일동 집과 고려신학교가 있는 광복동을 등하교 하는 4년 동안 전철 안에서 10분간 전도 설교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나중에 은석은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 박윤선 목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복음에 대한 열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은석은 고려신학교 시절부터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소명을 키웠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바울과 같은 선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바울선교의 전략”이란 제목의 졸업논문을 써서 제출했다. 그는 그 시절 사모님(강원순)을 만나 1958년 1월 9일에 결혼하게 된 조건도 신학교 교수가 아니라 선교사가 되기로 한 약속이었다고 고백한다.
1957년 3월 은석은 신학교 졸업과 함께 군대에 입대하여 군목으로 2년간 복무하였다. 군대 생활에서도 은석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순수성이 나타난다. 그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우상숭배라고 거부하고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한 번은 불교신자인 사단장이 원만한 진지 구축 작업을 위하여 예하 군대의 장교와 군인들에게 산신령을 달래는 고사를 지내기를 강요하자 은석은 오히려 그 자리에서 “요새와 진지만 믿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먼저 믿으라.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 이 가운데 기독교 신자 장병들은 하산하자”는 내용으로 10분간 설교를 하였다.1) 군 생활 중 그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하고 많은 기도 응답을 경험하였다.

1)김의환,“회고록/주의 말씀을 따라 반세기:교단과 강단 사이에서,” ?교회와 역사:은석 김의환 박사 고희 기념논총?(서울:총신대학교,2003),55.


(2)유학생활(1959-1966)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친 은석은 1959년 8월 13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처음으로 입학한 학교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커버넌트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였다. 이 학교는 개혁장로교회(RPC)가 운영하는 교단 신학교였는데,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신학교였다. 커버넌트신학교에서 은석은 나중에 그의 기독교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받은 잊지 못할 경험을 하였다. 커버넌트신학교에서 은석은 유학자금과 생활비가 부족하여 학교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은석은 거기서 커버넌트신학교 총장의 아들이 학교식당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기독교적 노동관을 깨달았다.

1년 후인 1960년 9월, 은석은 그랜드래피즈에 있는 칼빈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로 전학하였다. 그 신학교에서 은석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약속했고 그곳에 유명한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가 교장으로 계셨기 때문이다. 칼빈신학교는 화란계 이민자 후손들이 세운 기독교개혁교회(CRC)에 속한 신학교다. 은석이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할 당시 그 신학교는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기반으로 신학적 특성을 표명하였다. 1962년 6월에 은석은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사(B. D: 오늘날의 M.Div.)과정을 마친다.

칼빈신학교를 졸업한 바로 그 해, 은석은 클로스터 교수의 추천을 받아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교회사를 전공하였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미국의 정통장로교회(OPC)와 관련이 있으면서, 구 프린스턴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여 개혁신학을 파수하는 신학교다. 은석은 교회사를 전공하면서도 당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걸출한 변증학자인 코넬리우스반틸(Cornelius Van Til)교수와 가깝게 지내면서 자유주의신학으로부터 정통 개혁주의신학을 표명한 칼 바르트까지도 비판할 정도로 올곧은 당대 최고의 개혁신학자였다.
은석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인물은 존 머리(John Murray)교수다. 머리는 조직신학자이면서도 성경 언어에 정통하고 성경신학적으로 조직신학을 설명하는 교수였다.

은석은 1963년 폴 울리 교수의 지도 아래 “The Christian Conflict with Shintoism in Korea"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고 교회사 분야에서 신학 석사(Th.M.)학위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교회사 이외에 변증학과 성경신학 입장에서 조직신학을 하는 법을 배웠고,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갈등 문제, 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면서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식견을 넓혔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한 은석은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교는 당대 미국신학계를 뒤흔들던 사신신학(死神神學)운동의 주동자 중에 한 사람인 반뷰렌(Paul Van Buren)이 재직하고 있던 학교였다. 은석은 박사학위 과정을 하는 동안에는 반뷰렌과 직접 마주칠 일이 없었지만 박사학위 구두시험을 치르는 동안 논문심사위원 중 한 사람으로 배정된 반뷰렌의 집요한 질문에 난처한 입장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1966년 2월 10일, 은석은 교회사 주임교수인 스토플러 박사의 지혜로 무사히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은석의 학위논문 제목은 “The Korean Church under Japanese Occupation: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Resistance Movement within Presxyterianism" 이다. 은석이 템플대학교 시절 겪은 반뷰렌의 사신신학적 입장은 은석의 저서 ?도전받는 보수신학?에서 미국의 자유주의 운동으로 ”사신신학“을 다루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2)

은석은 미국에서 과정을 마칠 때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교회가 갈등하는 문제를 학위논문 주제로 다뤘다. 이것은 민죽주의 정신 때문에서만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은석은 일찍이 교회와 세상의 관계, 일본 선교에 대한 관심사를 가졌고 그것을 논문으로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박사학위를 박은 은석은 1966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과 미국에서 교수와 목회 사역을 하였다.

