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이단의 기준, 이단에도 구원 가능성 있다.
최삼경 목사의 이단문제 일문일답
이단에 속한 자는 모두 지옥에 가는가?
2005년 06월 10일 (금)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어떤 사람, 어떤 단체를 사이비 이단이라고 할 때 우선 기본적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거나 단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이단에 속하기만 하면 모두 구원받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과연 이단에 속한 자는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른 답을 얻으려면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구원의 문제요, 다음은 이단이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구원은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이냐는 것이며, 다음은 이단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구원의 문제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원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연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요, 다음은 귀납적으로 인간의 믿음의 측면에서 보는 것입니다.
먼저 구원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같은 진흙을 가지고 귀한 그릇도 만들고 천한 그릇도 만드는 토기장이 비유까지 들어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 앞에 인간의 믿음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의무를 약화시키고, 반대로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즉 구원 얻도록 예정된 자는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것이요, 또 구원 얻지 못하도록 예정된 자는 믿어도 구원 얻지 못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고 해서 인간의 의무인 믿음이나 전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이요, 역시 인간의 의무인 믿음과 전도를 강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의무를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또한 인간의 의무를 강조하여 이 두 가지가 조화 있게 나타납니다. 즉 인간에게 믿음과 전도를 촉구하면서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의무인 믿음과 전도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인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도 구원받을 믿음인지 아닌지 판단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오는 문제는, 이단 문제는 구원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가정을 파괴하고 금품을 갈취하며 부녀자를 폭행하는 등의 부도덕한 일을 자행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이단 문제의 본질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단 문제의 본질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교리적 문제입니다. 즉 이단이란 성경이 말하고, 사도들의 전승 위에서 2천 년 동안 교회가 믿어오고 주장하던 구원론을 부정하고 침해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이서 1장 9절에서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교훈의 종교",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렇다면 이단자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믿음을 확인하고 그에게 구원을 확신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아닌 것처럼, 이단에게도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님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단들은 본질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단에 속하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본질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단과, 그러나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이단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통일교나 JMS나 최근의 천부교나 영생교 등은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교리적 체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이단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락교회 김기동 씨 같은 경우 이단사상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에 활동하는 이단 중에 이단 사상이 가장 넓게 퍼져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신론에도, 기독론에도, 인간론에도, 계시론에도, 창조론에도, 천사론에도, 성령론 등에서도 이단사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전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속에 있어도 김기동 씨의 사상과 상관없이 바른 죄관과 구속관과 영접관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단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을 비난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또한 이단에 속한 자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이단에 속한 사람은 다 구원받지 못한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요, 또한 이단자도 구원받는다고 하여 이단에 속한 교회를 나가도 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은 죽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겠다고 낚시질을 하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시인하는데도 이단이 될 수가 있는가?
2005년 06월 10일 (금)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위의 질문이 형식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은 진정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이단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시인하는데, 왜 이단이라고 하느냐?" "이단이라고 지칭된 사람들도 예수를 믿고 있고, 오히려 더 뜨겁게 믿고 있는데 왜 이단이라고 하는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단자들이나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사용되고, 결국 순진한 성도들을 속이는 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질문에서 문제의 핵심은 한 가지라고 할 수 있고, 또 두 가지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하나는 "믿는다는 예수가 어떤 예수냐" 하는 점이며, 다음으로는 "믿는다는 주님은 어떤 주님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예수를 믿느냐"와 "어떤 주님이냐"의 문제는 상통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인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그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닐 때 결국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이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기독론입니다. 즉 모두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은 온전하신 인간이요 온전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한 인격 속에 두 성품(인성과 신성)이 온전히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현설주의(도케티즘)자들은 "예수님이 신으로 오셨고 신으로 죽으셨다"고 주장하여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 되었고, 그리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이 하나님의 신성과 다르다"고 주장하여 신성을 제한하다가 이단이 되었고, 아볼로나리우스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와 다르다"고 주장하여 인성을 제한함으로 이단이 되었고, 에비온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여 이단이 되었고, 그리고 유디키안은 예수님의 신성 안에 인성이 흡수되어 있거나 두 성품이 혼합되어 제3의 종류를 만들어 냈다고 하는 일성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들이 다 예수를 믿었지만 그러나 이단이 된 것은 그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실례를 한국교회에서 들어보겠습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많은 이단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는 베뢰아아카데미(성락교회)의 김기동 씨의 경우입니다. 그도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고 또 그를 추종하는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예수를 살펴보면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닙니다. 즉 김기동 씨가 믿는 예수는 그 인성에서도 신성에서도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은 에비온파처럼 부정하고, 인성은 아볼로나리우스처럼 제한하고 있습니다.
