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민 영석 목사님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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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민 영석 목사님 전기


나의 아버님 민영석 목사 地域 敎會史 자료
2009/06/24 15:06





민영석 목사 근영(현 97세)



나의 아버님 민영석 목사

민상식 장로(부산 새순교회)




1. 시작하면서


나의 아버지 민영석목사는 1909년 10월 21일(음) 충북 영동 황간 우천리에서 출생하셨다. 1920년 초등학생의 나이에 지나지 않는 12세 때 만주에 있는 독립군이었던 둘째 형님에게로 가서 조선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가출하여 이 때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다. 아마도 이런 동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믿음으로 일생을 살아오셨다.


이버지는 공무원이 되셨는데 1932년에는 부산 철도국 부산역에서 근무했다. 이 때 아버지는 부산진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아버지가 이곳에서 일하고 계실 때인 1935년 장남인 내가 태어났다. 이듬해 아버지는 사상역으로 전근하게 되었고 자연히 가까운 교회인 사상교회로 이명 하였고, 곧 이 교회 집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에는 다시 부산역으로 전근되어 일하게 되었다. 이 때는 시국이 전운(戰雲)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그 해 12월 8일에는 일본이 진주만 기습 공격함으로서 대동아 전쟁이 발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가택 연금을 시키는 등 외국인이 동태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런 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힘겨운 도전은 신사참배 강요였다. 많은 이들이 체포 구금되거나 순교하셨는데, 나의 아버지도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시고 고난의 길을 가셨다. 믿음을 지키며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는 어려서부터 보게 되었다.


2. 신사참배 반대


1936년 아버지가 부산 사상역에서 근무할 때 신사참배 불참문제로 일인 역장과 관계가 악화되어 직장에서 쫓겨나든지 경찰에 고발되든지 양단간 조치가 될 줄 각오를 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더욱 향상되어 간 것으로 믿는다.


지금도 가끔 그 당시 절박하였던 심경을 말씀하시면서 어느 겨울날 눈이 와서 온 천지가 하얗게 덮여 있을 때 사상역에서 평행으로 끝없이 벋어나가는 철도 레일을 바라보다가 구덕산 꼭대기에 눈 덮인 모양을 보고 불현듯,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데서 오나....." 하는 찬송이 떠올라 이 찬송을 부르면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아니 평생을 이 찬송가만 부르면 그 당시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새로워진다고 하신다.


1940년 사상역장이 다시 부산역으로 전보시켜서 사상에서 통근 하셨다. 통근 열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짓곤 하셨다. 옛날에는 전등 하나로서 방과 부엌을 오가며 사용하였다. 부엌에서는 밥을 짓고 아이들은 자고 있고 캄캄한 방에서 아버지 혼자서 찬송을 부르시는데, "내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 되신 주 ..... " "주안에 있는 나에게 ....." 혹은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이 찬송들을 주로 불렀는데 이 중에서도 "내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를 가장 많이 부르셨다. 신사참배문제로 목사님들은 붙잡혀가고 직장에서는 아침조회 때마다 신사참배를 하는데 우선 피하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피해질지 알 수 없고 당시에 너무 괴로워 어느 목사님을 찾아가서 질문했다고 한다.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해도 된다고 하고, 성경에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을 하니 목사님께서는 "성경말씀 대로입니다. 그러나, 내가 집사님에게 절하라. 절하지 마라고는 말을 할 수 없으니 집사님 마음대로 하세요" 하면서 울더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자신의 신앙양심대로 행동해야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 아버지는 이때 외로운 싸움이었다고 생각된다. 목사님들과 교역자들은 경찰에게 당시 1차 구금, 2차 구금..... 이런 식으로 집단으로 체포되어 갔기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하더라도 감옥에서 서로 위로도하고 격려도 하고 합심하여 기도도 하였겠지만 아버지는 직장에서 혼자 뿐이었고 서로 말씀을 나눌 대상도 없이 암울한 시절을 보내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내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 되신 주, 저 본향 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 걸음씩 늘 인도하소서..... " 3절까지의 가사가 당시 아버지의 심경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었음을 내 나이 30대에야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


3. 1차 투옥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여 일제가 일차적으로 서양 선교사들을 가택 연금 시키고 다음에는 각자 본국으로 철수하라고 종용한 것으로 안다, 아버지가 예원배 선교사집을 방문하신 시기는 전쟁발발 직후 가택 연금 당했을 때 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다른 선교사들도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호주 선교사 예원배도 부산진의 선교사 관에 다른 동료들과 함께 연금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하루는 24시간 근무를 마치고 호주 선교사(예원배)의 집을 방문했다. 일신학교 밑에 큰 둥구나무 근방에 선교사 관이 있은 것으로 기억하신다.


아버지께서 예원배 선교사님을 방문한 목적은 첫째는 타국에 와서 선교사역에도 힘이 드시는데 뜻하지 않게 전쟁이 일어나 가택연금까지 당하니 얼마나 외롭고 두려우시겠는가하는 생각에서 위로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두 번째는 세계정세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 서양 사람이니까 잘 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방문하셨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전쟁이 끝나면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질까 하는 점들에 대해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아버지는 잠복근무 중인 일인 경찰에게 피체되었고, 신분을 확인하고는 내일부터 직장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었다. 다음 날 형사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왔다. 당시는 자동차가 귀할 때이므로 백여 리 길도 자전거를 이용할 때였다. 경찰은 아버지 방에서 책장, 책상 서랍, 책궤를 샅샅이 뒤져서 편지, 가족사진, 성화, 서적 등을 압수하고 자전거 2대에 가득 실었고 아버지도 체포되어 가셨다. 이것이 아버지의 첫 번째 구속이었다. 경찰서에서 아버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고문을 당하고 조사를 받고 2개월 여 만에 풀려 나왔다. 직장인 철도(부산역)에는 복귀되어 근무하게 되었으나 선교사집을 방문한 한 가지 이유로 경찰에서는 "스파이" 혐의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해방 후에 사상파출소 순경이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왜정 때 이 집 주인이 "스파이"노릇을 했네요" 하더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1차 투옥에서 풀려날 때는 저녁에 석방되었는데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을 때는 이발을 할 수 없었으므로 철도 제복 입은 채로 경찰서 근방 사진관에 가서 촬영을 하였는데, 이 사진 한 장만 지금까지 남아있다. 아버지의 구속에 대한 문건이나 서류는 남아 있지 않아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사진의 철도원 제복은 당시의 철도원의 하복인 점을 볼 때 42년도의 하복착용 할 때 피체 된 것으로 짐작된다.


