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예장과 기장의 분열사
1954년 서울의 다방교회
나는 1954년 3월, 나 혼자 진영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어판을 간행하던 이주운, 주태익 등 친구와 함께 쌍문동에 하숙을 얻어 한 방에 거주했다. 나는 그 세 친구와 함께 1954년 3월 첫 주일 다방을 빌려서 다방교회를 열었다. 김형식, 김동진 내외, 이성삼, 이희호, 임인수, 정규 등 작가, 음악가, 화가 등 소위 문화인 친구들이 모였다. 그 때 다방은 주일이면 쉬게 되니 우리들은 오후 2시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거기서 차 한 잔씩 마시면서 친교를 나누었다. 회원들은 모두 당대 명사이어서 자기 분야의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에 예배 후 시간이 매우 유익했다.
그 때 모인 교인들은 교인들이기는 하지만 기성 교회에 교적을 두었을 뿐 실제로는 다니지 아니하는 변두리 교인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그러한 양식의 교회가 꼭 필요했다. 아마도 한국에서 처음이었던 것 같다. 차츰 교인들이 늘어갔다. 새로 예수를 믿으려는 친구도 생겼다. 어느 교회에도 마음을 두고 다니지 못한 소위 인텔리들이 한두 명씩 모였다.
2, 3개월 지나니 인원이 증가되어 다방에서는 더 모일 수 없게 되어 자리를 옮겼다. 당시 화신 빌딩 관리인으로 있던 김동진 군에게 부탁하여 화신 백화점 7층 옥상에 3평 가량 되는 좋은 방을 새로 얻게 되었다. 그 때 전세금이 20만 원이었는데 각자가 연보를 모아 쉽게 갚았다. 그 방은 주일날이면 예배를 드리지만 평일에는 글 쓰는 친구들의 집필실로도 쓰게 했다. 나는 그 때 거기서 <복음은 땅 끝까지> 그리고 <기독교>라는 책을 썼다. 종로서관 김상배 사장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써 달라 해서 쓴 것이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사가 바로 화신빌딩 1층에 사무실을 두었으니 그것도 안성맞춤이었다. 교인의 수는 점점 많아져서 7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다방교회 소문이 어떻게 퍼져갔던지 당시 시내 제일 큰 교회, 유명한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서울에 이상한 교회가 있다는데 주일 날 다방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하고는 모여서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하니 말세의 징조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집회에 나오는 몇몇 친구들은 담배나 술 문제는 예수 믿는 것과 관련을 시켜 생각지 않는 분들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집회의 진실성이나 경건함을 무시하거나 경솔히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더 진지한 태도로 예배에 참여했다.
친구 주태익, 이주운과 셋이서 하숙을 정한 집은 다행히도 잘 믿는 교우의 가정이었다. 남편을 6?25사변에 여의고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살아가는 30대의 과부 집이었다. 우리 셋이 저녁에 모이면 그 집 세 식구와 함께 어울려 웃고 지냈다.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아들을 키우기에 막막한 부인에게 웃음과 위로를 주었다. 우리는 꼭 6개월 간을 그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 분은 김선명 권사님이시다. 김 권사님은 수입의 십일조보다 언제나 더 많이 교회에 바쳤다. 그래서 교회에서 공식으로 하는 특별 연보 때면 언제나 김 권사님의 연보 액수가 장로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장로들에 비해 늘 몇 갑절 더 바치는 셈이니 인색한 장로들이 부끄럽게 되었던 것이다. 헌금을 믿음으로 열심히 바쳐서 그것 때문에 못살게 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그로부터 근 30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김 권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안부를 묻는 내게 “목사님, 나는 지금 영동에 큰 집을 가지고 삽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 어쩌면 연약한 여성으로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이 어린 두 아들을 안고 주저앉아 버렸을 것인데 오히려 남부럽지 않은 여생을 보내니 이것이 믿음이 낳은 기적이라 해서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기장과 예장의 분열
1954년 10월, 경기노회가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그 노회는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로 나뉘는 비극적인 노회였다. 당시 노회장은 전필순 목사이고, 부회장은 한경직 목사, 서기는 박한진 목사, 회계는 강헌집 목사였다. 경북 안동에서 열린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40회 총회가 제 38회 총회의 김재준 목사와 그 동조자들을 제명키로 한 결의를 실천에 옮길 사명을 맡고 돌아온 전필순 노회장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경기노회 소속인 김재준 목사를 제명하려 했다.
