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 인재 전기 - 박 시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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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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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역사] 이 인재 전기 - 박 시영 저


약력 - http://www.injaelee.org/k_index.html


이인재목사(李 仁 宰 牧師, 1906-2000)는 일제 외정시대때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을 거부,

반대운동하다가 옥로를 치른 한국 장로교 초대 교회 역사의 중요한 인물중 한분 이시다.



신사참배 거부 결과 한국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가 핍박을 당했다. 약 200여 교회가 문을 닫었어야만

했고 약 2000여명의 성도들이 감옥에 강감되었다고 추측되며 그중 50여명이 순교 하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출옥이후 이인재목사는 부흥 강사로, 목회자로 한국 전국에 복음을 전하였고 1974년

6월에 68세의 나이로 미국에 이민와 계속 복음전파에 열두 하다가 2000년 4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소천하셨다.



"어린양같이 순한 이인재 목사"라고 같이 옥고를 치른 안이숙여사는 그를 가르켜 표현하였다.



이 이인재목사의 훔페이지를 설립함으로 그의 생애, 그의 역사배경, 그의 동역자들에 관한 한국 장로교

초대 역사 보존및 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정수 (막내아들)




1906년 1월 4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779번지에서 출생

1926년. 밀양농잠학교 졸업

1926년 3월~1938년 1월, 면서기로 13년간 공무원 생활

1930년 12월 4일, 마산리교회의 초대 선출직 집사로 피택

당시 이름은 집에서 부르던 리쥬원(이주원)으로 기록되어 있음

(마산교회 제1회 당회록, 1936년 12월 4일)

1938년 4월, 평양 신학교 입학,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

1940년, 평양 이노리 교회 전도사로 봉직

1940년 5월 13일,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일경에 의해 체포.

평양경찰서 유치장과 평양형무소 수감. (예심종결문)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함께 출옥(만 5년 4개월 옥고치룸). (사진)

1945년 10월, 밀양마산교회 전도사(제12대 담임 교역자).

1946년~1947년, 창원교회 전도사(창원교회 제17대 교역자로 부임).

1947년 6월 7일, 조수환, 황철도와 함께 고려신학교 제1회로 졸업 (사진)

1948년~1950년 8월, 전도사로 서울 성산교회를 개척해서 설립했지만

6.25참변으로 몸바쳤던 교회가 분해되는 역사적 고통을 겪음.

1950년 9월~1952년 5월, 거제도 장승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1951년 3월 6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제54회 경남노회 정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날 목사로 장립을 받은 사람은 이인재, 배수윤, 김희수, 김장원,



정해동, 손명복, 박성근 모두 7명이었다.



1952년 7월~1960년 12월 6일, 대구 성남교회 시무

1961년~1963년, 대구 동성로 교회 시무

1965년~1967년 10월, 서울 의정부중앙교회 시무 (사진)

1967년 11월~1971년, 서울 성광교회 시무

1971년~1974년, 대구 달성교회 시무

1974년 6월 29일, 도미(渡美) (사진)

1976년~1978년, 시카고 미현 교회 창립(후에 「조명교회」로 이름을 바꿈)

1978년~1979년, 뉴저지 허드슨 장로 교회 창립, 시무

1978년 2월 8일, 미주 합동측 예수교장로회 총회 창설, 초대 총회장 역임 (총회록)

1979년~1981년, 펜실베니아주 이리 (Erie) 장로교회 창립, 시무

1980년 8월 12일, 미국 시민권 취득 (사진)

1981년 5월~1984년, 필라델피아 새한 장로 교회 창립, 시무

1984년 12월 11일, 미주 필라델피아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됨

1987년 8월~1889년, 콜로라도 덴버 성산교회 창립, 시무

1992년 4월 8일, 필라델피아 새한 장로 교회 원로목사 추대 (사진)

2000년 4월 30일, 새벽 1시 50분, 소천. (묘지사진)



저서: 『넘쳐 흐르는 생명강』(서울: 소망사), 1982. 6. 30

『하늘에서 온 방문객』 (부산: 제일문화사), 1988. 10.1

『성령충만을 받는 비결』(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4. 7. 25.



이인재 목사 소개 책자: 『이인재 목사의 생애와 설교』(영문), 심군식1996. 10. 5





가족사항: 이인재

신상이 - 이정희 이정빈 이수옥 이정신

문상문 - 이정윤 이정수

















이인재 목사 전기, 박시영 목사 저 (밀양일보 연속 기사, 2005)





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가? (1)

1940년 3월 다시 경남지방으로...다시 평양으로 (11)



이인재의 유년시절과 학문의 길 (2)

주기철 목사의 석방과 이인재 전도사의 체포 (12)



이인재의 기독교 입문과 면서기 시절 (3)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에 대한 일제 검속과 검찰 기소 (13)



배경 인물들 (4)

평양 종로경찰서 유치장 생활 (14)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 전도사(5)

가족들의 수난 (15)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남북교회의 가교역할(6)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유부장 (16)



신사참배 강요와 남북교회의 가교 역할(7)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유부장 (17)



8. 1940년, 경남지방 순회와 평양에서의 신사참 (8)

반역의 역사, 저항의 역사 (18)



8. 1940년, 경남지방 순회와 평양에서의 신사참 (9)

평양지방법원 예심회부 (19)



1940년 2~3월 평양에서 (10)

1945년 8월 17일, 출옥 (20)

























◆신도, 신사란 무엇인가?



‘신도(神道)’란 일본의 토착적인 원시 종교이다. 이것은 다신론적이며 자연숭배적인 일본 고래의

종교인 셈인데, 여기에다 일본은 국조신(國祖神)이라고 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과 그 이후의 종신

(宗神)들을 섬기며, 또 천황(天皇)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기는 민족종교(民族宗敎)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도의 신을 제사 지내는 곳이 `신사‘(神祠)이다. 일본 곳곳에는 현재 8만여 개의

신사가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아세아 주변 여러 국가들이 반대하는데도 굳이

신사참배를 2001년 취임 이후 4차례나 강행했던 곳과 최근 국민적 가수인 조영남씨가 방문해서

참배했던 곳인 야스쿠니(靖國) 신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을 모셔 놓은 곳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에 있는 여러 신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아주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일본

천황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즉, 일본 천황을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죽은

군인들을 위한 곳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을 애도하고, 다시는 전쟁이 있어선

안 될 것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 왜냐하면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뿐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의 위패도 보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도조 히데키 등 2차대전을 일으킨 전쟁 책임자인

A급 전범 14명을 신으로 받들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인 것이다.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일본은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지만 틈만 있으면 과거 전쟁을 정당화하려고

애써 왔다. 일본 사람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극우(極右) 세력들이 특히

그렇다. 이들은 옛날을 그리워하며 군국주의(軍國主義, 국가의 힘을 키우는 수단으로

오로지 군사력을 기르고 전쟁 준비에 힘을 쏟는 주의)가 되살아나길 꿈꾼다.

일본 총리의 신사 참배는 결국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되기에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들인 대다수 아시아 국가들이 발끈하는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신사참배 강행은 크게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이 강한 나라가

되길 꿈꾸는’ 총리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행하고, 세계 여러

나라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총리의 이런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 강요



우리가 신사참배를 생각할 때 빼놓지 않고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신사참배 강요이다. 1930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조선통치 말기에 소위 대륙 병참화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 등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 정책의 거점을 신사에 두고 ‘일면일신사주의(一面一神社主義)’를 강행하여

전국 요소요소에 ‘신사(神祠)’를 건립했다.



원래 이 신도(神道)는 원시적 자연숭배 종교로서 민족적 성격을 띤 국교화된 종교였다. 그런데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에 의해 새로 성립한 정권은 천황제 국가로서 신도를 기념이념으로

하였다. 그리고 신도를 국가적 종교로 전 국민에게 참배토록 하기 위해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에 보은하는 국민도덕’이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매우 기만적인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국가적

의식으로 강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비종교화(非宗敎化)’한 것이다.



이것은 대외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문명국가임을 보여주고, 대내적으로는 신도이념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도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일본의 조치였다. 이 신사제도가 천황제국가와

결합하여 신사참배는 강요되었고, 이것이 전쟁정책과 결부되면서 조선에서도 1930년대부터

강요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군국주의 체제로 소위 대동아권 형성을 꿈꾸면서 신사에 대한 참배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이것은 신도라는 일본종교를 가지고 천황중심주의의 이념적 통일을 꾀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신사에 대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본천황-일황(日皇)이라 칭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도록 요구하는

동방요배, 일본국기 게양 요구, 황국신민서라는 일본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문의 제창

등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일을 통해서 일제가 표면화 시킨 정책은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

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실제로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인 셈이었다.



(1990년 일본인들의 신실한 사과 및 부전의 맹세)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요람지



일제하 조선의 정치인, 기업인, 지식인, 종교인들이 신사참배에 대다수 굴복하였다. 하지만

기독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끝까지 저항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도 그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일제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일부의

기독교인들이 끝까지 거부하면서 실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이때 신사참배를 반대한 200여 교회가

파괴되었고 2,000여명이 투옥되었으며 그중에 50여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박해사건이었고, 한국교회의 큰 수난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 밀양에서도 상남면 마산리에 있는 마산교회(1896년 교회설립)는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를 중심으로 해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운동의 요람지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특히

이인재 전도사의 활약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기에 밀양신문의 본란을 통해서 역사의 뒤안길에서

그를 생각해 보고 자랑스런 밀양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인재의 유년시절과 학문의 길 (2)





1. 그의 출생



일제 말엽(1940년 5월 13일)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쟁하다가 검속되어 평양형무소에서 5년

4개월 동안 옥고(獄苦)를 치루고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출옥(出獄)하게 된(8월 17일 출옥)

이인재 목사.



그는 조선(朝鮮)이 국권(國權)을 잃어가던 1906년 1월 4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77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이씨(李氏) 문중의 6남 4녀 중 아들로는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경주 최씨이며 현처효부(賢妻孝婦)로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모범 여성이었다.



인재(仁宰)를 잉태할 때 어머니는 하늘에서 용마(龍馬)가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첫

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런 연고도 있고 하여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관심이 지극하였다. 필시 하늘의

뜻이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이었다. 인재는 유독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할아버지는

인재를 늘 가까이 하였다.



2. 조부의 이야기



인재가 말을 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때쯤 할아버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민담(民

譚)을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역사(歷史)를 이야기하셨다. 그 역사란 집안 이야기였다. 자신의

조상들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한 학자로서 동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접장님이라고 불렀다. “이 접장(接長)님, 이 접장님!” 하고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우대하였다.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박식(博識)하였다.



할아버지는 인재를 향하여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인재야, 너는 효령대군의 손자이니라. 그러니

다른 아이들과는 신분이 다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둘째 아들로

세종대왕의 형이며 양녕대군의 아우가 되는 분이었다. 그 효령대군의 후손 가운데 한 분이 뒷날

경남 밀양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 분은 나라에서 낙주제란 칭호를 받은 분이라 하였다. 그 분의

자손들이 밀양을 중심하여 김해 등지로 이주하며 살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밀양과 김해 등지에 그 후손들이 늘어나 이씨(李氏) 성이 많아진 것이었다. 지금도

낙주제의 무덤이 김해군 상동면에 있어 해마다 그 후손들이 한차례 모여 묘사(墓祀)를 지낸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인재에게 가문(家門)의 긍지를 심어 주었다. 인재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은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자라나게 되었다.



3. 한문공부



인재가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할아버지는 집에서 한문 공부를 시켰다.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도덕군자인 할아버지로 통하여 인재는 한자 뿐 아니라 인간수업을 받았다.

천자문을 다 배우고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웠다. 동몽선습이란 조선 중종 때 학자 박세무(朴世

茂)가 엮은 책으로 《천자문》을 익히고 난 후의 학동들이 배우는 초급교재였다. 먼저 부자유친(父子

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

(五倫)이 나와 있고, 이어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부터 명나라까지의 역대사실(歷代史實)과

한국의 단군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한 책이었다. 인재는 할아버지를 통해서

서당에 가기 전 어린 시절에 이것을 배웠다.



머리가 총명하여 어린 나이인데도 잘 이해하고 암기하였다. 7살 때 사칙통편(四則通編)을 통달(通達)

하였다. 사칙통편이란 수학에 관한 것으로 더하기와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셈하는 법칙을 말한다.



4. 서당 시절



1914년 봄. 인재는 서당에 들어갔다. 서당이름은 죽림제(竹林薺)였다. 여기에서 더욱 체계적인

한문교육을 받았다. 중국 역사책인 통감(痛鑑)을 1권에서부터 7권까지 모두 통달하였다. 대학,

중용, 논어를 막힘이 없이 다 익혔다. 그러나 이때는 일제가 들어선 때이고 나라는 일제가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공부를 하였지만 그 학문이 소용이 없었다. 일제가 들어서지 않았다면

과거에 나갈 수도 있었고 급제가 되면 진사가 되고 벼슬길이 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국(時局)이

달라졌기 때문에 한문공부만으로는 별 쓰일 곳이 없었다. 청운(靑雲)의 꿈이 무산되고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5. 신학문의 길



이인재는 좋지 못한 시대에 태어났기에 어려서 많은 학문을 접하였지만 출세의 길을 얻지 못하였다.

책을 손에서 놓고 가사를 도우며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 신학문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 이웃 면소재지에 공립 보통학교가 서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6년제 소학교였다.



1922년 3월. 그 소학교를 찾아가 입학원서를 내었다. 하지만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연령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재의 나이는 16세였다. 8세에 1학년에 입학이 되는데 16세니

입학이 될 리 없었다. 인재는 여러 차례 교장을 찾아가 입학을 허락해 달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본사람인 교장은 원리원칙만 따졌다. 그러니 보통소학교 입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사람인 교장을 대하면서 너무나 조선 사람을 멸시하고 천시하는 것을 실감하였다. 1923년,

기산에 시립강습소가 생겼다. 6년 학제였다. 이곳에는 나이를 상관하지 않았다. 인재는 입학을

하였다. 수업을 하다 보니 너무 쉬워서 노는 것 같았다. 다 아는 것이었고 너무나 수준 이하였다.

월반제도가 있어서 응하였다. 월반에 월반을 해서 그는 6년 과정을 1년 6개월 만에 마쳐 졸업을

하였다. 이것은 그가 이미 배운 여러 가지 학문이 그를 월반하게 하였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머리가

명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집에서 강습소까지의 거리는 십오리 길이었다. 1년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보로 다니며

졸업을 하였다. 진학을 해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중학교 응시를 위한 검정고시를 치루었다. 합격이

되었다. 밀양고등농잠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제1회생, 1924년 5월 6일 개교). 밀양은 그의 집이

있는 마산리에서 삼십리가 되었다. 세 시간이 소요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을 하였다. 왕복

60리길은 결코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찌든 가난으로 배불리 밥을 먹는

것은 물론 끼니를 이어가기 힘든 상황이므로 인재 역시 배고픈 가운데 학교를 오가야 했다. 그러나

갈 때는

괜찮은데 올 때는 길에 쓰러져 아사(餓死)직전까지 가게 되었고 길손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것이

몇 번이나 되었다. 1926년 이인재는 농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인재의 기독교 입문과 면서기 시절 (3)





생존 그 자체가 문제였던 일제 강점기, 하지만 결코 생존만을 위해서 현실과 타협하며 살지 않았던

귀한 사람 이인재. 그의 끊임없는 학구열과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면서 새롭게 시작되어지는 그의

제2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사춘기와 성인군자



인재가 18세가 되던 해, 그는 소년으로서 다른 여늬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에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웠고, 자라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기에

비록 소년이었지만 공자의 도덕훈을 배운 사람으로 자기 스스로는 도덕군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러기에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점잔을 빼고 얌전하였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러하지

못했다. 처녀들을 보면 마음이 움직였고 안아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처녀를

만나면 공연히 처녀의 손목을 잡아보는 것이었다. 처녀가 화들짝 놀라 달아나면 멀거니 바라다 보고

서 있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 자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것을 하는가? 아직 군자가 되지 못해서 그런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도덕적인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이 있는 것일까? 그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알 수 없는 유혹을 물리칠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2. 마산교회



그 무렵, 밀양 마산리에는 이미 교회당이 서 있었다. 인재가 살고 있던 마산리 교회는 1986년

8월경에 시작된 교회이다. 역사가 아주 깊은 교회였다. 일찍이 그곳에 살고 있던 박건선과

박윤선이라는 두 형제가 복음을 받아 들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들의 자택에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1908년 초가 삼간 한 채 구입해서 교회당으로 개조하였다. 마산교회는 1908년 김응진

전도사가 교역자로 시무하면서 교회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손종도 하나 구입해서 새벽마다 종(鐘)

을 쳤다. 주일 낮과 밤, 수요일 밤 예배 시간에도 시작을 알리는 종을 쳤다. 어느 주일이었다. 인재는

교회당 옆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도 교회당에서는 종을 쳤다.



창문 밖으로 손종을 심하게 흔드는 것이었다. 작은 마을에 종소리가 진동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인재는 호기심이 생겨 교회당 주변을 서성거렸다. 교회당은

초가삼간의 방 세칸으로 되어 있었다. 두 칸은 벽을 터서 남자들이 앉았고, 한 칸은 벽을 남겨 둔

채였다. 그 쪽에는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벽으로 남녀석을 구분한 것이다.. 이러게 한 것은 예수를

믿지만 아직 남녀칠세 부동석의 관습이 깊게 인식된 때였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설교를 하는

강대상은 비둘기집 같은 판자통을 각목 네 개가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앞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 모습을 본 인재는 웃음이 나왔다. ‘저게 무언고?’그리고

앉아있는 사람 중에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많았다.그런데 남녀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인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욕하였다. ‘세상에 남녀가 예의도 없이 함께 노래를

부르다니 순전히 상놈들이야.’인재의 마음 속 깊이 뿌리 내려있는 공자의 사상이 기독교를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 인재가 살고 있던 마산리는 양반 동네가 아니었다. 이곳은 역마(驛馬)를 기르고

관할하는 곳이었다.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상사람들이고 이러한 연유에서 마산이란 동네명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결코 마산리는 인재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랑스러운 동네는 결코

아니었다.



명색에 그는 왕손의 후예요, 양반 중에 양반이었다. 공자의 도덕훈을 배워 도덕군자로 행세하는

처지였다. 인재의 조부(祖父)에게 있었던 일화다. 읍네에서 마산리로 걸쳐 외산리라고 하는 동네로

어떤 부자가 말을 타고 달려가고 있었다. 인재의 조부는 왕손의 긍지가 가득하신 분이었다. 마산리

입구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이 부자에게 호통을 쳐서 기어코 말에서 내려 마산리를 지나가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만큼 인재의 가문은 자긍심이 대단하였다. 인재의 모친도 시집올 때 몸 종 둘을 거느렀을

정도였다.그런 가문의 의식 속에 자란 인재가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기적이라고나 할까?



