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미국 한인 교회 현실
미국 이민교회의 현실과 문제점
송 영 석
(대학원 선교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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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서론
Ⅱ. 미국 이민과 재미 한인교회의 역사적 배경
1. 한국인의 미국 이주 역사
(1) 초기의 이민과 그 특징
(2)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민
2. 한국인과 다른 아시아인의 이민 비교
(1) 급성장한 이민
(2) 젊은 층의 이민
(3) 교육 수준이 높은 이민
(4) 경제 생활이 활발한 이민
(5) 흩어져 사는 이민
(6) 교회가 많은 이민
3. 미국 이민교회의 역사
Ⅲ. 미국 이민교회의 역할
1. 혼합종족 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
2. 이민교회의 여러 가지 역할
Ⅳ. 미국 이민교회의 현실과 문제점
1. 목회자의 고충
(1) 신도들의 비판적 자세
(2) 헌신된 교인의 부족
(3) 떠돌이 교인의 문제
(4) 한국식 교회성장의 기대
2. 신도들의 불만
(1) 목회자의 자질 문제
(2) 생동감 있는 가르침의 부족
(3) 권위주의적인 접근 방식
3. 미국 이민교회의 깊은 문제점
(1) 문화적 고립 상태
(2) 자녀세대와의 단절
(3) 교회 분립의 시련과 직분의 남발
(4) 이단침투의 용이
(5) 지나친 교회 수의 문제
(6) 개교회 문제의 조정
(7) 목회윤리의 문제
Ⅴ. 미국 이민교회의 나아갈 방향
1. 장기적 방안
(1) 이민교회와 한인교회 사이의 장래에 대한 연구
(2) 2세 사역자의 발굴과 양성
(3) 이민교회의 연합적인 구도에 대한 논의와 확립
2. 단기적 방안
(1) 목회자들의 계속 교육프로그램
(2) 평신도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
(3) 가정 목회원의 설립
(4) 개교회 실정에 맞는 외향적 목표의 설정
(5) 공동체 의식의 함양
3. 미국 이민교회 특유의 가능성
(1) 세계선교로의 교량 역할
(2) 특수대상에 대한 선교
(3) 한국교회에 대한 지원
(4) 미국 교파 내에서의 기여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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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재미 한인교회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재배농장으로 이민해 온 한국인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계속해서 도착함에 따라 한인사회는 발전되어 갔고, 거기에 따라서 한인교회의 교세도 확장되어 가게 되었다. 한인사회가 커짐에 따라 한인들의 활동무대는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에까지 확대되며 본토 대륙에도 한인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의 반면에 한인사회는 변화와 재편성 과정에서 혼란과 분쟁의 시련을 면치 못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이민의 중단, 국제정세의 변천 등이 혼란과 분쟁을 겪고 있던 한인교회들에게 위축과 정체의 시기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재미 한인교회는 혼란과 정체기 속에서 재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1968년 이른바 케네디 신이민법이 발효됨으로써 한국인의 미국 이민의 길이 넓어지게 되어 한인교회는 활기를 띠게 되었고 일대 부흥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드디어 재미 한인교회는 그 역사가 97년이 되는 이때에 이르러 수천의 교회를 가진 미국 안에서 가장 큰 교세를 차지하는 동양계 이민교회가 되었다.1) 물론 이러한 교회의 난립과 경쟁 등에서 오는 교포사회의 갈등과 분열과 불협화음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교회 수가 늘어가는 것에 대한 부정적 견해보다는 긍정적인 견해에 찬동할 수 있다.2) 한 교포 임상심리학자도 "한인교회는 꼭 필요하다. 한인교회는 많을수록 좋다."고 정신위생학적인 입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3)
이제 미국 한인이민교회는 곧 100주년 기념식을 거국적으로 전한인교회가 지켜야 할 때가 온다. 이러한 시점에서 미국에 있는 한인 이민교회의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고 2000년대를 생각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2000년대를 맞이한 한인 이민교회는 보다 큰 도전을 받고 있다. 따라서 사명도 크다고 본다. 아놀드 토인비의 "모든 도전에서 승리하는 민족만이 번영한다."는 말은 우리에게도 부합되는 말이다. 이민교회가 가진 문제들을 잘 정리·해결해 나가면 교포사회의 번영은 물론 조국과 미국 나아가 전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4)
본 고에서는 먼저 한국인의 미국이주의 역사, 다른 아시아인 이민과의 비교, 미국 이민교회의 역사 등 역사적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고, 나아가 이민교회의 역할, 이민교회의 현실과 문제점, 그리고 이민교회의 나아갈 방향과 그 특유의 가능성 등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Ⅱ. 미국 이민과 재미 한인교회의 역사적 배경
1. 한국인의 미국 이주 역사
한국인의 미국 이민은 한국내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형편이 극도로 혼란할 때에 이민의 물결이 일어나곤 하였다. 이것을 크게 두 기간(초기의 이민: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최근의 이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5)
(1) 초기의 이민과 그 특징
1945년 이전까지 한국이민은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한국의 혁신 정치가들과 사회개혁자들이 구 정권을 타도하려는 쿠데타(갑신정변)에 실패하고 국외로 망명했는데 그 일부가 미국에 입국한 것이다. 그들은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한국 해방 전후에 걸쳐 한국민 지도에 크게 헌신하게 된다. 그 대표적 인물이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김규식, 박영호, 서광범, 박용만, 윤치호, 신성구, 리강 등으로 그 연대는 1884년에서 1905년 사이의 일이다.6)
두 번째 이민의 물결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로 계약되어 입국한 약 7천명의 노동자들(남자 6048, 여자 637, 어린이 541)이다. 그 중 983명이 한국에 돌아갔고 약 2,000명이 미 본토로 이동해 갔다.7) 이러한 미국 이민의 역사는 그것 자체가 "특수한 상황"이다. 1902년 5월 9일 하와이 사탕재배자협회의 회장인 찰스 비숍(Charles R. Bishop)이 노무자를 모집하여 한국에 들어와 정부와 이민 조약을 맺게 되었다. 1902년 11월 16일에 신민원 설치 법률안(이민국)이 통과되어 민영환이 그곳의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데이빗 데쉬러는 동아개발회사를 차려서 광고를 내었다. 그 내용은 하와이에 건너가 일하게 되면 주 60시간에 한 달 봉급이 16불이며 주거비, 의료, 식사, 물 그리고 영어를 배우는 학교에 무료로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와 미국 상인 사이의 계약이 체결된 후 게릭(S. S. Gaelic)이 102명의 한국 이민자들을 싣고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 항을 떠나 항해를 거듭하여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것이다.8)
세 번째 이민은 수백 명의 학생들이 정치망명겸 미국에 들어와 주로 대학 공부를 하였는데 이 시기는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합병하고 압박하던 1910년 이후의 사건이다. 그들은 미국 국무성의 입국 허가를 받고 중국과 유럽을 거쳐 미국에 들어온 사람들로서 그들 유학생 총수는 891명이었며,9) 미국에서 피난학생이라 불렸고 한국에서는 신도(新渡)학생이라 불리었다. 이들은 국적이 없는 형편이어서 미국에 있는 대한 국민회가 보증하여 줌으로 특수 경우로 인정받아 입국이 허용되었다. 미국무성에서는 한국인들의 진정을 받아들여 "한국 청년으로 합병 이전에 국외에 거주하던 사람에 한하여 여행권이 없이 미국에 들어와서 수학함을 허가한다"고 결정하여 길을 열어주었다. 이때에 온 이민자들의 20%는 학업에 종사하고 나머지는 상업과 노동 등에 종사하며 지냈는데, 후에 이들이 재미 한인교회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10) 그리고 1921년부터는 일본의 한국 통치가 무관정치에서 문관 정치로 변하게 되어 일본 여권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렸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대부분 예수교회의 후원으로 입국한 사람들로서 취학 성적이 좋아 15%에 달하는 수가 박사학위를 받았다.11)