당시 경기노회 회원은 총 4백 명이었고 한신 편과 총신 편이 각각 반반씩 되었다. 김재준 목사가 소속된 경기노회는 38회 총회 이후 독자적으로 김재준 목사의 신학 문제에 관한 이단 시비를 가리려고 조사위원회를 조직했고, 그 위원장으로 가장 중립적 인사인 우동철 목사를 추대했다.
그런데 우동철 목사의 경기노회 특별 조사위원회는 김재준 목사의 신학설을 조사한 결과 성서관에서 이단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보고를 노회에 제출했다. 노회는 역시 그 보고를 그대로 받았다. 그러므로 경기노회로서는 총회가 심의를 하지 않고 직접 김재준 목사를 제명처리하기로 결의한 일에 대해 노회의 이름으로 노회 조사보고와 더불어 총회의 결의에 이의를 제기해야 했다. 왜냐하면 총회가 노회원을 해당 노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처리하는 법도 없으며, 또 적법 절차를 밟아 재판국을 설치하고 정당한 심사를 하지 않고 즉결 처리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필순 경기노회장은 총회 결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강행했다. 당시 그러한 처사에 대해 나와 전균명, 박한진 목사는 법적으로나 도의적, 신앙적, 양심적으로 그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우리의 주장에 동조하는 노회원이 절대 다수였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도저히 김재준 목사 제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바로 직전에 노회 조사위원들이 제출한 무혐의 보고서를 노회가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가지고 나는 반나절 동안 노회장과 계속 논쟁을 벌였다. 사회는 회장과 부회장이 번갈아 서면서 긴장된 논쟁을 진행시켰다. 전필순 목사는 그 문제에 대한 사리와 법 논리를 누구보다도 더 명백히 아는 분이었다. 그 분 자신이 그 일이 있기 2년 전까지만 해도 김재준 목사와 한신대학을 변호하는 제일선의 지휘관이었다. 그러한 그가 기어이 김재준 목사 제명을 관철시키려 무리한 회의를 진행시켰다. 이일선 목사는 “빌라도 법정이냐?”고 방청석에서 고함을 질렀고 회의장은 긴장과 소란으로 이어져 갔다.
한국 장로교계를 휘어잡던 전필순 목사도 우리 젊은 두세 명 목사들의 논리를 막지 못하고 꼭 하루 반을 논쟁으로 이끌어 갔다. 저녁 5시 정회 시간이 되어 회무를 정회하자 회계석에 앉았던 강헌집 목사가 나를 보고 자기가 저녁을 살터이니 전 목사와 함께 이야기해 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좋다고 수락했다. 5시 반쯤, 서울시청 아래 무교동 쪽에 있는 이학이란 회식집으로 가서 셋이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전 목사에게 “전 목사님은 법에 밝고 총회 경험도 많으신 데 김재준 목사님에 대해 그렇게 처리하는 일이 법으로 가능하신가?”를 물었다. 그러자 전 목사님은 “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솔직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목사님께서 무리한 일을 하시려고 하십니까?”고 질문하고, 내게 한 가지 좋은 안이 있으니 생각해 보라고 제안하였다. 그것은 지금 총회는 이미 두 개로 갈라졌고 경기노회만은 아직 나누어지지 않고 있으니 전 목사님을 선두로 4백여 명 노회원들이 단합해서 총회 통일 운동을 전개하면 꼭 성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 목사님께서도 한국교회를 위해 불멸의 탑을 쌓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과, 경기노회가 김재준 목사를 제명하지 않는다 해도 보수 진영이 노회를 탈퇴하지는 않을 것이며 통합 운동에 절대다수가 찬동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울러 조신 측도 이미 지난 6월 조선신학교 강단에서 호헌을 걸고 새 총회를 조직한 후 만일 우리 노회가 통합 운동만 벌이면 분열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선두에 서 달라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전 목사님의 마지막 대답은 “북장로회 현지 선교사들이 조신 편에 서 주지 않으니 결국 선교사 편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너무도 섭섭하여 그 자리에서 “다른 목사님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이해할 수 있지만 목사님이야 평생 선교사들과 그 주동자들의 식민지적 교권주의에 대항하여 싸우셨던 분이신 데 그 말씀을 어찌 할 수 있습니까?”하고는, 이어서 “나는 목사님이 기어이 그렇게 하시면 전 개인 신상에 대한 말씀까지라도 노회 석상에서 성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강헌집 목사님은 시종 오고가는 대화만을 지켜보다가 일어섰다. 이미 시간은 저녁 속회 시간이 다 되었다. 셋이서 새문안교회로 돌아갔다.