3. 기독교 입문



그런 그가 교회당에 한번 발을 디딘 이후로 그만 마음이 교회로 쏠리고 만다. 그 다음 주일에 또

교회당에 간 것이다. 밖에서 보니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자세히보니 그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밀양박씨 문중의 사람이었다.이름 박수민(朴秀敏)씨였고 교회에서는 영수(領袖)

라 했다.



박수민 영수는 양반 출신이었다. 모든 생활면에서 모범스러웠다. 도덕군자를 자처하는 자기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에 비하여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분이었다. 어쩌면 인재는 그들보다 훨씬

훌륭한 양반으로 박수민 영수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그분이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상놈이니 하며 우습게만 볼 처지가 아니었다. 교회당 안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상놈도

많았지만 양반도 적지 않았다. 인재는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심각히 관찰하였다. 박수민 영수가 전하는 말씀도 공자의

가르침 못지 않았다. 새롭고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교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예배 후

교회에서는 인재를 환영하였고 그에게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다. 그것은 한 쪽 거죽이 떨어져 나간

국,한문

성경책이었다.



교회에서 그에게 국-한문성경책을 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인재는 그 동네에서 제일 한문을 많이

알기로 소문 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 이름 대신에 ‘서당총각’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 있었다.박수민 영수는 이인재의 출현을 놀랍게 생각하며 관심을 기울였다. 인재는 비록

한 쪽 거죽이 없는 성경이었지만 그것이 책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기뻤다.인재는 성경책을 좋은

선물로 여기고 소중히 간직하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열심히 읽었다. 그는 한글은 조금

서툴렀지만 한문은 자신이 있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사서삼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살아있는

교훈을 접하였다. 그는 성경에 취미를 붙여 교회 출석에 열심을 내었다.



4. 공무원이 되어



인재는 밤에는 야학교(夜學敎)를 열어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한문과 한글을 가르쳤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는 의미도 되고 또 마을 사람들의 눈을 띄운다는 의미에서 열심히

가르쳤다. 마을을 위해서 무언가 좋은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낮에는 학교에 나가면서 저녁엔

야학에서 늦게까지 글을 가르치는 일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재는 그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했다.1926년 이인재는 밀양농잠학교를 졸업하였다. 진학을 해서 더 공부를 하고

싶었다.그러나 그의 가정형편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더 배우려면 경성으로 가든지 일본으로 가든지

마을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가난한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다. 돈이 드는 일인데

그 돈을 마련할수 있는 가정형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는 진학을 포기하였다. 우선 가정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들이 그를 더 염려해 주었다.“인재야, 너는 배운

것도 있고 머리도 좋고 하니 관공소에라도 들어 가도록 해 보거라.”“그런 곳에 쉽게 들어갈 수 있냐,

어디.”“강기수에게 한번 부탁해 보거라.”



강기수는 면사무소 직원이었다.“내가 말하기가 쑥스러워서...”그런 인재의 말에 친구들이 대신

강기수에게 부탁을 하였다.어느날 강기수가 인재를 만나 말했다.“인재야, 내가 면사무소에 추천을

해 볼 것이니 이력서를 한통 만들어 다오.”고마운 일이었다. 인재는

이력서를 강기수에게 건네 주었다. 이인재는 강기수를 통하여 면사무소 서기가

되었다. 첫 월급 18원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큰 돈이었다. 어려운 집안에 굉장한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인재의 마음은 무거웠다. 영영 진학의 꿈은 사라지고 면서기로서 여생을 마칠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5. 면서기 업무



인재는 잘 준비되어진 사람이었기에 면서기로서도 여러 가지 일을 맡게 되었다. 사실 그 때만 해도

면사무소의 업무가 요즈음 처럼 세분화되어 있지 못한 시절이었고,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많은

분야의 일을 맡아서 일할 수 밖에 없었다. 세무 관계며 호적관계, 산업관계의 일들을 모두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인재는 농민들의 산업을 장려하는 일을 탁월하게 감당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농민들의 삶이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저 한끼 밥만 먹을 수있어도 다른 걱정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상남면에서 농민들이 살 길은 땅을 가지는 일이었고, 농사지을 수 있게 주변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당시 상남면의 가장 큰 문제는 낙동강물이 범람해서 매해 여름마다 농토를 잃게

되는 일이었다. 그는 여기 저기 도움을 받아서 강둑을 쌓는 일에 전념을 하였다. 예림 뿐만 아니라

마산리에 둑을 쌓아 강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사실 이일은 단순히 강둑을 막는 일

뿐만 아니라 수 많은 농토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면민들을 잘 살펴

주었고,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적극적으로 농토 를 확보하고 또 나눠주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는 한편 당시 상남면과 현 가곡동 사이를 잇는 예림교 착공을 계획

추진해서 준공하였다. 이 예림교 개통으로 인해 상남면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밀양읍으로 나르는데

결정적인 편리함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렇듯 인재는 머리가 명석하고 근면 착실해서 어떤 일이든 능률적으로 잘 감당하였다. 그러기에

면민 가운데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면민들 뿐만 아니라 상사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훗날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면서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1938년). 그 일은 그가 그토록 하고 싶은 학문탐구의 길이기도 했고, 느즈막하게 들어선

길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召命)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3년간의 공무원

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가 면서기직을 사직하기 위해서 사표를 제출했을 때 그는 밀양경찰서에

붙잡혀가서 하루 종일 갖은 술수로 회유를 받게 되었다. 일본 순사는 그에게 다시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면 면장직을 주겠다고 했다.



인재는 기로(岐路)에 서게 되었다. 그에게는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었다. 면장이 되면 큰 명예와 함께

그 지방의 유지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생활도 보장이 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면서 큰

결심을 하였다. 순간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그는

미련없이 수석 면서기직을 떠나게 된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 전도사(5)



평양신학교의 입학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우리는 지금 일제 강점기의 견디기 어려운 압력에 맞서서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실천하고자 애를

쓰는 한 인간의 모습을 살피고 있다. 타협만이 살 길이고 생존이 유일한 삶의 이유인 시대에 결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길을 택한 귀한 인물, 이인재는 편안한 삶이 보장된 면서기직을 사면하고

평양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게 된다. (사진: 평양신학교 건물과 이인재 전도사)



1.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와의 만남



1938년 3월, 이인재는 평양으로 갔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매주일 당시 평양의 대표적인 교회인

산정현 교회에 출석하였다. 당시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는 주기철 목사(1897.11.25~1944.4.20)

였다.산정현 교회는 일제시대때 일본귀신 앞에 절하는 것을 거부함으로 인해 수 많은 탄압과 희생을

겪으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과 한국기독교 역사의 맥을 이어 온 대표적

교회이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의 거두(巨頭)라고 할만한 수다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한국의

간디'로 통하는 고당 조만식 장로(1922년, 장로로 장립됨)와 같은 비범한 인물들이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여 민족의 대표적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928년에는 당시 산정현 교회를 맡고 있던 당회장 강규찬 목사가 연로(年老)함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 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朴亨龍)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부목사로 취임하여

담임목사를 보필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 9월, 박형룡 박사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전임하여 갔다.

그후 1936년 박형룡 목사는 임시당회장의 자격으로 당회를 열고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할

것을 결의하였고, 동년 8월에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神社)참배 반대에 있어 한국개신교 목사의 대표격인 평양신학교 제19회 전기

(1925년)졸업생으로 그는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여 8년 간 시무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192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부산 초량교회를 첫 목회지로 하여 시무하였으며,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로 임지를 옮겼다가,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것이다. 오산학교의 은사(恩師)

이기도 했던 조만식 장로는 직접 마산으로 내려가 자신의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를 자신이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셔왔다. 때는 바야흐로 평안남도 지사였던 야스다께가 기독교학교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한 이듬해이어서 주목사는 이미 일제와의 투쟁을 각오하고 평양성에 들어섰다.

그로 인해서 산정현교회는 민족주의 교회의 총본산으로 더욱 무장하게 되었는데 신앙 진리의 사수

(死守)를 위하여 한국 교회가 크게 단합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다음 해인 1937년 3월 7일 당회와 제직회에서 새로운 예배당 건축안을 결의

하고 그해 9월 5일, 250평의 새 교회당을 완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렸다. 이때 주기철 목사는 설교를

통해 이 교회는 일본 우상에 대항하여 절대로 신사참배를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당시 일제는

교회당 안에 일본 국기(國旗)를 달게 하였고 일본 귀신이 들어 있는 가미다나(神棚)를 벽에 걸도록

강요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이 강단에 어떠한 간판도 달지 못하며 못자국 하나도 낼 수 없다고

교회당의 절대 신성(神聖)을 강조하였다.



1938년 2월 8일, 산정현교회 헌당식(獻堂式)이 거행된지 얼마 후에 주목사는 경찰에 검거(檢擧)

되었다.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고 이에 흥분한 평양신학교 학생 한 명이

평북노회장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 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여기에 관련시켜 주기철 목사를

검거한 것이었다. 주목사는 얼마 후 석방되기는 하였다. 바로 이때에 이인재는 평양으로 이사를

갔고 평양신학교를 입학하게 되어 주일마다 산정현 교회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의 설교는 이인재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로 작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사참배의 문제는

점차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산정현 교회에서 주기철 목사의 설교는 신사참배는 어떠한

경우에도 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인재는 예배 후에

주목사를 만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목사는 젊은 전도사인 인재에게

신사참배와 왜 잘못된 것인가에 대해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2.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일제의 36년간 식민지배가운데 신사참배 강요는 그들이 한국교회를 괴롭혀온 마지막 수단이었고

가장 견디기 어려운 박해였다. 1935년, 11월 14일, 당시 평안남도 도지사였던 야스다께는 자신의

집무실에 평남도내 각급 공, 사립학교는 물론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교장도 참석하는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 자리에서 도지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평양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60일간의 유예기간을 주어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이 소용돌이 속에서 대다수의 학교들이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평남도지사를 찾아가 신사참배할 뜻을 전했다. 종교단체들도 마찬가지

였다. 안식교를 비롯해서 대다수 종교단체들과 일부 기독교 교단들도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이에

굴복했었다. 천주교도 1936년 5월 25일 교황 비오(Pius) 12세가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이를 용허한다”고 밝힘으로, 이를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국 기독교 교파가운데서 최대 교파였던 장로교회는 이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였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1938년 2월 아래와 같은 시정 방침을 전 한국교회에 시달했다.



1. 시국 인식의 철저를 위해 기독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여 지도 계몽에 힘쓸 것.

2. 시국인식의 철저를 위한 지도 및 시설. 1) 교회당내 국기게양탑을 건설할 것. 2)

기독교의 국기 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 서사 제창을 실시할 것. 3) 서력연호의 사용을

삼갈 것.

3. 찬송가, 기도문, 설교에 있어서 내용이 불온한 것을 엄중 취체할 것.

4. 당국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신자는 법적 조치를 취할 것.

5. 국체에 맞는 기독교의 신건설은 이를 적극 원조할 것.



이와 같은 시정방침이 시달되자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피난처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이리오라” 는

찬송을 위시해서 몇몇 찬송가사에는 먹칠을 해서 부르지 않았고, 교회 마당에는 국기 게양대를

세우는가 하면,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하는 한편 심지어 예배당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완강히 반대하는 자는 한국내 최대 교파인 장로교였다. 일제는

이를 미리 짐작하고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웠다.



즉 1938년 9월에 있을 총회를 대비하여 각 노회별로 신사참배 결정을 적극 강요한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했다. 당시 경남노회장은 함태영목사였고

경남노회에서 이 거부안이 통과되자 당시 부산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집요한

공작으로 1938년 9월 총회 전에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에서는 신사참배 찬성을 가결시켰고,

같은 해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당에서 개최된 제27차 조선장로교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수백 일본 경찰의 위압 하에 떨리는 목소리로 가(可)만 묻고 부(不)는 묻지도 않은 채

신사참배 만장일치를 가결해 선언을 하고 말았다. 1938년 9월,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 안이 가결되자 주기철목사와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본격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교회가 패쇄되고 순교를 당하면서까지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3. 평양신학교의 폐교



참으로 힘들게 평양으로 이사와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했던 이인재는 밀양에서와 똑같은

신사참배반대로 인해 1학기 수업만 받고 2학기 수업에는 아예 참여도 하지 못한채 자신의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얼마나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던가? 공무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를 피해 평양으로 왔는데 더 큰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된 이인재는 이제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아주 중요한 시대적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인재가 입학을 하게 된 평양신학교는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교였다. 이 학교는

1901년에 개교해서 1907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1938년 9월 20일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그만 폐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인재는 평양신학교의 마지막 배를 탄 셈이었다.



1938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명령 시달에 평양신학교 내에서도 교수와 교수, 학생과 학생

사이에 부단한 논란이 있었다. 학생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하며 논의를

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은 라부열 박사 (Slacy L. Robert, 1881~1946) 였다. 초대

교장이었던 마포 삼열 박사에 이어 1925년 10월 1일에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한 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라부열 교장은 당당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일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들 중에는 더러 요동(搖動)이 있었다. 몇 분의 교수들은 신사 참배 문제를 크게 생각지

않았다.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교수들이 있었다.

교수들의 확고한 태도가 보이지 않을 때 학생들은 흔들렸다.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1938년 여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종강일이 다가옴에 따라 신사참배 문제는 더욱 강하게

부각되어 졌다. 이미 지난 봄 노회때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사나 장로들이 총대로 뽑히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주기철 목사도 예비검속이 되어 총대가 되지 않았다.1938년 9월

총회시에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여져 가결될 것이란 소문도 돌고 있었다. 만일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어지면 평양신학교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주기철 목사가

검속되기 전 어느날 학생 기도회 시간에 설교를 한 일이 있다. 그 때 주기철 목사는 학생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였다. “신학생 여러분, 앞으로 큰 시련이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 그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베드로와같이 말만으로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고 할 것이 아니라 기도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학생 여러분은 산 속으로 들어가든지 바닷가로 나가든지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능력받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시국이 험악해지자 학생들은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기억하였다. 이인재도 주목사의 말씀이

하나님의 예언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1학기 종강이 되었다. 종강 예배시간에 라부열 교장은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를 읽고서 강하게 설교하였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결단코 흔들리지 말고 넘어지지 않도록 하세요. 우리 학교는 신사참배를 하면서까지

학교문을 열지 않습니다.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가결하여 신사참배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학교는 문을 닫습니다. 신사참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원히 문을 열지 않습니다.”

학기말 시험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마음은 불안하였다.



이인재는 학우들의 후원으로 경남 함양군 휴천면에 개척교회를 세울 사명을 뛰고 내려왔다. 경남

함양군 휴천면에 두 달간 머물면서 이인재는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리고 개척교회 기초를 닦아놓은

후에 고향인 밀양 상남면으로 돌아왔다.그때 당시 밀양마산교회는 교역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인재는 고향교회인 마산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하게 되었다. 우려했던대로 그해 9월 9일부터

평양성문밖 교회당에서 모이게 된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하도록

가결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이 일로 인하여 문을 닫게 되었고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이인재는 교회

일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 전도사(7)



신사참배 강요와 남북교회의 가교 역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가운데 어떤 분은 신사(神社)는 일본의 종교인데 왜 기독교 신앙의 잣대로

한 시대적 상황이었던 신사참배를 문제시하며 지역신문에서 굳이 이것을 다루느냐고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논(論)하는 신사참배와 그것에 반대하는 이인재,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우리 민족 운명에 관한 문제였다. 당시 우리 조선은 국권(國權)을 잃은

상태였고 신사라는 우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반(反)하는 것뿐 만 아니라

국권의 회복은커녕 영원한 국권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신사참배로 대표되는

태양신 숭배에 반기(反旗)를 들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태양신과 맞서 싸웠던 한 용기 있는

신앙인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1.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한국은 거듭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오다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라는 강압에 의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무단통치를 단행하였고 경찰과 헌병대를 일원화한 '헌병 경찰제도'를 만들어 조선인을 혹독하게

통치하였다. 1910년에는 '범죄 즉결법'이라는 무서운 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반도사』를 편찬.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정립하였고, 조선통치를 이념적으로

합리화하려고 시도하였다. 후일에는 한국어의 사용 금지는 물론 한국인 고유의 성(姓)마저 쓸 수

없도록 강요하는 소위 창씨개명을 강요함으로 조선은 일대 수난(受難)을 맞게 되었다.





일제 통치 기간 많은 한국인이 전쟁터로, 탄광촌으로 징발(徵發)되어 자유와 인권이 유린된 채 이국

(異國)의 하늘에서 죽어갔고 초등학생에 지나지 않은 12살 아이에서 50대 여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의 부녀자들이 ‘정신대’란 이름으로 전장에 끌려갔다.





이 기간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것이었다. 일제의 조선통치와 기독교 정책은 일관되게

'분할을 통한 다스림'(Devide and Control)이었다. 특히 1925년 이래로 신사(神社)를 건립하고

1935년 이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인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일대 탄압과

수난의 역사를 엮어 갔다. 신사참배 강요는 1935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분열, 무력화시키고 식민 통치 방해가 되는 기독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시행된 일제의 정책이었다.

1937년으로 접어들자 시국은 더욱 암울해지기 시작하였다. 7월에는 중. 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9월

6일이 애국일로 정해지면서 일본국기 게양, 동방요배가 신사 참배와 함께 요구되었다. 그해

10월에는 황국신민서사가 제정되어 모든 모임에서 암송토록 요구되었다. 그리고 '일면일신사(一面一

神社)'정책을 수립하여 곳곳에 신사를 세웠다.





이와 같은 일제의 정책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하였으나 탄압과 회유에 못이겨

다수의 교계 지도자들이 마지못해 친일적 배교의 길을 갔다. 그러나 주기철, 고흥봉, 이기선,

이인재, 한상동, 주남선, 최덕지, 조수옥 등은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천주교(1936. 5. 25), 감리교(1938. 9)는 이에 굴복하였고. 당시 대표적인

교단이었던 장로교도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

라고 하며 이를 가결하는 큰 수치를 범하게 되었다.





1938년 총회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함과 동시에 전국 곳곳에서는 이에

맞서는 신사 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신사불참배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생활의 순결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고된 싸움이었다. 그러던, 1940년, 이일을 묵과할리 없는 일제의

검거령에 의해 신사참배반대운동가들은 투옥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투옥된 신자는 약 2,000

여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50명 정도는 옥사(獄死)했고 해방 후 30여명이 출옥(出獄)하였다. 이때

출옥한 인사가 고흥봉, 김린희, 김형락, 김화준, 박신근, 방계성, 서정환, 손명복, 안이숙, 양대륙,

오윤선, 이광록, 이기선, 이인재, 이현속, 장두희, 조수옥, 주남선, 최덕지, 채정민, 한상동 등이었다.