김기동 씨가 보는 신성은 이렇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신의 생애가 아니고 사람의 생애입니다. 물 위를 걸은 것은 사람이신 예수가 걸은 것입니다. 사람이 걷는 것이니 보편적인 것입니다. 무덤이 열리기 전까지 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느 한 부분이 신이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베뢰아아카데미 9기생 테이프 19-2)라고 하고, "예수는 성령을 말씀하실 때마다 "내가 가면 그가 오시리니" "오실 때에" "오시면" "너희와 함께 계시면" 하여 존칭을 쓰셨습니다. 이처럼 주님도 성령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존칭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자신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에, 곧 피조물과 함께 하시어 피조물이 수태되는 것같이 사람 몸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땅에서 식물을 먹고 피곤하여 저녁에는 주무시며, 죽임을 당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곧 인자로 계셨기에 그 동안은 성령을 자기와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일체되시지만 인자 예수가 받은 영광보다 성령은 더 크신 영광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성령을 알자, p.13)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몸을 입고 있을 때 신이 아니란 말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김기동 씨가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도 성경이 말하는 인성이 아닙니다. 그가 믿는 예수님의 인성은 죄성만 제하고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인성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1장 1절, 14절에 근거하여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이 말씀은 요한복음 6장 63절에 의해 곧 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로서 영은 항구적 존재이니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의 영과 같은 수준으로서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베뢰아아카데미 9기생 테이프 9-2)라고 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육체는 영입니다.
그의 흘리신 피는 영입니다"(베뢰아 사람 9권, 1989년 3월호 p.44)라고 하였습니다. 즉 아볼로나리우스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서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와 다르다는 말로 "영적 육체"(spiritual body)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의하면 굳이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할 의미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뜨겁게 믿고 있다고 하는 김기동 씨이지만 그 예수가 다른 예수이기 때문에 이단이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비록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고 해도 어떤 주님으로 믿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즉 노란 예수를 믿는다면 그 구원도 노란 구원일 것이고, 빨간 예수라면 그 구원도 빨간 구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다르면 그 구원의 성격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즉 병만 고쳐주는 주님이거나, 이 땅에서 영생하게 하는 주님,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주님이라면 그가 말하는 구원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여도 역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서 1장 9절에서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교훈의 종교입니다.
=============================================================================
이단규정 기준, 교리인가 성경인가?
2005년 06월 10일 (금)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Q: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이나 사람들이 자신들은 성경적으로는 이단이 아닌데 교리적으로 이단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이단을 규정해야지 교리를 기준으로 해서 이단을 규정하느냐"고 항변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은 성경입니까, 교리입니까?
A: 이단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의해 왼쪽도 오른쪽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오른쪽이 왼쪽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단이 아니라고 하기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만일 그 판단이 주관적으로 진실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준의 차이에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이단 규정은 최고의 형벌입니다. 만일 이단 규정을 감정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규정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극악한 죄라고 봅니다. 이단된 자보다 이단되게 한 자의 죄가 더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기준을 잘못 선정하여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도 무서운 죄입니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한다는 것은 크리스천에게 영적으로 가장 무서운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내 신앙과 다르면 이단이며, 내 교단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우선 제일 많이 대두되는 문제는 "이단 규정의 기준이 성경이냐 교리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주로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이나 단체들이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받은 안식교와 윗트니스 리(회복교회, 지방교회), 그리고 김기동측(성락교회)에서 주로 한 말이었는데 그들을 옹호하는 교계의 일부 신문들에 의하여 한국교회에 확산된 측면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단 규정 기준은 교리라는 말과 성경이어야 한다는 말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씩 나누어서 답하겠습니다.
먼저, 이단 규정의 기준을 교리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이단 문제의 본질은 교리적인 문제이지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교리적이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이단 비판의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교리이다"라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을 본질적으로 윤리적 문제에서 찾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교리에 대하여는 너그럽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엄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녀자 성폭행을 했다거나, 금품 갈취를 했다거나, 가정 파괴를 했다고 하면 이단으로 생각하고, 삼위일체관이 잘못되었다거나 기독론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윤리적 문제가 중요하지만 그러나 윤리적 문제가 이단 규정의 본질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둘째, 이단 규정의 기준이 교리라는 말과 이단 규정의 기준이 성경이어야 한다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는 다른 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그 기준이 바로 교리인 것입니다. 세상에 인생관 없이 사는 사람이 없듯이, 세상에 교리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정리된 인생관은 아니더라도 모두 내재된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정리된 교리는 아니더라도 내재된 교리는 최소한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이단을 규정해야 한다고 하고 교리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마치 자신은 교리는 없어도 성경적으로는 옳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이 곧 진리요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그것을 성경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교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번 성경적이라고 생각한 잘못된 생각을 영원히 고칠 길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제 저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믿고 주장하다가 오늘 이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되면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이 아니라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수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수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 비판 기준이 교리가 되지 말고 성경이어야 한다는 말처럼 옳게 보이는 말이 없지만 그러나 그 말처럼 이단들에게 악용되는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누가 이단이라고 해야 이단인가?