2)?도전받는 보수신학?(서울:생명의 말씀사,1970,1993,2005(2판),43-47;?현대신학과 개혁주의 신앙?, 김의환 전집 제2권,14244.


(3)사역(1966-2010년)

이 기간에 은석의 사역은 총회신학교 교수 사역과 미국 이민교회 목회사역, 그리고 다시 한국에서 교육과 목회 사역 등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총회신학교 교수 사역(1966-1975년)
은석은 미국 유학을 마치자마자 처음에 선교사가 되려고 일본 선교를 지원했다. 그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뤘듯이 일본과 한국교회의 관계는 그가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였다.3) 은석은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할 당시나 미국 유학 시절에 선교사로서 열정을 불태웠다. 은석은 미국 개혁장로교회(현재는 미국장로교회인 PCA와 통합됨)에 속한 필라델피아 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OMF 본부가 있는 싱가포르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은석은 일본에서 비자를 거부당했다. 선교사 자격으로 일본에 입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은석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던 당시 한국교회의 동향과 성장의 동인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신사참배의 강요와 한국교회의 수난,” ?기독교회사?,431-34;"한국교회 성장의 역사적 조명”,?도전받는 보수신학?,252-68. 그리고 한국교회와 일본교회의 특성을 비교한 “한국교회와 일본교회”,?강해설교와 신앙 수상?,김의환 전집 제5권,469-71을 보라.

그래서 은석은 할 수 없이 발걸음을 한국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은석은 일본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일본비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당시 총회신학교(현,총신대학교)교장이었던 명신홍 목사에게서 총회신학교의 교회사 교수로 부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은석은 내심 비자 발급이 지연되는 동안만 교수 사역을 수행하기로 하고 총회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1966년부터 1975년까지 만 9년간 총회신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은석은, 열정적이고 부흥회 분위기를 가지신 박윤선 목사와 조용하고 과묵한 박형룡 박사에게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두 분 모두 보수신학을 지키며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을뿐더러 자유주의 신학을 통렬히 비난하던 개혁주의 신학자셨다. 특히 은석은 박윤선 목사에 대해서는 늘 기도에 열심인 분으로 기억한다.4)
은석은 총회신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동료 교수인 최의원,김희보,이진태,김득룡,박아론 교수들과 가까이 지냈다. 총회신학교에서 가르칠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은석에게 특별한 영향과 도전을 주신 분이 계셨는데, 바로 간하배(미국명,Harvie Conn) 선교사셨다. 간하배는 미국 정통장로교회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였다. 그는 선교에 대한 사명이 특출나 기지촌에까지 가서 윤락녀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시절 이미 주경학과 변증학에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던 학자였다. 간하배 선교사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반틸 박사의 요청으로 변증학 교수로 본국에 돌아가기까지 총회신학교에서 7년간 사역하였다. 은석은 간하배에게서 개혁신학적 변증학과 선교에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4)“회고록”,74,

총회신학교 교수 시절(1967-1975년),은석은 수많은 논문과 짧은 글을 ?신학지남?에 기고했으며, 1970년부터 1975년까지는 친히 ?신학지남?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문서 활동에 매진했다.

은석이 총회신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마음 한 구석에 늘 부담으로 남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선교에 대한 부담이다. 그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일본 선교사로 가려던 것이 막히자 비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3년만 한국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 교수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은석은 교회사를 강의하는 중간에 자주 한국교회를 향하여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라고 강조도 하고 “선교동지회”를 조직하여 기도회 모임을 가졌으며, 1975년에는 CCC강당을 빌려 선교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 동안 선교에 정열을 쏟으면서 전도와 선교에 대한 전략을 세운다.