2. 지하 신학교의 개강

1939년 9월. 밀양 마산교회를 한상동 목사에게 맡기고 가족들과 함께 평양으로 갔던 이인재

전도사는 시국이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신자들을 규합하는 일에 우선하였다. 이미 교회들도 일제의 조종

하에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지하 가정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중단한 신학공부도

계속해야 했기에 김지성이란 친구와 함께 권세열 선교사를 찾아갔다.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교수들은 더러 미국으로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남은 교수들이 몇몇 있었다(구례인 박사(J. C.

Crane), 함일돈 교수(Rev. F. Hamilton) 등). 이인재 전도사는 권세열 선교사(F. Kinsler,

1904~1992,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10월 내한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사역,

1932년 9월 불우 청소년 6명을 발견하고 평양 광문서림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1938년에는 13개의 성경구락부에서 5천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침. 이 일로 인해 일본 경찰로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의심까지 받게 됨.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일본 경찰에 의해

추방명령을 받고 1940년, 미국 플로리다로 귀향하게 됨. 해방 후 1949년에 대시 내한(來韓)하여

성경구락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1965년, 대통령으로부터 교육문화공로 훈장을 받게 됨)에게

말하였다.





“신학교를 개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학생들이 모여 계속 공부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권세열 선교사는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합니다. 지금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를 하자면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가 있고 학생이 있으면 어디서든지 가능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하신학교가 개강되었다. 학생은 1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 신학교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끈질긴 고등계 형사들의 추적과 방해 때문이었다.





3. 평북 선천에서

김인희 전도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 전도사님 한 번 다녀가십시오. 평북 선천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입니다.”

이인재 전도사는 평북 선천으로 김인희 전도사를 찾아갔다. 그때가 1939년 11월이었다.

김인희 전도사집으로 갔더니 박신근 집사가 와 있었다. 박신근 집사는 김인희 전도사보다 한 살

아래로서 농사를 업(業)으로 하고 있었다.

철산에서 용산교회를 출석하며 집사로 봉사하였는데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서게 되자 이일로

인해 교회에서 집사직을 면직 당하게 되었고 교회 출석까지 불가능해지게 되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뒷날 평양 형무소까지 가게 되고 6년간 옥중 투쟁을 하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게 된 투철한

신앙인이었다.

세 사람은 더욱 결심을 굳히고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다음날 선천을 떠나올 때 김인희

전도사는 이인재 전도사에게 돈 4백원을 건네주었다.

“이 전도사. 이 돈을 신사참배 반대운동 하는데 사용하십시오. 경남에 가서 한상동 목사를 만나거든

이쪽 사정을 이야기하고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우리도 경남의 동지를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

“예, 감사합니다.”

이인재 전도사는 작별 인사를 하고 선천을 떠나면서 앞으로 얼마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4. 경남으로

평양으로 다시 돌아온 이인재 전도사는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1939년 12월 28일,

평양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탄다. 먼저 삼랑진역에서 내려 밀양 마산리로 갔다. 한상동 목사

(밀양마산교회 제9대 담임목사, 1939년 부임. 시무 중 1940년 7월 3일, 신사참배 반대운동 주동자

체포됨)를 만난 것은 12월 29일 오후였다.

밀양 마산교회도 평안한 안식처는 못되었다. 수시로 고등계 형사가 찾아와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평북지방 성도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교회들은 이미

신사참배의 시험에 빠졌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불참하기로 작정한 교인들은 자신의

가정에서 예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그리고 활발히 산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5개항의 표준을 세워서 그것에 따르고 있다는 소식 또한 전달하였다.

1)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원을 노회 내의 각종 부서에 참석시키지 못하게 하고 각 교회로 하여금

노회 부담금을 내지 못하게 한다.

2) 신사참배 불참자들로 새로운 노회를 조직한다.

3)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는다.

4) 신사참배 불참배 동지들의 상호협조를 도모한다.

5) 가정예배 또는 가정 기도회를 개최하여 일인 면담, 개인전도 등을 수단으로 신사불참배 성도들이

앞장 서서 신사참배 교인들을 설득한다.

이상의 내용을 전하고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에게 돈 2백원을 전하였다.

저녁무렵 한상동 목사와 함께 이인재 전도사는 이웃에 있는 밀양 상남면의 예림교회에 윤술용 목사

(밀양마산교회 제7대 담임 교역자, 1935년~1938년 시무)를 찾아갔다.

한상동 목사가 윤술용 목사에게 말하였다.

“여기서 이야기하기 곤란하니 부산으로 내려갑시다.”

한상동 목사, 윤술용 목사, 이인재 전도사 세 사람은 이날 저녁 부산 동래로 갔다. 동래 온천에 있는

화성여관에 들어갔다.

이날 밤 세 사람은 밤이 기울도록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다음 날인 12월 30일, 날씨가 몹시 추웠다. 셋은 부산 초읍리에 있는 조수옥 전도사 집을 찾아갔다.

그 곳에는 백영옥 전도사도 있었다.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날 한상동 목사는 가정예배를 인도하면서 이렇게 권면하였다.

“지금 당국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하면서 마음대로 예배하고 종교생활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신사참배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아주 악한 일입니다. 신사참배를 시행하는 교회는 마치 무너져 가는 건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들은 여하한 고난에 당면하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바른 진리를 위한 활동해 나가야

합니다. 두 분 전도사님은 여성들이지만 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협력을

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날 이후 이들은 순회를 다니며 만나는 교인들에게 신사참배 불참을 이야기하였고 밀양지방과

동래지방을 순회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 전도사(8)



8. 1940년, 경남지방 순회와 평양에서의 신사참





올해는 우리나라가 해방 60주년, 을사조약 100주년, 강제병합 95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욱이 가해자인 일본이 무자비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잘못된 과거사를

정당화하면서 급속히 우경화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과거 우리에게 행한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새로운 역사인식을 가지도록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제잔재청산을 위한 각종 시도는 바람직한

역사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명록 발간이라든지 시민단체나 대학 학생회 등이 일제잔재청산위원회를

발족하고 청산작업을 서두르고 있는 점 등은 너무도 바람직한 역사작업이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어 있었다.

과거는 하찮은 것, 또는 현실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굴절되는 일도 많았다. 물론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올바른 현실을 만드는 일은 최초의 원인부터 밝혀내고 고쳐나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특히 과거의 것들이 고쳐지지 않고 현실에 남아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밀양신문을

통하여 일제말 기독교를 중심으로 펼쳤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한 고찰은 무척 유익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여덟 번 째 기고문이다.





1. 1939년 12월, 밀양으로... 부산으로...

1939년 12월 28일.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고 삼랑진에 내려 밀양으로 갔다.

거기서 한상동 목사(韓相東, 1901.밀양 마산리교회 목사)를 만났다(12월 29일, 오후). 이인재

전도사는 평북지방 성도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소개해주고 5개의 표준을 세워서 신사참배 불참

운동을 전개하며 그것에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밀양 마산리교회도 고등계 형사들이 찾아와 수시로 괴롭히기 때문에 평안한 안식처가 되지는

못하였다.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그리고 윤술용 목사(尹述龍, 밀양 마산리교회 제7대 담임

교역자, 1935년~1938년 시무, 1939년 12월 당시는 밀양 예림리교회 목사였다)는 이날 저녁 부산

동래로 가서 동래 온천에 있는 화성여관에서 하루를 지냈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30일, 셋은 부산

초읍리에 있는 조수옥 전도사(趙壽玉, 경남 하동 태생, 당 32세,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형무소에서

옥고 치룸, 해방 후 고아들을 돌보며 한평생을 살았서 그녀를 ‘고아의 어머니’라 부름)와 백영옥

전도사(白英玉, 밀양마산교회 제6대 담임교역자(1933년)였던 차재선 전도사의 부인임, 차재선

전도사는 1933년 10월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다. 이후

백영옥 사모는 신학(神學)을 하게 되고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다)를 만났다. 함께 예배를 드린

후에 윤술용 목사는 집으로 돌아가고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는 선교사들 집을 찾아갔다.





부산부 좌천정에 살고 있는 데이지 호킹 선교사(호주선교회 소속 영국인 여선교사, 허데시(許大是))

와 추루징거 선교사(M. Trudinger, 秋瑪田, 호주선교부 소속 영국인 선교사, 쓰루징가 혹은

트루딩거라고도 불리움), 를 방문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개의 소식을 전하고 힘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2월 31일, 부산 초량에서 박신출 집사(朴新出)와 초량교회 서영수 집사(徐永守)를 만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도록 권면 하였다.





2. 1940년 1월, 칠일간 경남지방 순회

1940년 1월 1일. 일본 사람들은 이날을 설날로 지내기 때문에 이 날의 거리는 한산했다. 집집마다

일장기(日章旗)가 휘날렸다.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를 따라 마산으로 갔다. 마산 제비산에 소재해 있는 태매시 선교사

(원래 이름은 테이트이다. 한국명은 ‘태매시(太邁是’)이며 지트 혹은 지도라고도 불리웠다)의 댁을

방문하였다. 태매시 선교사는 영국 선교사였다. 여성으로 조선 교회 여성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준

귀한 믿음의 선교사였다. 태매시 선교사댁에는 최덕지 전도사(崔德支, 1901.6.25~1956.5.13, 경남

통영 태생,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네 번에 걸친 구속과 많은 고문을 받았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후 해방과 함께 출옥됨, 후에 재건교회를 창설했고 증경총회장을 지낸 인물임)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최전도사는 통영지방에서 신사참배 불참운동을 하고 있는 굳은 믿음의

여전도사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를 이들에게 소개시키고 평북에서의 신사참배 불참운동의 목적과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태매시 선교사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최덕지 전도사에게 말하였다.

“전도사님, 우리는 신앙의 동지를 많이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바쳐지는 머릿돌이 되어야

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인재 전도사는 최덕지 전도사에게 말하였다.

“최 전도사님, 경남 일원에 산재한 부인동지들을 설득시켜 신사참배 불참운동에 협조하도록 힘써

주십시오. 경남 여전도회가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1월 2일.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진주로 갔다. 먼저 찾아간 곳은 서덕기(스탓기로도

불리운다. 한국명으로 徐德基이다. 진주 봉래정에 거주하고 있었음) 선교사댁이었다. 그는 영국인

선교사였다. 그에게도 평북지방의 상황을 설명하고 경남에서의 반대운동 전개를 촉구하였다.

한상동 목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선교사님, 경남에도 조직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해나가야 합니다. 금번에 이인재 전도사가

평양에서 왔기로 나도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해야 하기에 경남

지역 일대를 지금 순회하고 있습니다. 부산과 마산을 돌아 진주에 왔습니다. 거창에도 갈 것입니다.”

“수고가 많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서덕기 선교사는 기도해주며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는 서덕기 선교사댁에서 나와 봉래정에 있는 김주학(金株鶴)의 집을

찾아갔다. 김주학은 미순회 서기였다.





마침 거기에는 최상림 목사(崔尙林,, ?~1945.6, 경남 동래 태생, 남해에서 목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심)가 와 있었다. 최상림 목사는 한상동 목사보다 선배로

한목사가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를 최상림 목사에게 소개하고 신사참배 불참운동의 목적과 상황을

설명하고 협력방침을 요망하였다. 이렇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신앙의 동지들이 서로 만나 피차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1월 3일. 이인재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봉래정에 있는 황원택 집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

이현속 전도사(李鉉續, 1896.12.12~1945.5.23. 경남 함안 태생, 당 46세, 하동, 사천, 진주에서

목회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교했다)를 만났다. 이현속 전도사는 장로였지만

진주 베돈 병원의 서기 겸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베돈 병원은 호주 선교부에서 운명하는

병원이었다.

황원택과 이현속 전도사에게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동향을 설명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함께 보조를 맞추자고 권면하였다.

그날 오후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는 거창으로 갔다. 거창은 진주에서 먼 거리였다.

거창교회에서 주남선 목사(朱南善, 1888.9.14~1951.3.23, 경남 거창 태생, 당 58세, 거창에서

목회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함)를 만나 하룻밤을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이인재 전도사가 함께 보내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에 이야기하였다.

“현재 우리 조선교회는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용납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가

부패되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온다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그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여야 하겠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하기로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신사참배의

우상숭배에 넘어가지 않도록 투쟁합시다.”

주남선 목사는 조용히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고난의 언덕을 넘어선듯 초롱초롱 빛이 났다.





1월 4일. 이인재 전도사는 거창을 떠나면서 주남선 목사에게 금 일백원을 건네주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비로 사용하십시오.” 이인재 전도사는 주남선 목사의 손을 굳게 잡았다.

주의 신실한 세 종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찬바람이 거창 시내를 쌩쌩거리며

지나 다녔다.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밀양 예림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이틀을 지내고 1월 7일,

평양으로 향하였다.





3. 평양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1940년 1월 7일, 밀양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하면서 이인재 전도사는 계속 기도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부 장별리에 있는 채정민 목사(蔡廷敏, 1872.4.28~1953.3.31.

평북 개천 태생, 당 74세, 곡산, 수안, 중화에서 목회함,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형무소서 옥고를

치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채정민 목사와 최봉석 목사, 김의창 목사를 만나 경남지방에서

있었던 신사참배반대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향후 활동방침 등에 대해서 깊은 협의를 하였다.

“경남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직접 찾아다니며 비밀 연락을 하고, 또한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신사참배가 어떤 죄인가를 깨우쳐 줘야 합니다”

이인재 전도사의 말에 채정민 목사는

“옳아요.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월 9일, 평양의 기후는 몹시도 차가웠다. 입김마저 얼어붙을 정도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옷을 겹겹이 겹쳐 입고 길을 나섰다. 이광록 집사(李光祿, 평북 의주 태생, 당

39세,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광록 집사는 평북 의주사람으로

유년시절 서당에서 3년간 한학을 수학하고 농사에 종사하다가 청년시절부터 매약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17살 때, 폐결핵을 앓아 어려움을 겪던 중 복음을 받아 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그의 신앙은

성경적이었고 건전하였다. 신사참배 문제가 생겨나자 극히 반대하는 입장에서 열렬하였다.

“이집사님,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신앙의 동지들에게 서로 연락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적극 펼쳐나가야 합니다.”

이광록 집사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야지요.”

“갑시다. 안이숙 선생을 만나 봅시다. 그도 우리와 뜻이 같은 사람이니 서로 힘을 합하여야

하겠어요.”

이인재와 이광록은 평양부 상수리에 살고 있는 안이숙(安利淑, 1908.6.24.~1997. 10.19, 평북 박천

태생, 신사참배 거부로 6년 옥고를 치른 후 8.15 광복과 함께 석방되었다. ‘살아있는 순교자’로

불리운다)의 집을 찾아갔다.

“안선생, 열심을 내시오. 경남과 평북 지방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되고

있습니다.”

안이숙은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나서서 힘껏 반대운동을 펼쳐나가도록 합시다.”

이인재는 한상동 목사에게서 받아온 돈 삼백원을 운동비로 사용하라고 내어 주었다.

1월 20일. 이인재 전도사는 혼자서 방계성 전도사(方啓聖, 경남 부산 태생, 당 58세,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를 찾아갔다. 방계성 전도사를 만나 경남과 이북의 각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 상황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이 두 사람은 그날 밤 늦게까지 평양지방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1월 26일. 다시 이광록 집사를 만났다. 둘은 함께 평양 시내에 살고 있는 차용서(車用瑞)의 집을

찾아갔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해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힘이 되기를 약속하였다.

1월 28일. 이인재 전도사는 평남 대동군에 있는 가현교회에 갔다. 이날 이 교회에는 교인 50여명이

성도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곳에 이인재 전도사가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신부”였다.

“신부가 정조를 지키기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정결한 여성으로 한 남편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기독신자들은 신앙의 정조를 지켜야 합니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요, 영적 신랑되신 예수님을 배신하고 마귀에게 정조를 빼앗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신앙의 정조를 깨뜨리지 않고 지킬 수 있도록 각별히 주의하여야 합니다.”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 전도사(9)



8. 1940년, 경남지방 순회와 평양에서의 신사참





올해는 우리나라가 해방 60주년, 을사조약 100주년, 강제병합 95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욱이 가해자인 일본이 무자비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잘못된 과거사를

정당화하면서 급속히 우경화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과거 우리에게 행한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새로운 역사인식을 가지도록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제잔재청산을 위한 각종 시도는 바람직한

역사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명록 발간이라든지 시민단체나 대학 학생회 등이 일제잔재청산위원회를

발족하고 청산작업을 서두르고 있는 점 등은 너무도 바람직한 역사작업이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어 있었다.

과거는 하찮은 것, 또는 현실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굴절되는 일도 많았다. 물론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올바른 현실을 만드는 일은 최초의 원인부터 밝혀내고 고쳐나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특히 과거의 것들이 고쳐지지 않고 현실에 남아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밀양신문을

통하여 일제말 기독교를 중심으로 펼쳤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한 고찰은 무척 유익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여덟 번 째 기고문이다.





1. 1939년 12월, 밀양으로... 부산으로...

1939년 12월 28일.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고 삼랑진에 내려 밀양으로 갔다.

거기서 한상동 목사(韓相東, 1901.밀양 마산리교회 목사)를 만났다(12월 29일, 오후). 이인재

전도사는 평북지방 성도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소개해주고 5개의 표준을 세워서 신사참배 불참

운동을 전개하며 그것에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밀양 마산리교회도 고등계 형사들이 찾아와 수시로 괴롭히기 때문에 평안한 안식처가 되지는

못하였다.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그리고 윤술용 목사(尹述龍, 밀양 마산리교회 제7대 담임

교역자, 1935년~1938년 시무, 1939년 12월 당시는 밀양 예림리교회 목사였다)는 이날 저녁 부산

동래로 가서 동래 온천에 있는 화성여관에서 하루를 지냈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30일, 셋은 부산

초읍리에 있는 조수옥 전도사(趙壽玉, 경남 하동 태생, 당 32세,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형무소에서

옥고 치룸, 해방 후 고아들을 돌보며 한평생을 살았서 그녀를 ‘고아의 어머니’라 부름)와 백영옥

전도사(白英玉, 밀양마산교회 제6대 담임교역자(1933년)였던 차재선 전도사의 부인임, 차재선

전도사는 1933년 10월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다. 이후

백영옥 사모는 신학(神學)을 하게 되고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다)를 만났다. 함께 예배를 드린

후에 윤술용 목사는 집으로 돌아가고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는 선교사들 집을 찾아갔다.





부산부 좌천정에 살고 있는 데이지 호킹 선교사(호주선교회 소속 영국인 여선교사, 허데시(許大是))

와 추루징거 선교사(M. Trudinger, 秋瑪田, 호주선교부 소속 영국인 선교사, 쓰루징가 혹은

트루딩거라고도 불리움), 를 방문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개의 소식을 전하고 힘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2월 31일, 부산 초량에서 박신출 집사(朴新出)와 초량교회 서영수 집사(徐永守)를 만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도록 권면 하였다.





