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 기풍 - 평양 출신 여수의 순교자
이기풍 목사
출 생 일 : 1865. 12. 23 순 교 일 : 1942. 06. 20 교단 : 장로교
1907년 평양신학교 졸업.
1907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1918년 3월 광주 북문안교회(현광주제일교회)
1920년 전남 노회장. 1921년 10대 총회장
1924년 고흥교회부임 .제주도 성내교회부임
1931년 벌교교회 부임
1934년 낙도, 돌산도, 완도 등지에 교회를 개척
이기풍은 1865년 12월 23일 평양 토박이로 태어났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2세 때 붓글씨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비범한 소년이었다.
평양깡패 이기풍은 30세가 되던해 일로전쟁당시 원산으로 피해 있던중 원산 시내에서 스왈렌 선교사에게 전도받아 예수를 믿은 후 과거 국가적 상황이 뜻을 펴기에는 너무 암울했던 시대에 깡패가되어 평양거리에서 그가 때려눕혔던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가서 울면서 회개했다.
마포삼열을 도와 함경도 지방을 순회하는데 앞장섰고 1903년 개교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한국인으로는 평양신학교 최초 7인 졸업생이자 한국교회 최초 7인목사가 되었다.
1907년 독노회 결정에 의해 이기풍목사는 제주도 선교가가 되었으나 제주주민들로부터 사교라고 몰매를 맞고 굶주려 쓰러졌다가 어느 해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때도 있었다.
그는 제주민들의 모진 학대에도 불구하고 분투노력끝에 제주도 성내교회를 비롯 삼양, 내도, 금성, 협재, 두모, 용수, 고산, 모슬포, 중문, 법환, 성읍, 세화, 조천 등에 교회를 세웠다.
1918년 3월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당회장으로 부임 교회를 부흥시키는 한편 1920년에는 전남노회장이 되었고 1921년에는 총회 제10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1923년 전남 순천교회부임 그 이듬해 고흥교회로 부임 4년동안 교회부흥에 전념하는 중 제주도 성내교회에서 청빙 망서렸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4년을 목회하여 자립교회로 만들어 미련없이 후배에게 맡기고 1931년 벌교교회로 부임 3년만에 3백명을 넘는 교회로 부흥시켰다.
노회에서 전남 여수군 남면 우학리 섬에 교회를 개척 봉급도 식량도 없는 자비량교회로 아무도 자원하는 기색이 없자 이목사가 자원하고 나서 1934년 70노구를 이끌고 우상숭배로 찌들은 낙도선교에 도전 돌산도, 완도 등지를 두루 돌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덧으로 기독교의 순수신앙에서 변절하기를 강요했으나 이기풍목사는 자신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동료목사들에게도 거부하기를 권면했다.
결국 일경은 사람을 보내어 회유를 유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자 변절을 강요한 일제의 요구를 거부함으로 부정선인으로 몰아 체포하고 고문으로 변절을 강요했으나 이목사는 "예수님이 날 배반한적이 없는데 어찌 내가 예수님을 배반하겠는가 죽을때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목숨이 그리 아깝다고 변절까지 하겠오 난 못하오" 강도를 높여 고문을 했으나 70고령의 이목사는 끝내 몸이 약해져 졸도하여 병보석으로 혼수상태에서 헤아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웠다가 1942년 6월 20일 77세로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
1953년 5월 9일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교묘지에 이장했다.
후예로는 외손주 이성근 목사가 장신59기로 졸업 목사로 시무하다가 은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