4. 2차 투옥


집사였던 아버지는 석방 된 후에도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1943년 구월 하순 경 부산역에서 아침 조회시 아버지는 다시 체포되었다. 이 당시는 관공서, 학교 등에서 아침마다 조회를 했는데, 조회 때는 언제든지 신사에 참배를 하는 것이 공식이었다. 아버지는 신사참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철도 근무 시간이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휴무하는 제도였는데, 2일에 하루는 조회에 참석을 해야 했다. 조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를 해야 했으므로 아버지는 조회에 참석 않기 위해 화장실에 피하고 했었다. 그런데 하루는 상급자에게 발각되었다. 상급자는 이번에는 용서하는데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있을 때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여 무사히 넘어 갔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어길 수 없었다. 이미 많은 주의 종들이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고 교회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 동방요배를 하고 예배를 시작한 것이 이 때의 상황이었다. 나도 유년주일학생으로서 장년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예배 시작 전에 동방요배부터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발각된 지 얼마 후 다시 화장실에서 그 동일한 상급자에게 발각되었다. 부산역 구내 마당에서는 조회가 진행 중이었는데, 70여 명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아버지는 앞으로 잡혀 나오게 되었다. 그 때 상급자는 아버지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너 혼자 신사에 절하라고 명령했다. 아버지의 눈은 멀리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스데반이 돌을 맞기 직전 하늘을 처다 보면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생각나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을 하나님은 보시고 계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결코 내가 믿는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작정한 아버지는, "절할 수 없습니다."고 하자 "그러면 지금 바로 헌병대에 연락한다." 고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상급자는 직원을 시켜 즉시 헌병대에 연락하였고, 70여 명의 역원(역직원)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헌병대로 연행되어 갔다.


이때 아버지는 순교 각오를 하고 헌병을 따라 갔다고 하셨다. 이번에도 지난 번 경찰에서 한 것처럼 헌병대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집에 가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음날 헌병대에서 사복 입은 두 명의 헌병대원이 자전거를 타고 사상 집으로 왔다. 지난 번 경찰서에서 본 사람이 했듯이 책장, 책상, 책궤들을 샅샅이 뒤져서 자전거 두 대에 책들을 가득 실었다. 아버지는 잡혀가기 전 이것이 마지막 길이 될지 모르니 아이들을 보고 가겠다고 허락 받아 우리 집이 학교와는 거리가 가까우므로 사람을 보내어 집으로 급히 아이들을 오게 하였다.


나 위로 누님들은 4학년, 5학년이었고 나는 2학년이었다. 학교는 사상공립국민학교였는데 당시 사상면에 하나 뿐인 학교였다. 당시 우리 형제는 5남매(큰누님 순이, 복례, 상식, 형식, 성희, - 은희와 대신이는 해방 후 출생)였다. 어린 나로서는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지난번에도 두 사람이 자전거에 책을 가득 싣고 아버지를 데리고 가서 몇 달 후에 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또 그러는 가 싶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때 처자식들과는 마지막이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떠나시기 전 어머니에게 자식들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시고 떠나셨다.


헌병대에서의 심문은 너무나 혹독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 헌병대에 잡혀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 한다는 곳이 헌병대였다. 헌병대 조사 과정에서 사상교회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 이름을 말하라고 하여 방문수 집사(후에 장로가 됨. 소천) 이름을 말하였다고 한다. 이 분 같으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아버지에 대해 불리한 말을 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댔다고 한다. 방문수 집사도 현벙대에 연행되어 간 일을 우리 집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는데, "민집사는 잡혀갔으면 혼자 당할 일이지 왜 남의 신랑을 잡혀가게 하여 골병을 들게 했노? 그런데 당사자인 민집사는 죽지 않았으면 병신 되지 않았겠나" 라는 말이 들려와서 방 집사님이 헌병대에 잡혀가서 고문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5. 형무소 생활


아버지는 헌병대에서 한 달 이상 조사를 받고 형무소로 넘겨졌다. 형무소에서는 다른 죄수들에게 사상범으로 알려져 사회에서 절도, 사기 등 죄목으로 수감 생활하는 죄수들에게 비록 33세의 젊은 나이지만 홀대를 당하지 않았다. 형무소에서는 죄수들 중 이발 기술이 있는 사람이 다른 죄수들 이발을 해주는데, 형무소에 들어가서 처음 이발을 하러 갔었는데 이발사가 가슴에 붙은 죄수 번호를 보더니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귀 가까이 얼굴을 대고는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음으로 그래도 우리 조선이 희망이 있지 않겠오" 라고 하여, 하나님의 손길이 여기에서도 나타나시는 것을 알고 감사하였다고 한다.


한편 사상 집에서는 아버지가 헌병대에 연행되어 간 후로는 전연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사상이 객지이므로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의논할 대상도 없었고 어머니는 당시 나이 31세로서 집에서 살림만 하는 시골 아낙네로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옆집 사람들의 말만 듣고, 사람이 잡혀가면 경찰서 아니면 대신동에 있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것이니 그곳으로 찾아 가보라고 하여 어머니는 겨울이 다가오므로 솜을 두둑히 넣은 한복 한 벌과 무릎까지 올라오는 솜버선을 만들어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인 큰딸을 데리고 경찰서, 대신동 형무소에 가서 이름을 말하고 면회를 요구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하면서 면회가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옷 보퉁이를 이고 사상 집으로 돌아왔는데 당시 김모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찬성하고 마음대로 활개 치는 세상이었다. 그 분 며느리 되는 사람의 친정집이 사상 우리 동네에 있어서 어머니는 그 이튿날 부산 그분 며느리 집에 옷 보퉁이를 맡기고, 시아버지께(신사참배론자인 김모 목사) 말씀드려서 민명석 집사에게 전해 달라고 사정사정하고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는 일이라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결국 몇 개월 후 이듬해 봄 아버지 출소 후에 옷 보퉁이를 찾아왔다.