첫째, 대학생 전도를 위해 IVF운동에 참여하는 일. 은석은 1972년부터 한국 기독학생연맹(KIVF)이사장을 지냈다(1969-1972). 그밖에도 은석은 세계복음주의연맹(WEF)에 속한 TAP(ATA의 전신)의 총무를 역임했다(1970-1973).
둘째, 학원복음화를 위해 학교 근처에서 목회하는 일. 은석은 1968년에 당시 서울대학교가 있던 종로5가 근처에 교회를 세우고 “새한교회”라고 이름 지었다. 새한교회는 신사훈,차남진,서동익,윤남중,김의환 등을 강사로 초빙하여 신앙 강좌를 개최하는 등 열정적인 사역을 하였다. 그 결과 1년 만에 새한교회는 교인 수가 400명이 넘는 교회로 부흥하였다. 은석은 새한교회에서 4년간(1968-1972) 목회했다. 그 후 서울대학교가 현 캠퍼스가 있는 관악구로 옮기자 은석은 새한교회를 사임하고 봉천동에 “에덴교회”를 개척하였다. 이곳에서 은석은 3년간(1972-1975)목회했다.

셋째,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설립을 구상하는 일. 은석은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의 신학교들이 신학교육을 하기에 수준이 미달된 처지에 있음을 보면서 아시아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그 곳 지도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수준 높은 교회지도자와 신학교수로 양성할 교육기관을 한국에 설립할 필요를 깨닫는다. 그는 1971년 한철하 박사와 의논하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설립하고 조종남과 오병세 교수를 한국 측 이사로 영입하였다.

이러한 은석의 활동은 일부 교단 지도자들에게 오해를 샀다. 다른 교단교수들과 신학운동을 같이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일을 계기로 은석은 단순하고 옹고집만 피우면서 방법론적인 문제에 집착한 보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진정한 교회 연합운동의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즈음 은석은 그의 비교적 초기의 책이면서 그의 주요 관심사를 천명한 ?도전받는 보수신학?이란 책을 출간한다.5)
그후 은석은 몇가지 이슈에 휘말리면서 그가 한국교회에 화두로 던졌던 몇가지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를 갖는다.

첫 번째는 교회연합 문제와 도전받는 보수주의 문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 문제 등 신학적인 문제이다. 신학적인 면에서, 은석은 1973년에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문제로 박형룡 박사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빌리 그래함을 신복음주의로 정죄하였고, 은석은 그 전도대회는 단순한 전도의 일이므로 초교파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두 사람이 대립한 주요 이유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은석은 신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6) 이런 상황에서도 은석은 빌리 그래함 로잔대회에 강사 자격으로 참석하여 “The Authority of the Bible and the Lordship of Christ"라는 주제 논문을 발표한다.7)

두 번째는 3선 개헌에 반대 운동을 하다가 중앙정보부(현,국정원)에 끌려간 일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은석의 배짱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드러났다. 은석은 서슬 퍼런 중앙정보부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교회를 법적으로 통제하려는 새로운 종교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전하였다. 그는 조사를 받는 중에서도 상대방에게 교회를 국가의 법으로 규제하려는 것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는 것과 그가 속한 교단이 신사참배에 불복하여 순교까지 한 교단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은석은 초기부터 신학과 삶에서 그의 신학적이 입지를 분명히 하였다.

5)이 책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3년에 은석은 개인적으로 ?도전받는 보수신학?이 30판을 인쇄했다고 주장하지만 (“회고록,”79.),공식적으로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1970년에 초판을 15회 인쇄하였고, 1993년에 개정판을 3회 인쇄하였으며, 2005년에 3판 개정판을 출간했다. 어찌 되었든지, 이 책이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혔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6)이 문제는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 ?도전받는 보수신학?(1970,2005),84-109; “신복음주의”, ?현대신학과 개혁주의 신앙? 김의환 전집 제 2권 (서울:총신대학교출판부,1999),166-86에 논의되었다.
7)이 논문은 다음해 ?신학지남?42/3(1975.9):110-20에 실렸다.


2)미국 이민교회 목회 사역(1975-1995년)
은석은 9년간의 교수사역을 마치고 1975년 8월에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갔는데, 6개월 뒤에 총회신학교로부터 해직 통보를 받는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미국에 정착하게 되고, 그 일로 시작한 미국 목회가 어언 20년간 계속된다. 미국에서 은석의 활동은 주로 목회와 교육 사업에 집중되었다.