초기 한국 이민의 특징을 살펴보면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이민이었다. 또한 배경과 경제력과 학식과 기술이 없는 불모의 이민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민족을 사랑했으며 잃은 조국을 찾고자 애쓰는 애국적 순례자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을 영구히 살 나라로 생각지 않았고 한국이 독립되면 즉시 돌아가 조국에서 살기를 염원하며 지낸 애국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한국 독립을 위해 사우는 "자유의 전사"로 생각했고 중노동에 혹사 당하며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자금을 기꺼이 희사하는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며 살았다. 어떤 기록에 보면 1910-1945년 사이에 3백만불을 독립기금으로 봉납했다는 것이다. 이같이 한국 초기 이민이 민족주의 고취와 독립 사상 앙양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미국의 사회생활에의 적응과 사회정치 참여에는 적극성을 결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떠나온 나라를 사랑한 나머지 미국 안에서의 한국 이민생활에는 항구적인 설계와 창조적인 경륜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를 "숨겨진 한국 이민의 시기"라고 부른다.12)
(2)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민
한국이 해방을 맞이하기 직전에는 전쟁과 그 여파로 한국인의 미국 입국은 더욱 부진했었다. 김성락 박사에 의하면 1940년과 41년 사이에 미국에 입국한 사람들은 불과 4명이었으며 그들은 그나마 일본 정부의 협조로 성경책을 사기 위해 왔던 목사 2인과 학생 2명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 입국한 사람들의 형편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1946년부터는 한국인 국제 결혼 부인들이 입국하기 시작했으며 뒤따라 주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들어오고 또 유학생들이 도미하여 영주권을 얻어 정착하는 수가 증가하여 갔다. 그러나 제 2차대전 이후에 한국과 미국은 특별한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이 활발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은 미국의 서양인 우대 정책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현재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이민법은 1963년 고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의 상하양원 앞으로 이민법의 개정을 요청함으로 1965년에 통과되고 1968년 7월 1일부터 발효하게 된 것이다. 이 이민법에 의하면 서반구에서 12만명, 동반구에서 17만명, 도합 29만명의 이민을 매년 받아들일 수 있게 했고 이른바 7개 우선순위의 심사기준을 만들어 실시했던 것이다. 그 우선 순위라는 것은 미국시민의 자녀, 영주권 소지자의 미혼자녀, 미국에 필요한 기술자와 과학자, 미국 시민의 기혼자녀, 미국 시민의 형제 자매, 미국에 필요한 노동자, 정치적 망명자 또는 피난민의 구분을 두고 순위를 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선순위에 의하여 심사가 진행되지만 1개국에서 2만명을 넘지 못한다는 단서가 있음으로 원칙적으로는 2만명의 한국인이 매년 이민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민국의 발표에 의하면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10여년의 기간에 영주권을 받아 이민을 하게된 한국인은 모두 17만 5천명에 달하고 있다.13)
이렇듯 한국 이민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점차로 미국 사회 안에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고, 특히 최근의 이민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1965년 소위 케네디 이민법이 통과된 이전과 이후로 갈라서 서술된다. 1965년 이전의 이민은 주로 미군과 결혼한 전쟁 신부들과 1950년 이후에 생긴 전쟁 고아들과 일반 어린이들의 미국으로 입양된 것이 대부분으로, 이들 이민은 특수 상태의 이민이었기 때문에 이민 온 후에 그들이 겪어야 했을 고독과 불안, 그리고 답답한 사정들이 한없이 많았을 것이 예상된다. 1965년 이후의 이민은 속칭 케네디 이민법으로 한국 이민이 비교적 빠른 속도로 성장되었다.14)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이민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한인사회는 점점 성장해가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기반도 굳혀가고 있었으며, 이제 한인교회들은 재미 한인교회 역사 이래로 최대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교회는 곳곳에 신설되었고 교인수도 증가하고 자체건물을 마련하는 교회도 많아지게 되어 교세는 날로 발전하였다.15)
2. 한국인과 다른 아시아인의 이민 비교16)
한국 이민이 미국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으며 그들의 특징은 무엇이고 그들의 문제점들은 무엇인가를 사회학적 견지에서 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한국과 경제, 문화, 정치적으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생활의 공통점이 가장 많은 터이며, 뿐만 아니라 한국보다 일찍이 미국 이민이 형성된 민족들이기 때문에 이들 이민의 표본들과 비교 연구하는 것은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사료된다. 특히 한국이민이 활성화된 1970년대 이후의 한국이민의 특징과 문제점을 찾기 위하여 이하 6가지로 나누어 중국 및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며 검토하고자 한다.
(1) 급성장한 이민
한국 이민의 시작은 1903년이지만 그것이 만 명을 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본격적인 이민은 새 이민법(1965)이 발효가 되는 1970년대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으로, 1950년까지 불과 17,000명이었던 한국 이민은 1970년에 113,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에는 해마다 20,000명 이상이 입국을 했는데 1976년부터는 평균 30,000명이 미국으로 이주를 하였다. 즉 한국 이민은 다른 아시아인의 이민과 비교하여 1970년대를 기점으로 가파르게 그리고 높이 급성장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젊은 층의 이민
한국의 이민은 그 연령이 비교적 젊다. 이민자 중 20세에서 39세 사이의 인구가 1970년에는 63%, 1976년에는 45%로서 미국전체의 인구연령 26%에 비하면 아직 많이 젊다. 또 50세 이상된 인구는 1970년에 3%, 1875년에 5%로서 미국 전체 인구 연령 19%에 비하면 역시 젊었다. 시카고 지역에서 행한 조사에 의하면 중국 이민의 평균 연령은 39세이며, 일본이 47세인데 비해 한국은 34세이다. 아시아 3국 이민 중에서 일본의 평균 연령이 제일 높고, 다음이 중국이고 한국이 가장 젊은 이민이다. 또한 60세가 지난 인구는 중국이 8%, 일본이 2.7%인데 반하여 한국은 2%에 미달된다. 사회학자 최복림 교수는 "한국전쟁 이래 미국에 이민온 한국인들은 연령층에서 보면 여자의 경우 20대, 남자의 경우 30대가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연령층은 가장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사람들로서 이들 모두가 미국 사회 각계 각층에서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한국 이민 가정은 젊은 남녀 부부로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나이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가정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새로온 이민과 젊은 층의 이민에게도 문제는 없지 않은데, 한국 이민의 정신질환과 가정의 문제들이 매우 심각한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3) 교육 수준이 높은 이민
한국인은 미국의 어느 다른 인종보다 교육수준이 높다. 1970년대에 미국인구조사에 의하면 25세 이상 인구 중 대학 4년의 교육을 마친 수는 일본인 15%, 중국인 21%, 필리핀 21%, 한국인 36%, 미국 전체 11%로 나타났다. 그리고 당시 최복림 교수와 다른 조사단이 발표한 숫자도 한국인이 4년제 대학을 마친 비율이 60% 정도 되는 것으로 한국인의 교육수준이 뛰어나게 높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들에게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높은 교육이 도리어 자신을 더욱 좌절케 할 수가 있었다. 한국 이민은 새로 온 나그네로서 언어의 장애 때문에 자기의 전공 분야에서 전문직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히 많다. 이같은 상황에서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깊은 좌절감을 느낄 것이 분명한 것이다.