2. 1940년 1월, 칠일간 경남지방 순회

1940년 1월 1일. 일본 사람들은 이날을 설날로 지내기 때문에 이 날의 거리는 한산했다. 집집마다

일장기(日章旗)가 휘날렸다.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를 따라 마산으로 갔다. 마산 제비산에 소재해 있는 태매시 선교사

(원래 이름은 테이트이다. 한국명은 ‘태매시(太邁是’)이며 지트 혹은 지도라고도 불리웠다)의 댁을

방문하였다. 태매시 선교사는 영국 선교사였다. 여성으로 조선 교회 여성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준

귀한 믿음의 선교사였다. 태매시 선교사댁에는 최덕지 전도사(崔德支, 1901.6.25~1956.5.13, 경남

통영 태생,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네 번에 걸친 구속과 많은 고문을 받았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후 해방과 함께 출옥됨, 후에 재건교회를 창설했고 증경총회장을 지낸 인물임)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최전도사는 통영지방에서 신사참배 불참운동을 하고 있는 굳은 믿음의

여전도사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를 이들에게 소개시키고 평북에서의 신사참배 불참운동의 목적과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태매시 선교사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최덕지 전도사에게 말하였다.

“전도사님, 우리는 신앙의 동지를 많이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바쳐지는 머릿돌이 되어야

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인재 전도사는 최덕지 전도사에게 말하였다.

“최 전도사님, 경남 일원에 산재한 부인동지들을 설득시켜 신사참배 불참운동에 협조하도록 힘써

주십시오. 경남 여전도회가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1월 2일.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진주로 갔다. 먼저 찾아간 곳은 서덕기(스탓기로도

불리운다. 한국명으로 徐德基이다. 진주 봉래정에 거주하고 있었음) 선교사댁이었다. 그는 영국인

선교사였다. 그에게도 평북지방의 상황을 설명하고 경남에서의 반대운동 전개를 촉구하였다.

한상동 목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선교사님, 경남에도 조직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해나가야 합니다. 금번에 이인재 전도사가

평양에서 왔기로 나도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해야 하기에 경남

지역 일대를 지금 순회하고 있습니다. 부산과 마산을 돌아 진주에 왔습니다. 거창에도 갈 것입니다.”

“수고가 많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서덕기 선교사는 기도해주며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는 서덕기 선교사댁에서 나와 봉래정에 있는 김주학(金株鶴)의 집을

찾아갔다. 김주학은 미순회 서기였다.





마침 거기에는 최상림 목사(崔尙林,, ?~1945.6, 경남 동래 태생, 남해에서 목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심)가 와 있었다. 최상림 목사는 한상동 목사보다 선배로

한목사가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를 최상림 목사에게 소개하고 신사참배 불참운동의 목적과 상황을

설명하고 협력방침을 요망하였다. 이렇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신앙의 동지들이 서로 만나 피차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1월 3일. 이인재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봉래정에 있는 황원택 집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

이현속 전도사(李鉉續, 1896.12.12~1945.5.23. 경남 함안 태생, 당 46세, 하동, 사천, 진주에서

목회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교했다)를 만났다. 이현속 전도사는 장로였지만

진주 베돈 병원의 서기 겸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베돈 병원은 호주 선교부에서 운명하는

병원이었다.

황원택과 이현속 전도사에게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동향을 설명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함께 보조를 맞추자고 권면하였다.

그날 오후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는 거창으로 갔다. 거창은 진주에서 먼 거리였다.

거창교회에서 주남선 목사(朱南善, 1888.9.14~1951.3.23, 경남 거창 태생, 당 58세, 거창에서

목회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함)를 만나 하룻밤을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이인재 전도사가 함께 보내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에 이야기하였다.

“현재 우리 조선교회는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용납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가

부패되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온다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그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여야 하겠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하기로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신사참배의

우상숭배에 넘어가지 않도록 투쟁합시다.”

주남선 목사는 조용히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고난의 언덕을 넘어선듯 초롱초롱 빛이 났다.





1월 4일. 이인재 전도사는 거창을 떠나면서 주남선 목사에게 금 일백원을 건네주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비로 사용하십시오.” 이인재 전도사는 주남선 목사의 손을 굳게 잡았다.

주의 신실한 세 종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찬바람이 거창 시내를 쌩쌩거리며

지나 다녔다.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밀양 예림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이틀을 지내고 1월 7일,

평양으로 향하였다.





3. 평양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1940년 1월 7일, 밀양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하면서 이인재 전도사는 계속 기도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부 장별리에 있는 채정민 목사(蔡廷敏, 1872.4.28~1953.3.31.

평북 개천 태생, 당 74세, 곡산, 수안, 중화에서 목회함,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형무소서 옥고를

치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채정민 목사와 최봉석 목사, 김의창 목사를 만나 경남지방에서

있었던 신사참배반대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향후 활동방침 등에 대해서 깊은 협의를 하였다.

“경남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직접 찾아다니며 비밀 연락을 하고, 또한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신사참배가 어떤 죄인가를 깨우쳐 줘야 합니다”

이인재 전도사의 말에 채정민 목사는

“옳아요.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월 9일, 평양의 기후는 몹시도 차가웠다. 입김마저 얼어붙을 정도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옷을 겹겹이 겹쳐 입고 길을 나섰다. 이광록 집사(李光祿, 평북 의주 태생, 당

39세,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광록 집사는 평북 의주사람으로

유년시절 서당에서 3년간 한학을 수학하고 농사에 종사하다가 청년시절부터 매약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17살 때, 폐결핵을 앓아 어려움을 겪던 중 복음을 받아 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그의 신앙은

성경적이었고 건전하였다. 신사참배 문제가 생겨나자 극히 반대하는 입장에서 열렬하였다.

“이집사님,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신앙의 동지들에게 서로 연락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적극 펼쳐나가야 합니다.”

이광록 집사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야지요.”

“갑시다. 안이숙 선생을 만나 봅시다. 그도 우리와 뜻이 같은 사람이니 서로 힘을 합하여야

하겠어요.”

이인재와 이광록은 평양부 상수리에 살고 있는 안이숙(安利淑, 1908.6.24.~1997. 10.19, 평북 박천

태생, 신사참배 거부로 6년 옥고를 치른 후 8.15 광복과 함께 석방되었다. ‘살아있는 순교자’로

불리운다)의 집을 찾아갔다.

“안선생, 열심을 내시오. 경남과 평북 지방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되고

있습니다.”

안이숙은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나서서 힘껏 반대운동을 펼쳐나가도록 합시다.”

이인재는 한상동 목사에게서 받아온 돈 삼백원을 운동비로 사용하라고 내어 주었다.

1월 20일. 이인재 전도사는 혼자서 방계성 전도사(方啓聖, 경남 부산 태생, 당 58세,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를 찾아갔다. 방계성 전도사를 만나 경남과 이북의 각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 상황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이 두 사람은 그날 밤 늦게까지 평양지방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1월 26일. 다시 이광록 집사를 만났다. 둘은 함께 평양 시내에 살고 있는 차용서(車用瑞)의 집을

찾아갔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해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힘이 되기를 약속하였다.

1월 28일. 이인재 전도사는 평남 대동군에 있는 가현교회에 갔다. 이날 이 교회에는 교인 50여명이

성도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곳에 이인재 전도사가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신부”였다.

“신부가 정조를 지키기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정결한 여성으로 한 남편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기독신자들은 신앙의 정조를 지켜야 합니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요, 영적 신랑되신 예수님을 배신하고 마귀에게 정조를 빼앗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신앙의 정조를 깨뜨리지 않고 지킬 수 있도록 각별히 주의하여야 합니다.”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10)



1940년 2~3월 평양에서





이 땅의 모든 등불이 꺼져갈 때, 역사의 흐름이 강자(强者)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때, 희망의 그루터기가 있었다. 일제말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조선민족의 말살을 꾀하던 일제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다들 숨을 죽이고

자신의 생존만을 확인하며 살아갔던 그런 시절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어려운 때에도 역사의

파숫군으로 잠든 시대를 일깨우며 민족의 생사의 갈림길에서 우리 민족의 살 길을 찾아나섰던

이인재 전도사는 그야말로 귀한 선각자(先覺者)가 아닐 수 없다. 반딧불은 미력한 존재이지만

생명력이 있기에 어둠을 밝히듯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도 역사의 어둠이 짙을 때에 그 어둠을

밝히는 빛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1. 1940년 2월, 평양에서...



2월 4일.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 남신리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남신리 교회에는 약 80명

정도의 신도들이 모여있었다. 이날 이인재 전도사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배우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향, 친척의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백세에 얻은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였을 때 그는 거절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순종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사는 우상입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입니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무서운 죄입니다. 절대로 신사참배를

하여서는 안됩니다.”

그의 설교에는 힘이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성도들은 이인재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결단코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다.



2월 7일, 수요일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이광록 집사(李光祿, 평북 의주 태생, 당 39세,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와 함께 평양 주기철 목사의 사택으로 오정모 집사(주기철 목사 부인, 1935년

11월에 주기철 목사와 결혼, 1947년 1월 27일 별세)를 찾아갔다. 주 목사는 이미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산정현 교회에는 담임 목사가 공석(空席)인 상태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오정모 집사에게 말하였다.

“사모님, 지금 평양노회가 산정현 교회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산정현 교회가 크기 때문에 많은

부담금을 요구하고 있는데 결코 노회부담금을 내면 안됩니다. 노회 임원들이 모두 친일파

목사들이고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이라하여 시행케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노회를 도와야 합니까?”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산정현 교회는 노회에 부담금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켜서 승리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때의 일이 중요한 것은 이 만남을 계기로 당시 주기철 목사를 파면하고 산정현 교회에 수습위원을

파송해서 교회를 접수하려는 평양노회에 대한 산정현교회의 부담금 납입 거부운동 방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939년 12월 29일에 밀양에서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등이 합의한 ‘신사참배 반대운동’ 5개 조항 중 1, 2항에 해당하는 ‘노회불복종운동’의 실천이었다.



2월 18일, 이 주일부터 이인재 전도사는 평남 강서군 초리면에 있는 이노리 교회에서 임시교역자로

섬기게 되었다. 이노리 교회는 그동안 교역자가 없는 상태였고 계속 전도사를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인재 전도사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신학생이고 신앙이 좋은 전도사임을 알게 된

이노리 교회에서는 이인재 전도사를 시무교역자로 청빙한 것이었다. 교인은 약 80명 정도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부임 첫주일 설교에

“신사(神祠)는 우상입니다. 조선교회는 벧엘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습니다. 모두가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들로 신사참배는

명백히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조선교회가 우상화되는 것을 우리는 막아야

합니다.”



2월 25일, 주일 예배를 마치고 이인재 전도사는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때 한일웅(韓一雄)

집사가 이 전도사에게

“전도사님, 오늘 우리집에서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집으로 오세요.”

“감사합니다.”

이전도사는 반갑게 말하였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대화를 나누는데 벽에 걸어둔 시계가 두 시를 치는 것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아무런 생각없이 소리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시계가 걸려있는 벽 구석 쪽에 신궁대마(神宮大麻: 가미다나에 넣어두는 일종의 신주 내지

부적, 일본 총독부가 신사를 만들어 참배케 하는 것도 부족해서 각 학교에는 ‘호안덴, 奉安殿’을

세워 참배케 하였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라는 가정 신단(神壇)을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이인재 전도사는 한집사에게 물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당황한 한집사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아, 예, 그것이 일본 귀신패 아닙니까?”

“왜 저런 것을 벽에다 붙여 놓았습니까?”

“예, 저... 반장이 무서워서 그대로 붙여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절하거나 빌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우상을 붙여 놓고 하나님께 어찌 기도할 수 있습니까?” 반장이

하나님보다도 두렵단 말입니까? 기독신자가 저런 것을 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는 일입니다. 당장에 떼어 버리세요. 저런걸 담대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저게 무슨 망령된 짓입니까?”

이인재 전도사는 무척 화난 소리로 말하였다.

한집사는 일어나 그것을 떼어버렸다. 한집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2. 1940년 3월, 평양에서...



3월 5일, 이인재 전도사는 자신의 방에서 이광록과 함께 김지성, 최성봉 목사를 만나고

경남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황을 설명하며 다 함께 향후 더욱 힘써

평양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쳐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3월, 어느 주일 밤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산정현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날 밤 설교제목은 “벧엘로 가지말라”였다.

그는 이날 밤 설교에서 신사참배 불참에 대하여 강하게 말하였다.

이날 밤, 그 예배 자리에는 평양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부장 황씨가 앉아 있었다.

예배 후 황부장은 이인재 전도사를 만나 충고하였다.

“재미없어! 두고봐. 앞으로는 설교도 할 수 없을거야.”



3월 8일, 평양부에 거주하는 미국인 선교사 함일돈 선교사(咸日暾, Floyd E. Hamilton)의 집을

방문하였다. 함일돈 선교사는 이인재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운동 자금으로 일백원을 건네

주었다.



3월 15일, 이인재 전도사는 이광록과 함께 경창리에 있던 안이숙(安利淑)의 방을 방문하였다. 당시

안이숙의 방은 신사참배 반대 운동가들의 주요 집회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선천 보성여학교 교사

출신인 안이숙은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1939년 1월 학교를 사직하고 평양으로 거처를 옮겨

‘지하교회’ 활동에 참여했다. 거기서 이인재 전도사는 경남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사정을 알리고 이들과 함께 운동자금 모금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안이숙으로부터 1939년 1월, 박관준 장로(朴寬俊, 1875. 4. 13~1945. 3.13, 평북 영변 태생,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그는 ‘한국의 엘리야’로 불리운다)와 함께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본 각료와

위정자들과 군인들을 만나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항의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 망한다고 경고한 일,

1939년 2월 5일, 전임 조선총독 우카키와 문무대신 아라키(?木) 등을 방문해서 신사참배를 강요의

부당성 등에 대해 항변한 일 등을 들을 수 있었다.



3월 17일, 이인재 전도사는 이노리교회에서 시무사면을 당하였다. 평양 종로경찰서에서 강제

추방을 한 것이었다.



3월 21일, 봄이 오고 있었다. 혹독하게 춥던 그해 겨울의 두꺼운 껍질들이 벗겨지고 있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다시 밀양으로 내려갔다. 상남면 마산리로 가서 한상동 목사를 만났다. 이날 밤 이인재는

한목사에게 만주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황을 보고 하였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가 이인재 전도사(11)



1940년 3월 다시 경남지방으로...다시 평양으로





3월 21일, 봄이 오고 있었다. 혹독하게 춥던 그해 겨울의 두꺼운 껍질들도 함께 벗겨져가고 있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다시 밀양으로 내려갔다. 상남면 마산리로 가서 한상동 목사를 만났다. 이날 밤

이인재는 한목사에게 만주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황을 보고

하였다.







만주에서는 한부선(韓富善, 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반대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일들의 근황에 대해 들려주었고, 특히 신사참배 반대 이유서를 인쇄하여

배포하며 신사 참배 반대운동을 펼치는 일에 대해서 상세히 보고하였다. 한편 평양에서는 주로

산정현 교회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진행 중이라는 것, 그리고 평양에 거주하고 있던

함일돈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운동 기금으로 일백원을 주었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 돈

일백원을 한목사 앞에 내어 놓았다.





한상동 목사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인재 전도사를 칭찬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님,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 운동자금이 생겼으니 경남지방 운동을 다시 합시다.”







3월 23일, 이인재 전도사는 한목사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좌천정(좌천동)에 살고 있는

호주선교부 여 선교사 허대시(許大是, D. Hocking)를 방문하였다. 북쪽지방과 만주 등지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상황을 보고하고 경남에서의 반대운동 방법을 설명하였다.







3월 24일, 영주정(영주동)에 거주하는 손명복 전도사를 찾아갔다. 손명복 전도사(孫明福, 경남 마산

태생,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 1973년 고신총회장 역임)는 산리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이인재는 손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함께 운동할

것을 동의 받았다.







3월 25일, 영국인 태매시(太邁是, 원래 이름은 테이트이다. 호주장로회 소속 선교사이며 한국명은

‘태매시’이며 ‘지트’ 혹은 ‘지도’라고도 불리웠다) 선교사를 방문하였다. 이곳에는 최덕지 전도사와

함께 여성으로 신사불참배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던 김묘년(金妙年), 박경애(朴敬愛) 등도 와

있었다. 여기서 이들은 비밀히 기도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인재 전도사는 힘써 동지들이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 이 민족을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할

것에 대해 강조하였다.

“우리들이 일치단결해서 하나가 되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치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의 파수꾼이 되어 싸웠던 것처럼 우리도

조선의 파순꾼이 되어 이 어려운 때 우상숭배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키나갑시다. 그럴려면 우리의

믿음을 신실하게 고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신자로서의 책임을 다합시다.”







3월 27일,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진주로 갔다. 봉래정(봉래동)에 사는 황성호(黃聖

浩, 27세, 황원택의 아우) 전도사의 집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이현속 전도사와 주남선 목사(朱南善,

1888.9.14~1951.3.23, 당 58세, 경남 거창 태생, 거창에서 목회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룸,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함)를 만났다. 그리고 함께 기도회를 가지고 서로 격려하였다.

주님선 목사가 거창 경찰서에서 당한 고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향후 어떠한 탄압과 핍박을 받더라도

믿음으로 맞서 싸워 신사 참배반대운동을 펼쳐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함께

서덕기 선교사(J.M. Stuckey, 徐德基. 진주 봉래정에 거주하고 있었음, 지난 1940년 1월 2일,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와 이미 한차례 만난 적이 있음)의 집을 방문하였다. 앞으로 펼쳐나갈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활동방향에 대하여 서덕기 선교사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3월 28일, 황성호의 집에서 주남선 목사와 작별하였다. 이때 이인재 전도사는 주남선 목사에게

40원을 신사참배 반대운동 자금으로 건네주었다. 그리고 진부 봉래정 배돈병원 부근의 노상에서

최덕지 전도사 (崔德支, 이미 1월 1일, 이인재 전도사, 한상동 목사와 이미 만난 적이 있음)를 만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자금으로 40원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는 함께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로 돌아와 한상동 목사의

자택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확산방안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에게 말하였다. “이전도사님,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본인 측에서 볼 땐 반국가적 항일 운동으로 간주될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경남지방이나 평양지방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전국적으로 실시하여야 합니다. 목적달성을 위하여 전국적인 조직망이 필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지금 주기철 목사가 검속되어 유치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아마 몸이 쇠약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될 것 같습니다. 그때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의논함이

어떻겠습니까?”

“그것 좋은 생각이오”

“그럼 제가 평양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주기철 목사님이 석방되면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평남북 지방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에게도 연락하여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합시다.”

“좋아요. 그럼 꼭 연락하시오.”







3월 29일, 이인재 전도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로 경남지방 동지들과

의견을 모은 후 한상동 목사와 작별하고 평양으로 올라갔다.