저녁 7시 개회가 되자마자 또 다시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미 전필순 목사는 무리하고 무법인 줄 알면서도 그의 뜻을 관철시킬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총회에 가서 조선신학교 반대파들에게서 위임받은 사명을 더 이상 적당히 얼버무려 통과시켜 버릴 수 없게 된 것도 알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과거 일정 시대 일본 경찰의 앞잡이가 되어 바로 그 새문안교회에서 일본 형사들을 포진시켜 놓고 경기노회를 강제로 혁신교단에 가입케 한 수법과 똑같은 수법을 쓰게 되었다.
이번에는 일본 형사들 대신 김재준 목사와 조선신학교를 전복 제명하려는 박형룡 일파의 호위를 받으면서 순식간에 회장 방망이를 들어 “총회의 결의를 받아들여 김재준 목사를 제명 처리함”하고 땅땅 두들겨 댔다. 그 때 바로 밑 자리 서기석에 앉았던 박한진 목사가 “불법이오!”하고 외치면서 세 번째 방망이를 두들기려는 회장의 손을 잡고 방망이를 그의 손에서 빼앗아 버림과 동시에 강단 위로 수십 명의 반대하는 회원들이 등단하여 전필순 목사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자 사회봉을 빼앗긴 전필순 목사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로 “정회요!”하고는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회장이 정당한 회의 절차도 밟지 않고 도망쳐 나갔기 때문에 그에 불복한 대다수 회원들은 서기 박한진 목사의 임시 사회로 회의를 계속했다. 그러나 이제 노회가 두 조각으로 깨어져 버린 것은 결정적이었다.
나는 그 시간 일제시대 한국교회를 일제에 팔아먹은 전필순 목사의 죄악상과 변절한 사실 등을 열거하면서 일장의 성토 연설을 했다. 뒤이어 전균명 목사가 또 나보다 더 격렬하게 성토를 했다. 노회 통과는 회장의 권한이었으므로 이미 깨어진 그릇을 다시 완전하게 되돌릴 수는 없다. 노회의 분열은 교회분열로 이어지고 중립적인 교회들은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방향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경기노회가 김재준 목사의 제명 소동으로 긴 논쟁을 벌였을 때 간간이 사회를 본 부회장 한경직 목사에게 회원들은 개인적 양심으로나 신학적 견해로 보아 과연 이단인가 아닌가를 명확하게 한 마디 개인 자격으로 대답하여 달라고 몇 차례 질문했다. 그러나 그 때 그 분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글쎄!”라며 종내 대답을 회피하셨다. 나는 그 당시 내가 선배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논쟁으로 대결하였던 것은 물론 김재준 목사의 무죄함을 변호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경기노회만이라도 분열하지 말고 총회가 다시 통합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갈라진 총회의 한 쪽에서 기장 총회를 섬겨오고 기장 총회의 총회장까지 지낸 오늘날에도 그 때 그 생각은 옳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분열은 여하한 구실에도 불구하고 죄악의 행위로 하나님이 머리를 저으실 것이라 생각한다. 종교 개혁 당시 개혁자들의 입장으로 보면 카톨릭교회는 지상에서 아주 없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잔당밖에 되지 못할 것으로 알았던 것이 확실한데 그 후 4백 년 세월이 지났지만 오늘날 카톨릭교회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악마의 전당이 된 것도 아닌, 하나님의 교회로서 신교와 신앙적 교통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김재준 목사를 이단으로 정의하고 그의 동료들을 추방키로 결의한 그 총회는 오늘 기장과 더불어 같은 KNCC 와 WCC 회원 교단으로 형제의 우의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그 때 그 시기, 인간의 지혜와 경험으로 전혀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신앙 문제에 관계되는 한 거기에 대하여 극단적인 판결을 내리는 일은 삼가야 하고, 또 자기를 정당화하거나 상대를 정죄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삼가야 한다. 그것은 벌써 하나님의 절대권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며 살아 계시고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학자의 신학이 그의 신앙에 깊이 연결되고, 그 신학과 그 신앙이 살아 계시며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화와 지시를 받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는 신앙에 기초하지 않으면 그 신학과 신학자는 예수를 팔아먹는 가룟 유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존재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먹었을 따름이지 교회를 찢어 놓기까지는 안 했으니 말이다.