(4) 경제 생활이 활발한 이민
한국인은 새로 이민 온 자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제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그 이유로는 높은 교육적 배경, 작으나마 자본을 갖고 온다는 점, 근면성과 강력한 생활 의욕 등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80년 전국 인구 조사를 통하여 알려진 바에 의하면 L.A.의 인종별 중간층 가계수입은 아시안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복림교수의 시카고 조사에 의하면, 한국계 이민의 평균 수입은 일본계 시민권자의 수입보다는 낮지만, 반면에 중국이민의 것보다는 높다. 이것은 최근에 이민을 온 사람들치고는 놀랄만한 발전인 것이다. 이같은 경제적 성과를 올리기 위하여 한국 이민은 불철주야 열심히 뛰고 있다. 1978년 로스앤젤레스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의 가정 중에 98%의 남편과 63%의 아내가 전적으로 취업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숫자는 미국인의 취업률보다 매우 높은 것으로 미국의 가정 부인의 취업률은 46%이다. 한편 한국 이민의 직업능력도 누구보다 높다. 그들의 높은 교육배경 때문에 전문직에 종사하는 율이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순으로 높다.
(5) 흩어져 사는 이민
본래 한국이민도 다른 동양계 이민과 같이 하와이에서 정착이 시작되고 다음 단계로 주로 캘리포니아주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1965년 이후 이같은 집중현상은 크게 달라져서 한국 이민은 이제 미주 50개 주에 아니간 곳이 없으리만치 넓게 퍼져 생활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 이민의 지역 분포는 중국, 일본, 필리핀 등과는 특이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하와이와 미서부에 살고 있는 동양이민은 1970년대에 일본인 81%, 필리핀 74%, 중국인 57%, 그리고 한국인은 41%였으며, 동양계 이민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남부지역에도 한인들은 비교적 많이 분포되어 일본인 5%, 필리핀 9%, 중국인 8%, 한국인 19%였다. 이같이 한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는 현상은 7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한인들은 35%만이 캘리포니아와 뉴욕으로 몰릴 뿐 나머지 65%는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한국이민이 다른 동양계 이민보다는 최근에 속하기 때문으로, 60년대 이전만 해도 미국 사회는 동양인에 대한 법적, 제도적 인종차별 정책으로서 거주지역을 상당히 제약을 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양계의 옛 이민들은 이미 정착된 지역에 모여 살았지만, 한국 이민은 자유로운 선택을 누리는 시기에 왔기 때문에 전국에 분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는 경험이 많아서 일제 하에서는 만주, 일본, 시베리아 등지로, 6·25동란 때는 피난생활로 지역 이동의 단련이 되어 있었고, 국내에서도 산업화의 물결 속에 높은 이동율을 보였는데, 이것이 각지에 분산할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 이민은 교육수준과 직업능력이 높음으로 하여 이동에 덜 제한을 받았던 것이다.
(6) 교회가 많은 이민
미주에서의 한인 교회 역사는 이민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1903년 1월 13일 제 1차 이민선이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부터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태동한 것이다. 이민 교회는 이때로부터 고국을 떠난 동포들에게 신앙과 교육, 친교와 봉사를 통하여 이민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왔다. 김원용에 의하면 초기 이민 8,000명 중에서 약 400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30명에 달하는 전직 전도사 등 신앙 지도자가 있어 쉽사리 전도사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재미 한인 사회의 토대는 기독교적 정신 위에 세워졌으며 교회와 일반사회단체와의 연락도 긴밀하였다. 이같은 특이한 사실은 먼저 이민온 중국인이나 일본인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현상이다. 1965년 새 이민법이 통과된 후 한국 이민은 파도처럼 미주에 상륙해 왔으며 따라서 교회도 가는 곳마다 세워져서 오늘날에는 수천의 교회가 되어 한인은 "신앙 민족"이라는 찬사를 받게 되었다. 1980년 봄 남가주 지역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이민은 그 수의 69.9%가 교회와 관련이 있으며, 교인 중 67.8%가 젊고 교회참여도가 적극적이어서 83.5%가 최소한 일주에 한번 이상 교회에 출석하며, 교인 중 25.8%가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중국과 일본은 종교에 열정이 희박함이 나타난다. 그들의 종교인구가 적을 뿐만이 아니라 교회참여도도 극히 소극적이다.
3. 미국 이민교회의 역사17)
처음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102명 중에서 신체검사에 불합격을 받은 15명은 귀국을 했고, 실제로 86명(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이 상륙했다. 이들은 모클레아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게 되었으며, 이들 중에는 50여 명의 남녀 교인들이 포함되었는데 그 내력은 이러하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를 모집한 일에 한국 내에서 직접 관여한 사람은 1884년 장로교에서 파송한 의사 선교사로 와서 후에 서울 미국 공사관이었던 알렌(Horace N.Allen)이었다. 그는 1901년 말 휴가차 귀국했다가 다음해 2월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경작자협회의 이사 한 사람을 만나 하와이에서의 노동력 문제와 한국인 이민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한 후 이 일의 추진에 크게 협력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노동자 모집을 크게 도운 사람은 인천 내리감리교회 담임목사인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 조원시)였다. 그래서 그 교회 교인 중에서 50여 명이 자원하게 된 것이다. 1903년 이후 1905년까지 수차례 선편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노동자들은 가족을 포함하여 7,200명이 넘었다. 이들 중에 교인이 400여 명이었고 교인들 중에 교회 직분자가 30여 명이었다. 이들 노동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어 작업을 시작했을 때 이들이 받은 처우는 노예에 가까우리만큼 혹사를 당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1905년에서 1907년까지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농장을 탈출하여 미국 본토(주로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이들은 LA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정착하여 새로운 생활터전을 마련했다.
하와이에서는 1903년 11월 3일에 한인감리교 선교회가 맨처음 조직되었는데 이는 하와이가 북감리교 선교구역이었기 때문이었다. 1906년 초 방화중 전도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왔는데 때마침 한국 선교사로 나가 평양신학교 교장인 마포삼열 목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했다가 방화중 전도사를 만나서 LA에 한인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한인 장로교회 설립의 뜻을 함께 하고 당시 북장로교 로스앤젤레스 노회를 방문하여 그 계획을 논의했다. 그 노회는 한인을 위한 교회설립을 돕기로 약속했고, 프리처드(Augustus B. Pritchard) 목사로 하여금 교회를 설립하여 인도하도록 했다. 로스앤젤레스 노회에서는 이 교회가 당회가 없는 상태이기에 한국인 장로교 미션으로 허락하고 그 행정을 관장하였다. 방화중 전도사는 교회 장소를 물색하던 중 사가를 얻어 1906년 5월 10일 주일에 18명의 교인들이 모여 감격스런 예배를 드림으로 라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창립되었던 것이다.
