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박 기천 - 공회 집회와 순교
공회 집회와 공회 순교 신앙에서 순교한 4 명 중 1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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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천 전도사
출 생 일 : 1920. 04. 02 순 교 일 : 교단 :
간의학당
1941년 심상소학교 졸업
복음농업중학교 졸업
박기천은 1920년 4월 2일 경북 금릉군 대덕면 내감리 910번지에서 아버지 박정하씨와 어머니 이순분여사의 4남 2녀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의 나이 6살에 아버지 박정하씨는 세상을 떠나 형들 손에 자라야 했다. 그는 어려서 마을학교인 간의학당에 다녔다. 민족의식이 강한 청년인 유옥수 선생이 가르치던 학당인데 그곳에선 신학문과 한문을 동시에 가르쳤다.
1933년 3월 그의 나이 11세때였다. 그곳 마을교회인 감수교회에 부애리 서양인 선교사가 왔다. 얼굴은 희고, 눈은 파랗고 머리는 노란 사람이 시골 동리에 찾아오니 구경거리였다. 그날 밤 부해리 선교사를 보러 동리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메웠다. 기천도 호기심을 가지고 사람들 틈에 끼어 앚아 있었다. 그날 밤 기천은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
거창읍 사무소에 근무할때 백영희전도사가 인도하는 가조교회 부흥회에갔다가 은혜를 받고 회개했다.
6세때에 아버지를 잃고 형들손에 자란 그는 1933년 3월 11세때에 감수교회 부애리선교사의 말슴을 듣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
1941년 소학교졸업식이 가깝던 어느날 담임선생님이 불러서 궁성요배를 안한 사람은 졸업장을 안주는데 교장님이 아셨기 때문에 졸업장을 못받을 것같다고 하자 졸업을 못했으면 못했지 동방요배는 안한다고 외고집을 부렸을 만큼 강직한 성격이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교회를 빌어 야간학교를 하다가 독립운동의 온상이라고 일제는 강제로 폐쇄시켰다.
결혼 후 만주에 들락거리면서 일거리를 찾았으나 찾지못하고 해방직전에 집으로 돌아와 농사를 짖고 싶었지만 농토가 없어 중학교졸업한 학력이 있어 위천면 사무소에 취직하였으나 때묻지 않은 그는 읍 서기직에 갈등을 심하게 느껴 주남선목사의 주선으로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있는 북상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굶기를 밥먹듯했지만 굴하지 않고 전도에 열을 쏟았다.
북상면은 양반의식이 깊어 교만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2년 후 목회수업을 마치고 1950년 봄 가천교회로 교역지를 옮겼다.
가천교회로 옮기고 얼마되지 않아 6.25가 발발했다. 밤이면 산에 올라가 방공호에서 지냈고 인민군들은 집에 있는 부인에게 미국스파이 남편 찾아내라고 총을 겨누고 위협했다. 심장이 약한 부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6.25가 일어난지 1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7월 중순 거창 합천 함양 3군의 교역자들이 거창 명덕학교에서 수양회를 하고 죽을 각오로 순교신앙을 지킬 것을 확약하고 수양회에서 돌아와 7월 마지막 주일 예배시간에 박기천 전도사를 연행해 공산당 정책에 반하는 반체제 인물이라하여 설교를 트집잡아 가두었다.
박전도사가 내무소에 잡혀온지 40일만에 외출이 허락되어 조카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조카집에 들렸다가 가지말라는 조카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의 약속도 약속은 약속이라고 하면서 옷만 갈아입고 인민군 구치소로 쓰이던 명덕학교 교정으로 걸어들어갔다.
인민군은 내무서에 잡혀와있는 애국인사 및 종교지도자들을 트럭에 태워 함양 단계산 쪽 도둑골에 도착해 그들을 한 줄로 앉혀놓고 사살했다.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그 동리 우체국장의 증언으로 그들의 죽음 현장이 전해졌다.
기도하는 모습으로 죽은 박전도사의 시체는 관에 넣을 수 없었는데 주남선목사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시신의 무릎이 펴져 관에 넣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아들 박내영은 부산 고신대 신학과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어 부산시 북구 구포동에 소재한 성도교회에서 담임목사로 교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