아버지께서 1차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나왔을 때, 미군이 부산을 공격할 우려가 있으므로 부산 시민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시골로 이사 가라는 소개령이 내려져 있었다. 우리 집도 사상 교인들과 같이 (양산)시골로 갈 것을 약속하고 현장 답사까지 마친 상태였었는데, 아버지가 2차 투옥되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들은 얘기로는 사상 교인들이 집단으로 양산으로 이주할려고 한 것은 일제가 전쟁 말기에 기독교인을 집단으로 체포 처형시킨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총독부에서 소개령이 내려져 있는 것을 빌미로 양산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기억된다. 아버지께서 2차 투옥되고 난 후 2,3 개월 되니까 사상 교인들은 한 집 두 집 양산으로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방문수 집사(장로), 정해동 조사(목사) 가정, 이영낙씨 가정, 손일용 집사(장로) 가정, 이재수 집사 가정 등도 그러했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이므로. 이사 가는 집 짐 싣는데 짐도 옮겨주고 했다. 이 때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이 보지 않는 데서 숨어서 울고 계셨다. 나 역시 어렸지만 친하게 지내던 분들이 다 떠나가고 우리 집만 가장도 없이 혼자 남게 된 데에 외로움을 느꼈다.


6. 손양원 목사님 사모님의 사랑


국민학교 2학년 때 오후반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 집 앞에서 "주인 계십니까?" 하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니 어떤 여자 분이 서 계셨다. 길다란 국방색 비슷한 치마를 입으셨고 눈은 운 사람처럼 부어 있었다. "여기가 철도 다니는 민집사 집이냐"고 물으셨다. 맞기는 한데 아버지는 안 계신다고 하니 잡혀가셨지? 어른은 안 계시느냐고 해서 부엌에 계신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가 마루로 나오셔서 처음 보는 사람이라 어떻게 오셨는가 물으니, 일단 방에 들어갑시다 하고 방에 들어오셔서, 기도가 끝나고 남편이 잡혀가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 남편은 목사인데 3년 전에 잡혀가서 지금 형무소살이 하고 있다고 하셨다. 집은 범일동 범내골 변전소 근방에 사신다고 하셨다. 이 분이 손양원 목사님 사모님이신데 처음 들어보는 목사님 이름이었다. 아이들이 몇 명인지 묻고, 학교에 갔다고 했더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 신사참배 하는데 왜 학교에 보냅니까? 보내지 마세요 라고 하셨다. 손목사님 댁에서는 자녀들 학교 다니던 것 다 그만두고 통 만드는 공장에 일하러 다닌다고 하셨다. 옆에 앉아서 어머니와 말씀하시는 내용 중에서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아이들 학교에 보내지 마세요" 라는 말이었다. 나는 학교에 안 가면 어떻게 되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손목사님 사모님은 위대한 신앙인이셨다. 십자가의 원수들과 싸우다 옥에 갇힌 젊은 청년의 가족들을 염려하여 자신의 처지도 어려우신데 찾아 오셔서 위로를 하시고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꼭꼭 찾아 오셨는데 오실 때마다 쌀 두서너 되, 다음 번에는 토란 줄거리, 갈치 말린 것, 현금 얼마, 등등 이런 배려는 아버지가 석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모님이 우리 집에 방문하실 때는 처음 오셨을 때 외에는 언제든지 저녁 어두울 때 오셔서 가지고 오신 것을 내어놓고, 기도하시고 급히 돌아 가셨다. 이런 일은 그 당시 이웃집에서는 잘 몰랐다. 사모님이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하셨고 아버지가 투옥된 뒤로는 사상교회 교인들조차 우리 집에 오지를 않았다. 사상경찰지서 일인 순사부장은 우리 집이 길가에 있었으므로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일본말로 "보~쨩, 보~쨩"(아가야 아가야)하고 불러서 문을 열고 내다보면 손을 흔들고 가기도 하고, 과자를 주고 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우리 집을 경찰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우리 집에서 손목사님 사모님께 드릴 것이 있었다. 땔감으로 어머니가 산에 가셔서 갈비(, 솔잎 떨어진 것)를 해 오는 것이 일과가 되어 있었으므로 땔감은 항상 풍족하였다. 하루는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니 손목사님 사모님과 두 분 아드님 동인이와 동신이 방문하였다. 오시면서 손수레를 끌고 와서 땔감을 싣고 집에 있는 삼목 널판을 같이 싣고 가서 얼마 후 그릇 씻는 통을 두 개 만들어 갖다 주셨다.


아버지가 출옥한 이후에는 우리 집에 오시지 않았고 그 후에는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8.15해방 후에야 소식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모님을 직접 만나 뵙기는 1955년도 부산에서 자녀들 공부하기 때문에 다니러 오셨을 때였다. 인사를 하고 "제가 옛날 사상교회 민집사 아들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니가 민목사 아들이구나" 하고 반가워 하셨다. "옛날에는 여위셨는데 지금은 너무 뚱뚱하시네요" 했더니 "해방된 후 손목사님이 염소 한 마리를 해주셔서 먹고 났더니 몸이 이렇게 불었다"고 하시면서 웃으셨다.