하와이에 첫 이민으로 온 한인들은 청교도들 같이 무엇보다 먼저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여 한 때 하와이에는 30여 처에 교회가 세워졌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수가 줄기 시작하여 북미대륙에는 해방전까지 5-6개 교회에 불과했고 교세도 퍽 약했었다. 60년대말 제 2의 이민의 물결이 밀려오기 직전까지 전미국에 한인교회의 수는 20여개 내외밖에 안되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한인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수천의 교회를 헤아리게 되었다.18)
Ⅲ. 미국 이민교회의 역할
1. 혼합종족 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
17세기 이후 아메리카대륙은 구라파에서 흩어진 여러 나라 민족들이 이루어 놓은 서구 혼합종족 사회로서, 지난 300년 동안 세계의 나라들과 민족들이 자기 종족의 뿌리, 지기 조국에 대한 소속 의식, 지기 문화와 언어, 그리고 자기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면서 복합문화, 복합언어 속에서 자신의 생활양식을 고수하기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세계문화와 인종의 복합전시장과도 같은 곳이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서 한인 이민교회의 의미와 역할을 찾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19)
우리 민족은 본래 단일 문화, 단일 종족, 단일 언어에만 익숙해져서 타문화권에 쉽게 용해되어 버리거나 타문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폐단이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 수 있고 내 것을 양보하거나 버림이 없이 또 다른 언어와 문화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인교회의 목회자들의 역할은 복합문화 사회에서 선량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미국시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종족이 하나님의 자녀로써 복합 문화 사회 속에서 자기를 상실함이 없이 그 사회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종족적, 문화적 뿌리를 지켜나가도록 하는 데에 있다. 우리의 2세는 "미국에서 난 한국인"이 되는 것이지 "한국서 이민 온 사람이 나은 미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은 미국교회의 한 부분이 되거나 한 분파로 존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그러한 시도는 일시적으로는 도움과 편의와 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심리의 동질성 원리와 고유성(토착성) 원리, 그리고 종족 중심주의 때문에 자기와 동질의 공동체를 찾아 뭉치게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미국 안의 한인교회들은 선교학적, 문화인류학적 견지에서 기존의 미국종파에 예속 또는 가입하는 사태를 방지하여야 하며, 한편 서구 식민지 시대 이후의 미국교회에서 저들은 미국시민이면서도 미국 외에 자기 조국을 따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 조국의 교회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근본 족보를 존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인교회는 고국교회들과의 관계확립에 보다 폭넓고 차원 높은 결단을 내리고 고국의 모든 복음적 동일 신앙고백 교단들과의 유대를 강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성장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사양길에 들어선 서구교회의 선교를 계승할 선교의 새 세력으로서의 지도적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데 장중한 과업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하여 자신의 족보와 뿌리를 재확인하며 자신의 주체적인 근본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미래는 우리가 선교적 사명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20)
2. 이민교회의 여러 가지 역할
이민교회는 동포들의 구원의 방주이다. 영적인 말씀을 통해 동포들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고 크나큰 영적 위안과 삶의 활력을 얻는다. 이민교회는 동포사회의 구심점으로서 사교장, 직업소개소, 사회사업기관 등의 별명으로 불리워졌다. 또한 이민 교회는 이민 초기부터 지금까지 유일한 연장교육의 장소이며, 동포들이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거의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다. 즉 교회에서 자기 지위와 위신을 얻음으로 자기의 정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민교회는 조국문화를 차세대에 전수하는 문화전수의 장이기도 하다.21)
또한 이민교회는 이민생활의 안내자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이민자들이 많이 생기면서 한인교회의 목회자들은 말못하고 풍습도 모르고 남의 땅에 무작정 내리는 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도와야 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한국 이민 정착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22) 그리고 이민교회는 미주 한인 사회에서 가장 힘이 세고 큰 영향력을 끼치는 조직으로서 한국이민들의 공동체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교회는 이민들이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모이는 유일한 장소로서 이민들은 교회에 와서 이민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고, 친구를 사귀고, 미국을 배우고, 영혼의 목마름을 축이는 것이다.23) 그러나 지금의 이민교회는 초기 이민교회의 전철을 밟아, 초기 이민교회들이 참교회로서의 구실보다는 독립운동을 하는 정치단체로,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사회단체로서의 구실을 더 하였던 것 등을 따라가지는 않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24)
이제 동포사회와 이민교회는 모든 면에서 안정을 이루면서 동포교회 울타리 안의 돌봄 목회에서 눈을 밖으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최근에 세계 각 지역을 향한 선교가 활발해 짐에 따라 어느 이민교회라도 선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인적, 물적 자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옛 서구 문화제국주의적 물량주의 선교 양상을 닮은 점이 있으며, 개교회 중심의 선교라는 점이 다소 걱정스럽다. 그러나 이민 차세대의 선교열이 강하고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기점으로 마치 사도바울이 로마를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으려고 했던 것과 같이 앞으로 이민 교회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다.25)
Ⅳ. 미국 이민교회의 현실과 문제점
1. 목회자의 고충
(1) 신도들의 비판적 자세
대체적으로 이민교회의 신도들은 비판적 성향이 높다. 즉 한국교회의 신자들만큼 고분고분하지 않으며, 설교·교회행정·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말을 하고 심지어는 목회자를 고용인이 피고용인을 다루듯 취급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목회자들은 섭섭함과 원망에 빠지며 심한 스트레스에 휘말린다.26)
(2) 헌신된 교인의 부족
목회자가 보기에 충실하고 열심 있고 헌신적인 교인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시간을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이민 생활은 시간이 곧 돈이므로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 몇 명의 지원자가 허락되지 않으면 목회자로서는 소신있는 목회사역을 전개하기가 힘들게 된다.27) 더욱이 한국의 기성교회 통계나 미국 교회의 통계를 보면 교인들의 주축은 60% 이상이 유년 주일학교 출신이나 한인교회의 경우는 그 신자의 3분의 1이 현지에서 새로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이어서 평신도 훈련이 긴급히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28)
(3) 떠돌이 교인의 문제
교인들이 갑자기 교회의 적을 옮기는 것은 목회자의 심정에 가장 큰 상처가 되는 것일 것이다. 만약 목회자의 배후에서 작은 실수를 침소봉대하고 다른 교인들을 쑤석거려 분위기를 흐려 놓으면 목회자의 고통은 몇 배가 가중된다.29)
(4) 한국식 교회성장의 기대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을 수적인 증가의 패턴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민 인구가 많이 몰리는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교인수의 증가라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목회자에게 타 교회의 부흥사례 소식 같은 것이 압박감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외적으로 표방할 만한 사역의 열매가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30)
2. 신도들의 불만
(1) 목회자의 자질 문제
이민교회의 신자들은 목회자에 대하여 선뜻 처음부터 신뢰감을 두지 않는다. 이는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동기, 소정의 신학교육, 인격적 훈련 등이 없이 그저 상황에 쫓기다가 목회자가 된 사례를 목격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영주권 해결이나 재정상의 편의에 마음이 쏠려 함부로 약속하고 약속을 어기는 행위를 경험한 때문이다.31) 미국 사회에서의 한인교회 목회는 특수목회에 속하는 것으로 평면적인 목회에서 입체적인 목회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미국 사회에 대하여 익숙치 못할뿐더러 한국에서 교육적 배경이 일정치 않으며, 신학적 훈련이 철저히 되어 있지 않고, 상회관계가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의 자질 향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재미 한인교회는 목사들의 자질 향상과 신학적 재훈련 내지 교육기구 설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32)