2. 또 다시 평양으로...



당시 밀양과 평양을 왕래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요즈음처럼 고속철도 K.T.X를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평양에서 서울까지, 서울에서 밀양으로... 그렇게 쉽게 오갈 수 있는 길이 결코

아니었다. 이인재 전도사의 여정은 갖가지 장애물을 피해가야 하는 그야말로 험난함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재 전도사는 사명감에 젖어 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또 다시 평양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평양 귀환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운동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4월 20일과 21일의 회합(會合)이다. 이틀 동안 장소를 바꿔가며 모두 네

차례에 걸친 모임을 가졌는데 채정민 목사, 최봉석 목사, 오윤선 전도사, 김인희 전도사, 김지성,

김의창 목사 등 기존의 평양의 지도자들 외에 만주지방에서 온 안동의 김형락과 봉천의 박의흠

전도사, 평북 선천의 김인희 전도사, 경남의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이들이 함께 한

것이었다. 평양과 평북, 경남과 만주 지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지휘하는 지도급 인사들의

회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틀간의 회합에서



1) 각 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수감자 현황을 점검하고,



2) 향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특히 운동의 방향에 대해 4월 21일 오후 이인재 전도사의 방(폐교(廢校)된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모인 참석자들은 “신사불참배(神社不參拜) 교회급(敎會及) 신사불참배 노회(神社不參拜 老會) 재건

(再建)을 기(期)하고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기로 맹서(盟誓)”하였다. 이 같은 결의를

이끌어내는 데 경남지방 대표인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4월 20~21일 회합은 4월 22일에 열릴 회합의 준비 모임 정도였다. 4월 22일. 평양 장별리

채정민 목사 사택에서는 가장 많은 13명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향과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이 모임의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이 바로 주기철

목사였다.







이들은 방금 석방된 주기철 목사를 위로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주기철 목사의 정확한 석방일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평양지방법원 예심종결서에 나타난

한상동 목사 조서에 “동년(1940년) 4월 30일경 주기철의 석방의 보(報)를 듣고 내양(內壤)하여”

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1940년 4월 20일 이전에 석방되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아마도 한상동 목사가 평양에 들른 것도 주기철 목사의 석방 소식을 듣고서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인재 전도사가 밀양을 떠나오기 전 주기철 목사가 가석방이 되면 연락을 주기로 했고,

이때 평남북 지도자들과 함께 활동하는 동지들의 회합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12)



주기철 목사의 석방과 이인재 전도사의 체포





1.주기철 목사의 석방



1940년 4월 20일경, 주기철 목사(1897~1944)가 가석방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주목사의 석방은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에게는 큰 기쁨의 소식이었다. 시급히 연락이 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다.







경남 밀양 마산리에 있던 한상동 목사가 올라오고, 채정민 목사, 최봉석 목사, 오윤선 전도사,

김인희 전도사, 김지성, 김의창 목사 등 기존의 평양의 지도자들 외에 만주지방에서 온 안동의

김형락 영수와 봉천의 박의흠 전도사, 평북 선천의 김인희 전도사 등 평양에 거주하면서 평북과

만주지역 신사참배 반대 운동 세력과 연결을 맺고 있던 반대 운동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즉 평양과 평북, 경남과 만주 지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지휘하는 지도급

인사들의 회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4월 20일-21일. 이틀동안 장소를 바꿔가며 모두 네 차례에 걸친 모임을 가졌다.







4월 20일. 먼저 김지성의 방에서 이인재, 최봉석, 김의창, 박관준이 모여 박관준 장로의 반대운동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인재 전도사의 방에서 최봉석, 채정민, 오윤선, 박관준, 김지성이

모였는데, 여기서는 채정민 목사가 설교를 하였고, 그 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침과 방법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관준 장로는 “현 정부는 기독교에 대한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멀지

않아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다. 작년은 흉년이 들었다. 이와 같은 행위를 감행하는 한

흉년 혹은 불상사가 폭발할 것이다. 우리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배격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4월 21일, 이날도 두 차례나 장소를 바꿔가며 회합을 가졌었다. 낮에는 채정민 목사의 집에서

최봉석, 한상동, 오윤선, 이인재, 김지성, 김의창이 함께 모였다. 이 자리에서 한상동 목사가 설교를

하였다. 한목사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제목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일제로부터 어떠한

박해를 받더라도 끝까지 잘 참고, 신앙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설교를 하였다.



이날 밤에는 이인재 전도사의 방에서 한상동, 김형락, 박의흠, 김인희, 이인재가 모여서로 자신들이

살고있는 지방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상황과 일제의 검속 가운데 수감자 현황을 점검하고 향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4월 22일, 평양 장별리에 있는 채정민 목사 집에서 ‘주기철 목사 위문’을 명분으로 한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의 회합이 이루어졌다. 이날 여기에 모인 사람은 다음과 같다. 주기철 목사,

오정모 사모, 채정민 목사, 최봉석 목사, 한상동 목사, 오윤선 전도사, 방계성 전도사, 안이숙 선생,

이인재 전도사, 김의창 목사, 이광록 집사, 김인희 전도사, 박의흠 전도사, 김형락 영수 등이었다.

이들은 각 지역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현황을 점검한 후 반대운동 방향과 내용을 논의 하였는데,

이 때 한상동 목사가 경남지역의 운동을 예로 들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회와 신도들로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즉 신사참배를 수용한 노회의 지시에 불복하고 노회 상납금을

거부하는 ‘관계 단절’의 수준을 넘어 신사참배 거부 노선을 추구하는 ‘대항노회’를 조직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자는 제안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말하였다. “현 정부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습니다. 작년은 흉년으로 벼를 많이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정부가 이런 망령된

일을 강요하는 한 흉년 뿐만 아니라 갖가지 불상사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배격하여야 합니다.” 참석한 모두가 그 말에 동의하였다. 한목사는 다시 말하였다. “이제는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되 전국적으로 실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들끼리 노회를 조직하여 교회를 살펴야 합니다.”이 때 주기철목사가 나섰다. “그것은 안

됩니다. 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실시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면 피해가

막심하게 됩니다. 많은 희생자를 내어야 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반대하는 것으로 끝내고

전국적으로는 반대운동을 확산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노회조직도 불가한 것이

앞으로 반대하는 지도자는 다 검거되고 환난을 당할 것인데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주목사의 말도 타당성은 있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주목사의 말이 너무 소극적인 것 같아

반대의견을 강하게 내세웠다. “아닙니다. 반대운동을 전개하여야 합니다. 이미 반대운동은 실시되고

있습니다. 중단할 수 없습니다.” 박의흠 전도사가 한목사의 말에 동의하였다. “이미 우리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시작된 반대운동을 더 힘차게 전개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옥중에서 많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나온다 해도 결코 일제가 탄압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일으켰을 때 아무런 성과는 없이 희생만 클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였다. “지금 이 정도의 반대 운동에도 심하게 탄압을 가하는데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친다면 그 희생만 많아집니다. 우리 지도자들이 묵묵히 신사참배에 불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반대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지금 평양이나

평북지방에 대대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경남지방도 저와 이인재 전도사가 순회해

보니 호응이 좋았습니다. 이것을 전국적 조직으로 펼쳐나가야 합니다.” 한상동 목사가 열을 올리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활성화를 강조하였다. 이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쳐나가는 데는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주기철 목사가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주목사는 조선교회의 희생을 최소한

막아보자는 것이었고, 전국적 조직망으로 전개할 때 일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을 모조리 잡아들이면 그 희생은 실로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

목사는 이렇게 염려하였다. “무엇보다 우리 지도자들이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시험에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별 수 없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담대히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지도자들의

신앙문제입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고 질(質)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마귀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면 조선교회는 삽니다.” 비록 합의된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날

모임은 남북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의 첫 회합이었다는 점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방향을

‘어용 노회’ 해산과 ‘신 노회’ 결성을 목표로 한 동지 규합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1940년 4월 23일, 주기철 목사의 석방을 기하여 평양 채정민 목사의 집에서 회합하였던 신사참배

반대 운동 지도자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새 노회’ 건설을 목표로 ‘신앙 동지’를 포섭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의했다. 각 지역 대표자들은 흩어지기 전에 다시 한 번 모여 운동 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병희 집사 집에서 가진 이날 모임에서 한상동 목사, 이인재 전도사, 김형락 영수,

박의흠 전도사, 김인희 전도사 등은 궁성요배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김인희

전도사와 박의흠 전도사, 그리고 김형락 영수의 주장을 받아들여 “궁성요배는 우리들 같은 인간인

천황폐하를 고의로 신으로 경배하는 결과밖에 안되는 것이요 또한 성경이 금하는 우상숭배인고로

결단코 행해서는 안된다”고 결론을 내림으로 이날 이후 신사참배와 함께 궁성요배도 거부 대상이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13)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에 대한 일제 검속과 검찰 기소





1940년 5월 13일, 이인재 전도사는 폐교된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광주에서 올라온 강순명 목사와

만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평양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경찰서로 연행되어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이와 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일제의 검속은 9월 20일까지 전국에서 193명에 이르게 되었다.





1. 1940년 9월 20일, 일제의 검속

일본 경찰 당국은 1940년 9월 20일 실시한 ‘일제 검속’ 에서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 혐의자 193명을 체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경찰의 연행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시간(長時間)에 걸쳐서 그리고 지역별로 시차(時

差)를 두고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추론 할 수 있는 근거는 경찰측이 작성한 피의자

조서에 나타난 지도자들의 마지막 활약 시점이다. 피의자 조서에 의하면 채정민을 비롯한 평양

지도자들은 4월 22~24일 행적으로 끝나며, 이기선을 비롯한 평북의 지도자들은 5월 중순, 한상동을

비롯한 경남의 지도자들은 6월 말까지 황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평양의 오윤선 전도사의

경우엔 9월 11일 수안에 가서 설교한 상황까지 언급되고 있어 그는 다른 평양의 지도자들과는

별도로 9월 말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경찰 당국은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을 추적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래서 이 운동의 거점인 평양지역을 필두로 평북과 경남지역 운동 지도자들을

검거하였다. 즉 제일 먼저 1940년 5월에 채정민, 이인재, 이광록, 안이숙, 방계성, 김인희 등 평양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 6월에는 이기선, 고흥봉, 김형락, 서정환, 장두희 등 평북지방에서

활동하던 지도자들을, 그리고 7월에는 한상동, 주남선, 최덕지, 이현속 등 경남지방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다만 손명복 목사만은 평양의 오윤선 전도사의 경우와 같이 9월초에 검속되었다.



경찰 당국은 조사과정에서 그동안 이들 지도자들과 접촉했던 교회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 대한

신상 정보를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전국에 퍼져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 조직망(network)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일제의 검속은 총독부 경무국과 법무국,

고등법원 검사국의 합동작전으로 추진되어 마침내 9월 20일 새벽,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에 대한 일제 검속을 단행하게 되었고 193명이 체포되었다. 물론 이 숫자는

이미 5월부터 검속된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을 포함한 숫자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일제의

검속은 비밀 작전으로 단행되었기에 일반인들은 사건 이틀 후, <매일신보(每日新報)>

를 통해 기독교인들의 검거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번 지나사변 이후 각 종교단체에서는 신앙보국(信仰報國)으로 총후(銃後)의 정성을 다해왔는데

최근 기독교의 일부 신자 중에는 이 비상시국에 용납 못할 불순한 행동과 반국책적인 결사를

조직하는 혐의가 있어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각도 경찰부를 동원시켜 전조선적으로 다수한 교역자(敎

役者)들을 검거하고 취조를 개시하였다. 이 검거는 주로 장로교(長老敎) 계통의 교역자가 거의

전부인 모양인데 이십일 새벽 네 시를 기해서 일제히 검거를 착수한 것이며 한편으로 기사 게제를

금지하였던바 이제 이십일일 오후 별항과 같은 담화로서 이번 사건의 일단을 발표하였다.

(<매일신보>, 1940.9.22)】



이어 <매일신보>는 총독부 경무국 명의로 발표된 담화문을 소개하여 총독부 기관지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하였다.



【최근 조선 야소교도중의 일부 불량분자가 비밀결사(秘密結社)를 결성하고 이것을 모체로 해서

전조선적으로 불온한 획책을 하였을 뿐 아니라 천황(天皇)과 황대신궁(皇大神宮)에 대하여 불경한

언동 혹은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造言蜚語) 총후국민(銃後國民)에 대한 반관(反官)과 반국가적(反國

家的)인 기운을 만드는 등 악질적인 범죄를 감행한 것이 판명되었다. 그래서 시국하의 전시체제를

문란케 하는 이러한 비국민적 행동에 대해서는 총후치안확보를 생각해서 21일 전조선 일제히

검거를 단행한 것이다.



그러니 당국으로서는 이번 검거로 말미암아 종교의 선포(宣布), 기타 행위에 대하여 방해압박같은

것은 절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럼으로 야소교도들중의 불순한 분자를 일소함으로서 종래 조선에

특수한 경향하에 가져오던 야소교도로서 이번 일을 계기로 순화갱생(純化更生)하여써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격을 새롭게 하고 종교보국으로 매진하기를 절실히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매일신보>, 1940.9.22)】



경무국의 담화문을 요약하면, ‘불량한’ 일부 기독교인들이 ‘반국가적’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천황 및

신궁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였을 뿐 아니라 군사(전쟁) 관련 유언비어를 퍼뜨림으로 전시 총후보국(銃

後報國) 체제를 문란케 했다는 혐의로 ‘전조선’에 걸쳐 일제 검거를 단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기독교인 검거가 종교의 선포 행위에 대한 박해나 압박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이 사건이 ‘종교박해 사건’으로 해석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일제 당국이 총독부 차원에서 이 사건을 다룬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반국자적인

‘비밀결사’ 조직으로 연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2. 1941년 5월 15일, 검찰의 기소

1940년 9월 20일 ‘일제 검속’으로 전국에서 193명을 체포한 후 각 지역 경찰서별로 혐의자를 8개월

동안 기소조차 하지 않은 채 조사하였다. 혐의가 가볍거나 신사 참배를 수용하겠다고 서약한

피의자들을 석방하고 1941년 5월 15일, 남은 86명의 피의자 명단과 함께 사건 자체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때부터 사건은 평양지검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지방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들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이것은 1938년 이후 평양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 거점이 되었던 관계로 각

지역별로 진행되던 조사를 평양으로 통합하여 단일사건, 즉 전국 단위의 ‘비밀결사’ 조직

기도사건으로 처리하려는 경찰당국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그리하여 이기선 목사를 비롯한 고흥봉, 서정환, 장우희, 양대록, 김화준, 박신근 등 평북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1939년 영변에서 검속된 후 신의주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박관준 장로도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주남선, 최상림, 이현속, 조수옥 등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도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과 평북지역 지도자들과 함께 조사받기 시작했다. 이로써 자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전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다시 평양에 모이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

석방 위로를 겸하여 열렸던 1940년 4월 22일의 평양 채정민 목사 사택 회합 이후 15개월 만의

일이었다. 평양경찰서 유치장에서 주기철 목사를 다시 만난 한상동 목사의 증언이다.



『내가 부산에서 검속된 지 1개월이 지난 1941년 7월 10일에 평양으로 옮겨 갔다. 평양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주님의 은혜로 뜻하지 않게 지금은 (1953년) 순교하시고 안 계신 주기철

목사님이 갇혀 계신 방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나는 너무도 반가왔다.



나는 그 방을 참으로 잊을 수 없다. 주 목사님과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했다. 주 목사님과는

마지막 말씀할 기회라 생각하고 이미 나는 각오하고 있었다. ‘연로하신 어머님을 두고 나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시고 다음은 말씀하시지 못하였다. 간수가 ‘주 목사님 말씀 다 했지요’

하고 방해 하였다. 부산과 다름없는 평양 간수였다. 그러자 주 목사님은 눈물에 잠기어

침묵하셨다.』



검찰 조사가 진행되면서 피의자들은 경찰서에서 형무소로 옮겨졌다. 8월 25일 평양시내 여러

경찰서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피의자들이 평양형무소로 이감된 것이다. 주기철 목사도 이 때 서성리

창광산 아래 있는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전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들의 관심은 가장 오랜 기간,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킴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부각된 주기철 목사에게 쏠려 있었다.

한상동 목사와 함께 경남지역 반대운동을 이끌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주남선 목사의 증언이다.



『1941년 8월 25일 갑자기 우리 일행을 불러 내어 형무소로 데리고 갔다. 문 앞의 차에서 나섰을 때

최상림 목사가 주기철 목사를 향해보고, ‘주 목사는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하여 그 말을 듣고 서로

밝은 기쁨이 충만하였다. 다시 나오지 못할 옥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교자의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하였던 것이다.』



평양경찰서 유치장 안에서 1년 가까이 주기철 목사와 무언의 ‘손가락 대화’를 나누었던 안이숙도

같은 내용을 증언하였다.

『사무실에는 성도들이 모두 제각기 소지품을 간수에게 맡기고 자기의 이름을 대신할 번호표를

받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자세히 보았다. 주 목사의 조각상같이 희고

아름다운 얼굴, 안질로 인한 빨간 눈에는 눈꼽이 아직도 끼었었다. 나는 쏟아질 듯한 설움을 꾹 참고

절을 했다. 그도 절을 하고 미소를 띠었다.』



이로써 평양형무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혐의로 기독교인들이 구속되어 고난당한 예가 없지 않았지만 수감자의 규모(68명)나 혐의 내용

(비밀결사 조직음모)에서 평양형무소 수준을 따르지 못하였다.



평양이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듯 평양형무소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한국

교회 수난의 대표적 현장이 되었다.



(매일신보)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한국어 일간신문이다. 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 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일제가

사들여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每日新報)》로

개제한 것이다. 경영상으로는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 통합, 《경성일보》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이 집권하여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하였다.



(지나사변)

1937년 7월부터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국토에 전개된 중일전쟁(中日戰爭)을 말한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14)



평양 종로경찰서 유치장 생활





1. 이인재 전도사의 체포와 유치장 감금

1940년 5월 13일, 이인재 전도사는 폐교된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평양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두 사람에게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이 때 이인재를 체포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유부장으로 이미 이인재와는 낯이 많이 익은 고등계

형사부장이었다. 당시 종로경찰서에는 사상범들을 잡아들이는데 활동하는 고등계 형사가 40명, 일반 잡범들을 잡는데 뛰는 형사가

40명, 도합 80여명의 형사가 있었다. 고등계 형사가 나타났다 하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부들부들 떨 정도로 그 기세는 대단했다.

그런 때에 이인재를 체포하기 위해 형사 부장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유 부장은 이인재를 보자 대뜸 손에 포승을 지웠다. 그리고 곧바로 평양 종로경찰서로 연행해갔다.