2005년 06월 10일 (금)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Q: 최근 들어 많은 이단들이 한국교회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단이라고 하면 저기서는 이단이 아니라고 하고, 이 사람은 이단이라고 주장하는데 저 사람은 이단이 아니라고 변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논쟁이 감정 싸움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누가 이단이라고 해야 이단인 것입니까?
A: 기독교 역사는 어떤 점에서 이단과의 논쟁과 싸움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단자들이 나타나서 이단 사설을 주장해 왔고, 이에 대하여 정통교회는 반박하고 또한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단자들과의 논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교단이나 종교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경우요, 또 하나는 개인적으로 공방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이단 논쟁은 사실상 선명하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단체라도 사람 없는 단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개인의 입장과 신학이 집단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리우스(Arius)라는 자는 예수님의 신성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Homoousios)하지 않고 유사(Homoiousios)하다고 주장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제한하다가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니케아(Nicaea AD. 325)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규정은 비록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지만 사실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라는 개인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베소회의(AD. 431)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Nestorius)도 씨릴(Cyril)이란 사람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누가" 이단이라고 했느냐보다 "왜" 이단이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이 이단 논쟁을 벌이는 것과, 단체가 이단 규정을 하는 것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 점을 살펴봅시다.
먼저 개인이 이단 논쟁을 벌이는 경우입니다. 사명도 하나님의 역사도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단과 싸우는 일이란 참으로 격려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본질적으로 거짓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난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이비 이단과의 싸움은 전투적 성격이 더 크기 때문에 많은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 연구가들에게 많은 격려와 후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은 다음과 같은 약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편견의 문제입니다. 개인이란 아무리 객관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자기 편견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것을 걸러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 모든 일은 상대적이기 마련입니다. 높은 것도 더 낮은 곳에서 볼 때만 높은 것이요, 더 높은 곳에서 보면 역시 낮은 곳이 됩니다. 평지도 분지 속에서 보면 높은 산이 되는 것입니다. 검은 것도 더 검은 것보다는 흰 것이요, 흰 것도 더 흰 것보다는 검은 것이 되며, 왼쪽도 오른쪽에서 볼 때만 왼쪽이요, 더 왼쪽에서 보면 오른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은 선하다고 보는 경우가 있고,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은 악하다고 보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단 논쟁은 이런 상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경우 편견이 문제입니다.
둘째, 개인은 단체보다 이단 논쟁을 감정적인 문제로 발전시킬 위험성이 더 크다는 점입니다. 개인이나 교단의 이해 때문에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감정이 개입되면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셋째, 가장 심각한 문제로서, 개인의 약점을 교회가 뒤집어쓸 위험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어떤 한 개인에게 이단문제를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그 개인의 사상적, 윤리적 약점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이단자들의 공격 목표가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결국 교회가 그 약점을 감당해야 하는 피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 연구의 위험성과 난해성이 때로 이단 연구가를 영웅주의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요, 지양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넷째, 개인 연구가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상당수의 이단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들을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고소하고 협박하고 심지어 테러까지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를 희생시킨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실제로 한 이단연구가를 죽음으로 넣고만 경험이 있습니다.
이제 공적인 단체가 이단을 연구하고 규정하는 경우입니다. 단체는 개인의 약점을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집단의 감정도 개인의 감정 수준을 못 벗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요, 어떤 점에서 집단 이기심은 개인의 편견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이 됩니다. 더욱이 힘이 항상 진리인 것은 아니라는 점과, 다수의 생각보다 선각적인 한 개인의 생각이 훨씬 옳았던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한국교회가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이단 문제에 대처해야 함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단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종교회의를 통해서 이단을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회의도 후대로 갈수록 천주교라는 한 집단의 변호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객관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이제 이단 문제를 취급해줄 범세계적 기구가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비록 세계교회협의회(WCC)라는 기구가 있지만, 이제 이 기구는 이단 문제까지 취급할 힘이나 기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구 안에서조차 이단 못지 않은 사상이나 행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 논쟁이 생길 때마다 이단이라고 비판을 받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변증의 행태는 두 가지입니다. 개인 연구가들에 대하여는 "너 개인이 이단이라고 해서 이단이냐?", "누가 네게 이단을 정할 권리를 주었느냐?"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교단이나 단체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면 "너희 단체가 한국교회의 종교경찰이냐?", "너희 교단이 한국교회의 대법원이냐?"는 등의 반론을 폅니다.