1976년 1월 4일, 은석은 LA글렌데일에 있는 크리스천 양로원의 채플을 빌려 나성한인교회를 시작했다. 그때 그는 교회론이 집약된 에베소서를 강해했다. 에베소서는 은석이 특히 좋아했던 성경인데, 그의 에베소서 강해에는 한국교회를 반성하고 교회의 지표를 찾을 수 있는 메시지와 사회와 중앙교회를 시무할 때(1999-2002)에도 3년간 주일 오후에 에베소서를 강해한 것을 보면 에베소서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무렵 그가 에베소서를 강해한 최종판이 ?닥터 바울 구원 클리닉:에베소서 강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8) 그 책 머리말에서 은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오늘날 전반적으로 교회 성장이 멈추고 이단들의 발호와 기복신앙의 범람이
넘쳐서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이때에 교회가 경성하여 회개
하여 말씀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이 책이 .......
한국교회 “말씀운동”에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말하자면, 에베소서는 이단과 기복신앙에 물들어 있는 한국교회가 깨어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하는 “말씀운동”의 좌표가 되는 책이다.
성경공부 이외에는 교회가 개혁될 가능성이 없다고 본 은석은 개척 초기부터 나성한인교회에게 성경고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성경공부 모임을 많이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은석은 나성한인교회에게 그가 가진 선교 비전을 설명하고 실천하였다. 그것은 국내 전도를 위해 매 2년마다 교회 하나를 개척하고, 제 3세계 전략적 선교를 위해 국제 신학대학원(ITS)을 세우는 것이다. 은석은 나성한인교회가 이런 비전을 갖는 교회가 되어 전도와 선교에 재정을 지원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성한인교회는 은석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여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도와 선교에 열심히 있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그 후 그 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하여, 몇 번에 걸친 이전 끝에 1984년 4월 8일 현재의 나성한인교회당이 있는 N.Eastern Avenue로 이전한다. 예배당을 이전하고 난 다음해(1985년)첫 주부터 은석은 요한복음을 설교했다.

8)이 책은 은석이 설교한 에베소서 강해를 엮은 것이다. ?닥터 바울 구원 클리닉:에베소서 강해?(서울:한국강해설교학교출판부,2001,2004).

은석의 설교는 늘 강해설교다. 조명환 목사는 ?미국의 8대 한인교회?에서 나서한인교회를 소개하면서 그 교회의 성장 비결을 은석이 가지고 있는 선교와 교육을 강조한 목회철학과 그의 인격과 성경적인 설교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조명환 목사가 소개하는 당시 이민 교회에 비친 은석의 인격과 목회자 상을 살펴보자.9)

그(김인환 목사)는 여러방면에서 자격을 갖춘 목회자다. ----신실하고
근면할 뿐만 아니라 겸손하면서도 존경이 가고 강인한 의지와 더불어
대단히 정감이 넘치는 인격을 갖추고 있다. ----목회 전반의 결정 사항에
있어 유연성을 발휘하지만 한번 결정된 목표를 위해서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성취시켜 나가는 추진력이 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사람이다. 그의 설교는 매우 지성적일 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
인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 실제적이다.


은석의 설교에 지성과 구체적인 삶의 적용이 배어 있는 것은 현대인과 현대사회를 직시하는 역사신학자로서 은석의 통찰이 목회에 잘 적용되었기 때문이리라.

9)이 내용은 존 최와 김대기가 1983년 풀러신학교에 제출한 “A Descriptive and Analytical Study of the Successful L. A. Korean Christian Reformed Church"란 제목으로 제추한 레포트에서 인용한 것이다. ?현대교회와 선교의 과제?김의환 전집 제4권 (서울:총신대학교출판부,2001)410에서 재인용.


은석이 목회를 하면서 선교를 강조한 데에도 그의 목회철학이 담겨 있다. 은석은 세계선교의 과제가 “어제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항상 오늘 속한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10)
오늘날 교회가 선교의 비전을 잃은 것은 자유주의, 사신신학, 신(神)부재신학 등 그릇된 신학사상의 도전 때문이라고 분석한 은석은 교회가 전도와 선교에 박차를 가하는 것만이 자유주의 신학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전도와 신학을 겸비한 선교기관의 건립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나성한인교회는 은석의 선교적 비전에 부응하여, 2년마다 한 개씩 지교회를 개척해오고 있으며,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고 재정적으로 후원한다.11)

그리고 은석은 1982년 9월에 파사데나에 ITS(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를 세운다. 윌리엄 캐리대학교의 교사 일부를 빌려 시작한 학교이긴 하지만 ITS가 위치한 곳은 천혜의 환경으로 평가된다. 윌리암 캐리대학교는 물론이고 랄프 윈터 박사가 이끄는 미국 세계선교센터와 한 울타리안에 있어 학문과 필드사역에 유익한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은석은 미국에 있는 동안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선교도 하고 신학교를 세웠다. 중국이 미국과 교류를 수립한 1979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선교의 발판을 놓았고, 1982년에는 부다페스트 개혁신학교를 방문하여 동구권 선교전략을 세웠으며, 1987년에는 구소련 치하에 있던 러시아의 선교를 타진하였다. 1989년에는 평양 복음화대회에 참석하면서 북한선교의 필요를 절감하였다.