그날, 오후 3시가 지나서 유부장은 이인재를 불러냈다. 3층 고등계 형사실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이인재가 형사실에 들어서자

유부장은 느닷없이 뺨을 갈겼다.

“이 미친놈!”

눈앞에 불길이 튀었다. 구둣발로 아래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형사실에서 흔히 있는 취조의 시작이었다. 이인재는

유부장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흥미가 있었다. “이 미친 놈!”

이 말에 이인재는 조용히 대답했다.

“여보시오 형사부장 나으리, 내가 참으로 미쳤으면 좋겠소!”

이인재의 뜻밖의 말에 유부장은 발길질을 멈추고 빤히 바라보며 반문하였다.

“뭐라구? 미쳤으며 좋겠다구?”

“그래요. 내가 우리 예수님으로 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미치지 못하여 한(恨)이 될 뿐이요.”

그 말에 유부장은 어이가 없는 듯 빤히 이인재를 바라보다가 자기 자리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정말 미쳤군! 완전히 돌아버린 거야!”

유부장은 책상 위에 종이를 펴고 펜을 잡았다. 취조문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순간 이인재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부장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미친 놈!’ 그렇다. 그 말이 이인재 자신에게 맞는 말일런지 모른다. 세상 사람이 볼때는 완전히 미친 일임이 분명하다. 순간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면 서기 시절, 자신이 몸담고 있던 면사무소에서 13년동안 근면하고 착실하게 일했다. 집에서 면사무소까지 십오리 길이지만

하루도 결근한 일이 없었다. 밀양 상남면사무소의 민형식 면장 뿐 아니라 모든 직원 심지어 면 산하 모든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았다. 심지어 면장으로 추대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를 마다하고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큰 딸 정희와 자신의 동생 이희재를 밀양공립학교인 상남초등학교에서 퇴학시키고 평양으로 데려왔다.

모범생으로 학교에서 칭찬 받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빈민학원에 넣었다.

일본 경찰들과 맞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고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비밀리 학생들을 모으고 교수들을

찾아다닌 일들, 이런 모든 것들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편에서 볼 때는 미친 놈의 짓인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가 취한 행동이나 생활자체는 하나님의 역사로 되어진 것이 아닌가?

이인재는 유부장의 말에 오히려 희열(喜悅)을 느꼈다. 성령님이 이인재의 마음속에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육신은

이제 매인 몸이 되긴 했지만 그의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는 종달새처럼 한없이 자유롭고 기뻤다. 유부장은 묻기 시작하였다. 본적,

주소, 성명, 학력, 그리고는 신사참배 불참의 동기와 이유, 반대운동을 하러 다닌 배경과 행로 등등.

이인재는 유부장이 묻는 것에 하나 숨김없이 대답하였다. 그렇게 되니 유부장도 평온을 찾은 듯 조용조용 얘기하기 시작했다.

취조가 끝나자 그를 지하 유치장 3호 감방에 구금시켰다. 유치장 신세를 지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것도 다른 죄를 지어서가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구금(拘禁)된 되었기에 그의 마음은 평온(平溫)하였다.



2. 유치장 3호 감방

유치장은 지하였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낮인지 밤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이인재는 잡혀올 때 입고 있던 춘추복 양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여섯 평 정도의 작은 방에 잡범(雜犯)들 20명 정도와 함께 기거(寄居)하였다.

유치장 감방은 복도를 중간에 두고 좌우에 같은 크기의 방이 이어져 있었다. 감방이 10개 정도였다.

오후 5시가 되니 저녁식사가 나왔다. 낡은 백철 도시락 그릇에 콩과 좁쌀로 된 잡곡밥이 조금 담겨있었다.

감방에 새 죄수가 들어와서 반가운 이들은 앞서 들어와 있던 죄수들이었다. 그 이유는 처음 들어온 죄수들은 유치장 식사에

길들여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 동안은 그 밥을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못 먹고 밀어내면 서로 나누어 먹는 재미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은 처음 끌려온 죄수들은 자신이 억울하게 들어왔다는 분함과 갑자기 바뀐 환경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유치장

밥은 더욱 더 먹기가 힘들다.

이인재 전도사가 들어 왔을 때도 앞서 자리한 죄수들의 기대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인재는 첫날 저녁에 들어온 밥을 한술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는 자신의 형편을 살펴볼 때 빨리 나갈 수 있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장기간 갇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하여야만 했고 건강을 위하여는 맛이 있든지 없든지 주는 음식을 먹어 두어야만 했다.

그러니 앞서 유치장에 들어온 죄수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기들 몫 외의 밥을 한 술 더 먹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는데 그것이 완전히 무산되어 버린 것이었다.



3. 취조관들

몇 차례 불려나가 취조를 받았다. 이인재가 그 동안 쓴 일기장이 그들의 손에 있었고 일기장을 세밀히 검토하여 그 내용들을

물었다. 일기장에는 누구를 만나고 어디서 무슨 설교를 어떻게 하였는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인재에 대하여 별로

조사할 것이 없었다. 일기장에 기록된 것을 재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평안남도 경찰국 구가경부는 일기장을 다 검토하고 이인재에게 말하였다.

“여기 기록된 설교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목적으로 작성된 설교가 아닌가?”

“목적을 그 한 가지에만 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순수한 목적은 복음을 바로 전하는데 있습니다. 진리를 바르게 증거 하려고 하다

보니 신사참배를 자연히 반대할 수밖에요.”

“순전히 신사참배 반대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설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되면 그렇게 인정하십시요. 그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구가경부와 둘러 선 취조관들이 기탄없이 말하는 이인재 전도사를 보면서 사뭇 놀라는 기색이었다.

구가경부는 평안남도 경찰국 고급관리였다. 그는 지금 검찰국에 조서를 넘기기 위하여 이인재와 대질 심문을 하는 중이었다.

“예수가 재림을 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십니다.”

“무엇하러 오는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 때는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럼 대 일본 제국의 천황폐하께서도 해당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만!”

구가경부는 이인재의 입을 막았다. 구가경부가 그의 담대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묻지 않겠어. 그만 가보시오.”

이인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는데 옆에 서 있던 취조관들이 속삭였다.

“이인재는 주기철처럼 외유내강(外柔內剛)이야.”



4. 원수를 친구처럼

성령님께서 강하게 이인재 전도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았다.

취조를 받을 때마다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있었음을 자신도 알았고 취조관들까지 이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취조를 받고

돌아오면서 이인재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였다.

처음 들어오던 날, 그의 뺨을 때리고 발길질 한 유부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이인재가 미워 그런 것이 아니고 고등계

형사부장의 체면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선 사람으로 일본 상관들에게 잘 보여야 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불쌍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인재의 마음속엔 일본 경찰이나 조선 형사들이나 모두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악역을 담당해야 하는 가여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가혹한 행위가 다 용서되었고 친구로 삼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특히 악명 높은 유부장까지도.

이런 마음이 생겨진 것은 이인재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그가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5. 첫 면회

평양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지 3개월이 지났다. 그 때까지 면회는 일절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상부의 명령이었다.

1940년 8월 중순께 몹시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구니모도상 면회요!”

간수의 외치는 말에 이인재는 귀를 의심하였다.

“구니모도상 뭣해요, 나오지 않고.”

간수 뒤에 유부장이 서 있었다. 이인재는 유부장의 지시에 따라 유치장에서 나왔다. 지하에서 지상 3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밟고

올라갈 때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렸다.

석 달 동안 유치장 안에서 콩과 좁쌀밥만 한 웅큼씩 먹고 지냈기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린 것이었다.

피도 많이 부족하였고 게다가 햇빛을 전연 보지 못한 상태여서 얼굴과 수족이 창백하였다. 머리털은 길어 귀를 덮었고 여름이라

머리에서 이가 득실거렸다.

마실 물을 잘 주지 않아 목이 많이 탔다. 그 때마다 차라리 고문이라도 당하여 물을 좀 마실 수 있었으면 하기도 했다. 잡범들이

이야기하기를 고문을 당할 때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을 먹인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목이 탔으면 물고문이 그립기까지 했을까?

지난 석 달 동안은 육체적으로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힘이 아니었다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간신히 3층으로 올라왔다. 취조실이었다. 유부장이 면회 온 가족을 대면시켜 주었다.

사랑하는 부인이 와 있었다.

창백하고 여윈 이인재 전도사의 모습을 보는 순간 부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 내렸다. 흐느끼는 것이었다.

“울지 마시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여야지.”

오히려 이인재가 부인을 위로하였다. 부인이 가지고 온 음식을 풀어 놓고 기도하였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소고기

국밥을 먹었다. 너무나 오래간만이었다.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으니 몸에 힘이 솟았다. 토마토를 먹었다. 붉은 토마토는 그대로

피가 되어 혈관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았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밝은 햇살이 거리에 깔려 있었다. 골고루 비추는 저 햇살도 유치장 안에서만은 누리지를 못한다.

인간사회에서 격리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평양 종로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간다. 저런 세계에 자신도 살았던가... 아득한 생각만 들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예수 따라가는 길이 이렇게도 험하고 좁은 것인가?

이인재는 생각을 추스르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많이 염려한 모습이었다.

“부인,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마오. 그리고 아이들 잘 보살피시오.”

“집안일은 염려마시고, 당신이나 조심하시오.”

“다음번에 올 때는 머리빗을 하나 사가지고 오시오. 참빗 말이오. 머리에 이가 득실거려서 견딜수가 없어요.”

“알았습니다. 다른 필요한 것은 없나요?”

“다른 것은 필요가 없어요. 유치장 규칙에 따라야 하니까요.”

그렇게 첫 면회는 끝이 났다.



6. 두 번째 면회

첫 면회가 허락된 뒤부터 매주 한 번씩 면회가 가능해졌다.

일주일 후에 부인이 다시 면회를 왔다. 부인의 손에 참빗이 들려 있었다. 빗을 받아 머리를 빗는 이인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등계 형사과 차석, 사사기 경사가 입을 열었다.

“흥, 이제 예수 다 되어 가는군!”

빈정대는 말이었지만 듣기 싫지가 않았다.

머리가 길어 그 모습이 꼭 예수님 같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이인재는 겉모습만 예수님 같을 것이 아니라 마음도 예수님

같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망하였다.

유치장 감방에 돌아온 이인재는 감방 안의 죄수들에게도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부인이 갖고 온 눈깔사탕 두 개씩이었다.

순식간에 감방 안은 명절날 분위기가 되었다. 죄수들 모두 기뻐하며 어린아이들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빗은 이인재 전도사에게만 해당이 되었다. 유치장에서 석 달 이상 있는 죄수는 별로 없었다. 그러니 머리빗이 그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니 깨알 같은 이가 머리에서 툭툭 떨어졌다.

이인재는 머리를 빗고 이를 잡으면서 부인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15)



가족들의 수난





1. 이인재의 부인: 신을라(申乙羅)

이인재 전도사의 부인인 신을라는 1909년 1월 9일 조선조 때 양반 가문이었던 평산신씨(平山申氏)

신덕균(申德均)과 백전이씨 이재순(李才順)사이에서 1남 3녀중 3녀로 출생했다. 하지만 조선조의

멸망과 더불어 가문도 몰락하게 되어 신씨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다가 1916년, 청년

이인재를 만나 첫 눈에 반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신을라(申乙羅)란 호적명의 취득 사연은 이렇다. 신씨가 출생한 후 모친이 그를 업고서 출생신고를

하러 면사무소에 갔는데, 아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호적 담당 면서기의 물음에 얼라(어린애)

라고 한 것이 을라(乙羅)로 호적에 등재되어 버린 것이다. 부인 신씨가 그 이름을 몹시 싫어하는

탓에 결혼 후 이인재는 그 이름을 신상이(申相伊)로 개명(改名)해 주었다.



2. 가족들의 고생

1938년, 이인재는 13년간 몸담고 있던 면사무소 면서기직을 사임(辭任)하였다. 그는 면민들 뿐 만

아니라 상사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 공무원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평양으로 떠난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학문탐구의 길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가족들의 고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타향살이의 설움, 가난과의 싸움,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수감생활...

1939년 가을, 이인재는 장녀 이정희(李廷喜)와 장남 이정빈(李廷彬)과 함께 먼저 평양으로 떠났다.

이인재는 평양신학교 교수들에게서 개인 교수를 받기 위해(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 됨),

그리고 큰딸 이정희(초등 4학년)와 아들 이정빈(초등학교 1학년)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학교가

평양에 있다 해서 그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먼저 평양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 후 며칠이 지난 후에

부인 신을라와 둘째 이정옥(李秀玉)이 뒤따라 평양으로 오게 되었다.

딸 이정희와 아들 이정빈은 대동학원(大同學院)에 입학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합동 수업을

하는데 교장겸 교사 1명이 모든 것을 담당했다. 그런데 글은 가르치지 않고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기가 일쑤여서 채 한 달도 채우지 못해 누나 이정희의 의견에 따라 이정희, 이정빈 모두

대동학원을 그만 두게 되었다. ?

1940년 5월 13일, 이인재가 고등계 형사 두 명에게 연행되어 갈 때 그는 가족들에게 "걱정 말라"

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그리고 평양 종로 경찰서로 연행, 수감되었다. 이때부터 이인재의 가족들은

계속 형사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한번은 형사들이 밤중에 가족들의 임시거처에 찾아와(폐교된

평양신학교 기숙사) 방 창문에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부인 신을라가 보고서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른 적이 있었다. 그 소리에 방에서 잠자던 3남매도 놀라 소스라지게 되었다. 이때 아이들이 떨고

있는 것을 본 일본 형사는 방안으로 들어와 "내니 두려워 말라. 내가 예수다"라면서 빈정대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가족들도 차차 ‘감시당하는 일’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이인재가 평양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고 면회가 허락된 이후로 부인은 꼭 한 주에 한번씩?

면회를 하러 왔다. 이인재는 부인과 만나면서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또 그렇게 짧은 가을이 지나가 버리고 11월이 되면서 평양의 겨울은

시작되었다. 면회하러 오면서 가지고 오는 음식은 식지 않도록 솜옷에 싸여서 전하여졌다.

이인재는 부인의 면회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도 부인이 면회 올 날인데 종일 기다려도 부인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그날 밤 11시경, 포승에 묶인 채 고문실로 끌려가는

그의 눈에 울고 있는 3남매의 모습이 들어왔다. 정희, 정빈, 정옥이었다. 형사는 아이들에게

말하였다.

“이 개새끼가 너희 애비냐?”

형사들은 이인재의 뺨을 치면서 아이들 옆을 지나쳐 그를 끌고 가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는 이인재이지만 분명 큰일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부인이 면회를 왔다.

“어찌된 일이오? 왜 오늘에야 면회를 오는 거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부인의 말은 이러하였다.

지난 수요일 저녁 예배를 어느 권찰 집에서 드리게 되었다. 당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공식예배와 모임을 일제 당국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주일이나 수요일 저녁도 집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날도 이인재의 부인 신을라는 그 권찰집에서 산정현 교인들 몇과

함께 수요일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 형사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형사들은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을 모두 이 종로경찰서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날 밤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추운 취조실에서 지내게 한 것이다.

한편, 도대체 예배를 드리러 갔던 모친은 돌아오지 않고 그 와중에 모친을 비롯하여 몇 사람들이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딸 이정희(당시 열한살)와 아들 이정빈(당시 여덟살)은

동생 이정옥을 업고서 그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평소 동생 이정옥이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부친의

면회를 다녔기 때문에 네 살 밖이 어린애였지만 경찰서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이정옥의 길안내를 따라 종로 경찰서에 도착한 세 남매는 거기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 내어 보내 주세요.”

1시간가량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다가 형사 1명이 울고 있는 3 남매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너희들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느냐?”

큰 딸 이정희가 말했다.

“우리도 신사참배를 안한다”

그러자 형사가 이정희의 얼굴을 수도 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함께 종로경찰서로 갔던 남매들은 더

크게 울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 형사 2명이 나타나 일본말로 자기네들끼리 말하였다.

“이들 3남매는 평양에 연고자가 없으니 고아원으로 보내자”.

이들이 말하는 것을 큰 딸 이정희가 알아듣고서 동생들에게 “더 크게 울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동생들은 더 크게 악을 써가며 울었다.

그런 중에 형사에게 묶인 채 끌려나오는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날은 그야말로 이인재

가족의 수난의 절정이었다.

새벽에 이인재의 자녀들은(삼남매) 집으로 돌아 왔고 너무 고단하여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는데 어머니가 옆에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일본법에는

24시간내 석방을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아이들이 경찰서로 찾아가서 밤새워 운 것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부인은 이인재에게 이와 같은 일들 때문에 지정된 날 면회하러 오지 못하였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만으로도 심히 힘겨운 그의 부인이었다.



3. 큰 딸 이정희의 편지

이인재가 유치장에 갇혀있는 동안 아이들은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직접 대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큰 딸 정희는 종종 어머니 편에 편지를 보냈다.

겨우 열한 살이었다. 소학교를 정규적으로 다녔다면 4학년이었다. 그러나 신사참배 때문에 정규적인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런 딸이었지만 아버지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버지를 격려하고 힘을

돋게 하는 내용의 글을 편지로 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 집안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신앙으로 이기세요. 우리는 매일 아침, 저녁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용기를 주는 편지였고 그 끝에는 언제나 요한 계시록 2장 10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네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인재 전도사는 딸 정희의 편지를 받았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감격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4. 밀양으로의 귀향

이인재의 가족 중 아이들(3남매)은 그 후 평양 생활을 접고 다시 밀양 마산리로 내려 왔고 부인

신을라는 옥중 수발을 위해 평양에 남았다. 하지만 부인도 셋째 딸 수자(秀子)를 해산하게 되어 더

이상 평양에서 견디기가 힘들게 되었다. 또 이인재가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기 때문에 부인 역시 다시 밀양 마산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셋째 딸

수자를 병으로 잃게 된다.

이인재의 부인 신을라는 믿음과 덕을 갖춘 여인이어서 사람들에게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17)



검찰의 기소와 평양형무소 시절





1. 검찰의 기소

1940년 9월 20일 ‘일제 검속’으로 전국에서 193명을 체포한 후 각 지역 경찰서별로 혐의자를 8개월

동안 기소조차 하지 않고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에 따라 혐의가 가볍거나 신사참배를 수용하겠다고

서약한 피의자들은 석방하고 나머지 68명의 피의자는 1941년 5월 15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때부터 사건은 평양 지검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지방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들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이것은 1938년 이후 평양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 거점이 되었던 관계로

각 지역별로 진행되던 조사를 평양으로 통합하여 단일 사건, 즉 전국 단위의 ‘비밀결사’ 조직

기도사건으로 처리하려는 경찰 당국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이리하여 이기선 목사를 비롯한 고흥봉, 서정환, 장두희, 양대록, 김화준, 박신근 등 평북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1939년 영변에서 검속된 후 신의주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박관준 장로도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주남선, 최상림, 이현속,

조수옥 등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도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과 평북지역 지도자들과

함께 조사받기 시작했다. 이로써 자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전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이 평양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 석방 위로를 겸하여 열렸던 1940년 4월

22일의 평양 채정민 목사의 사택 회합 이후 15개월만의 일이었다.