이제 이단을 규정할 세계적 기구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교단적으로 이단을 규정하고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우선, 일차적으로 이것이 제일 바람직하고 또한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이미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이 그렇게 하고 있음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단이 이단을 규정할 때는 두 가지 제한된 의미의 활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 교단의 교리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요, 둘째는 형식적으로 그 교단의 교인들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행해지는 사역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교단과 교단의 교리적 차이점이 이단에 대한 반대입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실정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을 저 교단에서 면죄부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 문제에 대해서만은 범교단적인 기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경우 현재 한기총이나 NCC같은 기구에서 이 일을 했으면 가장 바람직하다고 사료됩니다. 그리고 이단 문제는 찢어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운동을 크게 자극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누가 이단이라고 해야 이단입니까? 개인이든 단체든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역사적 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기준으로, 그리고 사도들이 물려준 그 전승을 기준으로 이단을 규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
이단을 비판하면 비성경적인가?
2005년 06월 10일 (금)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Q: 성경에 보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단을 규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이 아닙니까?
A: 먼저 위의 말을 긍정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틀림없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비판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말하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더 분명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자책할 것을 찾지 못했어도 의롭다고 할 수 없음은 하나님의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그렇습니다. 비판이란 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죄 없는 자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림으로 당사자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심지어 잘못된 사형이나 종신형을 내려 한 사람의 모든 가능성을 빼앗아 가버린 안타까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자들이 많을 것이며, 이중에는 사후에조차 진실이 밝혀지지 못했던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이단 규정은 이보다 훨씬 더 악한 일입니다. 비록 잘못된 이단 규정이 그의 영혼을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이 땅에서 영적 가능성을 모두 빼앗아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동기와 목적으로 그리고 잘못된 기준으로 이단을 정한다면 이단으로 규정된 자보다 이단을 규정한 자가 훨씬 더 악한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편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내 편은 악한 자라도 선하게 판단하고 네 편은 선한 자라도 악하게 판단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악한 자 속에 있는 작은 선이라도 확대하면 그를 선한 자로 만들 수 있고, 반대로 선한 자 속에 있는 작은 악이라도 확대하면 그를 악한 자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비판을 조심해야 하고 또한 어떤 점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단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의 본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어떤 비판이나 어떤 판단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비판의 기능 자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아무도 아무 것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물론 톨스토이(L.Tolstoy) 같은 사람은 "비판하지 말라"는 말을 법정의 심판까지도 부정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오해하거나 고의적으로 성경의 주장을 왜곡시키려는 자들의 주장입니다.
과연 성경이 모든 판단을 금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봅시다. 바울은 판단 자체를 모두 금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교회 문제를 가지고 세상법정에 송사한 것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고전 6:1-2). 바울은 성도가 심지어 천사까지 판단할 것이라고 했으며(고전6:3)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고전2:15). 더욱이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고 한 그가(고전4:5) 음행하는 자들을 이미 판단하였다고 하였다는 것이(고전5:3) 무엇을 말해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판단, 모든 비판을 금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해야 할 판단을 피하고 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단문제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죄수가 없는 감옥이나 법정, 병자 없는 병원, 전쟁 없는 군인들만큼 무익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단이 없다면 이단 연구도, 이단 비판도 무익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한국교회에는 이단 연구가가 필요 없을 만큼 이단이 적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계 교회 역사에 한국교회만큼 이단 문제가 심각했던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이비 이단의 피해는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많은 이단, 심각한 이단 문제에 적은 비판, 적은 연구로 대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문제가 일 만이요 일천만이라면 그 대처는 십이요 일만 정도 밖에 되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객관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자료의 객관성과 비판 기준의 객관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료의 객관성이란 확실하고 정확한 증거를 가지고 비판해야 한다는 말이요, 비판 기준의 객관성이란 자기 기준이 아닌 역사적 교회의 입장에서 비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비판 기준의 객관성입니다. 어차피 인간의 기준은 다원적이고 다변적인 것입니다. 이 편에서 보면 이것이 옳아 보이고, 저 편에서 보면 저 것이 옳아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 비판은 성경말씀에 따라서, 그리고 사도들의 전승에 의해 비판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단자들이나 그들을 옹호해 주는 자들의 말과 글을 보면 자료의 기준이나 비판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문제 삼지 못하고 이단을 규정하는 것이 교회의 일치를 해친다거나, 오히려 이단을 양산한다는 식의 막연한 비판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단을 경계하여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한 2서 1:10-11)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하려면 먼저 이단자가 누구인지 판단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쉽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단자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라. 단, 진리를 따라, 바른 교리를 따라, 그리고 사랑으로"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