(2) 생동감 있는 가르침의 부족
많은 비율의 신도들이 목회자의 설료에 불만이나 아쉬움을 표시하곤 한다. 이것은 이민교회 신자들의 학력 수준이 높고 지적 수용능력이 큰 이유와 함께 목회자 편에서 같은 설교의 반복, 설교를 통한 특정 교인에 대한 공격, 준비와 노력의 흔적이 없는 것 등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33)
(3) 권위주의적인 접근 방식
적잖은 이민 교회신자들은 목회자가 필요 이상으로 권위를 내세우는데 대하여 불평을 호소한다. 이들은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필요한 때에는 신도들의 의견도 존중하고 귀기울여 들어줄 만한 아량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의논의 상대가 되어주고 교인들을 이해하고 함께 고통하는 상담가적 목회자상을 동경한다.34)
3. 미국 이민교회의 깊은 문제점
(1) 문화적 고립 상태
오늘날 이민교회는 크게는 미국 사회로부터, 좁게는 소속한 지역사회로부터 문화적·언어적·인종적 고립을 겪고 있다. 비록 어떤 이민교회가 미국의 어떤 교파에 가입이 되어 있다고 해도 그 교파의 사업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조직상으로는 가입이 되어 있지만 심리상·문화상으로는 남남이요 외국인인 것이다. 이민교회는 문화적 장벽을 헐어 버릴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한인교회의 본질적 성격은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올바로 해결되지 않으면 이민 교회는 그 정체를 확립하지 못하고 위축되거나 지역사회와 무관한 게토식 종교집단으로 퇴행할 염려가 있다.35)
실제로 나타나듯이, 동포 이민자들을 돕는 사회사업은 활발해도, 대체로 미국사회의 문제는 거의 외면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또한 미국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들도 영어구사에 문제가 없는 분을 제외하고는 교단의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흑인사회의 문제를 미국 역사나 정치경제적인 틀과 관련하여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민교회나 목회자들이 지극히 적으며 오히려 백인 문화우월주의에 더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도시에서 한국인들은 한국어 TV와 방송, 신문을 보고 조국을 걱정하나, 실제로 미국에서 할 일들을 찾아나서는 교인과 교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인 것이다.36)
(2) 자녀세대와의 단절
무엇보다도 2세들과의 대화의 단절로 인한 틈이 깊다는 것이 문제이다. 1세는 한국의 뿌리가 중심이기 때문에 희생적인 헌신이 장점인 방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이 약하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2세들은 문제를 보는 눈부터 합리적인 사고로 보는 장점이 있지만 희생하거나 헌신하겠다는 정신이 부족하다. 더 나아가 언어적인 갈등, 문화적인 습관 갈등, 세계관적인 사고 갈등은 더욱더 문제를 복잡하게 한다. 재미 1세들의 경우도 미국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 다른 형태를 지니는데, 첫 번째 유형은 미국적인 것보다는 더 한국적인 전통주의형이고, 두 번째 유형은 아직 한국인이지만 더 미국화되고자 노력하는 융화주의형, 세 번째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고립주의형, 그리고 네 번째는 한국인이면서도 미국인인 다문화주의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러한 네 종류의 형태들이 2세들과 연결될 때에 결과는 더욱 복잡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이민교회이므로 그야말로 특수한 상황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37)
또한 이들을 제대로 지도할 수 있는 주일학교 교사들이나 기독교교육 전문가의 부족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실상 교사들도 부모들인데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나 대화가 안되면서 교회가 성공적인 신앙지도를 하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교회지도자들의 희망은 훨씬 적은 것으로서 아동들에게 영어로 설교라도 할 수 있는 적임자가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다. 2세의 신앙교육에 대한 적임자를 찾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주일학교의 설교와 성경공부가 학생들의 인격과 삶에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겉도는 것은 주일 학교의 위기요, 이민 교회의 장래를 어둡게 만드는 암적인 요소이다.38)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오랜 이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2세들의 한글교육에 대한 확실한 방향이 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한글교육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국어 교육의 가장 중요한 장소는 가정과 부모임을 기억하고 먼저 가정에서 철저히 한국어를 쓰며 교육하고, 교회에서 한국학교를 세워 운영하면 자녀들은 자연히 이중어를 배우게 될 것이다.39)
또한 오늘 이민교회는 미국생활과 언어에 별로 불편이 없고 1세와 2세 사이에서 교량역할을 할 수 있는 젊은 일꾼을 필요로 하며, 시기적으로도 이민교회에 그들이 가담할 연령이 되어오고 있는 시점에서 청년들이 미국화되고 기성그룹과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은 큰 문제가 되고 있다.40)
(3) 교회 분립의 시련과 직분의 남발
이민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분립에 분립을 거듭하였는데, 분립 현상은 그 휴유증이 대단하다. 우선 분립에 관계된 주동 인물들의 마음 속에 상처와 미움, 분노 등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서 그들의 신앙 건강에 부정적 영향력의 요소가 된다. 또 일반 교민사회의 스캔들로 등장하여 복음 전도의 길이 굳게 막혀 버린다.41)
일부 교회에서는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이 너무나 헐하게 취급되고 있으며, 신학교들도 운영에 쫓겨 학위증을 팔고 있다. 그리고 이제 교회까지도 직분을 팔아 교회를 운영하고 목사생활비를 충당하고자 하는 큰 문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42)
(4) 이단침투의 용이
이민자들은 옮겨 심은 나무이거나 아니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그러므로 교포선교의 현장처럼 거짓 선생들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이요, 본국과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민 선교현장은 더욱 이 문제가 심각하고 어렵다. 온갖 사이비와 이단 종파가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친다. 구원파, 엘리야 선교원, 김기동의 귀신파, 다미선교회,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도저히 질서를 잡을 수 없는 평신도들 중심의 크고 작은 선교회라는 이름의 모임, 아직은 완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준교회 운동들이 수없이 많다. 여기가 곧 교포선교 현장이다. 교포들의 정신적 방황과 사이비의 교묘한 침투는 톱니바퀴처럼 이가 맞물려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현실이므로 바른 신앙과 신학의 개혁주의 신앙운동 중심의 선교가 더욱 절실한 곳이 교포선교 현장이라고 할 것이다.43)
(5) 지나친 교회 수의 문제44)
일반적으로 말할 때 재미 한인교회는 한인교포의 수에 비하여 교회수가 많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교회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전도와 신앙에 열의가 있는 증거이며, 거기에 비례하여 열심히 전도함으로 복음사업이 철저히 진행되어 결과적으로 바람직하다는 낙관론도 설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수천의 교회는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아 일견 교회 활동이 활발해 보이기는 하지만 과잉 세분 분산되어 있는 상태여서 힘이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선교적 거점으로서의 교회가 각양 책임을 다하기에 불급한 면이 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이러한 형편은 각 교회의 집회건물 소유에서도 나타나 자체 건물을 가지지 못한 교회는 미국인교회를 빌어 오후에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 예배시간은 이상적이지 못하고 교육시설과 특별집회시의 제약 등으로 선교활동이 본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리고 교인들은 자기 교회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건물이나 시설에 애착심이 적고 청소나 가꾸는 일에 창의적이지 못하며 봉사정신도 잘 길러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자체 교회건물을 갖지 못하는 현상은 여러 가지 원인 중 특히 지나친 교회 수에서 오는 힘의 분산의 결과에 기인한다.
또한 지나친 교회 수로 인하여 오는 또 다른 약점은 역시 재정적인 능력의 부족으로 교역자 대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들이 미급한 예산을 세울 수밖에 없어서 교역자는 교회 일만을 전담할 수가 없음으로 파트타임으로 세속적인 일을 하면서 목회 일을 담당해야 하는 형편에 있다. 심한 경우에는 풀타임으로 세상에서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목회 일을 부업처럼 담당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렇게 목회자가 최저 봉급선의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목회자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으며 교회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고 아니 할 수 없다.