검찰조사가 진행되면서 피의자들은 경찰서에서 형무소로 옮겨졌다. 8월 25일, 평양시내 여러

경찰서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피의자들이 평양형무소로 이감(移監)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가들이 다시 한번 전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2.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던 날

평양이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듯 평양형무소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한국

교회 수난의 대표적 현장이 되었다.

1941년 8월 25일, 처서(處暑)가 지났는데도 아직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간간이

불러오는 바람에도 더위 기운이 가득했다. 평양 종로경찰서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평양형무소로 이감

(移監)된다는 소식이 아침부터 들려왔다. 감방에 있던 신사참배반대운동가들의 마음이 설레었다.

더운 날씨지만 잠시라도 거리를 걸을 수 있고 지하의 답답한 곳을 벗어나 넓은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뙤약볕 아래였지만 햇볕을 한몸 가득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리고 잠시만이라도 보고픈 하나님의 종들의 얼굴을 마주 할 수 있겠기에 이감(移

監)되는 시간만 기다려졌다.

한 나절이 지나서야 종로경찰서 마당에 그동안 평양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 주남선 목사, 최봉석 목사, 한상동 목사,

방계성 장로, 이광록 집사, 조수옥 전도사 등 참으로 반가운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함부로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포승줄에 묶인 채 일본 순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걸어가기를 원했다. 다리 운동도

해야 했고 마음껏 햇빛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 순사가 말하였다.

“평양형무소까지 택시로 가야하니까 택시비는 당신들이 내시오.”

이게 무슨 말인가?

주기철 목사가 항의하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지하 유치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햇빛이 그립습니다. 오늘은 걸어서 가게

해주시오.”

그러나 일본 순사는 엉뚱한 말을 하였다. 마치 그들을 위하는 것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모두 목사들인데 어찌 포승줄에 묶인 채 길을 걷는단 말이오. 창피하지 않겠소? 부끄러울 터이니

택시를 타고 가도록 합시다.”

그때 주기철 목사가 말하였다.

“우리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인입니까?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 순사들은 막무가내 택시를 네 대나 불렀다. 그리고 타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네 대의 택시에 각각 나눠 탔다. 택시는 평양 시내로 들어갔고, 평양 형무소가

있는 서쪽으로 향하여 거침없이 달렸다. 평양 형무소 철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택시에서

내리니 순사들이 말했다.

“택시비를 내시오.”

아니 여지껏 경찰서 유치장 안에 갇혀 지내던 사람이 무슨 돈이 있다고 택시 값을 내라는 것인가?

정말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부인이 면회를 와서 필요할 때 쓰라고 준 돈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생각해냈다.

택시 한 대에 1원씩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4원을 내어 각각 택시 운전사들에게 주었다. 돈을

건네주면서 이인재 전도사는 무척 기뻤다.

하나님의 종들을 위하여 요긴하게 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를 많이 즐겁게 하였다. 그

즐거움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평양 형무소 철문이 육중하게 버티고 있었다. 문이 열려져 있었다. 이들을 환영한다는 의미 같아

보였다.

이인재 전도사가 앞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소!”

여성의 소리였다. 이인재 전도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안이숙 선생님!”

“이 전도사님 많이 고생하셨어요.”

“정말 반갑습니다. 여기서 만나다니...”

“이제 들어가면 영영 나올 수 없는 감옥소가 되지 않을 런지...”

“... ...”

일행들은 형무소의 넓은 뜰을 걸어서 사무실 쪽으로 갔다. 형무소 사무실 옆에 옷을 갈아입는 방이

있었다. 그 곳으로 안내되었다.

수인복(囚人服)은 푸른색이었다. 모두는 사복(私服)을 벗고 푸른색 수인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인복에는 각각 번호표가 붙었다. 죄수복은 때가 묻고 더러웠다. 세탁을 하지 않은지 오래된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입고 있다 벗어 놓고 나간 옷을 세탁도 하지 않고 그냥 나누어 주는 듯했다.

이때 권능(權能)이란 별명이 붙은 최봉석 목사가 소리쳤다.

“예수님은 홍포(紅布)를 입으셨는데 우리는 청포(靑布)를 입는구나.”

최봉석 목사의 말이 떨어지자 옆에 있던 주남선 목사가 한 마디를 던졌다.

“지금은 청포를 입지만 우리도 얼마 안가서 예수님처럼 홍포를 입게 되겠지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무소 안에서 미결수는 청포(靑袍)를 입지만 기결수가 되면 홍포(紅袍)를 입는 법이다. 멀지 않아

재판을 받게 될 것이고 형이 구형(求刑)될 것인데 그 형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는 국법(國法)을 어긴 것이 되고 따라서 대역죄(大逆罪)가 된다. 그들은 이 죄를

가볍게 볼 리가 없다. 치안 유지법 위반이요, 보안법 위반이니 불경죄에 해당되어 실형만 선고되면

무기형은 물론이요 사형까지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형이 확정되기만 하면 홍포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로 이곳까지 온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은 두려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푸른 죄수복을 입으면서도 그들의 얼굴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한

그들이었기에 푸른 죄수복을 입으면서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세계의 사람들이기도 했다.



3. 입소 후 몇 달 동안

평양 형무소 내에는 40명에 가까운 목사, 장로, 전도사가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의 고난은 실로

극심하였다. 그중에서도 먹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하지만 이인재 전도사 일행이 평양 형무소에

입소한 후 몇 달 동안은 그야말로 지낼만한 형편이었다.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대접이 좋았다.

거의 매일 사식(私食)이 들어왔다. 이 사식은 옥문 밖 숨은 기독교 신도들의 성의(誠意)로

들어와지는 것이었다.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金次淑) 여사가 돈을 모아 공동으로 사식을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감되어 있는 신사참배반대운동가 모두에게 공급되었다.

사식은 형무소 내 식당을 통해 나왔다. 밥은 팥이 섞인 쌀밥이었다. 붉으스레한 밥에 채소 반찬,

소고기 부침, 돼지고기 부침 등 그 당시로는 가정에서도 먹기 어려운 음식들이 전하여졌다.

감옥 안이었지만 그 어느 부자 부럽지 않은 생활이었다.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 여사는 자녀가 없고 오직 한사람 남편뿐이었기 때문에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자 옥문 밖에서 뒷바라지 하는 것이 그의 생활 전부였다.

그녀가 평양형무소 밖 담벽 밑에 앉아있으면 평양성 안의 숨은 기독신도들이 무엇인가를 전하여

주었다. 쌀이며 돈이며 옥중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이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40명 가까운 옥중

성도들의 사식을 마련하여 차입을 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만주에서 트럭 운전을 하고 있는 이경석씨(1908년 8월 8일~1990년 4월 8일)를 통하여 돈이

전달되기도 하였다. 이경석 씨는 해방 후에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고 후에 부산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이사장을 지낸 바 있는 옥문 밖의 신실한 봉사자였다. 그는 당시 만주에서 트럭 운전을

하며 모은 돈의 일부를 만주에서 평양으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 여사의 역할은 전국교회 숨은 기독신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무엇이든 있는 대로 김차숙 여사에게 건네졌고 김차숙 여사는 그것으로 매일처럼 사식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 때는 한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였다. 감옥 안이 덥기 때문에 시원한 모시옷이 필요하였다.

이 모시옷도 김차숙 여사의 손을 통하여 들어왔다.

다른 죄수들은 생각도 못하는 모시옷을 입고 옥문 안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4. 고달픈 감방생활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 잠깐이었다. 이후 감방 생활은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다.

특히 식사가 말이 아니었다. 처음 몇 달은 사식이 들어 왔지만 그것도 중단되었다.

당국에서 금하였다.

“전쟁터에서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호사(豪奢)스럽게 사식이라니?”

그 후 콩밥은 콩깨묵 밥이 되었다. 그것도 콩기름을 짠 콩찌꺼기 밥이었다.

어느 날은 썩은 콩찌꺼기 밥이 들어와 감옥 안에 소동이 벌어졌다.

콩 찌꺼기 밥에서 황냄새가 지독하게 난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모두가 배탈이 났고 여러 사람이

회복되지 못하고 죽기도 하였다.

그리고 밤만 되면 빈대와의 전쟁을 치루어야만 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싸움이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18)



반역의 역사, 저항의 역사





이인재 전도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있을 때 감옥 밖의 상황은 점차 ‘종말(終末)’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38년 신사참배 강요를 기점으로 더욱 강화된 일제의 황민화 정책이 창씨개명,

국민정신총동원을 거쳐 국민징용령(1939년), 학도동원령(1943년), 징병령(1944년), 정신대근무령

(1944년)에 다다르게 되면서 식민지 수탈과 민족 말살은 그 최고조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역시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39년 일본 제국의회에서 통과된 종교단체법을

계기로 모든 종교는 ‘종교보국’(宗敎報國)이라는 정책에 철저히 순응(順應)해야 하며 이에 반대하는

어떠한 행위 또한 용납되지 않았다. 모든 종교를 종파와 교파별로 단일 조직 하에 구성하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종교조직과 통합(統合)을 추구하였다. 정치적 통제가 편리하도록

교파를 통합하여 단일 교회를 만들려는 의도였다. 기독교의 ‘일본화’와 ‘교파 합동’이 일제의 기독교

정책의 핵심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지도자 대부분은 ‘순응의 논리’로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종교 정책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시기(時期)의 차이는 있지만 1938년에 이르러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한

기독교 각 교파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공식으로 수용하는 결의를 하였다. 특히 장로교의 경우

1938년 9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지도부의 노골적인 친일 행각이 전개되었다. 1939년

9월 신의주 제2교회에서 회집한 장로교 제28회 총회에서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8회 회록, 1939년, 87~94쪽). 이것을 계기로 총회 안에 중앙상치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로교회의

헌법과 교리, 예식 등을 전면 재검토하여 “맹목적이었던 구미(歐美)의존주의를 결연히 차버리고

기독교를 우리나라 국체에 맞는 일본적인 종교로 하여 그 내용을 근본적으로 혁신”(매일신보,

1940년 4월 11일자 기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와 같은 일들은 결국 한국 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신사참배를 비롯하여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

일본의 ‘국민의례’를 교회 의식에 적극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교회의 ‘일본화’(日本化)

는 민족교회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종교 영역에서 이루어진 ‘반민족적’(反民族的) 행위였다.



교파 합동은 1938년 6월 일본기독교회(장로교) 의장인 도미타(富田滿)의 방한 때 논의되기

시작했고 1940년 일본 메소디스트교회(감리교) 감독 및 일본 기독교연맹 의장인 아베(阿部義宗) 의

방한을 계기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루어진

이들 일본 교계 지도자들의 방한은 한국 교회에 ‘교파통합’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1943년

1월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일본기독교회 대표들로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교파를 초월한 단일 ‘혁신’ 교단 조직을 향한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매일신보, 1943년

1월 26일자 기사).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구체적인 ‘혁신안’에 대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그리고 두

교회 안의 추진 세력 간의 의견 차이가 노출되어 처음 구상했던 대로 단일 교단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1943년 5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1943년 8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각각 체제를 바꾸었다.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협력하여 동포의 정신작흥(精神作興)에 자(資)하고 일층(一層)

전도(傳道)에 정진(精進)하여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보국(報國)의 성(誠)을 다 하기를 기(期)

함.”(조선기독교연합회 조직선언서 중, 1938년 7월 7일)

이로써 장로교와 감리교 양교파는 ‘조선’이라는 이름 대신 ‘일본’이름을 앞세워 교단을 개편함으로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일본 교회에 예속(隸屬)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같은 시기 성결교나

동아기독교(침례교), 안식교 등은 재림신앙(再臨信仰)을 이유로 강제 해산되는 비운(悲運)을 겪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아 있는 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할 것 없이 ‘일본적’ 종교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발발(勃發)로 일본이 독일과 연맹을 맺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 독일 나치

정권의 ‘반(反) 유대주의’ 정책을 일본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성경에서 유대 역사를 담고

있는 구약성경 전체를 폐지했고, 신약에서도 유대적 생체가 짙은 성경(예를 들어 마태복음과

히브리서, 야고보서)은 읽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찬송가에서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수행중인

전시체제와 천황 유일체제를 부정하는 찬송, 즉 평화나 재림, ‘만왕의 왕’, ‘그리스도의 군대’ 등을

담은 찬송은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연성’(鍊成)이란 이름으로 목회자들은 신궁(神宮) 건설현장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말 잘하고

똑똑하다는 목사들은 시국강연회(時局講演會)에 초청 강사가 되어 시국강연을 하러 다녀야 했다.

시국강연을 통해서 그들은 같은 말을 되풀이 하여야 했다.



“영국과 미국이 우리 동양을 착취한 악업(惡業)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동양에서

몰아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을 주축으로 해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일에 온 국민이 총력을

다 하여야 합니다.”



목사들은 일제가 시키는대로 나가서 배우처럼 활동을 하여야 했다.



그러니 이제 신사참배는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었다. 교회 예배당 안에는 일장기(日章旗)가

게양되었고 가미다나(信棚))라는 모형 신사가 설치되어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동방요배를 하게

했다. 이는 동쪽에 일본 천황이 있기 때문에 천황을 향하여 경배를 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황국신민 선서를 하게 했다.



“우리는 황국 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봉사하자”

일본 말로 이러한 맹세를 하게 한 것이다.

구약성경 에스겔 8장 16절,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 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 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양 태양에 경배하더라”

하는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이런 일을 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 한 것인가?

이렇듯 한국교회는 완전히 마귀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두려운 일이 펼쳐진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당시 장로교는 부일협력으로 총회 연맹과 상치위원를 중심으로 전시물자 동원과 인력동원에 대하여

협력하였다. 급기야 1941년 8월 14일, 상치위원회는 전시체제 성명 및 소위 ‘애국기(愛國機,

전투기) 헌납’을 결의하고 그 이듬해인 1942년 2월 10일 일본 육해군에 비행기 한 대와 기관총

7정분 대금인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하였다.(기독교신문, 1942,4,29 기사). 한편 감리교단에서도

1944년 교회를 통폐합한 돈으로 애국기를 헌납하자는 공문을 교회에 내려보냈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총독부의 지시에 따르긴 하였으나 교단 연맹이 이에 충실히 협력하였기 때문에

그 피해는 막대하였다.

일제말기, 순응과 타협의 노선을 선택한 교회 지도자들은 ‘반민족적’이고 ‘비신앙적’인 오류를

범하며 다수의 교인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신앙과 민족에 대한 반역의 역사였다.

한국 교회사에 실로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2. 저항의 역사

그러나 일제말기, 한국 교회사에는 이 같은 반역의 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순응(順應)보다는 저항(抵抗)을 선택하면서 신앙과 민족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택하였던 올곧은 신앙인들의 저항의 역사도 있었다. 비록 숫자로 보면 소수(小數)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저항의 역사가 있었기에 부끄러운 역사를 속죄(贖罪)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된다.

1940년 당시 한국 개신교회 34만 교인(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1941년도 말 기독교인 통계

자료) 가운데 신사참배로 조사를 받은 교인이 5천 명(1.5%), 그 중에 순교를 각오하고 옥중 투쟁을

하고 있는 교인들이 2백 명(0.06%)에 이르렀다.(C. A. Clark, Home Letter, Oct.1, 1941.) 당시

한국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짧았다. 교세도 미약한 가운데 외부의 지원도 없었다. 오직 신앙의

힘만으로 순교 투쟁을 결심했던 옥중 성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 교회는 크나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 밀양의 자랑스런 인물인 이인재 전도사가 있고, 한국 교회의 대표적 수난교회인

밀양마산교회가 있었다. 일제치하에서 가장 신사참배를 반대한 지역이 평안도와 경남인데, 이 두

지역의 고리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인재 전도사이다. 그는 평남과 경남을 오가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허리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가 늦게 예수를 믿었고, 늦게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가 평양신학교가 폐교되는 까닭에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의 믿음만은 뜨거웠다.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이기도 한 안용준씨는 이인재

전도사를 일컬어 ‘신앙의 투사’라고 불렀다. 이제 그는 비록 평양형무소에 영어(囹圄)의 몸으로

옥고를 치루고는 있지만 옥 밖의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이 저항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밀양마산교회는 초대장로로 박수민 장로(1930년에 장로 장립)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박

장로는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바쳐 교회를 섬기는 훌륭한 신앙의

인물이었다. 당시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는 터라 밀양마산교회는 많은 핍박(逼迫)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수민 장로를 비롯해서 밀양마산교회 교우들은 일본 순사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 뿐 아니라 같은 마을에 함께 사는 종적인 마을 주민들도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 해서 밀양마산교회 신도들을 향해 침을 뱉는가 하면 갖은 핍박을 가하였다.



하지만 밀양마산교회는 그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 한편 박수민 장로는 자신의 자녀들을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에 보내지 아니했고 아들 중 박치덕(후에 목사가 되었고, 1990년에는

고신교단 총회장을 역임함)은 일본 해군에 입대했으나 신사불참배로 일본 해군 형무소에 옥고를

치루었으나 2차대전이 끝나고 석방됐었는데, 옥중 생활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

이처럼 저항의 역사 한가운데 밀양마산교회가 서 있었다는 것은 우리 밀양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19)



평양지방법원 예심회부





1. 예심 심문(豫審 審問)

신사참배반대운동가들에 대한 사건을 넘겨받은 평양지검에서는 피의자들에게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을 채 시간을 끌었다. 이는 경찰에서 이미 1년 넘게 조사한 관계로 사건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건을 조속히 종결짓기보다는 되도록 지연시켜서 가능한 한 피의자들을

형무소 안에 오래 구금시켜 놓으려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즉 정부당국의 종교 정책을 거부하는 ‘반체제’ 저항 세력을 교회와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사회적 안정

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장기 투옥으로 인해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들의 저항의지가 약화되기를 기대한 측면도 있었다. 형무소에 갇힌 피의자들에 대한

검찰의 조사는 ‘회유’와 ‘협박’으로 일관되었다.

경찰에서 용의자 조사 기한 1년을 채우고 나서 검찰에 피의자를 넘긴 것처럼, 검찰에서도 1942년

5월 12일이 되어서야 68명의 피의자 중 35명을 예심재판에 회부하고 8명을 기소유예, 25명을

불기소 처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기소(起訴)하기 전 인신(人身)을 구속할 수 있는 최고 법적

기한인 1년을 꼭 채운 것이다. 사건을 넘겨받은 평양지방법원도 느리게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재판부에서는 기소된 35명의 피의자를 공식 공판에 회부하기 전 예심법원에 넘겼다. 이때부터

피의자들은 길고 긴 예심 재판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예심 종결이 끝나고 정식으로 평양지방법원

공판에 회부하기로 결정된 것이 1945년 8월 15일이었으니, 피의자들을 무려 3년 동안이나 ‘미결수’

상태로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시켰던 것이다.