7. 신사 방화(神社 放火)


1) 사상국민학교 신사 불태움


아버지는 두 번째 투옥 때 4개월 간 구금되어 계시다가 1944년 1월경 집행유예로 풀려나셨다. 철도근무처에서는 파면되었고. 10여 년 이상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했으나 퇴직금은 몰수 당해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옥중에서 고생하신 것도 커다란 고통이었지만 어린 자식들 먹이시고 입히시느라 어머님의 고생도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던 날은 여름방학 기간이었다. 몇 일 후에 전교생 조기 개학 통보가 하달되어 우리는 학교로 모였다.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는데 평소에는 교장선생님이 예복(연미복)을 입고 신사 앞에 서서 무어라고 주문을 외우고 손뼉을 치고 절을 하면 전교생이 따라서 같은 행동을 한다. 어린 우리들은 무슨 짓인지도 모르고 학교에서 시키니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이래서 손양원 목사님 사모님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개학 첫날 조회 때는 평소에 하던 일들이 생략되고 일인 교장, 일인교사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각자의 반 앞에 서 있었다. 한국인 주번선생님이 교단에 올라가서 짤막한 전달사항을 말하고,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고 "센소 이찌지 야수미," 즉 임시휴전이라고 하였다. 이때 나는 3학년 때인데 미국 군인에게 일본군이 항복하였다고 우리 집에서나 온 동리에서 좋아라고 야단인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한국청년들이 거의 민족혼을 잃고 일본 사람화 되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센소 이찌지 야수미"라고 말한 선생님은 지금도 생존해 계신다. 그분 명예를 생각해서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조회를 마치고 각 학급이 자기들 교실로 들어가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운동장에서 우와 하는 소리가 들려 쫓아나가 보니 5,6학년 학생들이 화단에 설치되어 있는 신사를 부수고 있었다. 신사 문을 열어보니 어른 팔뚝만한 길이 넓이의 딱딱한 종이판에 글자만 씌어져 있는 것 1개가 세워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앙카 볼트를 풀고 여럿이 신사를 사면에서 들고 운동장 가운데로 옮겨놓았다. 어느 누구도 말리는 사람도 없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교직원 한 사람도 직원실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두리번두리번 살피니 양산으로 이사 가셨던 사상교회 집사님들과 아버지도 거기 계시면서 아이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신사에 불을 붙여 태우니 아이들이 말하기를 "절을 많이 받아먹어서 화력이 세구나" 하면서 웃고 있었다. 어제까지도 허리 굽혀 절하던 그 신사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일제시대 사상교회 예배당 안에도 일본 우상 "가미다나"를 설치하였다. 남녀석이 분리되었던 당시 여자반 출입문에 들어가면 왼쪽 코너 부분에 선반을 만들어 가미다나를 올려 두었었다. 교인들이 거기에 절을 하였는지는 기억에 없고 예배 시작 전에 전 교인이 일어나서 동방요배(일본 궁성을 향하여 묵념)를 한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해방되던 날 아침부터 일왕의 특별담화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이웃집(양이광의 집) 주인도 없는 방에서 라디오를 듣고 일본이 항복한 것을 알았다. 저녁 때 동네 청년들을 불러 모아서 사상교회에 있는 큰북, 작은북, 심벌즈를 가져오게 하여 치고 두드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서 괘법에서 동 괘법을 거쳐 큰길을 따라 괘내로 돌아서 다시 서 괘법까지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사상교회 남자 교인들은 양산에서 8.15를 맞이했는데, 해방이 되고 몇칠이 지나 양산으로 이사 갔던 몇 분이 사상으로 돌아왔다. 마침 사상국민학교가 조기 개학을 한 날이었다. 그날 학교에 가서 큰 아이들을 불러모아 신사를 뜯어오게 하여 운동장 가운데 옮겨와 불태운 것이었다.


사상주재소의 일본인 경찰이 다 떠나고 치안 상태가 공백이 되자 동네 유지들이 의논하여 민영석집사를 사상지서 치안대장으로 위탁하였다. 사상면 사람들은 민집사가 일제 때 두 차례 투옥된 것을 알고 있어 사상에서는 항일투사로 보았기 때문에 객지 사람이었지만 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되지 않아 사임하였다. 해방된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동참하는 뜻으로 조선민족청년단이 결성될 때 사상에서는 이재수 집사가 단장이 되고 민영석 집사는 총무가 되어 해방된 조국의 초창기 사상 청년들을 지도하였다.


2) 아버지의 용두산 신사 방화


아버지가 부산의 대표적인 신사였던 용두산 신사를 방화한 사실은 지금껏 비밀로 공개되지 않았던 일이다. 이 일은 아버지와 절친했던 두 사람, 곧 사상교회 방문수 집사( 장로.별세)와 이승원전도사(후일 목사가 됨)에게만 말했던 극비사항이었다. 그 외에는 오직 한사람 어머님(장두분)만 알고 계셨다. 내가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 세상을 떠나셨다. 다음의 이야기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1945년 9월 하순경인지 확실한 날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실 내가 한 모든 일들은 나 자신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1차 투옥 때 책갈피에 끼워둔 편지가 문제가 되어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으므로 나는 그 후론 일체 기록을 남기지를 않는다.


저녁 어둑어둑할 때 한 되들이 병에 신나를 가득 채워서 신문지로 말아 용두산으로 올라갔다. 신나의 출처는 형무소 출소 후 취직을 할 수 없으므로 이승원 조사의 제매인 김채민씨의 가방공장에서 해방될 때까지 근무하였는데 가방공장에서는 가죽을 염색하기 때문에 물감을 신나로 희석하여 사용하였다. 그래서 신나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용두산에 일본신사가 버젓이 서 있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 일을 결행하기 위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었다. 8월 달 사상국민학교 신사는 조그만 하여 들어다 운동장 가운데서 태웠지만 용두산 신사는 큰 사찰이었다. 내가 불태웠던 그 시기는 일제 말엽에 확장 공사를한다고 경내가 어수선한 것으로 기억된다. 큰 사찰을 불태우게 되면 방화범이 될 것이고 여러 사람이 방화하는데 가담을 하게 되면 비밀이 누설되기 쉬울 테고,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이 일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신사(일본 우상) 때문에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무너져 내렸고 많은 목사들이 변절하고 투옥되고 순교 당하고, 해방된 이 하늘 아래에 이 신사를 어떻게 그냥 두고 보겠는가? 신사경내에 들어가니 신사 근방의 부속건물들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일본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있었다. 이 놈들이 여태 부산을 떠나지 않고 떠들고 있구나 생각하고 신사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는 사람이 없이 조용하였다. 준비해간 신나를 마루바닥에 뿌리고 나서, 밖으로 나가서 신사의 뒤쪽 벽에도 뿌리고 나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신문지에 불을 붙여 신나를 향해 던졌다. 불이 붙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밖으로 나왔다.