10)“보수주의 교회와 선교 문제,” ?도전받는 보수신학?(서울:생명의말씀사,1970,2005),135-37.
11)자세한 내용은(현대교회와 선교의 과제),413을 보라.


3)한국에서 교육과 목회 사역(1995-2010년)
나성한인교회와 관련한 은석의 20년간 미국 목회 사역은 1995년에 마무리된다. 한국의 총신대학교에서 그에게 총장직을 요청하였고 은석이 총장직을 수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1995년에 총신대학교의 총장에 취임하면서 4년간의 임기를 수행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표를 설립하고 시행하려고 노력했다.

첫째,정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
둘째,국제적인 신학 교류를 통하여 총신대학교를 세계적인 신학대학원으로 육성하는 일.
셋째,열악한 교육환경 조성을 위하여 종합관을 건립하는 일 등.12)
이것만을 보더라도 은석이 개혁주의신학에 대하여 얼마나 천착하고 실천했으며,교회와 신학의 국제화에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12)“회고록”,89.

총신대학교 총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은석은 성복중앙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다시 목회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3년간(1999-2002)성복중앙교회를 교육중심으로 목회하였다. 교육중심의 목회를 한다는 것이 은석에게는 새삼 새로울 것이 없지만, 한국의 은사중심의 교회이며 은사분야의 2인자라면 서러워할 부흥사 이천석 목사가 오랫동안 길들여 온 성복중앙교회에서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를 한다는 것은 일대 혁명이고 그것이 먹혀들어간다면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은석은 부임하자마자 흑판까지 사용해가며 교인들에게 교리 공부를 시켰다. 여기서 말하는 교리는 당연히 개혁신학의 뿌리인 웨스트민스터신앙 고백과 소요리문답의 내용이다. 은석은 성복중앙교회를 교육적인 교회로 바꾸면서 동시에 그 교회에서도 선교 사명을 일깨웠다. 성복중앙교회는 특히 탈북자 선교에 열심을 보였다.

2002년 이후 은석은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2003년 3월 칼빈대학교에서 총장직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은석은 2007년 2월까지 만4년을 칼빈대학교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그 학교를 한 차원 높은 수준의 학교로 발전시켰다. 동시에 은석은 총장직을 수행하면서도 학교 근처에 칼빈교회를 개척하여 목회 사역을 수행하였다.(2003-2007). 은석은 교육자 지위와 목회자 지위를 선택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늘 병행했다.
칼빈대학교 총장직 임기를 마친 은석은 대한신학대학원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석좌교수와 박사원장을 맡아 여전히 후학들을 가르쳤다(2007-2010년). 그는 매학기 개혁주의 신학(성령론,교회론,역사관 등)을 교수하면서 한국교회에서 개혁주의 신학이 튼튼히 뿌리 내리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는 중에 은석은 미국ITS의 한국 지부를 운영하면서 평신도 선교사 지망생들을 훈련했고 열방교회를 목회하였다. 다른 분들 같으면 은퇴하여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시기에 은석은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캄보디아에 설립한 ITS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강의하고, 일본 선교단체인 JTS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강의하고, 일본 선교단체인 JMF에 관여하여 해마다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가 유학생활을 마치면서 가려고 했지만 가지 못한 일본 선교에 대한 부담을 말년에 JMF를 통하여 이행하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벗은 것이다.

한평생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대로 교단과 강단을 오가며 살았던 은석은, 우리 모두가 생각하기에 너무 이른 날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2010년 5월 10일 77세의 일기로 세상의 모든 일을 쉬고 지금은 주님 품에서 안식하고 있다.


























저자 소개

저자 오광만교수는

총신대학교
미국웨스트민스터신학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베드로전서의 메시지(그리심),
주기도문 강해(생명의 말씀사),
영광의 복음 요한계시록(생명나무)를 저술하고,

하나님나라(헤르만 리델보스),
칼빈의 요한복으주석(존칼빈),
예수님의 비유 어떻게 읽을 것인가(로버트 스타인)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