(6) 개교회 문제의 조정
한인교회는 종합적으로 볼 때 미국계통 교단이건 한국계통 교단이건간에 공통적으로 가입을 보류하는 이유는 그들 개교회 교인들의 교단 또는 교파 배경이 상이한 데 기인한다. 이와 같은 형편으로 미가입교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미 가입한 교회들도 그 상회관계에서 볼 때에는 특수적인 관계와 위치를 가지고 있어서, 독립교회 내지 준회원교회 또는 중립교회, 초교파적인 교회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개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한다든가 장로를 세우는 일이 있을 때, 더욱이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 이와 같은 처리들을 정상적인 상회관계를 통한 절차와 지도를 받음 없이 편법적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상회의 개입과 지시는 개교회에서 받고 싶으면 받고 받기 싫으면 거절하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로 인하여 상충이 생기면 상회를 탈퇴하는 현상이 일어남으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이를 조정할 만한 상회의 기능이 약하고 따라서 개교회 자체의 조정기능도 약하여 진통을 많이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법이 아닌 정상적인 상회관계가 이루어지도록 한인교회들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적응하여 나가는 것이 그 장래를 위하여 유익할 것이다.45)
(7) 목회윤리의 문제
재미 한인교회가 당면한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목회윤리의 정립이다. 미국에서는 가정적인 제도가 다르며 가치관의 변화로 가정마다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인들을 지도할 목사가 한 차원 높여서 목회윤리를 수립하지 않으면 직면하는 많은 문제들을 명랑하게 처리할 수 없으며 교인들로 하여금 실망을 주게하는 때가 많다. 지나친 교회 수에서 오는 심리적인 작용도 있겠으나 한인교회 목회자들은 덕을 세우는데 노력하지 않고 교인쟁탈전을 벌린다거나 과당 경쟁의식을 고취하여 교인들간에 화목을 저해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들은 스스로의 위치에서 자신을 깎아 내리게 되며 동료자들을 헐뜯게 됨으로써 교인들이 방황하게 되는 사례가 생기곤 한다. 한때 워싱톤, 시카고,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일어난 목사들의 비행으로 목회윤리 정립은 더욱 절실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46)
Ⅴ. 미국 이민교회의 나아갈 방향
1. 장기적 방안
(1) 이민교회와 한인교회 사이의 장래에 대한 연구
이민 교회가 장차 어떤 모습으로서 미국사회에 정착할 수 있을 지 연구하는 것으로, 이 연구에는 적어도 세 분야의 주제, 즉 한국민·민족주의·기독교신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 미국사회 내의 인종 문제 및 소수 민족의 문화적 반응 패턴에 대한 조사, 그리고 타 정착민과 교회에 대한 역사적 고찰 등이 필요한 것이다.47) 여기서 세 번째는 특히 한민족의 이민보다 훨씬 일찍 이루어진 주류민족이나 소수민족들의 미국 동화과정의 성공과 실패를 모형화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그들과 같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우리들의 미래 모습을 그나마 볼 수 있는 것이다.48)
이제 한인교회는 웅비의 큰 꿈을 가질 때가 되었다. 특히 21세기의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 백년지계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보아야겠다. 생각과 꿈이 있는 개인·교회·사회는 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한인 이민교회의 존재의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민 신학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분모를 찾아서 이민교회가 이 시대, 이 사회에 있어야 할 역사의식이 분명하도록 해야 하겠다. 그리고 미국에 한인교회가 많다고 해도 여전히 믿는 이들보다는 안 믿는 교포들이 더 많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전교포 복음화 운동에 힘써야 할 것이다.49)
(2) 2세 사역자의 발굴과 양성
1.5세나 2세 목회는 오늘 너무나도 중차대한 것이다. 교회가 청소년 목회에 무관심하고 실패하면 한인이민교회의 장래는 암담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50) 또한 부지런히 사역자들을 키워내지 않으면 개개 이민 교회는 물론 이민교회 전체가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51) 그리고 영어사용세대 즉 2세 및 1.5세를 위한 예배와 전도, 교육 프로그램들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52)
사역자의 양성을 위하여는 발굴·교육·활용의 세 단계가 포함되는데, 우선 사역자의 은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2세들을 눈여겨보는 가운데 혹시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있는지 상담과 평가, 대화를 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학생의 헌신과 부모의 동의로 일단 발굴된 2세들은 미국 각지의 여러 학교에 추천하고, 교회는 지망한 2세를 위해 재정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며, 과정을 마치고 나면 각 이민 교회는 주저 없이 이들을 환영해야 한다. 누구든지 실수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는 만큼 격려와 위로, 충고와 편달을 동시에 공급해야 한다.53)
1950년대까지 이민교회의 이슈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발전에 관한 사회적, 민족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1965년부터 이민교회에 있어서는 개인구원이 주된 관심이었다. 이제 두 가지 이슈를 모으고 키워 균형시키는 작업을 젊은이들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청년을 역사·문화·교육 그리고 신앙적 차원에서 교량으로 연결시켜주는 것이 시급하다.54) 그리고 1세들의 헌신적인 삶과 2세들의 합리적 사고를 묶는 작업을 해야하는데, 이를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는 미래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이냐에 호소하는 것이다. 특수한 상황 속에 있지만 선교지향적 지구촌 삶의 가치체계를 수립해야 한다.55)
실제로 차세대를 위한 목회자 및 지도자 양성문제를 미리 대비한 교회나 교단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미연합감리교회 등에서 전환세대 목회를 위하여 이중 문화에 익숙한 젊은 목회자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미래를 전망하는 교파에서는 영어문화권 젊은이들을 이민교회의 우산 아래에 두지 않고 아예 따로 독립시켜 저들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여 운영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영어세대를 위한 독립 한인 차세대 동포교회가 설립되었고, 계속하여 설립되고 있는데, 이러한 교회는 이름 그대로 다인종 교회로 발돋움하고 있다.56)
(3) 이민교회의 연합적인 구도 논의와 확립
개교회 지향적인 이민교회의 역사를 청산하고 연합적인 조직과 연합적인 사업을 계획하고 작게는 미주 내의 교회, 해외에 흩어진 한민족교회, 더 나아가서는 한국교회와 연계하여 세계교회와의 연대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이처럼 지구촌 시대를 대비하는 것이 이민교회가 살아남는 길인 것이다.57)
또한 이민 교회는 미국인교회 및 미국 사회와 보조를 맞추어 더 나은 사회건설에 이바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즉 미국사회가 진통을 겪고 있는 인종차별주의나 경제적 수준으로 계층을 나누는 자본주의의 계급주의, 그리고 환각제·마약·알콜·폭력·성도덕의 문란 등의 문제에 한인교회가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함께 해결해 가는 프로그램을 가져야 할 것이다.58)
(4) 새로운 가치관과 한국인의 상에 대한 정립59)
미국 속의 한국인이란 미국의 가치관만을 따를 수도 없고 전통적인 한국의 가치관만을 따라서 살 수도 없다. 실제로 미국서 교육을 받은 2세와 1.5세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배운 미국의 가치관과 부모로부터 요구되는 한국적 가치관 사이에서 혼란과 문제를 날마다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교회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의 바람직한 가치관을 지도해 주어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으므로, 미국 속의 한인교회는 한국과 미국의 두 가치관을 성서의 빛에 비추어 조화시켜서 미국 속의 한국인들을 위한 제 3의 가치관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민교회가 현재의 시점에서 영도할 문제는 미국인의 눈에 비치는 한국인의 상을 바람직하게 구축하는 작업이다. 부지런하다는 점,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 좋다는 점, 사업을 잘 한다는 점 등은 지금까지 미국사회에 준 긍정적인 한국인 상이었으나, 한국인은 돈만 안다는 것, 지역사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종을 차별 멸시하는 점에서 백인 못지 않다는 점 등은 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약점들이다. 백년 뒤의 한국이민사회를 생각하면 지금부터 미국사회와 잘 어울려서 살아가는 전통을 만드는 것이 교포사회의 가장 조직력을 가진 교회들이 맡은 책임일 것이다.