산 아래로 내려와서 위를 쳐다보니 확실히 신사 건물은 불타고 있었다. 가슴이 통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염려가 되었는데 혹시 걸인이 구석진데서 자다가 일을 당하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상으로 돌아와서 다음날 친한 교회 친구 방문수 집사(후에 장로, 별세)에게와 친구 이승원 조사(후에 목사, 별세), 아내(장두분. 소천), 3사람에게만 이 사실을 말하였다. 몇 년 전 신문에 보니 용두산 공원에 있는 일본 신사는 해방 직후 어떤 방화범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기사를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 사실을 지금까지 일체 밝히지 않았다. 이승원 목사를 별세하기 삼사 년 전에 만나서 부산시내 초교파 모임인 은퇴 목사회에 자신이 회장으로 있으면서 나를 은퇴 목사회에 가입시켜 주었고, 거기서 옛날 용두산 신사 방화 한 일을 말하고 별난 사람이라고 하며 웃었다. 이제 60여 년이 지난 일이므로 방화범인 나에게 법적인 문제는 따르지 않겠지...


아버지는 용두산 신사를 방화한 정확한 날자를 기억하지 못했는데, 근래 유상곤 집사가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하여 알려 주어서 방화 날자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날이 1945년 11월 17일(토요일)이었는데, 당시 부산에서 발행되던 [민주중보] 11월 19일(월)자에 보도도 되었다고 한다. 또, 중요한 자료는 용두산 신사 현황이었다. 용두산 신사에는 "천조대신" 을 비롯해 총 9개의 그들의 조상귀신을 갖다 두고 섬겼다고 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일본귀신에게 절을 한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인데도 불구하고 국민의례 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판단하실 줄 안다.


이런 자료를 구해준 유상곤 집사는 아버지가 1936년 사상역에 전근되어 사상으로 이사가 서 사상교회에 다닐 때 만난 신앙의 동지 유영흥 집사의 장남이다. 유영흥 집사는 아버지와 10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지만 아버지의 친동생처럼 지냈는데, 일제 말기부터 낙심하였다가 오랜 후에 다시 신앙을 찾았고 아버지 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셨다. 그가 낙심하여 있을 때에도 아버지는 늘 그를 위해 기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불러주셨음을 감사하셨다. . 아버지와 유영흥 집사와의 유대가 후대인 우리 대에도 이어진 것은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다.


8. 경남노회 교역자수양회


1946년 1월 부산 영도 태종대에서 경남노회 교역자 수양회가 개최되었다. 이 때의 일을 아버지는 이렇게 증언하셨다.


해방이 되자 평신도들은 예수를 마음대로 믿어도 교회를 헤치는 자가 없으므로 정말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목사들은 신사참배 관계를 매듭을 짓지 못해 활기가 없었다.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가결된 일본신사에 참배하는 것, 목사들이 앞장서서 우상에게 절을 하면서 국가시책이니 죄가 안 된다고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였던 자들은 해방이 되고 일본이 물러갔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니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로 회복이 되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학사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율법책을 낭독하고 설교를 할 때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던 일을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보면서 잘 알고 있다. 실패하였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이런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를 못하였다. 나는 당시 사상교회의 젊은 집사로서 부산 태종대에서 모인 교역자수양회에 첫날부터 참석을 하였는데 그곳은 태종대의 남쪽에 일본군인들이 사용하던 막사였다. 이 집회 장소를 주선한 사람에 대해서 그 당시에는 아무 것도 몰랐었는데 1990년대에 알게 되었다. 당시 시청에 근무하던 윤창수라는 청년이었다. 현재는 은퇴목사 윤창수 씨다. 당시 내 판단으로는 경남노회 교역자 수양회가 열린 이유는 해방이 되었는데도 총회에서 조직적인 아무런 회개운동의 움직임도 없고 하니 경남노회만이라도 교역자들이 모여 회개운동을 해야 되지 않겠나 하고 모인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내가 참석하게 된 것은 여전도사인 정해금 선생(정해동목사 누이동생)이 가자고 하여 참석하였다. 집회가 계속되어 갔지만 집회 분위기가 냉랭하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2,3일 지나서 나이 많은 목사님들이 따로 모여 의논하더니 부산진교회를 시무하시는 최재화 목사님(독립운동가)과 몇 분의 목사님이 나를 불러서 갔더니 "민 집사, 지금 시내 들어가서 김길창 목사님을 모시고 오면 좋겠다"고 하셨다. 내 생각으로는 신사참배에 앞장 선 사람이 김길창 목사이고 당시 목사로서는 거물급 인사이므로 이 분이 이 자리에 나가야 옳은 회개운동이 일어나겠다고 생각되었다. 항서교회 사택으로 김길창 목사를 만나러 가다가 법원 앞 네거리 근방 인장(도장) 파는 점포 앞에 서서 누굴 기다리는 듯이 손에는 서류봉투를 들고 서 있는 김목사를 만났다. 인사를 하고는 "목사님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하고 인장 파는 점포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이 점포 주인은 당시 송창근 목사의 사위인 김상규 집사였다.


"목사님 지금 영도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데 사흘이 되어도 은혜가 되지를 않아서 거기 모인 목사님들이 모두 김 목사님을 모셔 와야겠다고 하여 제가 심부름으로 목사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이 바쁜 시기에..... 거기 갈 시간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학교를 접수 신청하는 문제로 대서방으로 법원으로 다닌 것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기가 막혀 "목사님이 신사참배 가결하고 신사참배 하는데 앞장서지 않았습니까?" 라고 했더니 나더러 "돌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멱살을 잡으려고 하니 뒷문으로 손살 같이 도망쳤다. 옆에서 보고 있던 점포주인 김상규 집사가, "김 목사님 요즈음 정말 바쁩니다." 하길래, "회개하는 일보다 그 일이 더 중요한가요?"하고 엉뚱하게 김집사에게 분풀이 겸 쏘아붙이고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영도 태종대로 가서 "김 목사는 바빠서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였더니 여기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느 목사님이 "민 집사 이왕 그렇게 된 것 한방 맥이지 그냥 왔느냐?"라고 하였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 집회가 시작은 잘하였는데 별 성과도 없이 마친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김길창 목사가 그 자리에 나와서 참마음으로 회개를 하였더라면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줄 안다. 신사참배한 한경직 목사는 죽기 전에 신사 참배한 것을 회개하였다. 그러나 김길창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도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9. 아버지의 목회생활