교회의 분열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분열을 낳게 한다. 교회 싸움은 마을 싸움으로 번지고 또 법정에까지 번져 그리스도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으나 오랜 싸움 끝에 손해를 본 것은 한국교회의 망신일 뿐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쪽 모두 패자가 되어 영육간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선량하던 장로가 악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순진하던 목사가 천하제일 부랑자 못지 않은 싸움꾼이 되고, 교인들은 쌍방 싸움에 한몫 끼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으니 순한 양들을 이리떼로 만든 셈이다.
그러므로 교회 싸움이란 어느 경우라도 그만큼 손해만 있을 뿐 이익은 없는 법이다. 싸워야 될 경우에는, 싸우고 지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먼저 지는 것이 훨씬 낫다. 미리 지면 피투성이는 안 될 것이고 옷이 갈기갈기 찢기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 싸움은 피차 지는 것뿐이고 이기는 경우는 없으니 짐승같이 미련한 자가 아니면 처음부터 싸우지 말아야 한다. 교회 분열은 실로 큰 비극이며 죄악이다. 한국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은 분열된 교단을 다시 하나로 회복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제일 과제는 교회를 통합하는 일이고, 한국민족의 제일 과제는 남북 통일인 것이다.
초동교회 목사
경기노회가 이처럼 분열되는 와중에서 개체 교회들은 매우 난감하였다. 처음부터 교역자나 당회의 입장이 선명한 교회들은 큰 고통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목사가 비어있는 교회나 혹은 목사는 이 쪽인데 당회는 저 쪽, 그리고 당회원 중에 이 쪽 저 쪽 모두에 속하여 있는 교회의 경우는 큰 분란이 일어났다. 절대 다수의 평신도들은 왜 나누어져야 하는 지도 모르고 있었고, 수많은 교역자들도 분열을 막지 못해 아쉬워했다.
장로들도 노회나 총회에 자주 다니는 출세파 장로들이나 이 편 저 편을 분간할 뿐, 일반 교회의 장로들은 별로 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장로들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분열 쟁점이 되고 있는 신학적 논점은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주동하는 목사들을 따라 개인적 친분 관계나 지방색으로 갈라져서 싸운 것이다. 알고 보면 어이없는 싸움이었다. 경기노회가 양분되면서 아직도 입장을 선명히 밝히지 못한 교회들을 피차 자기 편에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그 중에서도 가장 끌어들이기 쉬운 교회들은 목사가 비어있는 교회들이었다. 어느 목사를 모시는가가 그 교회의 향방을 결정짓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의 초동교회는 정대위 목사님이 시무하시다가 유네스코 사무총장직을 맡아 사임하면서 목사 없는 교회가 되었다. 개인 생활에 매여 그 날 그 날을 살아가는 장로님들은 교파 싸움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다만 목사를 모시고 조용히 예수를 믿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초동교회 후임 목사 초빙에 내 이름이 올랐고 당회와 제직회의 결의와 공동의회의 결의까지 얻어 노회에 제출되었다.
초동교회는 해방 후, 일본인 교회당을 접수하여 피난민 중심으로 시작한 교회였으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교회당이 불탔고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서울 수복 후 얼마 안 되어 교우들이 잿더미가 된 터 위에 군인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목사 초빙 수속도 간편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그 때까지 다방교회로 시작한 모임이 적지 않게 성장했고, 그 책임을 질 처지였으나 처음부터 기성 교회와 같은 격식을 갖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초동교회의 초빙을 받고 친구들과 그 문제에 대해 의논하니 친구들이 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것은 본래부터 다방교회가 어느 특정한 목사 중심의 교회이기보다 거기 모인 유능한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운영해 가기를 기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집회의 중요 멤버들은 넉넉히 예배를 인도할 수 있었고 또 설교와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유능한 분들이었다. 또 하나 내가 초동교회에 가야함은 초동교회가 기장 편에 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지금 매우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그 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1954년 12월 첫 주일, 나는 서울 중구 초동의 초동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 내 나이 만 3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