2. 단기적 방안
(1) 목회자들의 계속 교육프로그램
교육이란 평생의 과정인 만큼, 특히 이민 교회 목회자를 위한 계속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신학적·학구적 내용을 바탕으로 깔되 목회적·실제적인 적용성과 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60) 특히 이민교회에서 전해지는 설교, 강연, 교육 등 메시지는 국내와는 상황과 문제가 다르고 특수한 시설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 깊이 연구되고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이민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메시지는 물론이고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이해와 협력을 촉구하는 내용, 미국의 사회문제들을 분석 해석하고 바른 방향을 가르치는 메시지 등이 기본적 구원의 메시지와 함께 전해져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설교자에 대한 계속교육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자료들을 빨리 소화하고 활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미국의 역사와 사회 및 인간상을 분석하는 공부도 필수적인 준비가 된다.61) 그리고 이질 문화권에서 큰 정신적 갈등을 받으며, 쉽게 상처를 잘 받는 성도들을 위하여 목회자는 인내와 전적으로 치유적인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위하여 준비하여야 한다.62)
(2) 평신도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
지적 발전이 영적 성숙의 전부는 아니지만, 하여튼 뭔가 배우는 것이 있어야 평신도들도 자라나게 마련이다.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의거한 교육, 교회도서관의 설치와 활용은 거의 필수적인 사항이다.63) 그러므로 교회는 제자화 훈련에 더욱 더 신경을 쓰고 시간과 정성을 다하여야 하겠다. 교회에 왔다 갔다만 하는 교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착실한 기독교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겠다.64)
(3) 가정 목회원의 설립65)
목회와 가족과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교회는 위기에 처한 가정을 회복하고 상한 인간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유능한 목회자를 개발해야 하며 그 목회자는 그의 교회적 지위나 조직을 발휘하여 가정 목회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성취해 나가야 할 것이다. 가정 목회원에서 추진해 갈 중요한 프로그램에는 결혼을 위한 프로그램, 부부를 위한 프로그램, 노인교육 프로그램, 목회자에 대한 제반 가정교육 프로그램 등이 있을 수 있겠다. 첫째 결혼을 앞둔 젊은 남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내일의 건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절실히 필요하다. 취급할 내용들은 크리스천 부부의 의미, 배우자 선택, 교제의 과정, 결혼식 준비, 신혼부부의 책임, 성교육 등이 내포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부부를 위한 프로그램은 교회에서 소홀히 취급되기 쉬운 부분으로 남녀가 따로 모이는 클럽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가정 목회는 문제가 생긴 가정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반 가정들을 선도하고 화평으로 굳게 맺어 주는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 이같은 모임은 건전한 오락 프로와 교육프로 등을 통해, 문제를 내포한 가정에도 영향력을 미쳐 점차 그들의 간격을 해소시켜 줄 가능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부부간의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조속히 발견하고 카운슬링을 통해 부부간 대화를 시도해 인격의 교류와 의사 소통을 촉진시키고 부부간에 취미와 생활방식에 공동참여를 유발하며 가족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도록 이끌어 가게 함으로 가정의 위기를 완화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노인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핵가족 형성으로 생긴 노인들의 문제, 특히 한국 이민 노인들의 문제는 교회가 대처할 당면 과제가 되어 있다. 노인교육의 주된 과제들은 노후 건강 관리 문제, 은퇴와 수입 감퇴, 배우자 사별 문제, 동년배들과의 교우 관계, 시민으로서의 역할, 일상 생활 정리, 죽음에 대처할 신앙 등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를 사역하는 목사들을 훈련하여 제반 가정 문제에 관한 교육을 이수시켜 이민의 사회 경제적 상황과 문화 심리적인 여건을 이해케 함으로 이민 가정이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올바로 파악하여 이들을 적절히 해결하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매 교회마다 가정 문제 전문 교역자를 모실 수는 없을 것이니 초교파적 연합으로 상담자를 준비하고 지역 커뮤니티의 경제 원조를 받아 이 일을 운영할 수 있다면 매우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개교회 실정에 맞는 외향적 목표의 설정
교회의 프로그램은 보통 활동의 방향과 관련하여 내향적인 것(예배, 교육, 친교 등)과 외향적인 것(선교, 전도, 구제, 사회봉사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민 교회는 문화적 고립으로 인해 외향적인 프로그램을 의미 있게 갖기가 힘들다. 그러나 교회는 으레 "세상 속에 흩어지는 공동체"로서의 역할 때문에 외향적 목표의 설정과 수행이 필요하다. 어떤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인가는 개교회에 따라 다르나, 반드시 그 교회의 실정과 관계되며 교인들의 단합을 동기유발시킬 만한 구체적인 사역 목표가 있어야 한다.66) 이민교회는 선교와 봉사에 새로운 조명을 가지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프로그램들을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민교회는 우리 교포가 미국 사회주류에 합류하는 의식적인 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방면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의식화운동이 있어야 한다.67)
(5) 공동체 의식의 함양
교회의 정신 중에 근본 골격은 그리스도인의 지체의식이다. 더욱이 이민교회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상처와 분립의 아픔을 겪어온 만큼 더한 사랑과 위로, 격려가 필요하다. 특히 제직회, 당회, 운영위원회 등의 회합 역시 단순한 의사 결정의 기구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인격훈련의 계기로, 형제 사랑의 실습을 위한 친교적 수단으로 간주되어야 한다.68)
3. 미국 이민교회 특유의 가능성
(1) 세계선교로의 교량 역할
한국에 있는 교회가 세계선교와 관련하여 가지는 난점들이 이민교회에 의하여 용이하게 풀릴 수 있다. 미국 시민권의 보유, 자유로운 여행, 경제적 능력이 그것이다. 특히 만약 2세들의 훈련이 제대로만 된다면 그들이 세계선교에 기여할 바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가 없는 것으로, 언어의 문제, 문화적 역동성의 경험 등이 강점으로 뽑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에 있기 때문에 지구촌 전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조망하고 이에 따라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69)
실제로 미국 이민 교회는 많은 문제점들 속에서도 그나마 충실하게 "다리선교(Bridge Mission)" 전략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본다. 뿌리는 한민족이며 나무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가지고 5대양 6대주를 향해 선교지향적으로 교회의 사명을 세우고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것이다.70)
(2) 특수대상에 대한 선교
미국의 대학원에 유학을 와 있는 학생들, 그리고 역시 유학하고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계의 학생들에게 이민 교회는 특이한 선교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특히 공산권이나 모슬렘 문화에서 자라난 학생들의 경우 그 전략적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71)
(3) 한국교회에 대한 지원
한국교회에 대한 지원은 재정보조, 자료공급, 인재양성이 가능하다. 달러의 화폐가치는 대단한 것으로 이민 교회의 헌금과 지원은 큰 의미를 갖으며, 또한 미국은 자료가 말할 수 없이 풍성한 나라요, 장학금의 설립과 공급을 통해 장래의 신학자나 평신도 지도자를 위한 양성에 충분한 재정을 투자함으로 지원할 수가 있는 것이다.72)
(4) 미국 교파 내에서의 기여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만큼 그들도 우리가 필요하다. 단일 민족으로서의 일체감도 중요하되 미국에 사는 만큼 다른 인종과의 교제 역시 중요한 것이다. 아마도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의 파트너쉽을 형성하는 첫 단계를 먼저 이민교회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73)
Ⅵ. 결론
한국인의 미국 이주에 대한 일반적인 개략과 재미 한인교회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며, 혼합종족사회에서의 이민교회의 역할과 이민교회의 현실, 문제점 등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특히 이민교회의 문제점으로는 첫째 목회자의 고충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신도들의 비판적 자세, 헌신된 교인의 부족, 떠돌이 교인의 문제, 한국식 교회성장의 기대 등이 있고, 둘째 신도들의 불만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목회자의 자질 문제, 생동감 있는 가르침의 부족, 권위주의적인 접근 방식 등, 그리고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으로 문화적 고립 상태, 자녀세대와의 단절, 교회 분립의 시련과 직분의 남발, 이단침투의 용이, 지나친 교회 수의 문제, 개교회 문제, 목회윤리 등에 있어서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21세기를 맞이한 재미 한인교회는 큰 꿈을 품고 근본적으로 교회가 가진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죽도록 충성하며,74) 장기적으로는 이민교회와 한인교회 사이의 장래에 대한 연구, 2세 사역자의 발굴과 양성, 이민교회의 연합적 구도의 논의와 확립, 단기적으로는 목회자들의 계속 교육프로그램, 평신도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 가정 목회원의 설립, 개교회 실정에 맞는 외향적 목표의 설정, 공동체 의식의 함양 등의 방안들을 이루어야 하겠다.