해방이 된 후 아버지는 엄궁교회에서 무보수로 전도사로 시무 하셨다. 일제 하에서 교회 문을 닫았던 엄궁교회 달려가서 문을 열고 예배를 시작하신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가 교역자로 나서게 되는 시작이었다. 1947년에는 엄궁교회에서 인접한 하단교회를 시무 하셨고, 1949에는 기장 월전교회를, 1951년에는 김해 덕두교회를 시무하셨다. 이런 목회생활 중에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1951년 6월 27일 고려신학교를 5회로 졸업하셨다. 이때 동기생들로 잘 알려진 분들이 김영진, 송명규, 오병세, 이근삼, 이경석, 장경재, 정순국, 홍반식 등이다. 신학교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1952년 10월 30일에는 함양중앙교회롤 이동하셨다. 우리 모든 식구들은 경상남도 함양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시무 하는 동안 하동 새장 터에서 현재 중앙교회가 위치한 상동으로 이전하여 교회당을 건축했다. 또 함양지방 SFC를 창립하기도 했다. 공비(빨치산)가 함양 시가지를 기습하였을 때, 교회의 위치가 함양시가지의 끝(하동 새장터)에 있었으므로 공비가 교회에 제일 먼저 들어와 위기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거창 시찰회에서는 통일이 될 때까지 금요일 밤에는 각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그 날이 금요일 밤이었다. 기도 중에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다.


1953년 8월에는 병곡기도소를 설립했는데(초대 교역자 오재선 선생), 지금의 병곡교회로 발전하였다. 1954년 10월 1일에는 서상면의 대남교회로 이동하였고, 이곳에 시무하는 동안자연석으로 교회당을 건축했다. 1960년 3월 29일에는 합천 가야 성산교회로, 1960년 7월29일에는 안의교회로, 이동하였다. 그런 중에 1960년 9월 진주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63년 4월 5일에는 다시 함양중앙교회로 재부임하여 시무하였고, 1965년 8월 1일에는 서상 대남교회로 재부임했다. 1967년 11월 1일에는 함안 영생교회로, 1974년 4월 30일에는 의령 덕실교회로, 1977년 4월 18일에는 진주 금산교회로, 1980년 1월 31일 이후에는 의령 성당교회에서 시무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중병으로 1981년 5월 7일 교역을 중단하고 은퇴하셨고, 어머니는 1981년 9월 2일 소천하셨다. 아버지는 현재 97세로 생존해 계신다. (2006. 9. 10."minss153"님의 블로그에서)









2006. 9. 2(토) 오후 5시 부산온천교회당에서 열린 부경기독교역사연구회 "제4회정기발표회"

에서 증언하는 민영석 목사(중앙), 장남 민상식장로(오른쪽), 주제발표자 김종화장로(왼쪽)







민영석 목사의 삼대



(사진은 "부경기독교역사연구회 홈페이이지"에서)









불타기전 용두산신사



용두산(龍頭山) 신사(神社)는 누가 불태웠는가?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교회사학)


1945년 11월 17일 토요일 오후 6시 경, 아직 거리의 움직임을 어렴풋이 식별할 수 있는 초저녁 용두산(龍頭山) 신사(神社)가 불길에 휩싸였다. 현재의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자리하고 있던 용두산 신사는 우리나라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신사로서 1675년 3월 금도비라신사(金刀比羅神社)로 시작된 한국에서 신사제도의 기원이 되는 신사였다. 해방된 지 꼭 3개월이 지난 이날 신사 배전(拜殿)에서 발화된 불길은 부산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순식간에 본전(本殿)으로 진화되면서 신체(神體)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에 휩싸였다. 신사 경내에 있던 소나무 등 수목은 불길을 전파하는데 기여하여 용두산 신사를 거의 불태우고, 신사의 배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곧 새가 머무는 곳을 상징화한 도리이(鳥居, ㅠ 자 모양의 신사입구)도 검게 그슬려 흉칙한 잔해로 남게 있었다.


이날의 화제에 대해 11월 19일(월)자 민주중보(民主衆報)는 “용두산 신사 소멸”, “방화혐의 농후... 일인의 모략”이라는 제하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우리나라는 신국(神國)이요, 신(神)이 보호하는 우리 국체(國體)는 영원히 불멸할 것이며 우리는 동아(東亞)의 맹주다’하고 덤비던 일본제국 착취정부도 말이 신국을 절규하며 또 우리 동포들은 40년 동안 소위 황국신민화라는 미명 아래 기회마다 숭배치 않으면 안 된다고 참배 요배(遙拜)를 시키던 식민지에 대한 기만정책의 본영인 부산 용두산 신사가 지난 17일 오후 원인불명의 화재로 소멸하였다. 물론 해방된 그날부터 시민이면 누구 없이 용두산 신사의 처분문제에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이러한 사건이 생겼으므로 아까운 생각은 없을 것이다. 소방서에 이 화재원인을 물은 즉 아직 확실치 않다고 하나 방화의 의심이 많다고 하며 항간에는 일인의 모략방화라는 소리도 높다. 만약 일인의 방화라면 과거에 있어서 소위 신부라고 숭배하던 신사를 왜 태워버렸는지 그 심리를 모르나 여하간 악괴의 본성을 폭로한 것이다.”


용두산 신사는 가장 역사가 오랜 신사일뿐 아니라 부산지방의 대표적인 신사였다.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게 되면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금도비라신(金刀比羅神)을 모신 사당을 부산진에 지었는데, 1678년 왜관을 용두산 기슭으로 옮기면서 쓰시마 번주(宗義眞)가 금도비라신사(金刀比羅神社)를 건립하였다. 이 신사가 1894년에는 거류지 신사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 신사가 초라하여 부산거류 일본인들이 거액을 모금하여 신사재건사업을 전개하여 1899년 준공하고 그해 7월 8일에는 신사 천궁식(遷宮式)을 거행하였다. 1900년에는 이 신사가 용두산 신사로 개칭되었다. 近藤喜博, 海外神社の史的硏究(11943), 47-8.


