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유 재헌 목사님 - 찬송과 순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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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유 재헌 목사님 - 찬송과 순교...[1]


공회 찬송가 201 곡 중에 7 곡이 유 재헌 목사님의 찬송입니다.
너무 깊은 찬송으로 은혜를 끼쳤고 그 자신은 순교 제물입니다.
우리 공회와 인연이 많은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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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헌 목사

출 생 일 : 1904. -3. 21 순 교 일 : 1950. 09.28 교단 : 장로교


경신학교 졸업. 피어선성경학교 재학. 고베관서성서신학교 졸업.
1945년 8월 대한수도원 설립(최초 개신교 수도원)
1950년 임마누엘 수도원 설립(영계의 발전도소. 은혜의 수원지)
조선기독교 독립교회 설립(일본)
114편의 복음성가가 지금도 불리우고 있다.


火壇 유재헌의 부친 유흥렬은 1863년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삼리에서 태어나 30세에 언더우드의 전도를 받아 세례를 받은 후 상투를 자르고 개화운동과 복음전도에 앞장서게 되어 문중으로부터 버림받고 멸시천대를 당했으나 그의 가슴에 불은 복음의 불을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언더우드와 동역자가 되어 제중교회(남대문교회) 조사로 서 사역하면서 용인,광주,안성, 평택 등지에서 속속 세워진 교회들의 순회조사로 시무하였다.
당시 제중병원 간호사와 결혼 1905년 용인 김량교회의 조사로 시무하다가 1919년 장로가 되어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은지 이틀 후 성역 50년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
유재헌 목사는 부친이 제중교회에서 조사로 시무하고 있던 1904년 3월 21일에 태어나 독자로 성장하였다.
유재헌은 경신학교를 거쳐 피어선성경학교를 다니던 중 1926년 6.10만세 시위에 가담 하였고 그후 피어선 성경학교 지하실에서 배재고보 협성학교 학생들과 YMCA 김동석 등과 재차 만세운동을 위해 모의 16일에는 거리에 뿌릴 독립문서를 등사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6월 30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나왔다.
그 후 경기도 용인의 동아일보 지구에 기자로 일하면서 감성회라는 민족계몽운동 단체를 조직 독립운동을 꾀하게 된다.
일경의 감시와 핍박을 피해 현해탄을 건너가 구두수선을 하면서 고베의 관서성서신학교를 마치고 1931년 12월 25일 미가와지마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도꾜 고베 요코하마 아까시 등지에 "조선기독교 독립교회"를 세우고 노방전도에 힘쓰던 중 수차 투옥 감금되어 고난을 당했다.
일본서 손수례를 개조하여 이동가옥을 만들어 그 안에 거하면서 구두수선으로 생계를 하면서 노방전도를 하면서 14년동안 교회를 개척하든 중 1941년에 옥고를 치룬다.
1942년 강제송환 귀국 40일 금식 후 부흥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했다.
1945년 최초개신교 수도원인 "대한수도원"을 철원에, 1950년 "임마누엘 수도원"을 서울삼각산에 세웠다.
"사람을 움직이기 전에 하나님을" "전도운동 전에 기도운동을" "기도하고 회개하고 성신받고 다음 나가 외치고 다음 건국하자"를 슬로간으로 선교와 독립운동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믿고 선언했다.
6.25전에 이미 이북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피난와서 유재헌목사의 집회에 참석.
6.25발발 두주 후 7월 9일 "나는 마음을 정하였다"고 고백하고 7월 11일 "순교자의 깃발"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살을 찢어 가라---" 는 복음성가를 불렀다.
1950년 8월 15일 정치보위부의 급습 지하실에 감금 고문당하다가 9.28수복전 납북되어 가던중 탈진하고 쓰러지자 총살당하고 만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한국 최초 개신교 수도원을 세워 영계의 발전소로 삼았다. 수도원이 개원되어 두달도 되기 전 1950년 6.25가 발발 이북에서 월남하는 교인들을 위해서 집회를 가지고 피난을 포기한채 6.25발발 두주 후인 7월 9일 복음성가를 지어 신앙고백을 하고 7월 11일 "순교자의 깃발"이라는 제목으로 찬송을 하였다.
미처 피난을 가지못한 성도들이 삼각산으로 몰려와 유재현 집회에 참석하든 중 8월 15일 정치보위부원들의 습격을 받아 유아와 늙은이들만 제하고 유재헌 목사를 선두로 모든 성도들이 체포되어 국립도서관 지하실에 감금 대부분 성도들이 풀려났으나 유재헌목사는 계속수사와 고문을 당하고 9.28 소복 전 공사군에 의해 납북되어 가던중 탈진하고 쓰러지자 총살당하고 만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114편의 주옥같은 복음성가로 오늘날도 수많은 노년층 신도들의 심금에 메아리 치고 영적인 활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아들 유종건목사는 수송교회 담임을 하다가 도미했고 차남 유광웅도 독일 유학을 하고 아세아연합신학에서 교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