미국 이민교회는 여러 특유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것은 세계선교로의 교량의 역할, 특수대상에 대한 선교, 한국교회에 대한 지원과 미국 교파 내에서의 기여 등에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잠재력을 가진 재미 한인교회는 큰 사명이 있음을 자각하고 100년 대계를 가지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자기 자체 교회의 일에만 집착하지 말고 시야를 더욱 넓혀야 할 것이다. 또한 과거의 역사를 교훈 삼아 재미 한인교회는 내적인 문제들을 조기 진단하며, 겸허한 자세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며, 발전하여 한인사회에 끌려가는 교회가 되지 말고 한인사회를 영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인 면에서도 인도하여 나아가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미 한인교회는 멀리 두고 온 고국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영향력을 미치며 공헌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 안에서 미국 교회와 대등한 위치에서 미국교회와 미국의 국가사회, 나아가서 전 세계에까지 선교의 사명을 다하며 기여하는 교회로의 포부와 비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신앙의 무장이 필요하며 상호협력 단합하는 기풍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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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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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택용, 재미한인교회 75년사(서울: 생명의 말씀사, 1979), p. 3.
2) 박대희, "이민교회를 위한 제언," 빛과 소금, 제57호(서울: 두란노서원, 1989), p. 242.
3) 최효섭, "이민교포사회와 교회," 새가정, 제366호(서울: 새가정사, 1987), p. 86.
4) 박대희, op. cit., p. 242.
5) 장윤성, 미국 이민 사회의 교회와 가정(서울: 양서각, 1986), pp. 31-32.
6) ibid., p. 32.
7) ibid., p. 32.
8) 강신권, "지구촌 시대의 이민교회, 그 역할은 무엇인가," 월간목회, 제252호(서울: 월간목회사, 1997), p. 40.
9) 장윤성, op. cit., p. 32.
10) 김택용, op. cit., pp. 21-22.
11) ibid., p. 23.
12) 장윤성, op. cit., p. 33.
13) 김택용, op. cit., pp. 23-24.
14) 장윤성, op. cit., pp. 33-35.
15) 김택용, op. cit., p. 69.
16) 장윤성, op. cit., pp. 37-50.
17) NKPC 한인교회사 편찬위원회(편), 미국장로교 한인교회사(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pp. 37-38.
18) 박대희, op. cit., p. 242.
19) 조동진, "선교와 이민교회의 역할," 월간목회, 제96호(서울: 월간목회사, 1984), pp. 140-142.
20) ibid., pp. 142-145.
21) 최종수, "미주로 떠난 사람들과 이민교회," 기독교사상, 제460호(서울: 한국기독교서회, 1997), pp. 30-31.
22) 김희선, "미주 한인교회는 이민생활 안내역을 톡톡히 하였다," 월간목회, 제210호(서울: 월간목회사, 1994), p. 344.
23) 유의영, "이민교회의 미래," 기독교사상, 제382호(서울: 한국기독교서회, 1990), p. 177.
24) ibid., p. 187.
25) 최종수, op. cit., p. 32.
26) 송인규, "이민교회 이야기," 빛과 소금, 제59호(서울: 두란노서원, 1990), p. 225.
27) ibid., p. 225.
28) 김택용, op. cit., pp. 117-118.
29) 송인규, op. cit., p. 225.
30) ibid., p. 225.
31) ibid., p. 225.
32) 김택용, op. cit., p. 117.
33) 송인규, op. cit., pp. 225-226.
34) ibid., p. 226.
35) ibid., p. 226.
36) 최종수, op. cit., pp. 35-36.
37) 강신권, op. cit., p. 42.
38) 송인규, op. cit., p. 227.
39) 김상복, "이민교회와 이중언어," 빛과 소금, 제53호(서울: 두란노서원, 1989), p. 236.
40) 이태종, "이민교회와 청년," 빛과 소금, 제55호(서울: 두란노서원, 1989), pp. 216-217.
41) 송인규, op. cit., p. 227.
42) 한종희, "미국 이민교회 목회의 특수성," 월간목회, 제124호(서울: 월간목회사, 1986), p. 108.
43) 김용출, "교포선교의 회고와 전망," 고신, 제132호(고려신학대학교, 1992), pp.53-54.
44) 송인규, op. cit., pp. 113-115.
45) ibid., pp. 115-117.
46) 김택용, op. cit., p. 119.
47) 송인규, op. cit., p. 228.
48) 강신권, op. cit., p. 43.
49) 박대희, op. cit., pp. 242-243.
50) ibid., p. 243.
51) 송인규, op. cit., p. 228.
52) 최효섭, op. cit., p. 88.
53) 송인규, op. cit., p. 228.
54) 이태종, op. cit., p. 217.
55) 강신권, op. cit., p. 43.
56) 최종수, op. cit., pp. 36-37.
57) 강신권, op. cit., p. 43.
58) 최효섭, op. cit., pp. 87-88.
59) ibid., pp. 88-89.
60) 송인규, op. cit., p. 228.
61) 최효섭, op. cit., p. 89.
62) 김용출, op. cit., p. 52-53.
63) 송인규, op. cit., p. 228.
64) 박대희, op. cit., p. 244.
65) 장윤성, op. cit., pp. 146-147.
66) 송인규, op. cit., p. 228.
67) 박대희, op. cit., p. 245.
68) 송인규, op. cit., pp. 258-259.
69) ibid., p. 229.
70) 강신권, op. cit., p. 41.
71) 송인규, op. cit., p. 229.
72) ibid., p. 229.
73) ibid., p. 129.
74) 박대희, op. cit., p. 245.
75) 김택용, op. cit., pp. 122-123.