이 용두산 신사는 항해의 안전을 지켜 준다하여 뱃사람이 많이 신봉했던 금도비라신을 비롯하여 주길대신(住吉大神), 관원대신(官原大神),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 등 여러 신들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1910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31개의 신사(神社) 혹은 신사(神祠)가 있었는데 용두산 신사는 으뜸이었다. 1915년에는 용두산 신사는 새로운 건물인 신락전(神樂殿)을 건립하였고, 1916년 10월 15일 용두산 공원 조성을 계기로 용두산 신사는 일제의 현존과 일본적 종교의 중요한 거점이자 부산의 명소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신사는 국가의 종사(宗祀)로서 존엄한 우리 국체의 성립, 찬란한 역사의 발자취와 표리일체를 이룬다. 경신(敬神)의 참뜻을 명징하여 이 도(道)의 융성을 꾀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사상의 함양에 절대 필요한 일”이라고 하여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을 공포하고 신사의 건립을 장려하는 한편 신사참배를 강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1917년 3월 조선총독부는 ‘신사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이 참배할 수 있도록 신불을 봉사하는 곳”을 신사(神祠)라 하여, 신사(神社)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작은 사당이라도 신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 설치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런 조치에 따라 3·1독립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당시에는 신사(神社)가 36개, 신사(神祠)가 41개, 조선에서의 신사제도의 총본산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설립되던 1925년에는 신사(神社) 42개, 신사(神祠)가 108개에 달했다. 1925년부터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려는 의지가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구체적으로 강요된 것은 1935년 이후였다. 앞서 인용한 “경신(敬神)의 본의에 철저하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신사참배를 의미했고, 그것은 국가제사 혹은 국민의례로서 어떠한 종교 신앙과도 배치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특히 1935년 4월 정무총감(今井田淸德)은 도지사 회의석상에서, “신을 경배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 우리가 나라를 세운 도의 요체이고, 국민도덕의 연원임에 비추어 이를 명징하고 선양함으로서 날로 국민정신의 진작, 경장을 도모할 것이다”고 훈시하고, “신사에 참배하여 경건한 기(氣)를 갖고 감사하는 것이 품성도야에 알게 모르게 심대한 영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라고 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할 것임을 보다 분명히 했다. 1936년 8월에는 신사제도개정에 관한 5건의 칙령이 발표되었다.


이 때 경성신사와 함께 용두산 신사가 국폐사(國幣社)로 격상되었다. 국폐사란 조선총독부가 관리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였다. 곧 이어 대구신사(1937), 평양신사(1937), 광주신사(1941), 강원신사(1941), 함흥신사(1944), 전주신사(1944)가 국폐사로 격이 정해졌고, 조선신궁을 보좌하는 관폐대사로서 1939년 부여신사를 창립했다. 정리하면, 이세(伊勢)신궁에 직접 봉사하는 조선신궁과 이를 보좌하는 관폐대사로서 부여신궁을 두고, 그 아래 용두산 신사 등 국폐사로 격이 정해진 신사를 두고, 그 다음에 거류민설치 신사를, 맨 밑에는 민중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신사(神祠)를 두어 신사제도의 계층제가 확립되었다. 이렇게 볼 때 용두산 신사는 신사제도에 있어서도 중요한 곳이었고,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5년 이후 부산지방에서의 참배의 중요 거점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사는 한국인들의 정신과 영혼을 짓밟는 귀신들의 전당이었고, 기독교인들의 원부(怨府)였던 것이다.


따라서 해방과 함께 일본종교의 거점이었던 신사는 불타거나 파괴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의 경우, 일제의 패망이 확실해 지자 조선총독부가 신궁의 본전(本殿)까지 스스로 소각하고 파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한국인들에 의해 불탔다. 해방 후 8일 만에 전국 136개 처의 일본 신사가 불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용두산 신사는 해방되고 3개월이 지나도록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1945년 11월 17일, 부산 앞바다의 세찬 바람이 귓전을 스치는 음산한 저녁 무렵, 용두산 신사에 불이 붙기 시작하고 불길은 삽시간에 이것 저곳으로 진화되었다.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의 억지 절까지 받아먹어 화력(火力)이 세다고 생각했다.


용두산 신사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도리이(鳥居)라고 불리는 ‘ㅠ‘자 모양의 입구가 있었다. 도리이는 일본 지도에서 신사를 가리키는 표지이기도 하다. 도리이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석등(石燈)이 늘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좀더 들어가면 한 쌍의 사자상이 있는데, 흔히 해태상이라고 말하지만 일본말로는 ‘고마이누’라고 한다. 이것은 해태상과 마찬가지로 악귀를 막는 수호상이었다.


신사 건물 앞쪽 한 귀퉁이에는 약수터같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데미즈야(手水舍)라고 부른다. 신 앞에 나아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한다는 의미로 손을 씻는 곳이다. 이런 정화의식을 ‘하라이’라고 부른다. 이런 석상 뒤에 있는 것이 배전(拜殿)이다. 이곳이 참배자들이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벽을 치는 곳이다. 그 뒤에 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본전(本殿)이 있다. 본전을 신전(神殿), 혹은 정전(正殿)이라고 부른다. 본전에는 제신과 제신을 상징하는 예배 대상물 곧 신체(神體)가 모셔져 있어 일반 참배자의 출입이 금지된다. 현재 부산탑이 위치한 곳이 본전이 서 있던 곳이었다.