정식 재판에 넘기기 전 경찰이나 검사 조사 과정에서 작성된 혐의 사실과 이에 관한 증거들을

심사하여 억울한 피의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예심 제도를 재판 지연의 수단으로 삼은 셈이다. 재판

없이 피의자를 장기 구금(拘禁)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를 최대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는 ‘합법(合

法)’을 가장한 ‘불법(不法)’ 행위였다.

그리고 경찰이나 검사 조사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예심 과정에서도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것보다는 ‘회유’와 ‘협박’을 통한 신사참배 반대 의지를 꺾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 같은 의도는 기소된 지 4개월이 지난 1942년 9월에 처음으로 예심 심문을 받은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드러났다.

“법정가서 예심 판사를 만났는데 대단히 친절히 대해 주며 왜 예수를 믿었느냐? 신앙의 동기 또는

신학한 동기 등을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 나라의 ‘신’(神)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였다. 물론 내가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하겠다는 성의가 있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국가를 위하여 힘써 달라는 말로 설유(說諭)하고 그 날 출옥시킬 예정이었다. 그리고 나도 출옥(出

獄)하리라고 믿었다.”1)

한상동 목사도 잠시 판사의 회유(懷柔)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입에서는 정작 다른 대답이

나왔다.

“그러나 주께서 나의 마음을 주장하사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온천하가 깜깜하여 이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못하도록 나의 입을 막으시는 체험을 나만이 알 수

있었다. 검사는 다시 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생각해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검사는

목사로서 일본 국체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지 못하였다는 말을 너무도 뜻밖의 대답이라고 하면서

내가 능히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답할 말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20분가량 기다리다가는 검사는 화가 나서 오늘날 우리 일본 청년들이 누구를 위하여 전지(戰地)에

나가서 죽느냐? 하며 ‘바가(바보)! 바가! 바가!’하고 수 십 차례나 욕을 하였다.”2)

다른 여러 피의자들도 이와 비슷한 ‘회유’와 ‘협박’의 예심 심문을 받았다. 1942년 9월의 예심은

이인재 전도사를 비롯한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 지도자들에게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평양과 평북지역 지도자들에 대한 예심은 해를 넘겨 1943년 1월에 이루어졌다.

안이숙 여사는 그의 책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예심 재판정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재판소에는 판사가 높은 자리에 앉았고 검사가 그 옆 자리에 있고 서기들이 밑에서 필기 준비를

하고 큰 테이블 좌우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위엄을 차리고 나를 정죄해 보려고 노력을

부리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여서 마음속으로 웃음이 터질 듯한 것을 참고 예수인답게

자연스러운 태도로 지명해 주는 자리에 가서 서 있었다.”3)

심문 내용은 한상동 목사의 경우처럼 경찰과 검찰의 조서를 바탕으로 신앙과 신사문제, 천황제도에

대한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대화는 주로 검사와 피의자 간에 논쟁으로

진행되었는데 회유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를 구분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심문이었다.



2. 순교의 해, 1944

거센 반역의 역사 흐름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양심으로 저항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던

‘종교적 양심범’, 이들이 수감된 감옥 안의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악화되었다. 전세(戰勢)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기울기 시작한 1944년 들어서서 형무소의 사정은 더욱더 그러했다.

건강했던 사람도 들어가면 병자가 되어 나온다는 평양형무소에서 2년 넘게 고문과 악형을 당하며

수감되어 있던 옥중 성도들도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그중에서도 평소 몸이 약했던 수감자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었다.

오래 전부터 결핵을 앓고 있던 한상동 목사는 그런 고통을 이렇게 증언했다.

“나의 폐병은 날로 위독하여 형무소에서도 아무래도 살지 못할 사람으로 알고 있었으며, 나도 죽을

줄 알고 몇 번이나 ‘오! 주여 어서 데리고 가시옵소서. 나의 한 날의 생활이 괴롭습니다’ 하였다.

나의 마음은 뜨거웠다. 나는 주님을 위하여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 너무 감사하였다. 아!

나는 진실로 나의 생명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밤마다 ‘오늘 밤에나 데리고

가시런지!’라고 기대하였다.”4)

고문과 악형으로 이어지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차라리 축복”이라는

생각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타협으로 생명을 유지하기보다는 죽는 한이 있어도 신앙양심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보여주기를 소원했다. 한상동 목사만이 아니라 형무소 안의 모든 옥중

성도들은 ‘죽음을 향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검속되어 고문과 악형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에

대한 소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경남 진영의 조용학 영수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김해경찰서로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가

뇌를 다쳐 가족들에게 인계되었다. 그 후 10일이 지난 1940년 8월 14일, 부산 철도병원에서

별세함으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최초의 순교자’5)가 되었다.

1941년에는 만주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이끌던 박의흠 전도사도 체포되어 만주 봉천의

심양형무소에서 복역 중 순교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6)

1944년에 들어 순교자의 수가 급증하였다. 평양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주기철 목사는 1944년 들어

건강이 눈에 뜨게 악화되었다. 이미 죽음이 눈앞에 와 있었다. 결국 형무소 당국은 4월 13일 그를

병감으로 옮겼다. 4월 21일 밤중에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주기철 목사는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하고서 숨을 거두었다.7)

나흘 후인 4월 25일에는 평양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옥중 성도 가운데 최고령(당시 76세)이었던

최봉석 목사가 숨을 거두었다. 최봉석 목사는 1944년 3월부터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그의 단식(斷

食)은 죽음을 끌어당겨 남은 고난의 시간을 단축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40일 금식 기도를 마친 4월 10일에 이르러 그의 몸은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 형무소 당국은

병보석으로 그를 가족들에게 인계하였고 평양 연합 기독병원에 입원시켰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4월 25일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하나님이 나를 오라고 부르신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8)

한 달 후인 5월 23일엔 이현속 장로가 평양 형무소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함안읍교회 장로였던

그는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과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오랜 수형생활로 인한 영양실조로 몸이 회복불능 상태에 다다르자 4월 병보석으로 잠시

가석방되었다.

그 때 평양에 올라와 있던 김차숙 여사(한상동 목사 부인)와 오정모 집사(주기철 목사의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건강이 좋아지자 일제 당국은 그를 재차 수감시켰고 또 다시

시작된 감옥생활을 견디지 못한 채 한 달 만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같은 순교 소식을 들은 이인재 전도사와 옥중 성도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떨기는커녕 오히려

순교의 열정에 몸이 타 올랐다. 순교가 감옥 밖의 사람에게는 두려운 공포였으나 옥중 성도들에겐

부러운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얻고 싶은 영광의 면류관이었던 것이다.



3. 순교, 그 이후

주기철 목사와 많은 옥중 성도들의 순교는 그들을 지지하고 따랐던 많은 교인들에게 충격과 슬픔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순교자들의 가족이나 지하교회 교인들의 신앙 투쟁 의욕을 저하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쟁하는 이들에게 신앙 투쟁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특히 형무소 안에 갇혀 있던 옥중 성도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소식이 아니라 부럽기까지 한

축복이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간 그들이었기에 동료 성도들의 순교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신앙과 투쟁 의지가 강화되었다. 이인재 전도사를 비롯한 한상동, 채정민, 이기선, 주남선,

방계성, 오윤선, 이광록, 최덕지, 조수옥 등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옥중성도들 모두가

그러하였다.

이와 같은 순교자들의 죽음 이후에도 옥중 성도들에 대한 예심 과정은 느릿느릿 우보(牛步) 형태로

진행되었다. 주남선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1944년 12월 한 차례 예심 법정에 나갔고 1945년 5월

초에 예심 판사가 형무소로 와서 최후 심문을 했으며 5월 18일에 이르러서야 “이기선 등 21명을

평양지방법원 공판에 회부한다”는 내용의 예심 종결서가 발송되었다고 한다.9)



한상동, “주님의 사랑”, 126쪽

한상동, 위의 글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 기독교문사, 1976, 214쪽

한상동, 『주님의 사랑』, 127쪽

김승태, 김승태, 『신사참배거부항쟁자들의 증언: 어움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 다산글방, 1993,

391~394쪽

김문제, 『수진제단-재건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재건서울중앙교회, 1963, 37~44쪽.

최병문, 『순교사 제1집: 주기철 목사편』, 대한기독교순교자기념사업회, 1959, 69쪽

심군식, 『손명복 목사의 생애와 설교』, 도서출판 영문, 1996, 62~63쪽.

김승태, 앞의 책, 139~140쪽.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終)(20)







1. 귀향한 가족들

1939년 가을,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갔던 장녀 이정희와 장남 이정빈, 그리고 차녀 이수옥과 아내

신을라는 3년간 평양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밀양 상남면 마산리로 귀향하게 되었다. 이인재가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어 있었으니 그 가족들의 고생이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 평양서 낳은

딸인 이수자는 밀양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병으로 그만 죽고 말았다. 1944년, 장남

이정빈은 상남초등학교 4학년에 전학(轉學)하게 되었다. 교사들이 이정빈이 신사참배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슬며시 눈감아 주면서 그의 전학을 허락해 준 것이다. 숨막히는 시절, 너무도 답답한

일들이 많았던 때였지만 그래도 고마운 분들이 더러 있었다. 1945년,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이정빈이

선교사님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학교 친구들에게 전달한 일이 있었다. “사이판에서 왜놈들이

전멸했다더라. 왜놈들이 망해야만 우리 조선이 속히 해방될 수 있대.” 그때 마을에서 부자로 통하던

강씨네 아들이 부동자세를 하면서 대뜸 이렇게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고노야로!!’ 그러면서

정빈이 한 말을 일본 순사들에게 일러준다는 것이었다. 이정빈은 아버지인 이인재 전도사로 인해

일본 순사들로부터 너무도 많은 감시와 tm트레스를 받고 살았기 때문에 일본 순사라는 말만 나와도

바지에 바로 오줌을 살 정도였다. 그날 정빈은 이 강씨 아들에게 얼마나 많이 얻어맞았는지 모른다.

그 후로 이정빈과 그 가족들은 숨을 죽인 채 일본의 패망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다.



2. 1945년 8월 15일

1945년 8월 15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원자탄의

위력을 알지 못하는 일본인들에게 미국은 미리 피신할 것을 알렸고 아주 작은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그 위력은 대단하였다. 원자탄이 떨어지는 순간 번쩍하는 강한 빛살이 눈을 부시게 하더니

버섯구름이 치솟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녹아 내렸다. 생물이고 광물체이든 간에 그냥 허물어지듯

녹아내려 버린 것이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한 후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히로시마에 실험용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이 놀라운 위력을 보고도 항복하지 않을 경우 다시

다른 장소에 원자탄을 투하하겠다.”그러나 일본은 그 무서운 원자탄의 위력을 보고서도 항복을 하지

않았다.미국은 두 번째 원자탄을 나가사끼에 투하하였다. 미국의 힘을 과시한 것이다.그리고 B29

8백대를 일본 상공에 날렸다. 엄청난 폭격이 가해졌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궁정 방공호 속에서

각료들을 불러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었다. 그리고 8월 15일 정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면서고 조선은 일본의 손에서 해방되었다. 조선 천지에 “만세”

소리가 메아리쳤다.



3. 1945년 8월 17일, 출옥

그러나 평양 형무소 내에서는 아무런 낌새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간수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만 급급하였기 때문에 이틀이 지난 후 8월 17일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해방의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고 출옥준비가 진행되었다.이인재 전도사는 간수의 지시대로 형무소 사무실로

나갔다. 함께 투옥되었던 여러 신앙의 동지들이 앞서 나와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이기선 목사, 손명복 목사 등등.서로 껴안으며 반가워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한 목사를 부축하여 맡겨진 짐들을 챙겼다. 옥분

밖으로 나섰다. 옥문 밖에는 밤 11시가 되었는데 출옥 소식을 듣고서 많은 성도들과 가족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일행은 성도들이 마련해 온 인력거를 타고 실려 평양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늦은 밤 성도들의 찬송소리가 온 평양 하늘에 울려 퍼졌다.출옥성도들은 안이숙 선생

모친의 집으로 갔다.그리고 이기선 목사의 인도로 감사예배를 드렸다.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출옥성도와 함께 한 성도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감격에 젖어 있었다.식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엷어진 창자가 그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새벽이 오기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새벽

4시경 모두 산정현 교회로 갔다. 그리고 산정현 교회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그냥 감격과

감사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집회는 2개월간 계속되었다.



4. 가마다 판사의 고백

이인재 전도사는 지난날들을 회상하면서 생각에 잠겨 들었다.5년 4개월간 평양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어려움을 참으며 투쟁하여 왔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예심재판을 받으면서 가마다 판사가 ‘일본 천조대신을

일본국조로 인정하는가?’라고 묻는 말에 엉겁결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 부분이었다.

이인재는 이날 이후부터 왜 내가 ‘그럴 수 없다’고 부인하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를 종종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인재는 1945년 8월말, 예심판사였던 가마다를 찾아갔다.한 때는 당당한 권세를

업고 날아가는 새라도 떨어뜨릴 위엄을 가졌던 가마다 판사였다. 그의 말 한 마디면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였다.그러나 이제는 일본이 패망하였고 그는 패전국의 국민으로 풀이 죽어

있었다. 곧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신세였고, 혹 돌아가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피살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였기에 그는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이인재 전도사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가마다상

있습니까?”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십니까?”하인인 듯한 사람이 문도 열지 않은 채 되물었다.“나는 구니모토(國本)라는 사람인데

가마다상을 만나고 싶어서 왔습니다.”“잠깐 기다려 주십시오.”안으로 되돌아갔다가 얼마 후 다시

나와 말했다. “이 문은 철폐하였으니 저쪽 뒷문으로 오십시오.”이인재 전도사는 언덕으로 올라가

나무 그늘 밑에서 잠시 더위를 식혔다. 얼마 후 뒷문이 열리면서 하인이 나와 손짓을 하였다.그를

따라 이인재는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 안내 되어 잠시 기다렸다.가마다는 자리에 누워 있었던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나왔다. 재판 할 때의 위엄은 사라지고 평범한 보통사람의

미소로 그를 맞아 주었다.“아 구니모도상 얼굴이 훤해 보이시니 참 좋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지요?

본의 아니게 많은 고통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함께 고생하셨던

친구분들 다들 안녕하십니까? 아, 인사가 늦었네요. 구니모도상 귀국의 독립을 축하드립니다.”

판사로서 또 죄인으로 그렇게 만났던 그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말씨가 겸허하긴 하나 힘이 없었다.

가마다를 만나러 온 것은 지난날의 잘못이나 억울한 일을 따지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구구한

인사나 또 자나간 일들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용건만 이야기하고 떠나고

싶었다. 기회가 없을까봐 서둘러 찾아 온 것이었다. “저, 말씀 드릴게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이인재

전도사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가마다는 꼭 죄수가 법관 앞에 선듯 겸손히 머리를

숙인 채 말하였다. 완전히 바뀐 형편이었다.몇 주 전만 하더라도 가마다는 대일본 제국의 판사였다.

이인재를 재판할 때 위협도 하고 언성도 높이며 언제나 당당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다른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 심문(審問)을 하면서 ‘천조대신을 일본국조로 인정하는가?’ 하고

물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때 내가 엉겁결에 ‘네,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돌아와서는 왜 그럴 수 없다고 부인을 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불려가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천조대신은 신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재판정에 불려가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이 일본으로 가기 전에 당신 앞에서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천조대신은 신이 아닙니다. 일본이 조작해 낸 것에 불과합니다.”이인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가마다 판사는 고개를 들면서 몇 차례 절을 하였다.“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잘못한 질문이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런 걸 물어본 내가 잘못하였습니다.”“그렇지

않습니다. 가마다상 당신은 일본 사람이니 일본의 풍습과 관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로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당신에게 오히려 전도를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습니다.”“당신은 참으로 훌륭하신 신앙인이십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가마다는 계속 절을 하면서 이인재에게 사과의 뜻을 표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늦게나마 늘 마음에 꺼림직하게 여겼던 것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 가벼워졌다.

마치 목에 걸려있던 가시를 뽑아 버린 듯 상쾌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가마다에게 인사로 이런

말을 했다.“일본이 일억국민을 총동원해가며 전쟁에 승리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패전으로 결말을

짓게 되어서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되었네요. 한

쪽이 좋으면 한 쪽이 나쁘게 되고 한 쪽이 나쁘면 한 쪽이 좋아지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가 속담에 ‘음지(陰地)가 양지(陽地)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맞는

말인 것 같군요.”그 때 가마다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구니모도상, 당신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겼습니다. 당신의 신은 참신이십니다. 나는 사실 당신들을 접촉하면서 당신들이 진실 된 신앙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많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사실 당신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들을 오래 구금시켜둔 것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었습니다.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경찰 당국에서 너무 가혹하게 취조를 해가며 기소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예, 잘 알고 있습니다.”가마다 판사는 한참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구니모도상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천조대신은 가상(假想) 신이었어요. 아니, 신도 아니지요.

처음부터 천조대신은 없는 것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정말 부질없는 일을 한 셈이지요. 당신들이

섬긴 여호와는 참 신이십니다. 우리는 12월 이내로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는 나도 당신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될련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너무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지금 내 심정 같으면 당신들 같은 위대한 기독신자가 있는 이 나라 국민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올해 안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가야만 합니다.”

이인재 전도사는 가마다의 말을 들으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그는 일어나 가마다의

손을 잡고 작별의 인사를 하며 권면하였다.“아무쪼록 무사히 귀국하시기를 바라며 꼭 하나님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이인재 전도사는 가마다 판사의 관사를 나와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벌써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고노야로’는 일본말로서 ‘너, 이 자식!!’ 이란 욕설이다. 이인재

전도사의 장남인 이정빈은 이후에 연세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우리나라가 최초로

교육부가 발령한 계명대학교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계명대학교에서 부총장으로 재직을 했으며

정년퇴직 후 현재 대구에서 살고 있다. 이정빈 교수는 그 날 이후 지금까지 경찰만 보면 왠지 모르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고백한다.



- 신사참배반대운동가 출옥성도 이인재편은 이번 기고문을 마지막으로 그 연재를 마치게 되었다. 이인재 전도사의

해방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밀양신문 기고문들을 모아서 출간될 ‘신앙의 투사, 이인재’라는 책자에 담아볼 계획이다.

그동안 본란을 통해서 이글을 읽어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역사의 뒤안길에서 살펴본 자랑스런

밀양인인 이인재 전도사를 통해서 필자 자신은 밀양인으로서 크나큰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그런 동일한 감동이 있었으리라 믿는다. 바라기는 더 많은 자랑스런 밀양인들이 이 지면을 통해서

알려졌으면 한다. 기회를 주신 모든 밀양신문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박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