경내에는 소나무(神木)들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새끼줄에 흰 종이오리를 여러 갈래로 드리운 일종의 금줄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이런 금줄을 ‘시메나와’라고 하는데, 신선(神仙)지역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이날 화제는 배전에서 시작되어 본전과 경내로 확산되었다. 비록 신사가 불탔으나 민주중보의 기사처럼 그 누구도 이를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이 신사가 불탔을까? 방화의 혐의가 짙다고 보았지만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혹자는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불을 질렀다고 말했을 만큼 신비로운 것이었다. 필자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용두산 신사가 전소된 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용두산 신사의 파괴는 방화에 의한 것이고, 방화자는 청년 집사 민영석(閔泳石, 1909-)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3년 6월 26일 주일이었다. 부산 대연동의 새순교회 예배 인도 차 갔다가 이 사실을 방화자 본인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1945년 당시 36세의 사상교회 집사였던 민영석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유린했던 신사가 버젓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의분을 감추지 못하고 방화를 결심했고, 이를 다른 이와 결행하면 비밀이 누설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단독으로 방화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두 번이나 투옥되었던 그는 직장을 잃었고, 해방 후에는 이승원 전도사의 제매인 김채민씨가 경영하는 가방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민영석은 가방공장에서 사용하는 염색용 물감을 회석할 때 사용하는 신나 두되들이를 병에 담아 신문지로 숨긴 후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갔다.


인적이 드믄 틈을 타서 도리이를 지나 계단을 올라 배전으로 갔고, 이곳저곳에 숨겨온 신나를 뿌렸다. 그리고는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인 뒤 민영석은 신속히 그곳을 빠져 나왔다. 마침 해풍이 불어 불길은 삽시간에 이곳저곳으로 확산되었다.


이 때의 방화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민영석은 오직 두 사람의 근친한 친구에게 알렸는데, 그 한 사람이 이승원 전도사(후일 목사가 됨)였고, 다른 사람이 사상교회 방문수 집사(후일 장로가 됨)였다. 후에 민영석은 고려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51년 6월 제5회로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함양중앙교회, 병곡교회, 대남교회, 합천가야성산교회, 안의교회, 함안 영생교회, 의령덕실교회, 진주 금산교회 등 서부경남지방에서 목회를 마감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장남 민상식 집사(현 장로)와 함께 새순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필자가 민영석 목사를 만났을 때가 바로 이 때였다.


민영석 목사님은 역사를 공부하는 필자에게 용두산 신사 방화 사실을 공개했던 것이다. 꼭 13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듣고 후일에 공개하리라 마음먹고 오늘까지 지내왔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의 여러 분들도 알게 되었고, 지난 9월 2일 민영석 목사님은 필자가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부산경남교회사연구회에서 공개적으로 이 사실을 증언하였다. 이제 용두산 신사의 방화는 더 이상 은밀한 사건이 아니다. 50여년의 세월 덕분에 민영석은 건조물 방화범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도리어 그것은 의로운 결행이었다. 그는 신나를 뿌리면서 인명 피해가 없기를 기도했다는데, 다행히 단 한 사람의 인명피해도 없었던 점을 그는 감사하고 있다.


현재 민영석 목사는 97세의 나이로 장남인 민상식 장로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2006. 11. 11. 한국기독신문)







글과 그림으로 엮은 부산 역사와 문화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 "부산이야기 99" 출간
민속·음악 망라…18~23일 갤러리 자미원서 전시


광복 직후 용두산 신사를 불태운 민영석 옹.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이 직접 그린 그림이다.




화가이자 부산민학회 회장인 주경업(사진)이 "부산이야기 99"(부산민학회)란 책을 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혼자서 만들었다. "그림과 함께 보는 부산의 역사와 문화터"란 부제를 단 이 책은 주경업이기에 가능했지 싶다.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글쓰기 일 뿐 아니라 20년 넘게 발품을 팔아가며 증언자의 말 한마디 놓치지 않은 현장 기록자의 글쓰기이고, 문화현장에 직접 뛰어든 자의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글은 민속에서 역사로, 역사에서 음악으로 막힘이 없이 흘러간다.


왜 하필 "99"일까? 99는 더 이상의 틈이 없는 꽉찬 수다. 99칸 집을 짓듯 부산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겠다는 욕심이 엿보인다.


"99"에 맞춘 걸까? 주경업은 광복 직후 용두산 신사를 불태운 민영석 옹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올해 민 옹의 나이가 99세. 지난해 건강상의 이유로 5번 만의 약속 끝에 만난 그였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형한 눈빛에 질려버렸어요. 안광에 빛이 나요. 금방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난 사람 같았지요. 신사를 불지른 감격이 지금도 남아있는 듯했어요. 식자라는 내가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요."


1945년 11월 용두산공원 꼭대기에 버티고 있던 신사는 열혈 청년 민영석의 손에 불태워졌고, 그는 그 사실을 인생의 마지막 무렵에야 털어놓았던 거다.


"어둠발이 묻어오는 용두산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신사로 오르는 계단으로 다가가는 민영석의 손에는 신나를 가득 채운 1되들이 병이 신문지에 둘둘 말려 들려있었다"로 시작되는 23번째 이야기 "불타는 용두산 신사, 그리고 민영석" 편은 실화소설처럼 생생하다. 민 옹에 대한 속깊은 애정과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서술이다.


주경업의 이야기는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천일야화처럼 끝이 없다. 조선 속의 일본인 마을로 여성출입금지 구역이었던 초량왜관에서 인삼교역으로 폭리를 취했던 대마도 상인이야기를 하더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병원인 제생의원이 콜레라 방제를 위해 동래부에 보낸 소독약을 동래부사가 썩은 물건이라 개울에 내다버려 돌림병 확산이 심해졌더라는 일화로 이어진다. 영국인 부산해관장의 딸과 애정행각을 벌인 120년 전의 국제 로맨스맨 권순도 이야기를 풀어내더니, 피란 시절 국제시장 한모퉁이 생긴 통술집과 문화예술 사랑방이었던 광복동의 음악다방과 대폿집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런 글쓰기에 그림이 갈마든다. 애당초 민속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다 역사에 빠져든 그였으니, 그림도 글을 닮았다. 책 속에 실린 87점의 그림은 연필과 펜으로 그린 것이기에 훨씬 더 글과 잘 어울린다. 이야기가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온다.


책 출간과 때를 맞춰 18일부터 23일까지 부산 중구 부평동 갤러리 자미원에서 책에 쓰인 그림 30점을 전시한다. 051-242-1828. (2009. 2. 15. 부산일보 / 이상헌 기자)





1945년용두산신사방화 http://blog.naver.com/kjyoun24/60043615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